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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나쁜 여자라고 하지∼ 마아∼ 용서∼ 못 해에에에에∼
분노의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마침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벨이 울리기 시작한 지 좀 된 모양인지 클라이맥스 부분이 흐르고 있었다.
“나 참, 이놈의 김 비서는 진짜 닦달하는 엄마도 아니고 왜 이러…… 어?”
김 비서의 전화일 줄 알았는데 액정엔 모르는 번호가 떠 있었다.
“네. 진혜린입니다.”
혜린이 시크한 업무용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나야.
휴대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혜린은 멈칫했다. 불길한 예감이 다시 발바닥 아래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누구시죠?”
―갑자기 전화해서 나야라고 할 사람, 또 있나?
젠장! 역시 강재하.
“내 번호 어떻게 안 거야?”
―어려울 것 같아?
혜린이 조소를 흘렸다.
“하긴 당신이 내 번호 하나 알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겠지. 그런데 나한테 무슨 볼일?”
목소리를 최대한 차갑게 내려고 노력하며 혜린이 말했다. 이 남자한테 절대 꿀리지 않으리라.
―너도 나한테 볼일이 있을 텐데? 재회 선물로 주기엔 상당히 네 취향 같은데.
재하의 쿡쿡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그 포르쉐는 지독히도 혜린 취향이기는 했다. 애마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녀석이니까. 하지만 그걸 꿰뚫고 말하는 재하의 말에는 오기가 치솟았다.
“당신이 내 취향에까지 관심 가질 건 없잖아? 비서 통해서 보내.”
―네가 직접 찾으러 와. 기다리고 있지. 오늘 안으로 안 오면 그리 내키진 않지만 재회의 선물로 받아 주겠어.
“뭐? 그게 무슨……!”
뚝.
말하고 있는데 지 멋대로 전화가 끊겼다. 끊긴 휴대폰을 바라보는 혜린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일그러졌다.
“아악!! 이 내장까지 골고루 난도질해 갈가리 씹어 먹어 버릴 자식!!”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은 혜린이 바락바락 소리 지르며 휴대폰을 침대 위로 내던졌다.

전화를 끊은 재하는 느긋한 표정으로 차창 밖을 바라봤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내걸고 있는 재하를 룸미러로 힐끗거리던 공 비서가 사색이 돼서 말했다.
“부, 부사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무슨 소리지?”
재하가 창밖을 향했던 시선을 돌려 룸미러를 쳐다보자 식은땀을 흘리는 공 비서와 눈이 마주쳤다.
“별일 없으신…… 거죠?”
“그러니까 무슨 소리냐고.”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재하의 눈썹 끝이 살짝 올라가는 것을 확인한 공 비서가 기겁을 하고 소리쳤다. 눈을 가늘게 뜬 재하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자 공 비서가 룸미러를 몰래 힐끗거렸다.
‘여, 역시 웃고 있어!’
재하의 왼쪽 입꼬리가 정확히 2시 방향으로 추켜 올라가 있었다. 칼로 찔러도 피는커녕 퍼런 냉기만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얼음 황태자 강재하였다. 3시 방향에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던 공 비서는 경악했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는데 혹시……?’
공 비서가 불안해지려 할 때 즈음 언제 그랬냐는 듯 재하의 입꼬리는 다시 정확히 3시 방향으로 돌아와 있었다.
‘뭐, 뭐지……? 잘못 봤나?’
룸미러로 재하의 표정을 슬쩍 살핀 공 비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자코 운전을 했다.
재하는 넓은 차내에서 긴 다리를 느슨하게 꼬고 턱을 괸 채 창밖을 내다봤다. 그의 입꼬리가 저절로 추켜 올라가고 있었다.
역시 전혀 변하지 않았어.
강재하에게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그는 0.0001초의 지체도 없이 ‘진혜린’을 지목할 것이다. 그녀를 상대하는 건 즐겁다. 예전부터 한결같이……. 그래도 모르는 척하는 건 너무하잖아? 내가 돌아온 걸 알면서도 아직까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은 주제에.
재하의 입꼬리가 다시 2시 방향으로 추켜 올라가는 것을 본 공 비서는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임원용 차량인 까만색 BMW가 주차장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재하가 사용하는 전용 주차장은 임원들도 주차할 수 있게 되어 있긴 했다. 하지만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회로를 가지고 있는 임원들은 절대로 재하가 사용하고 있는 주차장에 자기 차를 대는 정신 나간 짓은 하지 않았다.
똥은 더러워서 피하지만 강재하는 무서워서 피한다.
그들의 일관된 주장이 말해 주듯 강재하가 전용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복도를 걷는 순간에도 마주치는 직원들은 홍해가 갈라지듯 쩍쩍 갈라지며 허리를 반으로 접어 댔다.
