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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는 내 남자입니다
3화
1. 크로키(2)
“네. 미술 교생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지민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강인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아이고, 천만의 말씀입니다. 무조건 환영입니다. 저는 여기 체육을 맡고 있는 나강인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러더니 손을 쑥 내밀었다. 지민은 손을 잡아야 되나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강인의 의도가 순수한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교문 앞이라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지민은 씩 미소로 대신했다. 강인은 머쓱해서 한 번 씩 웃더니 지민이 몸을 돌리자 터미네이터의 T―800모드로 당장 돌아갔다.
지민의 발걸음이 가벼워진 것은 막 교문을 통과할 때부터였다.
내 사전에 이런 일이 있었나? 지민은 말 그대로 개떼처럼 본관 건물을 향해 걸어가는 남학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예비 소집을 할 때는 학생들과 마주칠 일이 없어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었다. 우거지죽상을 하며 걸어가던 아이들이 지민을 보자 갓 피어난 꽃처럼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했지만 지민은 이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그녀는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남학생들의 로망은 바로 청순가련한 여선생님 아니겠냐며, 지민은 보무도 당당하게 걸었다.
대개의 중고등학교가 그렇듯 지민이 첫 실습을 하게 될 태양 고등학교 역시 약간의 언덕이 있었다. 언덕을 오르다 보면 본관 건물이 보이고 운동장이 나오고 본관 건물 옆에는 강당과 매점이 있었다.
지민은 언덕의 끝을 향해 나비처럼 사뿐사뿐 걸었다. 여전히 아이들이 힐끔거리며 지민을 쳐다보고 있었고 지민은 아이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고개를 살짝 젖힌 뒤 한 손으로 가볍게 머리를 목 뒤로 쓸어 넘기다 발을 잘못 디뎌 삐끗하고 말았다.
지민은 아무렇지 않은 듯 괜히 어깨에 멘 가방을 치켜 올리는 것으로 창피함을 커버했다.
“와아, 이번에 온 교생 샘인가 봐. 절라 예뻐.”
“오, 대박! 이제 학교 다닐 맛 나겠는데.”
“완전 청순가련형이야. 내 스퇄인데.”
지민은 어깨를 으쓱하며 예쁘네 어쩌네 떠드는 아이들에게 고맙다는 의미로 윙크라도 한 번 날려 줘야 될 것 같아 예쁜 척하며 돌아보았다.
어라, 그런데 아이들이 보는 방향이 지민이 아니었다. 지민이 뭔가 이상한 예감에 뒤로 몸을 홱 돌리자 젊고 예쁘고 아름답고 착하고 청순하기 짝이 없는 여자가 지민을 향해 싱긋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이 여자에게 뺏겼다 생각하자 지민은 별로 안녕하지 못했지만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녀는 이번에 지민과 함께 교생 실습을 하는, 지민과는 같은 사범 대학교 같은 학번의 이름은 모르지만 아무튼 교내에서 얼짱이라고 소문이 자자하게 나 있어 어떻게 생겼나 하고 지나가다 얼굴은 본 적이 있는, 음악 교육을 전공한, 말 그대로 ‘훅’ 불면 ‘픽’ 하고 쓰러질 청순가련형 여자였다.
세상에는 두 가지 여자가 있다. 청순가련형 여자와 그냥 여자.
그냥 여자가 아무리 섬마을 선생님처럼 코스프레를 해도 태생이 청순가련형 여자에게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그냥 베이지색 원피스 쪼가리 하나 걸친 것뿐인데, 화사하고 청순하고 상큼하고 귀엽기까지, 더군다나 과목이 음악이란다. 한마디로 그냥 러블리했다.
지민은 괜히 비교당하기 싫어 걸음을 재촉했다.
“앞으로 자주 볼 텐데, 우리 인사나 해요. 전 심은아예요.”
청순가련형 여자는 얼굴도 예쁜데 목소리도 좋고 성격도 좋았다. 게다가 이름까지 청순가련해 보였다. 이렇게 세상이 불공평한 걸 보면 분명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네. 저는 민지민이라고 해요. 거꾸로 해도 민지민, 우리 가족들은 다 이래요. 이름 외우기 쉽죠?”
청순가련형 여자보다 조금 앞서는 건 이따위 썰렁한 농담을 할 수 있는 특이한 이름뿐이란 말인가. 어쨌든 은아는 재미있다는 듯 입을 가리며 웃었다.
