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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 우리는 무슨 사이인가요?(2)
“김 대리, 자.”
불쑥 테이크 아웃 커피 잔이 책상에 내려놓아진다. 옆자리 빈 의자를 끌고 와 천천히 조심스럽게 앉는 수진의 배는 소복하게 불러 있다. 손을 가지런히 배 위에 놓고서는, 숨을 몰아쉰다.
정연은 수진이 내려놓은 잔을 기분 좋게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마시고서는
“윽, 뭐야? 이거 우유야? 수진아 바뀌었나 봐. 임산부 몫이 내게 왔어.”
뚜껑을 닫고 내밀다 아니라는 수진의 손짓에 정연의 눈썹이 살짝 올라간다. 고소한 우유의 맛이 입 안에서 기분 좋게 맴돈다.
“너 점심도 굶고 일하잖아. 이거라도 먹으라고. 따뜻해서 요기가 될 거야. 그래도 밥은 먹고 일해야지. 무슨 억만금을 번다고 그래. 곧 부잣집 사모님이 되실 텐데.”
확, 정연의 얼굴이 일그러지다 수진은 악의 없이 하는 말에 도리어 역정 내기 무안해 얼굴을 다시 폈다. 휴, 속으로 한숨을 집어넣는다.
“오늘 데이트라며? 구매 팀 은수 씨가 윤성에 들어갔다 박 팀장님 뵈었다는데, 퇴근하고 너랑 음악회 간다고 우리 회사 들어오신다고 하더라고. 오늘은 무슨 음악회야? 부럽다. 배불뚝이 아줌마는 자꾸 화장실 마려워서 음악회 가지도 못하는데.”
이런 게 공개 연애인가? 연예인이라도 된 느낌이다. 회사의 모든 사람들이 정연의 연애사를 다 안다. 주말이라도 지나고 오면, 데이트는 잘했어? 하는 인사가 밥 먹었어? 하는 인사처럼 따라온다. 무슨 데이라고 붙은 날은 김정연 대리 앞으로 뭐라도 선물이 온 게 없나 다들 한 번씩 물어보고 간다.
한 마디씩의 입이 모여 헤아릴 수 없는 같은 말을 듣고 산다. 부럽다는 시선과 언제까지 가나 보자는 시샘 섞인 시선도 다 안다. 지겹다. 싫다.
오늘은 멘델스존이라고 했었나? 모차르트라고 했었나?
정연은 관심도 없고 복잡한 사람들 많은 음악회 생각에 벌써부터 한숨이 쉬어진다. 비싼 좌석에 앉아 언제 박수를 쳐야 할지, 대체 어디가 좋은지 모르는 음악을 두어 시간 듣고 있어야 한다는 게 가까스로 눌러놓은 짜증을 다시 일으킨다.
“박 팀장님은 형님 덕분에 그렇게 좋은 공연 티켓을 잘 구하는 거야? 보면 유명하다는 클래식 공연은 늘 가는 거 같던데 나는 언제 그렇게 살아 보나? 우리 신랑은 음악이라고는 애국가밖에 몰라.”
“형님? 무슨 형님?”
“엥? 그 왜 요즘 케이블에 ‘클래식을 이야기합니다’라는 프로 진행자 잘생긴 바이올린 하는 남자 있잖아, 그 사람 박 팀장님 형이잖아. 정말 몰랐어?”
멀뚱히 무슨 소리인가 하는 정연의 얼굴에 기가 차다는 듯 수진은
“대체 너희 커플은 만나서 말은 해?” 하고 소리를 빽 지른다. 그래 놓고는 마감해서 넘겨야 할 서류가 있다고 뒤뚱거리며 배를 살짝 감싸 안고 일어섰다.
하, 남들이 다 아는 가족사도 서로 모르는 커플이라. 하긴 박 팀장도 정연의 가족 관계는 전혀 모른다. 정연이 자세히 말해 준 적도 없고, 대학 때부터 혼자 살았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으니 말이다. 이러니 서로 서운할 것도 없겠다.
하지만 서운의 감정을 넘어선 한 가지 사실이 두어 달 전부터 정연을 누르고 있었다. 기껏 먹은 한 잔의 우유가 고소한 맛 대신 비릿한 느낌으로 저만큼에서 머물고 내려가질 않는다.