“부사장님, 나오셨습니까!”
“좋은 아참입니다!”
누군가는 실수로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관둬요. 내가 조폭입니까?”
재하가 맘에 안 든다는 듯 말해도 그들의 직각으로 접힌 허리는 그가 사라질 때까지 절대 펴지지 않았다.
‘부사장이랑 눈 마주치고 인사도 하지 않아서 그 날로 자기 책상 치워졌다더라.’
‘부사장 지나가는 것도 모르고 발 밟았다가 사우디 지사로 보내졌대.’
출처조차 모호한 카더라 통신이 회사 내를 흉흉히 돈 이후부터 그들은 재하를 마주칠 때마다 마치 귀신을 본 듯 겁을 먹었다.
“누굴 사람 잡아먹는 식인귀로 아나…….”
재하는 미간을 좁히며 집무실로 들어섰다.
“네가 절대 편한 이미지는 아니지.”
그의 집무실에는 벌써 손님이 와 있었다. 연구팀 이사로 있는 재하의 동갑내기 사촌인 현성이었다. 그는 재하의 두툼한 가죽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 고급스러운 재하 전용 커피 잔을 들고 여유롭게 블루마운틴 향을 음미하고 있었다.
회사임에도 캐주얼 차림을 한 것과, 어깨 정도 기장의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헤어스타일에서도 느껴지듯 현성은 재하와는 전혀 다른 러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재하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현성 앞에 삐딱하게 섰다.
“꺼져.”
“부사장이라고 자기만 좋은 의자 앉고, 자기만 더럽게 비싼 커피 마시고 그러는 건가? 그래서 모처럼 왔으니 나도 좀 누려 보겠다는데 그거 하나 못 하게 하고? 나 참, 더러워서 정말…….”
현성은 마지못해 일어서며 투덜거렸다. 그러면서도 그의 손엔 본차이나 커피 잔이 소중하게 들려 있었다.
집무실 중앙에 놓인 이태리제 가죽 소파로 옮겨 가 털썩 앉는 현성을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던 재하가 자신의 의자에 앉았다.
“있지도 않은 소문 퍼트리는 놈치고 제정신인 놈 없어. 헛소리를 곧이곧대로 믿는 놈들도 마찬가지.”
책상 위에 놓인 결재 서류들을 훑어보며 재하가 말했다.
“네가 잘 모르는구나. 소문이란 게 얼마나 재밌는 건데. 그리고 돌 만하니까 돌지? 없는 소문이 지 혼자 발 달려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겠냐?”
재하의 얼음장 같은 시선이 오싹하게 온몸을 훑자 현성이 진저리 치듯 말했다.
“거 보라고! 그런 식으로 죽일 듯이 사람을 쳐다보니까 그런 소문이 생기는 거 아냐. 딱 봐도 사람 대여섯은 한강 물에 돌 매달아 생매장시켜 봤을 것 같은 눈이잖아?”
“첫 번째로 매장당하고 싶지 않으면 닥치고 꺼져라.”
“아유, 무서워! 무서워 죽겠네. 정말! 오빠 너무 살벌하다∼!”
재하가 이마에 핏대를 불끈 세우고 엉덩이를 살짝 들 기미가 보이자 호들갑을 떨던 현성이 남은 커피를 급히 원샷 하고 문 쪽으로 달아났다.
“어쨌든 커피 잘 마셨다. 난 간다!”
씨익 웃고 바람처럼 빠져나가는 현성의 뒷모습을 본 재하가 낮게 한숨을 쉬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아버지는 왜 저런 미친놈을 기용해서.”
재하가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노트북을 켜자 병풍처럼 서 있던 비서실장인 유 실장이 다가왔다.
“천재시잖아요. 저래 봬도 강현성 씨 노리는 데 많아요. 다른 데 뺏기는 것보다야 훨씬 낫죠.”
“저 정도의 천재는 널렸어.”
“뭐 부사장님이 보시기엔 그렇겠지요.”
볼에 홍조를 띤 여비서가 살포시 건네준 블루마운틴을 재하 앞에 놔둔 유 실장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방금 유 실장의 말은 진심이었다. 재하와 미국 지사에서부터 함께해 왔던 유 실장이 보기에 재하는 천재가 널렸다는 말을 쉽게 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는 성격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보통 사람의 범주는 이미 한참 전에 넘어간 넘사벽급 인물이었다.
