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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무무
달무무 (1화)
1. 첫 만남
눈보라가 몰아친다. 바람은 비명을 지를 때마다 눈 폭풍이 모든 생명을 휘갈기며 우롱한다. 겨울의 일방적인 폭력에 대지는 꼼짝없이 얼어붙는다. 태양은 시커먼 먹구름에 잡혀 버려, 얼마 되지 않는 빛의 시간마저 빼앗겼다. 끔찍한 겨울날이다.
그러나 이 잔인한 눈보라 속에서 한 남자만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유유히 걷고 있었다.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양 편안한 걸음걸이였다. 그를 본 바람이 손을 내리쳤다. 후드가 벗겨지고 매끄러운 흑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남자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벗겨진 후드를 보고 다시 하늘을 보았다. 입꼬리가 꿈틀거린다. 차가운 미소였다.
“감히.”
속삭이듯이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그러자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무섭도록 사납게 부르짖던 바람이 뚝 끊어졌다. 말 한마디에 고요를 거머쥐었음에도 남자는 여전히 기분이 나빠 보였다. 은회색 눈동자가 사냥감을 찾은 맹수처럼 번득였다.
인간들에겐 보이지 않는 두 형상이 나타났다. 무릎을 꿇고 덜덜 떨고 있는 그들은 바람과 눈의 정령이었다. 두 정령을 제외한 다른 정령들은 나무나 바위 뒤에 숨어서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삽시간에 공포가 주위를 뒤덮는다. 만물을 긴장시킨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물었다.
“소멸시켜 줄까?”
-자, 자, 잘못…….
남자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다. 동시에 먼저 말을 꺼냈던 정령은 뒤로 튕겨나갔다. 늑대 형상을 한 바람의 정령이 바위에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바로 뒤에 숨어 있던 다른 정령들이 놀라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내 ‘웁!’ 하고 황급히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무릎을 꿇고 있던 눈의 정령은 차마 뒤조차 돌아보지 못한 채 몸만 떨었다.
“잠깐…….”
남자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성큼성큼 바위 쪽으로 걸어갔다. 늑대는 엄습한 공포에 몸조차 일으키지 못했다. 남자는 늑대를 보며 ‘아, 제기랄.’ 하고 욕을 했다.
“또 생각났네.”
불쾌한 기분이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다. 남자는 신음하는 제 몸만 한 정령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늑대가 입을 벌리며 고통스러워했으나 남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지금 그는 분노 속에서 과거를 되짚어 가는 중이었다.
†
태초에 무無에서 하늘과 땅이 서로를 마주 보며 탄생하였다. 그들은 맞대고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존재였다.
땅과 하늘이 생기면서 반대 성향의 신들이 잇따라 태어났다. 이성의 신이 태어나자 감성의 신이 크게 웃으며 그를 반겨 주었다. 사랑의 여신이 꽃잎에 둘러싸여 세상에 나왔을 때, 증오의 여신이 직접 그녀의 머리를 빗겨 주고 옷을 입혀 주었다.
빛의 신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선 어둠의 신이 나타났다. 태양이 잠들고, 밤이 구석에 숨어 있던 어둠을 끌고 나왔을 때였다. 검은 머리에 은회색 눈을 한 어둠의 신이 양수같이 따뜻하고 아늑하던 어둠을 스스로 찢고 나왔다.
그는 어둠을 매만지다 검은 자락 위에 유일하게 빛나던 달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우연찮게도 신의 눈동자 색깔과 똑같았다. 어둠의 신은 은은한 은회색 빛을 보다 하늘에게 저것의 이름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하늘의 신은 저것은 ‘달’이라는 별이라고 말해 주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어둠의 신은 작게 읊조렸다. 달, 달……. 그리하여 어둠의 신은 제 이름을 달이라고 지었다. 다른 신들이 고민하여 이름을 붙여 줄 필요도 없었다.
달은 제가 어둠을 찢고 나올 때 생긴 찌꺼기들을 데리고 신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훗날 마귀들이라고 불리는 마족의 주인, 달의 탄생이었다.
정반대의 상징을 가진 신들은 서로를 친밀하게 여겼다. 본질이 같으나 결정적인 단 하나에서 달라 서로의 대척점에 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제 짝이 되는 신을 형제처럼, 자매처럼, 혹은 연인처럼 사랑한다.
어둠의 신과 빛의 신도 마찬가지였다. 달은 거칠고 사나워 마음에 안 들면 모든 걸 어둠으로 물들여 버리고 부숴 버렸다. ‘어둠의 신이 아니라 전투의 신이어야 했던 것 아니냐’고 신들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을 정도였다. 빛의 신도 보통 성미가 아니라, 그들 역시 빛과 어둠이라는 대립을 제외하곤 다를 바 없었다.
유일하게 타 신들과 다른 점은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너, 카미엘.]
빛의 신 카미엘은 찬란한 금발을 한 미남이었다. 이 잘생긴 신은 달을 볼 때마다 얼굴을 일그러뜨렸는데, 그때마다 치솟는 눈매를 보며 달은 희열을 느꼈다. 저 재수 없는 놈을 제대로 물 먹였다는 것이 얼마나 재밌는지.
하지만 지금은 즐거워할 기분이 아니었다. 달은 짜증 난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카미엘을 향해 이를 갈았다.
[감히 내 용을 죽여?]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에 분기가 실린다. 각자 노닐고 있던 신들은 겁에 질린 얼굴을 했다. 그들 중에는 ‘어휴, 또 싸운다.’ 하며 한숨 쉬고 빠져나가는 신들도 있었다.
빛의 신, 카미엘이 팔짱을 낀 채 달을 노려보았다. 사파이어처럼 새파란 눈동자에 경멸 어린 빛이 번득였다.
[감히 도마뱀 주제에 내 신자들을 죽였으니까. 그놈 때문에 아무도 내 신전에 오지를 못했어.]
[화풀이 삼아 터뜨린 게 아니라?]
두 신은 서로를 향해 얼굴을 굳혔다. 달은 털이 달린 새까만 망토를 벗어 던졌다. 그의 그림자가 솟아올라 망토를 받았다. 싸울 때 그는 늘 망토를 벗곤 했다.
