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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세계 1권
1화
1. 잃어버린 시간
고등학교 입학식. 처음 입는 교복은 몸에 맞지 않는 것처럼 어색했다. 1만 광년은 떨어져 있었던 세계인 것처럼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다. 이상하게 초조해서 손가락을 튀기는 걸 반복하다가 바보같이 보일 것 같아서 관뒀다. 역시 녀석들이 없으니까 몸부터 반응하는구나. 싶어 한숨이 났다.
친구가 두 명이 있었다. 모두 끔찍할 정도로 말썽을 부려서 부모님들은 하나같이 우리가 친구인 걸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우리는 늘 함께 붙어 다녔고 한 몸에서 태어난 형제보다 더 사이가 좋았다.
문제를 일으켜 파출소를 들락거릴 때도 함께였고 가출해서 노숙을 할 때도 함께였다. 한 명씩 번갈아 가며 나와서 서로 재워 주는 요령이 없었던 것도 똑같았다. 아니, 집에서 나와 공원을 배회하다가 마주친 거니, 서로 약속하고 집을 나온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차라리 운명 같기도 했다. 이런 표현을 쓰면 녀석들은 미친 듯이 웃으며 비웃을 테니까 절대 입 밖에 내지는 않을 거지만. 아무튼 녀석들은 내 형제였고 내 자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랬던 우리가 오늘에서야 각자의 길로 떨어져 나온 것이다.
새카만 머리로 뒤덮여 있는 체육관 안을 멍하게 지켜보다가 아이들을 따라 걸었다. 아는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이미 몇몇은 중학교 때 알던 친구들끼리 패를 이뤄 시끌시끌했다. 나는 그들을 지켜보다가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지?’ 하고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을 다시 한 번 되풀이했다. 그 전까지는 굳이 친구를 만들 필요도, 스스로 뭔가를 결정해야 될 필요도 없었다.
그건 내 역할이 아니었으니까.
‘나난’, 그 녀석은 우리 중에, 굳이 말하면 리더의 역할을 하는 녀석이다. 취미는 싸움, 특기는 격투기, 삼시 세끼 밥 먹는 것보다 싸우는 걸 좋아하는, 악의 축, 문제의 근원, 모든 말썽의 종착역이었다. 폭력에 환장한 것치고는 우리 중에 성격이 제일 좋지만, 그게 더 나빴다. 우리는 그의 카리스마에 홀려 언제나 그가 일으키는 문제에 휘말리거나 동조하거나 둘 중 하나였으니까. 뭐, 가끔은 부추기기도 한다만…….
저지르는 짓이란 것이 귀신에 씌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악독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어쨌든 놈도 열 살 때는 평범한 코찔찔이 어린애였으니까.
녀석은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또래의 아이들과 머리 쓰는 걸로 경쟁한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던 녀석이었으니 의무교육을 마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공사판에서 인부로 일하기 시작한 나난은 지난 달 처음으로 우리를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데려가서 자기가 번 돈으로 밥을 샀다. 왜 그런데 돈을 낭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녀석 본인이 좋아했으니 그걸로 된 것이겠지.
사실 나난보다 의외였던 건 하진성, 그 녀석이다. 그놈은 심지어 입시 지옥을 뚫고 근방에서 제일 들어가기 힘들다는 사립고에 붙었다. 그 녀석, 성실한 불량학생이긴 했지만 별로 공부를 잘하는 건 아니었는데. 나난과 어울려 다니면 아무리 약삭빠르고 영리해도 공부할 시간 따위 없으니까 잘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공부를 못하는 건 당연한 거다.
그런데 어느 날 녀석이 돌연, “내 역할은 이게 아닌 거 같아.” 하고 말하더니 코피까지 터져 가며 공부에 몰두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이 녀석, 집이 부자라서 고액 개인교습까지 받으며 기를 쓰더니, 다른 경쟁자들이 억울할 정도로 한 번 미끄러지는 법도 없이 입시에 성공했다. 진짜 독한 새끼다.
그렇게 따지면 제일 어중간한 건 나. 성실하게 불량학생이었던 나는 제일 무난한 길을 달려왔다. 평일에는 학교에 가고, 주말에는 나난과 어울려 다니며 온갖 사고를 다치고 다녔다. 성적은 반에서 밑에서 세는 게 더 빠르지만 지각하는 법도 없이 학교의 룰에는 따른다. 뭐 그 정도?
사실 나난과 떨어지는 게 싫어서 진학 대신, 건설 노동자가 되는 건 어떨까하고 고민하기도 했었다. 고등학교 같은 건, 할 마음도 안 생기고 괜히 3년이나 시간 낭비할 바에는 사회인이 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엄마가 울면서 말리는 바람에 대충 성적에 맞춰서 들어온 상고이긴 하지만 입학식에 와 있는 지금도 별로 할 마음이 없긴 마찬가지다. 그렇긴 해도, 레일 위를 그냥 달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으니 곧 적응하겠지.
……적응하겠지?
모르겠다.
등교 첫날부터 자포자기의 마음인 건, 근성이 썩었다는 증거지만 어쩌겠어? 그저 넋 놓고 파도에 휩쓸리는 대로 따라가는 수밖에.
어느샌가 나는, 배정받은 반에, 번호를 받고, 자리를 받고, 교과서를 받고, 얌전하게 부품이 되어 들어가야 할 장소에 들어와 있었다. 할 마음이 안 생기니 굳이 뭔가 능동적으로 움직일 기운도 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어필할 마음도 들지 않는다. 이러면 안 되는데 싶지만-
사실 학교에서 사귄 친구 같은 것은 전혀 의미 없다는 생각까지 든다. 나에겐 이미 나난과 진성이 있다. 그 전처럼 자주 만나거나 할 수는 없겠지만. 그 녀석들을 생각하면, 다른 누군가를 만나 그 녀석들처럼 관계를 쌓아 가는 복잡하고 험난한 일은 도저히 무리란 생각이 든다.
