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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그 여자의 연애
1화
프롤로그
매미가 길게 우는 여름의 오후.
정연은 손으로 얼굴에 차양을 드리우고 걸음을 재촉한다. 하루 종일 거래처에서 자료를 정리하고 보고서를 수정하느라 뻣뻣해진 목을 돌린다. 어질할 정도로 따가운 여름 햇살은 오후가 되어 가도 그 기세가 접힐 줄을 모른다.
정연은 에어컨 바람으로 서늘해진 몸에 햇볕이라도 받아 두자 싶어 그냥 나온 자신을 속으로 나무란다. 흐느적거리며 걷다 눈에 보이는 커피숍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살짝 밀고 짤랑하는 종소리와 함께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반갑다. 성큼 큰 걸음으로 카운터 앞으로 간다.
“어서오세요.”
정연은 반갑게 인사하는 어린 알바생에게 눈인사를 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주세요. 사이즈 큰 걸로 주시고 마시고 갈게요.”
정연이 지갑을 찾는데 가방 안에서 울리는 진동에 휴대전화를 꺼낸다.
“어, 수진아. 나 이제 나왔어. 지금 윤성 앞에 커피숍. 여기 상호가?”
정연이 실내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앞에 점원이 눈치 빠르게 손으로 카운터 앞에 적힌 상호를 보라고 알려 준다. 정연은 가볍게 고맙다고 눈인사를 한다.
“숲. 어딘지 알지? 네가 이쪽으로 올 거지? 커피 한잔하고 있을게. 늦지 말고 와. 나 지금 너무 배고프고 기운 빠져.”
― 응, 살짝 눈치 봐서 조금 일찍 나가 볼게. 근데 밥은 다 보고 먹자. 배 볼록해서 드레스 입을 수 없잖아. 대신 맛있는 거 사 줄게.
“몰라. 일찍이나 와.”
정연은 주문을 하고 옆으로 비켜선다. 전화 통화를 마치고 마침 나온 커피를 들고 자리를 찾았다. 그다지 크지 않은 카페는 들어올 때와 다르게 이미 자리가 꽉 차 있었다. 정연은 쟁반을 들고 난감한 듯 실내를 두리번거렸다.
일회용 컵에 받아 왔으면 들고 나가기라도 할 텐데 유리잔에 담긴 커피를 들고 다시 컵을 바꿔야 하는지 잠시 망설였다. 그래야겠다고 몸을 돌린다. 바로 옆 테이블에서 누군가 일어선다. 자리를 비우나 싶어 반색하며 확인을 하는 정연의 얼굴이 살짝 굳는다.
“김정연 씨?”
“아, 안녕하세요?”
정연은 들고 있던 쟁반을 남자가 일어선 테이블에 놓고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오늘 들어갔다 나온 윤성기업의 박진우 팀장이다. 생각지도 않은 자리에서 본 거래처 상사에게 격을 갖춘 단정한 인사를 하는 정연을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받고 다시 앉는다.
정연은 자리를 비워 주려는 행동인 줄 알았다 살짝 무안스럽게 커피 쟁반을 다시 든다. 그런 정연을 보고 실내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상황을 짐작한 듯
“괜찮으시다면 여기 앉으세요.”
들었던 쟁반을 들고 잠깐 고민하던 정연이 그 말을 그냥 받아들인다.
“네, 고맙습니다.”
“뭘 고맙기까지야.”
박 팀장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보던 자료를 챙겨 가방에 넣고 의자에 기댄다. 어색하게 눈이 마주친다.
“우리 회사 들렀다가 가는 길인가요?”
“네. 팀장님 출장 중이라고 하셔서 창영 씨한테 일단 보고는 드렸어요. 추가 사항은 저에게 연락 주시면 됩니다. 아 지금 자리가 좀 그렇긴 하지만…….”
정연은 얼굴 본 김에 설명을 다시 해야 하나 싶어 주변을 한 번 살펴보다 노트북을 꺼내려고 한다. 그런 정연을 박 팀장이 살짝 짜증 섞인 표정으로 만류한다.
“저 좀 피곤해서요. 회사 들어가기 전에 커피나 한잔하려고 왔습니다. 일 이야기는 다음에 합시다. 창영 씨가 알아서 잘 처리했겠죠.”
정연은 눈치 없이 의욕만 앞선 사람이 되어 무안스러운 표정을 애써 숨긴다.