은아의 아름다운 미소를 보자 지민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제부터 심은아와 친하게 지내기로. 괜히 질투나 하면서 거리를 두다간 그녀의 주위로 떨어지는 수많은 떡밥들과 콩고물을 놓칠 수가 있었다.
그동안 지민의 주위에 모솔 희진 같은 이들이 있었으니 솔로 탈출은 꿈도 꾸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운명처럼 능력자가 나타났다.
왠지 실습 한 달 동안 좋은 일이 가득할 것만 같은 예감에 지민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새 언덕을 넘어 본관에 도착한 지민과 은아는 교무실을 향해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교생실로 이어지는 복도 앞에서 지민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 첫 실습이라 그런지 긴장이 되어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힐끔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은아 역시 긴장한 표정이 역력해 보였다.
“지, 지민 씨, 기, 긴장하지 마세요. 괘, 괜찮을 거예요.”
은아가 떨자 지민도 떨렸다.
“그, 그렇죠. 괘, 괜찮을 거예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막 교생 실습실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리던 지민은 그대로 돌처럼 굳어서 가만히 있었다.
순간 머릿속에서는 생각이란 게 증발해 버리고 시간이 멈춰 버린 것만 같았다. 그 멈춰진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지민의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지민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 남자였다. 열아홉 순정을 다 바친 짝사랑의 주인공. 크리스마스만 되면 악몽처럼 떠오르는 기억 속 그 사람, 서주혁.
틀림없이 서주혁이 맞았다. 깎아 놓은 알밤처럼 이목구비는 단정했고 풍기는 이미지는 여전히 부드럽고 선했지만 언뜻 칼에 베일 것처럼 날카롭기도 했다. 짙은 눈썹 아래 눈꼬리가 조금 처진 눈은 여전히 매력적이었으며, 검은 두 눈동자에는 예전에 없던 카리스마까지 뿜어져 나왔다. 그 어떤 조각상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곧은 콧날과 야무지게 각이 진 턱이 다시 한 번 지민의 눈앞에서 서주혁임을 강조해 주었다.
멈췄던 지민의 심장이 다시 깨어난 건 그가 지민에게 고개를 까딱하고 인사를 한 뒤, 지민의 옆을 휙 지나쳐 간 뒤였다. 그에게선 여전히 커피 향이 맴돌았다. 지민은 가만히 선 채로 눈만 껌벅거렸다.
‘뭐지? 날 기억 못 하는 건가?’
잠시 후 멈춰졌던 시간이 돌아가기 시작했지만 지민의 시간은 여전히 멈춰져 있었다.
열아홉 살의 그때로.
남자들 밖에 없는 남고에 가면 모든 남학생들과 총각 선생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을 거란 지민의 예상은 교문을 통과하고 10분도 채 되지 않아 산산이 부서졌다. 그게 다 심은아 때문에. 당연한 결과라며 겸허히 받아들이기엔 왠지 모르게 아쉬웠지만 그것은 진리였다.
교생실에서 교생 담당 선생님과 간단히 조회를 끝내고 아직은 서로 어색한 교생끼리 모닝커피를 마시며, 앞으로 잘해 보자는 둥, 파이팅하자는 둥 떠들고 있자 조회가 있다며 다들 운동장으로 모이라는 방송이 나왔다.
그렇게 교생들은 학창 시절 가장 싫었던 것들 중 하나인 조회를 몸소 경험하며 학생들과 선생님들 앞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을 짧게 가졌다.
이번엔 실습 인원이 적어 모두 여덟 명이었는데 남자 교생이 여섯 명이었고 단 두 명이 여자 선생이었다. 그 단 두 명의 여자 중 한 명이 심은아고 또 다른 한 명은 바로 민지민이라는 불편한 진실.
먼저 남자 교생들이 자기소개 하는 시간을 가졌다. 여섯 명의 남자 교생들이 차례차례 자신을 소개하는 동안 운동장에 모인 남학생들은 정말 영혼 없는 박수를 치고 있었다.
남자 교생들의 소개가 끝나자 지민의 차례가 돌아왔다. 지민이 노래방에서 하던 버릇 그대로 마이크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자 스피커에서 듣기 싫은 파열음이 들렸다.