어깨가 축 처져서 책상만 내려 보고 있자니 혼자 남은 게 더더욱 우울해지기만 했다.
“하아…….”
자리가 창가인 것은 좋다. 고개를 살짝 틀었더니 창밖으로 탁 트인 운동장이 내려다보였다.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서 그 점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그러다가 체육관의 지붕이 내려다보이는 게 꽤 높은 지대구나, 싶어서 아찔해졌다. 여기서 뛰어 내리는 애들도 있을까? 있으려나? 여하튼 사고를 쳐도 교실에서는 큰일이 나겠네. 잘못해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황천행이겠는데?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운동장에서 소란이 일었다. 신입생들끼리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시끌벅적해진다 싶더니 금세 들러붙어 엎치락뒤치락 하는 두 인형人形이 보였다. 싸움인가? 금방 아이들이 창가로 들러붙었다.
“조하인하고 박진욱이잖아?”
“오오!”
아이들이 신이 나서 떠들어 댔다. 첫날부터 구경거리를 제공해 주신 저 두 분의 이름이 조하인과 박진욱이라고?
“저 새끼들, 이 학교 됐어? 씨발, 좆 됐다!”
웅성거리는 이야기들을 듣자니 대충 종합해서 저 둘은 앙숙인 모양이었다. 중학교 때 영역 싸움을 하던 놈들이 한 학교에 들어오다니, 서열 정리될 때까지는 한동안 시끄럽겠네. 손바닥에 턱을 괴고 구경하자니, 폐에서 피식, 힘없이 바람이 빠지며 헛웃음이 났다.
평화롭구나.
어차피 진짜 문제인 놈들은 고등학교까지 올라오지도 않는다. 굳이 인문계 학교가 아니더라도 ‘학교’란 울타리 안에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맛이 간 놈들은 다 걸러진다는 소리다. 아니면 금방 강제로 정리되던지. 사회는 의무 교육의 틀에서 벗어난 고딩들에게까지 너그럽지는 않은 것 같았다. 문제를 일으키면 정학이든 퇴학이든- 금방 울타리 밖으로 밀려난다.
‘요령 없기는.’
금방 선생 몇이 뛰어나와 둘러싸고 있던 애들을 돌려보내고 붙어 있는 조하인과 박진욱을 떼어 놓았다. 그러고는 그 둘을 끌고 본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험악하기도 하지. 첫날부터 눈도장 확실히 찍어 뒀으니 저놈들 이제는 뭘 하든 선생들한테는 밉상이겠네. 권력자의 눈 밖에 나면 편한 길은 버려야 된다고, 쯧쯧. 하진성이 그런 쪽으로는 진짜 약삭빨랐지. 선생들 앞에선 무조건 선량한 얼굴로 헤헤, 웃었으니까.
나는 뭐든 중간도 못가는 덜 된 인간이지만,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 법이다. 옆에 있었던 녀석들이 그렇게 대단한 놈들인지라 보고 배운 것만 해도 꽤 되었다. 괜히 분란을 일으키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는 나난을 보면 되고, 반대로 분란을 피하려면 하진성이 하는 것처럼 하면 된다. 그러고 보니 진성이도 오늘이 입학식이었지.
녀석은 괜찮으려나?
“흐암~!”
재미없다, 고등학교. 나난이나 하진성 둘 중에 하나만 옆에 있었어도 잠시도 쉴 새 없이 롤러코스터 타는 것처럼 신났을 텐데. 한숨만 내쉬다가 환청처럼 흐느끼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아서 안색이 어두워졌다.
우는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네, 네. 알았어요, 엄마. 고등학교 졸업은 할 테니까 울지 좀 마세요.
* * *
신학기의 고등학교, 은근히 중학교랑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다르네. 시커먼 사내자식들로 뒤덮여 있는 광경은 별로 다르지 않지만, 바싹 긴장하고 정자세로 앉아 있는 건 좀 기묘한 광경이었다.
박진욱이란 녀석과 같은 반이 되었다. 창가 자리를 좋아하는 습성은 다들 마찬가지인지, 그는 반에 들어오자마자 내 뒷자리에 앉아 있는 놈과 자리를 바꾸었다. 털썩 앉아 씩씩거리는 놈의 숨결이 거칠었다.
……나도 자리나 바꿀까? 이놈 앞에 앉으면 왠지 귀찮은 일이 많아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살짝 돌아보았지만 내게 순순히 자리를 양보할 만한 녀석은 보이지 않는다. 어째 그렇게 긴장하고들 있으신지요? 이 자리는 불운의 자리 낙찰?
음. 이렇게 된 이상 박진욱이 빨리 짤리든지 나난처럼 등교 자체에 별 흥미를 못 느끼는 놈이길 바라는 수밖에.
조신하게 교과서 정리나 하고 있었더니, 짝이 박진욱을 힐끔거리는 게 보였다. 신경 쓰이냐? 근데 그랬다가는 그쪽에서 널 더 신경 쓸 텐데.
아니나 다를까? 반응도 빠르게, 쾅! 하고 뒤에 놈이 짝의 의자를 걷어찼고, 이름 모를 짝은 몹시 격하게도 놀랐다. 그런데 박진욱이 앉은 자리가 내 뒷자리인지라 필연적으로 나까지 휘말렸다 이거지. 가만히 있다가 책상에 처박힌 터라 급속하게 우울해졌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이 자리는 역시 불행의 자리.
