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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책방 홈페이지에서 주말 예약을 받을 때는 선불이지만 어제 같은 경우, 그러니까 예정에 없이 하룻밤을 지내게 될 때는 굳이 도중에 요금 정산을 요구하지 않았다.
시간 가는 것도 잊고서 밤이 되도록 책 속에 폭 파묻혀 있는 사람에게 방값부터 계산해 주시죠, 그러지는 못한다. 아니, 안 한다. 하루를 머물게 되면 다음 날 나가면서 책들을 사 가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보니 한꺼번에 정산을 하는 게 편하기도 하니까.
어쨌거나 겨우 하루치 숙박비 몇만 원 때문에 핸드폰으로 추적에 들어간다는 게 어쩐지 야박하게 느껴져 썩 내키지 않았다. 과정이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엄마랑 아빠가 있었어도 없던 일로 치고 넘어가려 했을 것이다.
“차도 되게 좋은 거던데.”
소을의 말을 명지가 잡아챘다.
“뭐였는데?”
“차종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외제 차 같았어. 생긴 게 되게 독특했걸랑. 그리고 옷이랑 가방도 다 명품이었어. 그치, 언니?”
다을은 어깨만 으쓱했다. 차도 옷도 백도 그게 외젠지 국산인지 명품인지 보센지, 봐도 전혀 모를뿐더러 애초에 그런 쪽엔 무신경했다. 좋고 나쁨, 또는 옳고 그름이라는 가치판단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완벽하게 순수한 무관심. 그러니 다을에겐 물어보나 마나 한 질문이었다.
“이 핸드폰도 최신형이고. 이거 점점 재미있어지는걸? 금수저 아가씨가 대체 어떤 사연이 있기에 새벽 도주를 했는지 슬슬 궁금해지기도 하고.”
도명지표 오지랖 제대로 발동 걸렸다.
다을은 탁자 위에 놓인 문제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무심히 화면을 터치했는데 그냥 열렸다. 매번 눌러야 하는 게 귀찮아서 비밀번호 설정을 해 두지 않는 다을과 마찬가지인가 보다.
“이리 줘 봐.”
명지가 다을의 손에서 냉큼 핸드폰을 가져갔다. 곧장 단축 번호를 찾아 들어가더니 풋 웃음을 터뜨렸다. 다을에게도 화면 속 목록이 빤히 보였다.

1번 — 악어
2번 — 늑대
3번 — 들개

“이건 뭐 거의 야생동물 집합소네.”
명지가 낄낄대며 말했다.
“엄마, 아빠, 오빠 순서일까?”
소을의 추측에 명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촉으론 셋 다 남자야.”
“늑대 아빠 들개 오빠는 몰라도 악어 엄마는 좀 그렇긴 하다, 언니.”
“난 들개. 다을아, 너는?”
난데없이 날아든 물음에 다을은 말똥말똥한 눈을 하고 되물었다.
“나? 나 뭐?”
“하나 고르라고.”
“골라? 왜?”
“셋 중에 하나 골라서 전화를 걸어야 할 거 아냐. 적자라면서?”
명지는 제법 진지했다. 아까 적자를 들먹였던 소을이 웃을까 어쩔까 애매한 표정으로 다을을 보았다.
“근데 핸드폰 없는 걸 알면 전화가 오지 않을까?”
다을의 물음에 명지가 고개를 힘껏 저었다.
“몇 시간 동안 잠잠하잖아. 도망친 거라니까? 핸드폰 여기다 떨어뜨린 거야 벌써 알았겠지. 그런데 창피해서 전화 못 하는 거야.”
명지의 논리가 나름 그럴듯했다. 방값은 둘째고, 최신형이라는 이 핸드폰을 돌려주기 위해서라도 연락은 해 봐야겠다.
“흠.”
다을은 두 손에 턱을 괴고 잠시 생각했다. 이 위험한 동물들이 그 여자의 가족이건 남자 친구이건 또는 다른 누구이건 간에 셋 중에서 제일 중요하고 가까운 사람은 역시 1번일 것 같았다.
“그럼 난 악어.”
“소을이 너는?”
명지가 묻자 소을이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난 기권할래, 언니. 강아지, 고양이, 토끼도 아니고 악어, 늑대, 들개? 나는 셋 다 싫어.”
가위바위보로 전화 걸 사람을 정하자는 제안도 명지가 냈다. 셋이서 엎치락덮치락 네 번의 접전 끝에 다을이 이겼다. 명지가 다을에게 핸드폰을 쓱 밀었다. 다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이겼거든?”
“이긴 사람이 거는 거야.”
천연덕스런 명지 편을 들며 소을이 콩콩 고개를 끄덕였다.
“귀찮은데.”
투덜거려 봐도 소용없었다. 결국 다을은 1번 악어에게 전화를 걸었다.





