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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지지 않는 남자
1화
1. 지워지지 않는 남자(1)
서은과 일행들이 도착하게 될 욕지도는 통영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 이십 분가량을 가야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서울에서 승합차를 타고 통영까지 내려오는 동안 서은은 빵과 우유를 먹은 게 전부였다.
바다는 잠잠했고 하늘엔 뭉게구름이 떠 있었다. 6월 중순의 무더운 날씨지만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와 서은의 볼을 간지럼 태우고 달아났다. 살랑거리며 부는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싫지 않았다.
하지만 배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 냄새가 서은에게 조금씩 역겨워지기 시작했다. 평소에 멀미를 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배를 처음 타 보는 서은이라 아무래도 뱃멀미에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난간에 몸을 기댄 서은은 숨을 가쁘게 내쉬며 도와줄 일행을 찾았지만 보이지가 않았다. 모두들 서은과는 반대편 갑판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옆에 붙어 있던 희진이가 화장실을 가는 바람에 서은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서은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쓴 물을 삼키며 멀미를 견디고 있었다.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어질했다. 서 있는 것도 힘이 들어 서은은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약한 파도에 배가 살짝 요동치자 급기야 참지 못하고 그녀는 난간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구토를 시작했다.
“우욱!”
먹은 음식이라고는 빵과 우유가 전부라 하얀 토사물이 서은의 입에서 조금 흘러나왔다. 그때 누군가가 서은의 등을 두드리고 있었다. 서은은 등을 두드리는 이가 희진이라는 생각에 안도하며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았다.
그런데 서은의 손에 느껴지는 감각이 이상했다. 희진의 팔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굵고 딱딱했다. 놀란 서은이 잡고 있던 팔을 놓으며 돌아보았다. 그러자 낯선 남자가 자신의 등을 두드리며 걱정스런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남자의 목소리에 서은은 창피한 나머지 얼굴을 푹 숙였다. 그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여은은 남자를 향해 고맙다는 뜻으로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네, 괜찮아요.”
“조금만 기다려요. 다 왔어요.”
서은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남자에게 다시 한 번 묵례를 하고는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창피해서 도저히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였다. 느낌이지만 서은은 자신의 등 뒤에 남자가 계속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짭조름한 바닷바람에 목이 간질거렸다. 속에서 음식물들이 서로 전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부글거렸다. 서은은 주먹을 꽉 쥔 채 목에 힘을 주었다. 금방이라도 속에서 무엇인가가 올라올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하얗고 긴 팔 하나가 서은의 눈앞에 쑥 나타났다. 손에는 생수병 하나가 들려 있었다. 방금 전에 서은의 등을 두드린 그 남자였다.
“이거 마셔요. 조금 괜찮아질 거예요. 그리고 이건…….”
그렇게 말한 뒤 남자가 서은의 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서은은 갑작스런 남자의 행동에 놀라 주춤했지만 이상하게도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서은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긴 남자는 서은의 귓불 아래 연약한 피부에 무엇인가를 붙였다.
“멀미약입니다.”
살랑거리는 훈풍처럼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서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남자의 호의, 서은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불쾌한 건지 고맙다고 해야 되는 건지…….
서은이 망설이는 사이, 남자가 등을 돌리더니 반대편 선미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서은은 남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만 보았다.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서은은 뭐가 뭔지 얼떨떨했다. 멀미약 때문인지, 남자의 행동에 놀라서인지 멀미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서은은 방금 자신의 귓불을 스치고 지나간 남자의 손길과 그 감촉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 생각에 그녀의 볼이 잘 익은 홍시처럼 붉게 물들었다.
평소의 자신답지 않게 바보 같다는 생각에 서은은 씩 미소 지으며 다시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갈매기 한 마리가 서은의 머리 위를 날아다녔다.
그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이 보였다. 이 바다의 끝은 어디일까?
선착장에 배가 닿자 서은은 등에 백팩을 메고 캐리어를 질질 끌며 배에서 내렸다. 버스와 배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멀미까지 참다 보니 눈앞에 보이는 아름다운 주위 경관이 그녀의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아침 일찍 서두르는 바람에 피곤이 밀려왔다.
