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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뭐야? 진짜 싸운 거야? 촬영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보다 진저 방금 주먹 쥔 거 봤어? 어머 진짜? 서윤 씨 치려던 거야? 에이 설마 그래도 히어론데. 진저가 언제 사람 챙기는 거 봤니? 오죽하면 히어로가 아니라 파이터라고 하겠어. 하긴 그건 그래.
참 이상한 일이었다. 히어로의 신체능력이 민간인보다 좋은 편이라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체의 최적화일 뿐,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드라마틱한 기능의 향상은 없다. 그런데도 왜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은 유난히도 잘 들리는 걸까.
정지한 듯 서 있던 진저가 귓가의 블러택으로 손을 가져가자 사위에 정적이 감돌았다. 혹시 블러택을 끄려는 게 아닐까, 그 유명한 진저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기대가 모두의 입을 막은 결과였다. 그러나 잠시 뒤, 더욱 흐릿해져 대강 보이던 윤곽마저 부정확해진 얼굴이 드러나고 진저가 조용히 세트장의 뒷문 쪽으로 향했다. 기괴하리만치 뭉개진 상像에 놀란 이들이 황급히 진저의 앞길을 터 주었다.
탁.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주열이 건물 외벽에 기대어 스르르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웅크리듯 감싸 쥔 뱃속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새강 의도하지 않아도 터무니없는 오해를 살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다수에게서 받는 오해는 외롭지만 좋은 사람에게서 받는 오해만큼 속상하진 않다는 것도.
“너 공일이 원래 아이돌로 데뷔했던 거 알지?”
“그랬어? 원래 배우 아니었나.”
“걔가 영화로 떠서 그렇지 원래는 아이돌이었어. 저번 달에 너 쉬는 동안 자기네 그룹에서 탈퇴했다고 말 진짜 많았는데, 정말 몰라?”
“아이돌에 관심 없는 거 알잖아.”
“아까는 배우인 줄 알았다더니? 배우한테도 관심 없냐?”
“누가 공일한테 관심 없대? 배우 공일한테는 관심 많아. 필모도 대충 알고. 아이돌 공일에 대해 몰랐을 뿐이야.”
서윤은 불편한 기분으로도 차분히 영재의 말을 받았다. 그 침착성이 단순히 애먼 데서 화풀이하는 짓을 용납할 수 없는 서윤의 도덕적 결벽증에서 나온 결과물임을 뻔히 아는 영재가 한숨을 푹 쉬었다. 저거 진짜 피곤하게 살아.
―New!
그때, 재킷 안주머니에서 울린 소리에 서윤의 굳은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
“이 근처 거의 다 왔는데 그놈의 안티들 때문에 뒷문으로 차 돌리느라 시간이 좀 걸리나 봐. 하여간 그것들은 할 일도 없지……. 서윤아? 마서윤? 너 내말 듣고 있냐?”
서윤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기를 끄집어내자 영재가 알 만하다는 얼굴을 했다. 비록 알림음은 듣지 못했으나 서윤의 기분을 풀어 줄 연락이라면 어디에서 온 것일지 뻔했다.
“또 그 새강 님이냐?”
“어.”
휴대기에만 온 신경을 집중한 서윤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보던 영재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나 좋은가. 절친한 친구(희망자는 많음)도 없고 애인(희망자는 무수히 많음)도 없는 서윤이 물고 빨고 핥는 유일한 상대는 바로 남자였다. 그것도 본명도 얼굴도 나이도 모르는, 정말 아는 거라곤 진새강이라는 가명 세 글자가 다인 상대. 그런데도 하루가 멀다 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워하는 서윤을 보고 있으면 영재로서는 복잡 미묘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저거 진짜 무슨 신종 사기 아냐? 영재가 알기로, 세상에 마서윤의 기준을 충족시킬 정도로 올곧고 바른 사람이 있다는 건 딱 두 가지 경우뿐이었다. 하나는 철저한 연기, 또 하나는 70억 인류의 다양성이 빚어낸 기적. 물론 영재는 후자의 희박한 가능성에 기대를 걸 정도로 어리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윤이 말하는 새강의 ‘사람됨됨이’가 연기 혹은 사기에 가까운 기만이리라 확신하면서도 영재는 처음 딱 한 번 이후로는 절대로 제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가 그 비슷한 의혹을 제기할 때마다 서윤이 정색을 하고 그럴 리 없다며 단언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실 저렇게 좋아하는 서윤을 보고 있노라면 그 희망에 찬물을 끼얹기 죄스러워지는 탓도 있었다. 영재가 자못 아련한 시선으로 서윤을 바라보았다. 쟤가 저렇게 웃으면 후광이 막……. 꺼트리는 건 신성모독 같아서…….
마늘 새강 님 오늘도 굉장히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올려 주셨네요. 좋은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을 말씀하신 건지 호인을 말씀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가슴 아플 것 같아요. 오늘의 한마디가 새강 님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 아니길 빕니다.ㅠㅠ 언제나 응원하고 있는 거 아시죠? 힘내세요, 새강 님!
서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번이고 새로고침을 눌렀다. 방금 올라왔으니까 아직 접속 중이시지 않을까. 그의 기대 섞인 눈빛이 어찌나 진중하던지 영재는 그만 혀를 끌끌 차고 말았다. 에라, 이 빠돌아. 핵무기의 위협에서 인류를 구제할 마지막 희망을 논하는 주인공의 얼굴로 새로고침을 연타하는 톱스타의 모습은 누가 볼까 두려우리만치 부조리한 광경이었다.