새벽마다 혼자인 잠자리에서 갑자기 눈이 떠지고, 다시 잠을 들지 못하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처음 얼마간은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얼마가 두 달이 넘어가고 있다. 정연의 하루 시작은 뒤척이는 게 지겨워 새벽녘 침대 끝에 멍하니 앉아 해가 뜨길 기다리게 되었다.
같이 밥을 먹고 일어설 때마다 소화제를 먹어야 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그 사람. 데이트라는 명분 아래 하루를 보내고 나면 바짝 솟아오른 긴장감 때문에 집에 돌아가서는 한참을 널브러져 따로 기운을 차려야 할 정도로 불편한 그 사람. 왜 그런 사람 때문에 고민을 안고 있는지 이제는 그게 스스로에게 보내는 질문이다.
털어 내면 될 명분을 자신이 쥐고 있는데 왜 말을 못 하는지. 하루 이틀을 그냥 보낼 때는 어려운 사람이라 그랬다고 변명을 달았다. 그런데 왜 그게 두 달이 넘어가는지, 이런 고민 속에서도 불편한 관계의 남자는 말이 없다.
모니터 앞 작은 전자시계가 6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멍하니 숫자가 바뀌길 바라보던 정연은 다시 봐도 뭔가 부족한 서류를 덮었다. 저장한 자료를 회사 서버와 외장 하드에 저장해 놓고 컴퓨터 전원을 껐다.
가방에서 거울을 꺼내 얼굴을 쓱 살펴보는데 마음에 안 든다. 야근을 할 사람들은 저녁을 구내식당을 이용할지 나갈지 고민하고, 퇴근할 무리는 부산스러운 동작으로 사무실을 한 번 들썩인다.
“김 대리, 내일 프레젠테이션 준비는 잘돼 가? 윤 과장이 할 일을 자네가 늘 하고 있어 고생이 많지? 그래도 믿고 잘하는 김 대리라 마음은 놓이네. 그래, 오늘 박 팀장이랑 약속 있다며?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런 거 곧잘 한다던데 일주년이라고 이벤트라도 해?”
난데없는 일주년은 또 뭐며 이벤트는 뭐란 말인가?
정연은 자신의 이야기가 맞는 건지 고개 숙여 두드리던 화장품의 뚜껑을 닫고 조금 멍한 표정으로 이 부장을 쳐다봤다.
“자네 커플 사귀기 시작한 그날이 우리 결혼기념일이라 안 잊어 먹지. 결혼기념일인데 회식한다고 해서 와이프가 잔뜩 뿔났었잖아. 잊을 수가 없어. 김 대리, 이거 먹어.”
이 부장은 책상 서랍에서 홍삼즙을 꺼내 내민다. 오나가나 지나가는 사람들만 보면 하나씩 건넨다. 듣기로는 집안이 금산 어디에서 인삼 사업을 크게 한다고 한다. 해서 이 회사에서 이 부장의 인삼을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은 서로 일면식이 없다고 해야 할 정도로 그런 마음 쓰임은 헤플 정도로 넘치시는 분이다.
“박 팀장이 자네 얼굴 보면 나더러 한 소리 할까 싶어 그래서 주는 거니 어서 먹고 나가 봐. 한창 좋을 나이에 얼굴이 그게 뭐야? 내가 그 나이에는…….”
무어라 뒤에 말을 더 하려다 정연의 얼굴을 보며 해 봤자 나이 든 사람의 잔소리로 비쳐질 걸 알았는지 말을 얼버무리고 책상을 정리했다. 살짝 멋쩍은 듯 껄껄 웃으며 이 부장은 결혼기념일이라 어디 근사한 레스토랑을 예약했다며 6시 숫자가 바뀌자마자 일어선 그대로 가방을 챙겨 나갔다.
이 부장은 나가다 뒤돌아서서 오늘 청혼받는 거 아니냐는 정연의 입장에서는 듣기 거북한 말을 내뱉고 문을 나섰다. 그 말에 냉큼 꼬리를 잡고 다른 부서 직원들까지 한껏 들떠 또 다 한 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김 대리 회사 그만두냐는 소리에 부잣집 사모님 소리가 또 터져 나왔다. 뭐라 대꾸할 기운도 없는 정연은 오늘 몇 번째인 줄 모르는 한숨을 속으로 또 삼켰다.