모 그룹 회장의 팔순 잔치를 위해 특별히 꾸려진 요리 팀원은 모두 다섯 명. 외식산업 파견업체인 ‘캡틴쿡’에서 선별한 정예 멤버였다. 그중에서 서은과 희진이 가장 막내였다.
요리사들을 인솔하는 김 실장이 선글라스를 짧은 머리 위에 고정시켰다. 30대 중반의 김 실장은 보통 정도의 키에 인상이 날카로웠다. 김 실장이 손가락으로 언덕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기 보이지? 저 언덕 위에 파란색 집. 그 옆에 우리가 머물 숙소가 있어. 우선 올라가서 설명할 테니까 나 따라서 천천히 올라와!”
김 실장이 캐리어를 끌며 앞장을 섰다. 파티의 주인공인 회장이 묵고 있다는 별장은 선착장에서 별로 멀지 않았다. 그 별장 옆으로 펜션이 하나 있고 그 펜션이 요리사들의 숙소였다. 하필이면 숙소가 언덕에 위치해 있어 짐을 들고 올라가기에는 힘이 들었다. 게다가 일행들의 정수리 위에 정오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었다.
“아침도 제대로 못 먹고 새벽부터 무슨 고생이야?”
서은의 옆에 바짝 달라붙어 걷던 희진이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투덜거렸다.
“조금만 참어. 다 왔어. 휴가라고 생각하면 되지.”
서은의 말에 희진은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며 대꾸했다.
“하여튼 보면 매사에 무조건 긍정적이라니까. 진짜 일당을 두 배로 준다니까 참는다, 참아.”
서은은 희진의 말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희진은 조금 작은 체구에 귀여운 외모를 지닌 친구다. 성격이 밝고 쾌활해서 늘 서은에게 에너지를 주는 친구이기도 하지만 가끔 불만이 있을 때면 투덜거리는 게 특기다.
별장에 도착하자 짭조름한 바닷바람과 솔향기를 머금은 산바람이 동시에 불어 땀으로 끈적거리는 일행들의 몸을 식혀 주었다.
먼저 도착한 김 실장은 집사로 보이는 남자와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은 뒤, 일행들이 묵게 될 숙소를 향해 앞장서서 걸음을 재촉했다. 숙소에 당도하자 김 실장은 일행 하나하나 묵게 될 숙소를 알려 주었다.
서은은 희진과 한방이었다. 숙소는 아담하면서 예뻤다. 짐을 내려놓자마자 희진은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아, 완전 피곤하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 생일 파티엔 어떤 사람들이 오는지 대개 궁금하네. 손님들은 요트라도 타고 오려나?”
서은은 침대 맡에 걸터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한때는 서은도 그런 무리들에 끼인 적이 있었으니까. 지섭과 함께했던 수많은 날들이 그녀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서은 자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류층 사람들.
먼 추억을 회상하던 서은은 문득 갑판에서 보았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정신이 없어서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 남자에게서 지섭의 향기가 느껴졌다.
벌써 3년이나 지났다. 그동안 머릿속에서 가슴속에서 깨끗이 지운 줄 알았는데 문득문득 지섭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내 생각이라도 하고 있을까?
“나 여기서 일하면 좋겠다. 그럼 매일매일 휴가 같은 그런 기분 들잖아. 그렇지?”
불쑥 튀어나온 희진의 말에 서은의 머릿속에 있던 생각들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그러게. 우리 중에서 한 명은 여기 남는다잖아.”
희진의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누가 될까? 완전 기대되는데. 난 여기 며칠 더 있고 싶은데, 고작 휴가를 하루밖에 안 주다니. 우리 실장님 너무해.”
“바쁘니까 그렇지. 아직 휴가철도 아니고.”
서은의 말에 희진의 입이 딱따구리처럼 튀어나왔다.
