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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세계 1권(23화)
7. 환영술의 진수(3)


정욱이 사는 반지하의 자취방은 비교적 햇빛이 잘 드는 장소였다.
커튼에 여과된 햇빛은 어두운 방 안에 조금이나마 스며들어 정욱을 비추었다.
이불 속에 푹 파묻은 정욱의 몸이 조금씩 뒤척인다.
햇빛이 정욱의 잠을 조금씩 깨우고 있는 것이다.
의식이 서서히 깨어나며 언제부터 울렸는지 모를 핸드폰의 진동 소리도 정욱의 귓가를 때렸다.
부우웅. 부우웅.
정욱은 연달아 울리는 진동 소리에 손을 더듬어 핸드폰을 집었다.
반쯤 감긴 그의 눈이 핸드폰의 액정을 살폈다.
액정화면에 누군가의 이름이 떴다.
‘정아?’
그는 단숨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오빠.”
왠지 가라앉은 소녀의 목소리가 정욱의 귓가에 들렸다.
“아…… 정아야, 무슨 일이야?”
정욱은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벽에 기대어 앉았다.
소녀는 다름 아닌 자신의 여동생 김정아였다.
한 달여 만에 듣는 동생의 목소리가 왠지 낯설었다.
“오빠, 학교 잘 다니고 있어?”
“그, 그렇지 뭐…….”
사실 정욱은 학교에 복학하기로 되어 있었다. 때문에 자취방도 따로 잡고 고향인 대구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보내 주신 등록금 조금만 쓰고 채워 넣자는 생각에 정신 차리고 보니 등록은커녕 등록금의 반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요즘에 연락이 왜 이렇게 없어……?”
“으응?”
‘그랬었나?’
요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정욱의 세상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능력을 얻고 하연을 만났으며 신들의 내기에 대해서 알아 갔다.
마치 예정된 운명인 것처럼 그 세상에 적응되어 갔으며 전에 없던 갈망으로 혼돈을 상대하고 자신의 능력을 수련했다.
말 그대로 뭔가에 홀린 것처럼 신들의 내기에 대한 모든 것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왠지 자신의 여동생인 정아의 존재가 다른 세상의 사람처럼 사뭇 낯설게 느껴졌다.
정욱은 거짓말하기 시작했다.
“아니, 뭐 복학생이라 그런지 많이 바쁘더라고. 잘 지내고 있어? 어머니는 별일 없으시고?”
정욱은 자신의 입에서 나온 ‘어머니’란 말에 왠지 모를 이질감을 느꼈다.
마치 그런 존재가 기억 속의 아득한 깊은 곳에서부터 떠올리는 것 같았다.
고작 두 달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정욱은 자신이 있던 세상과 멀어져 가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라는 존재에게서조차.
문득 능력을 받은 순간 정상적인 세상과 단절하게 될 것이라는 하연의 말이 떠올랐다.
냉혹하고 신들의 내기판은 그런 것들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아는 말을 이었다.
“엄마 사고 당했어. 오늘 아침에.”
“뭐!”
아버지는 정욱이 열 살 때, 그리고 정아가 다섯 살 때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 둘을 어머니는 홀로 장사를 하시며 길러 오셨다.
어머니가 하시던 장사는 몸은 고되지만 아낀다면 생활비보다 조금 더 되는 돈 정도는 벌 정도였다.
사무치게 어려운 생활은 없었다.
때문에 어머니는 남들 손 빌리지 않고 정욱을 대학에 진학시킬 수 있었고 좁지만 남의 집이 아닌 당신의 집을 마련하여 세 가족을 꾸려 오셨다.
서울에 대학을 진학하게 된 아들을 위해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살 집을 마련해 주시고 등록금도 대 주셨다.
그런데 비해 정욱은 등록금을 반쯤 써 버린 뒤에야 자신의 방탕한 생활을 후회했다.
한 달 전쯤 자취방에 반찬 해 들고 오신다던 어머니 생각이 났다.
오신다는 소식에 혹여 어머니가 해를 당하시지 않을까 야구 방망이를 들고 주변의 혼돈에게 덤볐던 기억도 났다.
왜 이것이 이제야 떠오르는 걸까.