일주년이라……. 당사자도 기억 못 하는 일주년을 온 회사 사람들이 축하를 해 주네.
휘몰아치듯 감정이 일 년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정연의 마음은 푹 가라앉는다.
그때 왜 그랬을까? 그 사람은 왜 그랬을까? 왜 거절의 말도 못했을까? 나는 왜 또 이렇게 어영부영 끌려와서 일 년을 채웠을까?
정연은 지난 일 년 동안 했던 질문을 수없이 반복하지만 답을 찾지 못한다. 끝없이 과거의 후회 속으로 빠져들던 정연은 휴대전화가 진동으로 윙윙거리는 소음에 차갑게 현실로 내려왔다.
「정연 씨, 지금 출발합니다. 30분쯤 걸릴 거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언제나 예의 바른 그의 말투가 옆에서 이야기하는 듯 문자가 대신 말을 한다. 일 년 가까이 회사가 요란하게 인정하는 연인 사이에도 참으로 멀게만 느껴지는 사람이다. 아직까지도 서로 존댓말을 쓰고, 보통의 연인들이 하는 다툼 한 번이 없었다.
하긴 싸울 만큼 여유로운 관계도 아니었다. 늘 출장이니 회사 업무로 바쁜 사람이었고, 정연도 역시 그런 거에 대해 투정도 없었다. 그런 그의 일상이 차라리 편했다.
물끄러미 휴대전화를 바라보던 정연은 「네.」 라는 짧은 단답형의 문자를 보내고 주변을 정리했다.
아침에 업무를 시작하면서 벗어 둔 하이힐을 다시 신다 짧게 아, 하고 신음 소리가 절로 나온다. 발이 부었는지 아니면 신발이 편하지 않아서인지 여전히 불편하다. 그러다 이내 빠르게 일어서 몇 걸음 걸어 본다. 괜스레 아픈 발이 그에게 신경 쓰이게 할까 싶어 미리 적응하려 애쓴다.
“김 대리니임, 이거 박 팀장님한테 좀 전해 주실 수 있죠? 이번 제품 인증서예요. 일단 메일로 보내긴 했는데 원본이 들어가야 하는 건이라. 제가 내일 지방 출장도 있고 해서, 윤성에 들러 직접 전해 드리기 좀 시간이 부족해서요. 중요 문서인데 직접 전달해야 하잖아요. 중요한 분한테 중요하신 분이 전해 주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겠죠? 그럼 부탁해요.”
중요하신 분이란 게 대체 누구란 말인가?
정연은 놀리는 것인지 아니면 부탁하면서 부리는 나름의 애교인지 상대의 말에 꼬투리를 잡고 싶은 걸 관두자 하며 신경을 눌렀다.
그런 복잡한 정연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구개발 팀 최 주임은 툭 서류 봉투 하나를 책상에 놓고 빠르게 사라졌다. 무슨 심부름꾼도 아니고 이런 절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차라리 아무런 사이가 아니었을 때는 윤성기업으로 회의차 방문할 때, 다른 부서의 서류 전달 그거쯤이 무슨 일이겠나 했다.
그런데 이런 관계가 되고부터는 뭔가 모르게 거슬린다. 거절도 못 하는 정연은 늘 그를 만날 때마다 이렇게 그의 회사와 정연의 회사의 전달책이 되어 가고 있다. 오늘에야 문득 그들의 관계가 일을 벗어난다면 과연 유지가 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뭔가 탁 하고 일깨워지는 관계의 정의에 몸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감정 조절이 힘든지 자꾸만 짜증이 일어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서류 봉투를 가방에 팽개치듯 넣어 버린다. 쑥 들어가는 서류 봉투의 바스락 소리에 정연은 다시 꺼내 살짝 구겨진 봉투의 겉면을 손바닥으로 바르게 폈다.
박진우 팀장님이라고 적힌 그 이름을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멍하게 상념에 잡힌 정연이 그렇게 넋을 놓듯 봉투를 보고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어지러운 생각을 그에게 들키기라도 한 듯 정연은 저장된 이름에 살짝 놀라기까지 했다.
