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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4. 악의
일이 마음에 드는 건 좋은데, 덕분에 학교에서 조는 일이 부쩍 늘었다. 마음 같아서는 등교를 포기하고 오전 내내 잠들어 있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집안이 시끄러워진다. 엄마가 울게 된다. 깨우거나 야단을 치는 일은 없지만, 엄마 혼자 아이를 키워서 내가 잘못되었다고 자책하며 훌쩍이는 걸 듣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잘 거라면 학교에 나가서 자는 편이 훨씬 편했다. 다행히도 다니는 학교는 수업 시간에 조금 조는 게 문제가 될 만한 곳도 아니니까, 부족한 수면은 학교 책상 위에서.
그러나 그 계획은 오늘만큼은 무산되었다.
사실 등교 때부터 학교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긴 했다. 아침에 학교에 왔더니 몇몇 교실 창문들이 박살이 나 깨져 있었다. 그 을씨년스러운 모습과는 상관없이 이미 익숙하다는 듯한 상급생이나 교사들의 태도도 이상했다. 무엇보다 갈아 끼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점이 제일 이상했다. 왠지 며칠은 더 이 폐허 같은 모습을 보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2교시가 끝날 무렵, 와장창, 아랫층에서 창문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졸고 있던 아이들도 깨어났지만 정작 수업하는 교사의 경우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수업을 계속할 뿐이었다.
참, 이런 소란 후, 의례 들려올 법한 웅성거림은 1학년 층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정작 사고가 난 아래층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서, 교실내의 웅성거림이 아니었다면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3교시가 시작될 무렵, 갑작스러운 호출로 웬만큼 말썽 부린다는 녀석들은 전부 교실을 빠져나갔다. 특히 박진욱은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어서 막연히 ‘뭔 일 터지겠구나’의 예고편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제 두 시간밖에 못 잤고, 눈은 거의 감겨서 꾸벅꾸벅 앞을 향해 인사하면서 졸고 있었다.
딱 콩!
“아야…….”
내 이마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이마를 문지르며 부스스 눈을 떴더니 코앞에 김한영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있었다.
“으아. 깜짝이야……!”
“잠이 오냐?”
“졸려.”
“너 조하인 봤어?”
“오늘? 아니, 못 봤는데.”
“당연히 못 봤겠지. 걔 오늘 학교 안 왔어.”
“뭐?!”
“깜짝이야!”
“아, 미안. 목소리 조절 실패.”
“주인 선배 오늘 학교 나온 모양이더라.”
……무슨 새삼스러운 일이라는 듯이 말해? 그럼 지금까지 학교를 안 나왔단 말인가? 그 표정을 읽었는지, 김한영이 웃었다.
“그게 아니라, 제 시간에 등교해서 교실에 앉아 있었다나 봐. 돌아가는 분위기가 이상해. 원래는 출석도 딴 놈한테 시키고, 점심시간 전에 나왔다가 잠깐 빈둥거리다가 돌아가는데.”
“팔자 좋네.”
부럽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다가 꿀꺽 삼켰다.
“뭔가 할 마음이 생긴 게 아니냐는 말이 돌고 있어.”
할 마음이 생기다니?
“공부?”
힘이 빠진 듯 미끄러지는 시늉을 한 김한영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럴 리가 있냐?”
역시 아니었군. 그렇다면 그 수업 외 특별활동? 써클 활동?
“조심해. 괜히 시비에 휘말릴까 봐 분위기 뒤숭숭해.”
“응.”
“긴장감 없는 녀석이라 걱정이야.”
“응.”
“네가 말이야! 제대로 듣고 있는 거야?!”
“……졸려.”
한숨 쉬지 마. 나는 하품하고 싶으니까. 으아아하암~ 텅 빈 옆자리를 보며 나는 마침내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아, 이젠 진짜 한계야. 등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지른대도 자야겠어.
* * *
조하인은 오후가 되어서야 학교에 나왔다. 한쪽 무릎에 깁스를 하고 있었고 목발을 짚은 채였다. 어제 하교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었는데. 결국 그렇게 된 건가싶어서 착잡했다. 저 상태로는 일도 나갈 수 없겠지? 형편이 어려워서 일하는 거라면 정말 큰일이었다. 그래서인지 평소 차갑기 그지없던 표정이 오늘따라 수심으로 가득 차 보였다.
그의 주위로는 방어막이 쳐져 있는 것처럼 그 누구도 얼씬도 하지 않았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싫어하건 말건 비굴할 정도로 그를 따라다니던 놈들도 보이지 않았다. 정작 다치고 나서 가방 들어 줄 사람도 없다니, 안됐다.
