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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1. 우리 엄마는 차여신(2)
무진이 잠든 늦은 밤, 지현과 여신은 식탁에 앉아 맥주를 홀짝이고 있다. 고요한 정적을 깨트리는 목소리는 지현의 것이다.
“오늘은 또 왜 그랬는데?”
“수혁이가 놀리더래. 아빠 없는데 뻥친 거 아니냐고.”
“아빠 기자라고 하지!”
지현이 식탁을 내리치며 외치자 여신은 실소를 뿜었다.
“농담할 기운 없어.”
지현은 못마땅한 듯 혀를 차며 이후의 상황을 물었다.
“그래서 또 대답 못 하고 눈물 글썽였어? 입학식 날처럼?”
“아냐. 야무지게 대답해 줬어.”
“퍽이나 야무졌겠다.”
지현은 몸을 뒤로 기대며 탄식했다. 친구의 말대로 ‘야무진’ 대답이었다면 무진이 저렇게 의기소침해 있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아빠’에 관한 대화가 나온 날은, 그 대화가 짧든 길든 두 모자가 똑같이 기운 빠진 꼴을 고스란히 봐 줘야만 했었다.
긴 유학 끝에 돌아온 대학원에서 만난 친구, 학창 시절 친구라고는 아무도 없는 모국에서 처음 사귄 친구였다. 비슷한 처지여서 빠르게 가까워졌고, 여신이 홑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보호자를 자처하며 그들 곁에 머물렀다.
강한 척, 턱을 치켜들고 다니는 여신이지만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 순간 한없이 나약해지는 여자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아킬레스건은 바로 무진이다. 아니, 무진과 무진의 아빠인 ‘그 남자’다.
용감하게 가족들을 떠나 혼자만의 삶을 일구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존경스럽기도 했었다. 물론 안쓰러운 순간도 많았다.
부모의 나라에서 외국인 신분으로 살아야 하는 미혼모와, 국적조차 제대로 갖지 못한 채 엄마의 성을 받은 그녀의 아들. 생각하면 코끝부터 찡해지던 때도 있었다. 지현은 소리 없는 실소를 뿜으며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지현이 생각에 잠긴 사이, 여신은 집 안을 둘러보고 있다. 20평짜리 복도식 아파트. 재건축 시기가 다가오는 낡은 아파트가 그녀들의 보금자리이다.
불과 삼 년 전만 하더라도 그녀들의 생활은 여유로웠었다. 뉴욕에서 기업가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있는 아버지의 지원이 끊어지기 전까지는 그랬었다. 가족을 떠날 핑계로 그녀가 내세웠던 대학원도 수료했고, 공공기관에 취업해 경험도 쌓았으니 이제 그만 가족들 곁으로 돌아와 도와주지 않겠냐는 제안을 거절했던 게 그 이유였다.
그녀의 유일한 친구인 지현 역시 조기 유학으로 대학까지 마친 수재였고, 지방에 있는 본가의 지원이 제법 넉넉했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독립적인 성향 덕분에 혹독한 서울 살이를 시작하게 된 안타까운 친구다.
그녀들이 서로를 떠나지 못했던 이유는, 서로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미혼모와 미혼모의 아들을 안타까워했던 지현과, 가족들과 너무 오래 떨어져 지내다 보니 그 정마저 잊어버린 친구를 안타까워했던 여신은 그렇게 함께 살게 되었다.
비록 낡아 빠진 월세 아파트지만, 그녀들의 힘으로 이뤄 낸 결과이기에 더욱 애틋한 보금자리가 된 것이다.
회상에 잠겨 있던 여신은 문득 한숨을 내쉬며 친구를 불렀다.
“나 잘렸어.”
생활비를 공동으로 부담해야 하기에 꼭 알려야 하는 일이다. 기어들어 가는 여신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지현의 목소리는 날카롭다.
“왜? 뭐 때문에?”
“센터 축소 이전한대.”
“그래서 인원 감축이야?”
“응.”
짧은 대화의 끝은 두 여자의 긴 한숨 소리다.
“사정 뻔히 알고 있으면서 너무했다. 카운슬러가 넷씩이나 있는데 하필이면 너를 자르니.”
한참 만에 입을 연 지현의 푸념에 여신은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농으로 대꾸했다.
“외국인 노동자의 비애랄까…….”
