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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3화
1. 재회(1)
“정말 빠져들겠어. 한번 빠지면 못 헤어 나올 것 같지 않니? 한윤정, 저 남자 눈빛 좀 보라니까.”
소진의 말에 윤정은 벽에 걸린 텔레비전 모니터를 잠시 쳐다보았다.
9년 동안 한시도 잊지 않았던 그의 존재, 가끔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뛰는 존재, 아니, 생각만 해도 가슴을 뛰게 만드는 그의 존재를 확인하자 윤정은 가슴이 아파 살며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녀는 모르는 척하며 반쯤 먹다 남은 아보카도 롤을 젓가락으로 한 조각 집어 입 안에 넣었다.
“넌 저 남자 좋아하지 않니? 영화 한 편 찍고 대박 났잖아. 광고도 몇 편 찍고. 요즘에 엄청 인기 많아. 정말 멋있지 않니? 어디 저런 남자 또 없을까? 저런 남자라면 당장 결혼할 텐데.”
소진이 떠드는 소리에는 관심 없이 윤정은 가늘게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남은 롤을 집어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넌 연예인한테 너무 관심이 없어. 하긴 너도 연예인이긴 하지만.”
단역 배우도 연예인이라고 한다면 그럴 테지. 하지만 연예인이라는 말이 듣기에 거추장스럽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기분. 그냥 단역 배우라고 불러 주는 게 윤정은 편했다.
“디저트는?”
윤정이 물었다.
“여기 뭐가 있지? 난 그냥 콜라 마실게.”
윤정이 지나가는 웨이터를 불러 디저트를 주문했다.
“여기 콜라 두 잔 주세요.”
디저트를 주문받고 돌아서려던 웨이터가 갑자기 놀란 눈을 하고서 윤정을 쳐다보았다.
“혹시 탤런트 아니세요?”
“……그, 그런데요.”
“사인 한 장만 해 주세요.”
“네.”
웨이터가 카운터로 걸어가 종이 한 장을 구해 오더니 윤정에게 내밀었다. 윤정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가 내민 종이에 사인을 해 주었다. 방긋 미소를 지으며 그가 돌아서자 소진이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윤정을 쳐다보았다.
“너도 이제 알아보는 사람이 있구나.”
“그러게. 이제 겨우 드라마 몇 편에 단역으로 나온 것뿐인데.”
“그건 그렇고 오늘 오디션 보는 건 어때? 자신 있어?”
윤정이 영화 오디션을 보는 날이다.
‘자신? 자신은 없다. 다만 내가 가야 할 길이니 하는 것뿐이지.’
오디션에서 수십 번을 떨어지고 나니 그동안 가지고 있던 자신감이 조금씩 소진되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남아 있는 자신감이 거의 바닥났는지도 모른다. 남은 것이 있다면 오로지 열정뿐이겠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줄 거니?”
“물론이지. 밥값은 해야지.”
“밥 사 준 것 때문에 기다리는 거라면 사양이야.”
“그럼 친구로서 당연히 기다려 주는 걸로 할게. 됐니?”
“응.”
윤정은 소진을 보며 크게 미소를 지었다.
오디션을 보는 영화 기획실 건물 앞에 도착하자 윤정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윤정은 호흡을 몇 번 가다듬었다. 늘 이번이 마지막이기를 기원하며 보는 오디션. 소진이 살며시 손을 잡으며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지만 윤정의 호흡은 조금씩 거칠어져 갔다.
“잘될 거야. 한윤정 화이팅!”
소진의 응원 소리를 귓전에 들으며 윤정은 오디션 현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38번 한윤정 씨.”
1시간 만에 이름이 호명되었다. 수십 번의 오디션을 보았는데도 떨리는 건 늘 똑같다. 곧 크랭크인에 들어갈 영화의 조연급 남녀 배우를 모집하는 오디션이다. 제법 알려진 감독이라 윤정은 신뢰가 갔다.
