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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지지 않는 남자
2화
1. 지워지지 않는 남자(2)


음식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어서 소나무와 전봇대 사이에 붙여 놓은 현수막 글귀마저 서은은 보지 못했었다. 사회자의 입을 통해 듣게 된 동성그룹 현종우 회장이란 말에 서은의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서은은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국자를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그렇다면 아까 배에서 본 남자는 현지섭?
그녀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마치 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온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서은은 창문에 붙어서 파티가 열리는 현장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몇 초쯤 흘렀을까. 서은의 시야에 한 남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눈에 띄는 한 남자, 바로 현지섭이었다.
시간이 멈춘 듯 그는 3년 전 모습 그대로였다.
서은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서은아, 너 괜찮아?”
일을 하다 말고 갑자기 창가를 바라보는 서은의 옆으로 희진이 다가와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 괜찮아.”
대답을 끝낸 뒤 서은의 몸이 휘청거렸다. 현기증이 일었다.
깨끗이 지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서연의 착각이었나 보다. 현지섭의 존재는 서은의 가슴속에 또렷하게 각인이 되어 있었다.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낙인처럼.

***

저녁 10시쯤에 파티는 끝이 났다. 술이 모자란 몇 명의 무리들이 밤을 새울 것처럼 야외 테이블에 앉아 술을 마셨고 행사 진행 요원들이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요리사들은 서버들이 가져온 접시들을 설거지하는 것으로 모든 업무를 종료했다. 내일 저녁까지는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가을까지는 일정이 빡빡하게 잡혀 있어 캡틴쿡의 직원들에게 이틀 이상의 휴가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 밤부터 내일 저녁까지 이어지는 휴식 시간이 이들에겐 꿀맛 같은 휴가나 마찬가지였다.
서은과 희진은 조리복을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서 선착장 주변을 돌아다녔다. 캄캄한 밤이라 별로 볼 것이 없었다. 짭조름한 바다 냄새를 풍기는 바람만이 쓸쓸하게 두 사람을 반겨 주었다.
산책을 하는 내내 서은의 머릿속엔 온통 지섭의 얼굴이 떠돌아다녔다.
이런 곳에서 그와 재회를 하다니…….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분명히 오전에 갑판 위에서 지섭은 서은을 보았었다.
그런데 왜 알은체를 하지 않았지? 왜 그냥 가 버렸지? 게다가 이런 곳에서 우연히 그를 만난다는 게 가능하기라도 한 거야? 다시 그와 마주치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서은의 머릿속이 깨질 것처럼 아파 왔다.
산책을 끝내고 다시 펜션으로 돌아오는 길, 건장한 남자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펜션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서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던 서은의 발걸음이 남자와 몇 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그대로 멈춰 섰다.
“윤서은, 오랜만이야.”
서은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선 채 웃고 있는 지섭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왜 대답이 없어? 별로 반갑지 않은 얼굴인데.”
서은은 뭐라고 대답을 해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생각들이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말을 꺼내면 그대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서은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옆에 서 있던 희진은 그제야 지섭을 알아보고는 간단히 고개를 숙여 묵례를 했다. 희진의 인사에 지섭 역시 고개를 숙여 답을 했다.
“서은아, 난 먼저 들어갈게.”
희진이 서은과 지섭의 눈치를 살피며 펜션으로 걸어가려 하자 서은이 희진의 손을 잡았다.
“같이 가!”
희진의 손을 잡고 서은이 걸음을 옮길 때였다. 한 발자국 옮겼을까, 지섭이 서은의 손목을 잡았다.
“잠깐 이야기 좀 해.”
서은은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사람 잘못 봤어요.”
심장이라도 얼려 버릴 듯한 차가운 서은의 목소리에 지섭의 표정이 굳어졌다.
“윤서은, 지난 3년 동안 널 기다렸어.”
간절한 애원이 묻어난 지섭의 말투, 하지만 서은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몸을 돌리지 않은 채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미안하지만…… 지난 과거, 난 다 지웠어. 그리고 난 한 번도 널 기다린 적 없어.”
서은은 차갑게 말을 뱉은 뒤 지섭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 길로 곧장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숙소까지 빠르게 걸었다
걸어가는 동안 희진은 서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은아 전에 그 남자…… 맞지?”
서은은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지섭과 2년간의 교제. 그 기간 동안 서은은 많은 것을 숨겨야만 했다. 가장 친한 친구인 희진에게조차. 재벌 3세와의 연애는 그랬다. 많은 것들을 숨겨야만 했다. 그래야 견딜 수 있었고 그래야 만날 수 있었다. 그래야 사랑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지섭이 원한 게 아니라 서은이 원했었다
