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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세계 1권(20화)
6. 이유(3)


정욱은 막상 그녀의 얼굴을 보니, 어찌 말해야 그녀가 상황을 납득할 수 있을지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 그녀를 보고 나서 잠시 요동쳤던 그의 마음이 어느새 지금 와선 묘한 분홍빛을 띠는 듯했다.
그래서 일단은 고개를 돌려 죽을 만드는 데 전념하는 척했다.
이 집 안에 펼쳐진 결계가 그녀의 분노를 잠재운 것인지 왠지 그녀에게선 특유의 살기가 피어오르지 않았다.
때문에 정욱은 특별한 거리낌 없이 그녀에게 등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만으로 정욱은 그녀로부터의 위협을 무시할 수 있었다. 최소한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혹은 당연한 일인지. 자신의 뒤에 있을 그녀도 말이 없다.
이윽고 죽이 끓기 시작했고, 정성스레 썰었던 재료들도 알맞게 어우러져 익어 가고 있었다.
이젠 그녀에게 죽을 건네며 최대한 편안한 분위기로 대화를 이끈다면 뭔가 이 상황의 해소책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정욱은 죽을 한 국자 퍼 담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날카로운 칼이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
순간 정욱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녀의 눈초리가 자신을 노리는 칼끝처럼 날카롭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만약 하연이었다면 그의 이성적인 잣대로, 망설임 없이 상대를 베어 갔을 것이었다.
아마 그녀도 이 묘한 중립 지대 안의 분위기에 이질감을 느꼈기에 행동을 머뭇거리고 있는 것이리라.
정욱은 말없이 자신을 노리고 있는 칼끝, 아니, 그 너머의 그녀의 시선을 맞받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뭔가 방어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녀의 눈빛에서 자신을 찌를 생각이 없음을 읽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욱이 입을 열었다.
“저 경계하시는 거라면, 지금은 안 그러셔도 됩니다. 이곳은, 그러니까 이곳은 안전해요.”
소연이 말을 받았다.
“원하는 게 뭐지?”
“원하는 건 없어요. 다만, 그러니까 어제 당신이 다쳤었잖아요? 그래서 휴식이 필요했잖아요? 그것뿐입니다. 다른 건 없어요.”
그런 건가 하고 소연은 생각했다.
이것은 오히려 자신이 백번 감사해야 할 일이 아닌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고, 기력을 회복시켜 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칼끝은 여전히 정욱을 날카롭게 겨냥했다. 이 본능적 분노를 잠재우는 환경에서 생각해 보니 납득할 만한 상황이었다.
이제는 그저 두려운 것이었다.
이 호의 뒤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를 역겨운 배반이.
그녀가 정욱에 대한 경계를 늦춘다고 해서, 정욱도 그녀를 진정 보살펴 줄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지금 자신에게 주려는 그 죽에 극독을 탔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거라면 왜 자신이 자고 있을 때 해치우지 않았나.
도대체 왜?
다시 정욱이 말했다.
“정말, 그뿐입니다. 이곳은…… 안전해요.”
소연의 칼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러니까 이 죽이라도 드시면서……. 이거 보기보다 그래도 꽤.”
“듣기 싫다.”
소연의 냉랭한 목소리가 정욱의 말을 날카롭게 잘랐다.
그녀는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어떤 행동이 옳은 것인지 모를, 이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만 싶었다.
그녀가 받아들이기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이 너무 어려웠던 것이다.
소연은 시선을 돌려, 정욱이 소파 위에 꺼내 놓은 초록 구슬들 중 하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중 하나가 허공에 둥둥 떴다.
소연이 말했다.
“지금은…… 그냥 가겠어.”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정욱의 초록 구슬을 들어 올렸다는 것은 꽤나 커다란 도발이었다.
언제라도 시동어를 외쳐, 이 장소를 빠져나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정욱의 눈치를 살폈다.
블랜더의 능력이라면, 그녀를 지금 제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초록 구슬 하나가 소연에게 사로잡힌 것을 보고도 정욱은 그녀를 경계하지 않았다.
그저 떨떠름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을 뿐이었다.
“좋아요. 어쩔 수 없지요. 하지만 다음에 만나게 된다면.”
“샤크툼!”
“헐.”
정욱의 말을 자르고 순식간에 그녀의 신형이 시동어와 함께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더니 이내 픽 하고 사라져 버렸다.
동시에 정욱을 노리던 그녀의 칼은 바닥에 털썩 하고 떨어져 버렸다.
“뭐야, 간 거야?”
정욱은 김이 모락모락 풍기는 죽을 들고 한동안 멈춰 서 있었다. 그리고 이내 다시 그 죽을 도마 위에 내려놓았다.
정욱의 방문은 활짝 열려 있어서, 그녀가 누웠던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와 특별한 뭔가가 있던 것도 아니었는데, 왠지 마음 한 켠이 빈 기분이 들었다.
