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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그리고 나난의 작은 오토바이에 세 명이 모두 타고 근처 파출소로 향했다. 파출소 근처에서 각자 마스크를 쓰고 손에 든 폭약을 장전했다. 그리고 오토바이가 지구대 앞을 지날 때, 우리는 손에 든 폭약에 불을 붙여 파출소 주차장으로 힘껏 던졌다. 몇 개는 불발이었지만, 몇 개는 운 좋게도 열려 있는 문 안으로 굴러 들어갔다. 곧이어 파파팍! 폭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파출소 안에서 난리가 났다. 몇 명이 뛰어 나왔다.
“푸하하하하하!”
나난이 급하게 오토바이를 출발했고 하진성과 나는 뒤로 몸이 젖혀지는데도 신나게 웃음을 터뜨렸다.
“돼지새끼 꼴 좀 봐!”
허리둘레가 40인치쯤 되는 교통과 경찰이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뒤따라 뛰다가 경찰 오토바이 쪽으로 뛰어갔다.
“난 씨~ 빨리~ 돼지가 쫓아와! 푸하하하하!”
“꼴좋다, 돼지!”
하진성은 뒤를 돌아보며 뒤뚱거리는 경찰을 놀려 댔다.
“너 이눔새끼들! 나난이지?! 잡히면 네놈들 다 가만 안 둔다?!”
“돼지~! 빨리 뛰어! 힘내!”
도주 루트 하나는 빠삭합니다. 크큭! 우리가 돼지라고 부르는 이재환 경관과는 3년째 악연을 이어 오고 있다. 그는 걸핏하면 우리를 잡아다가 부모님을 소환해 댔고, 우리는 그런 그에게 보복성 테러를 하는 게 취미였다. 얼굴이 시뻘게져서 날뛰는 그를 보는 게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다. 아마 이 인연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
해가 바뀌고 한동안 조용하다 했더니, 간만에 시끌벅적하게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골목골목을 잽싸게 누비는 동안, 막혀 있던 속이 뻥 하니 뚫린다.
우리가 치는 장난이라는 게 고작 해 봤자 이 정도 수준이다. 좀 약 오르긴 하겠지만 강도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신나를 빨거나 강간사건으로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는다. 정도가 약간 지나친 개구쟁이일 뿐이지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 수준의 장난만 칠 뿐이다…고 우리들은 생각했다. 상대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전혀 모르겠지만.
돼지를 따돌리고 강변에 온 우리는 족히 30분은 돼지의 상태에 대해 떠들며 낄낄거렸다. 별 볼일 없는 아이들의 별 볼일 없는 유쾌한 장난에 대해서 과민하게 반응하는 어른들 쪽이 멍청한 거다. 우리 같은 놈들을 잡으러 쫓아다닐 바에는 좀 더 건실한 일을 하는 게 좋을 텐데, 하며 우리는 어른들을 비웃었다.
밤에 부는 강바람은 차가웠다. 민소매 티만 입고 있는 나난이 조금 추워 보여서 빤히 보았더니 그는 선하게 웃음 지었다. 개구쟁이의 얼굴을 어느새 사라지고 다 큰 사내의 얼굴을 하고 있는 그가 신기했다.
진성이가 담배를 입에 물자 나난도 한 개비 얻어서 입에 물었다. 빨간 동그라미가 허공이 두 개 생긴다. 멍하게 그걸 보고 있는데 하진성이 웃었다.
“조용히 잘 지내고 있나 보더라?”
“어? 어.”
“우리 학교에는 가끔 소식이 들려오거든. 너네 학교 1학년은 대충 정리됐다던데?”
“박진욱이 조하인 밑으로 들어갔어.”
“요즘 애들은 참, 별 볼 일 없는 데 집착한단 말이지.”
자기도 요즘 청소년인 주제에 애늙은이처럼 그렇게 중얼거린 하진성은 피식 헛웃음을 터뜨렸다. 진성이네 학교는 입시 전문 인문계라 그런지 불량한 녀석은 씨가 말랐고, 셔틀이나 사소한 분란조차 없는 따분한 곳이랬다. 그렇기는 해도 젊은 혈기를 동경하는 사내자식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라, 몇몇의 소식통이 부지런히 주변 학교의 서열정리에 대해 정보를 가져다 나르는 모양이다.
나난이 말했다.
“어머님 우시는 것 보니까 마음이 안 좋더라. 어차피 네 동급생 중에는 신경 쓸 만한 녀석은 없지만 ‘우주인’은 조심해.”
