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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낼모레면 서른인 남자가 애처럼 구는 모양새를 보며 또다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 서윤이 불쑥 입을 열었다.
“왜 꼭 진저래?”
영재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걔가 그래도 일은 제일 잘하잖아.”
“잘하는 게 아니라 많이 하는 거겠지.”
많이, 하고 힘주어 내뱉는 서윤의 어조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영재가 실실 웃으며 서윤의 어깨를 툭 쳤다.
“너무 미워하지 마.”
“미워하는 거 아닌데.”
고지식하게 대답하는 서윤의 말에 배인 고집에 영재가 허허 웃어 버렸다.
하긴, 진저라면 서윤이 싫어할 만한 타입이긴 했다. 일과 윤리의식, 예의에 있어서만큼은 완벽주의자라는 말이 손색이 없는 서윤에게 좋게 말해서 쿨하고 나쁘게 말해서 싹수없는 히어로 진저는 영 상성이 맞지 않는 상대일 게 뻔했으니까.
게다가 성격적인 면은 차치하더라도 진저는 이미 다른 면에서 서윤에게 단단히 미운털이 박힌 차였다. 그게 언제였더라. 아이즈 광고 찍을 때였으니까……. 몇 달도 더 된 기억을 더듬던 영재의 머릿속에 티 나지 않게 눈살을 찌푸리던 서윤의 모습이 떠올랐다.
‘진저 씨……랬나요. 그분은 왜 아직도 안 오시죠?’
곧 촬영인데 이렇게 늦으면 어쩌자는 거야. 굳이 말로 내뱉지는 않았으나 프로답지 못한 언행에 질색하는 서윤을 잘 아는 영재는 그의 속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즈 시스템을 홍보하는 차원에서 찍는 공익광고였기에, 그 자리에 모인 히어로들은 물론이고 서윤 자신도 보수 한 푼 없이 임하는 촬영이었다. 한데 제법 유명세를 탄 히어로들이 모두 도착하는 중에도 정작 기대했던 빨간 머리는 촬영이 임박하도록 나타날 기미가 없으니 당연히 서윤으로서는 탐탁지 않을 법도 했다. 그런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즈측 관리자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진저 씨는 이런 일은 안 하시는 주의시라서요.’
명색이 사람을 구하는 히어로면서 돈이 되지 않는 일에선 발을 뺀다? 매일같이 출동할 정도로 시간 여유가 충분한 작자가? 잠시 어리둥절하던 모두의 머릿속에 동시에 똑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피도 눈물도 없는 유능한 히어로라더니 과연!
서윤은 거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했다. ‘히어로 자격도 없는 사람이군.’
아무리 능력이 좋아 와일러를 누구보다도 많이 퇴치해 낸 히어로라 해도, 기본적으로 사람을 위하려는 마음이 없고서야 그저 위선일 뿐이다. 히어로라는 이름이 아깝지. 히어로들을 존경하고 열렬히 응원하는 톱스타 마서윤은 진저를 그렇게 평했다. 그리고 그 섬세한 눈매 아래로 침잠하는 서윤의 생각을 귀신같이 알아챘던 것은 다름 아닌 영재였다.
아, 혹시 무슨 일 생기는 건 아니겠지. 과거의 회상에서 깨어난 영재는 곧 있을 진저와 서윤의 만남을 생각하자 덜컥 걱정이 솟았다.
제발, 제발 진저가 세간에 알려진 것보단 싸가지를 겸비한 놈이길. 이제 남은 날짜는 겨우 사흘. 영화 <흑주黑晝>의 크랭크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마서윤입니다.”
아무리 진저가 인간적으로 제 마음에 드는 부류가 아니라 해도, 고작 그런 걸로 기본적인 예의를 건너뛰는 것은 서윤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게다가 어차피 공적인 관계 아닌가. 진저 덕분에 촬영장이 안전하게 보호받고 무사히 촬영을 마친다면 그걸로 된 일이니 서윤이 부러 진저와 마찰을 빚을 필요는 없었다.
그런 연유로, 서윤은 8년차 배우의 관록을 톡톡히 발휘하며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인사를 건넸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호의가 담긴 목소리며 우아한 미소, 부드럽게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손의 움직임까지 무엇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완벽에 가까운 것은 그의 얼굴이었지만.
곁에 섰던 영재가 매일 보는 면상인데도 좀처럼 익숙해지질 않는다며 남몰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바람에 영재는 온 스텝들의 시선이 서윤과 주열에게로 집중되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의 눈이 점차 경악, 충격 혹은 그 비슷한 색으로 물들고 있다는 것도.