오디션 현장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윤정은 긴장한 탓에 숨이 막혔다.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한 줄로 늘어선 지원자들의 옆에 나란히 섰다. 여전히 가쁜 호흡에 심사 위원들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윤정의 번호와 이름이 누군가에 의해서 불리어지고 윤정이 몇 가지 질문에 대답을 했다. 그들이 던져 주는 대본을 읽고 연기를 하고 나자 곧 오디션은 끝이 났다. 뭐라고 대답을 했는지 어떻게 연기를 했는지 윤정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무것도 기억을 할 수가 없었다.
오디션 현장에서 마주친 단 한 사람만이 그녀의 기억에 남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인데,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 평생 가장 큰 실수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날이 추억처럼 머릿속에 떠올라 기억이 난다.
9년 전 5월에 있어났던 일. 악몽인지, 추억인지, 그리움인지 분간도 할 수 없는 기억의 잔재 속 준서의 존재. 그렇게 그를 그리워했었다. 미워하면서 결코 미워할 수 없고 증오하면서도 그리웠던 그.
그런데 왜 하필 이런 자리에서 그를…….
준서를 보는 순간, 윤정은 차마 뛰쳐나갈 수가 없었다. 이미 준서의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부터 윤정은 몸이 굳어 버려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를 피하는 것이 더 창피하다는 생각에 피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준서의 앞에서 당당하고 싶었다.
심사 위원과 지원자로, 윤정은 그렇게 준서와 만났다. 정확히 9년 만에.
잠깐 마주친 그의 눈동자에서 윤정은 읽을 수 있었다. 그 역시 자신을 알아보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윤정 자신만큼 그도 자신을 그리워했는지 그건 알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예전의 친구인 한윤정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오디션 지원자 중 한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처음 섹스를 했던 여자를 대하는 시선이 아니라 그의 시선은 단지 많고 많은 오디션 지원자들 중의 한 명을 대하는 그런 표정이었다. 놀람과 당혹감보다는 차갑고 냉정한 시선.
사랑하는 사이를 연기하며 가졌던 그와의 섹스는 그의 시선 앞에서 한낱 꿈이었다. 기억 속에서 영원히 지워야 될 꿈.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지워야 된다. 그런데 준서와의 만남이 다시 기억을 상기시킨다. 빌어먹을 9년 전의 상처를…….
“윤정아, 너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셔? 오디션은 어떻게 된 거야? 잘됐어?”
걱정하는 소진을 무시하고 윤정은 잔에 가득 담긴 맥주를 단번에 비워 버렸다.
‘나쁜 자식.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다야. 정말 벌받을 놈. 천하에 재수 없는 자식.’
속으로 욕을 퍼부었는데도 윤정의 기분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가 욕을 먹을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도 윤정은 욕을 하고 있었다. 마치 스스로를 향한 푸념처럼.
먼발치에서 그의 존재를 느끼는 것과 막상 면상에서 그를 만나는 것은 확실히 달랐다. 증오하면서도 늘 그리웠던 존재. 그를 증오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윤정은 9년 전 저질렀던 그 과오로 인해 스스로가 미울 뿐이었다. 그 미움이 점점 커져 급기야 그를 증오하는 것뿐.
“너 무슨 일 있어? 술도 못 마시는 애가 왜 이래? 오디션 느낌이 안 좋구나. 그렇지?”
아마도. 잘될 일이 없지. 그가 날 봤으니 날 합격시킬 이유가 없잖아.
윤정은 오디션 현장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준서가 그 영화의 남자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아마 떨어질 것 같아. 그래서 속이 상해서…….”
“왜, 연기를 잘못했어?”
“그런 것 같아.”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준서와의 사이를. 물론 말을 해도 믿어 주지 않겠지만. 9년 전 그 일이 있은 이후, 준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군에 입대를 했다. 그러고는 그와 소식이 끊겼다. 다시 그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이미 신인 탤런트가 되어 있었다. 연극영화과를 전공했던 그이기에 충분히 예상은 했었지만 그렇게 갑자기 인기 있는 배우가 되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전공을 하지 않고 연극 무대에서 경험을 쌓은 윤정과는 가는 길이 너무나도 달랐다.