카미엘은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떴다. 흰 손등에 푸르스름한 핏줄이 불거진다. 그는 구름 속에 숨겨 두었던 빛을 꺼내 들었다. 손에 잡힌 빛은 칼 모양으로 변했다. 달이 삐뚤게 웃었다.
[해 보자는 거냐?]
빛의 신이 자리에 일어나며 말했다.
[덤벼.]
바라던 바라는 듯, 달이 날선 목소리로 뇌까렸다.
[뜻대로 해 주마.]
잠시 후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두 신이 하늘에서 싸우는 걸 모르는 지상의 인간들은 ‘비는 안 오는데 왜 자꾸 번개가 친담.’ 하고 의아해했다.
†
회상을 끝낸 달은 분노로 이를 갈았다. 만약 가장 높은 신인 하늘의 신이 와서 말리지 않았으면 둘 중 한 명은 소멸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라 볼 수 있는 하늘의 신은 지금 이렇게 싸울 때가 아니라며 빛의 신을 데리고 어디론가 가 버렸다.
무슨 문제가 있는 모양이었지만 달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화가 났고, 화를 풀 대상이 사라졌단 사실에 더욱 분통이 터질 뿐이었다. 달은 내내 치켜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크…… 컥…….]
정령이 땅으로 떨어져서 신음을 뱉었다. 달은 차게 식은 눈으로 노려보았다. 날 선 눈매의 늑대를 보고 있으니 빛의 신 카미엘이 떠올랐다.
달은 꼭 더러운 걸 만졌다는 듯이 옷에 손을 문지르며 등을 돌렸다. 흰 눈 위로 발자국이 새겨진다. 바람조차 없는 고요한 설산에서 달은 어디론가 걸어간다.
†
‘감히 내 용을 죽였다는 거지. 다른 신의 소유물을 멋대로 없애는 것만큼 거만한 짓거리가 어디 있는가.’
결투를 채 끝내지 못했던 달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빛의 신은 제 것을 죽였다. 아무리 상대가 싫어한다 할지라도 서로 선이라는 건 지키던 사이였다. 신의 소유물을 건드리는 건 그 신의 권위를 능욕하는 행동임을 카미엘이 모를 리 없었다.
달은 분노와 함께 의구심을 느꼈다. 재수 없지만 선만은 지켜 오던 카미엘이 어째서 내 용을 죽인 걸까. 한참을 생각하던 중에 빛의 신과 나누었던 대화가 불현듯이 생각났다.
[그놈 때문에 아무도 내 신전을 오질 못했어.]
그거다. 제 신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남의 용을 없애 버린 것이다. 달은 납득과 동시에 더 큰 증오를 느끼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카미엘의 신전은 여러 군데 세워져 있으니, 하나 정도 문을 닫는다고 해서 문제 될 게 전혀 없다. 그런데도 카미엘은 그까짓 신전 하나 때문에 달이 몇백 년간 귀중하게 키워 온 용을 죽인 것이다.
달은 이것이 자신에게 내민 선전포고라 여겼다. 그리고 그는 이 전쟁 선포를 기꺼이 받아 주기로 했다.
‘부숴 주지. 원래 신전이었다고 생각도 못 할 만큼 가루로 만들어 주겠어.’
달은 자신이 떠올린 잔인한 계획이 마음에 들었다.
‘신관은 특별히 네놈 제단에서 사지를 찢어 죽여 주마.’
이것이 달이 지금 인간 세계에 내려온 이유였다. 어느새 짧은 흑발의 소년으로 화한 그는 맞은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엔 신전이 덩그러니 있었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세워진 신전은 다른 신전들에 비해 규모가 작았다. 게다가 카미엘의 몇 개나 되는 신전들 중에 이 신전은 드물게도 높은 산에 위치했다. 이 초라한 모습에 달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저따위 허름한 신전 하나 때문에…….”
다시 흘러나오는 위압감에 정령들이 도망을 쳤다. 달은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눈을 번득이며 노려보았다. 어디서부터 부숴야 하나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달은 문득 한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언젠가 한 여신과 남신이 크게 다투었던 일이었다. 갑자기 그게 왜 생각난 걸까. 달은 의아해하면서도 흐릿한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희미했던 기억의 조각들이 점점 맞추어진다. 전부터 여색을 밝히던 남신이 미인이 없나 기웃거리던 찰나에 여신의 신관을 보게 된 것이다. 그는 첫눈에 반했고 신관을 유혹하여 그녀와 동침했다.
문제는 장소가 다름 아닌 여신의 신전이었다는 것이다. 남의 신관을 유혹하다 못해 신전을 동침 장소로 선택한 것에 여신은 불같이 화를 내었다. 어찌나 큰 싸움이었는지 다른 신들에게 관심 없는 달조차 구경할 정도였다.
‘그거다.’
소년의 얼굴에 만족의 웃음이 깃들었다. 달은 거리낌 없이 신전으로 걸으며 생각했다.
‘제단에 놓고 놈의 신관을 범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죽여서 피바다로 만드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다른 신들이 들으면 완전히 미쳤다고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제가 아꼈던 어린 용의 목이 떨어진 시점에서 달은 정말로 미쳐 버렸다. 그는 굳게 닫힌 문을 보며 고민했다. 칼로 부숴 버릴까? 녹여 버릴까? 아니면…….
그때, 귓가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든 정령들이 도망친 시점에서 소리를 낼 수 있는 건 신인 달만이 가능하다. 혹시 아직 도망치지 않은 정령이 있었던 것일까. 어떤 겁 없는 놈인가 생각하며 달은 고개를 돌렸다.
“여행자님?”
조용한 목소리였다. 달은 눈을 크게 떴다. 계단 옆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삽을 든 채 놀란 얼굴로 보고 있었다. 스무 살을 갓 넘었을 것 같은 남자의 머리는 눈처럼 희었다. 단정하게 자른 짧은 머리 밑으로 흰 목선이 그린 듯이 연결되어 있었다.
달은 그걸 보다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끝이 밑으로 처진 눈매를 한 남자의 눈은 옅은 하늘색이었다.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선이 얇고 섬세해 계속 눈이 가는 외모였다.
