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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는 내 남자입니다
2화
1. 크로키(1)
엄청나게 빨리 그리는 그림. 너무 빠른 대신에 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경우도 있다.
인생은 크로키다. 생각지도 못한 사이, 빠르게 나이를 먹어 간다. 아니, 늙어 가고 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저주 이후, 지민도 빨리 늙어 가는 중이다.
“규민아, 나중에 누나하고 영화 한 편 때릴까?”
지민은 비음을 잔뜩 넣은 목소리로 이제 막 군대를 제대한 남동생 규민에게 말을 했다. 스물다섯이 된 지금까지 모태솔로로 지낸 지민은 틈만 나면 규민을 통해 남자란 인간을 분석하고 탐구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물론 그게 첫 번째 이유이기도 한데, 더 큰 이유는 그녀가 좋아하는 장르의 최신작이 개봉했는데 같이 가 줄 남자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뭐, 여자 친구랑 같이 가면 되는 일이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딱 한 번쯤은 나도 남자와 영화를 보러 왔다는 사실을 극장 안에 있는 직원이나 불특정 다수들에게 보이고 싶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규민은 경기를 일으키며 치를 떨었다.
“아, 징그럽게 뭔 영화야?”
“오누이끼리 다정하게 영화 좀 보자는데, 정말 이러기야?”
막 제대를 한 예비군답게 규민은 아무도 없는 숲 속 한가운데서 간첩이라도 만난 것처럼 잔뜩 지민을 경계했다.
“내 친구들 다 물어봐도 누나랑 같이 극장 갔다는 애들 한 명도 못 봤어. 어우, 완전 생각만 해도 막 오글거린다.”
“야, 오글거릴 게 뭐 있어? 좀 떨어져서 따로 앉아서 보면 되지. 내가 영화 보여 주고 밥도 사 준다는데 뭘 그렇게 값을 올려?”
규민은 밥이고 영화고 누나하고는 절대 가지 않겠다는 듯 필사의 의지를 다졌다. 규민이 군에 입대하던 날에도 이 정도의 비장함은 없었다.
“집에서 같이 밥 먹는 것도 지겨운데, 밖에 나가서도 같이 밥 먹어야 돼? 나도 자유를 좀 만끽하자. 이제 제대한 지 보름이다.”
“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야. 그냥 따로 영화 보고 나올 때만 같이 나오면 되잖아. 그때 사진 한 장만 같이 박으면 되는 건데.”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규민은 누나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극장에서 나올 때 인증샷 한 장을 찍기 위해 남동생에게 같이 극장에 가자고 하다니.
“인증샷 하나만 찍자.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할게. 이 누나, 남자한테 인기 많은 척 좀 하자. 넌 누나가 모태솔로로 늙어 가는 게 안타깝지도 않니?”
지민이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동정표를 구했지만 규민은 동정은커녕 콧방귀만 뀌었다.
“안타깝지, 안타깝고말고. 그런데 알고 보면 내가 더 안타깝지. 알잖아, 나 군대 가 있는 동안 여자 친구 고무신 거꾸로 신은 거.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탈영하고 싶은 거, 참고 참아서 여기까지 온 거야. 이런 내 마음을 누나가 알아?”
규민이 첫 휴가를 나왔을 때, 애인이 고무신 거꾸로 신었다며 울고불고 군대 안 간다던 놈을 지민이 두드려 패서 군대에 보낸 기억이 났다.
지민은 무섭게 노려보며 회심의 한마디를 던졌다.
“그래도 넌 여자 친구라도 있었잖아.”
모태솔로의 비애는 생활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주위 사람들, 심지어 가족까지도 무시한다.
“너 오늘 첫 출근인데 뭐 입고 갈 거야?”
아침 식사를 끝내자마자 나름 아줌마계의 송혜교라고 스스로 떠들고 다니는 지민의 엄마 정미정 여사가 지민을 아래위로 훑었다. 조금 예쁘고 동안이긴 해서 가끔 지민과 나란히 걸으면 자매지간으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 아주 멀리서 봤을 때 간혹.
“그냥 깔끔한 오피스 정장 타입이면 되지 않을까? 지난번 사촌 오빠 결혼식 때 입고 갔던.”
“어허, 얘는 누굴 닮아 이렇게 촌스럽지? 몸매도 되고 얼굴도 되겠다, 좀 화려한 것 좀 입고 다녀. 그러니까 네가 남자 친구가 없는 거잖아. 무난한 거 말고 튀는 것 좀 입으란 말이야. 거기 총각 선생님도 많을 거 아니냐. 너 예쁜 다리 뒀다 뭐 할 거니? 국 끓여 먹을 거니? 쫙 달라붙는 원피스나 미니스커트 같은 거 좋잖아!”