꼭 한 번은 찾아 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천천히 마셔. 그러다 술 취하겠다.”
“오늘은 미치도록 취하고 싶어. 소진아, 괜찮지?”
소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진은 둘도 없는 친구이자 룸메이트인 윤정의 부탁을 나 몰라라 할 수가 없었다. 아픔이 있어도 솔직하게 표현을 하지 않는 그녀, 오디션은 핑계일 뿐, 또 다른 상처가 그녀를 괴롭히는 것은 아닌지 소진은 걱정이 되었다.
*
“감독님, 아직 신인 배우 결정 안 하셨죠?”
“아직 결정 안 했어. 며칠 더 찾아보려고. 왜, 추천할 사람이라도 있나?”
“네.”
“누군데?”
“오늘 오디션을 본 친구 중에 괜찮은 친구가 있어서 말입니다.”
준서의 대답에 정우는 의아한 눈을 하고서 물었다.
“오늘 오디션을 본 애들 중에 있다고? 누구 말하는 거야?”
준서는 테이블 위에 놓인 프로필 중에서 하나를 꺼내어 정우에게 내밀었다. 정우는 준서가 내민 프로필과 사진을 살폈다.
“이 여자 말하는 거야?”
“네.”
“조연으로는 괜찮겠네.”
“아니요. 주연입니다.”
“주연?”
정우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겨우 1차 오디션에 합격한 여자를 주연으로 쓰겠다고?”
“네.”
“이 정도 경력에 다른 괜찮은 애들도 많아. 괜한 헛수고하지 마.”
딱 잘라 말하는 정우에게 반박하듯 준서가 말했다.
“이 친구로 해 주십시오. 아니면 한번 기회를 주시거나 조금 트레이닝 시키면 되지 않겠습니까?”
강한 준서의 반박에 정우의 미간이 심하게 찌푸려졌다.
“아는 여자야?”
“네.”
“어떻게 아는데.”
“그냥 조금 아는 친구입니다.”
3화
1. 재회(1)
“정말 빠져들겠어. 한번 빠지면 못 헤어 나올 것 같지 않니? 한윤정, 저 남자 눈빛 좀 보라니까.”
소진의 말에 윤정은 벽에 걸린 텔레비전 모니터를 잠시 쳐다보았다.
9년 동안 한시도 잊지 않았던 그의 존재, 가끔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뛰는 존재, 아니, 생각만 해도 가슴을 뛰게 만드는 그의 존재를 확인하자 윤정은 가슴이 아파 살며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녀는 모르는 척하며 반쯤 먹다 남은 아보카도 롤을 젓가락으로 한 조각 집어 입 안에 넣었다.
“넌 저 남자 좋아하지 않니? 영화 한 편 찍고 대박 났잖아. 광고도 몇 편 찍고. 요즘에 엄청 인기 많아. 정말 멋있지 않니? 어디 저런 남자 또 없을까? 저런 남자라면 당장 결혼할 텐데.”
소진이 떠드는 소리에는 관심 없이 윤정은 가늘게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남은 롤을 집어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넌 연예인한테 너무 관심이 없어. 하긴 너도 연예인이긴 하지만.”
단역 배우도 연예인이라고 한다면 그럴 테지. 하지만 연예인이라는 말이 듣기에 거추장스럽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기분. 그냥 단역 배우라고 불러 주는 게 윤정은 편했다.
“디저트는?”
윤정이 물었다.
“여기 뭐가 있지? 난 그냥 콜라 마실게.”
윤정이 지나가는 웨이터를 불러 디저트를 주문했다.
“여기 콜라 두 잔 주세요.”
디저트를 주문받고 돌아서려던 웨이터가 갑자기 놀란 눈을 하고서 윤정을 쳐다보았다.
“혹시 탤런트 아니세요?”
“……그, 그런데요.”
“사인 한 장만 해 주세요.”
“네.”
