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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강수
1화
Prologue : 뜨거웠던 그 바닷가(1)


활짝 열린 창문으로 파도 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귀를 씻어 주는 듯한 소리에 기분도 한껏 들뜬다. 거울 앞에 앉은 헤일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오늘을 위한 단장을 시작했다. 그녀가 꿈꿔 온 몰디브에서의 특별한 날, 틀에 박힌 일상에서 벗어나 온전한 자유를 만끽할 여행의 첫날. 바람이 실어 온 아침 공기도 그녀를 응원해 주는 것 같다.
준비의 시작은 머리부터다. 머리에 두르고 있던 수건을 풀어내자 짧게 커트 된 머리칼이 삐죽삐죽 제멋대로 엉켜 있다. 며칠 전까지는 갈색의 긴 머리였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마치 선악과처럼 위험스럽고도 유혹적으로 느껴지던 금발이다.
헤일리는 손가락만을 이용해 머리칼을 정돈했다. 대충 가르마를 타고 슥슥 매만지니 벌써 머리 손질이 끝났다. 거울 속의 도톰한 입술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린다.
다음은 렌즈다. 푸른빛이 도는 회색 렌즈를 검지에 얹고 홀린 듯 쳐다본다. 헤어스타일과 마찬가지로 정말 잘한 짓이다.

‘헤일리! 가발 샀니? 정말 잘 골랐네, 제법 어울려!’

커트를 하고 집에 돌아갔던 날, 엄마의 하이톤 목소리가 그녀를 반겨 주었었다. 그리고 그녀가 엄마에게로 다가선 다음은…….

‘눈동자에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두 번째 하이톤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딸의 머리가 가발이 아님을 손으로 확인한 엄마는 새된 비명을 내질렀었다.

‘헤일리!’

넓은 집 안에 사자후처럼 울려 퍼지던 그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헤일리는 어깨를 들썩여 죄책감을 털어 내고는 일탈을 도와줄 두 번째 무기를 비장한 움직임으로 착용했다. 눈을 몇 차례 깜빡이자 이물감이 싹 사라진다. 그녀의 미소는 더 커진다. 대만족이다.
렌즈까지 착용한 헤일리는 한동안 골똘한 얼굴로 거울 속의 얼굴을 살폈다. 별다른 화장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지금 그녀가 있는 방갈로에는 아무도 없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오늘 그녀가 할 일은 방갈로에서 곧장 바다로 뛰어들거나, 걸어서 3분 정도면 도착할 프라이빗 비치에 타월을 깔고 드러누워 즐길 일광욕뿐이다.
‘아!’
거울 속의 자신에게 생글생글 미소를 날리고 있던 그녀는 문득 탄사를 내뱉으며 선크림을 찾는다. 자외선에 쉬이 굴복하는 피부 때문이다. 태닝 대신 버닝할 계획이 아니라면, 선크림을 꼼꼼히 발라 줘야 한다.
“됐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자외선 차단은 완벽히 끝냈다. 나갈 준비가 된 것이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선 그녀는 비키니의 매무새를 정돈하는 일까지 후다닥 해치워 버리고 바다와 연결된 데크로 달려 나갔다.
눈부신 태양과, 태양빛을 반사시키느라 더욱 눈부신 바다가 그녀를 반겨 주었다. 짙푸른 하늘과 투명한 바다, 입이 떡 벌어지는 광경이다.
“꺄아!”
냅다 소리부터 지른 헤일리는 히죽히죽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얕은 바다 속에 고정된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서자 물결이 발바닥을 간지럽히고, 그녀는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다. 그 탄성은 이내 낭랑한 웃음소리로 바뀌어 파도를 타고 넘실거렸다.
우스꽝스럽게 생긴 스노클을 끼고 물속을 탐사하고, 파도에 몸을 맡긴 채 둥둥 떠다니기도 하며 오전을 보낸 헤일리는 샤워를 끝내자마자 침대로 직행했다.
종일 물에서 나오지 않겠다던 야무진 다짐은 이미 연기처럼 사라졌다. 지금은 충전이 필요한 시간이다. 1분 1초가 아까운 이 여행 계획에 휴식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계획은 변경되기도 하는 법이다.
“10분만 이러고 있자, 10분만…….”
속절없는 다짐을 중얼거리며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바람에 화들짝 눈을 뜬 헤일리는 천장을 응시하다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너무 깊이 잠들어 버렸다. 창밖의 해는 벌써 바다와 가까워져 있다.
“안 돼!”
허탈하게 외쳐 보지만 그런다고 해가 다시 솟아오르지는 않을 것이다. 헤일리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침대를 벗어났다.
로드아일랜드의 겨울바람에서 해방된 지 며칠밖에 지나지 않아 온몸이 늘어져 버린 게 분명하다.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면 열대의 후끈한 바람을 그리워할 것이다. 놓쳐 버린 오후의 하늘이 벌써 그리우니 말이다.
헤일리는 긴 한숨을 내쉬며 욕실로 향했다.
“그래도 아직 첫날이잖아.”
용기를 북돋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볍게 씻고 나온 헤일리는 다시 거울 앞에 앉았다. 이번에는 화장도 좀 해야겠다. 메인 레스토랑에서 우아한 저녁 식사를 할 계획이라 화장도 옷도 공을 들이고 싶다.

