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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그래서 우리는 또 페이디드(Faded)라는 클럽 앞에 와 있다. 우중충한 내 안색에도 불구하고 하진성은 뚫어져라 클럽 앞을 보고 있었다.
“안 어울리게 소심한 척은. 어차피 친해지긴 텄다며?”
그게 아니라. 이건 내 보물이었단 말이야. 훈훈하게 친구 되기는 포기했지만, 관찰하는 취미는 버린 게 아니라서 학교 안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밤 산책 때는 꼭 이 앞을 얼쩡거리고는 했었다. 그동안의 관찰 결과에 따르면 적어도 일주일에 세 번은 이 시간쯤 페이디드 앞에 나타났으니까.
“아!”
무심코 내뱉은 탄성에 나난과 하진성의 얼굴이 휙! 돌아갔다.
“저 녀석인가?”
조하인이었다.
“얼굴에 힘 풀렸어.”
“엥?”
“솔직히 말해 봐. 저 새끼한테 반했냐?”
그 말에 하진성의 코를 물어뜯었다. 으아악! 하고 뒤로 뒹구는 놈을 발로 밀어낸 후, 나난과 함께 페이디드 앞을 보았다.
“잘생긴 녀석일세.”
“너만큼은 아니야.”
자기 잘생겼단 말은 좋은지 나난이 씨익 웃었다. 어느샌가 옆에 붙은 하진성도 나직하게 감탄한다.
“남다르긴 하네.”
“역시 그렇지?”
조하인은 나난과는 다른 의미로 ‘미성년자’ 같아 보이지 않는 녀석이다. 이름이 하인인 것조차 컴플렉스가 되지 않을 것같이 고고한 놈이랄까? 어른스러운 표정도 그렇지만 분위기에서도 전혀 풋내가 느껴지지 않아 더욱 그랬다. 어른스러운 아이, 정도가 아니라 이미 어른. 나는 빨리 성인이 되고 싶은 만큼 그런 구석에 몹시 약한지라 어느새 입까지 조금 벌리고 녀석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것도 나난이 벌어진 입 안에 손가락을 쑤셔 넣어서 겨우 깨달았지만…….
“근데 들었던 거랑은 다르게 싸가지 없어 보이지는 않는데?”
“응, 사실은 무지 착한 녀석일 거야.”
“소설 쓰고 있네. 야, 우리도 들어가 보자.”
“뭐? 어떻게?”
“저 자식도 들어갔는데, 우리가 까일 리 없잖아?”
“이런 차림으로?”
셋 다 슬리퍼에 동네를 배회하는 백수 삼촌 같은 옷차림인지라 서로를 마주 보고 잠시 침묵했다. 그나마 나난이 운동화는 신었네?
“나난, 출동이다! 가서 뭐하는지만 보고 와.”
하진성이 나난의 엉덩이를 밀었다. 엉거주춤하게 앞으로 떠밀려간 나난이 머리를 긁적이며 뒤돌아본다.
“파이팅!”
내가 주먹을 불끈 들어 격려하자 나난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애초에 보러 오자고 한 것도 너였잖아. 크큭!
할 수 없이 비실비실 걸어 페이디드 앞으로 간 나난이 들어가기 전, 한 번 더 우리 쪽을 돌아보았다. 우리가 빨리 가라는 듯 손짓하자 나난은 등을 쭈욱 폈다. 그리고 클럽 입구 쪽으로 들어갔다. 한 번도 유흥업소 안으로는 들어가 본 적 없었던 꼬꼬마 하진성과 나는 키득거리며 잔뜩 부푼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어라? 뭐야?”
너무 쉽게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나난 씨.
“에게?”
역시 쫓겨날 리가 없나? 하긴, 저 녀석이 어디에서 까인 걸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하진성의 등을 밀었다. 돌아보는 하진성과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었다. 하진성도 마주 웃는다. 그리고 녀석은 용감무쌍하게 클럽 쪽으로 향했다. 1분도 안 되어서 다시 돌아왔다만.
“집에나 가래.”
“풋! 푸하하하하하하!!!”
“아아, 하여튼 난 씨 겉늙은 건 알아줘야 돼.”
“그보단 슬리퍼나 갈아 신고 다시 와! 크큭!”
어쨌든 출입에 실패한 우리는 거기서 한참을 기다렸다. 쭈그리고 앉아서 담배 두 개비를 다 태웠을 무렵, 나난이 클럽에서 나왔다.