“뭘 쳐다봐, 이 새끼야?!”
발작적으로 소리 지르는 박진욱은 몹시도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인 것 같았다. 저런, 상대적으로 감수성이 높은 인간이 곁에 있으면 불편한 일이 늘어나는데. 절대로 상종하지를 말아야겠다고 결심하고는 0.1mm도 그 녀석 쪽을 향해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쩔쩔매며 사과하는 짝이 불쌍하긴 하지만 어쩌겠어? 그러게 왜 눈치 없이 힐끔거리냐?
담임은 30대 건장한 남자였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담임이 들어왔다 나가고도 교실은 신학기스러운 명랑함을 되찾지 못했다. 암묵적으로 반의 최강자로 군림한 뒷자리분께서 심기가 불편하시니 숨소리도 크게 못 낸다. 명랑함과는 담 쌓은 듯한 박진욱이 교실로 들어오자마자 동급생의 의자를 걷어차며 화풀이를 해 댔으니, 감히 까불어 대는 놈이 없는 것이다.
조용하네. 차라리 이 조용함이 계속 되었으면.
쉬는 시간이 되자 다른 반에 있던 박진욱의 패거리들이 몰려들었다. 그놈들 때문에 잠깐이지만 교실 안이 시끌벅적해졌다. 대화의 주제는 주로 조하인을 어떻게 박살 낼까 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거 곤란하잖아? 쉬는 시간마다 이렇게 이 반으로 몰려들면 자리 특성상 내 주위가 굉장히 소란스러워진다. 혈기 넘치는 사내자식들이 귓가에서 쫑알대니 잠자기는 도저히 무리고, 괜히 시비에 휘말리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인 일이다.
중3, 나난과 하진성, 그리고 나는 같은 반이었다. 학교에서 그렇게 묶어 놓아 버린 것 같았지만 아무튼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땡큐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괜히 주위 학우들과 공포 분위기 조성하며 험악하게 지낸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특히 나난은 누구와든 스스럼없이 친해질 수 있는 마법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그 무렵에도 또래보다 훨씬 성숙한 분위기였던지라 과묵하고 어른스러운 동급생으로 인기가 많았다.
사고를 치긴 해도 저차원적인 장난질이고, 누구처럼 공포 분위기 조성하면서 위화감 만든 적은 없다 이거지. 적어도 학교에서는. 나난은 인기인이었고 모두가 의지할 수 있는 큰 형님 같은 동급생이었다. 히어로 영화의 주인공 같은 녀석을 적이 아닌 이상 무서워할 이유는 없었다. 어째서인지 졸업식 날 나난을 보고 울음을 터트린 기분 나쁜 녀석들도 꽤 있었으니까…….
그에 반해, 뒷자리 양반은 버릇이 나쁘네. 완전 민폐.
이야기를 듣자 하니,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도 조하인을 좀 악랄하게 깨부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거의 선망에 가까운 감정이 드러나서 조금 놀랐다. 상급생인가 보지? 설마 동급생에게 경외심을 보이진 않을 테고.
드르륵, 앞문이 열리고 곰처럼 커다란 사람 둘이서 교실에 들어왔다. 그러자 시끄럽게 굴던 박진욱 패거리까지 단번에 닥쳤다. 와, 포스가 이만저만이 아닌데? 나는 괜히 눈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시선을 내려 깔았다.
“박진욱, 나와라.”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나고 박진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두말없이 앞으로 나가는 그를, 반 아이들이 전부 지켜보았다.
곰 두 마리 앞에 선 박진욱은 상대적으로 작아 보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전의가 철철 흘러넘치는 게 꿀리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박진욱이 앞으로 나와서 자신들 앞에 서자 곰 선배가 느닷없이 앞발을, 아니지. 주먹을 헤머처럼 휘둘렀다. 박진욱은 순발력 있게 그 팔을 잡았지만 휘두르는 곰의 힘이 힘인지라 형편없이 떠밀려서 바닥을 나뒹굴었다.
“선배가 부르면 대답을 해.”
곰 선배는 그렇게 근엄하게 말씀하신 뒤, 바짝 쫄아 있는 박진욱의 패거리를 눈짓으로 불렀다.
“너희도 따라와라.”
다른 곰 선배가 쓰러져 있는 박진욱을 끌어 올려 질질 끌고 나가자 녀석들은 발소리까지 죽이며 따라 나간다. 무심코 휘파람을 불 뻔하다가 혀끝을 깨물어 참았다.
큰곰이 나가고 작은곰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다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너.”
그의 시선이 똑바로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 나 왜? 눈치 없는 놈인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어리숙하게 대답했다.
“저, 저요?”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는 작은곰이었다. 작은곰의 앞발 휘두르기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모두 목격했던 반 아이들은 완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너 뭐냐?”
“네? 신입생인데요?”
움츠러든 기색으로 그렇게 말하자 작은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 정도면 모범답안 아니냐? 나갔던 큰곰이 교실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뭐하냐? 괜히 애 괴롭히지 말고 나와.”
“낯이 익은데.”
“누가?”
“저 녀석.”
그러더니 큰곰도 나를 빤히 쳐다본다. 나는 살며시 눈을 내려 깔았다.
“평범하게 생겼네. 뻘짓 하지 말고 나와. 9반도 들러야지.”
“알았어.”
그렇게 두 마리 곰이 퇴장한 다음, 교실 안은 일순간 긴장이 풀린 듯 한숨과 함께 웅성거리는 소음이 찾아왔다.
“씨발, 존나 커.”
“뭐야? 박진욱 어떻게 되는 거야?”