“푸핫! 너도 그 웃긴 이름의 선배를 알아?”
우리 학교 2학년에는 ‘우주인’이란 이름을 가진, 박진욱도 조하인도 덜덜 떠는 무서운 선배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나난이 이름을 알 정도라니. 왜 난 그동안 몰랐지?
하진성도 걱정 가득한 얼굴로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더니 충고했다.
“조용히 학교 다닐 거면, 그쪽으로는 엮이지 마. 심란해지거든. 우주인이 미친 개새낀 건 다 알아.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네가 걱정이다.”
“괜찮아. 나 완전 범생이잖아?”
“그렇겠지.”
어차피 나야, 나난과 하진성, 이 둘과 어울려 다니는 게 좋아서 말썽을 일으켰지. 불량한 세계에 대한 동경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건 둘도 마찬가지겠지만. 아무튼 치기 어린 서열정리나 못된 짓에는 관심이 없다. 맹하게 하진성을 올려다보았더니 그가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웃는다.
“근데 진짜 순해 보인다. 크큭!”
“알아. 그래서 이 이미지 키우려고 연구 중이야. 착해 보이지?”
이를테면 이렇게 맹하게 쳐다보면서 담배를 구걸하는 스킬 같은 거.
나난이 옆에서 낄낄거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이 녀석들과 함께 있는 게 제일 마음이 편했다.
2. 그림자
저녁 산책 삼아 골목길을 천천히 걸으며, 나는 아직 완전히 지지 않은 태양과, 또 시리도록 맑은 달에 빠져들었다. 누가 말을 걸지 않는 이상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완전한 침묵의 나날 속에서 나는 날로 자유로워져 가고 있었다. 얼마 안 가 날개가 돋아나 어디론가 날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신이 이상해지고 있는 걸지도.
어쨌든 스스로 생각하기에, 해가 지면 나는 정신이 맑아지고 온몸에 엔돌핀이 돌기 시작한다. 그제야 잠들어 있던 영혼이 깨어나는 것 같았다. 그때가 되면 나는 깊이 숨을 들이 마시고 활기차게 걸을 수 있게 된다. 밤은 나의 시간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무섭도록 캄캄한 밤에 별빛에 의지하여 유령처럼 떠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때도 이상할 정도로 어둠에 대한 공포가 없었던 꼬마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 사는 곳이 바뀌고 환경이 변하여, 지금은 가로등 불빛과 가게들의 네온사인 불빛에 의존해 산책을 하지만 역시 낮보다는 밤이 좋았다.
가엾은 진성이는 학원에 개인교습까지, 숨도 못 쉬도록 빡빡하게 짜인 일상을 견뎌 내느라 일주일에 한 번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대신 나는 밤거리를 배회하다가 나난을 만나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먹고는 했다.
“어이구, 동생이 참 잘 먹네. 좀 더 시켜 줘, 총각.”
포장마차 아줌마가 그렇게 말하자 나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나난과 둘이서 같이 다니면, 남들에게는 우리가 사이좋은 형제로 보이는 것 같았다. 나난은 키가 190 가까이 되는 데다가, 여자아이의 두 배는 되는 어깨를 가져서 아무도 그를 미성년으로는 보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동생 취급’ 때문에 기분이 나빠졌던 적이 한 번도 없다. 내가 작은 게 아니라, 저쪽이 지나치게 큰 거니까. 저쪽이 형님처럼 듬직한 게 뭐가 나빠? 오히려 나난에게 아양을 떨면 정말 친동생에게 그러는 것처럼 콩고물이 많이 떨어져서 좋은걸?
“난 씨~ 오뎅 하나만 더 사 주라.”
별로 궁핍한 건 아니지만, 원래 용돈이란 한정되어 있기 마련이고 이 무렵에는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법이다. 나난은 먹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는 주의라 참 좋다. 우리, 평생 가자, 나난.
“많이 먹어.”
이렇게 실컷 먹어 대는 데도 싫은 소리 한 번 안하는 진짜 천사. 헤헤, 웃다가 문득 생각 난 것이 있어 나난을 불렀다.
“있잖아, 나난.”
“어?”
이목구비가 시원스럽게 자리 잡은 호남형의 얼굴이- 어묵을 먹다가, 눈동자만 굴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과 마주치자 새카맣게 번민이 몰려들었다. 나는 하고 싶었던 말을 꿀꺽 목구멍으로 삼키고, 다른 말을 했다.
“……오뎅 하나 더 먹어도 돼?”
