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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는 내 남자입니다
1화
프롤로그
버스에서 내리자 차가운 바람이 지민의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다.
일기 예보와는 달리 눈은 내리지 않았다. 몇 발자국 걷자 커피숍의
전면 유리 너머로 형형색색의 크리스마스 전구를 휘감은 포인세티아가 눈에 들어왔다.
커피숍 입구 좌우에 매달린 스피커에서는 귀에 익은 캐럴송이 흘러나왔다.
지민은 손에 든 조그만 종이 가방의 손잡이를 꼭 쥐었다. 가방 안에는 지민이 난생처음 남자에게 줄 선물이 들어 있었다.
지난 3개월 동안 정성스레 짠 목도리. 그 목도리는 하얀 바탕에 빨간색 하트로 가득 채워진 포장지에 싸여 있었다. 그건 단순한 포장지가 아니라 지민의 마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방 안에 든 포장지의 하트를 내려다보며 지민은 상상했다. 따스한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차콜 그레이 색상의 터틀넥 스웨터를 입고서 지민이 짠 고급 캐시미어 원단의 빨간색 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연필로 눈 내리는 창밖의 풍경을 스케치하는 주혁의 모습을.
상상만으로 지민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만개했다.
“민지민!”
며칠 전 친구들과 함께 최신 개봉작 영화를 보고 막 거리로 나올 때였다. 누군가가 지민의 이름을 불러 돌아보자, 정말 우연인지 운명인지 말도 안 되게 그토록 보고 싶어 지민이 안달하던 주혁이 그녀의 등 뒤에 서 있었다.
물론 지민의 이름을 부른 건, 주혁이 아니라 윤호였다.
지민이 짝사랑하는 주혁이 지민의 이름을 기억할 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지민은 주혁의 반이 아니라 윤호의 반이니까.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지민이 주혁의 수업을 받긴 하지만 지민은 눈에 띄는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게다가 소심하기까지 한 지민은 주혁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늘 수업 시간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런 아이였다.
지민은 주혁과 윤호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그들에게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주혁의 바로 1미터 앞에 지민이 멈춰 서서는 고개를 숙여 묵례를 했다.
주혁이 숨을 쉬면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주혁과 지민의 거리는 가까웠다. 그에게선 갓 볶은 원두 같은 커피 향이 나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근처 커피숍에서 그런 향이 났나 보다.
지민은 가파르게 뛰어오르는 자신의 숨소리를 들키지 않기 위해 숨을 삼켰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지민의 손바닥에 땀이 맺히고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지민은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들어 주혁을 쳐다보았다. 주혁도 지민을 쳐다보고 있었다.
주혁과 눈이 마주치자 지민의 심장이 콩닥거렸다. 주혁의 눈동자는 목탄을 마구 눌러 찍은 듯이 아주 진한 흑색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도 투명했다.
지민은 창피하다는 생각도 잊은 채 얼빠진 사람처럼 그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 순간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아니,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싶었다.
그러다 곧 자신이 너무 주혁의 얼굴을 뚫어져라 본 건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창피함이 몰려왔다.
창피함에 지민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바닥에 보이는 보도블록의 무늬만 쳐다보았다.
지민의 시야에 가늘고 긴 주혁의 손가락이 보였다. 늘 연필이나 붓을 쥐고 있어서 그런지 세 번째 손가락 마디가 유난히도 튀어나와 있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뭐 할 거야?”
지민은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그런데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쉽게도 주혁이 아니라 윤호였다.
지민은 순간적으로 윤호가 아니라 주혁이 자신에게 한 말인가 착각을 했었다. 그리고 곧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주혁이 아니라 윤호란 사실에 지민은 속으로 크게 실망을 하고 말았다.
주혁의 앞에만 있으면 지민은 늘 그랬다. 바보가 되는 것만 같았다. 주혁의 앞에 있는 것만으로 그녀의 심장은 말도 안 되게 빠른 속도로 뛰고 있었다.
“왜 대답이 없어? 이번 크리스마스에 뭐 할거냐니까?”
주혁이 앞에 있다고 생각하자 지민은 방금 윤호가 무슨 말을 했는지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진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다.
크리스마스? 그게 뭐하는 거지? 새로 나온 빵인가? 누구 생일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난 여기 왜 서 있었지? 내 앞에 있는 건 조각상?
꿈에서 깨듯 정신을 차린 지민은 겨우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 그…… 그날 그냥 아무것도…… 그, 그냥 집에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지민은 지난 19년 인생을 살면서 자신이 이렇게 말을 더듬고 횡설수설 말을 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 깨달았다.