박 팀장은 팔짱을 끼고 그대로 몸을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피곤하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가 보다. 정연은 시원하게 마시던 아이스커피를 내려놓다 달가닥하는 얼음 소리가 그에게 신경이 쓰일까 싶어 혼자 덜컥한다.
다행히 눈을 감은 남자는 미동이 없다. 가만히 훔쳐보듯 얼굴을 쳐다보다 살짝 몸을 움직이는 그의 동작에 정연은 놀라 고개를 숙인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한참이 남아 있다. 오늘 회사 동료인 수진의 웨딩드레스를 함께 봐 주기로 했다. 윤성기업에서의 외근을 마치고 회사로 들어가 같이 나오자고 했던 원래의 약속은 수진이 너 들어오면 또 야근에 붙잡힌다며 적당히 밖에서 업무를 끝내기로 말을 맞췄다.
그래서 시간을 때운다고 들어온 커피숍에는 엉뚱하게 윤성기업의 박진우 팀장이 앉아 있다. 몇 번의 만남과 업무로 익힌 이름과 얼굴이 오늘에야 선명하게 들어온다.
시간은 더디게 흘러간다. 유리창 너머 여름 햇살의 거리는 거짓말 같다. 정연은 조심해서 커피를 마시며 맞은편 남자를 의식한다. 책이라도 볼까 생각하다 마침 오늘은 가방을 바꿔 들고 온지라 늘 두던 책도 없다.
어디 잡지라도 있나 싶어 둘러보는데 하필이면 이 남자의 옆에 잡지꽂이가 있다. 그걸 가져오기 위해서는 몸을 일으켜야 하고 그를 스치고 책을 꺼내 와야 한다.
피곤하다고 눈을 감은 남자의 고단한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가만가만 정연은 이 남자의 오수를 지켜 준다.
하루 종일 박 팀장의 회사에 들어가서 일을 했다. 원래 만나기로 했던 이 남자는 오늘 어느 나라에서 돌아오는 출장이라고 했었다. 그 설명에 그러냐고 최종 보고서는 박진우 팀장님의 메일로 보내겠다면서 돌아오시면 연락 달라고 전해 주기를 청했다.
연락을 해 줄 남자는 지금 정연의 맞은편에 앉아 고단한 일정의 끝을 달래고 있다.
정연은 잠든 남자의 얼굴을 보며 묘한 기분에 잠시 젖는다. 멈춰 가는 시간과 옆자리 테이블에서 소곤거리는 남의 이야기, 그리고 어색한 남자와 여자의 시간은 다른 듯 같은 듯 같이 흘러간다. 그렇게 정연이 조심하며 커피를 마시고 이제는 녹아 버린 커피 잔의 얼음이 물이 되었을 시간이 흐른다.
방울방울 맺힌 커피 잔의 물을 붓 삼아 테이블에 글씨를 쓴다. 조용한 동작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데 어느 사이 맞은편의 남자가 눈을 뜨고 고개 숙인 여자를 물끄러미 한참을 본다.
“정연아!”
반갑게 이름을 크게 부르는 소리에 정연이 고개를 든다. 그리고 남자의 몸짓도 이름이 불린 입구 쪽으로 향한다. 정연은 고개를 천천히 들며 함께 같은 방향으로 시선이 가는 남자를 의아한 듯 쳐다본다. 그러자 남자의 시선이 여자에게 와서 머문다.
언제 일어났는지?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이 남자가 먼저 반응하는지 정연은 찰나에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스친다. 눈이 마주친 두 남녀는 서로를 빤히 본다.
그리고 펑 하고 마법이 깨지듯 반갑게 다가오는 목소리에 둘은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 소리의 주인을 찾아간다.
“어, 박 팀장님? 어떻게 둘이 같이?”
살짝 놀란 수진이 먼저 박 팀장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네자 정연이 커피 잔을 챙기고 일어선다. 정연이 고마웠다는 인사를 눈으로 한다.
그 역시 일어나 가방을 챙기고 자리를 정리한다. 정연이 먼저 그의 잔을 챙긴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듯 손을 젓는 남자에게 정연은 어색한 듯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라는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휴대전화로 시계를 보며 먼저 문을 열고 나서는 수진의 뒤를 따른다. 그 뒤에 박 팀장은 한 박자 늦게 걸음을 옮기며 문을 밀고 나간다.
“무슨 일이야? 대체 박 팀장님이랑 저기 왜 같이 있는 거야?”
“자리가 없어서 그냥 같이 앉았어.”
“무슨 이야기 했어?”