“……진저 씨?”
서윤의 목소리가 재차 들려온 뒤에야 영재는 서윤이 진저에게 손을 내민 지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윤이 가벼운 한숨과 함께 손을 도로 물리기에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치는 시간이. 주변의 스텝들이 잔뜩 목소리를 낮추고 수군거렸다. ‘헐, 지금 진저가 마서윤 인사 씹은 거야? 대단하다 진짜.’ 때마침 귀에 들어온 누군가의 말에 영재는 십분 공감했다. 그래, 어떤 의미에선 대단하지.
모델 2년 배우 8년, 도합 10년간 서윤의 매니저 일을 하면서 별별 잡놈은 다 봤다고 자부하는 영재였지만 천하의 마서윤을 면전에서 뿌리치는 놈은 처음이었다. 저건 악플 걱정도 안 되나? 마서윤 이름값이 얼만데 마녀사냥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제가 다 불안한 마음에 진저의 얼굴을 힐끗 살핀 영재는 이내 간과하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아 맞다, 쟤가 누군지도 모르지.
“…….”
“…….”
한참의 침묵이 흐르고, 지켜보던 이들의 긴장감이 슬슬 고조되는 가운데 얼결에 서윤과 진저의 첫 대면을 지근거리에서 관람하게 된 영재만 속이 타들어 갔다. 말없이 보고만 있는 걸 보면 서윤도 마냥 즐겁지는 않은 모양이었으나 이미 배우의 가면을 쓴 얼굴에서 영재가 더한 것을 읽어 낼 수는 없었다. 물론 그놈의 블러택인지 뭔지로 얼굴을 감춘 진저도 속내는커녕 겉꺼풀조차 보이질 않으니 이해할 수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아, 어색해 미치겠네. 머리 뒤꼭지를 벅벅 긁은 영재가 앞으로 한 발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진저입니다.”
너 방금 말했니? 구경꾼들은 물론이고 코앞에서 진저와 얼굴을 마주하고 섰던 서윤마저도 일순 움찔했다.
받아야 할 당연한 인사를 받은 것뿐인데―그마저도 상당히 부족한―왜 이렇게 생소하고 예기치 못한 기분이 드는지 의아해하던 서윤은 이내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야, 근데 진저 말할 줄 알았어?’ 영재가 옆에서 속없이 속삭였다.
아이즈에 ‘진저’만 쳐도 줄줄이 쏟아져 나오는 그의 와일러 퇴치 영상들 중에도 정작 진저의 목소리가 담긴 것은 하나도 없었다. 말은 고사하고 흔한 기 합성조차 없어서 오죽하면 진저가 벙어리가 아니냐는 의혹까지 나왔을까. 그뿐만이 다가 아니었다. 180을 훌쩍 넘는 덩치와 달리 계집애 같은 목소리인 건 아니냐는 악의 섞인 낭설은 물론이고 외국 출신이라 한국어를 모른다, 혀가 짧아 발음이 어눌하다, 사투리가 무형문화재급이다 등 별별 추측이 나돌았다.
하지만 그토록 꽁꽁 감췄던 것치고 진저의 목소리는 지극히 평범했다.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냥 옆집 총각 목소리. 오히려 너무 특징이 없어서 이상할 정도였다. 이럴 거면 왜 그렇게 숨겼대? 들어도 누군지도 모르겠구만. 영재가 닉네임만 덜렁 내뱉고 돌아서서 제 갈 길을 가는 진저의 뒷모습을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쫓았다.
그런 영재에게 서윤이 이럴 줄 몰랐냐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게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했잖아. 정말이지, 예쁘게 봐 주려고 해도 어디 한군데 예쁜 데가 없었다.
“아, 아까워. 아까 녹음이라도 하는 건데.”
“맞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사건도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겠다, 도로 시끌벅적한 활기를 되찾는 세트장에서 뒤늦게 발을 동동 구르는 이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서윤은 괜히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래 봤자 히어로가 아니라 괴물 사냥꾼에 불과한 사람이다. 그것도 몹시 무례하고 신비주의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 그런 사람을 왜 저렇게들 못 좋아해서 안달인지. 남의 호불호에 간섭할 마음은 없었지만 서윤이 보기에 진저는 그가 받아야 할 것보다 과한 사랑과 동경을 받고 있었다. 애석한 일이었다.

한편, 세트장을 안내하는 잡무보조 하나를 따라 걸음을 옮기는 내내 주열은 언제 말을 했었냐는 듯 침묵을 고수했다. 그의 머릿속을 가득 메운 것은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방금 만난 마서윤, 나머지 하나는 그에 대한 짤막한 소감.