회사 안으로 들어올 줄 알았던 그는 주차장이라고 한다. 퇴근 후 만날 일이 있으면 늘 회사로 들어와 다른 직원들과 업무 이야기며 전달 사항 등을 풀어 놓고 같이 나서곤 했었다. 정연은 그 상황이 너무 싫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느 정도의 반가움을 나타내야 할지 쳐다보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감을 충족시켜 줘야 할 의무감은 늘 불편했다. 그래서 그가 회사에 들어올 즈음에는 일부러 화장실을 간다든지, 아니면 다른 부서에 자료를 전달하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주차장으로 정연을 불러냈다. 다행이다. 오늘은 여기저기 집 없는 아이처럼 그를 피해 떠돌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조금은 편했다.
늦가을 바람이 스산하게 부는 회사 주차장은 해가 저물어 더 쓸쓸한 느낌이다. 벌써 텅 비어 가는 주차장은 고요했다. 또각또각 정연의 하이힐만이 주차장을 울린다. 저쪽에 주차된 차에 그 사람이 있다.
다가가서 어떤 식으로 알은척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가 먼저 자신을 알아보면 그때는 또 어떤 인사를 해야 하나 싶은 생각에, 이 사람과는 무얼 해도 맞는 부분이 없구나 하는 것을 더 명확하게 느낀다.
방금 주차장으로 불러낸 그가 조금은 편해졌다는 생각이 성급했다고 인정했다.
진우는 차 안에서 통화 중이었다. 정연을 미처 보지 못한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살짝 언쟁이 오가는 통화인 듯 입 모양이 일그러졌다. 통화가 끝나길 기다려야 하나 망설이며 서 있는데 정연을 발견한 진우는 급하게 전화를 끊고 밖으로 나와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굳이 문까지 열어 줄 필요가 있을까 좀 과한 친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정연은 애써 삼켰다. 이 남자 역시 자연스럽지 못한 그들의 관계에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이 든다.
“안녕하세요?”
아, 정말 자연스럽지 못한 인사.
정연은 내뱉고 나서도 바로 어색한 말투에 슬쩍 무안해진다. 그게 제 마음만은 아닌지 진우의 인상이 방금 전의 통화처럼 확 일그러진다.
그때 다시 전화가 울린다.
1. 우리는 무슨 사이인가요?(2)
“김 대리, 자.”
불쑥 테이크 아웃 커피 잔이 책상에 내려놓아진다. 옆자리 빈 의자를 끌고 와 천천히 조심스럽게 앉는 수진의 배는 소복하게 불러 있다. 손을 가지런히 배 위에 놓고서는, 숨을 몰아쉰다.
정연은 수진이 내려놓은 잔을 기분 좋게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마시고서는
“윽, 뭐야? 이거 우유야? 수진아 바뀌었나 봐. 임산부 몫이 내게 왔어.”
뚜껑을 닫고 내밀다 아니라는 수진의 손짓에 정연의 눈썹이 살짝 올라간다. 고소한 우유의 맛이 입 안에서 기분 좋게 맴돈다.
“너 점심도 굶고 일하잖아. 이거라도 먹으라고. 따뜻해서 요기가 될 거야. 그래도 밥은 먹고 일해야지. 무슨 억만금을 번다고 그래. 곧 부잣집 사모님이 되실 텐데.”
확, 정연의 얼굴이 일그러지다 수진은 악의 없이 하는 말에 도리어 역정 내기 무안해 얼굴을 다시 폈다. 휴, 속으로 한숨을 집어넣는다.
“오늘 데이트라며? 구매 팀 은수 씨가 윤성에 들어갔다 박 팀장님 뵈었다는데, 퇴근하고 너랑 음악회 간다고 우리 회사 들어오신다고 하더라고. 오늘은 무슨 음악회야? 부럽다. 배불뚝이 아줌마는 자꾸 화장실 마려워서 음악회 가지도 못하는데.”
이런 게 공개 연애인가? 연예인이라도 된 느낌이다. 회사의 모든 사람들이 정연의 연애사를 다 안다. 주말이라도 지나고 오면, 데이트는 잘했어? 하는 인사가 밥 먹었어? 하는 인사처럼 따라온다. 무슨 데이라고 붙은 날은 김정연 대리 앞으로 뭐라도 선물이 온 게 없나 다들 한 번씩 물어보고 간다.
