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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1
“반달곰.”
귓가에서 울리는 건 명지 목소리다.
명지가 지어 준 별명, 반달곰. 10년 넘게 들어와서 이름만큼이나 익숙하지만, 솔직히 100% 맘에 드는 건 아니다. 명지는 곰돌이 푸가 떠오르고 어감도 귀엽다 주장하지만 반달곰도 어쨌든 곰. 굼뜨고 퉁퉁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니까.
별명만 들으면 사람들은 대개 고개를 갸웃거리곤 한다. 외모랑 연결이 잘 안 되어서 그럴 거다. 잠이 많아서요, 라고 덧붙여도 흔쾌히 끄덕이지 못하다가 반다을이란 이름을 듣고서야 웃으며 수긍을 했다. 처음 반달곰이라 불리던 중학교 땐 살짝, 아주 살짝 통통했었다는 사실은 비밀.
“모닝커피 왔어요.”
명지가 다정하게 재촉했다. 다을은 창 쪽으로 돌아누웠다. 달콤한 잠을 떨쳐야 하는 아침이 제일 싫다. 11월 중순, 겨울로 접어드는 이 계절엔 더더욱. 그렇지만 고소한 커피 향은 외면하기 힘들다.
“오늘의 날씨는?”
다을은 눈 감은 채 잠꼬대하듯 중얼거렸다. 명지 손길에 차르르 커튼이 걷히며 눈두덩 위로 햇살이 환하게 쏟아져 내렸다. 눈이 부셔 뜨지 않고는 도무지 버틸 재간이 없다.
“보시다시피 끝내주게 맑음.”
재잘대듯 다가드는 햇볕을 피해 다을은 되돌아 누웠다. 미소를 담뿍 머금고 내려다보는 명지 얼굴이 보였다. 명지는 그새 연하게 화장도 했다.
“부지런한 명지 씨.”
“다을이 너한테 끝내주게 멋있는 오빠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
“애석하도다. 나한테 오빠가 있었음 너랑 맺어 주려고 열심히 노력했을 거야.”
“그렇게 되면 나한테 올케 언니라고 불러야 되는데도?”
“그게 뭐 어때서. 너 원래 언니 캐릭터잖아.”
“후후, 내가 좀 그렇긴 하지?”
“많이 그럴 때도 있지.”
“그래서 귀찮다는 거야?”
“아니, 명지 넌 절대로 안 귀찮아. 넌 언제나 예외야.”
“황송하옵니다.”
과장되게 사극 말투를 쓰는 명지를 보며 다을은 웃었다.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서 헝클어진 긴 머리칼을 대충 쓸어 올려 묶자 기다렸다는 듯 명지가 쟁반을 들어 올렸다. 머그잔엔 방금 내렸을 커피가, 접시에는 동그란 모닝롤빵 여러 개가 아기자기 앉아 있었다.
토요일 아침인 게 실감난다. 명지가 주말에만 오지 말고 매일 여기 살았으면 좋겠다. 진심.
“없는 오빠 대신 나랑 결혼하자, 명지야.”
“싫어.”
“쳇.”
다을은 눈을 쓱쓱 비비고 머그잔을 집었다.
“쌍꺼풀 생겼다!”
새삼스럽게 명지가 감탄했다. 보나마나 왼쪽 눈에만 살그머니 잡히는 속쌍꺼풀일 터. 다을은 두어 번 눈을 깜박였다.
“이제 없지?”
“응, 감쪽같이 사라졌어. 다을이 너 쌍꺼풀 수술하면 끝내주게 예쁠 텐데.”
아쉬워하며 은근히 수술을 권하는 명지에게 다을은 담백하게 대꾸했다.
“귀찮아.”
“하긴, 요즘은 너처럼 매끈한 눈이 대세라더라.”
잠이 완전히 달아난 두 눈에 책들로 가득 찬 책장이 들어왔다. 앞에도 양옆에도 뒤에도 창을 제외한 벽이란 벽은 책들로 빽빽했다. 천장이 낮은 이 다락방도 사면을 아늑하게 둘러싼 책들도 늘 다을을 포근하게 만들어 주었다.
도서관 사서 일을 그만둔 지 6개월 남짓. 새벽부터 일어나 헐레벌떡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아침의 여유가 참 행복하다. 주변에서는 요즘 같이 취직하기 힘든 세상에 그 좋은 직장을 왜 박차고 나오느냐며 걱정과 핀잔을 뭉텅이로 주었지만 그것도 다 지난 일이 되었다.