웅성 웅성. 그래, 확실히 말도 안 되고말고. 저게 고딩이라니 누가 믿겠어? 얼굴 삭은 것 좀 봐. 덩치 좀 보게. 나난도 저 정도로 크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날씬하다. 노동으로 다져진 잔 근육은 예술이지. 저렇게 크기만 한 게 아니라고.
긴장이 풀린 교실을 둘러보며 1년간 같이 생활할 학우들을 관찰했다. 같이 지내기 괜찮을 만한 녀석은 누가 있으려나? 상고라 그런지, 뜯어보면 꽤나 다채로운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냄새나고 커다랗고 시커먼 건 똑같지만, 은근히 머리에 색을 뺀 녀석들도 있고, 머리 길이도 천차만별이다. 교복을 줄인 것도 그렇고.
……공부할 것같이 생긴 녀석은 없네. 오히려 이 반 통틀어 내가 제일 얌전하게 생긴 듯?
며칠 전, 나름 경축할 만한 고교 진학인지라 엄마한테서 돈을 받아 하진성과 함께 미용실에 갔다. 머리를 까맣게 염색하고 단정하게 커트하고 나니, 왠지 대만족. 사립고 범생이 삘로 스타일이 완성되어 버리긴 했지만- 내 평생 이렇게 착해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
하진성과 함께 서로를 마주 보며 숨 넘어 가도록 낄낄거렸었지.
“너 이 새끼, 누구야?! 낄낄낄!”
새 학기에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성실하지 않은가?
“괜찮아?”
우선 짝에게 그렇게 물었다. 녀석은 불안한 시선으로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는 눈치다. 그래, 얼마나 가시 방석이겠냐. 그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내가 “응?” 하고 소리 내자 화들짝 놀라 시선을 내려 깔았다. 기가 약한 녀석이네. 그래, 박진욱이 깨져서 돌아오면 또 그 섬세한 성격에 얼마나 날카로워져 있을까? 게다가 눈을 데룩데룩 굴리는- 짝 역시 섬세한 신경의 소유자인 것 같다. 음, 같이 못 놀긴 힘들겠구나.
우중충한 한 학기의 시작이었다.
* * *
오랜만에 나난과 하진성을 만났다.
반쯤 말라 죽어 가고 있었던 터라 나난이 물을 뿌려 주고, 하진성이 비료까지 뿌려 주자 겨우 기운이 되살아났다.
뭘 하다 왔는지는 몰라도 나난은 트레이닝복 바지에 진흙이 잔뜩 묻어 있는 운동화를 신고 위에는 몸에 딱 들러붙는 검은색 민소매 티만 입고 있었다. 그동안 피부가 더욱 탄 데다 근육도 커져서 완전히 어른 같아 보였다. 부시시한 머리카락은 또래의 남자들과는 다르게 뒤로 꽁지 머리로 묶을 정도로 길었다. 시큼한 땀 냄새가 났다.
그래도 햇살같이 밝은 미소는 그대로라 마음이 놓였다. 전과는 다르게, 서로 완전히 다른 일상을 보내며 살아가고 있지만, 나난은 여전히 그대로인 것 같다. 까불거리며 가슴과 어깨가 얼마나 커졌는지 자랑하는 그는 아직 중학생처럼 천진해 보였다. 힘든 일을 하는데도 그늘이 없어 보여 다행이다. 무엇보다 지갑에 항상 돈이 많은 게 부러웠다.
나난이 일을 시작한 후로는 언제나 돈 쓰는 일은 나난이 맡았다. 굳이 그러지 마라는데도 막무가내. 이제는 정말로 큰 형님 같다. 특히 지갑을 열 때는 우리와는 달리 완전히 어른 남자가 된 것 같아서 어떤 경외심마저 느껴졌다.
그에 반해 하진성은 은테 안경을 쓰고 나와 우리의 비웃음을 한 몸에 샀다. 도련님 스타일로 변신한 후, 그게 체질에 잘 맞는지 하루가 다르게 귀하게 자란 도련님으로 변해 가는 놈이다. 녀석은 우리의 비웃음에 함께 낄낄대며 즐거워했다.
“나 존나 공부 잘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냐? 웃기지?”
잘 어울리는 것 같긴 하지만 어째 훌쩍 멀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해서 섭섭하다. 그런 마음을 읽은 건지 하진성은 옆에서 “섭섭하냐? 형아가 안 놀아줄까 봐 우울해?” 하고 놀려 댄다. “우울해.” 하고 말했더니 “아이고, 귀여워라. 또 혼자 삽질하고 있네, 우리 꼬맹이.” 하고 신랄함을 가장한 위로가 되돌아왔다.
그래서 나도 그를 위로해 주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이 중 제일 초조해하고 있는 건 하진성, 그 자신일 것이다. 그는 우리를 믿고 있지만 두려워하고 있기도 했다. 완전히 반대편으로 향하는 자신이 우리들에게서 따돌려질까 봐 겁내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손을 내밀었다. 놈은 아무 말 없이 손을 맞잡았고, 그렇게 둘이서 손을 잡고 있었더니 나난이 징그럽다고 진저리를 쳤다.
음. 난 씨는 다 좋은데 감수성이 너무 부족해.
열일곱 살이 된다는 건, 열여섯 살과는 분명히 달랐다.
저차원적인 장난을 일삼으며 주위 사람 골치 꽤나 아프게 만들고 돌아다니던 우리들도 각자의 스타트 지점에 다시 서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똑같은 추억을 안고 언제까지나 이어져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긴 했어도 우리의 행동패턴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오락실에서 코인 게임으로 몇 시간을 때우다가 근처 문방구에서 폭죽을 샀다. 그걸 가지고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몰려가 시끄럽게 폭죽을 터뜨려 대며 놀았다.
“우리 돼지 있는 데나 한번 가 볼까?”