***

레스토랑 지배인과 열띤 토론을 벌이던 강수는 말이 통하지 않는 지배인을 노려보다가 짜증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드문드문 테이블이 채워진 레스토랑을 둘러보고 나니 더욱 짜증이 치솟는 것 같다.

‘몰디브 리조트의 부활 여부에 따라 네 자리도 정해질 거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할 거야.’

부드러운 어조로 엄포를 놓던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에 다시 울려 퍼졌다.
다 망해 가는 낡은 리조트를 되살릴 계획은 충분했었다. 이곳으로 날아와 벽창호 같은 지배인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체념을 담은 한숨을 짧게 내뱉은 강수는 출장 동행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경력으로 따지자면 강수가 스승으로 모셔야 할 사람이지만, 이번 출장에서만큼은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하며 동행했던 매형을 찾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레스토랑 어디에도 매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답게 또 어딘가를 시찰하러 간 모양이다.
그렇다면 아직도 열변을 토하고 있는 노땅 지배인은 혼자 상대해야 한다. 뒷목이 뻐근하게 굳어지는 느낌이다. 뭉친 근육을 풀어 보려 목을 이리저리 꺾다가 문득, 시야에 들어온 무언가를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가장 먼저 시선을 끈 것은 조명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는 짧은 머리칼이다. 다음은 선글라스로 가린 얼굴과 맛깔스러운 푸딩처럼 반짝이는 입술로 자연스레 시선이 옮겨 갔다.
이곳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하얀 피부를 수줍게 가리고 있는 하얀 선드레스는 가장 마지막에 발견했다. 다시 시선을 끌어 올려 그녀의 얼굴을 찾는 순간, 안쪽을 향해 걷고 있던 그녀가 돌아봤다.
카운터에 팔꿈치를 대고 삐딱하게 서 있던 강수는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몸을 바로 세운다.