교무실에서 교실로 돌아가던 길에 복도에서 마주친 조하인은 익숙하지 않은 목발 때문에 짜증이 잔뜩 난 것 같았다. 물론 성격상 그 짜증을 겉으로 표출할 리는 없지만 콧잔등이 아주 조금 찌푸려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신발장에서 슬리퍼를 꺼내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움찔한 조하인이 행동을 멈추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 시선을 읽기도 전에 얼른 발걸음을 돌렸다. 책망을 하든, 귀찮아하든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랬을 뿐이다. 만에 하나라도 고마워할 것 같지는 않아서 걸음을 빨리했다.
거의 빛의 속도로 걸어 교실로 돌아왔지만……. 별개로 마음속에는 잔잔한 만족감이 물결을 치듯 퍼져 나갔다.
교실에 돌아오니 짝이 책상에 얼굴을 박고 엎드려 있었다. 가만히 옆에 앉았더니 아주 작은 소리에도 흠칫흠칫 떨었다. 지켜보자니 녀석은 간헐적으로 떨고 있었다. 목에 꼭 흡혈귀의 송곳니 자국처럼 물집이 두 개 잡혀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미친새끼…….”
감정이 격해져서 그렇게 중얼거리자 짝은 완전히 얼어 버렸고 앞자리 이웃 김한영도 돌아보았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서 그의 시선을 돌려보내고는 손으로 얼굴을 훑었다.
담배로 지진 자국이다. ……잘 안 보이는 곳도 아니고, 저렇게 드러난 자리에- 그것도 살이 여린 목에다가. 어떤 미친놈이 저런 익살을 부린 거야?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시커먼 악의다.
상관하지 않으려다가 가방에서 연고를 꺼냈다. 조금 짜서 상처 자국에다가 발랐더니, 녀석이 경기를 일으킬 듯 들썩였다.
“가만히 있어.”
마치 마법의 언어처럼.
“병원에 꼭 가 봐라. 심하면 피부 이식해야 될 수도 있어.”
눈이 마주친 그는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섬세하고 여린 녀석이다. 그런 자식이 어쩌다가 그런 패거리에 끼고 싶어 한 건지. 나로서는 이해할 방법이 없다.
곧이어 박진욱도 교실로 들어왔다. 사나운 분노가 치솟았었는데, 그를 보자 그 분노도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박진욱도 상태가 별로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짝처럼 반 패닉 상태인 것도 아니지만 완전히 얼어 있었다. 옆에서 누가 소리를 쳐도 들릴 것 같지 않았다. 내가 똑바로 자기를 보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짝은 그가 뒤에 앉자 오히려 마음을 놓은 듯 어깨에 들어갔던 긴장을 풀었다.
나는 다시 앞을 보고 똑바로 앉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조하인은 무릎이 깨져서 나타났고, 내 짝은 역겹도록 가학적인 장난의 흔적이 남은 채 떨고 있다. 박진욱은 입술이 다 터져서 얼이 나가 있었고.
고등학교라는 거, 의외로 음습한 곳이었던가?
‘그래 봤자 고딩들이잖아?’ 했던 안일한 생각은 그날 오후 깨끗하게 폐기처분 해야만 했다.
* * *
내가 만만해 보이는지 담임은 꽤나 자잘한 심부름을 내게 시키는 편이었다. 반장의 일이 아닌 거 같은 일도 있지만, 어쨌거나 담임은 흔치 않게 고분고분한 나를 마음에 들어 했다. 마음에 들어 하는 만큼 할 일이 늘어난 게 싫었지만.
육상부 고문인 담임의 심부름으로 체육관으로 온 나는, 부실에 내팽개쳐 놓은 출석부와 기록표를 챙겼다. 청소 시간이긴 했지만, 제대로 청소를 하는 바람직한 학생이 있을 리 없다. 체육관은 조용하기만 했다. 얼른 배달하고 집에 가서 잠깐이나마 눈 좀 붙여야겠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빨리했다.
옆구리에 서류를 끼고 체육관을 나가려는데 지하에서 웅웅 울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담고 있는 감정의 편린에 순간 걸음을 멈췄다. 어쩌면 저렇게 즐거워 죽겠다는 듯 웃을 수 있을까? 지하엔 샤워실과 검도부실이 있다.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이런 느낌이 들면 대체로 피하는 편이지만-
나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서서 잠깐 고민했다.
뭘 하고 싶은 거야? 어둠이 깊게 계단 아래로 스며들고 있었다. 다리가 부자유스러워진 조하인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짝의 담배빵도.
“관둬.”