2





통유리 너머 보이는 앙상한 나무들만 아니라면 봄이라고 해도 알맞게 볕이 따스한 토요일 오전.
오 팀장과 나란히 앉아 신입 편집자 면접을 지켜보던 중 진동이 울렸다. 석주는 탁자 위에 뒤집어 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발신자를 확인했다. 난주다.
이 녀석이 어쩐 일로 나한테?
의문이 들었다. 첫 번째는 철주, 다음은 기주. 난주의 용건은 매번 그 두 단계를 거치기에 그랬다. 그리고 기주까지 올라가기도 전에 철주 선에서 대체로 해결이 되는 편이었다. 해결 못 하는 일은 철주가 석주와 기주에게 대신 말해 주곤 했다.
철주와 난주는 어려서부터 죽이 잘 맞았다. 둘 다 개성이 강한 편인데도 서로 부딪치지 않는 걸 보면 그나마 적은 세 살 터울 덕일 게다.
오빠가 아니라 삼촌 같아.
석주를 두고 그러더란 소리를 철주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누가 할 소릴, 하고 생각했지만 입 밖에 내어 말하진 않았다.
진동음은 오래 끌지 않고 금세 조용해졌다.
“도서 정가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
오 팀장의 질문이 이어지고 있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다는 앳된 지원자가 예상했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뜨거운 감자라고 생각합니다.”
“뜨거운 감자요?”
오 팀장이 되짚자 지원자가 방글방글 웃으며 대답했다.
“네. 한마디로 말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골치 아픈 문제다, 이거죠.”
“그런 뭉뚱그린 대답 말고 개인적인 견해를 물은 건데요?”
“그게 제 견핸데요?”
천진난만하게 되묻는 말투며 태도가 해맑기 그지없다. 역시 기주 스타일은 아닌데. 누굴까.
오 팀장이 석주를 돌아보았다. 맘에 안 차는지 그만하고 내보낼까요? 묻는 눈빛이었다. 석주는 질문을 살짝 바꾸었다.
“뜨거운 감자를 처리하는 방법이 있다면?”
“음…….”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지원자가 입을 열었다.
“버릴 수는 없으니까 식을 때까지 기다렸다 먹습니다.”
이번에도 방글거리는 웃음을 빼놓지 않았다. 하하, 오 팀장이 억지웃음을 지었다. 석주는 웃지 않았다. 어이없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도서 정가제가 시행된 지 이제 만 1년. 짐작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뜨겁다 소리만 내지르기엔 이른 것이 아닌가. 조바심을 치며 지금 당장 뾰족한 대책을 찾아 발을 동동 구르기보다는 좀 더 긴 안목으로 기다려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해답은 언제나 저런 단순함 가운데 숨어 있는 게 아닌가. 그러한 생각들이 스쳐 간 것이다.
“대표님?”
오 팀장이 석주를 짧은 상념에서 끌어냈다. 석주는 기다리듯 자신을 바라보고 앉은 지원자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출근할 수 있어요?”
지원자가 입을 커다랗게 벌렸다. 진심이세요?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오 팀장을 향해 석주는 턱으로 한 번 끄덕였다.
이렇다 할 결격사유가 없는 한 어지간하면 들일 예정이었다. 기주의 부탁 때문이었다. 그런 부탁을 하는 녀석이 아니라 석주는 내심 놀랐다. 누구인가 물었지만 기주는 지인의 조카라고만 했다. 지인도 아니고 지인 조카의 취직을 청탁하다니. 믿기지 않았으나 캐묻지도 않았다. 캐물어 봐야 기주가 답을 내놓지도 않았을 터였다.
“저 된 거예요? 정말요?”
“그런 것 같네요.”
오 팀장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지원자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커다란 하트를 그려 보이며 발랄하게 외쳤다.
“애정합니다, 대표님!”
하하. 다시금 오 팀장이 헛웃음 소리를 냈다.
“애정하는 건 또 뭡니까. 편집자 지망생이 문법 파괴를 일삼기나 하고.”
작게 툴툴대는 오 팀장에게도 지원자의 하트 공세가 날아들었다.
“애정합니다, 팀장님!”
석주는 묵묵히 일어섰다. 난주에게 전화하려고 회의실을 나서는데 손안에 든 핸드폰이 드르르 떨렸다. 다시 난주. 이번엔 문자다. 복도 끝 햇빛 드는 창가로 걸어가 문자 내용을 확인했다.