그런 영재의 마음을 알았는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서윤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클라이막스를 오가던 영화가 삽시간에 해피엔딩을 맞이한 이유는 너무나 뻔했다. 그분이 오셨구만. 영재가 질렸다는 듯 중얼거렸다.
새강 앗 역시 마늘 님! ‘좋은 사람’, 중의적인 표현이었는데 역시 알아주시네요 ㅎㅎ 음 경험담이 맞긴 한데 뭐 어떻게 보면 일반론적인 말이고 그냥 문득 든 생각이니까 크게 마음 쓰지 마세요! 걱정해 주시고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ㅠㅠ 마늘 님밖에 없어요ㅜㅜㅜ
마늘 헉 경험담이시라니 더 걱정되는데 저밖에 없다고 해 주셔서 또 신나요. 어쩌지ㅜㅜ 울면서 춤출게요~(ㅜㅜ)~
상품으로 치자면 최고급 명품이라는 말로도 모자랄 수려한 외모로 듣도 보도 못한 이모티콘을 써 가며 몹쓸 개그나 치고 있다니. 서윤의 어깨 너머로 열심히 곁눈질을 하던 영재가 못 볼 것이라도 본 양 눈을 질끈 감고는 고개를 털어 냈다. 쟤, 저거 유출되면 난 끝이야. 모가지 잘릴 거라고. 사장님한테 말해서 쟤 보안점검 앞당기든지 해야지 안 되겠어.
베타 어 새강 님이다!!!!!!! 헐 저 동접 첨이에요 헐헐허러럴럴러러
유비 새강 님!!!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ㅋㅋㅋㅋ 역시 랜덤출몰이셔
새벽녘의 정기적인 접속을 제외하고는 팬들이 우스갯소리로 와일러가 아니냐고 할 정도로 대중없는 시간대에 ‘출몰’하는 새강이었기에, 겨우 코멘트 하나만 단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새강 님’을 연호하며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처음 몇 번은 꼬박꼬박 답하다가도 자연스럽게 말수를 줄이는 새강을 눈치챈 서윤이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새강은 팬들이 많이 모여 복작복작하게 떠들고 있을 때면 말없이 가만히 화면만 확인하거나 단편적인 답밖에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들이 많은 걸 싫어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스스로를 노출하기 싫어하는 건가. 아니면 나서서 말하길 싫어하는 타입? 단순히 말수가 적은 것 치고는 일대일로 대화는 능숙하게 이어 가는 편이었기에 사교성이나 말재주 문제는 아닐 거라는 게 서윤의 판단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말과 글은 별개라고 하지만 그토록 글을 자유롭게 풀어 가는 사람이 간단한 일상대화를 어려워할 리도 없었다.
어쩌면 남몰래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있는 걸지도 모르지. 그래서 스스로의 신분도 밝히지 않고 온라인에서도 최대한 말조심을 한다든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서윤이 일순 멋쩍은 듯 턱을 긁적였다. 어차피 쓸모없는 억측일 뿐인데 너무 깊게 파고든 것 같아 민망해서였다.
그리고 서윤은, 재고의 여지없이 배제한 가설이 진실에 가장 가깝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한편, 새로고침을 한 번 할 때마다 스크롤이 쭉쭉 올라가는 휴대기를 들여다보며 어떻게든 대화에 끼려 노력하던 주열은 잊을 만하면 저를 불러 주는 ‘마늘’ 덕에 간신히 인사를 건넬 타이밍을 잡을 수 있었다.
새강 앗, 전 이제 그만 나가 봐야겠어요ㅜㅜ 쓰론님들 좋은 하루 되세요!
그래, 명색이 업무시간인데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을 순 없지. 주열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핑계에 불과했던 순찰과 경계 임무에 충실하기로 했다.
‘다 괜찮을 거예요.’
겨우 그 한마디가 이렇게 힘이 될 줄이야. 연회색 바탕의 화면에 새겨진 남빛 글씨 몇 자가 주열의 머릿속에 새겨 낸 듯 뚜렷이 박혔다. 누구나 할 수 있는 흔한 말이고 어쩌면 상대에게는 그저 가벼운 인사치레였을지도 모르건만 차게 식었던 손끝에 말랑한 온기가 돌았다. 그게 고맙고 기뻐서 주열은 남몰래 웃음을 삼켰다.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달려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싶더니 주열이 기댄 벽의 철문이 거칠게 젖혀졌다.
―끼익.
―꺄아아아악!
갑자기 벌컥 열린 문에 놀라는 것도 잠시, 건물 모퉁이 쪽에서 급정거하는 차 소리와 찢어지는 여자들의 고성이 귀청을 때렸다. 가벼운 해프닝이라기엔 악다구니에 가까운 비명에 진저가 흠칫거리는 것과 동시에, 다급히 뛰쳐나와 누군가를 마중하듯 두리번거리던 스텝 몇몇이 이상하다는 듯 진저를 훑었다. 굳이 해석하자면 ‘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 정도의 시선이었다. 그 눈빛 어디에도 공포나 불안의 징조는 없었으니 방금 전의 비명 소리가 그네들에게 들리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설마, 와일러일까? 저들에게는 잘 들리지 않지만 내게는 들리는 소리라면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아니, 비명인 것을 감안하면 느껴지는 것보다 더 멀리에 있을지도.
‘―빨리 가지 않으면 늦을지도 몰라.’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주열은 더 지체하지 않고 몸을 날렸다.
“진저 씨? 잠시만요!”
뒤에서 누군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에게는 다수의 비명이 더 중요했다.