“아, 아,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앞으로 4주 동안 여러분의 미술 과목을 가르치게 된 민지민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지민은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전교생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자 남자 교생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격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에 지민이 사범대에 가길 정말 잘했다며 속으로 흐뭇해하는 것도 잠시, 다음 차례로 은아가 단상 위에 올라가자 박수는 기본이고 일시에 ‘와아’ 하는 함성 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심지어는 휘파람을 부는 녀석도 있었다.
지민은 그런 은아의 인기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은아를 보는 순간, 미리 예상했던 결과였고 지금 지민의 머릿속에 주혁의 존재가 가득 차서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으니까.
예비 소집을 할 때 담임과 담당 교과를 맡은 선생님과 인사를 가졌었는데 그땐 주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실습하게 될 교생들의 학급 담임도 아니었고, 교과 담임이 아니었으니까. 그때까지 지민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 학교에 주혁이 다닐 거라는 사실을.
자리로 돌아간 지민은 운동장을 둘러친 콘크리트 담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담장 너머 계속 시선을 멀리 두자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교회 첨탑이 보였다. 그 뒤로 쭉 가다 보면 화실이 나올 것이다. 추억 속 한 페이지를 장식한 그 화실. 지민은 그 예전 풋풋하면서 아팠던 추억이 잠시 떠올라 피식하고 웃었다.
감수성이 오를 대로 오른 열아홉, 그때 맞이했던 우울한 크리스마스 이후로 지민은 더 이상 화실을 찾지 않았다. 소문을 듣자니 주혁은 몇 개월 뒤 군대를 갔다고 한다. 지민이 몇 번 휴대전화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저장된 전화번호는 모두 다 날아갔다.
그리고 주혁이 군대를 간 이후로 화실은 문을 닫아 버렸다. 윤호는 주혁보다 한 달 더 일찍 군대를 갔다고 들었다. 지민을 악몽에 빠뜨렸던 수정은 고등학교 졸업 후 유학을 가 버렸고.
그날 이후로 지민은 딱 한 번 화실을 찾았다. 대학에 들어가고 첫 번째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지지리 궁상처럼 혼자서.
화실은 요가 학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1년이라는 짧았던 지민의 추억이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참, 민지민 씨, 교과 담당 선생님이 서주혁 선생님으로 바뀌었습니다. 서주혁 선생님이 교과 담당이자 학급 담임이기도 합니다.”
헐? 조회가 끝나고 교생 실습실로 돌아오자 수학을 가르치는 교생 담당 선생인 오준호 선생님이 지민에게 교과 담당이 주혁으로 바뀌었다고 말을 했다. 그리고 그 교과 담당이 학급 담당이라는 말과 함께.
지민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 말인즉, 앞으로 주혁을 매일 마주쳐야 된다는 말이었다. 지민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껄끄러워 그 이유라도 알고 싶어 물었다.
“갑자기 바뀐 이유라도…….”
“아, 원래 하려고 했던 교과 담당 선생님이 몸도 좀 안 좋으신 데다 요즘 아드님 장가보낸다고 신경 쓸 일이 많대요. 그래서 젊은 친구한테 양보한다고 한 거죠. 미술 과목은 그 선생님하고 서주혁 선생 둘밖에 없거든요. 미술 과목이 조금 여유도 있고 해서 학급 담임까지 같이 하는 겁니다.”
지민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첫날은 다행히도 주혁과 마주칠 일은 없었다. 좁은 교생 실습실에서 태양 고등학교의 연혁과 교장 선생님의 약력, 학교 경영, 공문서 작성법 등을 듣고 나자 점심시간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남자 교생들은 자신의 신분도 망각한 채 학생들처럼 좋아라 하며 우르르 멧돼지 떼처럼 교직원 식당으로 몰려갔다. 지민은 전화 통화를 하고 갈 테니 먼저 가서 먹고 있으라는 은아의 말에 자리 잡고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을 한 뒤 남자들 뒤를 따라갔다.
“와아, 맛있겠다.”
교직원 식당에 나온 반찬을 보자 지민의 입이 쩍 벌어졌다.