지현은 곱게 눈을 흘기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야, 차라리 잘됐어. 네 스펙이 아까운 직장이었어. 이참에 다른 길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응, 넋 놓고 있지 말고 다른 일자리 구해 봐야지.”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차여신이지. 나 혼자 벌어서 감당 안 될 텐데.”
기운을 북돋우는 친구의 낭랑한 어조에 여신도 웃음을 되찾았다.
“진짜 남편 같다.”
“남편 아녔어? 나 맘 바뀌어서 ‘취집’ 하기 전까진 네 남편 한다 그랬잖아.”
지현이 호기로운 투로 예전의 약속을 재차 확인시켜 주자 여신은 웃음을 터뜨렸다.
친구의 웃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현은 눈을 찡긋거리며 좋은 소식 하나를 알려 주었다.
“석 달 정도는 어떻게 될 거야. 나 이번에 주간지 고정 칼럼 하나 맡았거든.”
“잘됐네.”
여신의 얼굴에 반색이 비쳤다. 손뼉까지 치며 축하의 말을 읊어 내지만 마음 깊은 데서부터 올라오는 미안한 기색을 다 감추지는 못했다.
그 미묘한 변화를 눈치챈 지현은 장난스레 눈을 희번득거리며 으름장을 놓았다.
“너도 잘될 거야, 비 맞은 강아지 얼굴 하지 마, 보기 싫어.”
***
며칠 후, 무진을 데리러 가는 여신의 차 안에 전화벨이 울려 퍼졌다. 발신자를 확인한 여신은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 학부 카페 들어가 봐. 괜찮은 거 하나 떴어.
스피커를 통해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는 지현의 것이다. 지현이 말하는 카페는 대학원 심리학부 수료자들이 모이는 인터넷 커뮤니티다. 기분 좋은 소식이 있는 모양이다.
“응, 나중에 볼게.”
― 반응이 왜 이래? 진짜 괜찮은 데라니까. 채용 조건이 파격적이야!
심드렁한 그녀의 반응을 나무라던 지현이 ‘채용’을 들먹이자 여신의 눈이 번쩍 커졌다.
“알았어, 무진이 데리고 집 가서 바로 볼게.”
― 아니, 아니. 학교 도착해서 무진이 기다리는 동안 폰으로 먼저 확인해 봐. 놓치면 정말 아까운 데니까.
재촉하는 지현의 흥분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여신은 짧은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알았어.”
― 여기 됐으면 좋겠다. 우리 이사도 하게.
“어딘데? 먼 데야?”
― 아니, 강남.
“그럼 별로 멀지도 않은데, 뭘 굳이 이사까지…….”
이사를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여신의 반응은 회의적이다.
― 센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기 눌러앉은 거였잖아. 너 강남 출근, 나 중구, 무진이 학교까지 생각하면 압구정이나 용산 쪽이 딱 좋아. 이사 갈 집 알아보자!
지현의 새된 목소리가 정곡을 찌르자 여신은 ‘흐음.’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하!’ 실소를 내뿜으며 혼자 저만치 앞서가고 있는 친구를 나무랐다.
“나 아직 채용 공고 보지도 않았어.”
― 어, 어, 봐. 보고 나서 전화해. 아니, 보고 바로 서류 준비해. 알았지?
지현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사라지고, 여신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
십여 대의 밴이 주차된 지하 주차장에 구둣발 소리가 요란하다. 말끔한 차림의 남자가 주차장을 가로지르고 있다. 힘이 넘치는 걸음걸이로 입구를 찾아가는 남자는 수(秀) 엔터테인먼트의 창립부터 함께해 온 경영기획이사 최장희다.
걸으면서도 주차 구획에 세워진 차들을 눈으로 살핀다.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밴들의 상태, 직원들의 출근 여부, 구석구석을 살피던 장희의 시야에 익숙한 대형차가 포착됐다. ‘벌써 나왔나.’ 장기간 자리를 비운 후의 출근이라 서두른 시간인데, 그의 보스는 한발 앞서 출근한 모양이다.
‘요즘 들어 부쩍 열심이군.’
가벼운 발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오르던 장희는 출근길을 방해하는 짐 더미를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크기가 제각각인 박스들과 너덜너덜해 보이는 갖가지 도구와 연장까지, 엘리베이터 안은 짐짝으로 만원이다.