‘존나 잘생겼다.’
좀처럼 험한 말을 입에 담지 않는 그였지만 방금은 하마터면 입 밖으로 낼 뻔했다. 그만큼 서윤에게서 받은 비주얼쇼크가 컸던 탓이다. 오죽하면 인사하는 것도 잊고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을까. 주열 저는 미추에 무감한 편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방금 전의 제 반응을 생각하면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설마 내가 얼빠였단 말인가?
주열은 평생 저와는 거리가 멀 거라 생각한 단어를 떠올리고는 충격을 받았다. 말도 안 돼. 이제까지 누구 얼굴에 혹해 본 적이 없었거늘. 주열은 스스로가 외모에 현혹되는 부류임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주변인의 외모를 폄하하는 쪽을 택했다. 그래, 3급수 메기들만 보다가 갑자기 수질이 달라지니까 괜히 혹한 걸 거야. 나이 스물둘이 되도록 만나 온 모든 이들을 한순간에 저급수 생선으로 치부하면서도 주열은 당당했다. 어떻게 걔들이랑 마느님이 같은 생물종일 수 있어. 사람들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서윤을 마느님, 마느님 하는 것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아니, 잘생기면 잘생긴 거지 무슨 유난을 저렇게 떨어.’
딱 사흘 전, 자기 잘난 맛에 살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안도원까지 마서윤을 가리켜 ‘마느님’ 운운하는 것을 듣고 주열이 내뱉었던 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얼굴 하나 반반한 것 가지고 가지가지 한다 싶었는데, 막상 실제로 서윤을 보고 났더니 마느님 소리가 절로 튀어나온다. 아 진짜 미쳤나 봐. 어떻게 그렇게 생길 수 있지. 주열은 남자의 얼굴이 아름답다고 느낄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심지어 여자 같은 얼굴도 아닌데! 주열은 그것이 새삼 충격이었다.)
경국지색이라 했던가. 얼굴발로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미인의 고사를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라도 만일 서윤이 나라를 주십사 청한다면 공손히 세계지도부터 대령할 테니까. 네 형, 말씀만 하세요. 아시아가 좋으세요 고객님?
“진저 씨! 다 봤으면 이쪽으로 좀 와요.”
반쯤 넋을 놓은 채 걸어가던 주열을 부른 것은 최 감독이었다. 열렬히 손짓을 하는 그를 돌아본 주열은 온 배우들과 스탭들이 감독의 곁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길래 저러지? 슬며시 솟는 호기심을 억누르며 다가가자 감독의 두툼한 뱃살 뒤에 감춰져 있던 돼지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아하니 주열이 세트장을 한 바퀴 돌고 오는 사이 고사라도 지낸 모양이었다. 돼지의 입과 귀에는 요즘엔 잘 들고 다니지도 않는 지폐가 잔뜩 꽂혀 있었다. 저거 다 진짜 돈일까? 주열은 그 와중에도 그게 궁금했다.
“진저 씨도 앞으로 우리랑 한솥밥 먹을 사인데 절 한 번은 해야지.”
넉살 좋은 제안의 이면에는 못된 아이 같은 호기심이 배어 있었다. 과연 진저가 절을 할까? ‘그’ 진저가?
감독을 필두로 한 흥미로운 눈빛들에 고스란히 노출된 주열은 돼지머리와 함께 이글이글 구워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블러택 아래 가려진 주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들었다. 아무리 히어로의 꺼풀을 쓰고 있어도 소시민 진주열의 알맹이는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었던 탓이다. 히어로 신분이 된 것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닌데도, 주열은 이렇듯 모두의 관심의 대상이 될 때마다 잔뜩 겁을 집어먹곤 했다.
주열이 못 박힌 듯 서서 눈치를 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어느샌가 조용히 시작된 내기는 점차 그가 절하지 않는다 쪽으로 판돈이 쏠리기 시작했다(‘아, 이러면 안 되지!’ 혼자서만 진저가 절을 한다 쪽에 돈을 걸었던 영재가 심통을 냈다).
“같이 할까요?”
그 제안에 가장 놀란 것은 서윤 자신이었다. 내가 왜 그랬지?
서윤이 스스로에게 반문하는 것과 동시에 진저의 고개 역시 서윤 쪽으로 휙 돌아갔다. 서윤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흐릿하게 뭉개진 진저의 시선이 제게 닿아 있다는 것이 똑똑히 느껴졌다. 그 시선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몰랐으나 최소한 고마움만은 아니길 바랐다. 실제로 진저에 대한 호의가 아니라 서윤의 자기만족에서 나온 행동이었으니까.