“우와, 나난 씨~ 역시 성공이구나?”
흥분한 하진성이 나난의 목을 흔들어 댔다. 어지럽게 흔들리던 나난이 진성이를 떼어 내고 내게 말했다.
“그 녀석 거기서 일하던데?”
“뭐?”
“바텐.”
“바텐더?”
“어.”
커다란 몸을 쭈욱쭈욱 펴며 몸을 풀던 나난이 시원스럽게 말했다.
“돌아가자.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다.”
일찍이 노동 청소년이 된 나난은, 제대로 일하는 또래에게는 약한 구석이 있었다. 자기가 돈 벌어 쓰는 녀석치고 똑바르지 않은 놈 없다는 게 나난의 지론이다.
……그나저나 미성년자 출입금지인 업소에서 당당하게 주류 판매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니, 지나치게 대담하지 않아? 아무리 학교에서는 멀리 떨어진 유흥가인 데다가 외국인들이 주로 몰리는 클럽이라도 그렇지.
어째 조하인의 그 차가운 시선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 학교 양아치들조차 네 눈에는 그저 세상 무서운지 모르는 어린애로 보였을 것이다. 그렇군. 그 눈빛은 잉여인간에 대한 환멸이었어.
“나난, 나 혹시 일할 만한 데 없어? 학교도 일찍 마치는데.”
“……음, 알아봐 줄까?”
“응!”
아…… 괜히 남의 비밀을 목격한 것 같은 느낌에 짠해진 건 둘째 치고 돈 벌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3. 무색無色의 세계
박진욱과 그 패거리가 실로 오랜만에 우리 교실에서 모였다. 수업보다는 수업 외 활동에 더 관심이 많은 녀석들이다. 당연하게도 그 녀석들의 대화 주제는 ‘특별활동’에 대한 것이었다.
“씨발, 분위기 존나 살벌해. 아씨, 조하인, 그 새끼 집합에는 도대체 왜 빠지는 거야? 선배들이 그 새끼 잡겠다고 난리잖아? 그놈 때문에 왜 우리까지 긴장 빨아야 되냐고?”
‘저리 꺼져, 이 잉여들.’ 그 이상의 생각은 없을 것이다, 조하인에게는.
“아, 씹. 그럴 거면 애초에 짜져 있지. 처음엔 왜 나대서 이 지랄?”
“주인 선배는 뭐래?”
“몰라, 씨발. 그 선배 요즘 뭐에 홀려서 학교에도 잘 안 나와. 썅, 그러니까 조하인, 이 존만이도 나대는 거고.”
“야, 모이래.”
한 놈이 와서 우르르 끌고 가고 나가니, 교실에 아주 짧은 정적이 찾아왔다. 곧바로 웅성거리기 시작했지만.
역시 조하인은 저들과 융화되지 못하는 타입이었구나. 조하인 밑으로 들어갔다고는 해도 저렇게 불온한 것 보니, 전혀 관리는 안 되고 있는 모양이다. 쯧쯧. 하긴 조하인이 또래의 사내자식들을 데리고 대장 행세를 하는 건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녀석이 그런 에너지 넘치고 의욕 가득한 일을 해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응, 응.
그렇게 진지하게 조하인 분석을 하고 있는데 앞에 앉은 녀석이 뒤를 돌아본다.
“저기.”
“어?”
짧은 사색을 끝내고 의식을 전환하자니 녀석이 수학 교과서를 들이밀었다.
“이거 어떻게 계산하는 거야?”
……이봐. 낸들 알겠냐?
생전 처음 겪어 보는 사태에 필요 이상으로 당황했는지 앞에 녀석이 흠칫 놀랄 정도로 인상을 써 버린 모양이다. 재빨리 미간의 주름을 펴고 최대한 가볍게 말했다.
“나 공부 못해.”
앞자리분이 “몰라?” 하고 확인 사살하듯 한 번 더 말하더니, “아니면 방해하지 말라는 거야?” 하고 되물었다. 녀석의 얼굴이 진지했다. 이 자식, 진짜 이상한 녀석이구나. 상고 쉬는 시간에 이렇게 진지하게 학우에게 수학문제의 풀이를 묻는 녀석은 자네뿐일 거라고 생각하네만.
“아니야, 진짜 몰라. 나 바보야.”
