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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세계 1권(25화)
8. 신들의 영역(2)
능력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환영은 영구적이지 못하다.
현금을 구체화하더라도 신용카드를 복제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환영일 뿐이었다. 그리고 고유의 일련번호를 가지고 있는 체계적인 현대사회의 금융시스템을 속이기엔 자신의 능력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떠오른 생각은 카챤터스였다.
언젠가 카챤터스에서 사회에서 거래되는 현금도 다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만약 구슬을 판다면 현금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맥델런도 자신에게 카챤터스로의 가입을 권유하면서 응당한 보상을 해 주겠다고 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알아본다면 길이 있을 것 같았다. 그마저도 안 된다면 자신과 다툰 하연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가족들을 위해 돈을 쓴다고 하면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르지만 정말 방법이 없다면 자신의 현재 유일한 인맥인 하연에게 부탁하는 것이 마지막 보루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욱이 그렇게 문득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별안간 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응? 능력자?’
정욱의 감각이 날카로워졌다.
분명히 이 이질적인 기운은 자신과 다른 신의 능력자였다. 찬기의 예상과는 달리 병원에 있는 자는 정아의 ‘친오빠’인 정욱이었고, 지금 그의 감각에 걸린 자는 다름 아닌 찬기였다.
“오빠, 갑자기 왜 그래?”
정욱의 표정 변화를 알아본 정아가 물었다.
그러나 정욱은 대답할 새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
자신이 느꼈다면 상대도 자신을 느끼고 다가오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능력에 휘말릴 가족들이 위험하다.
“잠깐 다녀올게. 꼼짝 말고 어머니 잘 보살피고 있어.”
ㄴ
금빛 샹들리에의 조명이 어두컴컴한 실내를 노랑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노랑 빛은 짙은 담배 연기에 여과되어 오묘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곳은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는 어느 평범한 바(bar)였다.
하연은 홀로 바 앞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깊은 맛이 우러나는 숙성된 코냑이었다.
정욱에게 쓴소리한 오늘이 자신의 정신력이 바닥나는 시점이란 것을 깨달았다.
때문에 그 굳건했던 자신이 어딘가에 기대고 싶어서 도심 한 곳에 있는 ‘바’를 찾았던 것이다.
평소 즐기는 술로 자신의 마음을 달래 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특별히 누군가를 따로 만나기로 했다.
술이 한 잔, 두 잔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면서 그는 긴장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더운 술기운이 그의 몸을 잠식해 갔다.
그가 앉아 있는 바 안에서 말없이 컵을 손질하는 바텐더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저자가 나보단 낫겠군.’
능력을 잃어버려서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자신보다 평범한 인생을 살 것이 분명한 저 바텐더가 더 낫다고 느껴졌다.
그만큼 하연이 느끼는 상실감은 대단했다.
죽는 것이 차라리 나을 정도라고 그는 생각했다.
능력자에게 있어서 능력이 사라지는 것은 팔다리가 잘려 나가는 것과 같다.
그것도 가장 팔다리를 많이 써야 하는 사람이 그런 것을 당한 것과 같은 것이다.
욕망을 들끓어 오르지만 그 욕망을 이룰 수단이 거세되어 버린 지금 하연은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다시 하연은 진한 코냑의 향을 코에 적신 후 그것을 한 모금 입에 담았다. 짙고 독한 포도향이 그의 입안을 가득 채웠다.
그때 하연의 옆에 누군가가 자연스럽게 들어와 앉았다.
“같은 걸로 한 병 주세요.”
하연은 고개를 슥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보기 드물게 밝은 은발의 사내였다.
여유 있게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에서 오묘한 매력이 뿜어져 나왔다.
은발의 사내는 자신을 바라보는 하연에게로 시선을 돌려 슬쩍 목례했다. 그의 눈이 초승달처럼 가늘어졌다.
“외로우신가요, 하연 씨?”
“흥!”
“에이, 사람을 기껏 불러 놓으시고는 ‘흥’이라니요.”
은발의 사내는 바텐더가 준 술잔과 코냑을 받아 들고는 하연에게로 내밀었다.
“한잔 주시죠?”
하연은 말없이 자신의 술잔을 내려놓고는 그의 술병을 받아 들어 기울였다.
은발의 사내가 든 코냑 잔이 갈색 투명한 액체로 채워졌다. 하연이 입을 뗐다.
“답답하군.”
“후후, 마음이 답답하실 땐 제가 잘 달래 드리겠습니다, 하연 씨.”
하연이 입에 쓴미소가 걸렸다.
자신 앞에 앉은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는 하연이 따라 준 술잔을 들어 보이며 싱긋 웃고는 입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고맙군. 예언자.”
하연은 말없이 술을 들이키며 뭐가 좋은지 배시시 미소를 짓고 있는 은발의 사내 예언자를 바라보았다.
하연은 이 사내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능력자로서의 삶을 살면서 얻은 모든 운명의 기운을 예언자라는 은발의 사내에게 맡기고 있었다.
예언자는 그에게 있어서 신의 사도와도 같았다.
다수의 구원을 위한 유일한 열쇠, 신과의 유일한 소통자, 그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하연이 넌지시 물었다.
“정말…… 내 능력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나?”
“후회되십니까?”
“…….”
“후후.”
예언자는 코냑을 입술에 살짝 적셨다가 혀로 핥으면서 그 향을 느끼고 있었다.