입으로는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발걸음은 이미 계단 아래로 한 걸음 내딛고 있었다.
쏴아……!!
까맣고 고요한 통로가 어디선가 틀어놓은 물소리로 윙윙 울렸다. 아마도 샤워실일 것이다. 나난이 없고 하진성도 논외로 둔 고등학교란, 어쨌든 아무것도 정하지 않은 내가 그냥 다녀야 할 과정일 뿐이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든.
무슨 일이 있든.
샤워실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살짝 열린 문 너머로 샤워기 수도꼭지가 전부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쏟아지는 물은 강물처럼 모여 하수구를 향해 빨려 들어갔다. 수증기가 피어오르지 않는 걸 보면 차가운 물일 것이다.
“귀여운 녀석이네.”
습기 가득한 그 공간에서 허스키한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그리고 뒤늦게 발견했다.
그곳에 조하인이 있었다.
불편한 다리로 비스듬하게 서서 쏟아지는 물을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그의 피부는 하얗게 질려 있었고 입술은 보라색과 다름없는 색으로 변색되어 있었다. 멀리서도 덜덜 떨고 있는 조하인의 가련한 몸이 보였다. 교복이 찰싹 달라붙어 체구가 고스란히 겉으로 드러났다. 의외로 근육 부피가 적은 날씬한 몸이었다.
머리카락을 따라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어지럽게 그의 얼굴을 적셨다. 호흡하는 것마저 불편해 보였다. 따닥딱딱 이가 부딪히며 나는 그 소음은 거센 물소리 속에서도 또렷하게 들려왔다. 조금이라도 손대면 조하인은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더 그곳을 향해 다가섰다.
그러자 한쪽 구석 책상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다른 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를 중심으로 몇 명의 남자들이 더 서 있었다. 그중에는 입학식 때 교실로 찾아왔던 큰곰, 작은곰 선배도 있었다.
“금 간 정도로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박살을 내 주지.”
입을 연 사람은 책상 위에서 앉아 물 한 방울 젖지 않은- ‘그 남자’였다. 머리를 한 가닥으로 묶어 꽁지머리를 하고 있긴 하지만 저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은 눈에 익다. 그 거칠거칠한 목소리도. 그런데 교복을 입고 있지 않은가?
귀에 꽂은 이어폰 한쪽을 빼내며 그 사람이 말을 이었다.
“그 건방진 태도는 다 어디로 갔을까?”
역시나 즐거워 죽겠다는 웃음기가 가득 배어나는 목소리. 그는 책상에서 일어서더니 그대로 날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대로 날아 조하인을 찼다. 겨우 서 있던 조하인을 레슬러처럼 날려 버린 것이다. 그 후 꼴사납지 않게 착지까지 하다니, 보통이 아니다. 그는 수도꼭지를 잠그고 돌아섰다.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는 그 손짓이 우아하기만 하다.
돌아선 그의 얼굴은 믿을 수 없도록 만족스러워 하고 있었다. 일광욕을 하는 고양이같이 길게 눈꼬리가 접혀 나른한 눈빛이 차올랐다.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잠시나마 처참하게 쓰러진 조하인을 잊어버렸다.
작은곰 선배가 타월을 건네자 남자는 얼굴을 닦더니, “아아.”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귀여운 얼굴에 생글생글, 간지러운 미소가 어렸다. 그 남자는 타월을 늘어뜨려 바닥에 고인 물로 적혔다. 그러고는 쓰러져 있는 조하인을, 물이 뚝뚝 흘러내릴 정도로 젖어 있는 타월로 내리쳤다. 무겁지만 날렵하게, 꼭 채찍처럼 조하인의 몸을 후려갈겼다.
……조하인은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몸은 무거운 해머에라도 후려 맞은 듯 격하게 흔들렸다. 채찍질은 재차, 삼차, 끝도 없이 이어졌다. 촥! 촥! 무겁게 후려갈기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지독해.
나난은 싸움을 밥 먹는 것보다 좋아했지만 그건 투쟁적 욕구지, 가학적인 욕구는 아니었다. 하진성도 저항하지 않는 상대를 때리는 짓은 하지 않는다.
실컷 조하인을 학대한 그는 그대로 조하인의 얼굴에 수건을 던져 버리고는 상쾌한 얼굴로 몇 번 더 복부를 걷어찼다. 퍽! 퍽! 내장이 파열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인정사정 보지 않고 축구공을 차듯 폭력을 휘둘렀다. 그러고는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정리해.”
그의 말에 선배들은 샤워기의 수도꼭지를 모두 잠갔다. 그걸 말없이 지켜보던 남자의 눈웃음이 진해졌다.