“어디 공사합니까?”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장희의 물음에 대답하는 소리는 박스 더미 뒤에서 흘러나왔다.
“어, 이사님 안녕하세요. 출근길이시군요?”
짐짝 사이로 겨우 고개를 내미는 사람은 이 건물 인테리어를 도맡았던 목수장이다.
장희는 겸연쩍은 얼굴로 마주 인사했다.
“예, 근데 이건 다 뭐예요?”
“새 사무실 공사요. 오늘부터 시작이잖습니까.”
장희는 금시초문인 소식이다. ‘새 사무실이 왜 필요하지?’ 묻고 싶은 말은 꿀꺽 삼키고 미심쩍은 표정으로 대꾸를 대신했다.
“아…….”
“지난주에 우리 디자이너들 계속 들락거렸는데, 모르셨어요?”
목수장이 떠들어 대는 소리를 들으며 장희는 분주히 머리를 굴렸다.
“아, 지난주엔 해외에 있어서.”
형식적인 대답을 끝내자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장희는 뒤쪽의 목수들에게 까닥, 목례로 인사를 대신하고는 바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따라 묵직한 카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공사를 할 사무실이 이 층인가, 임원 사무실과 회의실이 배치된 층에 새로운 사무실이라면……. 장희의 얼굴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복도를 따라 몇 걸음 더 들어가니 열려 있는 문이 있다. 경영이사인 김국표의 방과 마주하고 있는 방이다. 열린 문간에는 낯익은 뒤태를 가진 남자도 서 있다.
“김 상무, 이게 다 뭔가?”
장희는 성큼 다가서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귀에 익은 목소리에 얼른 몸을 돌린 국표는 환한 미소로 기획이사를 반겼다.
“어! 최 이사님 오셨군요. 여독은 다 푸셨어요?”
열흘간의 장기 해외 출장에 대한 인사를 먼저 챙기는 국표에게 장희는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으로 대꾸하고는 빈 사무실로 들어섰다.
“이 방 뭐 하게?”
“어, 짐 들어오네요. 이쪽으로…….”
문 앞까지 와 기다리고 있던 장비들이 두 남자를 지나가고, 국표는 뒤늦은 대답을 읊조렸다.
“힐링룸이에요.”
“힐링 뭐?”
장희는 눈을 치켜떴다. 그가 출장 간 사이 젊은 혈기들이 사고를 친 것 같다. 연습실 하나를 더 만들어도 부족할 판국에 힐링룸이라니……. 무슨 꿍꿍이인가 싶다.
국표는 금시초문일 전무를 위해 사족을 붙였다.
“아침 회의 시간에 대표님이 말씀하실 거예요.”
장희는 ‘흐음.’ 낮은 탄식을 뱉으며 국표를 쳐다보다가 방을 나섰다.
임원들이 둘러앉은 회의실, 강수의 돌발 선언이 끝난 뒤 잠깐 동안 이어지던 침묵을 깨트리는 사람은 장희다.
“생뚱맞게 힐링이라니요. 연습실, 작업실 하나라도 더 만들어 빡세게 돌리지는 못할망정 애들 놀이터 하나 더 만들어 주자는 것도 아니고 이건 좀 너무하잖습니까.”
최 전무의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자 강수는 몸을 뒤로 젖혀 의자에 기댔다. 회의 말미까지 참았다가 터뜨리는 것이니 짧게 끝나지는 않을 것 같아서다.
“놀이터가 아닙니다.”
맞은편에 앉은 국표가 잘못된 단어를 고쳐 주지만 장희는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인간적인 대우를 안 해 주는 것도 문제지만, 분에 넘치는 처우를 해 주는 것도 문제가 될 때가 있어요. 이 바닥 안 겪어 봤습니까? 풀어 주면 자유를 누리는 게 아니라 아차 하는 순간에 방종하게 되는 게 이 바닥 애들 생리예요. 아시는 분들이 왜 이러실까, 정말.”
“전무님.”
매니지먼트 팀을 총괄하는 미숙이 상냥하게 부르는 소리에 장희의 목소리가 그쳤다.
‘왜요?’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되묻는 장희에게 미숙은 차분한 어조로 그가 내뱉은 말뜻을 물었다.