앗차, 사실이지만 내 입으로 먼저 밝히다니. 첫 경험에 지나치게 당황한 모양인 듯 앞자리분이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웃기에 눈 밑을 긁적였다.
어느샌가 그 녀석 옆자리 녀석도 뒤돌아보고 있었고, 하루가 다르게 멍 자국이 늘고 있는 짝까지 힐끔거리고 있어서 조금 얼굴이 뜨뜻해졌다. 앞자리 녀석이 가만히 나를 응시하더니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밥 같이 먹을래?”
지잉~ 청춘 드라마의 세계에서나 나올 법한 이 훈훈한 대사라니. 남고에서 들을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더니, 녀석이 이빨을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인상이 참 좋은 녀석이다. 매일 뒤통수만 봤는데, 앞모습도 그럴싸한 분이셨구나 싶어 신선했다.
그리하여 나는 앞자리분, 이름은 김한영이라는 녀석의 집단에 낄 수 있…게 되었달까……? 좀 복잡 미묘한 기분인데? 언제나 종, 땡- 치면 빛의 속도로 달려 급식소까지 가서 아무 곳에나 빈자리에 앉아 식사하던 생활도 돌연 끝나 버렸다. 상급생들 사이에 끼어 밥만 먹고 일어나기도 했던 그날들이 그립냐면, 그건 아니지만.
건너편에 앉은 짝은 박진욱 패거리에 끼어서 밥을 먹고 있었다. 녀석들이 밥을 다 먹고 나면 식판을 치우거나 시중을 드는 폼이 자연스럽다. 의외로 저쪽 생리가 잘 맞는 걸까? 멍하니 그쪽을 보고 있었더니 김한영이 말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 별생각 안 하는데.”
식판을 들고 옹기종기 모여 앉은 이쪽 아이들을 보며 나는 웃어 보려고 노력했다. 아, 이거 엄청나게 간질간질한 느낌이로구나. 고작 같이 밥 먹는 것뿐인데, 이렇게 모여 앉는 것이라든가, 다른 일행이 다 먹을 때까지 속도를 맞춰야 하는 것 등. 신세계의 질서는 꼭 소녀만화 속의 세상 같군.
식사가 빨리 끝나서, 젓가락을 손에서 놓고 멍 때리고 있었더니 금방 김한영이 말을 걸어왔다. 새로 끼인 무리의 일원에게 신경 써 주는 건 좋은데, 나 은근히 낯가리는 성격이라서.
“신경 쓰여?”
“뭐가?”
“박진욱. 아니면 박경일.”
박경일? 3초간의 연산과정 끝에 그게 내 짝의 이름이란 걸 깨달았다. 음. 맞아, 그런 이름이었지. 어깨를 으쓱이고는 침묵했다.
짝은 내 뒷자리 양반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편이었다. 어쩐지 박진욱을 의식하는 것만큼이나 나를 의식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건 과민반응이라고 치부하고 있다. 어쨌든 짝은 뒷자리 양반의 무리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는데, 어쩌면 단지 겁내는 걸 수도 있었다. 아무튼 그 녀석은 웬만한 괴롭힘에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스트레스에 강한 성격은 아닌 것 같으니까 아마도 자의로 상황을 견디고 있는 것 같았다.
보면 조금은 알 수 있지. 저 경우에는, 억지로가 아니라 ‘자기가 원해서.’이다. 특히 짝이 저 패거리들을 볼 때, 지긋지긋하다는 시선 대신에 동경으로 가득 찬 시선을 보내는 것이 그 증거였다.
“어째서 양아치 따위가 되고 싶은 걸까?”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린 모양이다.
“넌 정말 겁을 안 내는구나?”
“뭐?”
고개를 돌려 보니 김한영이 재밌다는 듯 나를 보고 있었다.
“허세가 아니었어.”
앞자리 양반은 그렇게 덧붙이며 미묘한 표정으로 생긋 웃었다.
수업이 끝나고, 가방을 어깨에 메고 교실을 나오는데 김한영이 옆으로 붙었다.
“박진욱이 왜 널 안 건드리는지 알아?”
“반장이라서?”
피식, 김한영은 그렇게 실소를 터뜨리고는 말을 이었다.
“안 건드리는 정도가 아니라, 널 꽤 신경 쓰고 있어. 바로 뒷자리잖아? 요즘 조용하지 않아?”
