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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세계 1권(24화)
7. 환영술의 진수(4)


그저 혼돈에 대한 분노와 자신이 가진 능력을 갈고닦는 것만이 신들의 내기에 들어선 정욱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다른 능력자들에 비해 몇 가지가 거세된 정욱의 성질을 하연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자코 있던 정욱이 마음을 굳게 먹고 입을 열었다.
“형, 갑자기 왜 이러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어머니에게 가는 게 중요해요. 비켜 주세요. 다녀온 뒤에 연락드릴게요.”
하연은 꼼짝하지 않았다.
“다른 능력자들에 대한 분노도 없고 승리에 대한 욕구조차 없다면 넌 뭐하는 녀석이지? 난 목숨을 걸고 모든 것을 걸고 승리를 갈망하고 있어. 난 너와 같이 구원을 받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단 말이다!”
정욱으로선 하연이 자신에게 갑자기 왜 이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하연은 일본에 다녀온 후 3일 동안 뼈를 깎는 상실감에 갇혀 살아야 했다.
금기의 구슬을 사용한 대가로 정말 자신의 능력 중 8할 이상을 봉인당했다.
힘이 사라진 것이다.
그 강력했던 불의 기운과 그림자의 능력들이 어린애 장난마냥 초라한 것으로 타락했다.
일본에서 초록 구슬로 공간 이동을 한 그는 예언자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었다.
예언자는 금기의 구슬을 사용한 이상 봉인된 능력은 그 봉인이 다른 자에 의해 풀리지 않는 한 사용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하연은 그 말을 듣고 입술만을 깨물었을 뿐이다.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번개의 능력을 다루는 그 괴물 같은 능력자를 본 이상 이 세상에 그를 놔두어서는 자신들의 승리가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온몸을 던져 그를 차원의 틈새로 봉인시킨 것이었다.
비록 자신의 능력은 봉인되지만 예언자를 비롯한 다른 편 능력자들이 자신의 희생으로 더욱 승리에 가까워질 것임을 기대했던 것이다.
때문에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은 하연을 대신해서 다른 이들이 분발해 주길 기대했다.
하연은 그런 사내였다.
그런데 막상 믿고 있던 정욱은 자신들을 위협하는 능력자들에 대해서 알아볼 생각은커녕 어머니를 찾아간다는 어리석은 말을 하고 있다.
신들이 내기에 발을 들인 이상 능력자들에게 있어서 그 이전의 세계는 모두 무의미하다.
후에 구원이 시작되면 능력자 이외에는 모두 사라진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런 자각이 아니더라도 능력을 받는 순간 본능적으로 그 이전의 세계와 멀어지게 되어 있다.
설사 그것이 같은 피가 흐르는 가족일지라도 말이다.
하연의 정신은 그런 상실감과 억울함에 피폐해져 있었다. 언제나처럼 자신을 지탱하고 싶었지만 도무지 그럴 순 없었다.
정욱에게 두서없이 이런 말을 내뱉는 그 자신도 괴로운 마음이었다.
그 순간 정욱의 입술이 다시 떼어졌다.
진지한 눈빛으로 하연을 노려보는 것이 진심이었다.
“비켜 주세요.”
“…….”
하연은 잠시 무표정한 얼굴로 정욱을 바라보다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등을 돌아 섰다.
정욱은 그런 하연 모습을 보고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길을 걸었다.
화가 났다.
자신을 이렇게 나무라는 하연에 대해서 화가 났다.
승리가 뭐길래!
그것이 중요하다 한들 자신에겐 어머니가 더욱 소중했다.
아니, 그것이 더욱 소중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정욱은 발걸음을 빨리해서 하연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든다.
뒤를 돌아 하연의 모습을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언제든 다시 마주치게 될 사람이다.
그때 가서 차분하게 화해를 나누는 게 낫겠다 싶었다.