숙성된 코냑의 향은 소름 끼칠 정도로 달콤한 맛이었다.
“제가 당신에게 금기의 구슬을 준 것은 아마 이때를 직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선택은 우리 모두에게 축복이 될 것입니다.”
“그런가? 구슬을 일본에서 쓰게 될 줄 알고 있었군.”
“그저 직감이었다고 해 두지요. 언제나처럼.”
예언자는 다시 싱긋 웃어 보였다.
예언자는 항상 그랬다.
모든 것을 먼저 앞서서 보는 듯 자신에게 묵시적인 암시를 주고는 했다.
일본에서 사건이 일어나기 한 달 전 이미 예언자는 자신에게 금기의 구슬을 쥐어 주었다.
이 세상엔 단 하나밖에 남지 않았던 그 엄청난 구슬을.
“금기의 구슬을 쓴 당신만이 그 번개의 능력자가 어디에 갇혔는지 알고 있겠지요?”
“그렇지.”
“그렇다면 당신 스스로 그 봉인을 어떻게 해제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겠지요?”
“…….”
하연은 말없이 술잔을 바라보았다. 그랬다. 자신은 금기의 구슬을 쓰는 순간 봉인의 해제법을 깨달았다.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방법 이외의 것을 예언자에게 물어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되돌아온 예언자의 대답은 ‘당신이 알고 있는 그 방법 이외엔 현재로선 없다’라는 대답과 같은 것 이었다.
예언자는 하연을 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 쪽 능력자들 중에 당신처럼 강인하고 고귀한 의지를 가진 자가 없다는 것이 안타깝군요. 저도 당신이 힘을 잃었다는 사실이 정말 아쉽습니다. 그러나 라힌델의 다른 능력자들 또한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이 당신을 대신해서 열심히 싸워 주는 수밖에 없겠지요.”
금기의 구슬을 쓰는 순간 시전자는 봉인의 해제법도 터득하게 된다.
하연이 터득한 봉인의 해제법은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 봤을 때 굉장히 어려운 것이었다.
최소한 우리 편 능력자 중 한 명의 목숨을 필요로 했다.
같은 편의 능력자들 중 한 명이 직접 차원의 틈새로 들어가 봉인을 푼 뒤 그와 같이 영원히 갇히게 되는 것.
생존과 구원에 대한 집착이 대단한 능력자로서는 다른 사람의 봉인을 해제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때문에 예언자는 하연의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하연과 같은 능력자는 거의 없다.
극한의 상실감 속에서 남을 잘 속여 낸다면 봉인을 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봉인을 자초한 사람은 하연 자신이었다.
괴로웠지만 이토록 쉽게 자신의 생각을 바꿀 맘은 없었다. 하연 또한 자신의 주변에 있는 능력자 모두의 고귀한 승리를 원하고 있었다.
하연은 피식하고 웃었다.
“희생이라……. 나 따위가 감히 그런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군.”
“훌륭하십니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무엇을 말입니까?”
“혼돈의 구슬이라도 흡수해서 능력을 키울 생각이야.”
예언자는 짐짓 의외라는 얼굴로 하연을 바라보았다.
“그냥 당분간은 몸을 숨기시죠? 제가 최대한 봉인의 해제법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아니, 가만히 있다간 그 전에 내가 먼저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도 모르겠어.”
하연은 쓴웃음을 지으며 술을 들이켰다.
불에 살짝 데워진 코냑은 극한의 달콤함을 머금고 있었다.
예언자는 술잔을 멈춘 채 하연을 바라보았다.
“도르힘의 예언자가 당신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당신이 능력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흥, 역시 그 녀석들이.”
“아시다시피 도르힘들은 당신에게 원한이 많습니다. 요즘 도르힘의 예언자의 움직임이 수상하니 그 의도를 파악하고 나서 움직이는 것이.”
예언자의 말은 하연의 말에 의해 잘렸다.
“아니, 도르힘 따위는 누가 오더라도 상대해 주겠어. 도르힘. 벌레만도 못한 것들!”
도르힘의 능력자들은 예언자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기로 유명하다.
예언자에 대한 신뢰가 굉장해서 예언자의 명령을 토대로 행동을 한다.
때문에 자신을 강화시킬 시간이 다른 능력자들보다 적은 편이라 개개인의 능력은 다른 신들의 능력자에 비해 약한 편이었다.
예전에 하연은 단신으로 그들의 본거지에 쳐들어가 3명의 목숨을 끊고 온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움직임이 요즘 이상했다.
여전히 예언자들을 토대로 뭉쳐 있었지만 그 행동반경이 굉장히 협소해졌고 소심해졌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행하던 능력자 사냥에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예언자는 하연이 그렇게 말하자 어느 정도 체념한 듯 말을 내뱉었다.
“역시 하연 씨군요. 좋습니다. 8할이 사라졌다고 해도 아직 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니까요. 혼돈들을 사냥하면서 단기간에 강해지셔야 합니다. 그동안에 저는 번개의 능력자를 잠재운 상태로 당신의 봉인을 해제할 방법을 알아보고 있겠습니다. 그런데 정욱 씨는 어떻습니까?”
“정욱? 약해 빠진 녀석이지. 능력자로서는 저주받은 케이스라고 할 수 있지. 본능이 거세되어 버렸으니까.”
“후후, 역시 그렇습니까?”
“왜 웃나?”
“후후, 아닙니다. 정욱 씨를 잘 보살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림자 세계』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