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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손님, 콩나물국밥 1인분 포장이요?”
“…….”
“손님?”
생각에 잠겨 점원의 말을 못 들은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의도적으로 무시하려 한 것도 아니었지만 서윤은 선뜻 입을 떼지 못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반쯤 자책하듯 던진 우문에 언젠가 들었던 영재의 현답이 잔상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넌 얼굴만 아니었으면 진짜 세상 피곤하게 살 타입이야. 알아?’
알아. 그때의 대답을 되뇌며 서윤이 입 안에서 혀를 지그시 깨물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한심하긴 했다.

‘진저 씨는 어쩌시려고요?’
발단은 막 멀어져 가는 진저를 불러 세운 서윤의 말이었다. 진저는 반문으로 답했다.
‘밖에서 드십니까?’
‘네? 아, 네. 오늘은 첫 촬영이라 감독님이 사신다고 하셔서요.’
‘다녀오실 때…….’
진저가 말을 하다 말고 무슨 이유에선지 입을 꾹 다물자 서윤이 오래 기다리지 않고 뒷말을 받았다. 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충동이 자꾸만 서윤을 조급하게 했다.
‘올 때 뭐 필요하세요?’
‘……삼각김밥,’
‘예?’
‘세 개 부탁드립니다.’
삼각김밥? 쟤가? 저 덩치가 어딘가에 쪼그려 앉아 삼각김밥을 먹는 모습을 상상하자 서윤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삼각김밥과 진저라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서윤은 석연찮은 얼굴로나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서윤 자신이 먼저 꺼낸 말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자꾸만 예상에서 벗어나는 진저 때문에 다른 대처가 어려웠다.
서윤이 본 진저라면 넌지시 회식에 끼겠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아예 먹을 걸 사다 달라고 할 줄이야. 여기까지만 했어도 그게 일에 대한 책임감 때문인지 대외용 보여 주기인지 분간이 어려웠을 텐데, 그 음식이라는 게 삼각김밥인 것은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진저가 원래 이런 캐릭터였나?

“손님…….”
“죄송합니다. 잠깐 생각하느라. 네, 포장해 주세요.”
“얼마나 멀리 가세요? 멀면 얼린 국물로 드릴게요. 요즘 날씨엔 금방 상해서…….”
“이 근처라 괜찮을 거예요. 그냥 따뜻하게 주세요.”
식사가 끝나고 조용히 옆으로 빠져 식사 포장 주문을 넣으면서도 서윤은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저 혼자 추측하고 싫어하고, 그게 괜히 미안해서 잘해 주고. 참 바보짓도 가지가지다 싶어 숫제 웃음까지 나오려는 찰나 휴대기에서 영롱한 알림음이 울렸다.
―New!
깜찍한 아이의 목소리에 서윤의 얼굴이 화색을 띠었다. 허겁지겁 휴대기를 꺼낸 서윤이 반짝반짝 빛나는 N자를 누르자 제법 깔끔하게 잘 만들어진 사이트가 떴다.

제목: 730902 천사를 만난 날
내용: 세상엔 정말 천사들이 많다. 하지만 오늘 만난 천사는 특별했다.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이를 걱정하고 신경 써 주는 천사였다. 비록 큰일이 아니라 끼니를 챙겨 준 것뿐이었지만 어찌나 고맙고 예쁘게만 보이던지. 이런 작은 천사들이 하루를 즐겁게 해주는 원동력이 아닐까? 나도 누군가에게 천사가 되고 싶다. 설령 그 누군가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또 어떠랴. 좋아하는 사람한테만 잘하는 건 천사가 아니라 사람인 것을. 그러고 보면 우리네 조상들은 천사가 되는 법을 잘 아셨던 것 같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면 그게 천사지 별건가? 어쨌든, 결론은 간단하다.
오늘은 기분이 좋다. 고마워요 M모님!

서윤의 손가락이 급히 움직였다.

마늘 짧지만 많은 걸 생각하게 해주는 일기네요 ㅎㅎ 처음부터 끝까지 신나신 게 보여서 제가 다 훈훈하고 ㅋㅋㅋ 그나저나 천사를 만나셨다니 오늘 복 받으신듯! 기분 좋은 하루가 되시겠어요. 부럽네요ㅜㅜ 저는 비록 천사를 만나진 못했지만 제가 한번 천사노릇 좀 해 보렵니다. 사실 아주 내켜서 주는 떡이 아니라서 반쪽짜리 천사긴 하지만^_ㅜ 언젠간 저도 쿨하게 미운 놈 떡 하나 더 줄 수 있는 천사가 됐으면 좋겠어요.