조금만 버텨 줘. 조금만 더. 출동할 때면 언제나 그랬듯, 와일러의 공격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이들에게 닿지 않을 바람을 되뇌며 주열이 빠르게 바닥을 박찼다. 바로 그때였다.
“――――지 마! 너――――해!”
“악! 니가 ――――――잖아!”
어? 눈 깜짝할 사이에 건물의 한쪽 면을 완전히 가로지르던 주열의 신형이 주춤했다. 보통 와일러에 쫓기는 사람이 저렇게 말을 했던가? 그간 숱한 와일러들을 퇴치해 왔고 또 그만큼 많은 피해자들을 만났지만, 아무리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사람이라도 말이 통하지 않는―그리고 심지어 보이지도 않는―이세계의 괴물에게 욕설을 퍼붓는 경우는 없었다. 뭔가 이상한데. 주열이 생각하는 와중에도 불명확하게 들리던 고함 소리는 차츰 가까워져 갔다.
“이거 당장 ―――라고!”
“니가 뭔데 우리 오빠한테 ――――야?!”
아 뭐야. 나 설레발쳤나 봐. 밀려오는 민망함과 허탈함을 참지 못하고 주열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가 보긴 해야겠지? 죽었다 깨어나도 저 앞의 목소리들이 와일러의 공포에 떠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일단 이곳의 안전을 책임진 이상 확인은 해야 했다. 어차피 요식행위에 불과하겠지만. 주열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시끌시끌한 건물 저편을 향해 모퉁이를 돌았다.
“형, 스탭들 이리로 오고 있대요?”
“글쎄, 일단 뒷문으로 나와 달라고 말은 했는데…….”
공일의 매니저, 태훈이 영 답답했는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창밖은 벤을 둘러싼 채 저희들끼리 엉겨 붙어 싸우는 소녀들로 아비규환이었다. 차라리 안티만 있다면 눈 딱 감고 엑셀 밟는 시늉이라도 하지, 현격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우리 오빠 건드리지 말라며 맞붙어 싸우는 공일의 팬들마저 깔아뭉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고, 우리 일영이들 계속 맞네. 야! 치사하게 이 대 일이냐? 안 되겠어요, 내가…….”
“야야, 아서라 아서. 네가 나가 버리면 너 하나 지키자고 저러고 맞는 네 팬들은 뭐가 되냐.”
태훈은 직접 나가서 뺨이라도 때려 줘야 직성이 풀리겠다며 씩씩대는 공일을 말렸다. 자기 사람 건드리는 꼴은 못 보는 공일의 성격상 그 말은 진심일 확률이 높았으니까. 게다가 한둘이면 또 모를까, 거짓말 좀 보태 백 명은 되어 보이는 인원을 공일 혼자서 당해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나저나 저것들 부모는 어디서 뭘 하는 거야? 자기 딸이 패악을 떠는데 냉큼 데려가지 않고. 태훈이 혀를 쯧쯧 찼다.
“어제까지만 해도 오빠, 오빠 난리를 치던 것들이…….”
어쩌면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안면을 바꾸냐. 무심코 중얼거리던 태훈은 문득 공일의 표정을 살폈다. 하긴, 제일 속 쓰릴 놈은 얜데 내가 이러면 안 되겠지.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공일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투로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오늘까지 오빠오빠 하는 애들이 더 많은데요 뭐. 원래부터 리조는 내 개인 팬이 먹여 살렸잖아요.”
탈퇴한 옛 그룹명을 거론하는 공일의 얼굴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태훈은 적잖이 안심하는 한편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저놈 일인데 왜 내가 더 속앓이를 해야 하지? 갑자기 극심한 피로가 몰려오는 듯한 착각에 태훈이 운전석에 몸을 축 늘어뜨렸다.
―지이이잉.
“제가 받을게요.”
오늘따라 태훈이 왜인지 모르게 피곤해 보인다고 생각하며 공일이 그의 휴대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한 실장님?”
―어, 공일이냐?
“네, 지금 어디세요? 저희 뒷문까지 가려고 했는데 안티들 때문에 옆문 쪽에서 차 섰어요.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데 빨리 좀 와 주세요. 우리 일영이들 다 얻어터지겠네.”
―그쪽으로 방금 진저 갔을 텐데, 못 만났어?
“네? 진저요? 진저가 구하러 온다고요?”
진저 본인이 들었다면 ‘아닙니다’라고 딱 잘라 부인했겠으나 불행히도 진저는 그들의 통화를 들을 수 없었고 언제나 믿고 싶은 사실만이 진실로 탈바꿈하는 법이었다. 그렇다고 진저가 그 방향으로 갔다는 사실에 ‘구하기 위해서’라는 자의적 해석을 덧붙인 공일을 탓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근 30분이나 안티팬들의 추격을 피해 세트장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그도 모자라 목적지 코앞에서 차에 꼼짝없이 갇혀 있다 보면 누구라도 인내심이 얄팍해질 만했으니까.
“정말이죠? 어디요? 어느 쪽에서 오는데요?”
―어? 어어, 아마 뒷문에서 왼쪽으로 건물 끼고 돌았을 테니까…….
“형, 받아요.”
그리고 공일은 원래부터 희박한 인내심의 소유자였다. 적어도 진저에 한해서만큼은. 타고난 신경줄이 등산로프보다 질기고 튼튼한 덕에 여간해서는 뭔가를 못 참아 내는 법이 없는 그였으나, 공일은 유일한 취미 생활에 있어서만큼은 조금도 참거나 양보하질 못했다. 아니, 애초부터 그럴 생각 자체가 없다는 편이 옳았다.