“그래, 먹어.”
“평생 형님으로 모실게.”
다 먹고 난 뒤 나난 씨가 활짝 웃을 수 있게 애교를 떨어 주는 건 기본이다.
불쌍한 진성이. 하얗게 빛을 발하고 있는 달을 보니 어딘가 갇혀 있을 하진성이 안타까워져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걸어 오늘 나난 씨에게 얻어먹은 간식거리 목록을 전부 읊으며 ‘밥은 먹고 다니냐?’고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후식으로 배부르게 욕을 잡쉈다. 아, 오늘도 보람찬 하루.
얼마 안 되어- 나난은 최근에 새로 시작한 야간일 때문에 먼저 가 버렸다. 모두 바쁘구나. 나만 어딘가 바위 사이에 끼어 정체되고 있는 것 같아.
그렇게 평소처럼 혼자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다가 또 ‘조하인’을 발견했다. 이것으로 두 번째다. 그는 최근 유일하게 머릿속에 자리 잡은 번민거리였다.
처음 그를 학교 밖에서 본 것도, 이렇게 여우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밤거리를 배회하는 중이었다. 당시에 어디선가 본 거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곧바로 기억해 내지는 못했었다. 입학식 때 박진욱과 시비가 붙어 꽤 소란스럽기는 했었지만 5층 높이의 교실에서 내려다봤던지라 얼굴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던 것이다. 당연히 그가 조하인이란 것도 몰랐다.
다만, 뭐랄까? 네온사인 불빛 아래 서 있는 그는 굉장히 특별한 분위기의 사람이어서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그의 얼굴을 머릿속 깊은 곳에 저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도 그는 지하 클럽으로 통하는 입구에서 웃는 얼굴로 몇 명의 외국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얼굴이 몹시도 온화하게 웃고 있어서, 나는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 모습을 훔쳐보았다. 그저 홀린 듯이 한참 동안 그 녀석을 바라보았다.
나난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또래로는 보이지 않는 녀석. 그를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가 왠지 어른스러워 보였다. 박진욱이 아직 치기 어린 골목대장 같다면, 그는 훨씬 섬세하고 훨씬 아름다웠다. 그를 둘러싼 분위기는 고요하고 따뜻한 색을 띠고 있었다. 그런 동시에 분명하게 ‘선’이 보였다. 아마도 이 선을 넘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힘든 일이 되겠지.
녀석은 내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대화를 끝낸 그는 금세 담배를 벽에 비벼 끄고는, 머리가 노란 외국인들과 함께 지하의 클럽으로 내려가 버렸다.
나는 그가 사라진 클럽 입구를 내려다보았다.
나난과 진성이에게 말하기 힘든 일 들이 하나둘 늘어 가고 있다. 그 둘도 그럴까?
누군가를 처음 본 순간 온몸의 세포가 일어나서 지잉, 우는 것 같은 느낌을 아시는지?
처음 그를 여기서 발견한 후로 내 시선은 언제나 조하인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는 내가 유일하게 친해지고 싶다고 느낀 동급생이었다.
학교에서 그를 다시 마주쳤을 때는 굉장히 인상이 강렬하게 남아 있던 사람이 나와 똑같은 교복을 입는 동급생이란 것에 놀랐고, 또 그 ‘조하인’이란 사실에 거듭 놀랐다. 그는 내가 상상했던 ‘조하인’과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었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만난 그 청년과도 달랐다.
학교에서의 조하인은-
그토록 고압적인 고등학생은 그 전엔 본 적이 없다. 적어도 겉으로는 조금도 양아치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유명 사립 명문고에 다니는 도련님쪽이 어울린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 가지 확실한 건, 녀석이 나를 포함한 동급생 모두를 명백하게 ‘바보’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빈정거리거나 잘난 척하는 일은 없다. 다만 경멸을 가득 머금은 시선이 서늘하게 박진욱을 노려볼 때는 가끔 나까지 오싹해지곤 했다. 차갑게 비웃고 눈 아래로 타인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꽤 그 얼굴에 잘 어울렸다. 또래와 어울려 노는 법도 없었다.
도전해 오는 불량학생을 거침없이 때려눕히는 패턴이 이해가지 않을 정도로, 그는 우리와 다른 세계에 있었다. 듣자 하니 그의 지론이 ‘바보는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였던가? 아무튼 그 위화감이 이상하게 내 신경을 건드렸다. 그래 봤자 양아치.
