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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세계 1권(22화)
7. 환영술의 진수(2)
마지막 남았던 주황 구슬까지 정욱은 목구멍으로 넘겼다.
목에 닿는 순간 녹아 흡수되는 그 느낌이 꼭 잘 녹은 초콜릿을 삼키는 느낌이었다.
잠이 오고 정신이 피로해지면 정욱은 구슬을 하나하나 삼켜 갔다.
구슬을 삼킬 때마다 머릿속이 정리되는 기분이었고 피로도도 사라져 갔다.
레시피는 거의 분석이 끝났지만 그것을 실체화를 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완전한 것만 같았던 구성에서 아주 중요한 연결고리 두세 개가 빠져 있었다.
‘다른 레시피를 뒤져 보면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카챤터스에 있었던 수많은 레시피들이 생각났다.
그것들을 모두 뒤져 볼 수 있다면 레시피만으로 환영을 구체화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가능하다면 카챤터스의 수많은 아티팩트들을 환영으로나마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집 안에 있는 가능한 모든 것들을 실체화 한 후에야 정욱은 실체화의 능력이 익숙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정욱은 밖으로 나섰다.
시간은 새벽 4시가 다 된 아직은 어둑한 시간이었다.
새벽바람이 쌀쌀했다.
주황 구슬을 삼킨 효과로 다시 머리가 개운해진 정욱은 잠시 주변의 환경에 집중했다.
‘느껴 보자!’
팔찌의 능력으로 강화된 환영의 능력에서 정욱은 한 가지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다.
자신이 가진 환영술을 되새겨 볼 때 상대방의 눈을 속이는 환영을 소환하는 것에서부터 실체를 부여하여 당분간이나마 ‘존재’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게다가 실체화에 필요한 분석의 능력까지 활성화 되어 가고 있었다.
때문에 정욱이 찾은 가능성이란 것은 주변 환경의 모든 것을 인식하고 조절해 나갈 수 있다면 상대방을 완전히 속여 혼란케 하는 환영 또한 부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정욱은 골목 모퉁이 벽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음.’
역시나 순식간에 벽의 구성이 정욱의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실체가 있는 벽의 환영이야 전에도 실현이 가능했지만 이렇듯 구성 입자들을 머릿속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되자 그 형태가 더욱 견고해졌다.
벽을 느끼던 손을 떼고 이번엔 허공에 조용히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공간 자체를 느껴 볼 작정이었다.
주변을 바꾸어 상대방을 완벽히 현혹시킬 환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야말로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른손에서 공기가 머물고 새벽의 조용한 바람이 머무는 것이 느껴졌다.
찌릿한 느낌과 함께 기운이 손바닥으로 몰려들었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어떤 노랑색을 띤 빛이 손바닥 아래로 모여드는 것이 느껴진다.
바람이 그것을 건드리고 갈 때마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상징들이 스쳐 지나갔다.
정욱은 더욱 정신을 집중했다.
손바닥의 노랑 빛이 이제 허공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마치 노랑 빛은 눈이 천천히 뜨이는 것처럼 세상을 바라보며 기운을 퍼뜨려 나가고 있었다.
“으으.”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주변 상황에 대한 인식이 그려졌다. 그것들은 순식간에 수많은 상징들로 분해되고 다시 합쳐졌다.
정욱은 그 상징들을 자신의 의지대로 이리저리 섞어 보았다.
자신이 상상하는 세상으로 그대로 주변을 가꾸어 나갔다.
그리고……!
정욱은 슬며시 눈을 떴다.
‘이, 이런!’
어두운 골목길은 더 이상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넓게 펼쳐진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낙원이었다.
수많은 사과나무가 달빛을 받으며 아름답게 심어져 있었다. 바위와 갈대들은 조화롭게 서로의 자리에 심어져 밤바람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낙원의 시발점에 정욱이 서 있었다.
낙원은 끝없이 펼쳐져 있어서 낙원의 끝으로 달려가면 당장이라도 달에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정욱은 순식간에 뒤바뀐 주변의 세상들에 감탄했다.
‘믿을 수 없어!’
정욱은 아직도 허공에 머물고 있는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그 오른 손바닥 밑에 사람의 ‘눈’을 상징하는 그림이 문신처럼 새겨진 채 노랑 빛을 뿜고 있었다.
전에 본 적 없었던 상징이었다.
‘손바닥 위에 상징이?’
그리고 그렇게 정욱이 잠깐 정신을 돌린 순간 단번에 낙원은 사라졌다.
어둑한 골목길이 정욱 앞에 다시 펼쳐졌다.