남자가 다가왔다. 그러더니 달을 빤히 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 달맞이꽃이 제가 그리던 존재가 하늘 높이 치솟았을 때 향기를 뿜으며 꽃망울을 터뜨리는 것 같았다. 그 바람에 달은 그만 체면을 잊고 멍하니 보고 말았다. 남자는 자신을 범하고 죽이러 온 신을 향해 반가움과 행복을 담아 활짝 웃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빛의 신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 햇살 같은 웃음에 달은 신관을 잡아 바로 제단에 눕혀야겠다는 계획을 우선 미뤘다. 삽을 든 채 방글방글 웃고 있는 신관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저게 카미엘, 그 새끼 신관이라고?’
새하얀 머리에 환한 웃음이 빛처럼 반짝인다. 카미엘은 성질머리가 아주 고약한 놈인데, 그런 놈을 모시는 이것은 딱 보면 ‘나는 착한 사람’이라고 쓰여 있었다. 달이 신관을 관찰하고 있을 때, 그 신관이 ‘아참’ 하며 급히 문을 열었다.
“어서 들어오세요.”
신전을 부수러 온 신한테 어서 들어오시란다. 달이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내쳤지만 신관은 삽을 내려놓고 커다란 문을 여느라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래, 어디 한번 구경이나 해 보자.’
얼마나 잘난 신전이기에 다른 신의 용을 죽였을까. 달은 열린 문 사이로 들어갔다. 뚜벅뚜벅. 검은 부츠가 대리석 바닥을 밟으며 눈 자국을 남겼다. 달은 일부러 발에 힘을 더 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은 신전이지만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다. 제단 앞에는 불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온기를 피우고 있었다. 빛의 신답게 벽과 바닥이 전부 새하얗고 눈부시게 빛난다. 달의 입장에서는 영 거북한 색깔이었다. 보기만 해도 정신 나갈 것 같네. 이 광적인 백색에 달은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그때 제단을 보고 있던 달의 옆에 불쑥 흰 손이 내밀어졌다. 두 손에는 나무잔이 들려 있었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잔을 든 채 신관이 밝게 말했다.
“마침 차를 끓여 둬서 다행입니다. 어서 드세요.”
“......?”
“속을 덥히는 데 좋을 겁니다.”
달은 얼떨결에 차를 받아 들였다. 손을 내밀자 신관은 세심하게 ‘조심하세요. 뜨거워요.’라고 배려했다. 어지간히 멍청한 녀석이군.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베푸는 친절이라니. 달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지만 그걸 듣지 못한 신관은 제 어깨에 두른 천을 벗었다.
“이것도 두르세요.”
달이 표정 없이 바라보자 신관이 ‘아.’ 하고 눈을 크게 떴다.
“손이 없으시구나. 제가 해 드릴게요.”
“됐…….”
됐다고 말하려던 달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 양옆으로 두 손이 내밀어졌다. 옅은 그림자가 달의 얼굴을 가린다. 잠시 후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담요가 어깨에 내려앉았다. 두툼한 담요가 묵직하게 어깨를 누른다. 신관은 담요가 흘러내리진 않을까 어깨를 요리조리 살피며 말했다.
“어떻게 이곳까지 오신 겁니까? 나이도 어리신 듯한데.”
‘나이?’
달은 탄생한 이후로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인간으로 화할 때 원래 외모보다 좀 더 어리게 보이도록 변했다. 신일 때는 가장 아름다운 청년 나이대로 다니지만 유희 중에는 색다른 기분을 느끼기 위해 평소와 다른 모습을 고르기 때문이다. 오늘은 여러 모습 중 십대 후반의 소년으로 택한 것인데, 이 멍청한 신관은 얼굴만 보고 어린 여행자로 본 게 틀림없다. 이제 달은 그가 우습기까지 했다.
‘희극이 따로 없군.’
달은 이 연극을 좀 더 즐기기로 했다. 신의 아량으로 제 목숨이 연장된 걸 알 리 없는 신관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긴, 어린 나이에도 능력이 아주 뛰어난 분들이 많으시죠. 그래도 요 근래 이곳까지 온 분은 여행자님이 처음이십니다.”
달은 무표정으로 보다 입을 열었다.
“왜?”
“보시다시피 이곳은 겨울이 되면 눈보라가 아주 심하거든요.”
신관의 하늘색 눈동자에 처음으로 음울한 빛이 돌았다.
“또 얼마 전에는 옆 산에 있던 용이 잠에서 깨어나고 말았습니다. 끔찍한 일이었죠. 다른 분들께선 이곳에 있다간 먹이가 될 거라며 다 도망치고 마셨죠. 신관분들께서도 도망칠 정도이니 누구도 감히 오질 못하시더군요.”
그렇게 말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작게 중얼거린다.
“요즘은 퍽 조용하지만……. 다시 잠에 든 걸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래, 자고 있지. 영원히.’
네 잘난 신이 내 용을 죽였거든. 달은 금발 머리 신을 떠올리곤 잊고 있던 살의를 다시 느꼈다. 들고 있던 찻잔의 차를 얼굴에 부어 버리고픈 잔인한 충동이 들었다. 마침 신관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혼자 생각에 잠겨 있다. 그의 흰 머리통 위로 차를 높이 들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갔다.
달이 손목을 살짝 꺾어 차를 부어 버리려던 찰나였다. 신관이 고개를 들고 활짝 웃었다. 눈살이 접히며 길고 흰 속눈썹이 옆은 하늘색 눈을 덮는다. 두 뺨에는 옅은 홍조가 맴돈다. 기쁘기 그지없다는 얼굴에 달의 손이 멈춘다.
“여행자님께서는 제가 얼마나 기쁜지 모르실 겁니다.”
목소리가 살짝 떨린다.
“한 달 만에 처음 뵙는 사람이거든요.”
그 말에 달이 눈을 가늘게 떴다. 신관은 미소 지으며 뺨을 긁적거렸다. 머쓱해하면서도 감정을 숨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흠.’
달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이렇게 보니 꽤 볼만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인 신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오히려 수수한 점이 눈길을 끈다. 화려한 외모는 아니지만 부드러운 인상이다. 거기다 새하얀 머리색과 피부는 마치 눈 같아 한번 건드려 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
‘여자가 아닌 게 유감이지만.’
남자라고 크게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이따금씩 미동들과도 잠자리를 나누었던 달은 곧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 정도면 범해 줄 만하니까.’
