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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입술에 취하다
2화
1. 4885 다시 만나다(1)
잠실야구장 안에는 경기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1위를 놓고 삼성 라이온스와 엘지 트윈스 두 팀의 치열한 순위 다툼은 물론 최근 홈런 타자로 떠오른 윤정후 선수가 개인 통산 100호 홈런을 때릴 수 있을지와 현재 연승을 올리고 있는 신인 투수와의 대결 구도 또한 야구팬들의 큰 관심거리였다.
모처럼 야구장을 찾은 도준은 외야석에서 경기를 관전했다. 티켓팅을 미리 해 놓지 않는 바람에 프리미엄석이나 블루, 레드 같은 지정석을 구하지는 못했다.
오랜만에 외야석에서 관전하는 재미도 꽤나 쏠쏠했다. 아쉬운 점은 주위에 커플들이 너무 많다는 게 그의 눈에 조금 거슬렸다. 도준의 바로 앞에 있는 커플은 주위 시선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진한 애정 행각까지 서슴지 않았다.
오후 3시가 되자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다. 이 시간이 아니면 도준이 밖으로 나와 야구 경기를 관전할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도준은 겨우 두 시간 남짓 관람을 하고 난 뒤 다시 본인이 운영하는 매장으로 가야만 했다. 그러니까 기껏해야 4, 5회를 구경할 정도의 시간만 그에게 허락이 되었다.
그 이유는 그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맛집으로 유명한 이탈리안 레스토랑 볼로네제의 오너셰프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가 빠지더라도 다른 주방 스태프들이 알아서 업무를 처리하겠지만 도준은 책임감이 무척이나 강한 성격인데다 완벽주의자에 가까웠기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피크 타임에는 매장을 비우지 않는 게 그의 철칙이었다.
그렇게 야구 광팬은 아니었지만 그는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점심시간을 끝내고 저녁 시간이 오기 전 그 짧은 브레이크 타임을 이용해 야구장을 찾곤 했다.
그가 가끔 야구장을 찾는 이유는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 해소나 취미 생활을 즐기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고등학교부터 대학교 때까지 자신의 야구 후배였던 윤정후를 보기 위해서였다.
“어, 저기 윤정후 몸 풀고 있다.”
“그러게. 와, 윤정후 완전 멋있지 않니?”
“멋있지. 특히 타석에 들어설 때가 제일 멋있어.”
정후의 팬인지 아까부터 계속해서 정후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었다. 도준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바로 옆에서 흥분한 목소리로 떠드는 여자들을 힐끔 보았다.
두 명의 젊은 여자인데 도준은 자신의 바로 옆에 앉은 여자에게 더 눈길이 갔다. 평균 정도의 키에 적당히 날씬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는데, 한눈에 확 띄는 그런 전형적인 미인형의 얼굴은 아니었지만 뭔가 묘한 매력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웃을 때 볼 옆으로 움푹 파인 보조개가 꽤 매력적이었으며 눈웃음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도준이 잘 알고 있는 그녀와 조금은 닮은 구석이 있었다. 잊으려고 노력해 봤지만 끝내 잊히지 않는 그녀와.
잠시 여자에게 시선을 뺏겼던 도준은 ‘땅’ 하고 타자가 안타를 치는 소리에 그라운드로 시선을 돌렸다. 내야 안타로 1루에 있던 주자는 2루로 가고 타자는 1루에 출루했다.
다음 타자는 도준이 기다리고 있던 후배 정후의 차례였다. 이번에 정후가 홈런이나 2루타를 날려 2타점 이상만 뽑으면 역전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5회말, 드디어 정후가 타석에 들어섰다. 정후가 타석에 들어서자 채린과 지연이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와, 이제 윤정후 차례다.”
“윤정후, 홈런 한 방 부탁해!”
아무리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타고난 성대로 소리를 치더라도 외야에서 타석까지 들릴 리 만무했다. 그런데도 채린은 목청을 높여 정후를 응원했다.
채린은 야구장 방문이 몇 번 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전까지 야구에 대해 전혀 관심도 없었다. 최근에 지연에게서 고등학교 동창인 윤정후가 유명한 야구 선수라는 것을 듣고 난 뒤 정후를 보기 위해서 야구장을 찾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정후가 채린의 첫사랑이니까.
채린은 멀리서나마 그런 정후를 응원했다.
투수가 던진 첫 번째 공에 정후의 방망이가 움직였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방망이를 맞은 공이 3루 베이스 옆 라인을 넘어갔다. 파울이었다. 여기저기서 아쉬운 함성 소리가 들렸다.
“아, 파울이네.”