서윤은 진저가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진저가 말 그대로 저자세가 되는 것을 모두가 흥미롭게 구경하는 이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다. 진저에게 미안해서? 글쎄. 서윤 스스로도 그 불편함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정확히 꼬집을 순 없었으나, 지금의 분위기에 동조한다면 반듯하다 못해 결벽증적인 제 윤리의식이 양심을 쿡쿡 찔러 대리란 것만은 확실히 알았다. 개인적인 감정으로, 혹은 막연한 군중심리로 누군가를 약자의 위치로 내모는 것은 서윤이 가장 경멸하는 것들 중 하나였으니까. 물론 누구도―심지어 말을 꺼낸 감독조차도―진저에게 그만한 악의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서윤은 이 찜찜한 기분을 참아 내고 싶지 않았다. 어떤 의도에서였든 상대를 곤란케 하고 그것을 즐거워하는 장난은 서윤의 취향이 아니었으니까.
또한 놀랍게도, 진저는 충분히 곤란해 보였다. 적어도 서윤의 눈에는 그랬다.
“…….”
말없이 돼지머리를 내려다보는 진저의 셔츠 깃 사이로 잔뜩 긴장한 목울대가 도드라졌다. 기분이 나빠서일까, 아니면 난감해서일까. 이성은 전자를 말했지만 서윤은 자꾸만 후자로 기우는 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좌중에 진저만큼 시야가 높은 이는 서윤뿐이었기에, 그 조용한 긴장의 표출을 눈치챈 것 또한 그뿐이라는 사실이 서윤에게 어떤 의무감을 불러일으켰다. 영재가 서윤에게 ‘얼굴만 아니었으면 세상 피곤하게 살 타입’이라며 혀를 끌끌 찼던 의무감이었다.
먹기 싫은 음식이지만 편식을 하고 싶지 않아 억지로 꾸역꾸역 삼키는 모범생, 그것이 세상이 모르는 ‘내면이 아름다운 배우’ 마서윤의 실체였다.
“진저 씨가 하기 싫은가 보네.”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최 감독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 소리에 번쩍 정신을 차린 주열은 그제야 제가 얼빠진 낯짝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블러택이 아니었으면 큰 망신을 살 뻔했다. 그러라고 있는 블러택이 아닐 텐데, 하며 비꼬는 도원의 목소리가 귀에 어른거렸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매력적인 제안을 해 온 것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서윤이었다. 주열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저 사람은 천사인가?’
사실 아무도 몰라줘서 그렇지, 좌중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무언가를 하는 것은 주열에게 너무도 어려운 과제였다. 정확히는 어렵다기보다 부끄러운 거였지만. 그나마 와일러를 퇴치하는 건 보람찬 일인 데다가 떨어지는 이득도 있으니 참는다손 치더라도 그 외의 것들은 죽어도 싫었다. 이를테면 돼지머리에다 절하기 같은 것들. 납작 엎드려 모두에게 제 뒤태를 과시할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얼굴이 달아오를 것 같다.
싫어. 절대 안 해. 그 마음이 워낙 절실했던 탓일까. 주열의 반응은 그가 의도한 것보다 훨씬 반사적이고 또 즉각적이었다.
“싫습니다.”
서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말꼬리를 가로채듯 이어진 대답에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오늘만 두 번째로 진저에게 감탄했다. 실로 독보적인 싸가지로고.
최 감독은 사람 좋게 허허 웃어 보였으나 못내 무안한 기분을 떨치지 못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는 품 안에 고이 접힌 딸의 손수건을 떠올리고는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래,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르지. 처음부터 사인을 해 달라고 덤볐다가 퇴짜를 맞느니, 진저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간접적으로나마 배우고 다음 기회를 기약하는 게 나았다. 안 그랬다간 오랜만에 뺨에 뽀뽀까지 해 가며 애교를 부리던 딸의 얼굴이 야차처럼 변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감상해야 할 테니까.
아무래도 근시일내로 진저의 사인을 받기는 어려울 거라 판단한 최 감독은 마음의 여유를 갖기로 했다. 앞으로 촬영만 몇 달인데 설마 진저라고 기분 좋을 날이 하루도 없을까. 현명한 판단이었다. 다만, 진저가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찔러보기 전엔 모른다는 게 문제였지만 최 감독은 그 부분에 대해선 생각하는 것을 피했다. 오래 지내다 보면 저도 사람인데 티가 나겠지. 그의 희망사항이었다.
