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그림자 세계 1권(19화)
6. 이유(2)


철웅은 속박에서 풀려나자마자, 재빨리 쇼우이에게 날아가는 그것을 막으려 몸을 날렸다.
그러나 크게 도약했던 철웅의 앞발이 할퀸 것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었다.
하연이 던진 뭔가에 쇼우이의 몸이 닿은 순간, 쇼우이의 형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쇼우이의 몸이 사라지자, 하연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바닥에 쇼우이가 소중하게 쥐고 있던 텟츠의 인형이 툭 하고 떨어졌다.
간발의 차로 하연이 던진 물건을 상쇄하지 못했던 철웅이 주저앉은 하연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서서히, 철웅의 형체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형체를 바꾸었다.
쇼우이가 있던 자리엔, 애초부터 아무도 없었던 듯 적막함만이 감돌았다.
철웅이 말했다.
“어떻게 그걸 가지고 있었지?”
“클클, 이 세상에 마지막 하나 남았던 것을 방금 사용했다고 보아도 좋아……. 낄낄.”
하연은 실성한 사람처럼, 바닥에 쭈그려 낄낄 웃었다. 그의 온몸에 힘이 다 빠져나간 듯했다.
철웅은 그런 그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그걸 쓸 각오로 일본에 왔던 것인가?”
“아니. 전혀. 크윽. 이건 전혀 내 예상 밖의 일들이었지…….”
“흠 너의 능력자로서의 역할도 이것으로 끝이겠군. 그 구슬의 발동 조건은 네 능력의 8할을 봉인한다.”
“8할이라…… 과연 그럴까? 클클.”
하연은 다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초록 구슬을 꺼내었다.
철웅은 그것을 보고서도, 하연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동어와 함께 하연의 몸이 일렁거리며 사라져 버렸다.
하늘에 먹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다.
불덩이가 사라지고, 그림자들이 온전히 자리에 돌아갔다.
쇼우이의 인형만이 고요하게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가운데서 철웅은 말없이 서 있었다.
‘그 금기의 구슬을 사용할 줄이야……. 그것은 자신의 능력을 대가로 상대를 영원한 차원의 틈새에 가두는 것. 복잡하게 됐군…….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사라진 번개의 능력자를 반드시 찾아야만 해.’

***

다음 날 아침, 정욱은 집에 돌아왔다.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그녀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듯했다. 방문을 열어 볼까 했지만, 그러기보단 냉장고 문을 열어 보았다.
정욱은 잠시 냉장고 안을 들여다본 후에, 이것저것 야채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
죽을 끓이기로 했다.
‘날 죽이려 들까?’
묵묵히 불을 올리고, 밥을 안쳤지만 정욱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상황을 생각해 볼수록 그녀와 정욱의 거리는 멀어져만 갔다.
정욱은 혼돈을 찾아 죽일 때의 통쾌함과 녀석들을 떠올렸을 때 피어오르는 분노를 떠올려 보았다.
‘그녀가 날 볼 때도 그런 기분일까.’
말로는 표현 안 되는 증오. 갈증과도 같은 살해 욕구.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카챤터스의 로비를 떠올렸다.
수많은 능력자들이 어울려 자신들이 이야기를 주고받던 그 모습이 생생했다.
‘결계의 기운은 안전해.’
정욱의 작은 칼이 묵묵히 당근을 썰었다.
설사, 그녀가 자신을 공격한다고 하더라도 순순히 당하기만은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전후의 상황은 모르더라도, 정욱은 그녀가 죽을힘을 다해 도망쳐 왔던 상대를 제압하고, 그녀를 구했다.
정욱이 인식하기에 그녀는 약자였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녀를 구했고, 이번에도 구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정말 정욱보다 약할 것이란 보장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를 위해 침대를 내어주고 죽을 쑤어 주는 것은, 정욱은 인간적으로 그녀를 대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왠지 그녀에게 마음이 끌렸고, 첫눈에 아름다운 그녀를 알아 가고 싶었다.
그녀를 해할 수 없는 상황과, 그녀를 아름답다고 느끼는 본능이 정욱의 행동을 결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