짐을 모두 정리하고 휴식을 취한 뒤, 다섯 명의 요리사들이 별장 주방에 모였다. 그사이 커다란 트럭 한 대가 별장 앞에 멈춰 섰고 건장한 남자들이 짐칸에 있는 주방 집기와 각종 음식 재료들을 별장 안에 있는 주방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요리사들은 웬만한 요리들을 다 할 줄 알지만 각각의 전공이 달랐다. 한식, 중식, 일식, 이태리, 태국 요리, 이렇게 다섯 명의 요리사가 세팅이 된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티는 저녁 5시, 참가 인원은 모두 삼십여 명. 저녁에 열릴 파티를 위해 정오부터 요리사들이 음식을 준비했다.
서은은 이탈리아 요리 담당이었다. 서은이 준비한 음식은 티본스테이크, 카르보나라, 뇨끼, 해물리소토, 피자, 그리고 후식으로 나올 티라미수였다.
요리사들은 오후 2시에 늦은 점심을 먹은 뒤, 본격적으로 요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오후 5시 정각부터 먼저 만들어진 음식이 테이블 위에 세팅이 된다. 잘 식지 않는 음식이 먼저 올라가고 그 뒤로 차례차례 만든 순서대로 서버들이 테이블 위로 나른다.
별장 앞마당에는 직사각형 모양의 커다란 탁자 여섯 개를 붙였다. 그 앞에는 의자가 놓이고 테이블 위에는 하얀색 천이 깔리고 센터피스로 긴 화병에 작약이나 붉은 장미가 담겼다.
손님들이 오기로 한 오후 5시, 선착장에 호화로운 요트 한 대가 정박했다. 요트에서 화려한 옷을 빼입은 손님들이 하나둘 별장 앞마당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서은의 손놀림이 더욱 빨라졌다. 파티가 시작되려는 듯 누군가가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를 시작하고 초대받은 손님들은 자리에 앉아 음식을 맛보기 시작했다.
“동성그룹 현종우 회장님의 팔순 잔치를 축하하기 위해 찾아 주신 귀빈들께 회장님을 대신해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마이크를 통해서 들려오는 사회자의 말에 서은은 잠시 일손을 멈추었다. 일을 들어가기 전에 김 실장은 클라이언트의 신분에 대해선 철저하게 비밀로 부치는 스타일이었다. 요리사가 클라이언트의 신분을 알아야 될 이유가 없다는 것이 김 실장의 생각이다.
1화
1. 지워지지 않는 남자(1)
서은과 일행들이 도착하게 될 욕지도는 통영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 이십 분가량을 가야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서울에서 승합차를 타고 통영까지 내려오는 동안 서은은 빵과 우유를 먹은 게 전부였다.
바다는 잠잠했고 하늘엔 뭉게구름이 떠 있었다. 6월 중순의 무더운 날씨지만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와 서은의 볼을 간지럼 태우고 달아났다. 살랑거리며 부는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싫지 않았다.
하지만 배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 냄새가 서은에게 조금씩 역겨워지기 시작했다. 평소에 멀미를 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배를 처음 타 보는 서은이라 아무래도 뱃멀미에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난간에 몸을 기댄 서은은 숨을 가쁘게 내쉬며 도와줄 일행을 찾았지만 보이지가 않았다. 모두들 서은과는 반대편 갑판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옆에 붙어 있던 희진이가 화장실을 가는 바람에 서은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서은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쓴 물을 삼키며 멀미를 견디고 있었다.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어질했다. 서 있는 것도 힘이 들어 서은은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약한 파도에 배가 살짝 요동치자 급기야 참지 못하고 그녀는 난간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구토를 시작했다.
“우욱!”
먹은 음식이라고는 빵과 우유가 전부라 하얀 토사물이 서은의 입에서 조금 흘러나왔다. 그때 누군가가 서은의 등을 두드리고 있었다. 서은은 등을 두드리는 이가 희진이라는 생각에 안도하며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았다.
그런데 서은의 손에 느껴지는 감각이 이상했다. 희진의 팔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굵고 딱딱했다. 놀란 서은이 잡고 있던 팔을 놓으며 돌아보았다. 그러자 낯선 남자가 자신의 등을 두드리며 걱정스런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남자의 목소리에 서은은 창피한 나머지 얼굴을 푹 숙였다. 그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여은은 남자를 향해 고맙다는 뜻으로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네, 괜찮아요.”
“조금만 기다려요. 다 왔어요.”
