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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세계 1권(21화)
7. 환영술의 진수(1)


정욱은 왠지 모를 허전함에 그녀가 누웠던 침대에 몸을 파묻고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난 시간은 어느새 저녁 7시였다.
창밖으로 저녁 빛이 어둑어둑 비춰지고 있었다.
‘그냥 잠들어 버렸구나……. 하긴 어제 밤을 샜으니.’
그녀에게 집을 내어주고, 자신은 시내로 나가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 온 탓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조차 묻지 못한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그녀는 초록 구슬을 사용해서 거처로 이동했을 것이었다.
차라리 잘된 것이다.
초록 구슬이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그녀가 구슬을 사용하지 않고 집 밖으로 나갔다면 집이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
정욱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곧장 책상 앞에 앉았다.
원래는 어제 집에 도착하자마자 해야 했던 일이 있었는데, 그녀와 관련된 싸움에 휘말리게 되어 못했었다.
그것은 바로 레시피를 분석해 보는 일이었다.
정욱은 카챤터스에서 적어 온 레시피를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모두 다섯 개였다.
정신없이 적었음에도 그 세부 사항이 복잡해서 많은 정보를 캐지 못한 것이다.
‘흠.’
일단 레시피를 살펴보니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베낄 땐 몰랐는데 이건 도무지 정욱이 해석할 만한 수준의 기호들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인터넷에 쳐 봐도 나올 리 만무했다.
이것은 능력자의 세계에서 창조된 아티팩트였기 때문이었다.
정욱은 다섯 가지의 레시피를 한참 동안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뭔가 연결고리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정욱의 능력은 특히, 정신력을 많이 요구하는 능력인지라 그가 붉은 구슬을 섭취할 때마다 그의 정신적인 능력도 증가했다.
눈에 띄는 지능의 향상은 없었으나, 집중력에 있어선 두드러진 변화가 나타났다.
정욱의 눈이 다섯 개의 레시피를 수십 번 훑었다.
‘응? 이거 어쩌면…….’
뭔가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잘 살펴보니 그 레시피들을 구성하고 있는 기호들은 막무가내의 암호가 아니라 어떤 상징적인 문자 체계인 듯했다.
동그라미와 네모, 그리고 불과 물의 상징처럼 보이는 기호들이 난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마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간략한 이미지로 옮겨 낸 형상 같았다.
정욱은 공책을 꺼내어 그것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미지화 된 상징이라……. 그럼 그 이미지를 역추적하면 분석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어. 그러니까 이건 이거고, 저걸 다시 이렇게 집어넣으면…….’
잡생각 따윈 일절 피어오르지 않는 완벽한 몰입이었다.
노트를 정리하는 정욱의 손놀림이 정신없이 빨라졌다.
그때 정욱이 어깨를 풀기 위해 잠시 몸을 돌리자 옆에서 뭔가가 툭 하고 떨어졌다.
‘어? 맞아. 이게 있었지.’
그것은 다름 아닌 어제 풀어 놓았던 팔찌였다.
증강의 팔찌.
그것은 정욱의 능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켜 주는 아티팩트였다.
무려 12개의 노랑 구슬의 가치가 있는 최고급 아티팩트!
게다가 정욱의 능력은 이런 내부의 상태를 증강시키는 아티팩트에 더욱 상성이 잘 맞기도 했다.
정욱은 얼른 팔찌를 주워 들어 팔에 찼다.
‘더 많은 걸 생각하게 될 수도 있을 거야.’
그러자 정욱의 몸에서 또다시 청량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그 기운은 머릿속을 맑게 헤집고 다니며 뇌를 활성화시키기 시작했다.
“역시…….”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오는 변화였다.
이 팔찌를 차면 기운이 넘쳐흘러서 자신감이 가득해졌다. 정욱은 머릿속이 맑아진 느낌으로 다시 다섯 개의 레시피를 분석해 보았다.
확실히 아까는 잘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들에서 여러 가지 연결고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배가 된 집중력으로 계속해서 레시피를 분석해 나갔다.

어느덧 밤이 깊어져 시계는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욱은 머리를 싸매고 레시피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의 옆엔 빽빽한 A4 용지들이 난잡하게 널려 있었다.
‘도대체 이게 뭘 뜻하는지 모르겠어!’
레시피 분석에 어느 정도 성공한 듯했지만 계속해서 핵심적인 뭔가에 걸리는 느낌이었다.
대부분의 상징들은 이미지와 관련된 것이어서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했지만 몇 가지는 전혀 이미지를 떠올릴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후……. 완성된 아티팩트를 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때 문득 정욱의 머릿속에서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붉은 구슬을 아티팩트와 관련지을 수 있지 않을까?’