한 마디씩의 입이 모여 헤아릴 수 없는 같은 말을 듣고 산다. 부럽다는 시선과 언제까지 가나 보자는 시샘 섞인 시선도 다 안다. 지겹다. 싫다.
오늘은 멘델스존이라고 했었나? 모차르트라고 했었나?
정연은 관심도 없고 복잡한 사람들 많은 음악회 생각에 벌써부터 한숨이 쉬어진다. 비싼 좌석에 앉아 언제 박수를 쳐야 할지, 대체 어디가 좋은지 모르는 음악을 두어 시간 듣고 있어야 한다는 게 가까스로 눌러놓은 짜증을 다시 일으킨다.
“박 팀장님은 형님 덕분에 그렇게 좋은 공연 티켓을 잘 구하는 거야? 보면 유명하다는 클래식 공연은 늘 가는 거 같던데 나는 언제 그렇게 살아 보나? 우리 신랑은 음악이라고는 애국가밖에 몰라.”
“형님? 무슨 형님?”
“엥? 그 왜 요즘 케이블에 ‘클래식을 이야기합니다’라는 프로 진행자 잘생긴 바이올린 하는 남자 있잖아, 그 사람 박 팀장님 형이잖아. 정말 몰랐어?”
멀뚱히 무슨 소리인가 하는 정연의 얼굴에 기가 차다는 듯 수진은
“대체 너희 커플은 만나서 말은 해?” 하고 소리를 빽 지른다. 그래 놓고는 마감해서 넘겨야 할 서류가 있다고 뒤뚱거리며 배를 살짝 감싸 안고 일어섰다.
하, 남들이 다 아는 가족사도 서로 모르는 커플이라. 하긴 박 팀장도 정연의 가족 관계는 전혀 모른다. 정연이 자세히 말해 준 적도 없고, 대학 때부터 혼자 살았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으니 말이다. 이러니 서로 서운할 것도 없겠다.
하지만 서운의 감정을 넘어선 한 가지 사실이 두어 달 전부터 정연을 누르고 있었다. 기껏 먹은 한 잔의 우유가 고소한 맛 대신 비릿한 느낌으로 저만큼에서 머물고 내려가질 않는다.
새벽마다 혼자인 잠자리에서 갑자기 눈이 떠지고, 다시 잠을 들지 못하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처음 얼마간은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얼마가 두 달이 넘어가고 있다. 정연의 하루 시작은 뒤척이는 게 지겨워 새벽녘 침대 끝에 멍하니 앉아 해가 뜨길 기다리게 되었다.
같이 밥을 먹고 일어설 때마다 소화제를 먹어야 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그 사람. 데이트라는 명분 아래 하루를 보내고 나면 바짝 솟아오른 긴장감 때문에 집에 돌아가서는 한참을 널브러져 따로 기운을 차려야 할 정도로 불편한 그 사람. 왜 그런 사람 때문에 고민을 안고 있는지 이제는 그게 스스로에게 보내는 질문이다.
털어 내면 될 명분을 자신이 쥐고 있는데 왜 말을 못 하는지. 하루 이틀을 그냥 보낼 때는 어려운 사람이라 그랬다고 변명을 달았다. 그런데 왜 그게 두 달이 넘어가는지, 이런 고민 속에서도 불편한 관계의 남자는 말이 없다.
모니터 앞 작은 전자시계가 6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멍하니 숫자가 바뀌길 바라보던 정연은 다시 봐도 뭔가 부족한 서류를 덮었다. 저장한 자료를 회사 서버와 외장 하드에 저장해 놓고 컴퓨터 전원을 껐다.
가방에서 거울을 꺼내 얼굴을 쓱 살펴보는데 마음에 안 든다. 야근을 할 사람들은 저녁을 구내식당을 이용할지 나갈지 고민하고, 퇴근할 무리는 부산스러운 동작으로 사무실을 한 번 들썩인다.
“김 대리, 내일 프레젠테이션 준비는 잘돼 가? 윤 과장이 할 일을 자네가 늘 하고 있어 고생이 많지? 그래도 믿고 잘하는 김 대리라 마음은 놓이네. 그래, 오늘 박 팀장이랑 약속 있다며?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런 거 곧잘 한다던데 일주년이라고 이벤트라도 해?”