서은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남자에게 다시 한 번 묵례를 하고는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창피해서 도저히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였다. 느낌이지만 서은은 자신의 등 뒤에 남자가 계속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짭조름한 바닷바람에 목이 간질거렸다. 속에서 음식물들이 서로 전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부글거렸다. 서은은 주먹을 꽉 쥔 채 목에 힘을 주었다. 금방이라도 속에서 무엇인가가 올라올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하얗고 긴 팔 하나가 서은의 눈앞에 쑥 나타났다. 손에는 생수병 하나가 들려 있었다. 방금 전에 서은의 등을 두드린 그 남자였다.
“이거 마셔요. 조금 괜찮아질 거예요. 그리고 이건…….”
그렇게 말한 뒤 남자가 서은의 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서은은 갑작스런 남자의 행동에 놀라 주춤했지만 이상하게도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서은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긴 남자는 서은의 귓불 아래 연약한 피부에 무엇인가를 붙였다.
“멀미약입니다.”
살랑거리는 훈풍처럼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서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남자의 호의, 서은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불쾌한 건지 고맙다고 해야 되는 건지…….
서은이 망설이는 사이, 남자가 등을 돌리더니 반대편 선미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서은은 남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만 보았다.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서은은 뭐가 뭔지 얼떨떨했다. 멀미약 때문인지, 남자의 행동에 놀라서인지 멀미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서은은 방금 자신의 귓불을 스치고 지나간 남자의 손길과 그 감촉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 생각에 그녀의 볼이 잘 익은 홍시처럼 붉게 물들었다.
평소의 자신답지 않게 바보 같다는 생각에 서은은 씩 미소 지으며 다시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갈매기 한 마리가 서은의 머리 위를 날아다녔다.
그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이 보였다. 이 바다의 끝은 어디일까?
선착장에 배가 닿자 서은은 등에 백팩을 메고 캐리어를 질질 끌며 배에서 내렸다. 버스와 배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멀미까지 참다 보니 눈앞에 보이는 아름다운 주위 경관이 그녀의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아침 일찍 서두르는 바람에 피곤이 밀려왔다.
모 그룹 회장의 팔순 잔치를 위해 특별히 꾸려진 요리 팀원은 모두 다섯 명. 외식산업 파견업체인 ‘캡틴쿡’에서 선별한 정예 멤버였다. 그중에서 서은과 희진이 가장 막내였다.
요리사들을 인솔하는 김 실장이 선글라스를 짧은 머리 위에 고정시켰다. 30대 중반의 김 실장은 보통 정도의 키에 인상이 날카로웠다. 김 실장이 손가락으로 언덕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기 보이지? 저 언덕 위에 파란색 집. 그 옆에 우리가 머물 숙소가 있어. 우선 올라가서 설명할 테니까 나 따라서 천천히 올라와!”
김 실장이 캐리어를 끌며 앞장을 섰다. 파티의 주인공인 회장이 묵고 있다는 별장은 선착장에서 별로 멀지 않았다. 그 별장 옆으로 펜션이 하나 있고 그 펜션이 요리사들의 숙소였다. 하필이면 숙소가 언덕에 위치해 있어 짐을 들고 올라가기에는 힘이 들었다. 게다가 일행들의 정수리 위에 정오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었다.
“아침도 제대로 못 먹고 새벽부터 무슨 고생이야?”
서은의 옆에 바짝 달라붙어 걷던 희진이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투덜거렸다.
“조금만 참어. 다 왔어. 휴가라고 생각하면 되지.”
서은의 말에 희진은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며 대꾸했다.
“하여튼 보면 매사에 무조건 긍정적이라니까. 진짜 일당을 두 배로 준다니까 참는다, 참아.”
서은은 희진의 말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희진은 조금 작은 체구에 귀여운 외모를 지닌 친구다. 성격이 밝고 쾌활해서 늘 서은에게 에너지를 주는 친구이기도 하지만 가끔 불만이 있을 때면 투덜거리는 게 특기다.
별장에 도착하자 짭조름한 바닷바람과 솔향기를 머금은 산바람이 동시에 불어 땀으로 끈적거리는 일행들의 몸을 식혀 주었다.