서윤은 몇 번이고 제가 쓴 코멘트를 확인했다. ‘ㅋ’의 갯수와 이모티콘, 토씨 하나까지 꼼꼼히 확인한 뒤에야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서윤이 등록 버튼을 눌렀다.
“손님, 주문하신 콩나물국밥 1인분 포장 나왔습니다.”
서윤은 한결 상쾌한 기분으로 점원이 건네주는 종이봉투를 받아 들었다. 국물이 들어 묵직한 짐이었는데도 어쩐지 가볍기만 했다.

모두가 떠난 사이, 주열은 세트장 주변을 배회하며 시간을 때웠다. 왜 이렇게 늦지. 밤까지 촬영이 있댔으니까 술을 마실 리도 없을 텐데. 배가 고파질수록 그가 시계를 들여다보는 간격이 짧아졌다. 마침내 주열이 스스로의 상태를 ‘배고픔’에서 ‘굶주림’으로 수정하기에 이르렀을 때, 누군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서윤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어쩌고 혼자서만 온 걸까. 의아하게 서윤을 살피던 주열은 그의 손에 들린 종이봉투 어디에도 제가 기대한 편의점 마크가 찍혀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다. 설마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주열은 덜컥 불안해졌다. 원체 새가슴인 탓에 촬영 장비가 고스란히 있는 세트장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여태 기다렸건만 자칫하면 쫄쫄 굶을 판이었다. 쪽팔린 걸 무릅쓰고 부탁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주열의 눈에 천사에 대한 배신감이 깃들려는 순간이었다.
“많이 기다리셨죠? 드세요.”
이게 뭔데요. 뭔지도 모르는데 덥석 받기가 꺼려졌던 주열이 봉투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콩나물국밥이에요. 방금 가져와서 아직 안 식었을 테니까 어서 드세요.”
어서, 하면서 진저의 가슴팍에 봉투를 덥석 안겨 준 서윤은 진저가 봉투를 열어 보는 것을 보고서야 모든 마음의 짐을 벗은 듯 가뿐해졌다. 역시 그분의 말씀이 맞았다. 눈 딱 감고 ‘천사’노릇을 하고 나니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떠넘긴 것처럼 속이 후련했다.
“값은…….”
“아, 제가 사는 거예요.”
내가 너 떡 하나 더 주는 거라니까. 서윤이 이론의 여지가 없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
천사다. 천사가 나타났다. 차마 형언할 수 없는 감격에 주열이 눈빛으로 찡한 마음을 전했다. 물론 서윤에게는 닿지 않았다. 닿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서윤은 그 묵시默視에 불안한 기분까지 들었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걸까. 가뜩이나 저를 보는지 안 보는지도 알기 어려운 판에 말까지 없으니 진저 혼자 딴생각을 하는 건지 자신을 보고 있는 건지 알 도리가 없었다. 판옵티콘이 따로 없군. 보든 안 보든 불편해 죽겠으니. 서윤이 속으로 혀를 찼다.
“삼각김밥만으론 모자라실 것 같아서…….”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변명하듯 덧붙인 말에 진저가 수긍했는지 고개를 까딱였다. 서윤은 안도하는 것과 동시에 심술이 솟았다. 왜 남 좋은 일 하는데 제가 눈치를 봐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타이밍 좋게 들려온 말에 뾰족해지려던 서윤의 눈빛이 도로 누그러졌다. 그래도 고마운 걸 바로바로 말할 줄은 아는 모양이네. 예의를 중시하는 서윤에게 그 점은 명백한 플러스 요소였다. 덕분에 서윤은 큰 노력 없이도 한층 너그러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뭘요. 그럼 열쇠 가진 스탭분 오실 때까지 저흰 저기에 앉아 있을까요? 진저 씨 그것도 드셔야 하고.”
세트장 근처의 벤치를 가리킨 서윤이 동의를 구하듯 진저에게 눈짓을 하고는 먼저 가서 자리를 잡았다. 서윤을 따라 벤치에 앉은 주열이 봉투 안에 든 용기들을 주섬주섬 끄집어냈다. 따뜻한 국물이 더울 것도 같았지만 이미 해가 다 진 마당이라 참을 만한 수준이었다. 마지막으로 수저를 꺼내 든 주열은 설레는 마음으로 밥을 크게 한술 떴다. 아니, 뜨려 했다.
“……?”
눈앞에 보인 어떤 물건만 아니었다면. 주열의 시선이 ‘그것’을 집어 드는 누군가의 손으로, 그리고 그 손의 주인에게로 옮겨 갔다. 서윤이 ‘그것’을 휴대기에 꽂으려다 말고 진저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진저 씨?”