방망이 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난 채린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야구의 룰을 잘 모르는 채린이지만 파울과 홈런, 안타, 아웃 정도의 기본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날도 무더운 데다 목이 말랐던 채린은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캔 맥주의 뚜껑을 땄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리더니 갑자기 그 안에서 맥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채린은 방금 전 정후가 친 파울을 보고 흥분을 한 나머지 손에 맥주를 들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마구 팔을 흔들었고, 그 결과 맥주 뚜껑을 따자마자 맥주가 분수처럼 치솟은 것이다.
그런데 그게 또 옆에 있는 젊은 남자에게 튀고 말았다. 남자가 입고 있던 청바지가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채린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남자의 허벅지 위에 남은 물기를 털어 내었다. 그러다 곧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깨달은 채린은 얼굴을 붉히고서 황급히 그의 허벅지 위를 털던 몹쓸 손을 걷어 내었다.
당황한 채린은 차마 고개를 들어 도준을 보지는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도준은 잠시 당황한 표정으로 채린을 힐끔 쳐다보았다. 옷이 젖은 거야 날도 따뜻하니 경기가 끝나기 전까지는 마를 것 같아 별로 개의치 않았는데 갑자기 그녀의 손이 허벅지를 더듬자 도준은 순간적으로 놀라고 말았다.
물론 그녀의 행동이 도준의 옷에 묻은 맥주를 털어 내기 위한 순수한 의도였지만 당하는 도준으로서는 당황할 만한 일임에 분명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도준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괜찮다고 대답을 했다. 그때였다. ‘딱’ 하고 방망이에 공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들렸다.
도준은 순간적으로 그라운드로 고개를 돌렸다. 정후가 휘두른 방망이에 맞은 공이 하늘 높이 치솟으며 크게 포물선을 그렸다. 공의 떨어지는 낙하지점이나 궤적으로 보아 도준이 앉아 있는 외야석이 분명했다.
공은 정확히 채린의 가슴 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채린은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두 손을 벌려 공을 받을 준비를 갖췄다.
만에 하나 가슴에 맞게 되더라도 그렇게 풍만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충격 흡수 작용을 해 주지 않을까 하고 그녀는 나름 판단했다.
그리고 홈런볼을 잡는 것이 야구팬들 사이엔 좋은 추억이 된다는 것쯤 채린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오늘 홈런은 정후의 개인 통산 100번째 홈런이라 그 의미가 남달랐다.
그러다보니 평생 맨손으로 야구공을 잡아 본 일이 없던 채린이지만 순간적으로 욕심이 생겨 손을 뻗은 것이다. 하지만 막상 공이 눈앞으로 오자 채린은 두 손만 벌린 채 질끈 눈을 감고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솔직히 공에 맞을까 봐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짧은 찰나의 시간이 지났다. 주위에서 홈런이라는 소리와 함께 환호성이 들렸다. 이제는 공이 손 안으로 빨려 들어왔겠지 생각하며 채린은 눈을 떴다.
그런데 공이 손안에 없다. 분명히 채린의 가슴팍으로 공이 날아오는 것을 똑똑히 확인했는데 말이다. 중간에서 누가 낚아채 가지 않는 이상 채린의 손안으로 쏙 들어오는 공의 궤적이었다.
순간, 채린은 옆을 돌아보았다. 채린이 두 손을 벌리고 있을 때 옆에 있던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뭔가 이상한 액션을 취하던 것을 채린은 놓치지 않았다. 뭐랄까, 공을 잡기 위한 동작 같은.
그런데 저 멀리 야구 모자를 눌러쓴 홈런볼 도둑이 역삼각형 뒤태를 보이며 도망치듯 걸어가고 있었다.
“어, 뭐야! 지연아, 저 사람 내 공 잡아서 튄 거 아냐?”
“그, 그런 것 같아.”
지연은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사실 지연 역시 자신에게로 공이 오는 줄 알고 두 눈을 질근 감은 채 손만 벌리고 있었더랬다. 그래서 그 뒤에 일어난 일을 지연은 전혀 알지 못했다.
채린은 씩씩거리며 마치 추격자의 김윤석으로 빙의라도 한 듯 눈동자를 번득이며 도준을 쫓았다. 하지만 통로에 서서 구경하는 사람들 때문에 도준을 쫓기가 쉽지가 않았다.
채린은 도준이 입고 있는 항공점퍼 뒤에 쓰인 숫자를 유심히 살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만 그가 입고 있는 점퍼에는 4885라고 커다랗게 쓰여 있었다.
채린이 다시 추격자의 김윤석으로 빙의하여 소리쳤다.
“거기 4885! 4885! 홈런볼 내놔요!”
하지만 4885는 코너를 돌아 채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윤정후의 통산 100호 홈런볼을 눈앞에서 놓치게 될 줄이야.
채린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는 과자 CF의 한 대사를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잡고 말 테다!”