네, 예쁜 다리 뒀다 국 끓여 먹을 겁니다. 내가 어디 무도회장이나 야유회 가는 줄 아십니까, 같은 뉘앙스로 지민은 정 여사를 쳐다보았다.
“엄마, 나 놀러 가는 게 아니라 학교 가는 거야.”
“고정관념을 깨. 요즘 같은 세상에 선생이라고 꼭 정장 입으란 법 있어? 그렇게 보수적이니까 네가 남자 친구가 없는 거잖아.”
그런가? 그래서 없는 건가? 매일 그 말을 대여섯 번 이상 듣다 보면 어느새 세뇌를 당한다. 정말 솔로의 비애다. 주위에서 그렇게 세뇌를 시킨다. 그러니까 남자 친구가 없다고. 그래서 왠지 커플들과는 태생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 뭔가 태생적으로 차이가 날 거야. 커플 인간들은 원래부터 유전자가 다를 거야. 선택받은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음이 분명해. 아님 연애에 적합한 유전자를 타고난다거나. 어쩌면 모태솔로 인간들은 인간의 본능이자 기본 욕망인 짝짓기를 거부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거나 연애를 할 수 없는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보유하고 있거나.
“이것도 마음에 안 들고, 이것도 별론데.”
거울 앞에 선 지민은 옷을 입고 한 바퀴 돌았다. 침대 위에는 옷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제 옷을 고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더 이상 지체하면 첫날부터 지각하게 생겼다. 이미 화장은 끝낸 후였다. 평소에도 화장을 잘 하지 않는 지민이라 기초화장만 했다. 물론 어느 정도 미모가 받쳐 주니까 가능한 일이라며 혼자 흐뭇해했다. 게다가 남자 고등학교 교생 실습을 나가는 자리에 진하게 화장을 하고 가면 가볍게 보일까 봐 최소한 옅게 발랐다.
화장은 그렇다 치고 문제는 의상이었다. 거울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지민은 좋은 생각이 난 듯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 섬마을 선생님.”
왜 있지 않은가.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섬마을에 막 부임 온 여자 선생님의 의상 말이다. 올이 굵어서 안이 조금 비치는 니트 카디건을 걸치고, 조금 바람에 나풀거리는 밝은색 계통의 플레어스커트를 입고, 바람에 긴 생머리가 나부끼면 남학생들이 두 눈에 하트를 잔뜩 그려 넣으며 쳐다보고, 언제 나타났는지 이승기 같이 생긴 애가 나타나 누난 내 여자라니까를 부르거나, 그중에서 김재원 같이 생긴 애가 나타나 몰래 적은 러브레터를 수줍게 건넨다거나…….
그러면 또 지민은 야들야들한 회초리 같은 거 하나 어디서 구해 가지고 와서는 손바닥 펴, 넌 학생이고 난 선생이야, 막 그러고.
생각만 해도 지민의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지민은 섬마을 선생님으로 코스프레 한 복장을 하고서 부푼 가슴을 안은 채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그 부푼 환상을 B29기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투하하듯 무참히 박살 낸 건 원수 같은 남동생 규민이었다.
“와아, 그건 또 뭐야? 왜 이렇게 촌스러워. 70년대 복고풍이야? 혹시 그거 엄마 옷 아냐?”
그러자 주방에 있던 정미정 여사가 고개를 내밀더니 쑥대밭이 된 지민의 가슴에서 살아 있는 생명체는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는 듯 확인 사살까지 해 주었다.
“나도 저런 옷은 거저 줘도 안 입는다. 아니, 돈 주고 입으라고 해도 안 입겠다.”
이런 가족들과 지내다 보면 가끔은 스스로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다스리거나 마구 상승하는 혈압을 다스리는 초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지금이 그럴 때다.
지민은 어금니를 살며시 깨물었다. 얼마 전 치과에 갔더니 특정 부위의 치아가 많이 닳은 것을 보고 의사 선생이 지민에게 그랬었다.
어금니를 자주 깨물지 않냐고.
지민은 무시하고 현관으로 나가 신발장에서 굽이 조금 있는 펌프스 구두를 하나 꺼내 신었다.
“엄마, 나 먼저 가요.”