마치 아주 오래된 흑백사진을 꺼내 볼 때처럼 순식간에 잊힌 기억들을 되새겨 보게 되었다.
이 내기판 밖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정욱의 인식의 범주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어머니란 존재, 가족이란 존재조차.
정욱의 귓가에 정아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오늘 아침에 사고 당하셨어, 교통사고. 그래서 나도 지금 시내 병원에 와있어. 수술은 잘 끝나셨고 엄마가 그러더라. 오빠 요즘 바쁜 거 같다고. 복학했으니 취업 준비에 뭐에 정신없을 거라고 오빠. 엄마한테 요새 연락 안 했지?”
“…….”
“오빠 바쁜 거 알겠는데 오빠는 장남이고 떨어져 사는데 엄마한테 연락이라도 자주 해 드려. 엄마 외로우신 거 알잖아. 오빠, 병원 올 수 있어? 엄마는 오빠한테 이야기하지 말라더라. 학교 일에 정신 없을 거라고. 그래도 어서 와…….”
어머니의 사고 소식을 듣고 놀란 마음에 몇 번이고 눈물을 쏟아 내었을 정아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녀는 수십 번 눈물을 쏟아 내고 더 이상 기력이 없어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자신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이었다.
정욱의 머리가 멍해졌다.
왜 도대체 이제야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이것 또한 신의 농간인지.
인간의 본성도 조금씩 바꾸어 놓던 신들의 내기의 절대적인 규칙들이 정욱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그 병원 어디야?”
정아와의 통화가 끝난 후 정욱은 왠지 공허해진 마음에 머리가 멍해졌다.
전화 한 통화에 순식간에 잃은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이 뒤틀려 가는 느낌, 자신도 몰랐던 순간에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소중한 것들, 신들의 내기란 그랬다.
능력을 받은 순간 전에 알던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능력자들을 증오하는 본능을 갖게 하고 신이 가진 궁극의 능력에 대한 갈망을 피어오르게 만들었다.
그 교묘한 조작들 속에서 정욱은 자연스럽게 내기에 융화되어 왔던 것이다.
정욱은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정해진 시간은 없었지만 마음이 급했다.
고향에 내려갈 생각이다.
아니, 당연한 것이지 않은가.
자신의 어머니가 사고를 당하셨다는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는 정욱의 눈에 자꾸만 책상 위에 놓인 완성되지 못한 레시피가 걸렸다.
이 순간에도 저 레시피를 해독하고 싶다는 기분. 탐욕스런 마음이 깃들었다.
하지만 정욱은 애써 그 레시피로부터 시선을 거뒀다.
나갈 채비를 마친 시간은 오후 12시 반. 어제 탈진한 채 새벽 4시경에 쓰러져 잠든 것을 생각해 보면 그리 긴 수면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신은 말끔했다.
또한 몸도 조금 가벼워진 기분이다.
정욱은 어제의 그 황홀한 낙원을 기억한다.
비록 실체가 없는 허구일지라도 자신이 만들어 낸 환영. 주변을 바꾸는 거대한 환영. 한 단계 더 나아간 깨달음이 정욱의 신체와 정신을 강화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의 환영술은 점점 신이 본래 가진 궁극의 환영술과 닮아 가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능력자들이 말하는 ‘능력의 강화’였다. 능력의 이해가 깊어지고 강력하게 그 능력을 다룰 수 있게 될수록 신이 원래 가진 ‘완벽한’ 능력으로 수렴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

정욱은 신발을 신고 대문을 열었는데 햇빛을 가리고 누군가의 그림자가 길게 뻗어 왔다.
정욱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여어.”
그 그림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하연이었다.
하연은 3일 전 일본으로 떠나기 전과 다름없는 복장으로 나타났다.
다른 점이 있다면 왠지 모르게 그의 분위기가 바뀌어 있다는 것이다.
특유의 강하고 두터운 기운이 사라져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에 검은 기미가 내려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안색도 창백하고 생기가 떨어져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하연의 날카롭고 강력한 기운에 정욱은 그가 근처에 오기도 전에 그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것이었다.
정욱은 일본에 간 뒤로 연락도 없이 나타난 그를 보고 놀랐다.
“어? 형. 오셨어요?”
그러나 문득 하연과 마주치자 그가 부탁했던 일이 생각났다.