달이 꼼꼼하게 얼굴을 보고 있을 때였다. 신관이 갑자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왜 찻잔을 들고 계세요?”
네 얼굴에 부어 주려고. 그러나 달은 그만두기로 했다. 혹시나 저 고운 얼굴에 흉이라도 지면 아까울 것 같았다. 일단은 좀 더 지켜보자 싶어 말없이 차를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신관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그렇지’ 하고 말한다.
“이럴 때가 아니었는데. 이리로 오세요.”
“……?”
“불가에 가서 몸이라도 녹여요. 시장하시죠? 음식을 내올게요.”
신관은 겁도 없이 달의 손목을 잡았다. 후드를 벗겼다고 산의 모든 정령을 내쫓았던 달이다. 그러나 갑자기 이런 당돌한 짓을 하니 달은 오히려 기가 막혀 아무 짓도 못 했다. 결국 두 사람은 끌고 끌려가며 화롯가에 왔다. 달을 의자에 앉힌 다음 신관은 부지런하게 어디론가 걸어갔다. 아치형 창문 안으로 쏟아지는 달빛을 받으며 후드를 휘날리던 신관은 작은 문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신관은 두 손에 음식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가만히 구경하던 달은 다리를 꼬았다.
“그럼 한 달 동안 여기서 혼자 살았다는 거야?”
달그락, 달그락. 그릇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신관이 대답했다.
“네. 그래도 이따금씩 토끼나 노루가 찾아오곤 해서 외롭진 않았어요. 물론 밤에 산짐승 소리가 들릴 때는 영락없이 죽겠구나 싶었지만.”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피식 웃는다.
“그런데 아니었나 봐요.”
“뭐?”
신관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미소 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외로웠나 봅니다.”
연하늘색 눈이 다시 속눈썹에 가려진다.
“여행자님을 보고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걸 보니까요.”
또다. 달은 흰 얼굴에 다시 홍조가 도는 걸 보았다. 그럴 때마다 달은 묘하게 찌릿한 자신을 발견했다. 심장 근처가 찌릿찌릿한 게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달은 알 수 없는 느낌에 의아해하며 말을 했다.
“심장이 뛰어?”
“네.”
“왜?”
신관이 나직하게 웃는다. 그는 그릇에 뜨거운 수프를 뜨던 중이었다.
“좋아서요.”
찌릿. 달은 제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왜 이래? 그사이 신관이 수프와 숟가락을 건네며 말했다.
“이것밖에 없어서 죄송합니다. 겨우내 버텨야 하다 보니 식량이 부족하거든요.”
달은 손을 내밀었다. 그때 그의 손가락에 신관의 손등이 닿았다. 차가운 달의 손과 달리 신관의 손은 따뜻했다. 따스하고 보드라운 감촉에 달은 순간 손을 움츠리고 말았다. 신관도 눈을 크게 떴다.
“이런. 손이 얼음장입니다. 어서 모닥불에 손을 쬐세요.”
“됐어.”
달이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으니까.”
어둠의 신은 태생적으로 몸이 차다. 그걸 알지 못하는 신관은 눈을 찡그렸다.
“이 높은 산맥까지 오시느라 그런 겁니다. 자칫 동상에 걸릴 수 있어요.”
“…….”
달은 무시하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이었었으나, 신관도 그의 제스처를 무시했다. 가까운 탁자에 수프를 올려 두더니 신관은 다시 성큼성큼 달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말없이 제단을 노려보고 있던 달의 손을 콱 잡았다. 뜨거운 감촉이 손 전체를 감싸자 달의 은회색 눈동자가 일순간 흔들렸다. 신관은 눈썹을 찡그리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였다.
“이것 보십시오. 손이 차지 않습니까.”
“…….”
“손을 펴세요, 여행자님.”
“…….”
“여행자님.”
달은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손을 펼 때까지 계속 불러 댈 기세였다. 이 부드럽게 생긴 인간은 은근히 고집이 센 듯했다.
“쳇.”
달은 손을 폈다. 곧 죽을 놈에게 베푸는 아량이라고 생각했다.
“하하.”
신관은 환하게 웃었다. 또 저렇게 웃는다. 뭐가 저리 웃을 일이 많을까? 달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신관을 보았지만 상대는 내리꽂는 시선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그저 쭉 편 여행자의 손을 불가로 가져가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타닥타닥.
뜨거운 열기가 손바닥을 데우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달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불을 노려보았다. 조그마한 새 형상을 한 불의 정령들이 울상인 얼굴로 손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녀들은 이미 남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신전 바깥에 들렸던 비명 소리를 다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조심스럽게 열기를 건네자 달은 입을 열었다.
‘꺼져.’
정령들은 기겁하며 몸을 부풀리더니 모습을 감춰 버렸다. 달이 인상을 찡그리며 입모양으로 욕설을 읊조렸다. 손에서 멀어지라는 뜻이었는데 정령들은 아예 장작 밑으로 기어들어 가 버렸다. 훅 꺼져 버린 불을 보며 신관이 ‘어어?’ 하고 당황했다.
“왜 갑자기 꺼졌지? 다시 불을…….”
“됐어.”
신관이 다시 입을 여는 걸 보고 달이 인상을 구기며 말을 덧붙였다.
“손이나 떼.”
그러나 신관은 손을 놓지 않았다. 여리고 순하게 생겨서는 예상외로 계속되는 고집에 달은 불쾌함을 느꼈다. 제 신과 워낙 다른 인상인 게 놀라워 가만두었더니 은근슬쩍 기어오른다. 신관이 한 거라곤 여행자에게 먹을 걸 나누어 주고 불을 데워 준 호의가 다였으나, 달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잡히지 않은 손에 힘을 넣었다. 우선 이놈의 건방진 손모가지부터 잘라 주지. 머릿속으로 팔다리가 부러진 신관을 생각할 때였다.
갑자기 하얀 두 손이 달의 손을 소중하게 감싸 안았다. 달은 눈을 크게 뜬 채 제 손에 온기를 나누어 주려 노력하는 상대를 보았다. 힘주었던 손이 당황해서 그만 아래로 떨어졌다.
“불쾌하시겠지만 정말로 손이 찹니다.”
“…….”
“잠시만 참아 주세요.”
신관이 덧붙였다.
“정말로 걱정되어서 그럽니다.”
