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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원수는 한남대교 위에서 만난다



감미로운 피아노 선율이 흐르는 신사동 라운지바.
잿빛 슈트를 입은 남자는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여자를 바라보고 있다. 윤기 흐르는 까만 생머리에 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가 도도한 시선으로 마주 보자 남자는 마치 드라마에 나오는 남주인공처럼 검지를 이마에 대고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잠깐 기다려 봐요.”
뒤를 힐끗 쳐다본 남자는 보라색 얇은 실크타이를 매만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여자의 시선이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확인하며 홀 가운데 비치된 그랜드 피아노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피아노 연주자는 남자가 다가오자 일어서서 자리를 비켜 줬다.
여기저기에서 오― 하는 소리가 들리며 사람들의 시선이 남자에게 집중됐다.
모던한 화이트칼라 가죽 의자에 앉은 남자가 고개를 돌려 여자가 앉아 있는 곳을 바라봤다. 도도한 고양이처럼 커다랗고 끝이 살짝 올라간 그녀의 두 눈이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그 눈빛에 화답하듯 싱긋 웃더니 이윽고 눈을 감고 섬세한 손가락으로 연주를 시작했다. 꽤나 수준급인 솜씨로 Steve Barakatt의 Rainbow Bridge를 연주하고 있는 남자에게 여자들은 감탄 어린 시선을 보냈다. 익숙한 듯 그 시선을 눈을 감고도 느끼는 남자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남자의 감미로운 연주가 끝나자 여기저기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남자는 고개를 들고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느긋하게 여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남자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그의 시선이 닿아 있는 자리에 여자는 없었다.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서둘러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서서 자리로 돌아온 남자의 눈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테이블 위의 칵테일 잔은 엎어져 있었고 여자가 앉아 있던 의자는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그때 남자의 귀에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들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세상에, 완전 기겁하고 도망가던데 봤어?”
“봤어. 뒤도 안 보고 냅따 달리던데……. 저 남자 창피해서 어쩌냐?”
남자의 당황스러운 얼굴이 그 여자들을 향했을 때, 뒤에서 홀 지배인의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정민 님∼ 여기 맡겨 두신 꽃다발과 케이크입니다∼ 프러포즈하실 분은 누구신가요?”

“저런 미친!!”
혜린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신경질적으로 은색 포르쉐 카레라 GT 5.7의 문을 열었다.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거칠게 차 위에 올라타 시동을 걸자 미끈한 은색 포르쉐가 굉음을 내며 주차장을 질주하듯 벗어났다.
“저 자식 저럴 줄 알았어, 저거!! 눈빛부터 더럽게 능글맞더라니 감히 누구 앞에서 미친 짓거리를 해대?”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불길했다.
저 남자는 맞선 보고 이번이 딱 두 번째 만나는 거였다. 그런데도 마치 자기 여자라도 되는 양 거들먹거리는 꼴부터 재수 없었는데 거기다 오글거리는 드라마병까지?
“저런 자식은 사회적 격리 조치를 해 버려야 돼! 나라 차원에서 군부대를 투입시켜 엄중한 관리를 해야 한다고. 아 진짜 기분 더러워서……!”
혜린은 분이 안 풀리는 듯 붉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거침없이 욕설을 내뱉었다. 아까 먹은 파스타가 한 올 한 올 식도로 거꾸로 솟구쳐 오르려는 역겨운 기분을 참아 내며 속도를 올렸다.
쿠웅!
갑작스런 충격에 혜린이 서둘러 브레이크를 밟았다. 돌아보니 뒤차가 자신의 애마 범퍼에다 용감하게도 박치기를 시전한 상태였다.
“기분도 안 좋은데 어떤 자식이……! 오냐, 너 잘 만났다!”
혜린은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거칠게 차에서 내렸다. 내리자마자 육두문자를 휘갈겨 줄 생각으로 손가락 하나를 가열차게 들어 올리는 순간, 혜린의 동공이 흔들렸다.