레스토랑 입구를 지나 빈 테이블을 찾아가던 헤일리는 일순 섬뜩한 전율을 느끼며 멈춰 섰다.
반신반의하며 돌아본 곳에는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동양인이 서 있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려 버린 탓에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동양인이 확실한 것 같다.
‘이런 곳에 혼자 온 거야?’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차던 헤일리는 문득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실소를 뿜었다. 정작 혼자 여행 와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사람은 그녀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더니…….’
혼잣말을 중얼대며 자리를 찾아 앉은 그녀는 들고 있던 작은 파우치를 테이블에 올려 두고 종업원을 기다렸다.
잠시 후,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에 고개를 들자 무뚝뚝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May I join you?(합석해도 될까요?)」
무뚝뚝하지만 점잖은 이 물음은 그녀가 기다리고 있던 멘트가 아니다. 곁에 선 남자를 올려다보기 위해 고개를 한껏 치켜들자 아까의 그 동양인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녀는 당혹감에 말을 잇지 못했다. 휘둥그레졌던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 나니 그는 벌써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맞은편 의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Are you alone?(혼자 왔어요?)」
의자만 차지한 게 아니라 혼자 대화도 시작했다. 예의 따위 가볍게 무시하는 남자인 모양이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조용한 손짓으로 카운터 근처에 있는 지배인을 불렀다.
지배인이 재깍 움직여 테이블로 다가오자 그녀는 낮은 어조로 속삭였다.
「이분, 자리를 잘못 찾으신 것 같아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배인은 난처한 표정으로 남자를 돌아봤다. 강수는 지배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대신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여자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다.
‘백인인가?’
창백해 보일 만큼 하얀 피부는 백인들의 그것과 조금 달라 보인다.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리고 있는 저 선글라스를 좀 벗으면 판단하기가 더 쉬울 텐데, 그녀가 벗을 것 같지는 않다. 지금도 방어구를 손보는 투사처럼 선글라스를 추켜올리는 중이니까.
그가 생각에 잠긴 사이 지배인과 여자의 소리 없는 신경전은 계속되고 있다.
헤일리는 엉뚱한 쪽의 눈치를 보고 있는 지배인을 재차 불렀다.
「내 자리에 저분이 멋대로 앉은 거라구요.」
다시 한번 낮은 어조로 사실을 일깨워 주지만 지배인은 남자의 눈치만 살피고 있다.
강수는 흥미진진한 상황을 조금 더 즐기고 싶다. 하지만 연신 힐끔거리는 노인네의 표정이 거슬린다.
「Sir…….」
마침내 지배인이 입을 열자 강수는 단호한 눈짓과 고갯짓으로 지배인을 곤란에서 구해 준다. 구원의 신호를 놓치지 않은 지배인은 사과의 말을 중얼거리며 쌩하니 그곳을 벗어나 멀어져 갔다.
멀어져 가는 지배인을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던 헤일리는 맞은편의 남자에게 시선을 붙박았다. 마치 처음부터 자기 자리였던 것처럼 느긋하게 기대앉은 모습을 보니 절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상당히 기분 나쁘네요. 사과하세요.」
「눈 가는 대로 따라왔을 뿐인데 무슨 사과를 하란 건지.」
곧장 대답을 주워섬기는 남자의 얼굴은 웃고 있다.
헤일리는 선글라스 뒤에서 있는 대로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봤다. 10대들도 하지 않을 유치한 작업성 멘트를 아무렇지 않게 날리는 걸 보니 남자의 인성은 더 보지 않아도 알겠다.
그녀는 최대한 거만한 표정으로 맞받아친다.
「전 그렇게 즉흥적인 성격이 아니에요. 이만 가 주셨으면 좋겠네요.」
「밥 한 끼 정도는 먹어 볼 수 있잖아요. 일행도 없는 것 같은데.」
이번에도 남자는 즉각 대답을 내놓는다. 처음보단 부드러워진 말투지만 그녀에게는 여전히 불청객이다.
그녀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싫어요.」
「내가? 아님 밥이?」
「둘 다 싫어요.」
‘흐음.’ 짧은 문답 끝은 그의 긴 탄성이다. 겨우 바로 세웠던 허리를 다시 의자에 기대며 물끄러미 바라보는 남자에게 헤일리는 또록또록한 발음으로 다시 한번 거절의 대답을 전했다.
「못 들었어요? 싫, 어, 요!」
의자 팔걸이에 의지해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보던 남자가 마침내 입을 열자 헤일리는 귀를 쫑긋 세웠다.
「한 시간만 줄래요? 그 뒤에도 싫으면 깨끗이 물러나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이번에도 역시 그녀가 원하던 대답이 아니다. 털썩, 의자에 등을 기대며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곤 선글라스의 특징을 최대한 활용해 맞은편의 남자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턱을 괴고 앉아 그녀를 응시하던 강수는 선글라스 뒤로 분주한 눈동자를 눈치채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일테면 심사 같은 건가, 그가 즉흥적으로 제안한 한 시간을 같이 보내도 될까 안 될까를 판단하기 위한 심사 말이다.
헤일리의 머릿속은 분주하다.
‘그냥 둬 볼까?’
‘이상한 사람이면 어떡해?’
‘고작 한 시간이면 밥 먹기도 모자랄 시간인데, 무슨 일이야 있겠어?’
자문자답으로 시간을 보내던 그녀는 불현듯 미소를 짓는 그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린다. 우물쭈물하다가 어색한 손놀림으로 물 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한 시간 동안 밥만 먹게 될 거예요. 난 아무 말도 안 할 테니까.」
「그러시든가.」
얄미울 만큼 느물대는 그의 태도가 또다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지만 어느샌가 헤일리의 눈길은 그에게로 돌아가 있었다.
묘하게 눈길을 끄는 남자다. 가벼워 보였던 방금 전의 설전과는 전혀 다른 절제된 움직임에서 눈길을 돌리기가 어렵다.
그녀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 다시 다가온 지배인이 남자로부터 주문을 받고 있지만 더 이상 개의치 않았다. 한 시간을 주기로 했으니 한 번쯤 맡겨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뭘 맡겨? 누구한테 맡겨?’
기다렸다는 듯 새어 나오는 머릿속 속삭임에 그녀는 얕은 한숨을 섞어 대꾸했다.
‘위험해 보이는 충동에…….’