웨이터가 카운터로 걸어가 종이 한 장을 구해 오더니 윤정에게 내밀었다. 윤정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가 내민 종이에 사인을 해 주었다. 방긋 미소를 지으며 그가 돌아서자 소진이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윤정을 쳐다보았다.
“너도 이제 알아보는 사람이 있구나.”
“그러게. 이제 겨우 드라마 몇 편에 단역으로 나온 것뿐인데.”
“그건 그렇고 오늘 오디션 보는 건 어때? 자신 있어?”
윤정이 영화 오디션을 보는 날이다.
‘자신? 자신은 없다. 다만 내가 가야 할 길이니 하는 것뿐이지.’
오디션에서 수십 번을 떨어지고 나니 그동안 가지고 있던 자신감이 조금씩 소진되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남아 있는 자신감이 거의 바닥났는지도 모른다. 남은 것이 있다면 오로지 열정뿐이겠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줄 거니?”
“물론이지. 밥값은 해야지.”
“밥 사 준 것 때문에 기다리는 거라면 사양이야.”
“그럼 친구로서 당연히 기다려 주는 걸로 할게. 됐니?”
“응.”
윤정은 소진을 보며 크게 미소를 지었다.
오디션을 보는 영화 기획실 건물 앞에 도착하자 윤정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윤정은 호흡을 몇 번 가다듬었다. 늘 이번이 마지막이기를 기원하며 보는 오디션. 소진이 살며시 손을 잡으며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지만 윤정의 호흡은 조금씩 거칠어져 갔다.
“잘될 거야. 한윤정 화이팅!”
소진의 응원 소리를 귓전에 들으며 윤정은 오디션 현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38번 한윤정 씨.”
1시간 만에 이름이 호명되었다. 수십 번의 오디션을 보았는데도 떨리는 건 늘 똑같다. 곧 크랭크인에 들어갈 영화의 조연급 남녀 배우를 모집하는 오디션이다. 제법 알려진 감독이라 윤정은 신뢰가 갔다.
오디션 현장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윤정은 긴장한 탓에 숨이 막혔다.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한 줄로 늘어선 지원자들의 옆에 나란히 섰다. 여전히 가쁜 호흡에 심사 위원들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윤정의 번호와 이름이 누군가에 의해서 불리어지고 윤정이 몇 가지 질문에 대답을 했다. 그들이 던져 주는 대본을 읽고 연기를 하고 나자 곧 오디션은 끝이 났다. 뭐라고 대답을 했는지 어떻게 연기를 했는지 윤정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무것도 기억을 할 수가 없었다.
오디션 현장에서 마주친 단 한 사람만이 그녀의 기억에 남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인데,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 평생 가장 큰 실수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날이 추억처럼 머릿속에 떠올라 기억이 난다.
9년 전 5월에 있어났던 일. 악몽인지, 추억인지, 그리움인지 분간도 할 수 없는 기억의 잔재 속 준서의 존재. 그렇게 그를 그리워했었다. 미워하면서 결코 미워할 수 없고 증오하면서도 그리웠던 그.
그런데 왜 하필 이런 자리에서 그를…….
준서를 보는 순간, 윤정은 차마 뛰쳐나갈 수가 없었다. 이미 준서의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부터 윤정은 몸이 굳어 버려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를 피하는 것이 더 창피하다는 생각에 피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준서의 앞에서 당당하고 싶었다.
심사 위원과 지원자로, 윤정은 그렇게 준서와 만났다. 정확히 9년 만에.
잠깐 마주친 그의 눈동자에서 윤정은 읽을 수 있었다. 그 역시 자신을 알아보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윤정 자신만큼 그도 자신을 그리워했는지 그건 알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예전의 친구인 한윤정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오디션 지원자 중 한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처음 섹스를 했던 여자를 대하는 시선이 아니라 그의 시선은 단지 많고 많은 오디션 지원자들 중의 한 명을 대하는 그런 표정이었다. 놀람과 당혹감보다는 차갑고 냉정한 시선.