공일에게) 오빠 진저덕질 그만하면 안 돼요ㅠㅠ? 자제점ㅠㅠㅠ
ㄴ공일 : 내가 내 진저님을 핥겠다는데 왜 자제해야 하지?^^
공일에게) 오빠 히어로가 좋아요 우리가 좋아요?
ㄴ공일 : 진저 형이 좋아^^
공일에게) 공일아 진저가 눈앞에 있으면 당장 뭐부터 할 것 같아?
ㄴ공일 : 음... 좋아서 기절?ㅋㅋㅋ
한때 인터넷에 파다하게 퍼져 많은 패러디를 양산해 낸 공일의 어록들이었다. 이렇듯 공공연히 진저에 대한 팬심을 불태우던 공일이 진저에게 구해질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됐다. 얼마나 꿈에 그렸던 로망인데! 단단히 결심한 공일은 휴대기를 냅다 태훈에게 떠맡기고는 벤의 창문에 납작 달라붙었다. 시야를 가득 메운 여고생들의 난투극 사이로 건물 모퉁이에서 막 돌아 나오는 붉은 머리칼의 사내를 포착한 공일이 벤의 문을 냅다 열어젖혔다.
“여보세요, 한 실장님? 방금 무슨 말씀을 하신 거예요? 진저가 여기로…… 야! 사공일!”
영문도 모르고 통화를 이어 가려던 태훈이 기겁을 하며 장만한 지 일주일도 안 된 휴대기를 내팽개쳤다. 허둥지둥 공일을 향해 뻗어 가던 손아귀가 전 아이돌가수이자 현 액션배우의 순발력을 이기지 못하고 안타깝게 허공을 가로질렀다. 공일의 발이 세 시간 만에 처음으로 땅을 디뎠다.
한편, 막 모퉁이를 돈 주열의 눈앞에는 공일을 응원하러 온 팬들과 그를 ‘테러’하러 온 안티팬들 사이의 드잡이가 한창이었다. 날계란과 밀가루, 토마토, 음식물 쓰레기 등을 뒤집어쓴 채 서로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옥신각신하는 그네들을 보고 있자니 주열의 안에서 무언가가 쩍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그 무언가는 바로 ‘꽃 같은 여고생’이라는 절대적인 이데아였다.
그랬다. 주열의 머릿속에 여고생이란 한없이 여리고 보듬어 줘야 할 귀여운 생물체였다. 물론 한창 혈기왕성하고 철없을 나이니 팔팔하게 뛰놀면서 사고를 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마저도 어린 강생이들처럼 귀여운 맛이 있는 소녀들. 한데 눈앞의 그녀들을 보고 있자니 예전에 그 비유를 들은 마늘 님이 고등학생인 여동생이 생각난다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음…… 확실히 어떻게 보면 강아지 같긴 하죠. 비글이라든가.’
그때 말씀하시는 어감이 묘했더랬지. 텍스트상으로도 명백히 느껴질 만큼 의미심장한 뉘앙스였기에 그때의 대화는 아직도 생생했다.
새강 비글요? 아 그 귀 축 처진 애요? 되게 귀엽던데 딱이네요!
마늘 네 딱이죠? 잘 때는 귀여운 것까지 완전 똑같아요 ㅋㅋ
새강 아니, 안 잘 땐 안 귀엽냐고요 ㅋㅋㅋㅋㅋㅋ
마늘 음 그게ㅋㅋ 안 자도 귀엽긴 한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새강 앗, 그 표정 귀엽다 ㅋㅋ 무슨 문제요?
마늘 안 잘 땐 대체로 용서가 안 되더라고요:D
새강 으잌ㅋㅋㅋㅋㅋㅋㅋㅋㅋ
주열은 어째서 마늘 님의 말에 은근히 뼈가 있다고 느꼈는지 알 것 같았다. 이건 마치…….
‘개싸움이잖아.’
“너 이거 놔!”
“너 먼저 놓으라고 xx아!”
“악! 너 지금 나 물었어?!”
맙소사. 쟤네 진짜 물어. 걷잡을 수 없이 악화일로로 치닫는 사태를 관전하던 주열이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그가 황망함을 애써 떨쳐 내려 노력할 즈음, 잠잠하던 벤의 문이 예고도 없이 열리더니 시커먼 그림자가 주열에게로 돌진해 왔다. 만일 그것이 사람이라는 지각이 없었더라면 와일러로 간주하고 진즉에 때려눕혔을 테지만 벤 안에서 나온 것은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의 사내였다. 이름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으나, 주열은 굳이 그의 정체를 궁금해하지 않아도 되었다.
남자가 누구이건 지금만큼은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 물소라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했으니까. 사력을 다해 뛰는 그의 뒤로 두 무리의 여고생들이 지축을 울리며 추격해 왔다. 하나는 공일을 잡으려는 안티 무리, 다른 하나는 그녀들을 막으려는 팬 무리. 놀랍게도, 벤을 빠져나온 공일을 발견하자마자 그녀들은 방금 전까지 벌이던 난투의 승부마저 도외시한 채 그의 뒤를 쫓았던 것이다. 그리고 주열은 그것이 환영할 만한 일인지 선뜻 판단할 수 없었다. 그냥 다시 싸워 주면 안 될까?
“잡아!”
“오빠! 달려요!”
“밀지 마! xx 밀지 말라고!”
