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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Prologue : 뜨거웠던 그 바닷가(2)
예상치 못했던 스킨십에 헤일리는 움찔하고 말았다. 그 당혹감을 추스르기도 전에 그의 얼굴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 순식간에 반전된 분위기가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는 아이러니한 순간이다. 헤일리는 홀린 듯 그의 눈을 바라봤다.
강수 역시 그녀의 눈을 빤히 들여다봤다. 손을 뻗은 것은 무엇을 하겠다는 목적의식이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런데 벌써 그녀의 얼굴이 코앞에 있다. 파르르, 눈꺼풀의 미세한 떨림이 그의 눈에도 고스란히 보일 만큼 가깝다.
‘그만둬야 하나?’ 스스로에게 물었다. 하지만 달큰한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진 도톰한 입술은 다른 대답을 생각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여자의 입술을 눈앞에 두고 이토록 망설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원하는 만큼 가지거나, 거리가 좁혀지기 전에 선을 긋거나, 언제나 명쾌한 결론이었다.
‘왜지?’ 머릿속 어딘가에서 또 물음표 하나가 튀어나왔다.
‘눈동자 때문인가.’ 짙푸른 빛이 감도는 회색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다.
그 순간 헤일리의 마음속도 시끄럽다.
‘이런 느낌이었어?’
그녀를 짝사랑했던 대학 동기에게 강탈당했던 첫 키스와는 너무도 다른 분위기다. 그가 내쉬는 숨결조차 향기롭게 느껴지다니, 현실에서 가능한 일인가 싶다. 때마침 미지근한 바람이 달콤한 열대의 향기를 실어 와 둘 사이에 퍼뜨려 주었다.
그의 눈동자가 점차 짙어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헤일리는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하는 그의 입술을 향해 떨리는 숨결을 불어 냈다.
저녁 내내 궁금했던 도톰한 입술이 수줍은 듯 맞이하자 강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성마른 신음을 뱉는다. 이제 겨우 시작된 키스인데 뒷덜미가 쭈뼛해질 만큼 강렬한 전율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강수는 본능적으로 더욱 깊숙한 곳을 찾아 움직인다. 그녀에게서도 새된 신음이 흘러나오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린다. 걷잡을 수 없는 욕망에 굴복해 버리고 싶지만 그 장막은 곧 걷히고 만다. 얼마 남지 않았던 이성이 한 박자 늦게 발동한 것이다.
빌라 입구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그녀의 옷을 찢어 버릴 게 아니라면 그만둬야 한다. 키스 한 번으로 그를 절정까지 치닫게 만드는 여자와의 사랑을 이렇게 볼품없는 곳에서 나누고 싶지는 않다.
가까스로 그녀에게서 도망친 강수는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내려다본다. 그녀는 아직 눈을 감고 있다. 명치 근처에서 꼭 맞잡은 그녀의 두 손이 얼마나 긴장했는지 여실히 보여 주는 것 같다. 강수는 미안함이 담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찾아 잡는다.
「내일 아침 아홉 시, 여기서.」
그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귓전을 맴돌지만 헤일리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강렬했던 키스 때문에 온통 난리법석인 머릿속과 마음을 다잡느라 섣불리 눈을 뜰 수가 없다. 명령하는 듯한 그의 제안에 겨우 고개만 끄덕인 그녀는 마침내 풀려난 손을 인지하고서야 눈을 떴다.
어느새 한 발짝 물러선 그가 그녀를 보며 웃고 있다. 마주 웃어 줘야 하는 건가, 잠시 고민하던 헤일리는 이내 몸을 돌려 빌라로 향한다.
현관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서서 문을 닫기 직전, 그 자리에 서 있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눈길을 돌린 그녀는 겨우 손을 흔들어 준다.
그가 몸을 돌려 멀어지기 시작하자 헤일리는 문을 닫고 돌아선다.
“미쳤나 봐…….”