“부탁이니까 너무 일찍 고집을 꺾진 말라고, 이쁜이. 기왕이면 오랫동안 재미 봐야 되지 않겠어?”
그 목소리에 담긴 황홀감은 지나칠 정도로 진심이어서, 지켜보는 내가 다 소름이 돋았다.
어쩌지? 하진성이 문제 근처로도 가지 말랬는데,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쪽이 오히려 더 범죄일 거 같아.
그 몹쓸 놈들이 전부 빠져나가고 난 뒤에 나는 샤워실 안으로 들어갔다. 조하인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신음 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저체온증 오겠네. 싶어서 빨리 교복을 벗겼다. 그렇게 사람을 패 놓고는 그냥 버리고 가는구나. 이대로 내버려 두면 이 녀석 죽는다고. 자력으로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조하인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나를 보았다.
“구급차 부를까?”
“……관둬.”
“움직일 수 있겠어?”
“…….”
조하인은 떠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지 이를 악 물었지만, 딱딱딱 이빨 부딪히는 소리만 더 커질 뿐이었다. 입고 있던 교복을 벗어 녀석에게 둘러 주었다. 어지간히도 추웠던 건지 그 고압적이던 녀석이 얌전하다. 살짝 만져 본 녀석의 피부가 시리도록 차가웠다.
“큰일이군.”
나는 녀석을 들쳐 업었다. 석고로 깁스를 한 녀석의 다리가 성가시긴 했지만, 석고를 나중에 깨고 다시 하는 한이 있더라도 빨리 따뜻한 곳으로 옮겨야 될 것 같았다.
내가 들어 올려 업자 당황한 건지 아님 아팠던 건지, 조하인은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조금만 참아.”
그리고 거의 뛰다시피 샤워실을 나왔다. 아차, 심부름! ……됐어. 다시 오는 수밖에. 구석에 밀어 둔 출석부와 기록표가 눈에 들어왔지만 고개를 한 번 젓고, 양호실까지 뛰었다. 어차피 이 녀석 교복도 챙기러 와야 되니까.
양호실 문은 잠겨 있었고, 선생님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문고리를 부수고 문을 열었다. 긴급상황이니까요.
있는 담요란 담요는 다 꺼내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녀석을 덮었다. 업고 있는 동안 체온이 전해진 건지, 경련이나 다름없던 녀석의 떨림이 많이 멎어 있었다. 입술은 아직 시퍼랬지만.
“병원 가야 되지 않을까?”
“……집이 병원이야.”
“와아.”
……부잣집 자식이었잖아? 아니, 그보다 제대로 대답해 주다니, 웬일이야?! 쑥스러워져서 등을 돌리고 양호실에서 나가려고 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조하인이 잔뜩 쉰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고요.”
……내 이름, 알고 있었어? 눈이 휘둥그레져서 돌아보았더니 녀석이 말했다.
“어딜 가는 거야?”
“……네 교복 가져와야지. 기다려. 너네 반에 들러서 가방도 가지고 올께.”
“……그럴 필요 없어.”
“아니야, 괜찮아. 폰 가져다줄 테니까 집에 전화나 해.”
“고마워. 그리고 귀찮게 해서 미안.”
그 다정한 목소리에 일순간 숨 쉬는 것을 잊을 정도로 놀랐다. 그러곤 잽싸게 양호실에서 나왔다.
까, 깜짝이야.
그렇다. 소개가 늦었지만 내 이름은 고요高曜. 성은 고씨요, 이름은 요, 외자다. 어머니의 성을 땄고 웬만해서는 잘 불릴 일이 없는 ‘이름’. 나난이나 하진성조차 ‘고요’라는 간질거리는 어감 때문인지 제대로 불러 주는 법이 드물었다.
그래서인지 조하인에게 풀네임을 불리자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를 정도로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알고 있었구나.”
알고 있었군. 하긴, 그렇게 성가실 정도로 눈앞에서 알짱거리는데, 알 수도 있겠지. 머리를 긁적이며 나는 다시 체육관으로 향했다. 가슴이 간질거렸다.
5. 웰컴 투 우주인 월드
……나는 네가 지난 하교 시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하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평소처럼 가게에 나왔더니 그 악마자식이 바bar 바로 앞에 앉아 있었다. 귀여운 얼굴로 생글생글 웃고 있으면 누가 속을 줄 알고? 아까 그 얼굴로 젖은 타월로 채찍질하는 걸 다 봤다고, 이 변태 싸이코.