나한테 올 거면 그냥 너희끼리 싸우란 말이야. 교복을 입고 봉두난발을 한 물소 떼가 쇄도하는 광경은 주열을 질리게 하기 충분했다. 와일러를 상대할 때와는 다른 의미로 겁을 집어먹은 주열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쳐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뭐야? 진짜 싸운 거야? 촬영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보다 진저 방금 주먹 쥔 거 봤어? 어머 진짜? 서윤 씨 치려던 거야? 에이 설마 그래도 히어론데. 진저가 언제 사람 챙기는 거 봤니? 오죽하면 히어로가 아니라 파이터라고 하겠어. 하긴 그건 그래.
참 이상한 일이었다. 히어로의 신체능력이 민간인보다 좋은 편이라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체의 최적화일 뿐,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드라마틱한 기능의 향상은 없다. 그런데도 왜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은 유난히도 잘 들리는 걸까.
정지한 듯 서 있던 진저가 귓가의 블러택으로 손을 가져가자 사위에 정적이 감돌았다. 혹시 블러택을 끄려는 게 아닐까, 그 유명한 진저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기대가 모두의 입을 막은 결과였다. 그러나 잠시 뒤, 더욱 흐릿해져 대강 보이던 윤곽마저 부정확해진 얼굴이 드러나고 진저가 조용히 세트장의 뒷문 쪽으로 향했다. 기괴하리만치 뭉개진 상像에 놀란 이들이 황급히 진저의 앞길을 터 주었다.
탁.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주열이 건물 외벽에 기대어 스르르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웅크리듯 감싸 쥔 뱃속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새강 의도하지 않아도 터무니없는 오해를 살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다수에게서 받는 오해는 외롭지만 좋은 사람에게서 받는 오해만큼 속상하진 않다는 것도.
“너 공일이 원래 아이돌로 데뷔했던 거 알지?”
“그랬어? 원래 배우 아니었나.”
“걔가 영화로 떠서 그렇지 원래는 아이돌이었어. 저번 달에 너 쉬는 동안 자기네 그룹에서 탈퇴했다고 말 진짜 많았는데, 정말 몰라?”
“아이돌에 관심 없는 거 알잖아.”
“아까는 배우인 줄 알았다더니? 배우한테도 관심 없냐?”
“누가 공일한테 관심 없대? 배우 공일한테는 관심 많아. 필모도 대충 알고. 아이돌 공일에 대해 몰랐을 뿐이야.”
서윤은 불편한 기분으로도 차분히 영재의 말을 받았다. 그 침착성이 단순히 애먼 데서 화풀이하는 짓을 용납할 수 없는 서윤의 도덕적 결벽증에서 나온 결과물임을 뻔히 아는 영재가 한숨을 푹 쉬었다. 저거 진짜 피곤하게 살아.
―New!
그때, 재킷 안주머니에서 울린 소리에 서윤의 굳은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
“이 근처 거의 다 왔는데 그놈의 안티들 때문에 뒷문으로 차 돌리느라 시간이 좀 걸리나 봐. 하여간 그것들은 할 일도 없지……. 서윤아? 마서윤? 너 내말 듣고 있냐?”
서윤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기를 끄집어내자 영재가 알 만하다는 얼굴을 했다. 비록 알림음은 듣지 못했으나 서윤의 기분을 풀어 줄 연락이라면 어디에서 온 것일지 뻔했다.
“또 그 새강 님이냐?”
“어.”
휴대기에만 온 신경을 집중한 서윤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보던 영재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나 좋은가. 절친한 친구(희망자는 많음)도 없고 애인(희망자는 무수히 많음)도 없는 서윤이 물고 빨고 핥는 유일한 상대는 바로 남자였다. 그것도 본명도 얼굴도 나이도 모르는, 정말 아는 거라곤 진새강이라는 가명 세 글자가 다인 상대. 그런데도 하루가 멀다 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워하는 서윤을 보고 있으면 영재로서는 복잡 미묘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저거 진짜 무슨 신종 사기 아냐? 영재가 알기로, 세상에 마서윤의 기준을 충족시킬 정도로 올곧고 바른 사람이 있다는 건 딱 두 가지 경우뿐이었다. 하나는 철저한 연기, 또 하나는 70억 인류의 다양성이 빚어낸 기적. 물론 영재는 후자의 희박한 가능성에 기대를 걸 정도로 어리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윤이 말하는 새강의 ‘사람됨됨이’가 연기 혹은 사기에 가까운 기만이리라 확신하면서도 영재는 처음 딱 한 번 이후로는 절대로 제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가 그 비슷한 의혹을 제기할 때마다 서윤이 정색을 하고 그럴 리 없다며 단언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실 저렇게 좋아하는 서윤을 보고 있노라면 그 희망에 찬물을 끼얹기 죄스러워지는 탓도 있었다. 영재가 자못 아련한 시선으로 서윤을 바라보았다. 쟤가 저렇게 웃으면 후광이 막……. 꺼트리는 건 신성모독 같아서…….
마늘 새강 님 오늘도 굉장히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올려 주셨네요. 좋은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을 말씀하신 건지 호인을 말씀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가슴 아플 것 같아요. 오늘의 한마디가 새강 님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 아니길 빕니다.ㅠㅠ 언제나 응원하고 있는 거 아시죠? 힘내세요, 새강 님!
서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번이고 새로고침을 눌렀다. 방금 올라왔으니까 아직 접속 중이시지 않을까. 그의 기대 섞인 눈빛이 어찌나 진중하던지 영재는 그만 혀를 끌끌 차고 말았다. 에라, 이 빠돌아. 핵무기의 위협에서 인류를 구제할 마지막 희망을 논하는 주인공의 얼굴로 새로고침을 연타하는 톱스타의 모습은 누가 볼까 두려우리만치 부조리한 광경이었다.