2화
1. 4885 다시 만나다(1)
잠실야구장 안에는 경기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1위를 놓고 삼성 라이온스와 엘지 트윈스 두 팀의 치열한 순위 다툼은 물론 최근 홈런 타자로 떠오른 윤정후 선수가 개인 통산 100호 홈런을 때릴 수 있을지와 현재 연승을 올리고 있는 신인 투수와의 대결 구도 또한 야구팬들의 큰 관심거리였다.
모처럼 야구장을 찾은 도준은 외야석에서 경기를 관전했다. 티켓팅을 미리 해 놓지 않는 바람에 프리미엄석이나 블루, 레드 같은 지정석을 구하지는 못했다.
오랜만에 외야석에서 관전하는 재미도 꽤나 쏠쏠했다. 아쉬운 점은 주위에 커플들이 너무 많다는 게 그의 눈에 조금 거슬렸다. 도준의 바로 앞에 있는 커플은 주위 시선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진한 애정 행각까지 서슴지 않았다.
오후 3시가 되자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다. 이 시간이 아니면 도준이 밖으로 나와 야구 경기를 관전할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도준은 겨우 두 시간 남짓 관람을 하고 난 뒤 다시 본인이 운영하는 매장으로 가야만 했다. 그러니까 기껏해야 4, 5회를 구경할 정도의 시간만 그에게 허락이 되었다.
그 이유는 그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맛집으로 유명한 이탈리안 레스토랑 볼로네제의 오너셰프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가 빠지더라도 다른 주방 스태프들이 알아서 업무를 처리하겠지만 도준은 책임감이 무척이나 강한 성격인데다 완벽주의자에 가까웠기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피크 타임에는 매장을 비우지 않는 게 그의 철칙이었다.
그렇게 야구 광팬은 아니었지만 그는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점심시간을 끝내고 저녁 시간이 오기 전 그 짧은 브레이크 타임을 이용해 야구장을 찾곤 했다.
그가 가끔 야구장을 찾는 이유는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 해소나 취미 생활을 즐기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고등학교부터 대학교 때까지 자신의 야구 후배였던 윤정후를 보기 위해서였다.
“어, 저기 윤정후 몸 풀고 있다.”
“그러게. 와, 윤정후 완전 멋있지 않니?”
“멋있지. 특히 타석에 들어설 때가 제일 멋있어.”
정후의 팬인지 아까부터 계속해서 정후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었다. 도준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바로 옆에서 흥분한 목소리로 떠드는 여자들을 힐끔 보았다.
두 명의 젊은 여자인데 도준은 자신의 바로 옆에 앉은 여자에게 더 눈길이 갔다. 평균 정도의 키에 적당히 날씬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는데, 한눈에 확 띄는 그런 전형적인 미인형의 얼굴은 아니었지만 뭔가 묘한 매력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웃을 때 볼 옆으로 움푹 파인 보조개가 꽤 매력적이었으며 눈웃음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도준이 잘 알고 있는 그녀와 조금은 닮은 구석이 있었다. 잊으려고 노력해 봤지만 끝내 잊히지 않는 그녀와.
잠시 여자에게 시선을 뺏겼던 도준은 ‘땅’ 하고 타자가 안타를 치는 소리에 그라운드로 시선을 돌렸다. 내야 안타로 1루에 있던 주자는 2루로 가고 타자는 1루에 출루했다.
다음 타자는 도준이 기다리고 있던 후배 정후의 차례였다. 이번에 정후가 홈런이나 2루타를 날려 2타점 이상만 뽑으면 역전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5회말, 드디어 정후가 타석에 들어섰다. 정후가 타석에 들어서자 채린과 지연이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와, 이제 윤정후 차례다.”
“윤정후, 홈런 한 방 부탁해!”
아무리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타고난 성대로 소리를 치더라도 외야에서 타석까지 들릴 리 만무했다. 그런데도 채린은 목청을 높여 정후를 응원했다.
채린은 야구장 방문이 몇 번 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전까지 야구에 대해 전혀 관심도 없었다. 최근에 지연에게서 고등학교 동창인 윤정후가 유명한 야구 선수라는 것을 듣고 난 뒤 정후를 보기 위해서 야구장을 찾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정후가 채린의 첫사랑이니까.
채린은 멀리서나마 그런 정후를 응원했다.
투수가 던진 첫 번째 공에 정후의 방망이가 움직였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방망이를 맞은 공이 3루 베이스 옆 라인을 넘어갔다. 파울이었다. 여기저기서 아쉬운 함성 소리가 들렸다.
“아, 파울이네.”