“다을이 너 요즘 딱 좋아 보여. 살도 적당히 붙었고. 올봄까지만 해도 해골 수준이었잖아.”
“그 정도였어?”
“차마 눈 뜨고 못 봐 줄 지경이었지. 너 고3 때도 그 정돈 아니었다.”
“우리 엄마 아빠한테 고마울 따름이야. 그리고 너한테도.”
“나? 나는 왜?”
너는 언제나 닥치고 내 편이 되어 주는 친구니까. 우리 엄마 아빠만큼이나.
속에 담긴 마음을 그대로 말하기가 오글거려 다을은 그저 생긋 웃어 주었다. 명지가 눈가에 새콤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이렇게 침대까지 커피 대령해 줘서?”
“응. 도명지가 매일 아침 이렇게 커피랑 갓 구운 빵이랑 들고 와서 가만가만 깨워 줬으면 좋겠어.”
“야. 그런 건 나 말고 남자여야지.”
“남자는 좀.”
“귀찮아?”
“응. 남자는 항상 여자에게 뭔가를 원하는 종족이라면서?”
“내가 그랬던가?”
다을은 웃으며 끄덕였다.
명지의 찬란한 연애 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매번 베푸는 쪽은 명지였다. 뭐든 제 손으로 만들어 먹이기 좋아하고 시시콜콜 챙겨 주는 걸 즐기기는 했다. 하지만 몇 번의 연애가 계속 그런 패턴으로 흘러가자 명지도 슬며시 지친 모양이었다. 다을에게 간단한 말로 남자라는 족속을 결론짓고 연애를 끊은 지도 1년이 다 되어 간다.
머쓱한지 헤헤 웃으며 명지가 말했다.
“남자 나름이지, 뭐. 어른 같은 남자를 만나면 되잖아. 너희 아빠처럼.”
“우리 아빠? 언제는 수도사 같다더니?”
“너랑 소을이랑, 딸을 둘이나 만들었는데 수도사 같다는 건 모욕이지.”
명지가 크크, 짓궂은 웃음을 보탰다.
대체로 명지 의견에 동감이다. 아빠는 자기 관리에 엄격한 학자로 보이지, 엄마를 열렬히 사랑한 남자로는 느껴지지 않는다. 엄마보다 열일곱 살이나 많은 나이 탓인지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엄마는 지금도 아빠를 존경하는 교수님으로 대하는 것 같다. 평소엔 ‘여보’라고 부르다가도 심기가 불편해지면 깍듯이 ‘교수님’이라 칭하는 이유도 엄마 마음 저 밑바닥에 결혼 전 예전의 관계가 남아 있기 때문일 거다.
그나저나 최강 동안인 엄마 덕분에 아빠가 낯선 여행지에서 또 괜한 오해나 안 받아야 할 텐데.
“두 분 지금 완전 행복하시겠다.”
“여행이야 뭐 워낙 자주 다니시니까.”
“이번엔 며칠짜리야? 사흘? 닷새? 일주일?”
“일주일. 여차하면 더 길어질 수도 있고.”
“나도 남자랑 여행 떠나고 싶다!”
명지한테 슬슬 연애 본능이 살아나려는가 보다. 그래, 1년이면 많이 참았다.
“다을아, 너는 어떤 남자가 좋아?”
“이상형 그런 거?”
“그래, 이상형 그런 거.”
“나는 목소리가 좋은 남자.”
“그게 다야? 목소리만 좋은 고자면 어쩌려고?”
“크크, 설마.”
“그래도 선택해야 한다면?”
“음, 그래도 난 목소리를 선택하겠어.”
“아무래도 다을이 넌 무성욕자가 분명해.”
다을은 큭큭 웃었다. ‘무’까지는 아니지만 ‘약’ 수준일 것 같기는 하다. 성적인 교감은 없어도 별 불만 없을 것 같은데 정서적 교감 없이는 하루도 같이 못 살 것 같으니까. 오래된 친구처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떠오르는 사람. 편안한 잠을 지켜 주는 사람. 그리고…….
“좋은 목소리로 아침마다 나를 감미롭게 깨워 주는 사람. 그런 남자라면 내 기꺼이 결혼해 주겠어.”