소연은 밖에서 들려오는 칼질 소리에 눈을 번뜩 떴다.
커튼에 여과된 햇볕이 흐릿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아침인 듯싶었지만 어둑한 방 안이 자신의 피로를 풀어 주고 있었다.
그녀는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이곳이 자신이 전혀 와 본 적이 없는 낯선 장소라는 것을 깨닫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어떻게 된 거지?’
그녀는 침착하게 어제 일을 떠올려 보았다.
도르힘의 능력자들을 지켜보러 갔다가, 3명의 능력자들에게 쫓겼다.
그중 한 명의 능력자가 자신을 끝까지 쫓아왔고, 그녀는 막다른 공사장에서 능력이 고갈되어 쓰러졌다. 그리고 쓰러지기 직전.
‘블랜더!’
그랬다. 가장 조심해야 할 상대인 블랜더가 자신의 자취를 쫓아서 나타난 것이었다.
게다가 그런 위급한 상황에 말이다.
늑대 인간은 블랜더에게 시비를 걸었고, 그녀가 쓰러지기 직전, 블랜더는 늑대 인간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이 그녀가 본 마지막이었다.
‘그럼 여긴 어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녀가 블랜더로 인식한 정욱이 그녀를 엎고 이리로 데려왔을 줄은 상상도 못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가지런히 덮여 있는 이불 하며, 닦여 있는 얼굴 하며, 설사 자신이 납치당했다면 이런 대접은 받지 못했을 것이었다.
제압당한 능력자들은 대개 단번에 죽여지거나, 동료들의 행방을 알아내려는 납치자의 고문을 받게 된다.
그녀는 정신을 차려 상황을 분석해 보려 애썼다.
무언가 끓는 소리와, 도마 튕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리?’
평범한 가정집 같았다.
그녀는 더욱 정신을 집중해 보았다.
그러자, 자신과 이질적인 기운이 밖에서 느껴졌다.
능력자였다.
그리고 이 기운은, 그녀에게는 아주 익숙한, 그리고 공포스런 블랜더의 기운이었다.
‘역시 그가!’
그렇다면 늑대 인간은 블랜더가 처리한 것인가. 소연은 눈을 꾹 감았다.
철웅의 말을 진작에 들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다.
무슨 연유인진 몰라도, 블랜더가 자신의 거처에 소연을 데려와 보살펴 준 꼴이었다.
‘나를 보살펴? 왜?’
소연의 머리가 복잡해져 갔다.
그런데 문득 스치듯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아주 모순되는 느낌이었다.
밖에 있는 블랜더를 느꼈음에도, 그에 대한 분노가 피어오르지 않는다.
그러기보다는 그가 하고 있는 요리가 어떤 것인지. 배고픈 자신에게 그것을 주진 않을 것인지…… 하는 평범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가 위협적이라거나 그를 공격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마치 이곳의 분위기는…….
‘카챤터스?’
카챤터스의 왁자지껄하지만 편안한 로비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소연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어찌 되었든, 그는 자신이 이 방 안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고, 어찌 됐든 그를 마주해야 했다.
그녀의 성격에, 이렇듯 답답하게 누워서 눈치를 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끼이익.
조심스럽게 돌린 문고리가 되레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녹이 쓸었었나 보다.
문을 열자마자 무언가를 ‘요리’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쳐다본다.
블랜더다.
“일어났어요?”
밝게 웃는 그의 모습이 싫지가 않다.
왜일까. 왜 그에게서 공포심이나, 증오가 피어오르지 않을까. 왜 다행이라고 느껴지는 것일까.
정욱은 소연이 갑자기 문을 열고 나오자,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요리가 집중했다. 그리고 한껏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무리 날 죽이고 싶어 해도, 웃는 얼굴에 무턱대고 칼질은 안 하겠지.’
정욱의 눈에 소연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주 숙면을 취한 듯 그녀의 머리가 헝클어져 있다.
커다란 그녀의 눈이 의아한 듯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고, 정욱은 그녀에게 ‘설명’을 해 줘야 함을 알 수 있었다.
“아, 몸은 어떠세요? 지금 죽 좀 끓이고 있는데 잠시만 기다리세요.”
소연은 정욱의 이런 태도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 그를 만났을 때도, 이렇듯 순박한 모습이었다.
자신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던 느낌. 강력한 그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해하려 하지 않았던 모습. 왜 이런 생각들이 이제야 떠오르는 것일까.
소연이 말했다.
“왜 내가 여기 있는 거지?”
그녀의 목소리는 성격을 대변하듯 거침이 없었다.
“아, 그러니까 그게…… 쓰러지셨었잖아요. 그 늑대 녀석 때문에.”
“그럼 그 녀석은?”
“아, 괜찮습니다. 그 녀석은 이제 없어요.”
정욱이 싱긋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소연은 그런 정욱의 웃음을 보며 경계심이 일었다.
‘역시…… 이 블랜더가 늑대 인간을 해치운 것이구나. 역시 강해.’
사뭇 블랜더의 강함을 다시 실감하게 된 소연이었다.