방망이 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난 채린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야구의 룰을 잘 모르는 채린이지만 파울과 홈런, 안타, 아웃 정도의 기본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날도 무더운 데다 목이 말랐던 채린은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캔 맥주의 뚜껑을 땄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리더니 갑자기 그 안에서 맥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채린은 방금 전 정후가 친 파울을 보고 흥분을 한 나머지 손에 맥주를 들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마구 팔을 흔들었고, 그 결과 맥주 뚜껑을 따자마자 맥주가 분수처럼 치솟은 것이다.
그런데 그게 또 옆에 있는 젊은 남자에게 튀고 말았다. 남자가 입고 있던 청바지가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채린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남자의 허벅지 위에 남은 물기를 털어 내었다. 그러다 곧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깨달은 채린은 얼굴을 붉히고서 황급히 그의 허벅지 위를 털던 몹쓸 손을 걷어 내었다.
당황한 채린은 차마 고개를 들어 도준을 보지는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도준은 잠시 당황한 표정으로 채린을 힐끔 쳐다보았다. 옷이 젖은 거야 날도 따뜻하니 경기가 끝나기 전까지는 마를 것 같아 별로 개의치 않았는데 갑자기 그녀의 손이 허벅지를 더듬자 도준은 순간적으로 놀라고 말았다.
물론 그녀의 행동이 도준의 옷에 묻은 맥주를 털어 내기 위한 순수한 의도였지만 당하는 도준으로서는 당황할 만한 일임에 분명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도준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괜찮다고 대답을 했다. 그때였다. ‘딱’ 하고 방망이에 공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들렸다.
도준은 순간적으로 그라운드로 고개를 돌렸다. 정후가 휘두른 방망이에 맞은 공이 하늘 높이 치솟으며 크게 포물선을 그렸다. 공의 떨어지는 낙하지점이나 궤적으로 보아 도준이 앉아 있는 외야석이 분명했다.
공은 정확히 채린의 가슴 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채린은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두 손을 벌려 공을 받을 준비를 갖췄다.
만에 하나 가슴에 맞게 되더라도 그렇게 풍만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충격 흡수 작용을 해 주지 않을까 하고 그녀는 나름 판단했다.
그리고 홈런볼을 잡는 것이 야구팬들 사이엔 좋은 추억이 된다는 것쯤 채린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오늘 홈런은 정후의 개인 통산 100번째 홈런이라 그 의미가 남달랐다.
그러다보니 평생 맨손으로 야구공을 잡아 본 일이 없던 채린이지만 순간적으로 욕심이 생겨 손을 뻗은 것이다. 하지만 막상 공이 눈앞으로 오자 채린은 두 손만 벌린 채 질끈 눈을 감고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솔직히 공에 맞을까 봐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짧은 찰나의 시간이 지났다. 주위에서 홈런이라는 소리와 함께 환호성이 들렸다. 이제는 공이 손 안으로 빨려 들어왔겠지 생각하며 채린은 눈을 떴다.
그런데 공이 손안에 없다. 분명히 채린의 가슴팍으로 공이 날아오는 것을 똑똑히 확인했는데 말이다. 중간에서 누가 낚아채 가지 않는 이상 채린의 손안으로 쏙 들어오는 공의 궤적이었다.
순간, 채린은 옆을 돌아보았다. 채린이 두 손을 벌리고 있을 때 옆에 있던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뭔가 이상한 액션을 취하던 것을 채린은 놓치지 않았다. 뭐랄까, 공을 잡기 위한 동작 같은.
그런데 저 멀리 야구 모자를 눌러쓴 홈런볼 도둑이 역삼각형 뒤태를 보이며 도망치듯 걸어가고 있었다.
“어, 뭐야! 지연아, 저 사람 내 공 잡아서 튄 거 아냐?”
“그, 그런 것 같아.”
지연은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사실 지연 역시 자신에게로 공이 오는 줄 알고 두 눈을 질근 감은 채 손만 벌리고 있었더랬다. 그래서 그 뒤에 일어난 일을 지연은 전혀 알지 못했다.
채린은 씩씩거리며 마치 추격자의 김윤석으로 빙의라도 한 듯 눈동자를 번득이며 도준을 쫓았다. 하지만 통로에 서서 구경하는 사람들 때문에 도준을 쫓기가 쉽지가 않았다.
채린은 도준이 입고 있는 항공점퍼 뒤에 쓰인 숫자를 유심히 살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만 그가 입고 있는 점퍼에는 4885라고 커다랗게 쓰여 있었다.
채린이 다시 추격자의 김윤석으로 빙의하여 소리쳤다.
“거기 4885! 4885! 홈런볼 내놔요!”
하지만 4885는 코너를 돌아 채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윤정후의 통산 100호 홈런볼을 눈앞에서 놓치게 될 줄이야.
채린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는 과자 CF의 한 대사를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잡고 말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