“반달곰, 일단 연애부터 하셔.”
끙. 물론 당연한 말씀. 그렇지만 연애란 거 무지 귀찮다.
“명지 너는? 너는 어떤 남자가 좋아?”
“내 이상형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나를 마구 휘어잡는 남자.”
“으. 난 그런 남자 질색인데.”
“다을이 너야 타고난 귀차니스트니까 그렇지. 휘어잡히는 것도 휘둘리는 것도 피곤해서 절대 못 견딜걸?”
“맞아. 난 그냥 나를 가만 놔두는 사람이 좋아.”
“가만 놔두는 연애가 가능이나 해? 목소리만 좋은 고…… 아니, 게으름뱅이를 만나야겠네.”
“게으름뱅이는 싫은데.”
“그래, 티 안 나게 너 아껴 주려면 게을러선 곤란하긴 하겠다.”
티 안 나게 아껴 주는 사람.
명지가 제대로 짚은 것 같다.
내가 너를 좋아합네, 주변이 다 알도록 떠들썩하게 티 내는 남자는 싫다. 내가 좋아해 준 꼭 그만큼 너도 나한테 돌려주어야 한다고 감정을 강요당하는 것만 같아서. 서로 동률의 감정을 나누면 당연히 바람직하겠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준 만큼 받아 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 왜 똑같이 안 주느냐고 화내는 사람, 진짜 피곤하다.
한 가지를 더하자면, 가치관이 같은 사람.
정치적 성향, 삶에 대한 태도와 방향, 세계관,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를 두는 것들, 그리고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들이 일치하거나 최소한 서로 엇비슷하게 맞춰 갈 수 있는 사람. 그런 남자가 있다면 귀찮아도 연애라는 거 해 보고 싶다. 스물여섯 해가 다 지나가도록 만나 본 적이 없다는 게 함정이지만. 어디까지나 이상형은 이상형일 뿐이니까.
머그잔을 든 명지가 햇볕이 곰실대는 창턱에 걸터앉더니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다을아. 우리 작은 책방 2호점 내자.”
“작은 책방 2호점?”
“응. 너랑 나랑 둘이서. 근데 여기처럼 북 스테이(Book stay)까지는 아니고, 순수하게 책방만. 물론 커피도 곁들여 팔아야겠지. 너는 책 담당, 나는 커피 담당. 어때? 끝내주게 환상적이지?”
아휴, 하는 한숨으로 끼어든 건 소을이다. 계단참에 선 소을이 허리에 손을 딱 얹고서 고개를 설설 저어 댔다. 소을을 돌아본 명지가 명랑하게 말을 건넸다.
“굿모닝, 소을. 네 생각은 어때?”
“굿모닝, 명지 언니. 나는 끝내주게 반댈세.”
다을은 키득키득 웃어 버렸다. 명지의 입버릇인 ‘끝내주게’를 절묘하게 사용한 소을이 덕분이다.
“생각도 안 해 보고 단숨에? 어째서?”
“명지 언니, 여기도 적잔데 2호점이 가당키나 해?”
정말이냐고 확인하듯 쳐다보는 명지를 향해 다을은 짐짓 심각하게 끄덕여 보였다. 명지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날마다 예약이 꽉꽉 차는데?”
1층에 셋, 2층에 셋, 그리고 다락방까지 방이 모두 일곱. 그중에서 1층 방 두 개는 다을이네 가족이 쓰고 있으니 실제로는 다섯인 셈이다. 주말이야 두 달 뒤까지 숙박 예약이 차 있지만 평일에는 책 속에서 평화롭게 몇 시간 머물다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엄밀히 말하면 ‘날마다’라고는 할 수 없다. 그래도 적자를 걱정해야 할 정도까진 아니다.
“명지 언니. 괜한 얘기로 우리 언니 꼬드기지 말고 아래층에나 좀 내려와 보삼.”
“왜? 아래층에 뭔 일 생겼어?”
다을을 앞선 명지의 물음에 소을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힘껏 끄덕였다. 소을을 따라 후다닥 뛰어 내려가는 것도 호기심 충만한 명지 몫이었다.
“낚였다, 도명지.”
다을은 웃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무슨 급한 일이 생긴 거라면 엄마랑 아빠한테 먼저 전화를 하지, 명지를 부르지는 않았을 거다.