저 미끈한 라페라리는……?
당장이라도 히히힝거리며 초원을 내달릴 듯한 금색 야생마가 앞발을 호기롭게 쳐올린 자태의 페라리 마크가 눈에 떡 들어왔다. 보닛 위에 번쩍거리며 위엄 돋게 자리 잡은 그 마크를 보자 불길한 예감이 7번 척추를 오싹하게 훑고 내려갔다.
설마……?
저 차는 현재 국내에 한 대 있을까 말까다. 그 차를 탈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을 가진 놈이라면…….
혜린이 머릿속에 떠오른 얼굴 하나를 애써 부정하고 있을 때 위잉― 하고 라페라리의 버터플라이형 앞문이 위로 들렸다. 세련된 블랙 슈트의 남자가 느릿한 몸짓으로 걸어 나왔다. 단단하고 날렵한 몸매에 위압적이리만큼 큰 키의 남자는 예의 그 길쭉한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마치 한남대교 위를 런웨이로 꾸며 놓은 패션쇼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모델이 천천히 워킹해 오는 듯한 느낌을 주는 남자를 보며 혜린은 인상을 팍 구겼다.
‘빌어먹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입꼬리를 기분 나쁘게 추켜올리고 천천히 다가오는, 윤기 좔좔 흐르는 매혹적인 까만 털의 재규어 같은 남자는 그놈이 틀림없었다.
“이런, 내 차가 박은 모양이군.”
가까이 다가온 남자는 씨익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톤이 낮고 울림이 좋은 매력적인 목소리였지만 혜린에게는 어마무지하게 위험하게 들렸다.
“아닌데요. 전혀.”
혜린은 상큼하게 웃어 보이며 빙글 뒤돌아 자기 차 쪽으로 잽싸게 걸어갔다. 그리고 얼른 차 안으로 들어가 문을 세차게 닫았다.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위험신호가 머릿속에서 계속 울리고 있었다.
그런데 차를 출발시키기도 전에 보조석에 그 남자가 성큼 올라탔다.
“이봐요! 이게 무슨 짓이에요?”
혜린이 눈을 치켜뜨며 날카롭게 말했다.
“못 들었습니까? 내 차가 당신 차를 박았다는 말.”
남자는 태연하게 문을 닫으며 혜린을 쳐다봤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에 선이 굵은 눈썹, 우뚝 솟은 콧날과 어딘가 금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입술. 그리고 매혹적일 정도로 차가운 눈빛……. 모든 게 예전의 얼굴보다 성숙되어 있었지만 영락없는 그놈이었다.
“글쎄 아니라니까요?”
“아니라니. 지금 내 차 망가진 거 안 보입니까?”
혜린이 어이없는 눈으로 뒤돌아보더니 헛웃음 쳤다.
“댁 차 멀쩡하거든요?”
“무슨 소리야? 폐차 지경인데.”
남자는 대뜸 말을 놓고는 혜린을 바라봤다. 날이 선 듯 날렵한 턱 선이 냉소적인 카리스마를 풍기고 있었다.
“얻다 대고 반말이세요?”
혜린은 지지 않고 눈을 부라렸다.
그녀 역시 호락호락한 여자가 아니었다. 생물학상 여성으로 분류되는 사람이라면 백이면 백, 그의 시선 한 방에 나가떨어질 정도로 그는 강력한 페로몬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혜린은 끄떡없었다.
남자는 오만한 입술 끝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혜린 쪽으로 몸을 바싹 기울였다.
“진혜린, 재미없게 굴지 마. 오랜만에 만났잖아?”
그의 입술에서 그녀의 이름이 낮게 흘러나오자 혜린의 눈이 흔들렸다.
젠장, 강재하!
뒤에서 빵빵거리는 클랙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차 안의 운전자들이 그들을 스쳐 지나가며 극렬한 욕설을 퍼부었다.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네? 너 나 알아요?”
재하의 한쪽 눈썹이 반듯한 이마에 매력적인 주름을 잡으며 휘어 올라갔다.