카챤터스에 가서 아티팩트를 구해 전투력을 높이라는 것. 그리고 도르힘의 능력자들을 살펴보라는 것이었다.
정욱은 아티팩트는 성공적으로 구했지만 도르힘의 능력자의 동태는 살펴보지 못했다.
그와 결투를 벌인 늑대 인간이 도르힘의 능력자라는 것을 정욱이 알아챘을 리가 없었다.
하연은 약간 당황한 정욱의 기색을 눈치챘는지 기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지금 어디 가는 거냐?”
“고향에 좀 가려고요. 어머니가 사고를 당하셨다고 하셔서.”
“그래?”
‘어머니’란 단어가 나오자 순식간에 하연의 표정이 날카롭게 변했다.
미묘하게 짓고 있던 웃음기도 없앤 채로 정욱을 노려보았다.
왠지 모를 그의 바뀐 분위기에 정욱은 압도되어 갔다.
정욱은 자신이 말한 ‘어머니’란 말과 하연은 왜인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하연에게 어머니라는 말을 꺼낸 것이 실수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연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도르힘의 능력자들에 대해 알아본 건 있어?”
“아니, 그게 아직.”
“그래? 그렇다면 지금 당장 나랑 같이 가자.”
하연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져 갔다.
그의 표정을 마주하는 정욱은 마치 큰 실수를 범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아니, 그가 맡긴 일을 못했으니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은 당연한 건가? 아니었다. 자신이 알기로 하연은 좋은 형 같은 존재였고 실수 가지고 이렇듯 날카로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사람이 아니다.
상하관계가 아니란 거다.
변했다.
처음 본 순간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하연의 속마음 어딘가가 뒤틀려 있었다.
정욱이 대답했다.
“지금은…… 어머니에게 가 봐야 돼요.”
정욱의 말에 하연의 입꼬리가 피식하고 올라갔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네가 지금 어느 상황에 있다고 생각하냐?”
“…….”
“어머니? 어머니란 존재가 중요할 것 같아? 넌 지금 능력자들의 순리를 역행하고 있어. 네가 행동을 지체해서 우리의 승리에 피해가 가게 생겼어. 우리가 내기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모두 사라지는 거야. 어머니? 웃기는 군. 모든 게 사라져!”
“…….”
“왜 갑자기 이러느냐 싶은 거냐? 너야말로 왜 이러는 거지? 잘 생각해 봐. 정말로 능력자들의 배를 후벼 파고 싶은 그런 분노가 느껴지지 않는 거냐? 승리에 대한 갈망이 정말로 없는 거야? 최후의 존재가 되고 싶은 그런 맘이 없는 거냐?”
정욱은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일순간 짜증이 밀려왔다.
정아의 전화를 받고 순식간에 정신이 들어 집을 나섰는데 난데없이 하연이 도착해서는 자신에게 눈을 부라린다.
하연이 무엇 때문에 이리 배알이 꼬였는지 몰라도 자신에게 이렇게 대해서는 안 되는 관계였다.
내기에 처음 발을 들인 요 한 달 동안 자신을 챙겨 주는 좋은 형이었고 자신과 같은 편인 유일한 능력자였다. 그런데 왜 그가 자신에게 별안간 이런 말을 해 대는 걸까.
하연의 말은 이어졌다.
점점 그의 언성이 높아져 갔다.
흥분하고 있었다.
“너처럼 그렇게 물러 터져서는 아무것도 못해. 승리는커녕 얼마 못 가서 정체도 모를 능력자들에게 목덜미를 잡아 뜯기겠지.”
이젠 정욱도 하연을 말없이 노려보았다.
그런 정욱의 시선을 느끼고 하연은 더욱 눈을 부라렸다.
“그런 눈을 짓는 거냐? 나한테? 너 설마 최후의 승리에도 피가 끓어오르지 않는 거냐?”
승리. 그것은 내기에서 최후의 존재로 남아 신들에게 구원 받는 것을 말한다.
모든 능력자들은 그것을 원하고 그것을 위해 서로 싸운다. 궁극적으로 승리를 위해 강해지고 능력자들과 싸워가는 것이다.
그러나 정욱에겐 그 승리라는 갈망조차 그리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