그러나 그 고압적인 태도를 비웃었던 건 한순간이고, 나는 나난을 대할 때와 거의 비슷하게 그를 향한 호감이 가득 샘솟았다.
친해지고 싶어. 친구가 되고 싶어.
그걸 깨달았을 때는 정말로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기뻤다. 부끄러워서 아무에게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정말로 그와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이쯤에서 고백하자면, 흠흠. 반장이 되었습니다.
부끄러워라……. 이건 죽어도 나난이나 하진성에겐 말 못하지.
그러니까 내가 왜 반장이 되었냐면 내가 그중에서 제일 덜 불량해 보였던 데다 아무도 반장 따위를 하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하인이 9반 반장이기도 했고. 즉, 조하인과 가끔은 우연처럼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답지 않게 소소한 희망이다. 그 소망은 쉽게 충족되지 않았지만, 뭐…… 그 외에 다른 부가 효과를 얻었으니 만족하고 있다. 아무래도 반장이라는 직책이 선생들의 시선을 많이 타는 위치인지라 박진욱 패거리들이 나를 괴롭히지 않았던 것이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각오하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소소한 이득에 스텝 밟으며 기뻐하는 중이다.
권위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직함이지만 그게 어디야? 바로 옆의 짝이 하루가 다르게 멍이 늘어 가는 동안 나는 편안하게 학교생활을 즐기고 있지 않은가? 더불어 뒷자리 양반은, 공식적으로 조하인에게 깨진 이후로 쉬는 시간도 조용해졌다. 집합 장소도 교실 밖, 불량함과 잘 어울리는 곳으로 정해졌고, 낙원이로세. 얏호! 그렇게 교실은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착각했습니다. 조하인이 얼마나 냉정한 인간인지. 거의 매일같이 울기 직전까지 몰리고 있어요.
감히 말이라도 걸라치면 숨이 멎을 정도로 차갑게 노려보았고, 쓸데없이 기웃거리며 폐라도 끼쳤다가는 베어서 피라도 철철 흘릴 수 있을 것 같은 독설을 덤으로 들을 수 있었다.
오늘도 교무실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기쁜 마음에 다가섰더랬다. 그가 유인물을 잔뜩 들고 있기에, 폐 속으로 가득 숨을 들이마시고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도와줄까?”
잠깐이지만 조하인은 나를 아주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봤었다. 그가 말했다.
“꺼져.”
아니, 호의에 그런 식으로 답하는 법이 어디에 있어? 그동안의 부작용인가? 아주 기분 나쁜 거라도 피한다는 듯이 빠른 걸음으로 저만치 걸어가 버리는 조하인의 뒷모습을 보며 내가 뭔가 잘못한 건가 싶어 얼굴이 붉어졌다. 다시 생각해 보니 조하인이 무겁지도 않은 종이 몇십 장을 동급생과 같이 나눠 들 정도로 사근사근한 성격은 아닌 듯하다. 으흠, 그렇군. 도움에 솔직하게 기뻐하지 못하는 부끄럼쟁이었구만?
그래서 재도전. ‘하하하, 미래의 친구여! 도움받는 것이 부끄럽다면 스스럼없이 도와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겠다!’가 목표였다.
오늘도 유인물을 가득 들고 가는 불량 청소년 조하인의 앞길을 나는 거침없이 막아섰다…기보다는 뛰어들었다. 시야의 사각지대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나 때문에 조하인은 깜짝 놀란 것 같았다.
“우왓!”
그것과는 별개로 지나치게 긴장했던 나는 조하인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미끄러져 버렸다. 넘어진 게 아니다. 미끄러진 거다.
계산 착오로 엄청나게 우스운 꼴로 엎어진 내 위로 하얀색 A4용지가 너울너울 떨어져 내렸다. 사락사락 바닥 위를 나는 종이 소리만 들려온다. 이윽고 복도는 완전히 적막해졌다.
망했다. 엄청나게 화내겠지? 때릴까? 패려나? 차려고?! ‘히익……!’ 한 걸음 떨어지는 그의 다리를 보며 나는 거의 절망에 가까운 미래를 상상해 버렸다. 친해지고 싶은 녀석에게 맞고 싶지 않아 눈을 질끈 감는데,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잠시 뒤 한숨을 쉰 그는 별말 없이 손을 뻗어 나를 일으켜 주었다.
사, 상냥하기도 하지!
“아, 그러니까 그게, ……미안.”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고야 말았다. 피해자인 그는 멀쩡히 서 있었고 가해자인 나는 넘어져 있었지만 백번 사죄해야 할 입장은 내 쪽이었다.