아직 진정되지 못해 요란하게 쿵덕대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내리누른다. 정말 위험한 충동이었다. 시작이 그랬듯이 끝도 갑작스러웠던 키스가 못내 아쉬워 그를 빌라 안으로 이끌 뻔했다는 사실이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헤일리는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1. 우리 엄마는 차여신(1)
칠 년 후, 서울
‘우리 센터는 인원이 적어서 예외일 줄 알았는데, 결국 피해 가질 못하네. 어떡하니 차 선생…….’
한 시간 전 울먹이던 센터장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린다. 여신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트에 더욱 깊숙이 등을 파묻었다. 지난 사 년간 그녀를 버티게 해 준 일자리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다니 믿을 수가 없다. 아니, 믿기 싫은 현실이다.
‘꿈이었으면 좋겠다.’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여신의 눈가가 촉촉하다. 오래전에도 이런 참담한 기분에 빠져들었던 적이 있다. 인생이 끝난 것만 같았던 칠 년 전 그날…….
세면대 앞에 선 여신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눈동자로 거울을 쳐다봤다.
“차여신, 어떡하니 너…….”
마치 자아가 분열된 듯 거울 속의 자신에게 걱정스러운 말을 전하고 있는 그녀의 손에는 임신테스터기가 손의 떨림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선명한 두 줄, 임신을 뜻하는 결과다.
“허어!”
세찬 날숨소리를 시작으로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입에서는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하하 하아, 하, 흐으…….”
모든 것이 몰디브 때문이다. 성인이 된 이후 그녀가 처음으로 혼자만의 여행을 선포하고 떠났던 곳, 몰디브. 컴퓨터 모니터 속의 사진으로만 봐 왔던 화이트 비치와 환상적인 빛깔의 바다를 꼭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게 된 그곳에서 그녀를 홀린 것은 형광빛 바닷물만이 아니었다.
‘나랑 같이 가자.’
그녀의 하얀 살결을 뜨거운 입술로 쓰다듬으며 그가 제안했었다. 그녀에게는 눈이 번쩍 뜨일 만한 획기적인 제안이었다.
‘그 말 믿고 정말 따라갔다간 짐짝 신세 되는 건 시간문제겠지?’
반신반의하며 묻던 그녀를 그는 새삼 매서워진 눈매로 나무랐었다.
‘허튼소리는 단 한 번도 한 적 없어.’
그 깊었던 눈동자에 홀려 정신 못 차리고 빠져든 결과가, 정확히 60일 후 그녀를 혼돈 상태로 몰고 간 것이다.
“미쳤나 봐, 미쳤었나 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약속 시간 늦겠다. 무슨 준비가 이렇게 길어?”
멀리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에 화들짝 정신을 차린 그녀는 바삐 손을 놀려 얼굴 반을 집어 삼킨 충격의 그림자를 지우고 후다닥 달려 나갔다.
“엄마!”
지척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번쩍 눈을 뜨자 장난기 어린 눈동자 한 쌍이 그녀를 반겨 주었다. 차창에 손 그늘을 만들어 붙인 채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있는 아이, 그녀의 아들이다.
눈을 뜬 그녀를 확인한 아이는 활짝 웃으며 뽀르르 달려와 조수석 문을 열었다.
“엄마 또 자고 있었지!”
차에 오르기 무섭게 잔소리 포문을 여는 아들에게 여신은 단호하게 반박했다.
“아니야, 생각했어.”
“아아, 자고 있었다고.”
“생각했다니까.”
“알았어, 잠깐 졸았다고.”
엄마 놀리기를 포기하지 않는 아들의 귓불을 아프지 않게 잡아당기자 ‘악!’ 엄살 부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신은 킬킬 웃음을 터뜨리며 차를 출발시켰다.
“오늘 재미있었어?”
“응, 과학 교실 선생님한테 칭찬도 들었어! 근데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일상적인 물음에 열성적인 목소리로 대꾸하던 무진이 진지한 얼굴로 묻자 여신은 얼른 시선을 피했다.
“무진이랑 맛있는 거 먹으러 가려구.”