난데없는 일주년은 또 뭐며 이벤트는 뭐란 말인가?
정연은 자신의 이야기가 맞는 건지 고개 숙여 두드리던 화장품의 뚜껑을 닫고 조금 멍한 표정으로 이 부장을 쳐다봤다.
“자네 커플 사귀기 시작한 그날이 우리 결혼기념일이라 안 잊어 먹지. 결혼기념일인데 회식한다고 해서 와이프가 잔뜩 뿔났었잖아. 잊을 수가 없어. 김 대리, 이거 먹어.”
이 부장은 책상 서랍에서 홍삼즙을 꺼내 내민다. 오나가나 지나가는 사람들만 보면 하나씩 건넨다. 듣기로는 집안이 금산 어디에서 인삼 사업을 크게 한다고 한다. 해서 이 회사에서 이 부장의 인삼을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은 서로 일면식이 없다고 해야 할 정도로 그런 마음 쓰임은 헤플 정도로 넘치시는 분이다.
“박 팀장이 자네 얼굴 보면 나더러 한 소리 할까 싶어 그래서 주는 거니 어서 먹고 나가 봐. 한창 좋을 나이에 얼굴이 그게 뭐야? 내가 그 나이에는…….”
무어라 뒤에 말을 더 하려다 정연의 얼굴을 보며 해 봤자 나이 든 사람의 잔소리로 비쳐질 걸 알았는지 말을 얼버무리고 책상을 정리했다. 살짝 멋쩍은 듯 껄껄 웃으며 이 부장은 결혼기념일이라 어디 근사한 레스토랑을 예약했다며 6시 숫자가 바뀌자마자 일어선 그대로 가방을 챙겨 나갔다.
이 부장은 나가다 뒤돌아서서 오늘 청혼받는 거 아니냐는 정연의 입장에서는 듣기 거북한 말을 내뱉고 문을 나섰다. 그 말에 냉큼 꼬리를 잡고 다른 부서 직원들까지 한껏 들떠 또 다 한 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김 대리 회사 그만두냐는 소리에 부잣집 사모님 소리가 또 터져 나왔다. 뭐라 대꾸할 기운도 없는 정연은 오늘 몇 번째인 줄 모르는 한숨을 속으로 또 삼켰다.
일주년이라……. 당사자도 기억 못 하는 일주년을 온 회사 사람들이 축하를 해 주네.
휘몰아치듯 감정이 일 년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정연의 마음은 푹 가라앉는다.
그때 왜 그랬을까? 그 사람은 왜 그랬을까? 왜 거절의 말도 못했을까? 나는 왜 또 이렇게 어영부영 끌려와서 일 년을 채웠을까?
정연은 지난 일 년 동안 했던 질문을 수없이 반복하지만 답을 찾지 못한다. 끝없이 과거의 후회 속으로 빠져들던 정연은 휴대전화가 진동으로 윙윙거리는 소음에 차갑게 현실로 내려왔다.
「정연 씨, 지금 출발합니다. 30분쯤 걸릴 거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언제나 예의 바른 그의 말투가 옆에서 이야기하는 듯 문자가 대신 말을 한다. 일 년 가까이 회사가 요란하게 인정하는 연인 사이에도 참으로 멀게만 느껴지는 사람이다. 아직까지도 서로 존댓말을 쓰고, 보통의 연인들이 하는 다툼 한 번이 없었다.
하긴 싸울 만큼 여유로운 관계도 아니었다. 늘 출장이니 회사 업무로 바쁜 사람이었고, 정연도 역시 그런 거에 대해 투정도 없었다. 그런 그의 일상이 차라리 편했다.
물끄러미 휴대전화를 바라보던 정연은 「네.」 라는 짧은 단답형의 문자를 보내고 주변을 정리했다.
아침에 업무를 시작하면서 벗어 둔 하이힐을 다시 신다 짧게 아, 하고 신음 소리가 절로 나온다. 발이 부었는지 아니면 신발이 편하지 않아서인지 여전히 불편하다. 그러다 이내 빠르게 일어서 몇 걸음 걸어 본다. 괜스레 아픈 발이 그에게 신경 쓰이게 할까 싶어 미리 적응하려 애쓴다.