막상 촬영이 시작되자 정작 주열은 할 일이 없었다.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하자니 너무 지루했지만, 그렇다고 뭔가 딴 짓을 하자니 농땡이 피우는 것 같아서 마음에 걸렸다. 딜레마였다.
게다가 ‘진저’의 모습을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노출시키는 것은 처음이라 주열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전전긍긍했다. 진주열에 대한 사소한 단서라도 흘릴까 봐 걸음걸이와 앉은 자세, 물 마시는 습관 하나하나까지 주의한 지도 몇 시간째. 주열의 머릿속에는 차라리 와일러를 때려잡는 게 이보다는 낫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도저히 못 견디겠다 싶었을 즈음, 주열은 아끼고 아낀 ‘순찰’이라는 핑계거리를 써먹기로 결심하고 조용히 건물 입구로 향했다.
마악 문밖으로 몸을 빼내려는 그를 포착한 것은 자신의 촬영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서윤이었다. 흘끗 옆을 돌아본 그는 마침 여배우가 낸 NG 때문에 웃느라 정신이 없는 영재를 확인하고는 진저에게 다가갔다.
“진저 씨, 어디 가세요?”
일순 얼어붙은 듯 정지했던 진저가 고개만 돌려 서윤을 향했다. 안개가 낀 얼굴이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 것 같아서 서윤은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였다. 우연히 보여서요.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데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는 그 자신도 몰랐다.
정말 우연이었나? 서윤의 안에서 울린 질문에 그와 꼭 같은 목소리가 답했다.
아니.
서윤은 인정했다. 아까부터 카메라 앞에 서는 순간을 빼놓고는 줄곧 진저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
진저는 여전히 말을 아꼈다. 아니, 말문이 막힌 걸까. ―변명거리가 없어서? 비뚜름한 추측이 고개를 드는 순간, 서윤은 방금 전의 제 자인自認이 부정확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정하자. 서윤은 단순히 진저를 보는 것을 넘어 관찰하고 있었다. 과연 그가 정말로 저의 설익은 판단처럼 ‘히어로 자격도 없는’ 사람인지 명확히 하고 싶었기 때문에.
진저에 대한 서윤의 호불호는 분명 불호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진저가 히어로로서 중시해야 할 가치를 도외시하는 자라는 추측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 추측이 서윤 스스로 확신하기 어려운 수준의 것이라는 데에 있었다. 서윤은 보다 확실한 증거를 원했다. 사람을 어떤 이유로 싫어한다면, 적어도 그 이유는 서윤 자신의 기준에서 정당한 것이어야 했다.
‘사람을 싫어하는 데 이유가 어디 있어?’
영재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지만 서윤은 동의할 수 없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라면 또 모르되, 싫어하는 것에는 반드시 온당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특히 사람을 싫어하는 주체가 서윤 자신이라면 반드시.
그래서 서윤은 그 누구보다도 진저의 히어로 의식을 증명, 혹은 반증하는 것에 열심일 수밖에 없었다. 전자라면 진저를 싫어할 합당한 이유가 생기고 후자라면 그 이유를 박탈당하는 결과가 되겠지만 어느 쪽이든 지금의 심리적인 부채가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서윤에게 좋은 결말이었다.
“……순찰 갑니다.”
어쩌다 이렇게 단둘이 대면하게 된 걸까. 예기치 못한 상대에 당황했던 주열은 또다시 첫 만남의 감각이 재현되려 하는 것을 깨닫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때처럼 멍하니 있다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덕분에 이번에는 너무 늦지도 급하지도 않게, 딱 제 페이스대로 말을 받을 수 있었다. 주열은 내심 뿌듯했다.
“곧 식사 시간이라…….”
쉬러 가려던 게 아니었나? 생각을 숨긴 채 의도적으로 말을 흐린 서윤의 시선이 탐색하듯 진저를 훑었다. 그리고 그러잖아도 방금 전의 소기의 성과로 기분이 좋아졌던 주열은 자신을 살펴보는 서윤을 좋게 해석했다. 지금 나 밥때 놓칠까 봐 걱정해 준 거야?
‘진저’를 누군가가 챙겨 주는 경험은 굉장히 생소했다. 놀랍고, 신선하고, 고마웠다. 그 모든 감정을 속으로 갈무리한 주열이 ‘진저치고는’ 친절히 대꾸했다.
“다녀오십시오.”
잠시 머뭇거린 서윤이 다소 의례적인 투로 웃어 보였다. 뭘 잘못 말했나? 어쩐지 당황한 것처럼 보였는데. 주열은 조금 아리송한 기분으로 서윤을 뒤로하고 건물을 나섰다. 그의 발걸음이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