공중에다 대고 아무렇게나 말한 뒤, 지민이 막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염려해서 하는 말인지 가서 한번 당해 보라는 말인지 규민이 한마디 던졌다.
“남자애들 교실 안 가 봤지? 장난 아냐. 냄새 쩔어. 걔들 잘 안 씻는 애들 엄청 많아. 그리고 그런 치마 입고 가면 조심해. 언제 봉변당할지 몰라. 바닥 잘 살펴봐, 거울 같은 거 있는지 조심해야 돼. 몰카 찍는 애들도 많거든.”
지민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문을 확 닫았다. 그리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걸어가면 10분 정도 걸린다는 대한민국에서 유명한 포털 사이트의 ‘길 찾기’의 말을 너무 맹신한 걸까. 앞전에 잠깐 들렀을 땐 친구가 태워 줘서 몰랐는데, 지하철에서 내려 걸어가자 생각보다 조금 더 많이 걸렸다.
지각이었다. 교생 실습 첫날부터 말이다. 하지만 지민은 뛸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지금 섬마을 선생님 코스프레를 한 복장이라 뛰어다니는 게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왠지 이런 복장은 정말 달팽이처럼 느림의 미학으로, 또는 봄날의 나비처럼 사뿐거리며 걸어가야 될 것 같은 느낌이랄까.
지민의 옆에서는 덩치 큰 남학생들이 바람을 가르며 달리고 있었다. 그러다 회사원으로 보이는 키가 큰 젊은 남자가 지민의 옆으로 휙 지나가다 지민의 등과 부딪쳤다.
섬마을 선생님 코스프레 때문에 일부러 관련 서적 몇 권을 가슴에 품고 있었는데 그 바람에 책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어머!”
지민은 바닥에 떨어진 책을 내려다보고는 힐끔 남자를 보았다. 순간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뭔가를 상상하고 있었다. 드라마에서 흔히 보던 장면 말이다. 남자가 책을 주워 주며 눈이 맞는 그런 거.
부끄러워 얼굴을 정확히 볼 수 없었지만, 아니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꽤 잘생긴 얼굴인 것만은 확실했다. 아침 햇살에 이 남자의 주위로 후광이 비쳤으니까.
지민은 조심스레 옆으로 앉아 책을 집어 들기 위해 손을 뻗었다. 이쯤 되면 남자가 손을 뻗고 책 위에서 손이 겹쳐져야 드라마인 것인데, 역시 현실은 잔혹했다.
“죄송합니다.”
그러고 고개만 살짝 까딱이더니 남자가 냅다 뛰어갔다.
이건 뭐지? 짧은 순간 백일몽처럼 날아가 버린 환상에 지민은 남자가 지나간 자리를 멍하니 보았다. 그러고는 책을 주섬주섬 집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애초에 모태솔로에겐 드라마에서나 보던 그런 우연한 만남은 생기지 않는다. 모태솔로로 25년을 남자와 단절한 채 지내 온 지민의 친구 모솔 희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태솔로에게 우연한 만남이 찾아올 확률은 길 가다 벼락 맞는 것만큼 어렵다고, 차라리 로또 1등에 당첨되는 게 더 빠를 수도 있다고.
차마 뛸 수는 없고 해서 경보를 하듯 빠르게 걸어 교문에 당도하자, 척 봐도 체육 선생님 같은 남자가 교문 앞에서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짧게 자른 머리에 한 손엔 야구방망이를 들고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처럼 눈동자를 번뜩이며 교문을 지나가는 학생들의 머리나 복장을 확인했다.
지민이 가까이서 보니 남자는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와 좀 닮아 있었다. 생긴 것도 비슷했지만 덩치도 장난 아니었다.
그런 이 남자, 지금까지 아이들에게 당장이라도 기관총을 난사하며 수류탄이라도 던질 듯이 노려보더니 지민을 보자 히죽거리며 웃는 게 아닌가.
“호, 혹시 오늘 오신다는 교생 선생님?”
아주 좋아하는 게 얼굴에 확 티가 나는 바람에 지민은 아놀드가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지민이 미리 들은 정보에 의하면 이 학교엔 여자가 한 명도 없단다.
뭐, 남고니까 여학생이 없어서가 아니라, 여선생도 없단다. 굳이 찾자면 서무실에서 사무 보는 여자가 한 명 있는데, 유부녀인데다 나이도 많단다. 또 찾자면 매점을 운영하는 부부 중에 아줌마가 한 명 있단다.
결론은 늑대들의 소굴 한복판에 지민이 툭 떨어진 셈이다.