“피이, 거짓말.”
어린 녀석이 눈치 하난 LTE급이다.
“아닌데?”
여신이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반박해 보지만 무진의 입에서는 야무진 소리가 튀어나온다.
“핑계 대고 조퇴한 거 아냐?”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엄마 얼굴이 그래 보여. 머리 아픈 얼굴이야.”
여신은 짧은 실소를 뿜으며 되묻는다.
“엄마 얼굴에 그런 것도 쓰여 있어?”
가방을 내려놓고 제자리를 찾느라 분주하던 무진이 마침내 조수석 시트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끄덕인다.
“응. 아이고, 머리야아 이렇게 쓰여 있어.”
여신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자 무진도 덩달아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아이의 웃음은 금방 그치고 만다.
아이의 침묵이 걱정스러워지려던 찰나, 창밖에 시선을 붙박고 있던 무진이 덤덤한 얼굴로 물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산타 할아버지 오시나?”
침묵의 이유는 두 달 남짓 남은 크리스마스에 대한 걱정이었나 보다. 여신은 작은 안도감에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아들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상한 일이다. 평소라면 큰 소리로 ‘소원 빌어야지!’ 외치며 두 손을 모아야 하는데 말이다. 여신은 의아한 얼굴로 아들을 쳐다본다. 무진의 시선은 여전히 차창 밖을 향해 있다.
“이번엔 무슨 선물 받고 싶은데?”
기다리다 못한 여신이 먼저 말을 꺼내지만 무진은 돌아보지도 않는다.
“있어.”
“비밀이야?”
“응.”
“궁금한데…….”
아쉬움이 짙게 밴 여신의 말에도 아들은 꿈쩍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 여신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궁금하지만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한번 입을 다물기 시작하면 어떤 훼방에도 꿈쩍 않는 녀석이니까. 녀석이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려 주는 수밖에.
두 군데의 사거리를 지나 번화가로 접어들었을 때쯤, 조수석에서 풀 죽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 벌섰어.”
“왜?”
놀라 되묻는 엄마에게 무진은 순순히 대답을 읊조렸다.
“수혁이 때렸거든. 책 가지고, 이렇게.”
무진은 수혁이가 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손을 휘둘렀다.
“수혁이가 뭐 잘못했어? 아님 그냥 장난치다가 그런 거야?”
“버르장머리 없게 자꾸 따지잖아.”
“버르장머리 없단 말은 어른이 아이한테 하는 말이야.”
말의 적절한 사용을 지적하는 엄마가 지겹다는 듯, 무진은 ‘쯧.’ 혀 차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암튼, 걔가 그렇게 굴었어.”
“수혁이가 미운 말 했어?”
무진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산타할아버지 이야기를 꺼낸 것도, 벌섰던 이야기를 꺼낸 것도 결국 마지막 한마디를 묻기 위해서였는데 막상 때가 되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오늘은 꼭 물어봐야지, 다부지게 먹었던 마음도 슬그머니 허물어지고 있다. ‘아빠’라는 한 단어가 무진의 입을 통해 흘러나올 때마다 엄마의 눈이 휘둥그레졌었기 때문이다.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하면 대충 얼버무리다가 얼른 딴 얘기를 꺼내기도 했었다.
‘오늘은 대답해 줄지도 모르잖아?’ 일말의 기대감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계속 묻다 보면 언젠가는 대답을 들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무진은 발끝에 시선을 내리꽂고는 엄마가 기다리는 대답을 뱉어 냈다.
“자꾸 우리 아빠 언제 오느냐고, 없는데 뻥치는 거 아니냐고 따지잖아.”
여신은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앞으로 더 자주 듣게 될 거라고, 그녀의 절친한 친구인 지현과 많은 대화를 나눴었다. 하지만 이미 현명한 대답은 고갈 상태다. 이 아이가 겪어야 할 십여 년의 학교생활 중 이제 겨우 일 년이 다 되어 갈 뿐인데 말이다.