강재하는 국내 재계 순위 3위의 명예그룹 회장 강도하의 아들로 월반을 거듭해 16세에 서울대 경영대에 입학한 후 18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에서 경영학 석사 과정을 밟았다. 그 후 잠시 국내로 돌아와 2년간의 현역 군복무를 마친 뒤 해외 지사들을 돌며 경험을 쌓다가 미국 지사에서 놀라운 실적을 달성한 공로가 인정되어 바로 부사장직을 달고 이번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재하를 보필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엔 그에 대한 세간의 신화에 가까운 평가들이 언론플레이로 이루어진 과대평가가 아닌가 하는 의심도 했었다. 하지만 재하의 탁월한 경영 능력을 옆에서 보좌하며 직접 눈으로 확인한 이후로는 국내에서의 평가가 절대 거품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확신한 사실은…….
“진성이 슬슬 조일 때가 됐는데?”
입술 끝에 특유의 비릿한 미소를 걸친 재하가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 톤과 입술 끝의 추켜 올라간 각도로 보아 그의 기분이 상당히 좋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었다.
“아마 오늘쯤 마지막 패를 꺼내지 않을까 싶습니다.”
유 실장의 말에 재하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그 표정은 흡사 가녀린 토끼를 사냥한 재규어가 오들오들 떠는 토끼를 코앞에 두고 군침을 흘리며 이걸 어떻게 먹을까, 어디부터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뭐 그런 종류의 고민을 하는 표정과 비슷했다.
“그래 봐야 어음 날짜를 연기해 달라는 거겠지. 어차피 끝난 게임이지만 뭐……. 연기해 줘.”
그럴 줄 알았다.
유 실장은 단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예상 답변을 듣고 눈을 빛내며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궁지에 몰려 갈 데까지 갈 때까지, 그 말씀이죠?”
진성이 더러운 짓으로 몸뚱이를 무리하게 불리다 인수 합병되기 직전 상황까지 가게 된 것은 당연하다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시간을 연기시켜 주는 동안 진성에선 어떻게든 살 방법 만들어 보겠다고 죽을힘을 다해서 단지 위로 기어 올라가려고 할 것이다.
재하가 공들여 벽에 찐득찐득하게 발라 놓은 꿀단지 위를……. 그리고 차근차근 조여 들어가겠지. 주변에 깔린 희망의 다리들을 하나하나 잘라 내며.
재규어에게 잡힌 토끼는 몇 날 며칠 잡아먹진 않고 침만 흘리고 있는 재규어의 앞에서 시달리다 결국 극심한 스트레스를 이겨 내지 못하고 공포에 질려 죽어 버리는 것이다.
‘으으, 사디스트…….’
빙글거리며 웃고 있는 강재하의 얼굴을 보며 유 실장은 절로 소름이 돋았다. 진성의 사장에게 일말의 연민을 느끼고 있을 무렵 재하의 전화벨이 울렸다.
“강재합니다.”
전화를 받은 재하의 한쪽 눈썹이 홱 하니 솟구쳐 올랐다.
“……도난차량이요?”

김 형사는 죽을 맛이었다.
특이한 차종답게 쉽게 도난차량의 현행범을 잡아 온 것까진 좋은데, 그게 우리나라 재계를 쥐락펴락하는 굴지의 그룹 총수 아들이라면, 더구나 이십 대 후반의 나이로 부사장직까지 고속 승진한 것으로 유명한 강재하라면 말이 달라진다.
어쩐지, 포르쉐라더니만! 젠장!
김 형사가 머리라도 쥐어뜯고 싶은 심정으로 앉아 있는데 비서인 듯 보이는 남자가 비서의 고정 유니폼 같은 각 잡힌 까만 정장을 입고 안경을 추켜올리며 물었다.
“언론에 노출된 건 아니겠죠?”
“아, 아닙니다.”
얼른 대답한 김 형사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를 힐끗 바라봤다.
민중의 지팡이인 자신이 왜 도난차량 현행범으로 앉아 있는 남자에게 주눅이 들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김 형사는 자신의 앞에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기럭지가 지나치게 긴 남자에게 기가 죽었다.
“쿡.”
김 형사가 움찔 놀랐다.
가마니같이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심장을 벌렁거리게 만들 만큼 위협적인 남자가 이유도 없이 실소를 흘리고 있었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재하가 몸을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묻으며 입꼬리를 살짝 추켜올렸다. 그 표정을 본 유 실장은 경악했다.
‘큰일이군. 저렇게까지 즐거워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데……. 그 여자는 어쩌자고 이런 짓을!’
유 실장은 진심으로 탄식했다.

“무슨 기분 좋은 일 있으십니까?”
김 비서가 혜린의 뒤를 따르며 슬쩍 물었다.
“아니? 왜?”