“시간 되면 크리스마스에 화실로 놀러 와. 애들이 모여서 조촐하게 파티를 하기로 했거든. 난 하루 종일 있을 거니까 아무 때나 찾아와.”
“아…… 네…….”
혀가 얼어붙었는지 말이 길게 나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이번에는 윤호가 아니라 주혁이 입술을 움직였다.
“그럼, 그날 보자.”
주혁은 그렇게 말을 하고 지민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주혁의 목소리와 짧은 손짓에 지민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튀어 올랐다.
지민은 고개를 숙여 묵례를 하고는 재빨리 돌아서서 친구들이 있는 곳을 향해 냅다 뛰어갔다. 여전히 그녀의 심장은 터질 것처럼 콩닥거렸다.
지민의 친구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수군거렸다.
“우와, 누구야? 둘 다 잘생겼다.”
“와아, 멋있다. 누구야?”
지민은 친구들에게 주혁과 윤호의 존재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았다.
방금 속삭이듯 나른하게 지민의 귓가를 파고든 주혁의 목소리와 깊고 투명한 그의 먹색 눈동자가 남긴 여운을 깨고 싶지 않아서였다.
지민은 그 자리에 선 채로 주혁이 사라질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게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 어느 극장 앞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지민은 직접 짠 목도리와 함께 주혁의 화실을 찾아갔다.
실기 시험을 치르고 난 뒤, 짐을 챙기기 위해 화실에 한 번 들른 것을 빼고는 처음이었다. 지민은 두 달 가까이 주혁을 보지 못했고, 그동안 극장 앞에서 한 번 마주친 게 전부였다.
주혁을 향한 지민의 짝사랑은 작년 크리스마스 즈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겨울 방학이 시작되기 며칠 전에 지민은 미술 입시를 위해 화실을 다니기 시작했고, 화실을 운영하는 주혁을 마음에 담게 되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건 주혁이 지민의 담당이 아니라 주혁의 친구인 윤호가 지민의 담당 샘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그때부터 그녀의 순수한 짝사랑이 시작된 지 꼬박 1년이 되었다.
버스에서 내려 화실까지 걷다 보니 어느새 하늘에서 하얀 눈송이가 날리기 시작했다. 눈송이 하나가 지민의 콧잔등에 내려앉았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왠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지민은 혼자서 방긋 미소를 지었다.
화실이 있는 2층 계단을 올라 복도를 걷던 지민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오르는 자신의 심장 위에 가만히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녀의 심장이 금방이라도 외투를 뚫고 나올 것처럼 두근거렸다.
화실로 이어진 창문 앞에서 지민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벽에 기대어 화실 안을 힐끔 쳐다보자 실내를 가로지르는 주혁의 모습이 보였다.
얼핏 보기엔 주혁 외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다른 학생이나 주혁의 친구인 윤호를 만날까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지민은 주혁이 혼자 있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때였다. 실내에 하나밖에 보이지 않던 실루엣이 하나 더 늘어났다. 낯선 실루엣이 점점 주혁에게로 다가갔다.
창가에 서서 몰래 훔쳐보자 그 실루엣의 주인은 지민과 같은 학년인 수정이었다. 수정이 다니는 여고에서 가장 예쁘다고 소문이 난 아이.
갑자기 지민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왠지 불길한 기운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다.
아니나 다를까, 창 너머로 보이는 수정이 주혁에게 뭐라고 중얼거리며 걸어가더니 갑자기 주혁의 뺨에 입술을 맞추는 게 아닌가.
순간, 지민의 다리에 힘이 스르르 풀렸다. 그녀의 손에서 조그만 종이가방이 힘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아닐 거야, 잘못 본 걸 거야.’
지민은 고개를 내저으며 현실을 부정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다시 실내를 응시하자 수정이 예쁘게 포장된 선물을 주혁에게 내밀고 있었다.
수정의 선물을 받아 든 주혁이 싱긋 수정에게 미소를 보이며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은색으로 반짝이던 포장지가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그 안에선 색색의 체크무늬가 화려한 목도리가 나왔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지민의 눈동자에는 옅은 눈물방울 하나가 고였다.
짝사랑은 원래 다 이런 거야. 이렇게 슬픈 걸 거야.
지민은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주워 들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갔다. 지난 1년 동안 셀 수 없이 많이 걸었던 복도가 오늘따라 유난히도 길게 느껴졌다.