두 시간 뒤, 헤일리는 위험해 보였던 남자와 함께 레스토랑을 나서고 있다. 그가 제안했던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이 걸렸지만 곤욕스러운 식사는 아니었다. 식사 시간은 충분히 즐거웠다. 오히려 즐거운 기분을 감추기가 더 힘들었달까.
「즐거웠어요.」
「섬 얘기밖에 안 했는데.」
인사치레에 장난스러운 대꾸가 돌아오자 헤일리는 힐끔 그를 올려다봤다.
‘그래서 더 즐거웠는데…….’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몰디브 군도에 관한 이야기만 했었기에 즐거울 수 있었다. 혹여 그가 시시콜콜 그녀의 개인사를 묻고 싶어 했다면 식사 시작도 전에 그녀는 방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물론 그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할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지리학자인가?’
생각에 잠긴 채 발을 옮기고 있는 그를 올려다보며 넘겨짚어 본다.
‘학자 스타일은 아닌데……. 모델이라면 모를까.’
저도 모르게 그의 몸매를 눈길로 훑어 내리던 헤일리는 스스로의 노골적인 행동이 어이가 없어 ‘핏.’ 짧은 웃음을 뱉었다.
「이쪽인가?」
한 발짝 앞서 걷던 그가 갈림길에 멈춰 서서 묻자 헤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맨 끝에 있는 방이에요.」
대답을 확인한 그는 잠시 그대로 서서 그녀가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헤일리는 선뜻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방까지 따라오겠단 소린가?’ 의구심이 들지만 매몰차게 ‘그만 돌아가세요.’ 하고 싶진 않다.
강수는 그녀를 따라 발길을 옮기며 분주히 머리를 굴리는 중이다.
‘칵테일 한잔할래요?’
너무 식상하다.
‘리조트 반대편에 뷰 좋은 곳이 있는데, 같이 가 볼까요?’
뷰는 이쪽이 훨씬 좋다.
‘차라도 한잔……?’
한심하다. 지구 상의 마지막 낙원이라 불리는 몰디브에서 ‘차나 한잔’이라니……. 이렇게 멍청했었나 싶다. 아니, 멍청한 건 아닌 것 같다. 데이트를 조금 더 끌어 보려 애썼던 적이 없었으니 당연히 그 방법도 모를 수밖에. 생각에 잠긴 사이 그녀는 벌써 걸음을 멈췄다. 116호, 이곳인가 보다. 이제 핑곗거리를 찾을 시간도 없다.
돌아선 헤일리는 어색한 침묵을 이기지 못해 두 손을 맞비빈다. 헤일리의 손을 발견하고 나서야 강수의 입에서는 아쉬움이 배인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두운 바다를 배경으로 드문드문 조명이 켜진 길을 걸어오는 동안 손조차 잡지 않았다니, 대체 한 게 뭐가 있나 싶다.
손을 맞잡은 채 눈을 굴리던 헤일리는 작별 인사를 건네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럼…….」
「내일…….」
동시에 입을 열었던 헤일리와 강수는 피식, 실소도 동시에 터뜨렸다.
「내일도 오늘과 똑같은 하루가 되겠죠. 일주일 정도 있을 예정이거든요.」
원하던 답을 술술 읊어 내는 그녀를, 강수는 빤히 쳐다봤다.
그에게는 시간의 한정 같은 것은 없다. 프로젝트를 마무리해야 이곳을 떠날 수 있을 테니까. 일주일 정도 나태해진다고 해서 문제 될 것도 없다.
그녀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일주일 동안 무엇을 할지, 어떤 것을 하고, 어떤 것은 하지 말아야 할지 아무것도 정할 수 없어 혼란스럽지만 온몸으로 번져 나가는 안도감은 그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강수는 불현듯 손을 움직여 그녀의 뺨을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