달무무 (1화)
1. 첫 만남
눈보라가 몰아친다. 바람은 비명을 지를 때마다 눈 폭풍이 모든 생명을 휘갈기며 우롱한다. 겨울의 일방적인 폭력에 대지는 꼼짝없이 얼어붙는다. 태양은 시커먼 먹구름에 잡혀 버려, 얼마 되지 않는 빛의 시간마저 빼앗겼다. 끔찍한 겨울날이다.
그러나 이 잔인한 눈보라 속에서 한 남자만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유유히 걷고 있었다.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양 편안한 걸음걸이였다. 그를 본 바람이 손을 내리쳤다. 후드가 벗겨지고 매끄러운 흑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남자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벗겨진 후드를 보고 다시 하늘을 보았다. 입꼬리가 꿈틀거린다. 차가운 미소였다.
“감히.”
속삭이듯이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그러자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무섭도록 사납게 부르짖던 바람이 뚝 끊어졌다. 말 한마디에 고요를 거머쥐었음에도 남자는 여전히 기분이 나빠 보였다. 은회색 눈동자가 사냥감을 찾은 맹수처럼 번득였다.
인간들에겐 보이지 않는 두 형상이 나타났다. 무릎을 꿇고 덜덜 떨고 있는 그들은 바람과 눈의 정령이었다. 두 정령을 제외한 다른 정령들은 나무나 바위 뒤에 숨어서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삽시간에 공포가 주위를 뒤덮는다. 만물을 긴장시킨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물었다.
“소멸시켜 줄까?”
-자, 자, 잘못…….
남자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다. 동시에 먼저 말을 꺼냈던 정령은 뒤로 튕겨나갔다. 늑대 형상을 한 바람의 정령이 바위에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바로 뒤에 숨어 있던 다른 정령들이 놀라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내 ‘웁!’ 하고 황급히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무릎을 꿇고 있던 눈의 정령은 차마 뒤조차 돌아보지 못한 채 몸만 떨었다.
“잠깐…….”
남자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성큼성큼 바위 쪽으로 걸어갔다. 늑대는 엄습한 공포에 몸조차 일으키지 못했다. 남자는 늑대를 보며 ‘아, 제기랄.’ 하고 욕을 했다.
“또 생각났네.”
불쾌한 기분이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다. 남자는 신음하는 제 몸만 한 정령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늑대가 입을 벌리며 고통스러워했으나 남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지금 그는 분노 속에서 과거를 되짚어 가는 중이었다.
†
태초에 무無에서 하늘과 땅이 서로를 마주 보며 탄생하였다. 그들은 맞대고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존재였다.
땅과 하늘이 생기면서 반대 성향의 신들이 잇따라 태어났다. 이성의 신이 태어나자 감성의 신이 크게 웃으며 그를 반겨 주었다. 사랑의 여신이 꽃잎에 둘러싸여 세상에 나왔을 때, 증오의 여신이 직접 그녀의 머리를 빗겨 주고 옷을 입혀 주었다.
빛의 신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선 어둠의 신이 나타났다. 태양이 잠들고, 밤이 구석에 숨어 있던 어둠을 끌고 나왔을 때였다. 검은 머리에 은회색 눈을 한 어둠의 신이 양수같이 따뜻하고 아늑하던 어둠을 스스로 찢고 나왔다.
그는 어둠을 매만지다 검은 자락 위에 유일하게 빛나던 달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우연찮게도 신의 눈동자 색깔과 똑같았다. 어둠의 신은 은은한 은회색 빛을 보다 하늘에게 저것의 이름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하늘의 신은 저것은 ‘달’이라는 별이라고 말해 주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어둠의 신은 작게 읊조렸다. 달, 달……. 그리하여 어둠의 신은 제 이름을 달이라고 지었다. 다른 신들이 고민하여 이름을 붙여 줄 필요도 없었다.
달은 제가 어둠을 찢고 나올 때 생긴 찌꺼기들을 데리고 신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훗날 마귀들이라고 불리는 마족의 주인, 달의 탄생이었다.
정반대의 상징을 가진 신들은 서로를 친밀하게 여겼다. 본질이 같으나 결정적인 단 하나에서 달라 서로의 대척점에 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제 짝이 되는 신을 형제처럼, 자매처럼, 혹은 연인처럼 사랑한다.
어둠의 신과 빛의 신도 마찬가지였다. 달은 거칠고 사나워 마음에 안 들면 모든 걸 어둠으로 물들여 버리고 부숴 버렸다. ‘어둠의 신이 아니라 전투의 신이어야 했던 것 아니냐’고 신들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을 정도였다. 빛의 신도 보통 성미가 아니라, 그들 역시 빛과 어둠이라는 대립을 제외하곤 다를 바 없었다.
유일하게 타 신들과 다른 점은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너, 카미엘.]
빛의 신 카미엘은 찬란한 금발을 한 미남이었다. 이 잘생긴 신은 달을 볼 때마다 얼굴을 일그러뜨렸는데, 그때마다 치솟는 눈매를 보며 달은 희열을 느꼈다. 저 재수 없는 놈을 제대로 물 먹였다는 것이 얼마나 재밌는지.
하지만 지금은 즐거워할 기분이 아니었다. 달은 짜증 난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카미엘을 향해 이를 갈았다.
[감히 내 용을 죽여?]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에 분기가 실린다. 각자 노닐고 있던 신들은 겁에 질린 얼굴을 했다. 그들 중에는 ‘어휴, 또 싸운다.’ 하며 한숨 쉬고 빠져나가는 신들도 있었다.
빛의 신, 카미엘이 팔짱을 낀 채 달을 노려보았다. 사파이어처럼 새파란 눈동자에 경멸 어린 빛이 번득였다.
[감히 도마뱀 주제에 내 신자들을 죽였으니까. 그놈 때문에 아무도 내 신전에 오지를 못했어.]
[화풀이 삼아 터뜨린 게 아니라?]
두 신은 서로를 향해 얼굴을 굳혔다. 달은 털이 달린 새까만 망토를 벗어 던졌다. 그의 그림자가 솟아올라 망토를 받았다. 싸울 때 그는 늘 망토를 벗곤 했다.