“그거…….”
“아, 아세요?”
서윤의 얼굴이 갑자기 확 밝아졌다. 눈에 띄게 반가워하는 서윤을 향해 차마 거짓을 고할 수 없던 주열이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책 읽어 본 적 있으세요?”
“어…… 없습니다.”
그래, 읽은 적은 없지.
“그래요? 그거 안타깝네요.”
내가 썼으니까.
“정말 재미있거든요. 좋아해요, 이 소설.”
서윤의 손에 들린 것은 그의 처녀작 ‘얼어붙은 왕좌’의 한정판 저장 칩이었다. 주열의 희멀건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다녀왔습니다.”
알싸한 밤의 정적을 뚫고 주열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온종일 긴장한 몸 여기저기 쑤시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것도 하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그렇게 자위하며 여느 때처럼 옷을 훌렁훌렁 벗어 던지던 주열의 머릿속에 잊고 있던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아 맞다. 나 얼왕 빌려 왔는데. 그와 동시에 거꾸로 뒤집힌 바지가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주열의 시야를 가로질러 방 한구석으로 날았다. 주열이 다급한 몸짓으로 날아가려는 바지자락을 부여잡았으나,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목적했던 물체는 거꾸로 들린 바지 주머니에서 흘러나와 그대로 곤두박질쳤다.
헉!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른 주열이 제 손가락 한 마디만 한 그것을 집어 들었다.
‘The Frozen Throne’
시린 제목과 달리 검붉은 색채가 어지러이 뒤섞인 저장 칩 표면에 다행히도 생채기는 없었다. 주열은 그 사실을 몇 번이고 확인한 뒤에야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물론 예의 저장 칩은 손 안에 소중히 감싸 쥔 채였다.
“큰일 날 뻔했네.”
남의 물건을 빌려 놓고 망가뜨리는 몰염치한 짓은 새가슴인 주열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상대가 흠집 하나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서 다뤄 온 물건이라면 더더욱. 원래대로라면 그게 어떤 물건이든 행여 망가뜨릴까 두려워 빌리기는커녕 손도 대지 않았을 터였다. 하물며 그 대상이 제가 쓴 소설인데 더 말할 나위가 있을까. 처음부터 빌릴 이유조차 없는 물건인 것을.
하지만, 결과적으로 주열은 서윤의 부드러운 권유를 이겨 내지 못했다.
‘그러지 말고 한번 읽어 보세요.’
겨우 그 한마디에 홀랑 넘어간 자신이 멍청이고 등신이었다. 어쩌자고 이걸 가져와서는! 손에 들린 한정판 저장 칩을 원망스레 흘기던 것도 잠시, 주열의 눈초리가 다시금 사흘 밤낮 푹 고아 낸 사골국 건더기같이 흐물흐물 풀어졌다. 그의 눈앞에는 이미 찬찬히 저를 살피던 서윤의 얼굴만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래, 그 얼굴만 아니었어도.
작가로서의 뿌듯함이니 독자에 대한 고마움 같은 건 다 핑계일 뿐이었다. 그 얼굴이 부탁하는데 어떻게 거절을 해. 보증만 빼고 뭐든지 다 해 주고 싶게 생겼단 말이야. 변명하듯 스스로를 정당화하던 주열은 자신이 얼빠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가 되었음을 불현듯 깨달았다. 말도 안 돼! 그는 침대에 누워서도 진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끙끙거리며 몸을 뒤척였다.
설사 그게 사실이더라도 나는 후천적인 얼빠야. 그 사람이 너무 잘생겨서 넘어간 것뿐이지, 원래부터 이렇진 않았다고. 그것이 주열이 기억하는 마지막 자기변호였다.

다음 날 아침, 모자란 잠 때문에 눈이 붓고 화장이 뜬 여배우들이 무색하게도 서윤은 여전히 반짝반짝 빛이 났다. 적어도 주열의 눈에는 그랬다. 사실 본연의 미모보다는 주열의 주관적인 심미안과 그 안에 강하게 자리 잡은 ‘마서윤=천사’의 등식이 큰 작용을 했으나 애석하게도 주열의 편중된 의견을 지적해 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좋은 쪽으로) 단단히 오해를 받는 당사자인 서윤마저도. 모두 주열의 선망 어린 시선이 블러택으로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진저 씨, 좋은 아침이에요.”