‘간 건가 뭐, 그래 차라리 잘됐어.’
시간을 더 끌다가, 혹여 하연이 자신의 집에 찾아온다면, 그녀는 무사치 못했을 것이다.
하연은 냉혹해서, 자신과 다른 신의 능력자들을 봐주는 법이 없었다.
굳이 본능이 아니더라도,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잡고 그으라면 그을 수 있을 사람이었다.
‘더 머물렀다면 위험했을지도 모르지. 나나, 그녀나.’
정욱은 푹 퍼 담았던 죽을 다시 냄비에 부어넣고, 자신의 방으로 갔다.
그리고 지친 듯 그 침대에 몸을 뉘었다.

***

번개의 능력자가 바르사르의 능력자임을 확인한 다음 날 철웅은 카챤터스에 와 있었다.
그리고 앞엔 정보상인인 맥델런이 마주하고 있었다.
“금기의 구슬이라. 검은 구슬을 말하는군.”
“그것이 아직 존재했었나?”
“존재하다마다. 인간이 만들 물건은 아닌지라 이곳엔 없겠지만, 신의 영역엔 당연히 존재하고 있지.”
“그 말인즉 이 세상에선 구할 수 없다는 말이군. 신의 영역이라…….”
철웅은 ‘흠’ 하는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신의 영역이라 함은, 신들의 내기가 이 세상에서 실현되면서 질서가 뭉개져서 생긴 어떤 다른 공간을 말했다.
혼돈 또한 질서가 붕괴되어 생긴 존재인지라 그 탄생 배경이 비슷했다.
그 공간은 신의 힘이 이 세상보다 더욱 강하게 미치는 공간이었다.
때문에 그곳에선 인간의 능력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수많은 아티팩트들과, 강력한 혼돈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아니 보통의 능력자들에겐 그렇게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 가 보았다는 능력자는 현재로선 발견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런 능력자가 발견되지 않았을 뿐,
철웅이 본 검은 구슬은 먼 옛날 신의 영역을 넘나들었다던 어느 존재가 신의 영역으로부터 그것을 가져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만들었다는 한정된 개수의 아티팩트였다.
때문에 하연이 그 구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던 것이다.
철웅이 다시 맥델런에게 물었다.
“금기의 구슬의 사용으로 인해 갇힌 능력자는…… 찾을 가능성이 그렇게 희박한가?”
“희박하지. 그는 아마 수억 가지의 뒤틀린 차원에 틈새가 끼게 되었을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검은 구슬을 사용했다는 능력자를 나조차도 만나 본 적이 없으니, 그 구슬을 발동한 자는 구슬의 희생자가 어디에 갇혀지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
“구슬을 발동한 자가, 알지도 모른다고?”
“그냥 내 생각일세. 그런데.”
맥델런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지며 철웅을 쏘아보았다.
“금기의 구슬에 당한 이가 그토록 중요한 자인가?”
“음. 그렇다고 해 두지.”
맥델런이 피식 웃었다.
“나에게 숨기려 해 봤자, 결국 모든 정보들은 내 귀에 들리게 되어 있다네.”
“상관없어.”
“그렇군. 클클.”
철웅은 사라진 번개의 능력자를 찾는 것이 자신의 승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직감했다.
그는 강했다.
강력한 번개의 권능으로 서툴지만, 상대를 강하게 압박했다.
능력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던 그가 그 정도의 권능을 발휘하는 것이라면, 정말로 번개의 능력자가 능력의 절정에 오르게 된다면 이 내기의 판도는 자신의 쪽으로 기울 것이 분명했다.
물론 철웅이 번개의 능력자와 완전히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전제하였다.
이 엄청난 번개의 능력이 세상에 나타날 일은, 매우 드물었다.
때문에 그를 죽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적은 확률로 능력을 흡수할 수도 있었지만, 실패한다면 그 능력은 세상에서 지워지는 것이었다.
혹여 소문대로 최후의 일인만이 내기에서 살아남는다손 치더라도, 번개의 능력자를 곁에 둔다는 것은, 다른 경쟁자들을 굉장히 줄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철웅은 볼일을 다 본 후, 카챤터스에서 빠져나왔다.
이제 철웅의 행로는 정해졌다.
바로 금기의 구슬을 쓴 능력자를 추적하는 것이었다.
철웅은 카챤터스에서 빠져나온 후, 소연의 집으로 향했다. 정보상인에게 구슬의 시전자에 대한 정보를 듣기 전에 소연에 집에 있는 정보록을 뒤져 보려는 요량이었다.
소연이 가진 정보록은 과거, 예언자의 품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때 예언자가 가진 정보를 모조리 옮겨 적은 노트였다.
현재 활동하고 있고, 발견된 능력자의 대부분이 그 노트에 적혀 있었다.
금기의 구슬을 소유할 정도의 능력자라면 그 노트에 적혀 있을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 철웅의 생각이었다.