그런 영재의 마음을 알았는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서윤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클라이막스를 오가던 영화가 삽시간에 해피엔딩을 맞이한 이유는 너무나 뻔했다. 그분이 오셨구만. 영재가 질렸다는 듯 중얼거렸다.
새강 앗 역시 마늘 님! ‘좋은 사람’, 중의적인 표현이었는데 역시 알아주시네요 ㅎㅎ 음 경험담이 맞긴 한데 뭐 어떻게 보면 일반론적인 말이고 그냥 문득 든 생각이니까 크게 마음 쓰지 마세요! 걱정해 주시고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ㅠㅠ 마늘 님밖에 없어요ㅜㅜㅜ
마늘 헉 경험담이시라니 더 걱정되는데 저밖에 없다고 해 주셔서 또 신나요. 어쩌지ㅜㅜ 울면서 춤출게요~(ㅜㅜ)~
상품으로 치자면 최고급 명품이라는 말로도 모자랄 수려한 외모로 듣도 보도 못한 이모티콘을 써 가며 몹쓸 개그나 치고 있다니. 서윤의 어깨 너머로 열심히 곁눈질을 하던 영재가 못 볼 것이라도 본 양 눈을 질끈 감고는 고개를 털어 냈다. 쟤, 저거 유출되면 난 끝이야. 모가지 잘릴 거라고. 사장님한테 말해서 쟤 보안점검 앞당기든지 해야지 안 되겠어.
베타 어 새강 님이다!!!!!!! 헐 저 동접 첨이에요 헐헐허러럴럴러러
유비 새강 님!!!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ㅋㅋㅋㅋ 역시 랜덤출몰이셔
새벽녘의 정기적인 접속을 제외하고는 팬들이 우스갯소리로 와일러가 아니냐고 할 정도로 대중없는 시간대에 ‘출몰’하는 새강이었기에, 겨우 코멘트 하나만 단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새강 님’을 연호하며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처음 몇 번은 꼬박꼬박 답하다가도 자연스럽게 말수를 줄이는 새강을 눈치챈 서윤이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새강은 팬들이 많이 모여 복작복작하게 떠들고 있을 때면 말없이 가만히 화면만 확인하거나 단편적인 답밖에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들이 많은 걸 싫어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스스로를 노출하기 싫어하는 건가. 아니면 나서서 말하길 싫어하는 타입? 단순히 말수가 적은 것 치고는 일대일로 대화는 능숙하게 이어 가는 편이었기에 사교성이나 말재주 문제는 아닐 거라는 게 서윤의 판단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말과 글은 별개라고 하지만 그토록 글을 자유롭게 풀어 가는 사람이 간단한 일상대화를 어려워할 리도 없었다.
어쩌면 남몰래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있는 걸지도 모르지. 그래서 스스로의 신분도 밝히지 않고 온라인에서도 최대한 말조심을 한다든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서윤이 일순 멋쩍은 듯 턱을 긁적였다. 어차피 쓸모없는 억측일 뿐인데 너무 깊게 파고든 것 같아 민망해서였다.
그리고 서윤은, 재고의 여지없이 배제한 가설이 진실에 가장 가깝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한편, 새로고침을 한 번 할 때마다 스크롤이 쭉쭉 올라가는 휴대기를 들여다보며 어떻게든 대화에 끼려 노력하던 주열은 잊을 만하면 저를 불러 주는 ‘마늘’ 덕에 간신히 인사를 건넬 타이밍을 잡을 수 있었다.
새강 앗, 전 이제 그만 나가 봐야겠어요ㅜㅜ 쓰론님들 좋은 하루 되세요!
그래, 명색이 업무시간인데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을 순 없지. 주열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핑계에 불과했던 순찰과 경계 임무에 충실하기로 했다.
‘다 괜찮을 거예요.’
겨우 그 한마디가 이렇게 힘이 될 줄이야. 연회색 바탕의 화면에 새겨진 남빛 글씨 몇 자가 주열의 머릿속에 새겨 낸 듯 뚜렷이 박혔다. 누구나 할 수 있는 흔한 말이고 어쩌면 상대에게는 그저 가벼운 인사치레였을지도 모르건만 차게 식었던 손끝에 말랑한 온기가 돌았다. 그게 고맙고 기뻐서 주열은 남몰래 웃음을 삼켰다.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달려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싶더니 주열이 기댄 벽의 철문이 거칠게 젖혀졌다.
―끼익.
―꺄아아아악!
갑자기 벌컥 열린 문에 놀라는 것도 잠시, 건물 모퉁이 쪽에서 급정거하는 차 소리와 찢어지는 여자들의 고성이 귀청을 때렸다. 가벼운 해프닝이라기엔 악다구니에 가까운 비명에 진저가 흠칫거리는 것과 동시에, 다급히 뛰쳐나와 누군가를 마중하듯 두리번거리던 스텝 몇몇이 이상하다는 듯 진저를 훑었다. 굳이 해석하자면 ‘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 정도의 시선이었다. 그 눈빛 어디에도 공포나 불안의 징조는 없었으니 방금 전의 비명 소리가 그네들에게 들리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설마, 와일러일까? 저들에게는 잘 들리지 않지만 내게는 들리는 소리라면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아니, 비명인 것을 감안하면 느껴지는 것보다 더 멀리에 있을지도.
‘―빨리 가지 않으면 늦을지도 몰라.’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주열은 더 지체하지 않고 몸을 날렸다.
“진저 씨? 잠시만요!”
뒤에서 누군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에게는 다수의 비명이 더 중요했다.