“무슨 이야기 할 거나 있나? 피곤하다고 자더라. 그래서 나는 눈치 보며 커피 마셨다야. 혹시 박 팀장님 깰까 봐 웅크리고 마신다고 몸이 오그라드는 줄 알았어. 너 때문이니깐 밥 맛있는 거 사야 해.”
정연은 방금 어색하게 흘러가던 시간이 생각난 듯 몸을 쭉 펴며 옆의 수진에게 불편한 시간을 고자질한다. 그러다 순간 둘이 마주쳤던 그 눈빛이 생각나 문득 뒤를 돌아본다. 어색했던 그 남자의 눈빛과 알 수 없던 자신의 감정이 뒤섞인다.
그러나 뒤돌아본 그 자리에는 예상했던 대로 박 팀장은 사라지고 없다. 살짝 서운한 느낌에 정연은 왜 이러나 싶어 생각을 털어 내고 옆에서 수다를 늘어놓는 수진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1. 우리는 무슨 사이인가요?(1)
처음도 끝도 구분이 안 되는 사진 수십 장을 문서화해서 설명과 차이점을 채워 넣는 작업이다. 정연은 이러다 서류에 파묻혀 죽겠구나 싶을 즈음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잠깐 손을 놓았다. 뻑뻑한 눈을 비비려다 화장이 지워질까 봐 그러지도 못해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만 눌러 준다.
일주일이 넘어가는 야근이다.
일 년 동안 준비했던 중국 공장 업체 등록을 문서화하는 작업이다. 이 업무를 보느라 일주일 동안 점심도 굶고 여기에 매달렸다. 몇 번의 현지 출장, 다녀와서의 끝도 없는 보고서 작업, 그리고 상대 거래처의 승인 절차, 그때마다 긴장감이 머리 뒤 끝을 타고 발뒤축까지 내려가는 엄청난 스트레스는 그래도 체력 하나는 자신 있다는 말을 쏙 들어가게 했다.
자꾸만 같은 단락에서 나오는 오류에 정연은 키보드에서 손을 뗀다. 머그잔을 들고 이내 바닥이 보이는 커피에 오늘 대체 몇 잔인가 셈을 하다 관둔다.
제법 탄탄한 이 회사를 대학 졸업하고 입사해서 올해 서른이 되는 정연은 작년에 대리를 달았다. 바로 직속상관인 과장과 부장이 있지만 대한민국 직장인의 일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자잘한 서류 작성은 다 밑에 허드레 대리의 일이고 부장은 몇 번의 말로 수많은 서류를 폐기시키기도 하고, 어설픈 자료를 하루아침에 포장해서 윗선에 진상품처럼 올리기도 하니 말이다.
거기다 규모가 많이 크지 않은 중소기업이다 보니 부서 이름이 무색하게 여러 가지 걸쳐 있는 업무는 일이 한창 재밌기는 해도 버거운 것이 사실이었다. 정연이 소속된 이름만 근사한 해외영업지원 팀의 윤 과장은 일 년째 중국 공장에서 근무 중이다.
부장은 중국 공장과 회사를 먹여 살려 주는 더 큰 갑을 위해 발에 땀이 나게 뛰고 있다. 그러니 온갖 서류와 각종 프레젠테이션은 늘 정연의 몫이다. 낮에는 거래처 업무에 자리를 비우고, 오후에 들어와 시작하는 서류 작성 업무는 해가 떨어지고도 늦도록 사무실에서 혼자 머물게 했다. 그렇게 진행된 서류는 수천 번을 더 쳐다보지만 늘 불안하다.
정연의 성격 탓도 있겠지만, 갑과 을의 이해 당사자를 다 모셔 두고 오로지 서류로만 중국 현지 공장 상황과 한국에서의 업무의 연결성을 설명해야 한다. 하나의 제품이 나오기까지의 완벽해야 할 그 과정을 설명하는 일은 아직 대리란 직함을 단 정연에게는 큰 부담이다.
그리고 또 하나 정연이 점심까지 거르게 할 정도로 더 큰 부담감을 갖게 하고 있는 그 사람. 일 년 가까이 관계를 맺고 있는 그 사람.
혹시나 그 사람의 눈에 거슬릴까 자신으로 인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까 그 걱정의 양만큼이 바늘로 변해 정연의 온몸에 하나씩 박혀 가는 중이다. 이런저런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안줏거리가 되어 그녀와 그의 이름은 늘 이 회사에 맴돌고 있다. 정작 당사자들의 의지로 시작된 적이 없는 그들의 관계는 끊어지지도 않고 질기게도 이어 가고 있다.