“지민아, 어디 가는 거니? 안에 안 들어가? 이따 애들 모이면 크리스마스 파티 할 건데. 음식도 잔뜩 주문했어.”
늘 그렇듯 윤호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지민의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는 윤호를 향해 눈물을 참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갑자기 몸이 피곤해서 들어가 봐야겠어요.”
윤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그런데 몸이 아프다면서 여기까지 왜 왔어?”
윤호의 눈동자가 지민이 손에 들고 있는 종이가방으로 향했다. 그가 고개를 앞으로 내밀자 가방 안에 든 포장지가 보였다.
“그건 뭐니? 선물 아냐? 누구 줄 거야? 혹시 나?”
지민은 윤호를 향해 슬픈 듯이 미소 지었다.
“네. 선생님 주려고 가져왔어요.”
지민은 종이가방을 그대로 윤호에게 내밀었다. 윤호는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민을 응시하다 종이가방을 받았다.
“진짜 나 주는 거 맞아?”
“네.”
“좀 의외네. 고맙다. 그런데 어쩌지? 난 지민이 선물 따로 준비하지 않았는데.”
지민은 배시시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그럼 전 그만 갈게요. 메리 크리스마스!”
“그래, 메리 크리스마스!”
지민은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를 하고는 황급히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윤호의 시선이 느껴져 뒤통수가 따가웠다. 홧김에 괜한 짓을 한 것 같아 후회가 밀려들었다.
‘모르겠어. 그냥 될 대로 돼라. 내가 뭘 어떻게 하든지 내일은 어김없이 오고 지구는 돌잖아.’
그날 지민은 열아홉 어린 순정에 심하게 스크래치를 입고 말았다. 생애 처음 남자에게 줄 선물인데, 그토록 바라던 그 남자가 아니라 다른 남자에게 주었다.
다른 남자에게,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그냥 아는 오빠, 지민이 좋아하는 남자의 친구.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캐럴송이 흘러나왔다.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우는 아이에게는 산타 할아버지가 서언물을 안 주우신대.
지민은 그 캐럴송이 이렇게나 슬픈 노래인지 그날 새삼 깨달았다.
하늘에선 여전히 눈이 내렸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그리고 지민에겐 악몽 같은 하루였다.
크리스마스의 저주 같은.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저주.
1화
프롤로그
버스에서 내리자 차가운 바람이 지민의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다.
일기 예보와는 달리 눈은 내리지 않았다. 몇 발자국 걷자 커피숍의
전면 유리 너머로 형형색색의 크리스마스 전구를 휘감은 포인세티아가 눈에 들어왔다.
커피숍 입구 좌우에 매달린 스피커에서는 귀에 익은 캐럴송이 흘러나왔다.
지민은 손에 든 조그만 종이 가방의 손잡이를 꼭 쥐었다. 가방 안에는 지민이 난생처음 남자에게 줄 선물이 들어 있었다.
지난 3개월 동안 정성스레 짠 목도리. 그 목도리는 하얀 바탕에 빨간색 하트로 가득 채워진 포장지에 싸여 있었다. 그건 단순한 포장지가 아니라 지민의 마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방 안에 든 포장지의 하트를 내려다보며 지민은 상상했다. 따스한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차콜 그레이 색상의 터틀넥 스웨터를 입고서 지민이 짠 고급 캐시미어 원단의 빨간색 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연필로 눈 내리는 창밖의 풍경을 스케치하는 주혁의 모습을.
상상만으로 지민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만개했다.
“민지민!”
며칠 전 친구들과 함께 최신 개봉작 영화를 보고 막 거리로 나올 때였다. 누군가가 지민의 이름을 불러 돌아보자, 정말 우연인지 운명인지 말도 안 되게 그토록 보고 싶어 지민이 안달하던 주혁이 그녀의 등 뒤에 서 있었다.
물론 지민의 이름을 부른 건, 주혁이 아니라 윤호였다.
지민이 짝사랑하는 주혁이 지민의 이름을 기억할 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지민은 주혁의 반이 아니라 윤호의 반이니까.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지민이 주혁의 수업을 받긴 하지만 지민은 눈에 띄는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게다가 소심하기까지 한 지민은 주혁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늘 수업 시간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런 아이였다.
지민은 주혁과 윤호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그들에게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주혁의 바로 1미터 앞에 지민이 멈춰 서서는 고개를 숙여 묵례를 했다.
주혁이 숨을 쉬면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주혁과 지민의 거리는 가까웠다. 그에게선 갓 볶은 원두 같은 커피 향이 나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근처 커피숍에서 그런 향이 났나 보다.