“물론 아주 잘 알지.”
“어므나, 내 스토커셨어요? 스토커 신고 번호가 몇 번이더라? 십팔십팔이었던가?”
“장난하지 말고 출발해.”
“당신이나 장난하지 말고 내려, 당장.”
“출발해.”
둘의 얼굴에는 미소가 자리 잡혀 있었지만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살벌했다. 재하는 절대 물러설 생각이 없는지 혜린 앞에 얼굴을 바짝 대고 빙글거렸다.
“뭐, 그렇게 나오신다면 좋아.”
으드득 어금니를 꽉 깨문 혜린이 묘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차 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대뜸 차 밖으로 나와 도로를 가로지르자 순식간에 끽― 하고 브레이크를 밟아 대는 차들의 소음으로 가득 찼다.
혜린은 도로를 가로질러 가드레일을 사뿐히 넘어섰다.
그녀의 얼굴엔 승리감이 떠올라 있었다. 인도로 내려선 혜린은 입꼬리를 추켜올리고 한남대교 위를 걸어가며 휴대폰을 꺼냈다.
“나야. 김 비서. 여기 한남대교 윈데, 내가 지금 좌표 날릴 테니까 당장 와.”
―네? 한남대교요? 차 고장 났으면 보험 부르시면 될 텐데.
김 비서의 말에 혜린이 미간을 찌푸렸다.
“시끄럽고 빨리 오기나 하…….”
부아아아앙.
전화기에 대고 목소리를 높이던 혜린이 느닷없는 굉음에 눈이 커다래졌다.
동시에 그녀의 날렵한 은색 포르쉐가 굉음을 내며 눈앞을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러곤 순식간에 도로를 질주해서 사라져 버렸다. 저 강재하가 세계에 단 몇 대밖에 없다는 라페라리를 버리고 자신의 차를 몰고 가 버린 것이다.
“저, 저 자식이……!”
어이없는 표정의 혜린이 자신의 애마가 사라진 방향을 황망하게 쳐다봤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사님??
휴대폰 너머로 김 비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1. 똥은 더러워서 피하지만 강재하는 무서워서 피한다



징글벨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거실.
창밖에는 몽실몽실한 눈송이들이 예쁘게 흩날리고 있었고 집 안 공기는 훈훈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엄마와 넓은 거실 안에 놓인 대형 트리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고 있었다.
“오늘 산타 할아버지 오신댔지?”
크리스마스트리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 모양 장식을 달며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가 다정한 표정으로 내려다 봤다.
“그러엄. 갖고 싶은 거 책상 위에다 적어 놨지?”
“응응. 적어 놨어.”
“산타 할아버지가 잘 보시게 크게 적어 놨지?”
“응응. 크게 적어놨어.”
생각하면 할수록 기대감에 부풀어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이번엔 꼭 산타 할아버지 볼 거니까, 나 안 자고 깨 있을 거야.”
“그러렴.”
비장하게 말했지만 매년 그렇게 말해 놓고 12시를 넘기지 못하고 잠든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 엄마는 쿡쿡 웃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뒤에서 소리도 없이 그놈이 나타났다.
그러고 보니 그놈은 그즈음에는 매년 자신의 부모 손에 이끌려 와서 우리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곤 했었다. 소파 위에 말없이 앉아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책을 보고 있던 그놈이 슥 다가왔다. 그러고는 아주 소중한 비밀이라는 듯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애냐? 산타가 어딨어. 산타는 너네 아빠야, 멍청아.”

“……헉!”
혜린이 번쩍 눈을 떴다.
자다가 하이킥을 한 건지 이불이 걷어차인 듯 바닥에 떨어져 널브러져 있었다. 혜린은 짜증이 치솟은 얼굴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아……. 나쁜 자식.”
갑자기 나타난 강재하 때문인가.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어릴 적 일이 꿈에 나타나다니.