1화
프롤로그
매미가 길게 우는 여름의 오후.
정연은 손으로 얼굴에 차양을 드리우고 걸음을 재촉한다. 하루 종일 거래처에서 자료를 정리하고 보고서를 수정하느라 뻣뻣해진 목을 돌린다. 어질할 정도로 따가운 여름 햇살은 오후가 되어 가도 그 기세가 접힐 줄을 모른다.
정연은 에어컨 바람으로 서늘해진 몸에 햇볕이라도 받아 두자 싶어 그냥 나온 자신을 속으로 나무란다. 흐느적거리며 걷다 눈에 보이는 커피숍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살짝 밀고 짤랑하는 종소리와 함께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반갑다. 성큼 큰 걸음으로 카운터 앞으로 간다.
“어서오세요.”
정연은 반갑게 인사하는 어린 알바생에게 눈인사를 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주세요. 사이즈 큰 걸로 주시고 마시고 갈게요.”
정연이 지갑을 찾는데 가방 안에서 울리는 진동에 휴대전화를 꺼낸다.
“어, 수진아. 나 이제 나왔어. 지금 윤성 앞에 커피숍. 여기 상호가?”
정연이 실내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앞에 점원이 눈치 빠르게 손으로 카운터 앞에 적힌 상호를 보라고 알려 준다. 정연은 가볍게 고맙다고 눈인사를 한다.
“숲. 어딘지 알지? 네가 이쪽으로 올 거지? 커피 한잔하고 있을게. 늦지 말고 와. 나 지금 너무 배고프고 기운 빠져.”
― 응, 살짝 눈치 봐서 조금 일찍 나가 볼게. 근데 밥은 다 보고 먹자. 배 볼록해서 드레스 입을 수 없잖아. 대신 맛있는 거 사 줄게.
“몰라. 일찍이나 와.”
정연은 주문을 하고 옆으로 비켜선다. 전화 통화를 마치고 마침 나온 커피를 들고 자리를 찾았다. 그다지 크지 않은 카페는 들어올 때와 다르게 이미 자리가 꽉 차 있었다. 정연은 쟁반을 들고 난감한 듯 실내를 두리번거렸다.
일회용 컵에 받아 왔으면 들고 나가기라도 할 텐데 유리잔에 담긴 커피를 들고 다시 컵을 바꿔야 하는지 잠시 망설였다. 그래야겠다고 몸을 돌린다. 바로 옆 테이블에서 누군가 일어선다. 자리를 비우나 싶어 반색하며 확인을 하는 정연의 얼굴이 살짝 굳는다.
“김정연 씨?”
“아, 안녕하세요?”
정연은 들고 있던 쟁반을 남자가 일어선 테이블에 놓고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오늘 들어갔다 나온 윤성기업의 박진우 팀장이다. 생각지도 않은 자리에서 본 거래처 상사에게 격을 갖춘 단정한 인사를 하는 정연을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받고 다시 앉는다.
정연은 자리를 비워 주려는 행동인 줄 알았다 살짝 무안스럽게 커피 쟁반을 다시 든다. 그런 정연을 보고 실내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상황을 짐작한 듯
“괜찮으시다면 여기 앉으세요.”
들었던 쟁반을 들고 잠깐 고민하던 정연이 그 말을 그냥 받아들인다.
“네, 고맙습니다.”
“뭘 고맙기까지야.”
박 팀장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보던 자료를 챙겨 가방에 넣고 의자에 기댄다. 어색하게 눈이 마주친다.
“우리 회사 들렀다가 가는 길인가요?”
“네. 팀장님 출장 중이라고 하셔서 창영 씨한테 일단 보고는 드렸어요. 추가 사항은 저에게 연락 주시면 됩니다. 아 지금 자리가 좀 그렇긴 하지만…….”
정연은 얼굴 본 김에 설명을 다시 해야 하나 싶어 주변을 한 번 살펴보다 노트북을 꺼내려고 한다. 그런 정연을 박 팀장이 살짝 짜증 섞인 표정으로 만류한다.
“저 좀 피곤해서요. 회사 들어가기 전에 커피나 한잔하려고 왔습니다. 일 이야기는 다음에 합시다. 창영 씨가 알아서 잘 처리했겠죠.”
정연은 눈치 없이 의욕만 앞선 사람이 되어 무안스러운 표정을 애써 숨긴다.