“정말 미안하다.”
다행히 화를 내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얼른 바닥에 흩어져 있는 서류를 주워 모았다. 그는 별로 원망하는 기색도 없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마디도 안 하는 게 무섭긴 했다. 평생 누군가의 눈치를 본 기억이 없는 나는 과묵한 동급생의 시선에 오들오들 떨 타이밍이란 걸 처음으로 느꼈다. 나는 흩어진 서류를 순식간에 모두 주워 그의 품에 안겨 주었다.
그는 끝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눈치를 보는 나를 아주 차갑게 한 번 보고 제 갈 길을 갔을 뿐이었다. 무표정하게 관찰이라도 하듯 보고 있는 그의 얼굴을 1초도 더 마주 볼 수가 없다. 비, 비싸신 분이군요. 그의 뒷모습을 보고 가슴을 잡고 휘청이는 시늉을 하며 익살을 떨었지만…… 진짜로 가슴이 싸했다.
저 눈빛, 알고 있다.
조하인이 자신을 따르는- 겉멋만 잔뜩 든 양아치들을 볼 때의 눈이다.
나난을 동경하는 애송이들이 나난을 귀찮게 만들 때, 그가 몹시 성가셔 하는 눈빛이다. 그러니까 눈에 들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는 아랫것들을 보는, 높으신 분의 환멸 가득한 시선이라 이거지.
아, 허탈해. 반장까지 됐는데.
나는 포기가 빠른 인간이다.
해서 안 되면 그만둔다가 내 방침.
조하인의 생각을 알아차린 순간 “텄군.” 하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짱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알짱거리는 애송이로 낙인 찍혔다면 더 이상 삽질해 봐야 내 꼴만 우습게 된다. 그렇게까지 해서 친구를 사귈 필요는 없잖아?
도대체 친구란 어떤 식으로 사귀어야 하는 거냐고!
모처럼 설렜는데 안타깝다. 뒤돌아서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체모를 호감에 잔뜩 휘둘리고, 안 하던 짓을 하다가 처참하게 자폭해 버렸네.
학교에선 무섭도록 도도하지만, 사실은 굉장히 아름답게 미소 지을 줄 아는 녀석은, 아무래도 나를 싫어하는 것 같다. 이 이상 접근해 봤자 역효과만 날 것 같아서-
소심하게 마음을 접었다.
우리는 인연이 아닌가 봐.
……나난한테는 말 안 하길 잘했네. 틀림없이 죽고 싶을 정도로 비웃었을 거야.
* * *
예상과는 다르게 죽고 싶어지도록 비웃은 건 나난이 아니라 하진성 쪽이었다. 하진성은 거의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특히 조하인이 나를 싫어하는 것 같다는 대목에서. 입을 연 내가 병신이지만……. 너 이 새끼, 좀 맞아야 정신 차리겠구나? 이를 아드득 가는데 나난이 사락사락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그럼 친구가 없어?”
“없어, 없어.”
중학교 때는 밥을 먹는 것도, 몰려다니며 떠드는 것도, 농구를 하거나 공을 차는 것도 전부 나난과 하진성과 함께였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라 그 모든 일들을 할 수 없다는 말씀. 덕분에 무지 심심하다. 스토킹하는 소일거리도 없어졌고…….
“그나저나 조하인이란 놈은 어떻게 된 인간이야? 그렇게 잘난 인간이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내가 알겠냐?”
나난이 물었다.
“그럼 넌 쉬는 시간에는 뭐해?”
“공부.”
“푸합!!!!!!”
하진성이 먹던 라면 국물을 내뿜었다.
“아, 이 씹새끼, 드럽게!”
“웃기시네! 어디서 구라를?”
결국 우리는 어지럽게 바닥을 뒹굴며 서로의 목을 졸라 댔다. 그 난리 통 와중에도 나난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문득 그가 물었다.
“우주인은 어때?”
하진성을 걷어차서 날려 버리고는 잽싸게 굴러 일어났다.
“뭐? 우주인?”
“별일 없는지?”
“마주친 적도 없어.”
“그래.”
그릇을 들어 후루룩 다 마신 나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성큼성큼 걸어 하진성의 옷깃을 잡아 일으켰다.
“뭐, 뭐야?”
“구경하러 가자. 그 하인이라는 놈.”
하진성이 활짝 웃자 나난도 싱긋 웃었다. 오히려 내가 당황해서 둘의 앞을 막아섰다.
“왜에? 재밌겠는데, 뭘. 안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