바 앞에 앉아 있는 그 남자를 보며 속으로 치를 떨었다. 나난과 하진성이 경고할 만한 자식이 이 자식 외에 또 있을 리 없었다. 한번 보고 나니까 나난도 하진성도 편한 학교생활을 위해선 우주인과 엮이지 말라고 했던 진의를 알 것 같았다. 정말 엮여 봤자 득 볼 일은커녕, 엉망진창으로 지옥행일 게 틀림없었다.
‘저리 꺼져, 변태.’
그런 내 경계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손님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안녕~?”
나를 보고 아는 척하는 그놈에게 희미하게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이 현실. 하필이면 같은 학교, 그것도 악의 소굴, 최종 보스가- 내가 일하는 가게의 단골이었을 줄이야. 어쨌거나 오늘도 착실하게 서비스맨의 미소를 띠며 사근사근하게 인사했다.
“오늘도 오셨네요?”
“응. 이 시간에 출근하는구나?”
“네. 손님께선 누구 기다리시는 분이라도?”
‘네.’ 하고 말았어야지. 습관적으로 대화를 이어 가는 화술을 전개하는 내 입이 원수.
“아니. 오늘은 그냥 혼자 마시러 온 거야. 너도 한 잔 마실래?”
댁 고딩인 거 다 알아! 그렇지만 나도 고딩이지……. 아니, 그게 아니라 난 접대부가 아니라고. 눈물이 앞을 가릴 것 같은 건 둘째 치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정중하게 사양했다. 돌변해서 채찍질이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 그는 빙그레 웃음 지으며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뚫어져라 바라보는 저 시선이 부담스럽다.
“예쁘게도 웃는구나?”
“어- 손님이야말로.”
사장님이 끼어들었다.
“징그럽게 뭣들 하는 거야? 꼬마, 4번, 7번 테이블 정리.”
“넵, 형님!”
두말 않고 잽싸게 뛰어가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 보는 형이었지만, 아무튼 고마웠다. 그 사람 근처에 있고 싶지 않았다. 넘실거리는 악의가 전해져 올까 불쾌했다. 그 사람 웃으면서 사람을 팬다고. 진짜로 기분 나쁘잖아?
의도적으로 바bar 근처를 피해 다녔더니, 그는 누군가와 잠시간 통화를 하다가 금방 사라졌다. 다행이다. 괜히 몇 시간이고 죽치고 있었다간, 이쪽은 일을 못한다고. 불편해서 큰일이지. 그나저나 이제 어쩐다? 학교에선 죽어라 피해 다니는 수밖에 없나? 술집에 출입하는 그쪽도 당당할 건 없겠지만, 어쨌거나 미성년자 출입금지 업소에서 불법노동을 하는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상황이 낫다. 게다가 어쩐지 선생들조차 우주인에 대해서는 무슨 짓을 하든지 포기하고 있는 것 같고.
문득, ‘조하인은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을 리가 없지.
그 녀석이 어쩌다가 우주인에게 찍힌 걸까? 쯧. 아무튼 그 독기로 볼 때 쉽게 끝날 것 같은 인연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건 내 딜레마이기도 했다.
정리해 보자면.
1. 나는 조하인과 친해지고 싶다.
2. 반대로 우주인은 꼭 피해 다녀야 한다.
3. 조하인과 우주인은 방과 후 따로 만나 스킨십을 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인 것 같다.
결론. 안타깝지만, 1보다는 2의 상황이 내게는 더 우선시 되었다. 즉, 조하인과는 겨우 통성명을 하고 씹지 않고 대화를 할 정도로 관계가 진척된 듯도 싶지만, 더 이상 그와 엮이는 일은 사양하고 싶다는 것이 마지막 결론이다. 내 생활까지 깨부숴 가며 지켜 줄 만한 의리를 쌓은 것도 아니고.
그러나 그런 결론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아 갈등하고 있었다. 나난이라면 스스로의 마음을 배반하는 바보짓은 하는 게 아니라고 하겠지만, 더불어 그는 내게 우주인과 엮이지 말라고 분명하게 말했었다.
위의 모든 상황과 내 판단을 뒤덮을 정도로 최우선시 되는 게 있다면 그건 나난의 말이다. 나난이 그렇게 하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 그는 내게 해가 되는 판단은 하지 않는다. 그걸 제치고라도 나난은 나의 히어로다. 나난의 기대를 배신하는 것보다 나쁜 것은 없지.
“난 씨. 나 어쩌는 게 좋을까?”
……그나저나 그놈, 정말 전형적인 태풍의 눈일세. 등장한 것만으로 주위 모든 것을 휩쓸고 있잖아? 우주인에 대한 원망이 새삼 치솟았다. 뭔가 아직 엮이지도 않았는데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고 있어. 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