콩나물 무침, 멸치 볶음, 소고기를 넣은 미역국, 동그랑땡, 감자 샐러드, 달걀찜. 그리고 후식으로는 토마토와 요구르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식판에 반찬을 가득 담은 지민은 앉을 자리를 휙 둘러보고는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3화
1. 크로키(2)
“네. 미술 교생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지민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강인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아이고, 천만의 말씀입니다. 무조건 환영입니다. 저는 여기 체육을 맡고 있는 나강인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러더니 손을 쑥 내밀었다. 지민은 손을 잡아야 되나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강인의 의도가 순수한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교문 앞이라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지민은 씩 미소로 대신했다. 강인은 머쓱해서 한 번 씩 웃더니 지민이 몸을 돌리자 터미네이터의 T―800모드로 당장 돌아갔다.
지민의 발걸음이 가벼워진 것은 막 교문을 통과할 때부터였다.
내 사전에 이런 일이 있었나? 지민은 말 그대로 개떼처럼 본관 건물을 향해 걸어가는 남학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예비 소집을 할 때는 학생들과 마주칠 일이 없어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었다. 우거지죽상을 하며 걸어가던 아이들이 지민을 보자 갓 피어난 꽃처럼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했지만 지민은 이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그녀는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남학생들의 로망은 바로 청순가련한 여선생님 아니겠냐며, 지민은 보무도 당당하게 걸었다.
대개의 중고등학교가 그렇듯 지민이 첫 실습을 하게 될 태양 고등학교 역시 약간의 언덕이 있었다. 언덕을 오르다 보면 본관 건물이 보이고 운동장이 나오고 본관 건물 옆에는 강당과 매점이 있었다.
지민은 언덕의 끝을 향해 나비처럼 사뿐사뿐 걸었다. 여전히 아이들이 힐끔거리며 지민을 쳐다보고 있었고 지민은 아이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고개를 살짝 젖힌 뒤 한 손으로 가볍게 머리를 목 뒤로 쓸어 넘기다 발을 잘못 디뎌 삐끗하고 말았다.
지민은 아무렇지 않은 듯 괜히 어깨에 멘 가방을 치켜 올리는 것으로 창피함을 커버했다.
“와아, 이번에 온 교생 샘인가 봐. 절라 예뻐.”
“오, 대박! 이제 학교 다닐 맛 나겠는데.”
“완전 청순가련형이야. 내 스퇄인데.”
지민은 어깨를 으쓱하며 예쁘네 어쩌네 떠드는 아이들에게 고맙다는 의미로 윙크라도 한 번 날려 줘야 될 것 같아 예쁜 척하며 돌아보았다.
어라, 그런데 아이들이 보는 방향이 지민이 아니었다. 지민이 뭔가 이상한 예감에 뒤로 몸을 홱 돌리자 젊고 예쁘고 아름답고 착하고 청순하기 짝이 없는 여자가 지민을 향해 싱긋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이 여자에게 뺏겼다 생각하자 지민은 별로 안녕하지 못했지만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녀는 이번에 지민과 함께 교생 실습을 하는, 지민과는 같은 사범 대학교 같은 학번의 이름은 모르지만 아무튼 교내에서 얼짱이라고 소문이 자자하게 나 있어 어떻게 생겼나 하고 지나가다 얼굴은 본 적이 있는, 음악 교육을 전공한, 말 그대로 ‘훅’ 불면 ‘픽’ 하고 쓰러질 청순가련형 여자였다.
세상에는 두 가지 여자가 있다. 청순가련형 여자와 그냥 여자.
그냥 여자가 아무리 섬마을 선생님처럼 코스프레를 해도 태생이 청순가련형 여자에게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그냥 베이지색 원피스 쪼가리 하나 걸친 것뿐인데, 화사하고 청순하고 상큼하고 귀엽기까지, 더군다나 과목이 음악이란다. 한마디로 그냥 러블리했다.
지민은 괜히 비교당하기 싫어 걸음을 재촉했다.
“앞으로 자주 볼 텐데, 우리 인사나 해요. 전 심은아예요.”
청순가련형 여자는 얼굴도 예쁜데 목소리도 좋고 성격도 좋았다. 게다가 이름까지 청순가련해 보였다. 이렇게 세상이 불공평한 걸 보면 분명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네. 저는 민지민이라고 해요. 거꾸로 해도 민지민, 우리 가족들은 다 이래요. 이름 외우기 쉽죠?”
청순가련형 여자보다 조금 앞서는 건 이따위 썰렁한 농담을 할 수 있는 특이한 이름뿐이란 말인가. 어쨌든 은아는 재미있다는 듯 입을 가리며 웃었다.