카미엘은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떴다. 흰 손등에 푸르스름한 핏줄이 불거진다. 그는 구름 속에 숨겨 두었던 빛을 꺼내 들었다. 손에 잡힌 빛은 칼 모양으로 변했다. 달이 삐뚤게 웃었다.
[해 보자는 거냐?]
빛의 신이 자리에 일어나며 말했다.
[덤벼.]
바라던 바라는 듯, 달이 날선 목소리로 뇌까렸다.
[뜻대로 해 주마.]
잠시 후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두 신이 하늘에서 싸우는 걸 모르는 지상의 인간들은 ‘비는 안 오는데 왜 자꾸 번개가 친담.’ 하고 의아해했다.
†
회상을 끝낸 달은 분노로 이를 갈았다. 만약 가장 높은 신인 하늘의 신이 와서 말리지 않았으면 둘 중 한 명은 소멸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라 볼 수 있는 하늘의 신은 지금 이렇게 싸울 때가 아니라며 빛의 신을 데리고 어디론가 가 버렸다.
무슨 문제가 있는 모양이었지만 달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화가 났고, 화를 풀 대상이 사라졌단 사실에 더욱 분통이 터질 뿐이었다. 달은 내내 치켜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크…… 컥…….]
정령이 땅으로 떨어져서 신음을 뱉었다. 달은 차게 식은 눈으로 노려보았다. 날 선 눈매의 늑대를 보고 있으니 빛의 신 카미엘이 떠올랐다.
달은 꼭 더러운 걸 만졌다는 듯이 옷에 손을 문지르며 등을 돌렸다. 흰 눈 위로 발자국이 새겨진다. 바람조차 없는 고요한 설산에서 달은 어디론가 걸어간다.
†
‘감히 내 용을 죽였다는 거지. 다른 신의 소유물을 멋대로 없애는 것만큼 거만한 짓거리가 어디 있는가.’
결투를 채 끝내지 못했던 달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빛의 신은 제 것을 죽였다. 아무리 상대가 싫어한다 할지라도 서로 선이라는 건 지키던 사이였다. 신의 소유물을 건드리는 건 그 신의 권위를 능욕하는 행동임을 카미엘이 모를 리 없었다.
달은 분노와 함께 의구심을 느꼈다. 재수 없지만 선만은 지켜 오던 카미엘이 어째서 내 용을 죽인 걸까. 한참을 생각하던 중에 빛의 신과 나누었던 대화가 불현듯이 생각났다.
[그놈 때문에 아무도 내 신전을 오질 못했어.]
그거다. 제 신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남의 용을 없애 버린 것이다. 달은 납득과 동시에 더 큰 증오를 느끼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카미엘의 신전은 여러 군데 세워져 있으니, 하나 정도 문을 닫는다고 해서 문제 될 게 전혀 없다. 그런데도 카미엘은 그까짓 신전 하나 때문에 달이 몇백 년간 귀중하게 키워 온 용을 죽인 것이다.
달은 이것이 자신에게 내민 선전포고라 여겼다. 그리고 그는 이 전쟁 선포를 기꺼이 받아 주기로 했다.
‘부숴 주지. 원래 신전이었다고 생각도 못 할 만큼 가루로 만들어 주겠어.’
달은 자신이 떠올린 잔인한 계획이 마음에 들었다.
‘신관은 특별히 네놈 제단에서 사지를 찢어 죽여 주마.’
이것이 달이 지금 인간 세계에 내려온 이유였다. 어느새 짧은 흑발의 소년으로 화한 그는 맞은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엔 신전이 덩그러니 있었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세워진 신전은 다른 신전들에 비해 규모가 작았다. 게다가 카미엘의 몇 개나 되는 신전들 중에 이 신전은 드물게도 높은 산에 위치했다. 이 초라한 모습에 달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저따위 허름한 신전 하나 때문에…….”
다시 흘러나오는 위압감에 정령들이 도망을 쳤다. 달은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눈을 번득이며 노려보았다. 어디서부터 부숴야 하나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달은 문득 한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언젠가 한 여신과 남신이 크게 다투었던 일이었다. 갑자기 그게 왜 생각난 걸까. 달은 의아해하면서도 흐릿한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희미했던 기억의 조각들이 점점 맞추어진다. 전부터 여색을 밝히던 남신이 미인이 없나 기웃거리던 찰나에 여신의 신관을 보게 된 것이다. 그는 첫눈에 반했고 신관을 유혹하여 그녀와 동침했다.
문제는 장소가 다름 아닌 여신의 신전이었다는 것이다. 남의 신관을 유혹하다 못해 신전을 동침 장소로 선택한 것에 여신은 불같이 화를 내었다. 어찌나 큰 싸움이었는지 다른 신들에게 관심 없는 달조차 구경할 정도였다.
‘그거다.’
소년의 얼굴에 만족의 웃음이 깃들었다. 달은 거리낌 없이 신전으로 걸으며 생각했다.
‘제단에 놓고 놈의 신관을 범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죽여서 피바다로 만드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다른 신들이 들으면 완전히 미쳤다고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제가 아꼈던 어린 용의 목이 떨어진 시점에서 달은 정말로 미쳐 버렸다. 그는 굳게 닫힌 문을 보며 고민했다. 칼로 부숴 버릴까? 녹여 버릴까? 아니면…….
그때, 귓가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든 정령들이 도망친 시점에서 소리를 낼 수 있는 건 신인 달만이 가능하다. 혹시 아직 도망치지 않은 정령이 있었던 것일까. 어떤 겁 없는 놈인가 생각하며 달은 고개를 돌렸다.
“여행자님?”
조용한 목소리였다. 달은 눈을 크게 떴다. 계단 옆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삽을 든 채 놀란 얼굴로 보고 있었다. 스무 살을 갓 넘었을 것 같은 남자의 머리는 눈처럼 희었다. 단정하게 자른 짧은 머리 밑으로 흰 목선이 그린 듯이 연결되어 있었다.
달은 그걸 보다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끝이 밑으로 처진 눈매를 한 남자의 눈은 옅은 하늘색이었다.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선이 얇고 섬세해 계속 눈이 가는 외모였다.