하긴, 괜히 뒷자리 양반의 발작에 휘말려 불편해지는 경우가 부쩍 줄긴 했다.
“떠보고 있는 중이야.”
“왜? 내가 뭘 했다고?”
“음- 너, 박진욱을 좆도 아니게 보고 있잖아?”
헐. 그 말 자체보다는 김한영 입에서 비속어가 나왔다는 게 더 신기해서 잠깐 쳐다봤다. 소녀만화 속 세상에도 욕은 존재하는구나. 허허, 웃고 있자니, 김한영이 말했다.
“혹시 조하인이랑 친하냐?”
“전혀.”
“그래?”
친했으면 좋겠지만, 안 되더라고. 김한영은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래, 가라. 내일 보자.”
하교 길에 잠깐 목격한 조하인은, 뭔가 시비가 붙은 듯하더니 인상을 팍 쓰고는 그들을 따라 건물 뒤쪽으로 사라졌다. 오늘 뒷자리 씨가 말한 뭐, 그런 용건인 걸까?
입학식 때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조하인은 고압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 것 치고는 요령이 없는 놈이다. 분쟁이 싫다면 분란의 근처로도 가면 안 된다. 그런데 저렇게 꼬박꼬박 문제를 피해 가는 법이 없으니- 쯧쯧. 안타깝긴 하지만- 나 역시 쓸데없는 분란은 싫어서. 문제의 근처로 가지 않는 게 최선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고.”
나는 내 갈 길로. 나는 호프집 알바가 있어서 좀 바쁘단다. 방학 때 했던 배달 알바하고는 차원이 다르게 패이가 세서 행복한 나날이었다.
* * *
왁스로 머리를 만지고 일자로 떨어지는 진에, 댄디한 스타일의 블레이저를 걸쳤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검정색 엔지니어 부츠까지 신고 났더니 거의 완벽한 것 같았다. 나는 거울을 보고 씨익 웃고는 집을 나섰다.
나난이 구해 준 아르바이트 자리는 썩 마음에 들었다. 학교에서 멀기도 했고, 여자들끼리 많이 찾는 호프집이라 더 그랬다. 대학생 누나들은 넋 놓고 보게 될 정도로 예쁘게 하고 다녔고, 분위기도 좋았다. 무엇보다 무척이나 안팎으로 이쁨받고 있어서 은근히 일하러 갈 시간만 기다릴 정도다.
“진성이 왔냐?”
그래도 이름만큼은 하진성의 이름을 빌려 쓰고 있었는데. 흔하기도 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헷!
“형, 오늘 손님 많네요?”
“응~ 그러니까 빨리 움직여.”
블레이저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는 유니폼으로 얼른 갈아입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바에 서 있었다. 나는 사근사근하게 웃으며 사장님 앞에 앉아 있는 누나들에게 “오셨어요?” 하고 인사를 했다.
“와, 이 자식 눈웃음치는 것 좀 봐.”
헤헤, 웃으며 형 옆에 서자 누나들이 “왜 그래? 귀엽기만 한데.” 하고 내 편을 들어 주었다. 누나들은 사장님의 지인들.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이 시간에 들러 잠깐 시간을 보내다 가고는 하는 단골손님들이었다.
“그쵸? 귀엽죠?”
검지로 양 볼을 푹 찌르며 아양을 떨자 누나들은 까르르 웃는다. 아아, 가슴이 지잉 울렸다. 여자들이란 참 사랑스럽기도 하지. 어떻게 웃음소리만으로 이렇게 가슴을 간지럽게 만들 수 있을까? 누나들도 내가 자기들을 좋아하는 걸 아는지, 따르는 강아지를 예뻐하듯이 잘해 주었다.
“넌 아주 그냥 눈가에 바람기가 자글자글 하다.”
“전 순정파예요.”
두 손을 모으고 그렇게 말하자 누나들이 좋아 죽는다. 연상의 상대에게 이쁨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정도는 도가 텄다. 그런데 어째서 동성의 또래에게는 그렇게 인기가 없는 걸까? 아, 원래 이런 타입은 좀 재수 없으려나? 하긴, 나 같아도 하진성이 누나들에게 아양 떨면서 귀여운 척하면 한 대 때려 주지 않고는 견디기 힘들 것 같다. 그런 것과 별개로 그 녀석, 유명한 연상 킬러지. 고1 주제에 말이야.