주열에게는 어제 처음 본 굉장한 미남, 그것도 이름을 모르면 와일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톱스타에게 넉살 좋게 ‘여어, 좋은 아침!’ 하며 손을 흔들 배짱은 없었다. 가뜩이나 얼굴을 넋 놓고 보던 게 들켰나 싶어 속이 뜨끔했던 그가 잠자코 고개를 주억거리자 서윤의 뒤에서 영재가 들으라는 듯이 투덜거렸다.
“거 인사를 하면 오는 게 있어야지, 원 벙어리도 아니고…….”
“형.”
서윤의 차분한 제지에도 불구하고 만성비염 환자라도 된 양 연신 흥흥거린 영재가 둘을 뒤로한 채 저만치 먼저 걸어갔다. 척 보기에도 진저와는 마주치기 싫다는 투였다. 저런, 환절기 감기인가. 주열은 영재의 땅딸막한 뒷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책은 읽어 보셨나요?”
기실 서윤도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영재의 부루퉁한 태도―보통은 노총각의 귀여운 투정 정도로 넘어가곤 하는―가 거슬렸는지 멀어져 가는 그를 빤히 쳐다보는 진저의 주의를 돌리는 것이 목적이었으니까. 그래서 서윤은 진저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읽으셨다고요?”
“예.”
“그 시간에요?”
“……예.”
정말이지 의외였다. 어제 촬영이 끝난 것은 밤늦게였고, 진저는 잠을 쪼개어 가며 책을 읽을 정도로 열정적인 독서가로 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그게 겉으로 봐서 보이는 건 아니지만 정말 의외인데. 제 안의 관념과 현실의 괴리를 맞닥뜨릴 땐 항상 그래 왔듯 서윤이 진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진저가 판타지소설을 좋아하나? 가장 먼저 떠오른 가설이었으나 서윤은 이내 그것을 부정했다. 판타지소설 팬인데 어떻게 얼왕도 안 읽어 볼 수가 있어. 말도 안 되지. 지극히 주관적이고 터무니없는 이유로 ‘진저 판타지 마니아 설’을 기각한 서윤이 다시금 납득할 만한 이유를 추측할 동안 주열의 얼굴은 시시각각 죄지은 자의 그것으로 변해 갔다.
왜 저렇게 보는 거야. 혹시라도 거짓말이 들통났나 싶어 주열은 속이 뜨끔했다. 어쩌지. 지금이라도 사실은 못 읽었다고 고백을 할까? 아니면 전에 읽은 적이 있다고 말할까? 갈팡질팡하는 진저를 기묘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서윤이 문득, 어딘지 우쭐한 얼굴을 했다. 착각인가 싶어 주열이 고개를 갸웃거리려는 찰나 서윤이 주열의 의문을 말끔히 걷어 냈다.
“안 빌리신다더니, 재미있으셨나 봐요.”
얼마나 재미있었으면 판타지소설을 좋아하지도 않는 진저가 새벽까지 책을 읽었겠어. 하긴, 우리 새강 님이 워낙 존잘이시긴 하지. 스스로의 확신이 사실과 멀어도 한참 멀다는 것도 모른 채, 서윤의 목소리는 밝다 못해 자못 의기양양하기까지 했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으나 서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나자 주열은 제 얼굴이 다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아, 뭐야. 저 사람 나중에 내가 작가인 거 알면―물론 밝힐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엄청 쪽팔릴 텐데 어쩌려고 저래. 왜 자기가 저렇게 자랑스러워하는 거냐고. 그런 서윤이 민망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이 다른 독자에게 사랑받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우쭐해하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던 나머지 주열은 무심코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속을 알지 못하는 서윤에게 있어, 미동도 없는 상대에게서 들려온 바람 빠지는 소리는 그저 흔한 비웃음 소리에 불과했다.
서윤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어 들었다. 새벽까지 책을 읽은 걸 보면 제가 추천한 책이 오죽 마음에 들었을까 싶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건넨 말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무례한 반응이 되돌아올 줄이야.
“……하.”
잠시 기대했더니 바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라 서윤이 허탈하게 웃자 주열은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지? 뭘 실수한 거지? 정확한 연유는 알 수 없었지만 뭐라도 말을 해야겠다는 의무감에 주열이 되는 대로 입을 열었다.
“그 소설, 정말 좋아하시나 보다 싶어서 웃은 겁니다.”
그 말을 가벼운 미소와 훈훈한 어조로 건네었다면 ‘어휴 뭘요. 겨우 여덟 번 정독했을 뿐인데요.’ 하는 대답과 함께 따사로운 덕토크의 장을 열었을 터였으나 안타깝게도 진저의 표정은 서윤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았고, 마음만 급했던 주열의 말은 너무나 빠르고 무미건조했다. 게다가 미처 완전히 걷히지 않아 살짝 곁들여진 웃음기까지. 누가 듣기에도 무성의한 겉치레에 불과한 변명이었다.