아이의 아빠를 찾으려 노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사흘간의 꿈같은 나날 이후에 남자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고,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녀가 다시 몰디브로 연락을 시도했을 때에는 리뉴얼 중이라는 안내만 듣게 되었었다. 그래도 그녀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홍콩’이라는 단서 하나를 붙들고 힘겹게 무진을 키우며 대학원을 수료했고, 혹시 모를 해후를 대비해 광둥어까지 배웠었다. 하지만 ‘홍콩’에서 성도 모르는 남자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비즈니스 여행으로 몰디브를 방문했다는 것, 리조트 사업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을 거라는 추측, 그리고 그녀로 하여금 현실을 망각하게 만들었던 현란한 키스 실력뿐이었다. 그 이후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녀는 서서히 체념하기 시작했다.
여신은 단호한 도리질로 상념을 털어 냈다. 터무니없이 빈약한 정보로 사람을 찾는 일은, 혼자 아이를 키워야 하는 미혼모가 덤벼들 엄두조차 못 낼 일이었다. 뻔뻔한 자기합리화 같지만 어쩔 수 없다.
“아빠 일이 너무 많아졌대. 그래서 아직 못 오시는 거야. 아빠는 되게 되게 중요한 사람이라 해야 할 일이 엄청, 우리가 상상도 못 할 만큼 엄청 많거든.”
엄마의 변명이 끝나기 무섭게 무진은 콧방귀를 뀌었다. 체념과 불만이 섞인 응수다.
“흥.”
무진의 반응은 여느 때와 다름없다. 여신은 조심스레 한숨을 내쉬며 화제를 돌렸다.
“레고 시리즈 갖고 싶은 거 없어? 새로 사고 싶은 거, 이번에는 없어?”
“칫, 레고 같은 거 필요 없어.”
퉁명스럽게 대꾸한 무진은 다시 차창에 시선을 붙박았다.
‘이럴 줄 알았어.’ 이런 식으로 사들인 장난감이 수십 세트다. 전 같으면 얼씨구나 하며 새 레고 시리즈 품번을 말했겠지만, 이제는 그러기 싫다. 이제 아기가 아니니까 말이다.
무진은 거리를 지나는 어른 남자들의 면면을 살폈다.
‘우리 아빠도 저런 아저씨들처럼 생겼나?’
무진은 혼자만의 상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무진아, 아빠 왔다!”
지현 혼자 들어서는 현관이 시끌시끌하다. 지현이 무진의 기분을 북돋우기 위해 내지르는 소리, 그녀가 들고 온 쇼핑백을 흔드느라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현관에서 가까운 무진의 방문이 빠끔 열리는가 싶더니 동그란 얼굴이 슬금슬금 문틈을 비집고 나왔다.
“숙제하고 있었어?”
“게임했어.”
발랄한 지현의 목소리에 대답하는 무진은 시무룩한 얼굴이다. 지현은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무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응, 잘했어. 머리도 쉬어 주면서 굴려야 해. 이거 뭐게?”
지현이 들어 보이는 쇼핑백을 힐끔 쳐다본 무진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블록 시리즈의 번호를 말했다.
“70747.”
“엇!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어?”
지현이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분위기를 돋우지만 무진은 여전히 덤덤하기만 하다.
“전에 말했었잖아.”
“흐이그, 까먹지도 않아요.”
지현은 아이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고는 선물을 건넸다. 곧장 상자를 꺼내는 무진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지현은 놓치지 않는다. 절로 웃음이 나는 모습이다.
소리 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지현에게 무진이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 뜯어도 돼요?”
지현은 흔쾌히 대답했다.
“응.”
“지금 여덟 신데?”
재차 확인하는 무진에게 지현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블록 장난감이라 조립을 해야 하겠지만 무진의 실력이라면 늦어도 열한 시 안에는 끝날 것이다.
“내일 토요일이잖아. 늦잠 자도 돼.”
무진은 그제야 씩 웃으며 거실로 뛰어 들어갔다.