***

인간은 감정과 이성의 동물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그 말인즉슨, 인간은 감정적이고, 이성적이라는 것. 그리고 다시 말해, 감정에 얽매이는 동물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동물이란 것이다.
감정에 의해, 충동을 느끼고 이성적으로 판단한다.
여기 중립 지대 안의 정욱과 소연의 대치가 그랬다.
지금의 소연에겐, 언제나 느껴 왔던 정욱에 대한 불안감과, 압박감, 그리고 증오의 느낌이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성은 그에게 칼을 겨누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이곳이 중립 지대가 아니었다면, 그 관계는 반대가 되었을 것이다.
상대 능력자를 죽이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 테고, 동시에 이성적으로 사람을 죽여선 안 된다는 판단이 들어설 것이었기 때문이다.
소연과 정욱의 관계는 어려운 관계였다.
하기 싫어도 그를 제압해야만 하는 상황. ‘상대편 능력자의 증오’라는 본능적 공격 이유조차 사라진 이 중립지역 안에서, 소연은 갈등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안전한 듯 보이는 그의 등을 지금 찌를 것인가. 아니면 다음 기회로 미룰 것인가.
지금 그의 등을 찔러, 그를 제압할 수만 있다면 자신들의 승리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정도의 능력이 사라지고, 혹여라도 소연에게 그 능력이 흡수가 된다면, 그것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욕구가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욕구에 앞서서, 소연은 정욱이 풍기는 묘한 인간미를 느꼈고 동시에 그 인간미 뒤에 가려졌을 그의 능력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연은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정욱 몰래, 주머니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정욱은 어색한 인사를 건넨 후, 묵묵히 요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니, 아마 그런 척하고 있을 것이다.
소연이 느끼기에 정욱의 태도에선 이 상황을 어찌 해명해야 하나 싶은 민망함이 배여 있었다. 그래서 황급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그가 다시 말을 이으려 입을 열지도 모르겠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상관없을 듯했지만, 역시나 너무 이질적인 기분이다.
아무튼 이로써 상황을 대충 감 잡을 수 있었다.
블랜더. 그가 결국 자신을 지켜 주었다.
이게 무슨 꿍꿍이인진 모르겠지만, 자신을 따라오던 늑대 인간을 제압한 뒤, 거처로 데려와 심신을 달래 주었다.
그녀의 체력은 완전히 회복되어서, 이 상태라면 강한 단계의 염력도 실현이 가능할 듯했다.
이제 선택은 좁혀졌다.
어딘가 숨겨졌을 그의 꿍꿍이를 무시한 채, 이 호의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그를 기습할 것인가. 혹은 다음 기회를 기약한 후 떠날 것인가.
소연의 손에 들렸던 칼이 그녀가 손을 놓았음에도, 허공에 둥둥 떴다.
물체를 조종하는 염력술. 얼마 전의 그녀라면 얻지 못했을 단계의 염력술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앞에 있는 블랜더는 이 정도쯤은 가소롭다는 듯이 실현시킨다.
그녀의 칼을 허공으로 높이 떠올라, 정욱의 등을 겨냥했다. 그러나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사실 결정은 이미 내려진 것일런지도 몰랐다.
블랜더의 강한 능력을 알고 있는 소연. 그리고 이 이질적인 평온함. 끓어오르지 ‘않는’ 분노. 그것들은, 소연이 정욱을 공격해야만 한다는 이성적 판단의 실행을 방해하고 있었다.
어느새 보글보글 죽이 끓는 소리와 함께, 소연과 정욱의 묘한 긴장감은 현장을 잠식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