벨이 울리고 주문 받으러 가는 동안, 월급 들어오면 할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공사장 알바에, 피시방 알바, 목욕탕 때밀이 알바까지, 수많은 알바를 전전해 보았지만, 노동 대비 시급은 여기가 제일 좋았다. 게다가 매일같이 눈 보신하는 데다 손님들은 대개 내게 잘 대해 주었다. 베이비페이스라고 귀여워하거나 번호를 물어보는 누나들도 그렇지만, 갑작스레 일어나는 소소한 이벤트들이 그 재미를 더해 주었다. 이를테면 어제는 화장실에 갔다 오는 길에 입술에 ‘츄’를 당했다고. ‘츄!’를!
나난이었다면 오히려 누나들 쪽이 어쩔 줄 몰라 했겠지만, 이쪽은 만만한 동생 취급받는 건지 마음껏 성희롱당하고 있다. 조금 친해졌다 싶으면 뺨을 조물락거리며 만지는 누님이 있지를 않나? 엉덩이를 톡톡 치는 짓궂은 분이 있질 않나? 뭐, 전혀 싫지 않으니까 사장님이 질색하는 눈웃음으로 보답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아, 정말 착해 보이는 애네?”
“그치? 귀엽지?”
사람 앞에 세워 놓고 너무 부끄럽게 만드신다, 누님들. 하하하. 순진하게 미소 지으며 쑥스럽다는 듯 굴자 그중에 한 분이 물었다.
“저기, 몇 살이에요?”
“만으로 스무 살이요.”
“정말? 그래서 애기처럼 보였구나~!”
“애기 아닌데요. 하하.”
그러는 누나들은 몇 살인데? 도대체 몇 살인데 중년 아저씨처럼 제 볼을 조물딱거려요? 그러는 사이에 누님들의 꺄아- 꺄아- 내지르는 고성에, 구석에서 웅크리고 자고 있던 남자가 작게 신경질을 내며 눈을 떴다.
“뭐야?”
“아니야, 더 자.”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는 언뜻 보고 여자인 줄 알았을 만큼 머리를 귀밑까지 길러 아이돌처럼 부풀린 사람이었다. 밝은 갈색 머리카락에 베이비 펌을 해서 절로 만져 보고 싶을 만큼 귀여운 인상이다. 그런 것치고는 지독하게 무표정했지만.
눈이 마주친 채로 3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나는 생긋 웃으며 물었다.
“주문은?”
“생맥 3000cc.”
목소리가 거칠거칠하다. 여러모로 겉보기와는 다른 캐릭터네. 누나 중 한 명이 그에게 “맥주 마시게? 또 뭐 사 줘? 안주 골라 봐.” 하고 귀여운 목소리로 아양을 떨었다. 뭔가 원래 정해 놓은 메뉴가 있는 듯싶었지만, 소년 같은 그 남자가 깨어난 순간 그 남자 위주로 주문은 다시 짜여졌다.
주문을 모두 받아 적고, 그 아이돌같이 귀여운 남자를 한 번 더 보았다. 역시나 눈이 마주쳤다. 어째서 그렇게 빤히 보고 있는지요? 아하하. 땀이 날 것 같은 속마음은 숨기고 그 살벌한 무표정을 향해 한 번 더 웃어 주고 돌아섰다.
그 후, 얼마나 정신없이 일했을까? 형이 잠시 바의 계산대를 비운 사이, 그 아이돌 같은 남자가 지갑을 들고 계산대로 왔다.
나는 얼른 계산대 앞에 웃는 얼굴로 섰다. 의외로 남자는 키가 컸다. 가느다란 체구에 귀여운 얼굴, 만져 주고 싶은 헤어스타일을 한 것 치고는 나보다 손가락 두어 마디는 더 큰 것 같았다. 이쪽도 2차 성징이 다른 또래보다 빨랐던 편이라 이미 클 만큼은 다 컸는데도 말이지.
“십이만 오천 원입니다.”
그는 핑크색 장지갑을 열어 카드를 꺼냈다. 아무리 봐도 본인 지갑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동작 빠르게 카드를 받아 계산을 하고 나자 남자는 또 빤히 내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나 아까처럼 무표정하지는 않았다. 그 얼굴에 꼭 어울리는 사랑스러운 웃음을 눈꼬리에 달고 있었다. 그 표정 변화가 어색해서 조금 어색하게 마주 웃었다. 그가 거칠거칠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물어왔다.