남자가 다가왔다. 그러더니 달을 빤히 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 달맞이꽃이 제가 그리던 존재가 하늘 높이 치솟았을 때 향기를 뿜으며 꽃망울을 터뜨리는 것 같았다. 그 바람에 달은 그만 체면을 잊고 멍하니 보고 말았다. 남자는 자신을 범하고 죽이러 온 신을 향해 반가움과 행복을 담아 활짝 웃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빛의 신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 햇살 같은 웃음에 달은 신관을 잡아 바로 제단에 눕혀야겠다는 계획을 우선 미뤘다. 삽을 든 채 방글방글 웃고 있는 신관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저게 카미엘, 그 새끼 신관이라고?’
새하얀 머리에 환한 웃음이 빛처럼 반짝인다. 카미엘은 성질머리가 아주 고약한 놈인데, 그런 놈을 모시는 이것은 딱 보면 ‘나는 착한 사람’이라고 쓰여 있었다. 달이 신관을 관찰하고 있을 때, 그 신관이 ‘아참’ 하며 급히 문을 열었다.
“어서 들어오세요.”
신전을 부수러 온 신한테 어서 들어오시란다. 달이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내쳤지만 신관은 삽을 내려놓고 커다란 문을 여느라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래, 어디 한번 구경이나 해 보자.’
얼마나 잘난 신전이기에 다른 신의 용을 죽였을까. 달은 열린 문 사이로 들어갔다. 뚜벅뚜벅. 검은 부츠가 대리석 바닥을 밟으며 눈 자국을 남겼다. 달은 일부러 발에 힘을 더 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은 신전이지만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다. 제단 앞에는 불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온기를 피우고 있었다. 빛의 신답게 벽과 바닥이 전부 새하얗고 눈부시게 빛난다. 달의 입장에서는 영 거북한 색깔이었다. 보기만 해도 정신 나갈 것 같네. 이 광적인 백색에 달은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그때 제단을 보고 있던 달의 옆에 불쑥 흰 손이 내밀어졌다. 두 손에는 나무잔이 들려 있었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잔을 든 채 신관이 밝게 말했다.
“마침 차를 끓여 둬서 다행입니다. 어서 드세요.”
“......?”
“속을 덥히는 데 좋을 겁니다.”
달은 얼떨결에 차를 받아 들였다. 손을 내밀자 신관은 세심하게 ‘조심하세요. 뜨거워요.’라고 배려했다. 어지간히 멍청한 녀석이군.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베푸는 친절이라니. 달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지만 그걸 듣지 못한 신관은 제 어깨에 두른 천을 벗었다.
“이것도 두르세요.”
달이 표정 없이 바라보자 신관이 ‘아.’ 하고 눈을 크게 떴다.
“손이 없으시구나. 제가 해 드릴게요.”
“됐…….”
됐다고 말하려던 달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 양옆으로 두 손이 내밀어졌다. 옅은 그림자가 달의 얼굴을 가린다. 잠시 후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담요가 어깨에 내려앉았다. 두툼한 담요가 묵직하게 어깨를 누른다. 신관은 담요가 흘러내리진 않을까 어깨를 요리조리 살피며 말했다.
“어떻게 이곳까지 오신 겁니까? 나이도 어리신 듯한데.”
‘나이?’
달은 탄생한 이후로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인간으로 화할 때 원래 외모보다 좀 더 어리게 보이도록 변했다. 신일 때는 가장 아름다운 청년 나이대로 다니지만 유희 중에는 색다른 기분을 느끼기 위해 평소와 다른 모습을 고르기 때문이다. 오늘은 여러 모습 중 십대 후반의 소년으로 택한 것인데, 이 멍청한 신관은 얼굴만 보고 어린 여행자로 본 게 틀림없다. 이제 달은 그가 우습기까지 했다.
‘희극이 따로 없군.’
달은 이 연극을 좀 더 즐기기로 했다. 신의 아량으로 제 목숨이 연장된 걸 알 리 없는 신관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긴, 어린 나이에도 능력이 아주 뛰어난 분들이 많으시죠. 그래도 요 근래 이곳까지 온 분은 여행자님이 처음이십니다.”
달은 무표정으로 보다 입을 열었다.
“왜?”
“보시다시피 이곳은 겨울이 되면 눈보라가 아주 심하거든요.”
신관의 하늘색 눈동자에 처음으로 음울한 빛이 돌았다.
“또 얼마 전에는 옆 산에 있던 용이 잠에서 깨어나고 말았습니다. 끔찍한 일이었죠. 다른 분들께선 이곳에 있다간 먹이가 될 거라며 다 도망치고 마셨죠. 신관분들께서도 도망칠 정도이니 누구도 감히 오질 못하시더군요.”
그렇게 말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작게 중얼거린다.
“요즘은 퍽 조용하지만……. 다시 잠에 든 걸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래, 자고 있지. 영원히.’
네 잘난 신이 내 용을 죽였거든. 달은 금발 머리 신을 떠올리곤 잊고 있던 살의를 다시 느꼈다. 들고 있던 찻잔의 차를 얼굴에 부어 버리고픈 잔인한 충동이 들었다. 마침 신관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혼자 생각에 잠겨 있다. 그의 흰 머리통 위로 차를 높이 들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갔다.
달이 손목을 살짝 꺾어 차를 부어 버리려던 찰나였다. 신관이 고개를 들고 활짝 웃었다. 눈살이 접히며 길고 흰 속눈썹이 옆은 하늘색 눈을 덮는다. 두 뺨에는 옅은 홍조가 맴돈다. 기쁘기 그지없다는 얼굴에 달의 손이 멈춘다.
“여행자님께서는 제가 얼마나 기쁜지 모르실 겁니다.”
목소리가 살짝 떨린다.
“한 달 만에 처음 뵙는 사람이거든요.”
그 말에 달이 눈을 가늘게 떴다. 신관은 미소 지으며 뺨을 긁적거렸다. 머쓱해하면서도 감정을 숨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흠.’
달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이렇게 보니 꽤 볼만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인 신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오히려 수수한 점이 눈길을 끈다. 화려한 외모는 아니지만 부드러운 인상이다. 거기다 새하얀 머리색과 피부는 마치 눈 같아 한번 건드려 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
‘여자가 아닌 게 유감이지만.’
남자라고 크게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이따금씩 미동들과도 잠자리를 나누었던 달은 곧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 정도면 범해 줄 만하니까.’