8. 신들의 영역(1)


시험 기간이 모두 끝난 후 찬기는 한동안 교실에 머물러 있었다.
항상 자신과 같이 하교를 하곤 했던 친구가 갑작스럽게 조퇴를 한 탓이었다.
찬기는 자신에게조차 말도 없이 급하게 조퇴했던 친구를 생각하며 거울을 만지작거렸다.
하교를 같이 하던 친구는 같은 반인 정아였다.
항상 같은 방향이라는 핑계로 정아와 같이 하교를 하곤 했지만 사실 찬기의 집은 정아의 집과 반대 방향이었다. 그러나 항상 그녀를 데려다주고 자신은 멀리까지 돌아간 이유는 그는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터 이런 두근거리는 감정이 생겼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부터 가끔 같은 반이 된 적은 있었지만 그저 멀리서 지켜봤을 뿐 지금처럼 이렇게 적극적으로 감정이 타오른 적은 없었다.
정아는 마음이 고왔고 예쁜 아이였다.
여타 다른 여자 아이들처럼 겉멋에 찌들어 굳이 외모를 꾸미지 않아도 예쁜 그런 순수한 아이였다.
찬기는 잠시 거울을 들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이내 숨을 꾹 참았다.
거울 속에서 병원 안이 비춰졌다.
누군가가 누워 있는 병원 입원실에서 그녀의 모습이 비춰졌다. 거울 속에서 정아는 자신의 어머니 손을 굳게 잡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정아의 손을 어루만지며 연신 괜찮다는 듯 달래고 있다.
찬기는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찬기는 그런 그녀의 슬픔과 아픔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지구상에서 그녀의 감정을 나눌 유일한 존재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찬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아가 힘들어 하는 이시점이야말로 그녀에게 특별하게 보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병원 앞에서 그녀를 기다릴 작정이었다.
학교에서 병원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그는 느긋하게 걸었다.
우연인 것처럼 가장해서 그녀를 보살펴 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병원에 거의 다다를 무렵 찬기는 거울을 꺼내었다.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펴볼 생각이었다.
숨을 멈추고 정신을 집중하자 거울이 일렁거리며 그녀를 비추었다.
그런데……!
“헉!”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찬기는 깜짝 놀라서 거울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거울 속에 비춰진 존재는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뿐만이 아니었다.
한 남자가 와 있었다.
그 주변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맴도는 남자였다.
능력자였다.
‘능력자가 여길 왜?’
찬기는 제자리에서 굳은 채로 섰다. 그리고 재빨리 떨어진 거울을 주워 들었다.
‘나와 같은 신의 능력자가 아니야!’
그의 마음 밑바닥에서 알 수 없는 형태의 분노가 끓어올랐다. 자신이 거울에 비친 사내를 향한 분노였다.
로딘의 능력을 받은 찬기의 능력과 그 사내의 능력이 적대적인 탓이었다.
‘그런데 왜 정아가 능력자와 같이 있지?’
자신이 알기로 능력자는 평범한 사람에게 접근할 일이 별로 없다.
능력을 받는 순간 평범한 사람들을 대할 의욕은 사라지고 다른 능력자들을 추적하거나 자신을 강화하는 것에 모든 힘을 쏟는다.
물론 본능을 억제해 가며 사는 자신은 학교에서 평범하게 묻혀 지내고 있지만 지금껏 그가 본 다른 능력자들은 모두 광기에 물들어 있었다.
그렇기에 능력자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접근할 일은 별로 없는 것이다. 능력자가 자신의 능력으로 그저 유희를 즐기는 것이라면 모를까.
‘설마!’
찬기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웬 낯선 남자가 정아의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는데다가 심지어 그는 능력자였다.
병문안 올 정도면 정아의 가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찬기는 능력자의 특성을 알고 있었다.
능력자는 능력을 받은 순간 자신의 혈연관계를 본능적으로 지운다.
때문에 정아와 함께 있는 자가 정아의 혈연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질투심과 함께 특유의 분노가 들끓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능력자를 느낀 순간 도망쳤겠지만 정아가 관련되어 있었다.
능력자가 어느 불순한 의도로 정아에게 접근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오른손에 꽉 쥐고는 터져 나오는 분노의 기운으로 자신을 무장한 채 병원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