주방에서 치우기 힘든 뭔가를 왕창 쏟았거나, 숙박 손님들에게 낼 토스트를 새까맣게 태웠거나, 그도 아니면 곁들여 나갈 샐러드를 망쳤거나. 최악의 경우 엄마를 잘 따르는 이웃집 냥이 사과가 보은한답시고 자랑스레 쥐를 잡아다 놓았을 수도 있다. 어쨌든 모두 다 명지의 손길로 처리가 가능한 분야들.
그러므로 다을은 느긋하게 커피를 마저 마셨다. 창 너머 햇빛은 더없이 투명하고, 이불 속은 좋은 사람의 품처럼 따듯하고.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한가로운 주말 아침이었다.
* * *
샤워를 마치고 1층으로 내려가니 명지와 소을 둘이서 낯선 핸드폰 하나를 탁자 위에 두고 궁리 중이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말끄러미 쳐다보는 다을에게 소을이 상황을 요약해 주었다. 어제 오후에 들어와 2층에서 밤을 보낸 손님이 방값도 내지 않고 새벽에 몰래 나가 버렸다는 것. 급히 도망치는 와중에 이 핸드폰을 떨어뜨렸을 거라는 것.
스무 살인 소을보다 두어 살쯤 더 많아 보이던 그 여자 손님을 다을은 똑똑히 기억했다. 혼자 왔으면서도 전혀 혼자임을 의식하지 않던, 책을 본다기보다는 주로 얼굴에 덮어 두고 고양이처럼 소파에 조그맣게 웅크려 자던. 오목조목 예쁘장한 이목구비며 군살 하나 없이 미끈한 몸매며 미모가 남달라서 더 선명했다.
“근처에 잠깐 나간 거 아냐?”
다을의 물음에 명지가 대답했다.
“가방도 없고 차도 없대.”
“가방 들고 차 갖고 외출했을 수도 있잖아.”
“그럼 미리 말이라도 해 두었어야지.”
“새벽이라 깨우기 난감해서 그랬겠지.”
“메모는 할 줄 모른대? 내가 봤을 때 이건 명백히 계획적인 도주야.”
명지가 단언했다. 도주라는 극단적 표현을 쓰고는 있지만 흥미진진한 일을 발견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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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곰.”
귓가에서 울리는 건 명지 목소리다.
명지가 지어 준 별명, 반달곰. 10년 넘게 들어와서 이름만큼이나 익숙하지만, 솔직히 100% 맘에 드는 건 아니다. 명지는 곰돌이 푸가 떠오르고 어감도 귀엽다 주장하지만 반달곰도 어쨌든 곰. 굼뜨고 퉁퉁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니까.
별명만 들으면 사람들은 대개 고개를 갸웃거리곤 한다. 외모랑 연결이 잘 안 되어서 그럴 거다. 잠이 많아서요, 라고 덧붙여도 흔쾌히 끄덕이지 못하다가 반다을이란 이름을 듣고서야 웃으며 수긍을 했다. 처음 반달곰이라 불리던 중학교 땐 살짝, 아주 살짝 통통했었다는 사실은 비밀.
“모닝커피 왔어요.”
명지가 다정하게 재촉했다. 다을은 창 쪽으로 돌아누웠다. 달콤한 잠을 떨쳐야 하는 아침이 제일 싫다. 11월 중순, 겨울로 접어드는 이 계절엔 더더욱. 그렇지만 고소한 커피 향은 외면하기 힘들다.
“오늘의 날씨는?”
다을은 눈 감은 채 잠꼬대하듯 중얼거렸다. 명지 손길에 차르르 커튼이 걷히며 눈두덩 위로 햇살이 환하게 쏟아져 내렸다. 눈이 부셔 뜨지 않고는 도무지 버틸 재간이 없다.
“보시다시피 끝내주게 맑음.”
재잘대듯 다가드는 햇볕을 피해 다을은 되돌아 누웠다. 미소를 담뿍 머금고 내려다보는 명지 얼굴이 보였다. 명지는 그새 연하게 화장도 했다.
“부지런한 명지 씨.”
“다을이 너한테 끝내주게 멋있는 오빠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
“애석하도다. 나한테 오빠가 있었음 너랑 맺어 주려고 열심히 노력했을 거야.”
“그렇게 되면 나한테 올케 언니라고 불러야 되는데도?”
“그게 뭐 어때서. 너 원래 언니 캐릭터잖아.”