“크크크!”
1화
1. 잃어버린 시간
고등학교 입학식. 처음 입는 교복은 몸에 맞지 않는 것처럼 어색했다. 1만 광년은 떨어져 있었던 세계인 것처럼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다. 이상하게 초조해서 손가락을 튀기는 걸 반복하다가 바보같이 보일 것 같아서 관뒀다. 역시 녀석들이 없으니까 몸부터 반응하는구나. 싶어 한숨이 났다.
친구가 두 명이 있었다. 모두 끔찍할 정도로 말썽을 부려서 부모님들은 하나같이 우리가 친구인 걸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우리는 늘 함께 붙어 다녔고 한 몸에서 태어난 형제보다 더 사이가 좋았다.
문제를 일으켜 파출소를 들락거릴 때도 함께였고 가출해서 노숙을 할 때도 함께였다. 한 명씩 번갈아 가며 나와서 서로 재워 주는 요령이 없었던 것도 똑같았다. 아니, 집에서 나와 공원을 배회하다가 마주친 거니, 서로 약속하고 집을 나온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차라리 운명 같기도 했다. 이런 표현을 쓰면 녀석들은 미친 듯이 웃으며 비웃을 테니까 절대 입 밖에 내지는 않을 거지만. 아무튼 녀석들은 내 형제였고 내 자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랬던 우리가 오늘에서야 각자의 길로 떨어져 나온 것이다.
새카만 머리로 뒤덮여 있는 체육관 안을 멍하게 지켜보다가 아이들을 따라 걸었다. 아는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이미 몇몇은 중학교 때 알던 친구들끼리 패를 이뤄 시끌시끌했다. 나는 그들을 지켜보다가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지?’ 하고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을 다시 한 번 되풀이했다. 그 전까지는 굳이 친구를 만들 필요도, 스스로 뭔가를 결정해야 될 필요도 없었다.
그건 내 역할이 아니었으니까.
‘나난’, 그 녀석은 우리 중에, 굳이 말하면 리더의 역할을 하는 녀석이다. 취미는 싸움, 특기는 격투기, 삼시 세끼 밥 먹는 것보다 싸우는 걸 좋아하는, 악의 축, 문제의 근원, 모든 말썽의 종착역이었다. 폭력에 환장한 것치고는 우리 중에 성격이 제일 좋지만, 그게 더 나빴다. 우리는 그의 카리스마에 홀려 언제나 그가 일으키는 문제에 휘말리거나 동조하거나 둘 중 하나였으니까. 뭐, 가끔은 부추기기도 한다만…….
저지르는 짓이란 것이 귀신에 씌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악독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어쨌든 놈도 열 살 때는 평범한 코찔찔이 어린애였으니까.
녀석은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또래의 아이들과 머리 쓰는 걸로 경쟁한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던 녀석이었으니 의무교육을 마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공사판에서 인부로 일하기 시작한 나난은 지난 달 처음으로 우리를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데려가서 자기가 번 돈으로 밥을 샀다. 왜 그런데 돈을 낭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녀석 본인이 좋아했으니 그걸로 된 것이겠지.
사실 나난보다 의외였던 건 하진성, 그 녀석이다. 그놈은 심지어 입시 지옥을 뚫고 근방에서 제일 들어가기 힘들다는 사립고에 붙었다. 그 녀석, 성실한 불량학생이긴 했지만 별로 공부를 잘하는 건 아니었는데. 나난과 어울려 다니면 아무리 약삭빠르고 영리해도 공부할 시간 따위 없으니까 잘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공부를 못하는 건 당연한 거다.
그런데 어느 날 녀석이 돌연, “내 역할은 이게 아닌 거 같아.” 하고 말하더니 코피까지 터져 가며 공부에 몰두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이 녀석, 집이 부자라서 고액 개인교습까지 받으며 기를 쓰더니, 다른 경쟁자들이 억울할 정도로 한 번 미끄러지는 법도 없이 입시에 성공했다. 진짜 독한 새끼다.
그렇게 따지면 제일 어중간한 건 나. 성실하게 불량학생이었던 나는 제일 무난한 길을 달려왔다. 평일에는 학교에 가고, 주말에는 나난과 어울려 다니며 온갖 사고를 다치고 다녔다. 성적은 반에서 밑에서 세는 게 더 빠르지만 지각하는 법도 없이 학교의 룰에는 따른다. 뭐 그 정도?
사실 나난과 떨어지는 게 싫어서 진학 대신, 건설 노동자가 되는 건 어떨까하고 고민하기도 했었다. 고등학교 같은 건, 할 마음도 안 생기고 괜히 3년이나 시간 낭비할 바에는 사회인이 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엄마가 울면서 말리는 바람에 대충 성적에 맞춰서 들어온 상고이긴 하지만 입학식에 와 있는 지금도 별로 할 마음이 없긴 마찬가지다. 그렇긴 해도, 레일 위를 그냥 달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으니 곧 적응하겠지.
……적응하겠지?
모르겠다.
등교 첫날부터 자포자기의 마음인 건, 근성이 썩었다는 증거지만 어쩌겠어? 그저 넋 놓고 파도에 휩쓸리는 대로 따라가는 수밖에.
어느샌가 나는, 배정받은 반에, 번호를 받고, 자리를 받고, 교과서를 받고, 얌전하게 부품이 되어 들어가야 할 장소에 들어와 있었다. 할 마음이 안 생기니 굳이 뭔가 능동적으로 움직일 기운도 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어필할 마음도 들지 않는다. 이러면 안 되는데 싶지만-
사실 학교에서 사귄 친구 같은 것은 전혀 의미 없다는 생각까지 든다. 나에겐 이미 나난과 진성이 있다. 그 전처럼 자주 만나거나 할 수는 없겠지만. 그 녀석들을 생각하면, 다른 누군가를 만나 그 녀석들처럼 관계를 쌓아 가는 복잡하고 험난한 일은 도저히 무리란 생각이 든다.