박 팀장은 팔짱을 끼고 그대로 몸을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피곤하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가 보다. 정연은 시원하게 마시던 아이스커피를 내려놓다 달가닥하는 얼음 소리가 그에게 신경이 쓰일까 싶어 혼자 덜컥한다.
다행히 눈을 감은 남자는 미동이 없다. 가만히 훔쳐보듯 얼굴을 쳐다보다 살짝 몸을 움직이는 그의 동작에 정연은 놀라 고개를 숙인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한참이 남아 있다. 오늘 회사 동료인 수진의 웨딩드레스를 함께 봐 주기로 했다. 윤성기업에서의 외근을 마치고 회사로 들어가 같이 나오자고 했던 원래의 약속은 수진이 너 들어오면 또 야근에 붙잡힌다며 적당히 밖에서 업무를 끝내기로 말을 맞췄다.
그래서 시간을 때운다고 들어온 커피숍에는 엉뚱하게 윤성기업의 박진우 팀장이 앉아 있다. 몇 번의 만남과 업무로 익힌 이름과 얼굴이 오늘에야 선명하게 들어온다.
시간은 더디게 흘러간다. 유리창 너머 여름 햇살의 거리는 거짓말 같다. 정연은 조심해서 커피를 마시며 맞은편 남자를 의식한다. 책이라도 볼까 생각하다 마침 오늘은 가방을 바꿔 들고 온지라 늘 두던 책도 없다.
어디 잡지라도 있나 싶어 둘러보는데 하필이면 이 남자의 옆에 잡지꽂이가 있다. 그걸 가져오기 위해서는 몸을 일으켜야 하고 그를 스치고 책을 꺼내 와야 한다.
피곤하다고 눈을 감은 남자의 고단한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가만가만 정연은 이 남자의 오수를 지켜 준다.
하루 종일 박 팀장의 회사에 들어가서 일을 했다. 원래 만나기로 했던 이 남자는 오늘 어느 나라에서 돌아오는 출장이라고 했었다. 그 설명에 그러냐고 최종 보고서는 박진우 팀장님의 메일로 보내겠다면서 돌아오시면 연락 달라고 전해 주기를 청했다.
연락을 해 줄 남자는 지금 정연의 맞은편에 앉아 고단한 일정의 끝을 달래고 있다.
정연은 잠든 남자의 얼굴을 보며 묘한 기분에 잠시 젖는다. 멈춰 가는 시간과 옆자리 테이블에서 소곤거리는 남의 이야기, 그리고 어색한 남자와 여자의 시간은 다른 듯 같은 듯 같이 흘러간다. 그렇게 정연이 조심하며 커피를 마시고 이제는 녹아 버린 커피 잔의 얼음이 물이 되었을 시간이 흐른다.
방울방울 맺힌 커피 잔의 물을 붓 삼아 테이블에 글씨를 쓴다. 조용한 동작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데 어느 사이 맞은편의 남자가 눈을 뜨고 고개 숙인 여자를 물끄러미 한참을 본다.
“정연아!”
반갑게 이름을 크게 부르는 소리에 정연이 고개를 든다. 그리고 남자의 몸짓도 이름이 불린 입구 쪽으로 향한다. 정연은 고개를 천천히 들며 함께 같은 방향으로 시선이 가는 남자를 의아한 듯 쳐다본다. 그러자 남자의 시선이 여자에게 와서 머문다.
언제 일어났는지?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이 남자가 먼저 반응하는지 정연은 찰나에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스친다. 눈이 마주친 두 남녀는 서로를 빤히 본다.
그리고 펑 하고 마법이 깨지듯 반갑게 다가오는 목소리에 둘은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 소리의 주인을 찾아간다.
“어, 박 팀장님? 어떻게 둘이 같이?”
살짝 놀란 수진이 먼저 박 팀장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네자 정연이 커피 잔을 챙기고 일어선다. 정연이 고마웠다는 인사를 눈으로 한다.
그 역시 일어나 가방을 챙기고 자리를 정리한다. 정연이 먼저 그의 잔을 챙긴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듯 손을 젓는 남자에게 정연은 어색한 듯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라는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휴대전화로 시계를 보며 먼저 문을 열고 나서는 수진의 뒤를 따른다. 그 뒤에 박 팀장은 한 박자 늦게 걸음을 옮기며 문을 밀고 나간다.
“무슨 일이야? 대체 박 팀장님이랑 저기 왜 같이 있는 거야?”
“자리가 없어서 그냥 같이 앉았어.”
“무슨 이야기 했어?”