대구로 내려가는 고속버스 창가에 정욱은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햇살이 그의 눈을 찔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따스했다.
빠르게 지나가는 주변의 풍경을 보며 상념에 잠겼다.
‘잃는 것과 얻는 것.’
잃는 것과 얻는 것, 그것은 어느 상황에서나 존재했다.
신들의 내기에서도 정욱은 이전의 자신을 잃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알고 있던 인간관계, 습관, 생활, 그리고 가족들마저도 잃어 가고 있었다.
능력을 얻게 되면서 자신의 모든 체질과 특징, 성격과 기호, 본능마저도 바뀌어 가고 있었다.
대신에 힘을 얻었다.
능력자들은 서로를 죽이는 것에 목숨을 건다.
결국엔 모든 이들을 이긴 자만이 구원을 받고 능력자들은 동시다발적으로 그 구원을 향해 이끌린다.
살기 위해서 경쟁자들을 죽이는 것이 본능이고 정의였다.
‘차라리 그 편이 나을까?’
정욱은 눈을 꾹 감았다.
자신은 어찌 된 일인지 다른 능력자들에 비해 본능의 지배를 덜 받고 있었다.
차라리 그게 더 나쁜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정의와 운명의 정의 사이에서 고뇌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화를 낸 하연 역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용납하기에는 아직 정욱의 심장은 뜨거웠다.
정욱은 눈을 감은 채로 뒤틀린 하연과의 관계, 그리고 잃어 가고 있는 것에 대한 것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잠시 잠을 청했다가 대구에 버스가 도착하며 정신을 차렸다.
정욱은 정아로부터 통보 받은 병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오랜만에 온 고향이었다.
그러나 고향임에도 불구하고 낯선 느낌이 들었다.
기대했던 아늑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어디에도.

***

정욱은 어느새 병원에 도착해 정아와 마주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동생의 얼굴이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상태는 어떠셔?”
정욱은 주무시고 계신 어머니의 귀에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히 이야기하였다.
“일단 위급한 상황은 넘기셨는데 수술을 받으셔야 한대.”
“수술?”
“응, 그런데 그게…….”
정아의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뺑소니 사고였대. 범인이 누군지 몰라서 보상 받을 길이 없대.”
“뺑소니?”
정욱이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얼굴이 부어 있는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마음이 울컥했다.
정욱이 말했다.
“그럼 수술비랑 치료비는?”
“보험 들어 놓은 게 있어서 어느 정도는 충당되는데……. 나중에 꾸준히 물리치료도 받으셔야 하고 이것저것 합치면 천만 원 정도가 부족해. 어떡하지?”
정아는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정욱은 그런 동생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미어졌다.
너무 미안했다.
이런 가족들이 자신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정작 그는 능력을 받은 후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천만 원, 정욱에게 그만한 돈이 없었다.
정아가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나라도 돈 빌릴 수 있는 곳에 가서 알아보려고. 금방 갚는다고 하고 빌리면 되지 않을까?”
“시끄러! 그런 소리 하지 말아!”
정욱은 대번에 그녀의 말을 잘랐다.
천만 원이란 액수의 돈을 듣는 순간, 그도 대부업체를 떠올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정아도 그것밖에 길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그녀를 벌써부터 그런 쪽에 얽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혹시 잘못 얽힌다면 가족 전체가 위험해지는 수도 있었다.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엄마 간호나 잘 해 드려. 수술 잘 되도록 도와드리고. 돈은 신경 쓰지 마!”
“오빠가 어떻게 하려고?”
“빌릴 만한 사람 있어. 나쁜 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정욱은 머릿속에 두 가지 생각을 떠올랐다.
첫 번째는 자신의 환영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어떻게든 돈을 구체화시키기만 한다면 해 볼 만하지 않을까 하는 발상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