‘모든 것이 환영!’
정욱은 오른손을 꽉 주먹 쥐었다.
오른손에 있던 눈의 상징과 노란 빛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극심한 피로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점점 주변이 어두워져 가는 기분이었다.
정욱은 급히 골목에 손을 대고 몸을 기대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정욱은 새로이 얻은 이 깨달음에 기분이 좋았다.
자신의 능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 가고 있었다.
강해지는 것은 능력자들의 ‘본능’이다.
능력자들에게 있어서 강해진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신이 본래 가졌던 능력과 흡사하게 만들어 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신의 능력에 가까워질수록 그들은 강해지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정욱은 자신의 성취에 큰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몸을 이끌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새벽 4시가 조금 지난 시각.
정욱은 그대로 풀썩 쓰러져 깊은 잠이 들었다.
***
한 고등학교의 시험 시간이었다.
학생들이 숨을 죽이고 하나하나 자신이 외워 온 지식들을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선생님은 그런 학생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감독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 차분히 시험을 적어 내려가는 학생, 포기한 듯 냅다 엎드려 자는 학생, 힐끗힐끗 옆의 시험지로 눈길을 돌리는 학생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괘씸한 것은 컨닝하려는 녀석들보다 그냥 엎어져 잠을 청하는 녀석이었다.
선생은 성큼성큼 녀석에게로 다가갔다.
아예 교복 윗도리를 이불처럼 덮고 고개를 처박은 녀석이었다.
퍽!
선생은 엎드린 그의 등짝을 시원하게 갈겨 주었다.
그제야 녀석이 맞은 등을 문지르며 일어나 늘어진 하품을 한다.
“아, 이제부터 풀려고 했어요.”
일어난 학생은 자신 옆에 와 있는 선생을 슬쩍 째려본 후 필통에서 뭔가를 꺼낸다.
연필, 지우개, 컴퓨터용 사인펜, 그리고 거울이다.
선생이 인상을 찌푸렸다.
“거울? 시험 치는데 이 자식이 그건 뭐할라꼬?”
“아, 그냥 얼굴에 자국 났나 보려고요. 이제 시험 칠 게요. 조용히 해 주세요.”
“이 자슥…….”
선생은 학생의 머리에 꿀밤을 쥐어박곤 몸을 돌려 다시 교탁 앞자리로 돌아갔다.
자던 학생, 황찬기는 치워 둔 시험지를 자신 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그것을 유심히 보았다.
‘음……. 하나도 모르겠군.’
모르는 게 당연했다.
공부를 한 기억이 없다.
하지만 그는 여유 있게 꺼내 놓은 거울을 힐끔 쳐다보았다. 또 시선을 돌려 평소 반에서 성적이 좋던 친구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리고 그중 이제 막 시험을 다 풀고 마킹을 확인하는 한 명이 눈에 띄었다.
‘흠, 저 녀석 것이 좋겠군.’
찬기는 슬쩍 앞에 서 있던 선생의 시선을 살피고 별안간 숨을 꾹 참았다.
그러자 진귀한 일이 벌어졌다.
거울이 슬쩍 일렁이더니 어떤 영상이 펼쳐졌다.
‘후후.’
찬기는 미소를 지었다.
거울에 떠오른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 찍어 뒀던 학생의 시험지였다.
찬기가 원하는 시점에서 거울은 학생의 시험지를 비추었다. 그것을 베끼는 찬기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숨이 점점 차오르고 있었다.
일 년 전 일곱 신들 중 하나인 로딘으로부터 능력을 받은 이후로 찬기는 여러 가지 용도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곳을 거울로 비춰 주는 능력.
발동 조건은 거울에 준하는 반사물체였고 능력이 진행되는 동안 숨을 참는 것이었다.
능력자임에도 불구하고 찬기는 조용히 평범한 학생들 사이에 어울려 있었다.
저급한 혼돈들이 그를 찾아오기도 했지만 능력을 얻고 나서부터 강해진 신체적 능력으로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의 능력은 공격에 특화된 능력이 아니어서 그는 전투에 그것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다만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할 수 있어 자신을 노리는 능력자들을 경계할 수 있었다.
신들의 내기의 규칙은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세상에 참가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언젠가 공격계 능력자들에 쫓긴 뒤로 그들과 싸우고 싶다는 마음은 사라졌다.
그저 능력자들에게 들킬 일 없이 조용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능력과 함께 즐기며 살아가자는 신념만을 굳혀 갔다.
“푸하.”
이윽고 찬기의 숨이 차올라 그는 숨을 내뱉었고 거울에 떠올랐던 잔상은 사라졌다.