소연의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
급한 상황에 항상 대비하기 위해 전화기를 꺼 놓는 일은 좀처럼 드물었다.
철웅의 발걸음이 자못 빨라졌다.
카챤터스에서 소연의 집까지 거리는 얼마 멀지 않았다.
카챤터스의 출구를 소연 집 근처로 지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일본에 가기 전 도르힘의 능력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해 주었던 것이 생각났다.
소연의 성격이라면 그들에게 찾아가고도 남을 것이었는데,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철웅은 회색 빌라 앞에 서게 되었다.
건물의 문 앞에서 비밀번호를 찍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3층으로 올라간 뒤, 다시 비밀번호를 해제시켰다.
틱. 틱. 틱. 틱.
철크덕.
철웅은 조심스럽게 문을 잡아당겼다.
인기척이 없었다.
거실의 불도 꺼져 있었다.
철웅의 발이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자리에 멈춰 섰다.
‘흠.’
누군가가 집 안에 침입했다거나, 그녀가 집에 없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기운을 느껴 봤을 때 방 안에 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철웅이 들어가길 머뭇거리는 것은 그녀의 기분이 우울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철웅은 번호키 누르는 소리를 들었을 소연이 마음을 가다듬고 밖으로 나오길 잠시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실 안쪽의 방문이 열리며 소연이 나왔다.
초췌한 얼굴이었다.
게다가 집에서 입기엔 불편해 보이는 외출복 차림이었다. 철웅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냥 묻지 마. 아무것도.”
소연은 거실 불을 켜고, 냉장고로 향했다. 그리고 물을 꺼내어 컵에 따른 뒤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그녀의 목을 쓸고 내려가자, 조금씩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이었다.
“내가 없을 때 특히 조심하라 했건만.”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소연이 지친다는 듯 대답하자, 철웅도 더 이상 묻진 않았다.
철웅은 그녀의 주변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묻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소연도 철웅이 그것을 느끼고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소연은 묵묵히 철웅에게 의자를 빼내어 자리를 내어 주었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의자를 꺼내 마주 앉았다.
소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일본에 조사는 벌써 마치고 온 거야?”
“그래. 그런데 복잡한 일 한 가지가 생겨 버렸어.”
철웅은 소연의 일을 듣는 것은 다음으로 미뤄 두고, 일본에서 있었던 일을 소연에게 말해 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소연이 말했다.
“그래서, 금지의 구슬 발동자를 찾는다면, 번개의 능력자를 구해 낼 수 있다는 거야?”
“확실한 건 아니야. 맥델런의 추측일 뿐이지. 하지만 그것 말고는 지금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만약 바르사르 예언자 쪽 능력자들이 뭔가 눈치채고, 방법을 강구한다면 그들이 우리보다 번개의 능력자를 빨리 발견해 낼 수도 있어. 번개의 능력자는 그만큼 강력했으니까, 예언자 측보다 먼저 그를 찾아내어 회유하지 않으면 안 돼. 적으로 돌리게 된다면, 아주 일이 힘들어질 테지.”
“우리나 예언자 쪽이나 번개의 능력자를 영원히 발견해 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거네?”
“그럴 수도. 하지만 가능성 있는 기회를 놓칠 순 없지.”
“그래, 아무튼 할 수 있는 것은 해 봐야 하니까. 그런데 금지의 구슬 발동자를 찾는다고 해도, 그가 순순히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할까?”
“일단 포획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입을 열게 만들어야지. 그의 정체만 알게 된다면 일은 쉬워질 거야. 금지의 구슬의 발동 조건은 시전자 능력의 8할을 봉인하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어. 그렇다면, 그는 지금 능력을 거의 잃은 거나 다름없어. 강력하긴 했지만 지금 그의 능력을 가늠해 볼 때, 우리의 추적을 피하진 못할 거야.”
철웅의 말을 다 들은 소연은 방 안 깊숙이 숨겨 놓았던 정보록을 꺼내 들고 왔다. 그리고 철웅의 말에 따라 그에 대한 정보를 하나하나 추적해 나갔다.
몇 장을 페이지를 넘기던 중 문득 소연이 멈칫하며 펼쳐진 페이지의 정보를 주의 깊게 훑었다.
‘이자는!’
페이지에 나타난 능력자는 철웅이 말해 준 정보에 의해 추적된 자였다.
그런데 그는 다름 아닌 자신이 블랜더인 정욱과 처음 만났을 때 나타났던 강력한 기운의 능력자였던 것이다.
철웅도 소연이 펼친 페이지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사진과 간략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흠, 역시 정보록에 기록이 되어 있었군. 이자가 맞아. 라힌델의 능력자라……. 불의 능력만 강조되어 있군. 그림자 능력은 숨기고 활동했던 거겠지.”
정보록을 건네받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철웅을 앞에 두고, 소연의 얼굴이 굳어 갔다.
왠지 겨우 안정될 뻔했던 마음이 다시 복잡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