“후후, 내가 좀 그렇긴 하지?”
“많이 그럴 때도 있지.”
“그래서 귀찮다는 거야?”
“아니, 명지 넌 절대로 안 귀찮아. 넌 언제나 예외야.”
“황송하옵니다.”
과장되게 사극 말투를 쓰는 명지를 보며 다을은 웃었다.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서 헝클어진 긴 머리칼을 대충 쓸어 올려 묶자 기다렸다는 듯 명지가 쟁반을 들어 올렸다. 머그잔엔 방금 내렸을 커피가, 접시에는 동그란 모닝롤빵 여러 개가 아기자기 앉아 있었다.
토요일 아침인 게 실감난다. 명지가 주말에만 오지 말고 매일 여기 살았으면 좋겠다. 진심.
“없는 오빠 대신 나랑 결혼하자, 명지야.”
“싫어.”
“쳇.”
다을은 눈을 쓱쓱 비비고 머그잔을 집었다.
“쌍꺼풀 생겼다!”
새삼스럽게 명지가 감탄했다. 보나마나 왼쪽 눈에만 살그머니 잡히는 속쌍꺼풀일 터. 다을은 두어 번 눈을 깜박였다.
“이제 없지?”
“응, 감쪽같이 사라졌어. 다을이 너 쌍꺼풀 수술하면 끝내주게 예쁠 텐데.”
아쉬워하며 은근히 수술을 권하는 명지에게 다을은 담백하게 대꾸했다.
“귀찮아.”
“하긴, 요즘은 너처럼 매끈한 눈이 대세라더라.”
잠이 완전히 달아난 두 눈에 책들로 가득 찬 책장이 들어왔다. 앞에도 양옆에도 뒤에도 창을 제외한 벽이란 벽은 책들로 빽빽했다. 천장이 낮은 이 다락방도 사면을 아늑하게 둘러싼 책들도 늘 다을을 포근하게 만들어 주었다.
도서관 사서 일을 그만둔 지 6개월 남짓. 새벽부터 일어나 헐레벌떡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아침의 여유가 참 행복하다. 주변에서는 요즘 같이 취직하기 힘든 세상에 그 좋은 직장을 왜 박차고 나오느냐며 걱정과 핀잔을 뭉텅이로 주었지만 그것도 다 지난 일이 되었다.
“다을이 너 요즘 딱 좋아 보여. 살도 적당히 붙었고. 올봄까지만 해도 해골 수준이었잖아.”
“그 정도였어?”
“차마 눈 뜨고 못 봐 줄 지경이었지. 너 고3 때도 그 정돈 아니었다.”
“우리 엄마 아빠한테 고마울 따름이야. 그리고 너한테도.”
“나? 나는 왜?”
너는 언제나 닥치고 내 편이 되어 주는 친구니까. 우리 엄마 아빠만큼이나.
속에 담긴 마음을 그대로 말하기가 오글거려 다을은 그저 생긋 웃어 주었다. 명지가 눈가에 새콤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이렇게 침대까지 커피 대령해 줘서?”
“응. 도명지가 매일 아침 이렇게 커피랑 갓 구운 빵이랑 들고 와서 가만가만 깨워 줬으면 좋겠어.”
“야. 그런 건 나 말고 남자여야지.”
“남자는 좀.”
“귀찮아?”
“응. 남자는 항상 여자에게 뭔가를 원하는 종족이라면서?”
“내가 그랬던가?”
다을은 웃으며 끄덕였다.
명지의 찬란한 연애 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매번 베푸는 쪽은 명지였다. 뭐든 제 손으로 만들어 먹이기 좋아하고 시시콜콜 챙겨 주는 걸 즐기기는 했다. 하지만 몇 번의 연애가 계속 그런 패턴으로 흘러가자 명지도 슬며시 지친 모양이었다. 다을에게 간단한 말로 남자라는 족속을 결론짓고 연애를 끊은 지도 1년이 다 되어 간다.
머쓱한지 헤헤 웃으며 명지가 말했다.
“남자 나름이지, 뭐. 어른 같은 남자를 만나면 되잖아. 너희 아빠처럼.”
“우리 아빠? 언제는 수도사 같다더니?”
“너랑 소을이랑, 딸을 둘이나 만들었는데 수도사 같다는 건 모욕이지.”
명지가 크크, 짓궂은 웃음을 보탰다.