‘아, 판타지 소설이에요? 서윤 씨, 그런 거 좋아하시나 봐요.’
비주류 문화 팬으로서 하루 이틀 설움을 겪어 본 게 아닌 서윤에게 진저의 대응이 위와 일맥상통하는 ‘너 판타지 좋아해?’의 수많은 베리에이션 중 하나로 받아들여진 것은 어쩌면 당연지사였다.
서윤의 얼굴이 전에 없이 냉랭한 빛을 띠자 주열은 더욱 당황했다. 그러니까, 잘생긴 형, 제가 그런 뜻이 아니라. 주열의 속이 급해질수록 말은 무디고 더디어졌다.
“그게 웃을 일인가요?”
“그런 걸 좋아하실 것 같지 않아서……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그런 게 뭔데요?”
간신히 쥐어짠 대답에도 상대가 누그러지는 기색이 없자 주열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판타지. 판타지를 뭐라고 하지. 뭔데. 뭐라고 해야 하는데. 판타지소설 작가 주제에 판타지를 모국어로 말할 줄 모르는 답답한 머리를 대신해 주열의 입이 가장 유사한 표현을 순발력 좋게 골라냈다. 자타공인 무거운 입답게 일을 쳐도 거하게 친다며 도원에게 곧잘 구박받곤 하던 주열의 표현력이 오늘도 빛을 발했다.
“현실에 없는, 허무맹랑한―”
“―예, 좋아합니다.”
아직은 싫어해서는 안 되는 상대였고, 따라서 정당하고 공평하게 대해야 할 이였다. 그 원칙을 완고히 고수해 온 서윤도 평정을 잃을 때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그의 금쪽같은 컬렉션에 대한 모욕을 들었을 경우였다. 서윤은 진저의 입에서 제가 가장 싫어하는 수식어들이 연이어 나오자 그만 참지 못하고 그의 말허리를 뚝 잘랐다. 그것이 예의를 도외시한 짓이었다는 것을 자각하자 서윤의 기분은 더욱 저조해졌다.
“그래서요? 그게 그렇게 웃으실 일인가요? 저는 별로 우습지 않은데요.”
그림으로 그린 듯 우아하기 그지없는 무표정 너머로 날을 세운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주열은 어쩔 줄 모르고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었다. 아, 어쩌지. 긴장했을 때의 버릇처럼 손을 꼼지락거리려던 주열은 시선을 아래로 향하는 서윤을 보고는 얼른 주먹을 쥐어 제 손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바로 그때였다.
“서윤아! 잠깐 이쪽으로…… 뭐해? 무슨 일 있어?”
저만치 떨어져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스탭들과 옹기종기 모여 뭔가를 의논하던 영재의 마지막 말에 모두의 시선이 진저와 서윤의 대치에 쏠렸다. 주열은 언제나의 고질병처럼 시선의 쇄도에 꼼짝없이 얼어붙었고, 주먹을 단단히 쥔 채 서윤을 빤히 바라보는 진저와 불쾌한 듯 시선을 내리깐 서윤의 모습은 가십에 목마른 이들의 상상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대로 있어 봐야 구경거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자각한 서윤은 진저에게서 눈길을 거두고는 천천히 몸을 돌려 영재에게 향했다.
“너네 혹시…….”
싸웠어? 서윤이 가까워지자마자 득달같이 물으려던 영재가 눈살을 찌푸리는 서윤을 보고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저 표정은 패턴 3, ‘형은 제발 입 좀 다물어’였으니까.
근데 아니면 왜 진저랑 그러고 있었던 걸까. 혹시 진저가 우리 마 배우한테 시비 턴 건 아니겠지? 설마. 서윤이가 지한테 얼마나 잘해 줬는데. 어제 밥도 사 주고 지가 그렇게 좋아서 죽고 못 사는 생강인가 새강인가 하는 작자 소설도 빌려줬댔는데 대체 뭔 일이여.
궁금한 걸 못 참는 성미대로라면 열 번이라도 더 멱살을 쥐고 진실을 토해 내라 다그쳤겠지만 진저도 서윤도 영재에게 만만한 상대가 못 되었다. 하는 수 없이 눈치만 슬금슬금 보는 영재와 마찬가지로 차마 당사자에게 사건의 진상을 물을 수 없던 사람들이 저마다 의미 없는 귀엣말만 속닥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