먼저 도착한 김 실장은 집사로 보이는 남자와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은 뒤, 일행들이 묵게 될 숙소를 향해 앞장서서 걸음을 재촉했다. 숙소에 당도하자 김 실장은 일행 하나하나 묵게 될 숙소를 알려 주었다.
서은은 희진과 한방이었다. 숙소는 아담하면서 예뻤다. 짐을 내려놓자마자 희진은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아, 완전 피곤하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 생일 파티엔 어떤 사람들이 오는지 대개 궁금하네. 손님들은 요트라도 타고 오려나?”
서은은 침대 맡에 걸터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한때는 서은도 그런 무리들에 끼인 적이 있었으니까. 지섭과 함께했던 수많은 날들이 그녀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서은 자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류층 사람들.
먼 추억을 회상하던 서은은 문득 갑판에서 보았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정신이 없어서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 남자에게서 지섭의 향기가 느껴졌다.
벌써 3년이나 지났다. 그동안 머릿속에서 가슴속에서 깨끗이 지운 줄 알았는데 문득문득 지섭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내 생각이라도 하고 있을까?
“나 여기서 일하면 좋겠다. 그럼 매일매일 휴가 같은 그런 기분 들잖아. 그렇지?”
불쑥 튀어나온 희진의 말에 서은의 머릿속에 있던 생각들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그러게. 우리 중에서 한 명은 여기 남는다잖아.”
희진의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누가 될까? 완전 기대되는데. 난 여기 며칠 더 있고 싶은데, 고작 휴가를 하루밖에 안 주다니. 우리 실장님 너무해.”
“바쁘니까 그렇지. 아직 휴가철도 아니고.”
서은의 말에 희진의 입이 딱따구리처럼 튀어나왔다.
짐을 모두 정리하고 휴식을 취한 뒤, 다섯 명의 요리사들이 별장 주방에 모였다. 그사이 커다란 트럭 한 대가 별장 앞에 멈춰 섰고 건장한 남자들이 짐칸에 있는 주방 집기와 각종 음식 재료들을 별장 안에 있는 주방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요리사들은 웬만한 요리들을 다 할 줄 알지만 각각의 전공이 달랐다. 한식, 중식, 일식, 이태리, 태국 요리, 이렇게 다섯 명의 요리사가 세팅이 된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티는 저녁 5시, 참가 인원은 모두 삼십여 명. 저녁에 열릴 파티를 위해 정오부터 요리사들이 음식을 준비했다.
서은은 이탈리아 요리 담당이었다. 서은이 준비한 음식은 티본스테이크, 카르보나라, 뇨끼, 해물리소토, 피자, 그리고 후식으로 나올 티라미수였다.
요리사들은 오후 2시에 늦은 점심을 먹은 뒤, 본격적으로 요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오후 5시 정각부터 먼저 만들어진 음식이 테이블 위에 세팅이 된다. 잘 식지 않는 음식이 먼저 올라가고 그 뒤로 차례차례 만든 순서대로 서버들이 테이블 위로 나른다.
별장 앞마당에는 직사각형 모양의 커다란 탁자 여섯 개를 붙였다. 그 앞에는 의자가 놓이고 테이블 위에는 하얀색 천이 깔리고 센터피스로 긴 화병에 작약이나 붉은 장미가 담겼다.
손님들이 오기로 한 오후 5시, 선착장에 호화로운 요트 한 대가 정박했다. 요트에서 화려한 옷을 빼입은 손님들이 하나둘 별장 앞마당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서은의 손놀림이 더욱 빨라졌다. 파티가 시작되려는 듯 누군가가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를 시작하고 초대받은 손님들은 자리에 앉아 음식을 맛보기 시작했다.
“동성그룹 현종우 회장님의 팔순 잔치를 축하하기 위해 찾아 주신 귀빈들께 회장님을 대신해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마이크를 통해서 들려오는 사회자의 말에 서은은 잠시 일손을 멈추었다. 일을 들어가기 전에 김 실장은 클라이언트의 신분에 대해선 철저하게 비밀로 부치는 스타일이었다. 요리사가 클라이언트의 신분을 알아야 될 이유가 없다는 것이 김 실장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