2화
1. 크로키(1)
엄청나게 빨리 그리는 그림. 너무 빠른 대신에 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경우도 있다.
인생은 크로키다. 생각지도 못한 사이, 빠르게 나이를 먹어 간다. 아니, 늙어 가고 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저주 이후, 지민도 빨리 늙어 가는 중이다.
“규민아, 나중에 누나하고 영화 한 편 때릴까?”
지민은 비음을 잔뜩 넣은 목소리로 이제 막 군대를 제대한 남동생 규민에게 말을 했다. 스물다섯이 된 지금까지 모태솔로로 지낸 지민은 틈만 나면 규민을 통해 남자란 인간을 분석하고 탐구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물론 그게 첫 번째 이유이기도 한데, 더 큰 이유는 그녀가 좋아하는 장르의 최신작이 개봉했는데 같이 가 줄 남자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뭐, 여자 친구랑 같이 가면 되는 일이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딱 한 번쯤은 나도 남자와 영화를 보러 왔다는 사실을 극장 안에 있는 직원이나 불특정 다수들에게 보이고 싶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규민은 경기를 일으키며 치를 떨었다.
“아, 징그럽게 뭔 영화야?”
“오누이끼리 다정하게 영화 좀 보자는데, 정말 이러기야?”
막 제대를 한 예비군답게 규민은 아무도 없는 숲 속 한가운데서 간첩이라도 만난 것처럼 잔뜩 지민을 경계했다.
“내 친구들 다 물어봐도 누나랑 같이 극장 갔다는 애들 한 명도 못 봤어. 어우, 완전 생각만 해도 막 오글거린다.”
“야, 오글거릴 게 뭐 있어? 좀 떨어져서 따로 앉아서 보면 되지. 내가 영화 보여 주고 밥도 사 준다는데 뭘 그렇게 값을 올려?”
규민은 밥이고 영화고 누나하고는 절대 가지 않겠다는 듯 필사의 의지를 다졌다. 규민이 군에 입대하던 날에도 이 정도의 비장함은 없었다.
“집에서 같이 밥 먹는 것도 지겨운데, 밖에 나가서도 같이 밥 먹어야 돼? 나도 자유를 좀 만끽하자. 이제 제대한 지 보름이다.”
“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야. 그냥 따로 영화 보고 나올 때만 같이 나오면 되잖아. 그때 사진 한 장만 같이 박으면 되는 건데.”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규민은 누나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극장에서 나올 때 인증샷 한 장을 찍기 위해 남동생에게 같이 극장에 가자고 하다니.
“인증샷 하나만 찍자.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할게. 이 누나, 남자한테 인기 많은 척 좀 하자. 넌 누나가 모태솔로로 늙어 가는 게 안타깝지도 않니?”
지민이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동정표를 구했지만 규민은 동정은커녕 콧방귀만 뀌었다.
“안타깝지, 안타깝고말고. 그런데 알고 보면 내가 더 안타깝지. 알잖아, 나 군대 가 있는 동안 여자 친구 고무신 거꾸로 신은 거.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탈영하고 싶은 거, 참고 참아서 여기까지 온 거야. 이런 내 마음을 누나가 알아?”
규민이 첫 휴가를 나왔을 때, 애인이 고무신 거꾸로 신었다며 울고불고 군대 안 간다던 놈을 지민이 두드려 패서 군대에 보낸 기억이 났다.
지민은 무섭게 노려보며 회심의 한마디를 던졌다.
“그래도 넌 여자 친구라도 있었잖아.”
모태솔로의 비애는 생활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주위 사람들, 심지어 가족까지도 무시한다.
“너 오늘 첫 출근인데 뭐 입고 갈 거야?”
아침 식사를 끝내자마자 나름 아줌마계의 송혜교라고 스스로 떠들고 다니는 지민의 엄마 정미정 여사가 지민을 아래위로 훑었다. 조금 예쁘고 동안이긴 해서 가끔 지민과 나란히 걸으면 자매지간으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 아주 멀리서 봤을 때 간혹.
“그냥 깔끔한 오피스 정장 타입이면 되지 않을까? 지난번 사촌 오빠 결혼식 때 입고 갔던.”
“어허, 얘는 누굴 닮아 이렇게 촌스럽지? 몸매도 되고 얼굴도 되겠다, 좀 화려한 것 좀 입고 다녀. 그러니까 네가 남자 친구가 없는 거잖아. 무난한 거 말고 튀는 것 좀 입으란 말이야. 거기 총각 선생님도 많을 거 아니냐. 너 예쁜 다리 뒀다 뭐 할 거니? 국 끓여 먹을 거니? 쫙 달라붙는 원피스나 미니스커트 같은 거 좋잖아!”