은아의 아름다운 미소를 보자 지민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제부터 심은아와 친하게 지내기로. 괜히 질투나 하면서 거리를 두다간 그녀의 주위로 떨어지는 수많은 떡밥들과 콩고물을 놓칠 수가 있었다.
그동안 지민의 주위에 모솔 희진 같은 이들이 있었으니 솔로 탈출은 꿈도 꾸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운명처럼 능력자가 나타났다.
왠지 실습 한 달 동안 좋은 일이 가득할 것만 같은 예감에 지민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새 언덕을 넘어 본관에 도착한 지민과 은아는 교무실을 향해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교생실로 이어지는 복도 앞에서 지민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 첫 실습이라 그런지 긴장이 되어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힐끔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은아 역시 긴장한 표정이 역력해 보였다.
“지, 지민 씨, 기, 긴장하지 마세요. 괘, 괜찮을 거예요.”
은아가 떨자 지민도 떨렸다.
“그, 그렇죠. 괘, 괜찮을 거예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막 교생 실습실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리던 지민은 그대로 돌처럼 굳어서 가만히 있었다.
순간 머릿속에서는 생각이란 게 증발해 버리고 시간이 멈춰 버린 것만 같았다. 그 멈춰진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지민의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지민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 남자였다. 열아홉 순정을 다 바친 짝사랑의 주인공. 크리스마스만 되면 악몽처럼 떠오르는 기억 속 그 사람, 서주혁.
틀림없이 서주혁이 맞았다. 깎아 놓은 알밤처럼 이목구비는 단정했고 풍기는 이미지는 여전히 부드럽고 선했지만 언뜻 칼에 베일 것처럼 날카롭기도 했다. 짙은 눈썹 아래 눈꼬리가 조금 처진 눈은 여전히 매력적이었으며, 검은 두 눈동자에는 예전에 없던 카리스마까지 뿜어져 나왔다. 그 어떤 조각상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곧은 콧날과 야무지게 각이 진 턱이 다시 한 번 지민의 눈앞에서 서주혁임을 강조해 주었다.
멈췄던 지민의 심장이 다시 깨어난 건 그가 지민에게 고개를 까딱하고 인사를 한 뒤, 지민의 옆을 휙 지나쳐 간 뒤였다. 그에게선 여전히 커피 향이 맴돌았다. 지민은 가만히 선 채로 눈만 껌벅거렸다.
‘뭐지? 날 기억 못 하는 건가?’
잠시 후 멈춰졌던 시간이 돌아가기 시작했지만 지민의 시간은 여전히 멈춰져 있었다.
열아홉 살의 그때로.
남자들 밖에 없는 남고에 가면 모든 남학생들과 총각 선생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을 거란 지민의 예상은 교문을 통과하고 10분도 채 되지 않아 산산이 부서졌다. 그게 다 심은아 때문에. 당연한 결과라며 겸허히 받아들이기엔 왠지 모르게 아쉬웠지만 그것은 진리였다.
교생실에서 교생 담당 선생님과 간단히 조회를 끝내고 아직은 서로 어색한 교생끼리 모닝커피를 마시며, 앞으로 잘해 보자는 둥, 파이팅하자는 둥 떠들고 있자 조회가 있다며 다들 운동장으로 모이라는 방송이 나왔다.
그렇게 교생들은 학창 시절 가장 싫었던 것들 중 하나인 조회를 몸소 경험하며 학생들과 선생님들 앞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을 짧게 가졌다.
이번엔 실습 인원이 적어 모두 여덟 명이었는데 남자 교생이 여섯 명이었고 단 두 명이 여자 선생이었다. 그 단 두 명의 여자 중 한 명이 심은아고 또 다른 한 명은 바로 민지민이라는 불편한 진실.
먼저 남자 교생들이 자기소개 하는 시간을 가졌다. 여섯 명의 남자 교생들이 차례차례 자신을 소개하는 동안 운동장에 모인 남학생들은 정말 영혼 없는 박수를 치고 있었다.
남자 교생들의 소개가 끝나자 지민의 차례가 돌아왔다. 지민이 노래방에서 하던 버릇 그대로 마이크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자 스피커에서 듣기 싫은 파열음이 들렸다.