달이 꼼꼼하게 얼굴을 보고 있을 때였다. 신관이 갑자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왜 찻잔을 들고 계세요?”
네 얼굴에 부어 주려고. 그러나 달은 그만두기로 했다. 혹시나 저 고운 얼굴에 흉이라도 지면 아까울 것 같았다. 일단은 좀 더 지켜보자 싶어 말없이 차를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신관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그렇지’ 하고 말한다.
“이럴 때가 아니었는데. 이리로 오세요.”
“……?”
“불가에 가서 몸이라도 녹여요. 시장하시죠? 음식을 내올게요.”
신관은 겁도 없이 달의 손목을 잡았다. 후드를 벗겼다고 산의 모든 정령을 내쫓았던 달이다. 그러나 갑자기 이런 당돌한 짓을 하니 달은 오히려 기가 막혀 아무 짓도 못 했다. 결국 두 사람은 끌고 끌려가며 화롯가에 왔다. 달을 의자에 앉힌 다음 신관은 부지런하게 어디론가 걸어갔다. 아치형 창문 안으로 쏟아지는 달빛을 받으며 후드를 휘날리던 신관은 작은 문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신관은 두 손에 음식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가만히 구경하던 달은 다리를 꼬았다.
“그럼 한 달 동안 여기서 혼자 살았다는 거야?”
달그락, 달그락. 그릇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신관이 대답했다.
“네. 그래도 이따금씩 토끼나 노루가 찾아오곤 해서 외롭진 않았어요. 물론 밤에 산짐승 소리가 들릴 때는 영락없이 죽겠구나 싶었지만.”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피식 웃는다.
“그런데 아니었나 봐요.”
“뭐?”
신관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미소 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외로웠나 봅니다.”
연하늘색 눈이 다시 속눈썹에 가려진다.
“여행자님을 보고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걸 보니까요.”
또다. 달은 흰 얼굴에 다시 홍조가 도는 걸 보았다. 그럴 때마다 달은 묘하게 찌릿한 자신을 발견했다. 심장 근처가 찌릿찌릿한 게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달은 알 수 없는 느낌에 의아해하며 말을 했다.
“심장이 뛰어?”
“네.”
“왜?”
신관이 나직하게 웃는다. 그는 그릇에 뜨거운 수프를 뜨던 중이었다.
“좋아서요.”
찌릿. 달은 제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왜 이래? 그사이 신관이 수프와 숟가락을 건네며 말했다.
“이것밖에 없어서 죄송합니다. 겨우내 버텨야 하다 보니 식량이 부족하거든요.”
달은 손을 내밀었다. 그때 그의 손가락에 신관의 손등이 닿았다. 차가운 달의 손과 달리 신관의 손은 따뜻했다. 따스하고 보드라운 감촉에 달은 순간 손을 움츠리고 말았다. 신관도 눈을 크게 떴다.
“이런. 손이 얼음장입니다. 어서 모닥불에 손을 쬐세요.”
“됐어.”
달이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으니까.”
어둠의 신은 태생적으로 몸이 차다. 그걸 알지 못하는 신관은 눈을 찡그렸다.
“이 높은 산맥까지 오시느라 그런 겁니다. 자칫 동상에 걸릴 수 있어요.”
“…….”
달은 무시하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이었었으나, 신관도 그의 제스처를 무시했다. 가까운 탁자에 수프를 올려 두더니 신관은 다시 성큼성큼 달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말없이 제단을 노려보고 있던 달의 손을 콱 잡았다. 뜨거운 감촉이 손 전체를 감싸자 달의 은회색 눈동자가 일순간 흔들렸다. 신관은 눈썹을 찡그리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였다.
“이것 보십시오. 손이 차지 않습니까.”
“…….”
“손을 펴세요, 여행자님.”
“…….”
“여행자님.”
달은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손을 펼 때까지 계속 불러 댈 기세였다. 이 부드럽게 생긴 인간은 은근히 고집이 센 듯했다.
“쳇.”
달은 손을 폈다. 곧 죽을 놈에게 베푸는 아량이라고 생각했다.
“하하.”
신관은 환하게 웃었다. 또 저렇게 웃는다. 뭐가 저리 웃을 일이 많을까? 달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신관을 보았지만 상대는 내리꽂는 시선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그저 쭉 편 여행자의 손을 불가로 가져가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타닥타닥.
뜨거운 열기가 손바닥을 데우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달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불을 노려보았다. 조그마한 새 형상을 한 불의 정령들이 울상인 얼굴로 손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녀들은 이미 남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신전 바깥에 들렸던 비명 소리를 다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조심스럽게 열기를 건네자 달은 입을 열었다.
‘꺼져.’
정령들은 기겁하며 몸을 부풀리더니 모습을 감춰 버렸다. 달이 인상을 찡그리며 입모양으로 욕설을 읊조렸다. 손에서 멀어지라는 뜻이었는데 정령들은 아예 장작 밑으로 기어들어 가 버렸다. 훅 꺼져 버린 불을 보며 신관이 ‘어어?’ 하고 당황했다.
“왜 갑자기 꺼졌지? 다시 불을…….”
“됐어.”
신관이 다시 입을 여는 걸 보고 달이 인상을 구기며 말을 덧붙였다.
“손이나 떼.”
그러나 신관은 손을 놓지 않았다. 여리고 순하게 생겨서는 예상외로 계속되는 고집에 달은 불쾌함을 느꼈다. 제 신과 워낙 다른 인상인 게 놀라워 가만두었더니 은근슬쩍 기어오른다. 신관이 한 거라곤 여행자에게 먹을 걸 나누어 주고 불을 데워 준 호의가 다였으나, 달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잡히지 않은 손에 힘을 넣었다. 우선 이놈의 건방진 손모가지부터 잘라 주지. 머릿속으로 팔다리가 부러진 신관을 생각할 때였다.
갑자기 하얀 두 손이 달의 손을 소중하게 감싸 안았다. 달은 눈을 크게 뜬 채 제 손에 온기를 나누어 주려 노력하는 상대를 보았다. 힘주었던 손이 당황해서 그만 아래로 떨어졌다.
“불쾌하시겠지만 정말로 손이 찹니다.”
“…….”
“잠시만 참아 주세요.”
신관이 덧붙였다.
“정말로 걱정되어서 그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