Prologue : 뜨거웠던 그 바닷가(2)
예상치 못했던 스킨십에 헤일리는 움찔하고 말았다. 그 당혹감을 추스르기도 전에 그의 얼굴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 순식간에 반전된 분위기가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는 아이러니한 순간이다. 헤일리는 홀린 듯 그의 눈을 바라봤다.
강수 역시 그녀의 눈을 빤히 들여다봤다. 손을 뻗은 것은 무엇을 하겠다는 목적의식이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런데 벌써 그녀의 얼굴이 코앞에 있다. 파르르, 눈꺼풀의 미세한 떨림이 그의 눈에도 고스란히 보일 만큼 가깝다.
‘그만둬야 하나?’ 스스로에게 물었다. 하지만 달큰한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진 도톰한 입술은 다른 대답을 생각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여자의 입술을 눈앞에 두고 이토록 망설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원하는 만큼 가지거나, 거리가 좁혀지기 전에 선을 긋거나, 언제나 명쾌한 결론이었다.
‘왜지?’ 머릿속 어딘가에서 또 물음표 하나가 튀어나왔다.
‘눈동자 때문인가.’ 짙푸른 빛이 감도는 회색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다.
그 순간 헤일리의 마음속도 시끄럽다.
‘이런 느낌이었어?’
그녀를 짝사랑했던 대학 동기에게 강탈당했던 첫 키스와는 너무도 다른 분위기다. 그가 내쉬는 숨결조차 향기롭게 느껴지다니, 현실에서 가능한 일인가 싶다. 때마침 미지근한 바람이 달콤한 열대의 향기를 실어 와 둘 사이에 퍼뜨려 주었다.
그의 눈동자가 점차 짙어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헤일리는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하는 그의 입술을 향해 떨리는 숨결을 불어 냈다.
저녁 내내 궁금했던 도톰한 입술이 수줍은 듯 맞이하자 강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성마른 신음을 뱉는다. 이제 겨우 시작된 키스인데 뒷덜미가 쭈뼛해질 만큼 강렬한 전율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강수는 본능적으로 더욱 깊숙한 곳을 찾아 움직인다. 그녀에게서도 새된 신음이 흘러나오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린다. 걷잡을 수 없는 욕망에 굴복해 버리고 싶지만 그 장막은 곧 걷히고 만다. 얼마 남지 않았던 이성이 한 박자 늦게 발동한 것이다.
빌라 입구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그녀의 옷을 찢어 버릴 게 아니라면 그만둬야 한다. 키스 한 번으로 그를 절정까지 치닫게 만드는 여자와의 사랑을 이렇게 볼품없는 곳에서 나누고 싶지는 않다.
가까스로 그녀에게서 도망친 강수는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내려다본다. 그녀는 아직 눈을 감고 있다. 명치 근처에서 꼭 맞잡은 그녀의 두 손이 얼마나 긴장했는지 여실히 보여 주는 것 같다. 강수는 미안함이 담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찾아 잡는다.
「내일 아침 아홉 시, 여기서.」
그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귓전을 맴돌지만 헤일리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강렬했던 키스 때문에 온통 난리법석인 머릿속과 마음을 다잡느라 섣불리 눈을 뜰 수가 없다. 명령하는 듯한 그의 제안에 겨우 고개만 끄덕인 그녀는 마침내 풀려난 손을 인지하고서야 눈을 떴다.
어느새 한 발짝 물러선 그가 그녀를 보며 웃고 있다. 마주 웃어 줘야 하는 건가, 잠시 고민하던 헤일리는 이내 몸을 돌려 빌라로 향한다.
현관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서서 문을 닫기 직전, 그 자리에 서 있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눈길을 돌린 그녀는 겨우 손을 흔들어 준다.
그가 몸을 돌려 멀어지기 시작하자 헤일리는 문을 닫고 돌아선다.
“미쳤나 봐…….”