사랑하는 사이를 연기하며 가졌던 그와의 섹스는 그의 시선 앞에서 한낱 꿈이었다. 기억 속에서 영원히 지워야 될 꿈.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지워야 된다. 그런데 준서와의 만남이 다시 기억을 상기시킨다. 빌어먹을 9년 전의 상처를…….
“윤정아, 너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셔? 오디션은 어떻게 된 거야? 잘됐어?”
걱정하는 소진을 무시하고 윤정은 잔에 가득 담긴 맥주를 단번에 비워 버렸다.
‘나쁜 자식.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다야. 정말 벌받을 놈. 천하에 재수 없는 자식.’
속으로 욕을 퍼부었는데도 윤정의 기분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가 욕을 먹을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도 윤정은 욕을 하고 있었다. 마치 스스로를 향한 푸념처럼.
먼발치에서 그의 존재를 느끼는 것과 막상 면상에서 그를 만나는 것은 확실히 달랐다. 증오하면서도 늘 그리웠던 존재. 그를 증오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윤정은 9년 전 저질렀던 그 과오로 인해 스스로가 미울 뿐이었다. 그 미움이 점점 커져 급기야 그를 증오하는 것뿐.
“너 무슨 일 있어? 술도 못 마시는 애가 왜 이래? 오디션 느낌이 안 좋구나. 그렇지?”
아마도. 잘될 일이 없지. 그가 날 봤으니 날 합격시킬 이유가 없잖아.
윤정은 오디션 현장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준서가 그 영화의 남자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아마 떨어질 것 같아. 그래서 속이 상해서…….”
“왜, 연기를 잘못했어?”
“그런 것 같아.”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준서와의 사이를. 물론 말을 해도 믿어 주지 않겠지만. 9년 전 그 일이 있은 이후, 준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군에 입대를 했다. 그러고는 그와 소식이 끊겼다. 다시 그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이미 신인 탤런트가 되어 있었다. 연극영화과를 전공했던 그이기에 충분히 예상은 했었지만 그렇게 갑자기 인기 있는 배우가 되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전공을 하지 않고 연극 무대에서 경험을 쌓은 윤정과는 가는 길이 너무나도 달랐다.
꼭 한 번은 찾아 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천천히 마셔. 그러다 술 취하겠다.”
“오늘은 미치도록 취하고 싶어. 소진아, 괜찮지?”
소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진은 둘도 없는 친구이자 룸메이트인 윤정의 부탁을 나 몰라라 할 수가 없었다. 아픔이 있어도 솔직하게 표현을 하지 않는 그녀, 오디션은 핑계일 뿐, 또 다른 상처가 그녀를 괴롭히는 것은 아닌지 소진은 걱정이 되었다.
*
“감독님, 아직 신인 배우 결정 안 하셨죠?”
“아직 결정 안 했어. 며칠 더 찾아보려고. 왜, 추천할 사람이라도 있나?”
“네.”
“누군데?”
“오늘 오디션을 본 친구 중에 괜찮은 친구가 있어서 말입니다.”
준서의 대답에 정우는 의아한 눈을 하고서 물었다.
“오늘 오디션을 본 애들 중에 있다고? 누구 말하는 거야?”
준서는 테이블 위에 놓인 프로필 중에서 하나를 꺼내어 정우에게 내밀었다. 정우는 준서가 내민 프로필과 사진을 살폈다.
“이 여자 말하는 거야?”
“네.”
“조연으로는 괜찮겠네.”
“아니요. 주연입니다.”
“주연?”
정우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겨우 1차 오디션에 합격한 여자를 주연으로 쓰겠다고?”
“네.”
“이 정도 경력에 다른 괜찮은 애들도 많아. 괜한 헛수고하지 마.”
딱 잘라 말하는 정우에게 반박하듯 준서가 말했다.
“이 친구로 해 주십시오. 아니면 한번 기회를 주시거나 조금 트레이닝 시키면 되지 않겠습니까?”
강한 준서의 반박에 정우의 미간이 심하게 찌푸려졌다.
“아는 여자야?”
“네.”
“어떻게 아는데.”
“그냥 조금 아는 친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