그의 시험지는 깨끗했지만 답안지만큼은 가득 차 있었다. 이제 의심을 받지 않도록 ‘데코레이션’ 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
철웅과 소연은 카챤터스의 맥델런을 찾아갔다.
하연에 대한 위치 정보를 구매할 생각이었다.
소연의 정보록에서 그의 정체를 알아냈으니 이제 맥델런이 그의 기운을 추적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소연의 얼굴은 왠지 모르게 굳어 있었다.
‘그의 위치가 탄로 나면 그 블랜더, 그와 철웅이 대면하게 되는 걸까?’
두려워서 철웅에게 블랜더와 하연의 관계를 말해 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블랜더가 강하다 한들 소연 자신이 보기에 일대 일 상황에서 철웅보다 강한 능력자는 없었다.
철웅은 야수계 능력자로서 빛을 뿜는 표범이었다.
그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표범의 가죽을 일순간 다이아몬드와 같은 성질로 만들어 주는 빛이었다.
그런 철웅에게 폭파계와 염력계 능력자는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연이 걱정하는 바는 따로 있었다.
그에게 적대감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두 번이나 도움을 받은 신세였다.
게다가 그의 악의 없는 표정과 행동이 자꾸만 소연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다른 신의 능력자에게 이렇게 두 번이나 목숨을 구원받고 보살핌을 받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왜 그랬을까?’
그도 마찬가지로 자신을 죽여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죽을 뻔했던 자신을 구해 주었다.
이유는 모른다.
생각이 이어지자 소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결국 죽여야만 하는 운명인 거야. 그가 멍청했던 거야!’
그러나 문득 그의 집에서 풍겨졌던 평온한 분위기가 떠올랐다.
왠지 마음이 따스해지게 만드는 기운이었다.
아늑한 왠지 모를 그리운 기운…….
이윽고 그들이 기다리던 맥델런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다시 찾아왔군.”
자신을 보며 미소를 짓는 맥델런을 보며 철웅은 하연에 대한 정보를 내밀었다.
“이자야.”
“으흠.”
맥델런은 철웅이 넘긴 정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 정도의 정보라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서 위치 정도는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맥델런의 눈에 광채가 어렸다.
“이자가 금기의 구슬을 사용했다는 자란 말인가?”
“그렇다. 위치를 알고 싶어. 구슬이 몇 개가 필요하지?”
“여덟 개만 주시게.”
맥델런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철웅은 구슬을 모아 둔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그 안을 세어 보았다.
정확히 여덟 개가 들어 있었다.
구슬을 맥델런에게 넘겨주려는 찰나 소연이 불쑥 끼어들었다.
“아직 잠깐만.”
철웅이 멈칫 그녀를 쳐다보았다.
소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 숨겼던 것이 있어.”
“뭐지?”
“네가 없을 때 도르힘의 능력자들에게 쫓겼었어.”
“뭐라고? 그 녀석들한테 찾아갔었던 거냐?”
“그래.”
그녀의 대답에 철웅의 눈빛이 번뜩이자 소연은 고개를 슬쩍 떨궜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본 맥델런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철웅이 말했다.
“혼자서 찾아가지 말라고 그랬건만. 그래서 그를 죽이지 못했나?”
“그래.”
“젠장.”
철웅이 묻는 의미는 간단한 것이었다.
상대 능력자에게 능력을 사용하게 되면 그 상대 능력자가 예언자 쪽일 경우에 그 능력은 추적이 가능하게 된다.
도르힘의 능력자들은 예언자를 중심으로 잘 뭉쳐 있기로 유명했다.
때문에 이 상태로 놔두면 소연의 목숨이 위태로웠다.
도르힘의 능력자들이 조만간 추적을 해 올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전에 소연과 철웅이 카챤터스를 찾아와서 하연으로부터 소연의 자취를 없앤 것도 그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철웅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맥델런을 돌아보았다.
“도르힘 능력자들의 추적을 지우고 싶다.”
“그것도 여덟 개라네.”
아무리 상황이 급하더라도 소연에게 딸린 능력자들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둘밖에 없는 상황에 혹시라도 도르힘의 능력자들이 달려든다면 상황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었다.
그런데 문득 철웅의 생각이 바뀌었다.
철웅은 맥델런에게 구슬 여덟 개가 담긴 주머니를 넘겨주다 말고 말을 덧붙였다.
“아니 추적을 지우는 게 아니라. 소연과 마주쳤다는 도르힘의 능력자. 그 녀석 위치를 알려 줘.”
“한바탕할 생각인가 보군. 그러지. 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