머리를 정갈하게 틀어 올린 혜린은 얼굴 가득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진 호텔 로비를 걷고 있었다. 웬만한 여자는 커버하기 힘들다는 연보랏빛 투피스를 화보 모델 급으로 고급스럽게 소화한 혜린은 누구나 한 번씩 뒤돌아볼 만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옅은 미소까지 풀옵션으로 장착한 채 걷고 있으면 보통 사람들은 ‘우와, 완전 여신이네.’ 생각하겠지만, 김 비서는 ‘대체 또 무슨 일을 벌이신 겁니까?’라고 생각하게 된다.
김 비서는 알고 있었다. 얼음 공주로 소문난 진혜린이 이렇게 기분 좋을 때는 딱 하나뿐이라는 걸.
바로 누군가를 엿 먹일 때.
“정말 아무 일…… 없으신 거죠?”
불안한 목소리로 김 비서가 묻자 또각거리던 혜린의 구두 굽 소리가 돌연 멈췄다. 그녀가 빙글 뒤돌았다. 김 비서를 바라보며 팔랑이는 긴 속눈썹을 부채질하듯 몇 번 눈을 깜빡거린 혜린이 생긋 웃었다.
“몇 번을 물어봐? 김 비서. 아무 일도 없다니까?”
활짝 핀 유채꽃처럼 화사하게 웃는 혜린을 보며 김 비서는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젠장! 이건 100퍼센트인데? 이번엔 또 누구야?!!’
다시 앞서 걸어가는 혜린을 따르며 김 비서는 잽싸게 머리를 굴려 댔다.
저 정도의 함박웃음을 터뜨릴 정도의 데미지면……. 김 비서는 가장 최근의 기억을 떠올렸다. 맞선 자리에서 만났다가 급기야 스토킹 짓까지 하게 됐던 L유통의 차남. 그 집요함에 혜린은 결국 그를 만취하게 만들어 홀딱 벗겨 놓고 강남 한복판에 버렸고, 그 사진을 직접 찍어서 SNS에 퍼트렸다. 그때 그 소송 막는 데 얼마가 깨졌더라?
“아.”
혜린이 멈춰 서자 김 비서도 멈춰 섰다.
“자리에 놓고 온 게 있네.”
“제가 가져올게요.”
엘리베이터 쪽으로 몸을 돌리는 혜린에게 김 비서가 얼른 말했다.
“……김 비서가 가져온다고?”
긴 속눈썹을 다시 천천히 들어 올리며 혜린이 김 비서를 바라봤다. 처음 본 남자들은 눈 깜빡임 한 번에 빠져든다던 저 눈썹부채질에도 김 비서는 초연해질 정도로 내공이 쌓여 있었다.
“네. 뭘 놓고 오셨는데요?”
김 비서가 묻자 혜린은 보일락 말락 한 미소를 지으며 올려다보더니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붙이고 귓속말을 했다.
“진통제 담긴 가방 놓고 왔어. 나 그날엔 통증 심한 거 알잖아.”
김 비서는 잠시 얼음이 된 듯한 표정을 하더니 곧 끄덕거렸다.
“……아, 네. 가져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뒷걸음질 치듯 엘리베이터 쪽으로 멀어지는 김 비서를 향해 혜린이 말했다.
“알지? 작은 진주색 파우치.”
“아. 진주색, 진주색.”
김 비서가 어정쩡한 자세로 끄덕거리더니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어머.”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여직원이 김 비서가 타자 볼을 살짝 붉혔다. 사실 김 비서도 혜린과 같이 서도 전혀 눌리지 않을 정도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세련된 엘리트의 분위기를 풍기는 검정 뿔테 안경에 짙은 그레이 톤의 정장이 그의 날렵한 몸매의 핏을 더욱 살려 줬다.
그가 비록 뒤에서 ‘진 이사의 몸종’, ‘공주의 남자’ 등등의 별명으로 불리고 있긴 하지만 사실 그의 외모에 흔들리는 여심을 부여잡는 여자들이 훨씬 많았다.
띵.
18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빠르게 이사실로 들어간 김 비서는 책상 위와 서랍 등을 주욱 훑었지만 진주색 파우치는 보이지 않았다. 갸웃거리던 김 비서의 뇌리에 불현듯 매우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차!”
그가 황급히 이사실을 빠져나가 로비로 내려갔다. 숨을 몰아쉬며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혜린은 보이지 않았다. 낭패한 표정으로 혜린의 휴대폰으로 전화해 봤지만 역시 꺼져 있었다. 오늘 저녁엔 분명 M그룹이 주최한 파티에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보기 좋게 자신을 따돌려 버린 것이다.
“제길, 당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신세가 된 김 비서가 지붕을 부술 기세로 분통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