<작은 책방 잠, 입니다. 핸드폰 주인이 핸드폰을 두고 가셨어요. 연락 주세요.>

작은 책방 잠?
일단 상황은 알겠다. 난주가 또 핸드폰을 아무 데나 흘렸다는 거. 하지만 잃어버린 곳에서 이렇게 연락이 오는 건 처음이다. 장소가 책방이라는 것도 뜻밖이고.
“대표님.”
돌아보니 오 팀장이 빙글빙글 웃고 있다.
“왜요?”
오 팀장이 회의실 쪽을 넘겨다보곤 다시 석주를 보며 놀리듯 물었다.
“맘에 드셨나 봐요?”
어떤 맥락인지 알아챈 석주는 피식 웃었다. 기주와의 관계도 잘 모르거니와 스물셋이면 열 살이나 아래다. 막내인 난주와 동갑. 게다가 ‘나 여자예요, 그러니까 예쁘게 봐 주세요’를 은연중에 어필하려는 여자들은 눈에 안 담겼다. 과하게 상냥하거나 애교가 넘치면 거슬리고 불편했다.
“웃으시네? 정말 그런 거예요?”
“기주가 보낸 학생입니다.”
“기주 씨가요?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요. 대표님 타입은 전혀 아닌데 싶어서. 대표님 끼 부리는 여자 싫어하시잖아요. 가만, 기주 씨 타입도 아닌 것 같은데? 기주 씬 다크다크 취향이니까.”
다크다크? 다크(Dark)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영 틀린 소린 아니라 웃음이 나려 했다.
“유능하신 편집장님께서 다크다크가 뭡니까? 아름다운 우리말을 두고.”
오 팀장이 겸연쩍게 웃었다.
“맹하진 않은 것 같으니 데리고 잘 가르쳐 보세요.”
“넵!”
신입과 관련한 소소한 일들을 오 팀장에게 맡기고 석주는 출판사를 나왔다. 어깨에 내리는 볕이 따뜻했다. 차에 올라 집으로 전화부터 했다. 아주머니가 받았다.
“접니다, 이모님.”
—석주구나. 잘 지내지?
“네. 아버지는요?”
—잘 계셔. 아침도 든든히 드셨고. 친구분들 만나신다고 지금 나갈 준비하셔. 점심 약속. 바꿀까?
“아뇨, 두세요. 난주는요?”
—난주? 난주 지금 없는데.
“나갔어요?”
—어제 낮에 나가서 아직 안 들어왔어.
넓디넓은 집에서 굳이 소곤대듯 말하는 걸로 봐서 아버지는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저한테 전화하지 그러셨어요.”
—한두 번이야, 어디. 친구네서 잔다더라. 너무 걱정하지 마.
“철주는 자요?”
—자. 어제도 새벽 다 돼서 들어왔거든. 자라고 뒀어. 억지로 깨워 봐야 밥도 안 먹어. 잠이 보약이지, 뭐.
변함없는 철주 편애 모드. 난주가 다섯 살 때 입주 도우미로 들어온 아주머니는 처음부터 철주를 유난히 예뻐했다. 친화력 좋은 철주 성격도 한몫했을 것이다. 이모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도 어린 철주였다.
—요즘 얼굴이 까칠한 게 안쓰러워서 못 보겠어. 푹 재우고, 이따 일어나면 잘 챙겨 먹여야…….
철주 얘기가 주렁주렁 더 길어질까 봐 석주는 중간에 끊고 들어갔다.
“저녁에 갈게요.”
—기주는? 같이 안 와?
“전화해 볼게요.”
—뭐 해 놓을까? 뭐 먹고 싶은 거 있음 얘기해.
“네. 난주 들어오면 저한테 전화하라고 하…… 아니, 이모님이 전화 주세요.”
—알았어. 근데 주말인데 일찍 들어오려나 몰라.
아마도 아주머니 예상이 적중할 것이다. 석주는 기주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받자마자 기주가 대뜸 한마디를 했다.
—고마워.
신입에게서 그새 연락이 간 건가. 그렇다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가까운 사이라는 의미인데. 궁금증이 일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고맙긴. 서류 심사도 거쳤고 정식 면접까지 치렀는데.”
—그래도.
“저녁에 집에 갈 건데. 올 거지?”
—일이 좀 있어서.
기주에게 워커홀릭 증세가 약간 있긴 하지만 오늘 집에 못 오는 이유가 ‘일’은 아니라는 직감이 왔다.
“알았어. 아버지께 전화는 드려.”
—음.
통화를 마치고 시동을 켜는데 막 현관을 나선 신입이 석주의 차로 조르르 뛰어왔다. 꼭 해야 할 말이라도 있는 표정으로 지켜 선 신입을 보고 석주는 차창을 반쯤 내렸다.
“대표님, 대표님이 기주 아저씨 형님이시라던데 정말이에요?”
“기주, 아저씨?”
절로 되새겨졌다. 서른한 살인 기주에게 아저씨라는 호칭을 붙일 정도로 어린애는 아니지 않나 싶어서였다.
“아니에요? 좀 전에 기주 아저씨가 그랬는데요.”
“맞아요.”
“그렇구나. 정말이구나.”
그렇잖아도 웃음이 남실대던 신입 얼굴이 더욱 환해졌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구령 붙이듯 외친 신입이 꾸벅 90도로 몸을 숙여 인사를 했다.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 석주는 턱만 희미하게 까딱이고 차창을 올렸다.
뭐라고 해야 좋을까. 좀 낯설다고 해야 할까. 정말 기주와 특별한 사이라면 형이라는 걸 알고서 어렵거나 불편하게 여겨야 자연스럽지 않을까. 그렇다면, 정말 저 신입을 조카로 둔 지인이 존재하고 그 지인이란 사람이 기주에게 특별한 건가.
뒤돌아선 신입이 총총 뛰어 다시 출판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