조금만 버텨 줘. 조금만 더. 출동할 때면 언제나 그랬듯, 와일러의 공격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이들에게 닿지 않을 바람을 되뇌며 주열이 빠르게 바닥을 박찼다. 바로 그때였다.
“――――지 마! 너――――해!”
“악! 니가 ――――――잖아!”
어? 눈 깜짝할 사이에 건물의 한쪽 면을 완전히 가로지르던 주열의 신형이 주춤했다. 보통 와일러에 쫓기는 사람이 저렇게 말을 했던가? 그간 숱한 와일러들을 퇴치해 왔고 또 그만큼 많은 피해자들을 만났지만, 아무리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사람이라도 말이 통하지 않는―그리고 심지어 보이지도 않는―이세계의 괴물에게 욕설을 퍼붓는 경우는 없었다. 뭔가 이상한데. 주열이 생각하는 와중에도 불명확하게 들리던 고함 소리는 차츰 가까워져 갔다.
“이거 당장 ―――라고!”
“니가 뭔데 우리 오빠한테 ――――야?!”
아 뭐야. 나 설레발쳤나 봐. 밀려오는 민망함과 허탈함을 참지 못하고 주열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가 보긴 해야겠지? 죽었다 깨어나도 저 앞의 목소리들이 와일러의 공포에 떠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일단 이곳의 안전을 책임진 이상 확인은 해야 했다. 어차피 요식행위에 불과하겠지만. 주열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시끌시끌한 건물 저편을 향해 모퉁이를 돌았다.
“형, 스탭들 이리로 오고 있대요?”
“글쎄, 일단 뒷문으로 나와 달라고 말은 했는데…….”
공일의 매니저, 태훈이 영 답답했는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창밖은 벤을 둘러싼 채 저희들끼리 엉겨 붙어 싸우는 소녀들로 아비규환이었다. 차라리 안티만 있다면 눈 딱 감고 엑셀 밟는 시늉이라도 하지, 현격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우리 오빠 건드리지 말라며 맞붙어 싸우는 공일의 팬들마저 깔아뭉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고, 우리 일영이들 계속 맞네. 야! 치사하게 이 대 일이냐? 안 되겠어요, 내가…….”
“야야, 아서라 아서. 네가 나가 버리면 너 하나 지키자고 저러고 맞는 네 팬들은 뭐가 되냐.”
태훈은 직접 나가서 뺨이라도 때려 줘야 직성이 풀리겠다며 씩씩대는 공일을 말렸다. 자기 사람 건드리는 꼴은 못 보는 공일의 성격상 그 말은 진심일 확률이 높았으니까. 게다가 한둘이면 또 모를까, 거짓말 좀 보태 백 명은 되어 보이는 인원을 공일 혼자서 당해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나저나 저것들 부모는 어디서 뭘 하는 거야? 자기 딸이 패악을 떠는데 냉큼 데려가지 않고. 태훈이 혀를 쯧쯧 찼다.
“어제까지만 해도 오빠, 오빠 난리를 치던 것들이…….”
어쩌면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안면을 바꾸냐. 무심코 중얼거리던 태훈은 문득 공일의 표정을 살폈다. 하긴, 제일 속 쓰릴 놈은 얜데 내가 이러면 안 되겠지.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공일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투로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오늘까지 오빠오빠 하는 애들이 더 많은데요 뭐. 원래부터 리조는 내 개인 팬이 먹여 살렸잖아요.”
탈퇴한 옛 그룹명을 거론하는 공일의 얼굴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태훈은 적잖이 안심하는 한편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저놈 일인데 왜 내가 더 속앓이를 해야 하지? 갑자기 극심한 피로가 몰려오는 듯한 착각에 태훈이 운전석에 몸을 축 늘어뜨렸다.
―지이이잉.
“제가 받을게요.”
오늘따라 태훈이 왜인지 모르게 피곤해 보인다고 생각하며 공일이 그의 휴대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한 실장님?”
―어, 공일이냐?
“네, 지금 어디세요? 저희 뒷문까지 가려고 했는데 안티들 때문에 옆문 쪽에서 차 섰어요.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데 빨리 좀 와 주세요. 우리 일영이들 다 얻어터지겠네.”
―그쪽으로 방금 진저 갔을 텐데, 못 만났어?
“네? 진저요? 진저가 구하러 온다고요?”
진저 본인이 들었다면 ‘아닙니다’라고 딱 잘라 부인했겠으나 불행히도 진저는 그들의 통화를 들을 수 없었고 언제나 믿고 싶은 사실만이 진실로 탈바꿈하는 법이었다. 그렇다고 진저가 그 방향으로 갔다는 사실에 ‘구하기 위해서’라는 자의적 해석을 덧붙인 공일을 탓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근 30분이나 안티팬들의 추격을 피해 세트장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그도 모자라 목적지 코앞에서 차에 꼼짝없이 갇혀 있다 보면 누구라도 인내심이 얄팍해질 만했으니까.
“정말이죠? 어디요? 어느 쪽에서 오는데요?”
―어? 어어, 아마 뒷문에서 왼쪽으로 건물 끼고 돌았을 테니까…….
“형, 받아요.”
그리고 공일은 원래부터 희박한 인내심의 소유자였다. 적어도 진저에 한해서만큼은. 타고난 신경줄이 등산로프보다 질기고 튼튼한 덕에 여간해서는 뭔가를 못 참아 내는 법이 없는 그였으나, 공일은 유일한 취미 생활에 있어서만큼은 조금도 참거나 양보하질 못했다. 아니, 애초부터 그럴 생각 자체가 없다는 편이 옳았다.