아직 진정되지 못해 요란하게 쿵덕대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내리누른다. 정말 위험한 충동이었다. 시작이 그랬듯이 끝도 갑작스러웠던 키스가 못내 아쉬워 그를 빌라 안으로 이끌 뻔했다는 사실이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헤일리는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1. 우리 엄마는 차여신(1)
칠 년 후, 서울
‘우리 센터는 인원이 적어서 예외일 줄 알았는데, 결국 피해 가질 못하네. 어떡하니 차 선생…….’
한 시간 전 울먹이던 센터장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린다. 여신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트에 더욱 깊숙이 등을 파묻었다. 지난 사 년간 그녀를 버티게 해 준 일자리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다니 믿을 수가 없다. 아니, 믿기 싫은 현실이다.
‘꿈이었으면 좋겠다.’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여신의 눈가가 촉촉하다. 오래전에도 이런 참담한 기분에 빠져들었던 적이 있다. 인생이 끝난 것만 같았던 칠 년 전 그날…….
세면대 앞에 선 여신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눈동자로 거울을 쳐다봤다.
“차여신, 어떡하니 너…….”
마치 자아가 분열된 듯 거울 속의 자신에게 걱정스러운 말을 전하고 있는 그녀의 손에는 임신테스터기가 손의 떨림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선명한 두 줄, 임신을 뜻하는 결과다.
“허어!”
세찬 날숨소리를 시작으로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입에서는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하하 하아, 하, 흐으…….”
모든 것이 몰디브 때문이다. 성인이 된 이후 그녀가 처음으로 혼자만의 여행을 선포하고 떠났던 곳, 몰디브. 컴퓨터 모니터 속의 사진으로만 봐 왔던 화이트 비치와 환상적인 빛깔의 바다를 꼭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게 된 그곳에서 그녀를 홀린 것은 형광빛 바닷물만이 아니었다.
‘나랑 같이 가자.’
그녀의 하얀 살결을 뜨거운 입술로 쓰다듬으며 그가 제안했었다. 그녀에게는 눈이 번쩍 뜨일 만한 획기적인 제안이었다.
‘그 말 믿고 정말 따라갔다간 짐짝 신세 되는 건 시간문제겠지?’
반신반의하며 묻던 그녀를 그는 새삼 매서워진 눈매로 나무랐었다.
‘허튼소리는 단 한 번도 한 적 없어.’
그 깊었던 눈동자에 홀려 정신 못 차리고 빠져든 결과가, 정확히 60일 후 그녀를 혼돈 상태로 몰고 간 것이다.
“미쳤나 봐, 미쳤었나 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약속 시간 늦겠다. 무슨 준비가 이렇게 길어?”
멀리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에 화들짝 정신을 차린 그녀는 바삐 손을 놀려 얼굴 반을 집어 삼킨 충격의 그림자를 지우고 후다닥 달려 나갔다.
“엄마!”
지척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번쩍 눈을 뜨자 장난기 어린 눈동자 한 쌍이 그녀를 반겨 주었다. 차창에 손 그늘을 만들어 붙인 채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있는 아이, 그녀의 아들이다.
눈을 뜬 그녀를 확인한 아이는 활짝 웃으며 뽀르르 달려와 조수석 문을 열었다.
“엄마 또 자고 있었지!”
차에 오르기 무섭게 잔소리 포문을 여는 아들에게 여신은 단호하게 반박했다.
“아니야, 생각했어.”
“아아, 자고 있었다고.”
“생각했다니까.”
“알았어, 잠깐 졸았다고.”
엄마 놀리기를 포기하지 않는 아들의 귓불을 아프지 않게 잡아당기자 ‘악!’ 엄살 부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신은 킬킬 웃음을 터뜨리며 차를 출발시켰다.
“오늘 재미있었어?”
“응, 과학 교실 선생님한테 칭찬도 들었어! 근데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일상적인 물음에 열성적인 목소리로 대꾸하던 무진이 진지한 얼굴로 묻자 여신은 얼른 시선을 피했다.