대체로 명지 의견에 동감이다. 아빠는 자기 관리에 엄격한 학자로 보이지, 엄마를 열렬히 사랑한 남자로는 느껴지지 않는다. 엄마보다 열일곱 살이나 많은 나이 탓인지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엄마는 지금도 아빠를 존경하는 교수님으로 대하는 것 같다. 평소엔 ‘여보’라고 부르다가도 심기가 불편해지면 깍듯이 ‘교수님’이라 칭하는 이유도 엄마 마음 저 밑바닥에 결혼 전 예전의 관계가 남아 있기 때문일 거다.
그나저나 최강 동안인 엄마 덕분에 아빠가 낯선 여행지에서 또 괜한 오해나 안 받아야 할 텐데.
“두 분 지금 완전 행복하시겠다.”
“여행이야 뭐 워낙 자주 다니시니까.”
“이번엔 며칠짜리야? 사흘? 닷새? 일주일?”
“일주일. 여차하면 더 길어질 수도 있고.”
“나도 남자랑 여행 떠나고 싶다!”
명지한테 슬슬 연애 본능이 살아나려는가 보다. 그래, 1년이면 많이 참았다.
“다을아, 너는 어떤 남자가 좋아?”
“이상형 그런 거?”
“그래, 이상형 그런 거.”
“나는 목소리가 좋은 남자.”
“그게 다야? 목소리만 좋은 고자면 어쩌려고?”
“크크, 설마.”
“그래도 선택해야 한다면?”
“음, 그래도 난 목소리를 선택하겠어.”
“아무래도 다을이 넌 무성욕자가 분명해.”
다을은 큭큭 웃었다. ‘무’까지는 아니지만 ‘약’ 수준일 것 같기는 하다. 성적인 교감은 없어도 별 불만 없을 것 같은데 정서적 교감 없이는 하루도 같이 못 살 것 같으니까. 오래된 친구처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떠오르는 사람. 편안한 잠을 지켜 주는 사람. 그리고…….
“좋은 목소리로 아침마다 나를 감미롭게 깨워 주는 사람. 그런 남자라면 내 기꺼이 결혼해 주겠어.”
“반달곰, 일단 연애부터 하셔.”
끙. 물론 당연한 말씀. 그렇지만 연애란 거 무지 귀찮다.
“명지 너는? 너는 어떤 남자가 좋아?”
“내 이상형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나를 마구 휘어잡는 남자.”
“으. 난 그런 남자 질색인데.”
“다을이 너야 타고난 귀차니스트니까 그렇지. 휘어잡히는 것도 휘둘리는 것도 피곤해서 절대 못 견딜걸?”
“맞아. 난 그냥 나를 가만 놔두는 사람이 좋아.”
“가만 놔두는 연애가 가능이나 해? 목소리만 좋은 고…… 아니, 게으름뱅이를 만나야겠네.”
“게으름뱅이는 싫은데.”
“그래, 티 안 나게 너 아껴 주려면 게을러선 곤란하긴 하겠다.”
티 안 나게 아껴 주는 사람.
명지가 제대로 짚은 것 같다.
내가 너를 좋아합네, 주변이 다 알도록 떠들썩하게 티 내는 남자는 싫다. 내가 좋아해 준 꼭 그만큼 너도 나한테 돌려주어야 한다고 감정을 강요당하는 것만 같아서. 서로 동률의 감정을 나누면 당연히 바람직하겠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준 만큼 받아 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 왜 똑같이 안 주느냐고 화내는 사람, 진짜 피곤하다.
한 가지를 더하자면, 가치관이 같은 사람.
정치적 성향, 삶에 대한 태도와 방향, 세계관,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를 두는 것들, 그리고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들이 일치하거나 최소한 서로 엇비슷하게 맞춰 갈 수 있는 사람. 그런 남자가 있다면 귀찮아도 연애라는 거 해 보고 싶다. 스물여섯 해가 다 지나가도록 만나 본 적이 없다는 게 함정이지만. 어디까지나 이상형은 이상형일 뿐이니까.
머그잔을 든 명지가 햇볕이 곰실대는 창턱에 걸터앉더니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다을아. 우리 작은 책방 2호점 내자.”
“작은 책방 2호점?”