어깨가 축 처져서 책상만 내려 보고 있자니 혼자 남은 게 더더욱 우울해지기만 했다.
“하아…….”
자리가 창가인 것은 좋다. 고개를 살짝 틀었더니 창밖으로 탁 트인 운동장이 내려다보였다.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서 그 점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그러다가 체육관의 지붕이 내려다보이는 게 꽤 높은 지대구나, 싶어서 아찔해졌다. 여기서 뛰어 내리는 애들도 있을까? 있으려나? 여하튼 사고를 쳐도 교실에서는 큰일이 나겠네. 잘못해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황천행이겠는데?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운동장에서 소란이 일었다. 신입생들끼리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시끌벅적해진다 싶더니 금세 들러붙어 엎치락뒤치락 하는 두 인형人形이 보였다. 싸움인가? 금방 아이들이 창가로 들러붙었다.
“조하인하고 박진욱이잖아?”
“오오!”
아이들이 신이 나서 떠들어 댔다. 첫날부터 구경거리를 제공해 주신 저 두 분의 이름이 조하인과 박진욱이라고?
“저 새끼들, 이 학교 됐어? 씨발, 좆 됐다!”
웅성거리는 이야기들을 듣자니 대충 종합해서 저 둘은 앙숙인 모양이었다. 중학교 때 영역 싸움을 하던 놈들이 한 학교에 들어오다니, 서열 정리될 때까지는 한동안 시끄럽겠네. 손바닥에 턱을 괴고 구경하자니, 폐에서 피식, 힘없이 바람이 빠지며 헛웃음이 났다.
평화롭구나.
어차피 진짜 문제인 놈들은 고등학교까지 올라오지도 않는다. 굳이 인문계 학교가 아니더라도 ‘학교’란 울타리 안에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맛이 간 놈들은 다 걸러진다는 소리다. 아니면 금방 강제로 정리되던지. 사회는 의무 교육의 틀에서 벗어난 고딩들에게까지 너그럽지는 않은 것 같았다. 문제를 일으키면 정학이든 퇴학이든- 금방 울타리 밖으로 밀려난다.
‘요령 없기는.’
금방 선생 몇이 뛰어나와 둘러싸고 있던 애들을 돌려보내고 붙어 있는 조하인과 박진욱을 떼어 놓았다. 그러고는 그 둘을 끌고 본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험악하기도 하지. 첫날부터 눈도장 확실히 찍어 뒀으니 저놈들 이제는 뭘 하든 선생들한테는 밉상이겠네. 권력자의 눈 밖에 나면 편한 길은 버려야 된다고, 쯧쯧. 하진성이 그런 쪽으로는 진짜 약삭빨랐지. 선생들 앞에선 무조건 선량한 얼굴로 헤헤, 웃었으니까.
나는 뭐든 중간도 못가는 덜 된 인간이지만,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 법이다. 옆에 있었던 녀석들이 그렇게 대단한 놈들인지라 보고 배운 것만 해도 꽤 되었다. 괜히 분란을 일으키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는 나난을 보면 되고, 반대로 분란을 피하려면 하진성이 하는 것처럼 하면 된다. 그러고 보니 진성이도 오늘이 입학식이었지.
녀석은 괜찮으려나?
“흐암~!”
재미없다, 고등학교. 나난이나 하진성 둘 중에 하나만 옆에 있었어도 잠시도 쉴 새 없이 롤러코스터 타는 것처럼 신났을 텐데. 한숨만 내쉬다가 환청처럼 흐느끼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아서 안색이 어두워졌다.
우는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네, 네. 알았어요, 엄마. 고등학교 졸업은 할 테니까 울지 좀 마세요.
* * *
신학기의 고등학교, 은근히 중학교랑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다르네. 시커먼 사내자식들로 뒤덮여 있는 광경은 별로 다르지 않지만, 바싹 긴장하고 정자세로 앉아 있는 건 좀 기묘한 광경이었다.
박진욱이란 녀석과 같은 반이 되었다. 창가 자리를 좋아하는 습성은 다들 마찬가지인지, 그는 반에 들어오자마자 내 뒷자리에 앉아 있는 놈과 자리를 바꾸었다. 털썩 앉아 씩씩거리는 놈의 숨결이 거칠었다.
……나도 자리나 바꿀까? 이놈 앞에 앉으면 왠지 귀찮은 일이 많아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살짝 돌아보았지만 내게 순순히 자리를 양보할 만한 녀석은 보이지 않는다. 어째 그렇게 긴장하고들 있으신지요? 이 자리는 불운의 자리 낙찰?
음. 이렇게 된 이상 박진욱이 빨리 짤리든지 나난처럼 등교 자체에 별 흥미를 못 느끼는 놈이길 바라는 수밖에.
조신하게 교과서 정리나 하고 있었더니, 짝이 박진욱을 힐끔거리는 게 보였다. 신경 쓰이냐? 근데 그랬다가는 그쪽에서 널 더 신경 쓸 텐데.
아니나 다를까? 반응도 빠르게, 쾅! 하고 뒤에 놈이 짝의 의자를 걷어찼고, 이름 모를 짝은 몹시 격하게도 놀랐다. 그런데 박진욱이 앉은 자리가 내 뒷자리인지라 필연적으로 나까지 휘말렸다 이거지. 가만히 있다가 책상에 처박힌 터라 급속하게 우울해졌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이 자리는 역시 불행의 자리.
“뭘 쳐다봐, 이 새끼야?!”