“아, 아,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앞으로 4주 동안 여러분의 미술 과목을 가르치게 된 민지민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지민은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전교생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자 남자 교생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격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에 지민이 사범대에 가길 정말 잘했다며 속으로 흐뭇해하는 것도 잠시, 다음 차례로 은아가 단상 위에 올라가자 박수는 기본이고 일시에 ‘와아’ 하는 함성 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심지어는 휘파람을 부는 녀석도 있었다.
지민은 그런 은아의 인기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은아를 보는 순간, 미리 예상했던 결과였고 지금 지민의 머릿속에 주혁의 존재가 가득 차서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으니까.
예비 소집을 할 때 담임과 담당 교과를 맡은 선생님과 인사를 가졌었는데 그땐 주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실습하게 될 교생들의 학급 담임도 아니었고, 교과 담임이 아니었으니까. 그때까지 지민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 학교에 주혁이 다닐 거라는 사실을.
자리로 돌아간 지민은 운동장을 둘러친 콘크리트 담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담장 너머 계속 시선을 멀리 두자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교회 첨탑이 보였다. 그 뒤로 쭉 가다 보면 화실이 나올 것이다. 추억 속 한 페이지를 장식한 그 화실. 지민은 그 예전 풋풋하면서 아팠던 추억이 잠시 떠올라 피식하고 웃었다.
감수성이 오를 대로 오른 열아홉, 그때 맞이했던 우울한 크리스마스 이후로 지민은 더 이상 화실을 찾지 않았다. 소문을 듣자니 주혁은 몇 개월 뒤 군대를 갔다고 한다. 지민이 몇 번 휴대전화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저장된 전화번호는 모두 다 날아갔다.
그리고 주혁이 군대를 간 이후로 화실은 문을 닫아 버렸다. 윤호는 주혁보다 한 달 더 일찍 군대를 갔다고 들었다. 지민을 악몽에 빠뜨렸던 수정은 고등학교 졸업 후 유학을 가 버렸고.
그날 이후로 지민은 딱 한 번 화실을 찾았다. 대학에 들어가고 첫 번째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지지리 궁상처럼 혼자서.
화실은 요가 학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1년이라는 짧았던 지민의 추억이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참, 민지민 씨, 교과 담당 선생님이 서주혁 선생님으로 바뀌었습니다. 서주혁 선생님이 교과 담당이자 학급 담임이기도 합니다.”
헐? 조회가 끝나고 교생 실습실로 돌아오자 수학을 가르치는 교생 담당 선생인 오준호 선생님이 지민에게 교과 담당이 주혁으로 바뀌었다고 말을 했다. 그리고 그 교과 담당이 학급 담당이라는 말과 함께.
지민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 말인즉, 앞으로 주혁을 매일 마주쳐야 된다는 말이었다. 지민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껄끄러워 그 이유라도 알고 싶어 물었다.
“갑자기 바뀐 이유라도…….”
“아, 원래 하려고 했던 교과 담당 선생님이 몸도 좀 안 좋으신 데다 요즘 아드님 장가보낸다고 신경 쓸 일이 많대요. 그래서 젊은 친구한테 양보한다고 한 거죠. 미술 과목은 그 선생님하고 서주혁 선생 둘밖에 없거든요. 미술 과목이 조금 여유도 있고 해서 학급 담임까지 같이 하는 겁니다.”
지민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첫날은 다행히도 주혁과 마주칠 일은 없었다. 좁은 교생 실습실에서 태양 고등학교의 연혁과 교장 선생님의 약력, 학교 경영, 공문서 작성법 등을 듣고 나자 점심시간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남자 교생들은 자신의 신분도 망각한 채 학생들처럼 좋아라 하며 우르르 멧돼지 떼처럼 교직원 식당으로 몰려갔다. 지민은 전화 통화를 하고 갈 테니 먼저 가서 먹고 있으라는 은아의 말에 자리 잡고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을 한 뒤 남자들 뒤를 따라갔다.
“와아, 맛있겠다.”
교직원 식당에 나온 반찬을 보자 지민의 입이 쩍 벌어졌다.
콩나물 무침, 멸치 볶음, 소고기를 넣은 미역국, 동그랑땡, 감자 샐러드, 달걀찜. 그리고 후식으로는 토마토와 요구르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식판에 반찬을 가득 담은 지민은 앉을 자리를 휙 둘러보고는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