네, 예쁜 다리 뒀다 국 끓여 먹을 겁니다. 내가 어디 무도회장이나 야유회 가는 줄 아십니까, 같은 뉘앙스로 지민은 정 여사를 쳐다보았다.
“엄마, 나 놀러 가는 게 아니라 학교 가는 거야.”
“고정관념을 깨. 요즘 같은 세상에 선생이라고 꼭 정장 입으란 법 있어? 그렇게 보수적이니까 네가 남자 친구가 없는 거잖아.”
그런가? 그래서 없는 건가? 매일 그 말을 대여섯 번 이상 듣다 보면 어느새 세뇌를 당한다. 정말 솔로의 비애다. 주위에서 그렇게 세뇌를 시킨다. 그러니까 남자 친구가 없다고. 그래서 왠지 커플들과는 태생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 뭔가 태생적으로 차이가 날 거야. 커플 인간들은 원래부터 유전자가 다를 거야. 선택받은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음이 분명해. 아님 연애에 적합한 유전자를 타고난다거나. 어쩌면 모태솔로 인간들은 인간의 본능이자 기본 욕망인 짝짓기를 거부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거나 연애를 할 수 없는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보유하고 있거나.
“이것도 마음에 안 들고, 이것도 별론데.”
거울 앞에 선 지민은 옷을 입고 한 바퀴 돌았다. 침대 위에는 옷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제 옷을 고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더 이상 지체하면 첫날부터 지각하게 생겼다. 이미 화장은 끝낸 후였다. 평소에도 화장을 잘 하지 않는 지민이라 기초화장만 했다. 물론 어느 정도 미모가 받쳐 주니까 가능한 일이라며 혼자 흐뭇해했다. 게다가 남자 고등학교 교생 실습을 나가는 자리에 진하게 화장을 하고 가면 가볍게 보일까 봐 최소한 옅게 발랐다.
화장은 그렇다 치고 문제는 의상이었다. 거울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지민은 좋은 생각이 난 듯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 섬마을 선생님.”
왜 있지 않은가.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섬마을에 막 부임 온 여자 선생님의 의상 말이다. 올이 굵어서 안이 조금 비치는 니트 카디건을 걸치고, 조금 바람에 나풀거리는 밝은색 계통의 플레어스커트를 입고, 바람에 긴 생머리가 나부끼면 남학생들이 두 눈에 하트를 잔뜩 그려 넣으며 쳐다보고, 언제 나타났는지 이승기 같이 생긴 애가 나타나 누난 내 여자라니까를 부르거나, 그중에서 김재원 같이 생긴 애가 나타나 몰래 적은 러브레터를 수줍게 건넨다거나…….
그러면 또 지민은 야들야들한 회초리 같은 거 하나 어디서 구해 가지고 와서는 손바닥 펴, 넌 학생이고 난 선생이야, 막 그러고.
생각만 해도 지민의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지민은 섬마을 선생님으로 코스프레 한 복장을 하고서 부푼 가슴을 안은 채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그 부푼 환상을 B29기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투하하듯 무참히 박살 낸 건 원수 같은 남동생 규민이었다.
“와아, 그건 또 뭐야? 왜 이렇게 촌스러워. 70년대 복고풍이야? 혹시 그거 엄마 옷 아냐?”
그러자 주방에 있던 정미정 여사가 고개를 내밀더니 쑥대밭이 된 지민의 가슴에서 살아 있는 생명체는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는 듯 확인 사살까지 해 주었다.
“나도 저런 옷은 거저 줘도 안 입는다. 아니, 돈 주고 입으라고 해도 안 입겠다.”
이런 가족들과 지내다 보면 가끔은 스스로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다스리거나 마구 상승하는 혈압을 다스리는 초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지금이 그럴 때다.
지민은 어금니를 살며시 깨물었다. 얼마 전 치과에 갔더니 특정 부위의 치아가 많이 닳은 것을 보고 의사 선생이 지민에게 그랬었다.
어금니를 자주 깨물지 않냐고.
지민은 무시하고 현관으로 나가 신발장에서 굽이 조금 있는 펌프스 구두를 하나 꺼내 신었다.
“엄마, 나 먼저 가요.”