공일에게) 오빠 진저덕질 그만하면 안 돼요ㅠㅠ? 자제점ㅠㅠㅠ
ㄴ공일 : 내가 내 진저님을 핥겠다는데 왜 자제해야 하지?^^
공일에게) 오빠 히어로가 좋아요 우리가 좋아요?
ㄴ공일 : 진저 형이 좋아^^
공일에게) 공일아 진저가 눈앞에 있으면 당장 뭐부터 할 것 같아?
ㄴ공일 : 음... 좋아서 기절?ㅋㅋㅋ
한때 인터넷에 파다하게 퍼져 많은 패러디를 양산해 낸 공일의 어록들이었다. 이렇듯 공공연히 진저에 대한 팬심을 불태우던 공일이 진저에게 구해질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됐다. 얼마나 꿈에 그렸던 로망인데! 단단히 결심한 공일은 휴대기를 냅다 태훈에게 떠맡기고는 벤의 창문에 납작 달라붙었다. 시야를 가득 메운 여고생들의 난투극 사이로 건물 모퉁이에서 막 돌아 나오는 붉은 머리칼의 사내를 포착한 공일이 벤의 문을 냅다 열어젖혔다.
“여보세요, 한 실장님? 방금 무슨 말씀을 하신 거예요? 진저가 여기로…… 야! 사공일!”
영문도 모르고 통화를 이어 가려던 태훈이 기겁을 하며 장만한 지 일주일도 안 된 휴대기를 내팽개쳤다. 허둥지둥 공일을 향해 뻗어 가던 손아귀가 전 아이돌가수이자 현 액션배우의 순발력을 이기지 못하고 안타깝게 허공을 가로질렀다. 공일의 발이 세 시간 만에 처음으로 땅을 디뎠다.
한편, 막 모퉁이를 돈 주열의 눈앞에는 공일을 응원하러 온 팬들과 그를 ‘테러’하러 온 안티팬들 사이의 드잡이가 한창이었다. 날계란과 밀가루, 토마토, 음식물 쓰레기 등을 뒤집어쓴 채 서로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옥신각신하는 그네들을 보고 있자니 주열의 안에서 무언가가 쩍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그 무언가는 바로 ‘꽃 같은 여고생’이라는 절대적인 이데아였다.
그랬다. 주열의 머릿속에 여고생이란 한없이 여리고 보듬어 줘야 할 귀여운 생물체였다. 물론 한창 혈기왕성하고 철없을 나이니 팔팔하게 뛰놀면서 사고를 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마저도 어린 강생이들처럼 귀여운 맛이 있는 소녀들. 한데 눈앞의 그녀들을 보고 있자니 예전에 그 비유를 들은 마늘 님이 고등학생인 여동생이 생각난다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음…… 확실히 어떻게 보면 강아지 같긴 하죠. 비글이라든가.’
그때 말씀하시는 어감이 묘했더랬지. 텍스트상으로도 명백히 느껴질 만큼 의미심장한 뉘앙스였기에 그때의 대화는 아직도 생생했다.
새강 비글요? 아 그 귀 축 처진 애요? 되게 귀엽던데 딱이네요!
마늘 네 딱이죠? 잘 때는 귀여운 것까지 완전 똑같아요 ㅋㅋ
새강 아니, 안 잘 땐 안 귀엽냐고요 ㅋㅋㅋㅋㅋㅋ
마늘 음 그게ㅋㅋ 안 자도 귀엽긴 한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새강 앗, 그 표정 귀엽다 ㅋㅋ 무슨 문제요?
마늘 안 잘 땐 대체로 용서가 안 되더라고요:D
새강 으잌ㅋㅋㅋㅋㅋㅋㅋㅋㅋ
주열은 어째서 마늘 님의 말에 은근히 뼈가 있다고 느꼈는지 알 것 같았다. 이건 마치…….
‘개싸움이잖아.’
“너 이거 놔!”
“너 먼저 놓으라고 xx아!”
“악! 너 지금 나 물었어?!”
맙소사. 쟤네 진짜 물어. 걷잡을 수 없이 악화일로로 치닫는 사태를 관전하던 주열이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그가 황망함을 애써 떨쳐 내려 노력할 즈음, 잠잠하던 벤의 문이 예고도 없이 열리더니 시커먼 그림자가 주열에게로 돌진해 왔다. 만일 그것이 사람이라는 지각이 없었더라면 와일러로 간주하고 진즉에 때려눕혔을 테지만 벤 안에서 나온 것은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의 사내였다. 이름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으나, 주열은 굳이 그의 정체를 궁금해하지 않아도 되었다.
남자가 누구이건 지금만큼은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 물소라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했으니까. 사력을 다해 뛰는 그의 뒤로 두 무리의 여고생들이 지축을 울리며 추격해 왔다. 하나는 공일을 잡으려는 안티 무리, 다른 하나는 그녀들을 막으려는 팬 무리. 놀랍게도, 벤을 빠져나온 공일을 발견하자마자 그녀들은 방금 전까지 벌이던 난투의 승부마저 도외시한 채 그의 뒤를 쫓았던 것이다. 그리고 주열은 그것이 환영할 만한 일인지 선뜻 판단할 수 없었다. 그냥 다시 싸워 주면 안 될까?
“잡아!”
“오빠! 달려요!”
“밀지 마! xx 밀지 말라고!”
나한테 올 거면 그냥 너희끼리 싸우란 말이야. 교복을 입고 봉두난발을 한 물소 떼가 쇄도하는 광경은 주열을 질리게 하기 충분했다. 와일러를 상대할 때와는 다른 의미로 겁을 집어먹은 주열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쳐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