“무슨 이야기 할 거나 있나? 피곤하다고 자더라. 그래서 나는 눈치 보며 커피 마셨다야. 혹시 박 팀장님 깰까 봐 웅크리고 마신다고 몸이 오그라드는 줄 알았어. 너 때문이니깐 밥 맛있는 거 사야 해.”
정연은 방금 어색하게 흘러가던 시간이 생각난 듯 몸을 쭉 펴며 옆의 수진에게 불편한 시간을 고자질한다. 그러다 순간 둘이 마주쳤던 그 눈빛이 생각나 문득 뒤를 돌아본다. 어색했던 그 남자의 눈빛과 알 수 없던 자신의 감정이 뒤섞인다.
그러나 뒤돌아본 그 자리에는 예상했던 대로 박 팀장은 사라지고 없다. 살짝 서운한 느낌에 정연은 왜 이러나 싶어 생각을 털어 내고 옆에서 수다를 늘어놓는 수진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1. 우리는 무슨 사이인가요?(1)
처음도 끝도 구분이 안 되는 사진 수십 장을 문서화해서 설명과 차이점을 채워 넣는 작업이다. 정연은 이러다 서류에 파묻혀 죽겠구나 싶을 즈음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잠깐 손을 놓았다. 뻑뻑한 눈을 비비려다 화장이 지워질까 봐 그러지도 못해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만 눌러 준다.
일주일이 넘어가는 야근이다.
일 년 동안 준비했던 중국 공장 업체 등록을 문서화하는 작업이다. 이 업무를 보느라 일주일 동안 점심도 굶고 여기에 매달렸다. 몇 번의 현지 출장, 다녀와서의 끝도 없는 보고서 작업, 그리고 상대 거래처의 승인 절차, 그때마다 긴장감이 머리 뒤 끝을 타고 발뒤축까지 내려가는 엄청난 스트레스는 그래도 체력 하나는 자신 있다는 말을 쏙 들어가게 했다.
자꾸만 같은 단락에서 나오는 오류에 정연은 키보드에서 손을 뗀다. 머그잔을 들고 이내 바닥이 보이는 커피에 오늘 대체 몇 잔인가 셈을 하다 관둔다.
제법 탄탄한 이 회사를 대학 졸업하고 입사해서 올해 서른이 되는 정연은 작년에 대리를 달았다. 바로 직속상관인 과장과 부장이 있지만 대한민국 직장인의 일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자잘한 서류 작성은 다 밑에 허드레 대리의 일이고 부장은 몇 번의 말로 수많은 서류를 폐기시키기도 하고, 어설픈 자료를 하루아침에 포장해서 윗선에 진상품처럼 올리기도 하니 말이다.
거기다 규모가 많이 크지 않은 중소기업이다 보니 부서 이름이 무색하게 여러 가지 걸쳐 있는 업무는 일이 한창 재밌기는 해도 버거운 것이 사실이었다. 정연이 소속된 이름만 근사한 해외영업지원 팀의 윤 과장은 일 년째 중국 공장에서 근무 중이다.
부장은 중국 공장과 회사를 먹여 살려 주는 더 큰 갑을 위해 발에 땀이 나게 뛰고 있다. 그러니 온갖 서류와 각종 프레젠테이션은 늘 정연의 몫이다. 낮에는 거래처 업무에 자리를 비우고, 오후에 들어와 시작하는 서류 작성 업무는 해가 떨어지고도 늦도록 사무실에서 혼자 머물게 했다. 그렇게 진행된 서류는 수천 번을 더 쳐다보지만 늘 불안하다.
정연의 성격 탓도 있겠지만, 갑과 을의 이해 당사자를 다 모셔 두고 오로지 서류로만 중국 현지 공장 상황과 한국에서의 업무의 연결성을 설명해야 한다. 하나의 제품이 나오기까지의 완벽해야 할 그 과정을 설명하는 일은 아직 대리란 직함을 단 정연에게는 큰 부담이다.
그리고 또 하나 정연이 점심까지 거르게 할 정도로 더 큰 부담감을 갖게 하고 있는 그 사람. 일 년 가까이 관계를 맺고 있는 그 사람.
혹시나 그 사람의 눈에 거슬릴까 자신으로 인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까 그 걱정의 양만큼이 바늘로 변해 정연의 온몸에 하나씩 박혀 가는 중이다. 이런저런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안줏거리가 되어 그녀와 그의 이름은 늘 이 회사에 맴돌고 있다. 정작 당사자들의 의지로 시작된 적이 없는 그들의 관계는 끊어지지도 않고 질기게도 이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