“응. 너랑 나랑 둘이서. 근데 여기처럼 북 스테이(Book stay)까지는 아니고, 순수하게 책방만. 물론 커피도 곁들여 팔아야겠지. 너는 책 담당, 나는 커피 담당. 어때? 끝내주게 환상적이지?”
아휴, 하는 한숨으로 끼어든 건 소을이다. 계단참에 선 소을이 허리에 손을 딱 얹고서 고개를 설설 저어 댔다. 소을을 돌아본 명지가 명랑하게 말을 건넸다.
“굿모닝, 소을. 네 생각은 어때?”
“굿모닝, 명지 언니. 나는 끝내주게 반댈세.”
다을은 키득키득 웃어 버렸다. 명지의 입버릇인 ‘끝내주게’를 절묘하게 사용한 소을이 덕분이다.
“생각도 안 해 보고 단숨에? 어째서?”
“명지 언니, 여기도 적잔데 2호점이 가당키나 해?”
정말이냐고 확인하듯 쳐다보는 명지를 향해 다을은 짐짓 심각하게 끄덕여 보였다. 명지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날마다 예약이 꽉꽉 차는데?”
1층에 셋, 2층에 셋, 그리고 다락방까지 방이 모두 일곱. 그중에서 1층 방 두 개는 다을이네 가족이 쓰고 있으니 실제로는 다섯인 셈이다. 주말이야 두 달 뒤까지 숙박 예약이 차 있지만 평일에는 책 속에서 평화롭게 몇 시간 머물다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엄밀히 말하면 ‘날마다’라고는 할 수 없다. 그래도 적자를 걱정해야 할 정도까진 아니다.
“명지 언니. 괜한 얘기로 우리 언니 꼬드기지 말고 아래층에나 좀 내려와 보삼.”
“왜? 아래층에 뭔 일 생겼어?”
다을을 앞선 명지의 물음에 소을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힘껏 끄덕였다. 소을을 따라 후다닥 뛰어 내려가는 것도 호기심 충만한 명지 몫이었다.
“낚였다, 도명지.”
다을은 웃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무슨 급한 일이 생긴 거라면 엄마랑 아빠한테 먼저 전화를 하지, 명지를 부르지는 않았을 거다.
주방에서 치우기 힘든 뭔가를 왕창 쏟았거나, 숙박 손님들에게 낼 토스트를 새까맣게 태웠거나, 그도 아니면 곁들여 나갈 샐러드를 망쳤거나. 최악의 경우 엄마를 잘 따르는 이웃집 냥이 사과가 보은한답시고 자랑스레 쥐를 잡아다 놓았을 수도 있다. 어쨌든 모두 다 명지의 손길로 처리가 가능한 분야들.
그러므로 다을은 느긋하게 커피를 마저 마셨다. 창 너머 햇빛은 더없이 투명하고, 이불 속은 좋은 사람의 품처럼 따듯하고.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한가로운 주말 아침이었다.
* * *
샤워를 마치고 1층으로 내려가니 명지와 소을 둘이서 낯선 핸드폰 하나를 탁자 위에 두고 궁리 중이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말끄러미 쳐다보는 다을에게 소을이 상황을 요약해 주었다. 어제 오후에 들어와 2층에서 밤을 보낸 손님이 방값도 내지 않고 새벽에 몰래 나가 버렸다는 것. 급히 도망치는 와중에 이 핸드폰을 떨어뜨렸을 거라는 것.
스무 살인 소을보다 두어 살쯤 더 많아 보이던 그 여자 손님을 다을은 똑똑히 기억했다. 혼자 왔으면서도 전혀 혼자임을 의식하지 않던, 책을 본다기보다는 주로 얼굴에 덮어 두고 고양이처럼 소파에 조그맣게 웅크려 자던. 오목조목 예쁘장한 이목구비며 군살 하나 없이 미끈한 몸매며 미모가 남달라서 더 선명했다.
“근처에 잠깐 나간 거 아냐?”
다을의 물음에 명지가 대답했다.
“가방도 없고 차도 없대.”
“가방 들고 차 갖고 외출했을 수도 있잖아.”
“그럼 미리 말이라도 해 두었어야지.”
“새벽이라 깨우기 난감해서 그랬겠지.”
“메모는 할 줄 모른대? 내가 봤을 때 이건 명백히 계획적인 도주야.”
명지가 단언했다. 도주라는 극단적 표현을 쓰고는 있지만 흥미진진한 일을 발견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