“무진이랑 맛있는 거 먹으러 가려구.”
“피이, 거짓말.”
어린 녀석이 눈치 하난 LTE급이다.
“아닌데?”
여신이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반박해 보지만 무진의 입에서는 야무진 소리가 튀어나온다.
“핑계 대고 조퇴한 거 아냐?”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엄마 얼굴이 그래 보여. 머리 아픈 얼굴이야.”
여신은 짧은 실소를 뿜으며 되묻는다.
“엄마 얼굴에 그런 것도 쓰여 있어?”
가방을 내려놓고 제자리를 찾느라 분주하던 무진이 마침내 조수석 시트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끄덕인다.
“응. 아이고, 머리야아 이렇게 쓰여 있어.”
여신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자 무진도 덩달아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아이의 웃음은 금방 그치고 만다.
아이의 침묵이 걱정스러워지려던 찰나, 창밖에 시선을 붙박고 있던 무진이 덤덤한 얼굴로 물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산타 할아버지 오시나?”
침묵의 이유는 두 달 남짓 남은 크리스마스에 대한 걱정이었나 보다. 여신은 작은 안도감에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아들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상한 일이다. 평소라면 큰 소리로 ‘소원 빌어야지!’ 외치며 두 손을 모아야 하는데 말이다. 여신은 의아한 얼굴로 아들을 쳐다본다. 무진의 시선은 여전히 차창 밖을 향해 있다.
“이번엔 무슨 선물 받고 싶은데?”
기다리다 못한 여신이 먼저 말을 꺼내지만 무진은 돌아보지도 않는다.
“있어.”
“비밀이야?”
“응.”
“궁금한데…….”
아쉬움이 짙게 밴 여신의 말에도 아들은 꿈쩍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 여신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궁금하지만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한번 입을 다물기 시작하면 어떤 훼방에도 꿈쩍 않는 녀석이니까. 녀석이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려 주는 수밖에.
두 군데의 사거리를 지나 번화가로 접어들었을 때쯤, 조수석에서 풀 죽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 벌섰어.”
“왜?”
놀라 되묻는 엄마에게 무진은 순순히 대답을 읊조렸다.
“수혁이 때렸거든. 책 가지고, 이렇게.”
무진은 수혁이가 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손을 휘둘렀다.
“수혁이가 뭐 잘못했어? 아님 그냥 장난치다가 그런 거야?”
“버르장머리 없게 자꾸 따지잖아.”
“버르장머리 없단 말은 어른이 아이한테 하는 말이야.”
말의 적절한 사용을 지적하는 엄마가 지겹다는 듯, 무진은 ‘쯧.’ 혀 차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암튼, 걔가 그렇게 굴었어.”
“수혁이가 미운 말 했어?”
무진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산타할아버지 이야기를 꺼낸 것도, 벌섰던 이야기를 꺼낸 것도 결국 마지막 한마디를 묻기 위해서였는데 막상 때가 되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오늘은 꼭 물어봐야지, 다부지게 먹었던 마음도 슬그머니 허물어지고 있다. ‘아빠’라는 한 단어가 무진의 입을 통해 흘러나올 때마다 엄마의 눈이 휘둥그레졌었기 때문이다.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하면 대충 얼버무리다가 얼른 딴 얘기를 꺼내기도 했었다.
‘오늘은 대답해 줄지도 모르잖아?’ 일말의 기대감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계속 묻다 보면 언젠가는 대답을 들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무진은 발끝에 시선을 내리꽂고는 엄마가 기다리는 대답을 뱉어 냈다.
“자꾸 우리 아빠 언제 오느냐고, 없는데 뻥치는 거 아니냐고 따지잖아.”
여신은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앞으로 더 자주 듣게 될 거라고, 그녀의 절친한 친구인 지현과 많은 대화를 나눴었다. 하지만 이미 현명한 대답은 고갈 상태다. 이 아이가 겪어야 할 십여 년의 학교생활 중 이제 겨우 일 년이 다 되어 갈 뿐인데 말이다.