발작적으로 소리 지르는 박진욱은 몹시도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인 것 같았다. 저런, 상대적으로 감수성이 높은 인간이 곁에 있으면 불편한 일이 늘어나는데. 절대로 상종하지를 말아야겠다고 결심하고는 0.1mm도 그 녀석 쪽을 향해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쩔쩔매며 사과하는 짝이 불쌍하긴 하지만 어쩌겠어? 그러게 왜 눈치 없이 힐끔거리냐?
담임은 30대 건장한 남자였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담임이 들어왔다 나가고도 교실은 신학기스러운 명랑함을 되찾지 못했다. 암묵적으로 반의 최강자로 군림한 뒷자리분께서 심기가 불편하시니 숨소리도 크게 못 낸다. 명랑함과는 담 쌓은 듯한 박진욱이 교실로 들어오자마자 동급생의 의자를 걷어차며 화풀이를 해 댔으니, 감히 까불어 대는 놈이 없는 것이다.
조용하네. 차라리 이 조용함이 계속 되었으면.
쉬는 시간이 되자 다른 반에 있던 박진욱의 패거리들이 몰려들었다. 그놈들 때문에 잠깐이지만 교실 안이 시끌벅적해졌다. 대화의 주제는 주로 조하인을 어떻게 박살 낼까 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거 곤란하잖아? 쉬는 시간마다 이렇게 이 반으로 몰려들면 자리 특성상 내 주위가 굉장히 소란스러워진다. 혈기 넘치는 사내자식들이 귓가에서 쫑알대니 잠자기는 도저히 무리고, 괜히 시비에 휘말리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인 일이다.
중3, 나난과 하진성, 그리고 나는 같은 반이었다. 학교에서 그렇게 묶어 놓아 버린 것 같았지만 아무튼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땡큐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괜히 주위 학우들과 공포 분위기 조성하며 험악하게 지낸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특히 나난은 누구와든 스스럼없이 친해질 수 있는 마법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그 무렵에도 또래보다 훨씬 성숙한 분위기였던지라 과묵하고 어른스러운 동급생으로 인기가 많았다.
사고를 치긴 해도 저차원적인 장난질이고, 누구처럼 공포 분위기 조성하면서 위화감 만든 적은 없다 이거지. 적어도 학교에서는. 나난은 인기인이었고 모두가 의지할 수 있는 큰 형님 같은 동급생이었다. 히어로 영화의 주인공 같은 녀석을 적이 아닌 이상 무서워할 이유는 없었다. 어째서인지 졸업식 날 나난을 보고 울음을 터트린 기분 나쁜 녀석들도 꽤 있었으니까…….
그에 반해, 뒷자리 양반은 버릇이 나쁘네. 완전 민폐.
이야기를 듣자 하니,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도 조하인을 좀 악랄하게 깨부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거의 선망에 가까운 감정이 드러나서 조금 놀랐다. 상급생인가 보지? 설마 동급생에게 경외심을 보이진 않을 테고.
드르륵, 앞문이 열리고 곰처럼 커다란 사람 둘이서 교실에 들어왔다. 그러자 시끄럽게 굴던 박진욱 패거리까지 단번에 닥쳤다. 와, 포스가 이만저만이 아닌데? 나는 괜히 눈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시선을 내려 깔았다.
“박진욱, 나와라.”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나고 박진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두말없이 앞으로 나가는 그를, 반 아이들이 전부 지켜보았다.
곰 두 마리 앞에 선 박진욱은 상대적으로 작아 보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전의가 철철 흘러넘치는 게 꿀리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박진욱이 앞으로 나와서 자신들 앞에 서자 곰 선배가 느닷없이 앞발을, 아니지. 주먹을 헤머처럼 휘둘렀다. 박진욱은 순발력 있게 그 팔을 잡았지만 휘두르는 곰의 힘이 힘인지라 형편없이 떠밀려서 바닥을 나뒹굴었다.
“선배가 부르면 대답을 해.”
곰 선배는 그렇게 근엄하게 말씀하신 뒤, 바짝 쫄아 있는 박진욱의 패거리를 눈짓으로 불렀다.
“너희도 따라와라.”
다른 곰 선배가 쓰러져 있는 박진욱을 끌어 올려 질질 끌고 나가자 녀석들은 발소리까지 죽이며 따라 나간다. 무심코 휘파람을 불 뻔하다가 혀끝을 깨물어 참았다.
큰곰이 나가고 작은곰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다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너.”
그의 시선이 똑바로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 나 왜? 눈치 없는 놈인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어리숙하게 대답했다.
“저, 저요?”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는 작은곰이었다. 작은곰의 앞발 휘두르기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모두 목격했던 반 아이들은 완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너 뭐냐?”
“네? 신입생인데요?”
움츠러든 기색으로 그렇게 말하자 작은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 정도면 모범답안 아니냐? 나갔던 큰곰이 교실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뭐하냐? 괜히 애 괴롭히지 말고 나와.”
“낯이 익은데.”
“누가?”
“저 녀석.”
그러더니 큰곰도 나를 빤히 쳐다본다. 나는 살며시 눈을 내려 깔았다.
“평범하게 생겼네. 뻘짓 하지 말고 나와. 9반도 들러야지.”
“알았어.”
그렇게 두 마리 곰이 퇴장한 다음, 교실 안은 일순간 긴장이 풀린 듯 한숨과 함께 웅성거리는 소음이 찾아왔다.
“씨발, 존나 커.”
“뭐야? 박진욱 어떻게 되는 거야?”