가지지 못한 것을 가졌을 때는 한 가지쯤은 버려야 한다고 그렇게 믿었다. 다 가지려 하다가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것 같아서.
결론적으로는 모든 것을 잃었는데 말이다.
그 당시에는 그랬었다. 그렇게 하는 게 지섭을 위하는 것이고 서은 자신을 위한 것이라 믿었으니까.
지섭은 서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애타게 기다렸던 재회. 돌아온 것은 얼음처럼 차가운 그녀의 눈빛과 말투가 전부였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지섭은 새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단 한 명, 현지섭이 사랑했던 여자, 윤서은.
이렇게 보내지는 않는다, 절대로.
그리고 이제 절대로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다.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난 서은은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밖에 안 나갈 거야? 아침은?”
“생각 없어. 그냥 쉬고 있을게.”
희진은 걱정스럽게 서은을 보았다. 아무래도 지난밤 지섭을 만났기 때문이리라.
희진이 지섭을 본 것은 여러 번이었지만 늘 스치듯 봤기에 기억이 가물거렸다. 그리고 지섭이 어떤 인물인지도 희진은 알지 못했다. 부잣집 아들이라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둘이서 연애를 한 지 2년이 다 되어 갈 동안 희진은 서은이 연애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런 지섭이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그룹인 동성그룹 현종우 회장의 손자라는 사실과 현종우 회장의 파티에서 그를 만났다는 사실에 희진 역시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3년 만에 뜻밖의 재회를 하게 된 서은은 오죽 놀랐겠는가 말이다.
“너 그 남자 때문에 그래?”
서은은 대답하지 않은 채 시트를 턱까지 끌어 올리고 돌아누웠다.
그 모습을 본 희진은 고개를 저었다.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건 서은의 마음이 혼란스럽다는 증거였다.
3년 전 그 남자와 헤어진 이후, 서은은 이탈리아로 갑자기 유학을 떠났었다. 가까운 친구인 희진에게조차 미리 언질 한 번 없이 훌쩍 떠난 유학길이었다. 그래서 서은이 현지섭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는 희진이 알 수 없었다. 서은이 3년간의 유학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마음의 정리를 했을 테니까.
그런데 지금 보니 그런 것이 아닌 것도 같았다. 서은의 가슴속에는 아직 현지섭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듯 보였다.
“먹을 것 좀 갖다 줄까?”
“아니, 괜찮아. 생각 없어. 그냥 좀 혼자 있고 싶어.”
늘 생글거리며 웃는 서은이라 그런지 힘없이 축 처져 있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희진의 마음이 썩 편치는 않았다.
희진은 서은의 어깨에 손을 얹어 몇 번을 주물러 주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프다고 그럴게. 식사하고 올 테니까 좀 더 쉬고 있어.”
희진이 나가고 난 뒤 서은은 천장을 쳐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라도 지섭을 만나게 될까 서은은 차마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어차피 저녁이면 여길 떠나게 된다. 그때까지 서은은 숙소에서 꼼짝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서은은 휴대전화를 들어 김 실장에게 전화를 넣었다.
“실장님, 저 부탁이 있어서 전화드렸어요.”
- 무슨 부탁이야?
“사정이 있어서 그러는데 먼저 올라가면 안 될까 해서요.”
- 서은 씨는 좀 곤란한데.
“네? 그게 무슨……?”
- 이번에 서은 씨가 여기 남게 됐어.
서은은 방금 들은 말이 무슨 뜻인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물었다.
“네? 저를요?”
서은은 김 실장에게 직접 그 말을 듣고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실력이나 서열로 봐서는 서연이 가장 막내였다. 이번에 현종우 회장의 별장에 남겨질 요리사의 대우가 파격적이라 파견 나온 모든 요리사들이 그 자리를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선배 몫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느닷없이 서은에게 그 일이 맡겨지자 서은은 어리둥절했다. 납득이 가지 않아 되물었다.
“왜 제가 남죠? 다른 선배님들도 계신데.”
- 내 생각엔 서은 씨가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이 돼서야!
대기업 회장의 전속 요리사나 다름없는 자리였다. 그리고 섬이라는 특성까지 고려해서 다른 곳보다 페이가 두 배 이상 차이가 났다. 선배들이 이 자리를 탐내는 것은 당연했다. 더군다나 단기 계약이다. 석 달이라고 한다. 보수도 많을 뿐더러 휴가지다. 문만 열고 나서면 푸른 다도해가 한눈에 펼쳐진다.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곳이다. 그런데 이런 자리를 햇병아리 같은 자신에게 맡긴다 생각하자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곧 서은의 궁금증이 한 번에 해결되었다.
현지섭의 입김이리라.
“미안하지만 전 안 될 것 같은데요.”
- 무슨 소리야? 다른 사람들은 서로 하려고 난리인데. 이미 결정이 난 사항이니까 그냥 그렇게 알고 있어.
“아뇨. 전 못 하겠어요.”
김 실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 계약 다 끝났어. 계약 위반하면 위약금 물어야 돼. 인간적으로 위약금 물지 않더라도 우리 회사 이미지가 어떻게 되겠어? 이미 여기 오는 조건에 다 들어가 있는 내용인데.
“그럼 다른 사람이 남으면 되잖아요. 다 저보다 잘하잖아요.”
- 여기 젊은 사장님이 윤서은 씨 이름까지 거론하면서 부탁했어. 계약서에도 윤서은 씨 이름 썼고. 윤서은 씨가 아니면 안 된대.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 이미 계약은 끝났어. 윤서은 씨가 하기 싫다고 하면 위약금 물어야 돼. 그럼 위약금 절반은 서은 씨가 물게 돼 있어.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