아이의 아빠를 찾으려 노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사흘간의 꿈같은 나날 이후에 남자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고,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녀가 다시 몰디브로 연락을 시도했을 때에는 리뉴얼 중이라는 안내만 듣게 되었었다. 그래도 그녀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홍콩’이라는 단서 하나를 붙들고 힘겹게 무진을 키우며 대학원을 수료했고, 혹시 모를 해후를 대비해 광둥어까지 배웠었다. 하지만 ‘홍콩’에서 성도 모르는 남자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비즈니스 여행으로 몰디브를 방문했다는 것, 리조트 사업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을 거라는 추측, 그리고 그녀로 하여금 현실을 망각하게 만들었던 현란한 키스 실력뿐이었다. 그 이후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녀는 서서히 체념하기 시작했다.
여신은 단호한 도리질로 상념을 털어 냈다. 터무니없이 빈약한 정보로 사람을 찾는 일은, 혼자 아이를 키워야 하는 미혼모가 덤벼들 엄두조차 못 낼 일이었다. 뻔뻔한 자기합리화 같지만 어쩔 수 없다.
“아빠 일이 너무 많아졌대. 그래서 아직 못 오시는 거야. 아빠는 되게 되게 중요한 사람이라 해야 할 일이 엄청, 우리가 상상도 못 할 만큼 엄청 많거든.”
엄마의 변명이 끝나기 무섭게 무진은 콧방귀를 뀌었다. 체념과 불만이 섞인 응수다.
“흥.”
무진의 반응은 여느 때와 다름없다. 여신은 조심스레 한숨을 내쉬며 화제를 돌렸다.
“레고 시리즈 갖고 싶은 거 없어? 새로 사고 싶은 거, 이번에는 없어?”
“칫, 레고 같은 거 필요 없어.”
퉁명스럽게 대꾸한 무진은 다시 차창에 시선을 붙박았다.
‘이럴 줄 알았어.’ 이런 식으로 사들인 장난감이 수십 세트다. 전 같으면 얼씨구나 하며 새 레고 시리즈 품번을 말했겠지만, 이제는 그러기 싫다. 이제 아기가 아니니까 말이다.
무진은 거리를 지나는 어른 남자들의 면면을 살폈다.
‘우리 아빠도 저런 아저씨들처럼 생겼나?’
무진은 혼자만의 상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무진아, 아빠 왔다!”
지현 혼자 들어서는 현관이 시끌시끌하다. 지현이 무진의 기분을 북돋우기 위해 내지르는 소리, 그녀가 들고 온 쇼핑백을 흔드느라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현관에서 가까운 무진의 방문이 빠끔 열리는가 싶더니 동그란 얼굴이 슬금슬금 문틈을 비집고 나왔다.
“숙제하고 있었어?”
“게임했어.”
발랄한 지현의 목소리에 대답하는 무진은 시무룩한 얼굴이다. 지현은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무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응, 잘했어. 머리도 쉬어 주면서 굴려야 해. 이거 뭐게?”
지현이 들어 보이는 쇼핑백을 힐끔 쳐다본 무진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블록 시리즈의 번호를 말했다.
“70747.”
“엇!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어?”
지현이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분위기를 돋우지만 무진은 여전히 덤덤하기만 하다.
“전에 말했었잖아.”
“흐이그, 까먹지도 않아요.”
지현은 아이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고는 선물을 건넸다. 곧장 상자를 꺼내는 무진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지현은 놓치지 않는다. 절로 웃음이 나는 모습이다.
소리 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지현에게 무진이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 뜯어도 돼요?”
지현은 흔쾌히 대답했다.
“응.”
“지금 여덟 신데?”
재차 확인하는 무진에게 지현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블록 장난감이라 조립을 해야 하겠지만 무진의 실력이라면 늦어도 열한 시 안에는 끝날 것이다.
“내일 토요일이잖아. 늦잠 자도 돼.”
무진은 그제야 씩 웃으며 거실로 뛰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