웅성 웅성. 그래, 확실히 말도 안 되고말고. 저게 고딩이라니 누가 믿겠어? 얼굴 삭은 것 좀 봐. 덩치 좀 보게. 나난도 저 정도로 크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날씬하다. 노동으로 다져진 잔 근육은 예술이지. 저렇게 크기만 한 게 아니라고.
긴장이 풀린 교실을 둘러보며 1년간 같이 생활할 학우들을 관찰했다. 같이 지내기 괜찮을 만한 녀석은 누가 있으려나? 상고라 그런지, 뜯어보면 꽤나 다채로운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냄새나고 커다랗고 시커먼 건 똑같지만, 은근히 머리에 색을 뺀 녀석들도 있고, 머리 길이도 천차만별이다. 교복을 줄인 것도 그렇고.
……공부할 것같이 생긴 녀석은 없네. 오히려 이 반 통틀어 내가 제일 얌전하게 생긴 듯?
며칠 전, 나름 경축할 만한 고교 진학인지라 엄마한테서 돈을 받아 하진성과 함께 미용실에 갔다. 머리를 까맣게 염색하고 단정하게 커트하고 나니, 왠지 대만족. 사립고 범생이 삘로 스타일이 완성되어 버리긴 했지만- 내 평생 이렇게 착해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
하진성과 함께 서로를 마주 보며 숨 넘어 가도록 낄낄거렸었지.
“너 이 새끼, 누구야?! 낄낄낄!”
새 학기에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성실하지 않은가?
“괜찮아?”
우선 짝에게 그렇게 물었다. 녀석은 불안한 시선으로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는 눈치다. 그래, 얼마나 가시 방석이겠냐. 그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내가 “응?” 하고 소리 내자 화들짝 놀라 시선을 내려 깔았다. 기가 약한 녀석이네. 그래, 박진욱이 깨져서 돌아오면 또 그 섬세한 성격에 얼마나 날카로워져 있을까? 게다가 눈을 데룩데룩 굴리는- 짝 역시 섬세한 신경의 소유자인 것 같다. 음, 같이 못 놀긴 힘들겠구나.
우중충한 한 학기의 시작이었다.
* * *
오랜만에 나난과 하진성을 만났다.
반쯤 말라 죽어 가고 있었던 터라 나난이 물을 뿌려 주고, 하진성이 비료까지 뿌려 주자 겨우 기운이 되살아났다.
뭘 하다 왔는지는 몰라도 나난은 트레이닝복 바지에 진흙이 잔뜩 묻어 있는 운동화를 신고 위에는 몸에 딱 들러붙는 검은색 민소매 티만 입고 있었다. 그동안 피부가 더욱 탄 데다 근육도 커져서 완전히 어른 같아 보였다. 부시시한 머리카락은 또래의 남자들과는 다르게 뒤로 꽁지 머리로 묶을 정도로 길었다. 시큼한 땀 냄새가 났다.
그래도 햇살같이 밝은 미소는 그대로라 마음이 놓였다. 전과는 다르게, 서로 완전히 다른 일상을 보내며 살아가고 있지만, 나난은 여전히 그대로인 것 같다. 까불거리며 가슴과 어깨가 얼마나 커졌는지 자랑하는 그는 아직 중학생처럼 천진해 보였다. 힘든 일을 하는데도 그늘이 없어 보여 다행이다. 무엇보다 지갑에 항상 돈이 많은 게 부러웠다.
나난이 일을 시작한 후로는 언제나 돈 쓰는 일은 나난이 맡았다. 굳이 그러지 마라는데도 막무가내. 이제는 정말로 큰 형님 같다. 특히 지갑을 열 때는 우리와는 달리 완전히 어른 남자가 된 것 같아서 어떤 경외심마저 느껴졌다.
그에 반해 하진성은 은테 안경을 쓰고 나와 우리의 비웃음을 한 몸에 샀다. 도련님 스타일로 변신한 후, 그게 체질에 잘 맞는지 하루가 다르게 귀하게 자란 도련님으로 변해 가는 놈이다. 녀석은 우리의 비웃음에 함께 낄낄대며 즐거워했다.
“나 존나 공부 잘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냐? 웃기지?”
잘 어울리는 것 같긴 하지만 어째 훌쩍 멀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해서 섭섭하다. 그런 마음을 읽은 건지 하진성은 옆에서 “섭섭하냐? 형아가 안 놀아줄까 봐 우울해?” 하고 놀려 댄다. “우울해.” 하고 말했더니 “아이고, 귀여워라. 또 혼자 삽질하고 있네, 우리 꼬맹이.” 하고 신랄함을 가장한 위로가 되돌아왔다.
그래서 나도 그를 위로해 주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이 중 제일 초조해하고 있는 건 하진성, 그 자신일 것이다. 그는 우리를 믿고 있지만 두려워하고 있기도 했다. 완전히 반대편으로 향하는 자신이 우리들에게서 따돌려질까 봐 겁내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손을 내밀었다. 놈은 아무 말 없이 손을 맞잡았고, 그렇게 둘이서 손을 잡고 있었더니 나난이 징그럽다고 진저리를 쳤다.
음. 난 씨는 다 좋은데 감수성이 너무 부족해.
열일곱 살이 된다는 건, 열여섯 살과는 분명히 달랐다.
저차원적인 장난을 일삼으며 주위 사람 골치 꽤나 아프게 만들고 돌아다니던 우리들도 각자의 스타트 지점에 다시 서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똑같은 추억을 안고 언제까지나 이어져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긴 했어도 우리의 행동패턴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오락실에서 코인 게임으로 몇 시간을 때우다가 근처 문방구에서 폭죽을 샀다. 그걸 가지고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몰려가 시끄럽게 폭죽을 터뜨려 대며 놀았다.
“우리 돼지 있는 데나 한번 가 볼까?”
“크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