지민은 가파르게 뛰어오르는 자신의 숨소리를 들키지 않기 위해 숨을 삼켰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지민의 손바닥에 땀이 맺히고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지민은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들어 주혁을 쳐다보았다. 주혁도 지민을 쳐다보고 있었다.
주혁과 눈이 마주치자 지민의 심장이 콩닥거렸다. 주혁의 눈동자는 목탄을 마구 눌러 찍은 듯이 아주 진한 흑색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도 투명했다.
지민은 창피하다는 생각도 잊은 채 얼빠진 사람처럼 그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 순간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아니,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싶었다.
그러다 곧 자신이 너무 주혁의 얼굴을 뚫어져라 본 건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창피함이 몰려왔다.
창피함에 지민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바닥에 보이는 보도블록의 무늬만 쳐다보았다.
지민의 시야에 가늘고 긴 주혁의 손가락이 보였다. 늘 연필이나 붓을 쥐고 있어서 그런지 세 번째 손가락 마디가 유난히도 튀어나와 있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뭐 할 거야?”
지민은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그런데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쉽게도 주혁이 아니라 윤호였다.
지민은 순간적으로 윤호가 아니라 주혁이 자신에게 한 말인가 착각을 했었다. 그리고 곧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주혁이 아니라 윤호란 사실에 지민은 속으로 크게 실망을 하고 말았다.
주혁의 앞에만 있으면 지민은 늘 그랬다. 바보가 되는 것만 같았다. 주혁의 앞에 있는 것만으로 그녀의 심장은 말도 안 되게 빠른 속도로 뛰고 있었다.
“왜 대답이 없어? 이번 크리스마스에 뭐 할거냐니까?”
주혁이 앞에 있다고 생각하자 지민은 방금 윤호가 무슨 말을 했는지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진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다.
크리스마스? 그게 뭐하는 거지? 새로 나온 빵인가? 누구 생일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난 여기 왜 서 있었지? 내 앞에 있는 건 조각상?
꿈에서 깨듯 정신을 차린 지민은 겨우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 그…… 그날 그냥 아무것도…… 그, 그냥 집에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지민은 지난 19년 인생을 살면서 자신이 이렇게 말을 더듬고 횡설수설 말을 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 깨달았다.
“시간 되면 크리스마스에 화실로 놀러 와. 애들이 모여서 조촐하게 파티를 하기로 했거든. 난 하루 종일 있을 거니까 아무 때나 찾아와.”
“아…… 네…….”
혀가 얼어붙었는지 말이 길게 나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이번에는 윤호가 아니라 주혁이 입술을 움직였다.
“그럼, 그날 보자.”
주혁은 그렇게 말을 하고 지민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주혁의 목소리와 짧은 손짓에 지민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튀어 올랐다.
지민은 고개를 숙여 묵례를 하고는 재빨리 돌아서서 친구들이 있는 곳을 향해 냅다 뛰어갔다. 여전히 그녀의 심장은 터질 것처럼 콩닥거렸다.
지민의 친구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수군거렸다.
“우와, 누구야? 둘 다 잘생겼다.”
“와아, 멋있다. 누구야?”
지민은 친구들에게 주혁과 윤호의 존재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았다.
방금 속삭이듯 나른하게 지민의 귓가를 파고든 주혁의 목소리와 깊고 투명한 그의 먹색 눈동자가 남긴 여운을 깨고 싶지 않아서였다.
지민은 그 자리에 선 채로 주혁이 사라질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게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 어느 극장 앞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지민은 직접 짠 목도리와 함께 주혁의 화실을 찾아갔다.
실기 시험을 치르고 난 뒤, 짐을 챙기기 위해 화실에 한 번 들른 것을 빼고는 처음이었다. 지민은 두 달 가까이 주혁을 보지 못했고, 그동안 극장 앞에서 한 번 마주친 게 전부였다.
주혁을 향한 지민의 짝사랑은 작년 크리스마스 즈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겨울 방학이 시작되기 며칠 전에 지민은 미술 입시를 위해 화실을 다니기 시작했고, 화실을 운영하는 주혁을 마음에 담게 되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건 주혁이 지민의 담당이 아니라 주혁의 친구인 윤호가 지민의 담당 샘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그때부터 그녀의 순수한 짝사랑이 시작된 지 꼬박 1년이 되었다.