“이름이 뭐야?”
…엥? 저한테 물으신 겁니까? …물론 그러시겠지요. 다짜고짜 반말이냐? 처음 보는 사내자식에게 이름 같은 거 가르쳐 주고 싶지 않아! 그러나 내겐 처음 보는 사내자식은 물론이고 유괴범에게도 가르쳐 주고 경찰에게도 가르쳐 줄 수 있는 이름이 있다.
“하진성-입니다. 여기 이름표 있으니까요.”
“진성이. 응, 괜찮은 이름이네.”
내 이름이 괜찮은지 어떤지 이러쿵저러쿵 떠들지 말란 말이다.
“여기서 일해?”
“보시다시피.”
“그래, 열심히 일해.”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이 상 한 사 람 이 야.
누님들을 양옆에 잔뜩 끼고 그렇게 퇴장하는 남자를 보며 다소 착잡해지는데 화장실에 갔다 온 사장님이 내 어깨를 살짝 쳤다.
“저 새끼, 잘생겼지?”
“새끼라니요, 손님인데요.”
“자주 와. 올 때마다 다른 여자들 데리고. 계산도 지가 하는 거 아니면서. 재수 없어.”
“그렇구나.”
싸가지 없는 놈인 건 확실해. 자기는 몇 살이길래 반말 ‘찍!’인지? 뭐 어쨌거나 나보단 위겠지만 예의가 아니잖아!
새벽 1시쯤에는 나난이 왔다. 이 일도 나난이 찾아 준 거고, 형도 나난과는 안면이 있는 사이여서 출입에 거침이 없었다. 물론 미성년자라는 건 모르는 게 확실했지만. 아무튼 나난이 오면 여자 손님들이 좋아한다고, 형은 그가 올 때마다 공짜 생맥을 500cc씩 내주었다.
앞에 맥주잔을 내려놓자 “일은 안 힘들어?” 하고 그 선량한 녀석이 묻는다.
“안 힘든 일이 어디에 있겠냐? 그래도 재밌어.”
흐흐, 웃는데 나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해. 여기 형님, 진짜 사람 괜찮아.”
그러게. 알고 싶다. 너랑 형이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지. 나난 성격상 절대 서비스업에 종사했을 리는 없다. 따라서 고용관계도 아니었을 테고.
“걱정 마.”
하진성은 내가 밤에 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고 하니까, 학교는 어떻게 가느냐, 어머니는 걱정하지 않으시냐? 이것저것 물었었지만 역시 나난은 그런 쪽으로는 묻지도 않았다. 내가 하겠다고 했으니까 내가 알아서 하는 거다. 다만 사장님께 폐 끼치지 않도록 열심히 하라는 격려만 했다. 맥주를 두 번에 걸쳐 다 마신 나난은 맥주값을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
“자고 싶어.”
“내 얼굴 보러 온 거구나?”
꼬리가 있다면 마구 흔들리고 있을 것 같은 얼굴로 녀석을 배웅했다. 형이 공짜로 주라는 것과는 별개로 나난은 매번 맥주 값을 지불했다.
“한두 번은 몰라도 매번 공짜 술을 마실 수는 없지.”
그 시퍼렇게 날뛰던 젊은 혈기는 그가 공사판 일을 시작한 후로, 꽤나 건전한 방향으로 발산되는 것 같았다. 지금은 대형 면허를 따려고 아는 사람에게서 운전을 배우고 있다고 한다. ‘트럭운전수’가 되고 싶다고 했던 것 같은데,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서운한 것 같기도 하고.
하진성은 공부가 싫으면 ‘기술’을 익혀 보는 건 어때? 하고 제안했지만 나난은 ‘운전도 엄연한 기술’이라고 받아쳤다. 게다가 나난은 몸이 고되어 한계까지 몰려야 만족하는 전형적인 육체파다. 아무튼, 17세 소년답게 ‘꿈’이란 걸 이야기하는 나난이 부러웠다.
일반적인 길과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 똑바로 어른이 되어 가는 그 녀석의 뒷모습이 듬직했다. 그런 친구의 최소한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나도 힘내야지. 으샤!
공병 박스를 기합과 함께 들어 올리자 사장님이 “오오, 힘 좋은 알바생일세.” 하고 흡족하게 웃는다. 형도 좀 돕는 게 어때? 사람 좋은 것과는 별개로 너무 게으름 부리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