“김 대리니임, 이거 박 팀장님한테 좀 전해 주실 수 있죠? 이번 제품 인증서예요. 일단 메일로 보내긴 했는데 원본이 들어가야 하는 건이라. 제가 내일 지방 출장도 있고 해서, 윤성에 들러 직접 전해 드리기 좀 시간이 부족해서요. 중요 문서인데 직접 전달해야 하잖아요. 중요한 분한테 중요하신 분이 전해 주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겠죠? 그럼 부탁해요.”
중요하신 분이란 게 대체 누구란 말인가?
정연은 놀리는 것인지 아니면 부탁하면서 부리는 나름의 애교인지 상대의 말에 꼬투리를 잡고 싶은 걸 관두자 하며 신경을 눌렀다.
그런 복잡한 정연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구개발 팀 최 주임은 툭 서류 봉투 하나를 책상에 놓고 빠르게 사라졌다. 무슨 심부름꾼도 아니고 이런 절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차라리 아무런 사이가 아니었을 때는 윤성기업으로 회의차 방문할 때, 다른 부서의 서류 전달 그거쯤이 무슨 일이겠나 했다.
그런데 이런 관계가 되고부터는 뭔가 모르게 거슬린다. 거절도 못 하는 정연은 늘 그를 만날 때마다 이렇게 그의 회사와 정연의 회사의 전달책이 되어 가고 있다. 오늘에야 문득 그들의 관계가 일을 벗어난다면 과연 유지가 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뭔가 탁 하고 일깨워지는 관계의 정의에 몸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감정 조절이 힘든지 자꾸만 짜증이 일어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서류 봉투를 가방에 팽개치듯 넣어 버린다. 쑥 들어가는 서류 봉투의 바스락 소리에 정연은 다시 꺼내 살짝 구겨진 봉투의 겉면을 손바닥으로 바르게 폈다.
박진우 팀장님이라고 적힌 그 이름을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멍하게 상념에 잡힌 정연이 그렇게 넋을 놓듯 봉투를 보고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어지러운 생각을 그에게 들키기라도 한 듯 정연은 저장된 이름에 살짝 놀라기까지 했다.
회사 안으로 들어올 줄 알았던 그는 주차장이라고 한다. 퇴근 후 만날 일이 있으면 늘 회사로 들어와 다른 직원들과 업무 이야기며 전달 사항 등을 풀어 놓고 같이 나서곤 했었다. 정연은 그 상황이 너무 싫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느 정도의 반가움을 나타내야 할지 쳐다보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감을 충족시켜 줘야 할 의무감은 늘 불편했다. 그래서 그가 회사에 들어올 즈음에는 일부러 화장실을 간다든지, 아니면 다른 부서에 자료를 전달하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주차장으로 정연을 불러냈다. 다행이다. 오늘은 여기저기 집 없는 아이처럼 그를 피해 떠돌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조금은 편했다.
늦가을 바람이 스산하게 부는 회사 주차장은 해가 저물어 더 쓸쓸한 느낌이다. 벌써 텅 비어 가는 주차장은 고요했다. 또각또각 정연의 하이힐만이 주차장을 울린다. 저쪽에 주차된 차에 그 사람이 있다.
다가가서 어떤 식으로 알은척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가 먼저 자신을 알아보면 그때는 또 어떤 인사를 해야 하나 싶은 생각에, 이 사람과는 무얼 해도 맞는 부분이 없구나 하는 것을 더 명확하게 느낀다.
방금 주차장으로 불러낸 그가 조금은 편해졌다는 생각이 성급했다고 인정했다.
진우는 차 안에서 통화 중이었다. 정연을 미처 보지 못한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살짝 언쟁이 오가는 통화인 듯 입 모양이 일그러졌다. 통화가 끝나길 기다려야 하나 망설이며 서 있는데 정연을 발견한 진우는 급하게 전화를 끊고 밖으로 나와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굳이 문까지 열어 줄 필요가 있을까 좀 과한 친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정연은 애써 삼켰다. 이 남자 역시 자연스럽지 못한 그들의 관계에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이 든다.
“안녕하세요?”
아, 정말 자연스럽지 못한 인사.
정연은 내뱉고 나서도 바로 어색한 말투에 슬쩍 무안해진다. 그게 제 마음만은 아닌지 진우의 인상이 방금 전의 통화처럼 확 일그러진다.
그때 다시 전화가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