정욱은 서랍을 뒤져서 아껴 두었던 붉은 구슬 하나를 꺼내 들었다.
맑고 영롱한 붉은 빛의 구슬이 정욱의 손아귀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음, 어디 보자.’
역시나 눈으로 볼 때는 단서를 포착해 낼 수 없었다.
그런데 문득 구슬을 쥔 정욱의 손에서 뭔가 아찔한 기분이 든다.
증강의 팔찌를 착용할 때 샘솟았던 청량한 기운이 붉은 구슬을 든 오른손에 슬며시 모여들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정욱의 감각이 그쪽으로 몰렸다.
‘뭔가가…….’
정욱은 감각의 이끌림에 따라 정신을 맡겼다.
마치 환영술을 쓸 때와 비슷한 기운이었다. 그리고 그때 머릿속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이것은!’
구슬을 쥔 오른손에 환영의 능력이 발현되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더니 순식간에 어떤 상징 기호들이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그것은 낯익은 것들이었다.
바로 레시피에 쓰여 있는 것들과도 같은 이미지들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설마?’
정욱의 머릿속에서 펼쳐진 정보들은 순식간에 붉은 구슬의 형상으로 조립되어졌다.
그리고 다시 상징체계로 분해되고 다시 붉은 구슬로 합쳐지는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반복되고 있었다.
정욱은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그 이미지에 집중했다.
‘붉은 구슬의 분해도? 이것도 환영술의 능력인가?’
팔찌를 착용하지 않았을 땐 없었던 현상이 발현되고 있었다.
신들의 내기 조항에 따라 팔찌를 착용하자 정욱의 능력이 강화된 것이었다.
능력자의 능력은 강화될수록 신들이 원래 가졌던 능력과 닮아 간다.
정욱의 기운이 강력해질수록 환영술은 신들이 가진 본래 환영술의 능력과 같아져 가는 것이었다.
신들이 가진 환영술의 절정은 ‘이미’ 존재하는 모든 것을 복제하고 구성 원리에 따라 모든 허상을 만들어 내는 것.
정욱에게서 일어나는 현상도 점차 그 능력을 닮아 가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붉은 구슬이 완전하게 분석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집중해 보아도 머릿속에서 떠오른 분해도 속의 연결고리 몇 가지가 비어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의 힌트만으로도 천천히 머릿속에서 이어지는 구조를 파악해 보았다.
붉은 구슬의 분해도와 비교해 가며 레시피를 살피자 기호들이 완전히 이해되기 시작하는 듯했다.
‘이거였어!’
정욱의 머릿속에 다시 뭔가가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는 손에서 붉은 구슬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머릿속에서 반복되었던 구슬의 분해도가 사라졌다.
그는 옆의 책상에 손을 올리고 붉은 구슬의 분해도가 떠올랐을 때와 같이 기운을 운용했다.
‘아니!’
놀라운 일이었다.
머릿속에서 시각적 정보로 저장되었던 책상이 분해되며 그 구성 원리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정욱은 다시 책상에서 손을 떼고 자신이 입고 있는 옷에 손을 대어 보았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머릿속에서 사물이 이루고 있는 구조가 자동적으로 이해되고 구성되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정욱은 그것들을 말하거나 글로 써 보라면 할 수 없었지만 단지 환영으로는 구현이 가능할 것 같았다.
정욱은 망설임 없이 파악된 옷의 구조를 토대로 그것을 실체화했다.
슈욱.
순식간에 손아귀에 입고 있던 옷과 똑같은 옷이 생겨났다. 그러나 정욱이 감탄하며 집중력을 흩트리자 얼마 가지 않아 연기처럼 일렁거리며 사라져 버렸다.
‘정말 대단해.’
한껏 달아오른 정욱은 내려놓았던 붉은 구슬을 다시 집어 들었다.
머릿속에서 떠오른 분석을 토대로 구현화 한다!
하지만 붉은 구슬은 모양 그 자체는 실체화가 가능했지만 풍기는 기운으로 보아 그저 붉은 구슬의 모습만을 띈 평범한 구슬로 실체화가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 낸 환영만으로는 능력까지 발현할 순 없는 듯했다.
아까 끝내 떠오르지 않던 연결고리가 문제인 것 같았다.
‘음, 그 비어 있는 연결고리를 채운다면 아티팩트 자체의 능력도 구현이 가능할까? 지금은 1차적인 사물들은 모두 분석이 가능할지도 몰라.’
정욱은 그때부터 정신없이 집에 있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실체화 해 보기 시작했다.
칼, 망치, 야구 방망이 등 모든 물체들이 머릿속에서 분석되고 실체화가 가능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