공중에다 대고 아무렇게나 말한 뒤, 지민이 막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염려해서 하는 말인지 가서 한번 당해 보라는 말인지 규민이 한마디 던졌다.
“남자애들 교실 안 가 봤지? 장난 아냐. 냄새 쩔어. 걔들 잘 안 씻는 애들 엄청 많아. 그리고 그런 치마 입고 가면 조심해. 언제 봉변당할지 몰라. 바닥 잘 살펴봐, 거울 같은 거 있는지 조심해야 돼. 몰카 찍는 애들도 많거든.”
지민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문을 확 닫았다. 그리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걸어가면 10분 정도 걸린다는 대한민국에서 유명한 포털 사이트의 ‘길 찾기’의 말을 너무 맹신한 걸까. 앞전에 잠깐 들렀을 땐 친구가 태워 줘서 몰랐는데, 지하철에서 내려 걸어가자 생각보다 조금 더 많이 걸렸다.
지각이었다. 교생 실습 첫날부터 말이다. 하지만 지민은 뛸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지금 섬마을 선생님 코스프레를 한 복장이라 뛰어다니는 게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왠지 이런 복장은 정말 달팽이처럼 느림의 미학으로, 또는 봄날의 나비처럼 사뿐거리며 걸어가야 될 것 같은 느낌이랄까.
지민의 옆에서는 덩치 큰 남학생들이 바람을 가르며 달리고 있었다. 그러다 회사원으로 보이는 키가 큰 젊은 남자가 지민의 옆으로 휙 지나가다 지민의 등과 부딪쳤다.
섬마을 선생님 코스프레 때문에 일부러 관련 서적 몇 권을 가슴에 품고 있었는데 그 바람에 책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어머!”
지민은 바닥에 떨어진 책을 내려다보고는 힐끔 남자를 보았다. 순간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뭔가를 상상하고 있었다. 드라마에서 흔히 보던 장면 말이다. 남자가 책을 주워 주며 눈이 맞는 그런 거.
부끄러워 얼굴을 정확히 볼 수 없었지만, 아니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꽤 잘생긴 얼굴인 것만은 확실했다. 아침 햇살에 이 남자의 주위로 후광이 비쳤으니까.
지민은 조심스레 옆으로 앉아 책을 집어 들기 위해 손을 뻗었다. 이쯤 되면 남자가 손을 뻗고 책 위에서 손이 겹쳐져야 드라마인 것인데, 역시 현실은 잔혹했다.
“죄송합니다.”
그러고 고개만 살짝 까딱이더니 남자가 냅다 뛰어갔다.
이건 뭐지? 짧은 순간 백일몽처럼 날아가 버린 환상에 지민은 남자가 지나간 자리를 멍하니 보았다. 그러고는 책을 주섬주섬 집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애초에 모태솔로에겐 드라마에서나 보던 그런 우연한 만남은 생기지 않는다. 모태솔로로 25년을 남자와 단절한 채 지내 온 지민의 친구 모솔 희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태솔로에게 우연한 만남이 찾아올 확률은 길 가다 벼락 맞는 것만큼 어렵다고, 차라리 로또 1등에 당첨되는 게 더 빠를 수도 있다고.
차마 뛸 수는 없고 해서 경보를 하듯 빠르게 걸어 교문에 당도하자, 척 봐도 체육 선생님 같은 남자가 교문 앞에서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짧게 자른 머리에 한 손엔 야구방망이를 들고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처럼 눈동자를 번뜩이며 교문을 지나가는 학생들의 머리나 복장을 확인했다.
지민이 가까이서 보니 남자는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와 좀 닮아 있었다. 생긴 것도 비슷했지만 덩치도 장난 아니었다.
그런 이 남자, 지금까지 아이들에게 당장이라도 기관총을 난사하며 수류탄이라도 던질 듯이 노려보더니 지민을 보자 히죽거리며 웃는 게 아닌가.
“호, 혹시 오늘 오신다는 교생 선생님?”
아주 좋아하는 게 얼굴에 확 티가 나는 바람에 지민은 아놀드가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지민이 미리 들은 정보에 의하면 이 학교엔 여자가 한 명도 없단다.
뭐, 남고니까 여학생이 없어서가 아니라, 여선생도 없단다. 굳이 찾자면 서무실에서 사무 보는 여자가 한 명 있는데, 유부녀인데다 나이도 많단다. 또 찾자면 매점을 운영하는 부부 중에 아줌마가 한 명 있단다.
결론은 늑대들의 소굴 한복판에 지민이 툭 떨어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