혜린은 인상을 찌뿌둥하게 구기고 머리를 산발한 채로 앉아 있었다. 워낙 저혈압이기도 했지만 오늘처럼 잠까지 대놓고 설친 날의 아침 기분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왜 너는 나를 만나서∼ 왜 나를 아프게만 해∼ 내 모든 걸 주우는데에∼ 왜 날 울리니∼
이로써 다섯 번째 전화다. 그녀의 벨소리는 몇 년째 한결같았다. 예전에 한창 유행했던 드라마 주제곡이었는데 혜린은 그 드라마에 아직도 푹 빠져 있었다. 그래서 주제가도 특별히 아꼈다. 들을 때마다 뭔가 복수를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을 용솟음치게 만드는 전투적인 노래랄까?
―나쁜 여자라고 하지∼ 마아∼ 용서∼ 못 해에에에에∼
클라이맥스 부분까지 다 듣고 나서야 혜린은 전화를 받았다.
“왜.”
혜린이 불퉁한 목소리로 짧게 대꾸했다.
―일어나셨습니까?
“일어났어.”
―정말 일어나셨습니까?
“일어났다니까?”
―아직 침대 위에 계시죠?
“아니.”
태연히 거짓말을 한 혜린은 침대 위에서 발을 뻗어 테이블 위의 리모컨을 발가락으로 집어 끌어오다가 툭 떨어뜨렸다.
―리모컨 떨어뜨리셨군요. 발가락은 손가락이 아니라고 제가 누누이…….
“닥쳐.”
―닥칠 테니 어서 씻으세요. 출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알았어.”
혜린은 전화를 끊고 잔뜩 찌푸린 얼굴로 발가락으로 리모컨을 눌러 벽면 TV를 켰다.
―저녑 씨랑 붕가하겠습니다!
―뭐라고? 이……이익……!!
TV에서는 몇 년 전에 했던 막장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다.
“그놈의 붕가는…….”
미간을 찌푸리고 화면을 노려보던 혜린이 코웃음을 쳤다. 막장 드라마를 봤더니 잠이 슬슬 깨는 것 같았다. 잠이 깨면서 새벽 내내 머릿속을 괴롭힌 어제 일이 다시 떠올랐다.
그 자식! 감히 내 애마를 가지고 튀어?
떠오르자마자 다시 성질이 확 뻗쳤다. 가뜩이나 잠결에 연달아 들은 벨소리 때문에 전투욕이 활활 타오르는데 어제 일이 분노에 기름을 끼얹고 있었다.
강재하.
그 남자의 이름을 다시 머릿속에 떠올리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이제 절대로 그놈과 엮이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게 벌써 십 년 전의 일이다. 그때 이후로 두 번 다시 그놈과 엮일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혜린은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다시 TV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후웅.
문자음이 울렸다.
[이사님. 막장 드라마 그만 보시고 욕실로 가시죠.]
문자를 확인한 혜린이 흠칫했다.
“뭐야, 이놈? 여기 CCTV라도 달아놨나?”
혜린은 투덜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 침실에 붙어 있는 욕실로 향했다. 훌렁훌렁 옷을 벗고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계속 강재하를 떠올리고 있었다.
만약 혜린에게 인생에서 뿌리째 뽑아 버리고 싶은 놈을 고르라 한다면, 그녀는 0.0001초의 지체도 없이 강재하, 그놈을 지목할 것이다. 그가 해외유학과 경영실무를 익히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가 본격적인 경영 승계를 위해 국내에 들어온다는 소리를 풍문으로 듣기는 했다. 기사들도 워낙 쏟아져 나오기도 했으니까.
그 사실을 접한 이후부터 혜린은 만에 하나 그놈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꼭 필요한 일을 제외하고는 사교적인 자리는 거의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피해 다녔는데 그놈을, 한남대교 한복판에서 만나? 젠장! 원수는 한남대교 위에서 만난다더니……!!”
혜린이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분을 못 참고 버럭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짜증이 가시질 않았다. 게다가 그놈은 그녀의 소중한 애마를 자기 멋대로 가지고 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