버스에서 내려 화실까지 걷다 보니 어느새 하늘에서 하얀 눈송이가 날리기 시작했다. 눈송이 하나가 지민의 콧잔등에 내려앉았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왠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지민은 혼자서 방긋 미소를 지었다.
화실이 있는 2층 계단을 올라 복도를 걷던 지민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오르는 자신의 심장 위에 가만히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녀의 심장이 금방이라도 외투를 뚫고 나올 것처럼 두근거렸다.
화실로 이어진 창문 앞에서 지민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벽에 기대어 화실 안을 힐끔 쳐다보자 실내를 가로지르는 주혁의 모습이 보였다.
얼핏 보기엔 주혁 외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다른 학생이나 주혁의 친구인 윤호를 만날까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지민은 주혁이 혼자 있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때였다. 실내에 하나밖에 보이지 않던 실루엣이 하나 더 늘어났다. 낯선 실루엣이 점점 주혁에게로 다가갔다.
창가에 서서 몰래 훔쳐보자 그 실루엣의 주인은 지민과 같은 학년인 수정이었다. 수정이 다니는 여고에서 가장 예쁘다고 소문이 난 아이.
갑자기 지민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왠지 불길한 기운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다.
아니나 다를까, 창 너머로 보이는 수정이 주혁에게 뭐라고 중얼거리며 걸어가더니 갑자기 주혁의 뺨에 입술을 맞추는 게 아닌가.
순간, 지민의 다리에 힘이 스르르 풀렸다. 그녀의 손에서 조그만 종이가방이 힘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아닐 거야, 잘못 본 걸 거야.’
지민은 고개를 내저으며 현실을 부정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다시 실내를 응시하자 수정이 예쁘게 포장된 선물을 주혁에게 내밀고 있었다.
수정의 선물을 받아 든 주혁이 싱긋 수정에게 미소를 보이며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은색으로 반짝이던 포장지가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그 안에선 색색의 체크무늬가 화려한 목도리가 나왔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지민의 눈동자에는 옅은 눈물방울 하나가 고였다.
짝사랑은 원래 다 이런 거야. 이렇게 슬픈 걸 거야.
지민은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주워 들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갔다. 지난 1년 동안 셀 수 없이 많이 걸었던 복도가 오늘따라 유난히도 길게 느껴졌다.
“지민아, 어디 가는 거니? 안에 안 들어가? 이따 애들 모이면 크리스마스 파티 할 건데. 음식도 잔뜩 주문했어.”
늘 그렇듯 윤호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지민의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는 윤호를 향해 눈물을 참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갑자기 몸이 피곤해서 들어가 봐야겠어요.”
윤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그런데 몸이 아프다면서 여기까지 왜 왔어?”
윤호의 눈동자가 지민이 손에 들고 있는 종이가방으로 향했다. 그가 고개를 앞으로 내밀자 가방 안에 든 포장지가 보였다.
“그건 뭐니? 선물 아냐? 누구 줄 거야? 혹시 나?”
지민은 윤호를 향해 슬픈 듯이 미소 지었다.
“네. 선생님 주려고 가져왔어요.”
지민은 종이가방을 그대로 윤호에게 내밀었다. 윤호는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민을 응시하다 종이가방을 받았다.
“진짜 나 주는 거 맞아?”
“네.”
“좀 의외네. 고맙다. 그런데 어쩌지? 난 지민이 선물 따로 준비하지 않았는데.”
지민은 배시시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그럼 전 그만 갈게요. 메리 크리스마스!”
“그래, 메리 크리스마스!”
지민은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를 하고는 황급히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윤호의 시선이 느껴져 뒤통수가 따가웠다. 홧김에 괜한 짓을 한 것 같아 후회가 밀려들었다.
‘모르겠어. 그냥 될 대로 돼라. 내가 뭘 어떻게 하든지 내일은 어김없이 오고 지구는 돌잖아.’
그날 지민은 열아홉 어린 순정에 심하게 스크래치를 입고 말았다. 생애 처음 남자에게 줄 선물인데, 그토록 바라던 그 남자가 아니라 다른 남자에게 주었다.
다른 남자에게,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그냥 아는 오빠, 지민이 좋아하는 남자의 친구.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캐럴송이 흘러나왔다.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우는 아이에게는 산타 할아버지가 서언물을 안 주우신대.
지민은 그 캐럴송이 이렇게나 슬픈 노래인지 그날 새삼 깨달았다.
하늘에선 여전히 눈이 내렸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그리고 지민에겐 악몽 같은 하루였다.
크리스마스의 저주 같은.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