“그 말씀은 연습생은 그저 노예처럼 굴리기만 해야 한다, 그런 말씀이세요? 요즘 그런 식으로 애들 다뤘다가는 당장에 기사 뜹니다. 정말 알 만한 분이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초심을 잃지 말자는 겁니다. 스파르타. 아이돌 양성 학교. 명문대 못지않은 교육 시스템에 최고 수준의 스텝들이며 트레이너들을 갖추기까지 어떻게 달려왔는지 잊었습니까? 우리의 초심은 양질의 콘텐츠였어요. 우리가 추구했던 양보다 질! 질 좋은 칼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장희의 반박이 곧장 이어진다. 반박이 아니라 열변을 토하는 수준이다.
좌중들을 둘러보기까지 하며 ‘초심’을 운운하던 장희는 잠시 뜸을 들인 후에 모두가 알고 있는 자신의 답을 말했다.
“담금질이에요. 달구고, 두드리고, 식히고, 다시 달구고. 제대로 된 물건이 나올 때까지 반복. 담금질.”
“힐링룸이 식히는 역할을 할 거예요.”
때를 놓치지 않고 끼어든 강수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거기서 뭘 하는데요?”
어이없는 목소리로 되묻는 사람은 장희다.
강수는 웃음기 어린 장희의 눈을 마주 보며 사실 그대로를 대답했다.
“카운슬러가 올 겁니다.”
“예?”
“심리학 전공자. 상담 심리를 전공하고 업으로 삼는 그런 사람이요. 기왕이면 학위까지 있으면 더 좋고.”
장희는 실소를 내뿜었다. 십수 년을 몸담아 온 연예계 바닥에서 상담사를 상주시키는 기획사는 본 적이 없다.
이미지 코디니 멘탈 트레이닝이니 거창한 이름을 붙인 외부 상담실을 방문한 적은 있어도 업무 공간 내에 상담실을 만드는 회사는 결단코 처음이다.
“정신과 의사 안 부르길 다행이군요.”
최대한 점잖게 비아냥대는 것으로 응수하지만 장희의 머리는 분주하게 돌아가는 중이다.
“필요하다면 정신과의 도움도 받아야죠.”
강수는 미소 띤 얼굴로 전무이사의 마지막 말을 받아 챙겼다. 농을 진담으로 받는 대표이사에게 장희는 뜨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궁극적인 목표가 뭡니까? 아이돌 양성입니까, 아니면 문제아 갱생입니까?”
“전무님이 가르치는 애들, 문제아예요?”
곧장 되묻는 강수에게 장희는 선뜻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가 적당한 대답을 찾는 사이 강수의 입이 먼저 움직였다.
“건강한 연예인으로 만들기 위해 가르치죠? 멘탈도 건강하면 더 좋지 않겠어요?”
장희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미 결정 내리고 시행하기로 마음먹은 일이라면 그가 온갖 딴죽을 건다 해도 시행되고 말 것이다.
“지난 한 주 동안 들어온 지원 서류, 제법 될 거예요. 두 분이 보시고 좀 추려 주세요. 면접 일정 잡히면 저도 참석하죠.”
조용해진 장희와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국표에게 지시 사항을 전달한 강수는 홀연히 일어나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면접을 직접 보겠다고?”
회의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장희가 불만을 드러냈다.
“이번엔 그러실 건가 봐요.”
국표의 간결한 대답, 다음은 총무과장의 목소리다.
“여기서 보시겠어요?”
방금 전 대표이사가 말했던 지원 서류가 담긴 파일을 내밀지만 전무이사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대신 국표가 ‘고마워요.’ 인사까지 챙기며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보나 마나 한 걸 뭐하러 봐. 대학 졸업하고 취업 못 해 눈에 불 켜진 애들이겠지. 김 상무가 알아서 해.”
“그러죠.”
장희는 마지막으로 불만 한 움큼을 더 쏟아 내고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전무이사의 뒤통수를 마뜩잖게 노려보던 미숙이 한껏 소리를 낮춰 불평했다.
“날이 갈수록 더해.”
“출장 끝내고 무사히 돌아오셨구나, 하고 생각해요. 일관성 있는 태도, 전무님 트레이드마크잖아요.”
재치 있게 응수하는 국표의 말에 나머지들 은 웃음을 터뜨리며 일어섰다.
월요일 아침 회의가 끝났으니 이제 분주히 움직여야 할 차례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둘러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2. 그 남자가 나타났다(1)
여신은 긴장을 풀기 위해 심호흡을 하며 대기실 안을 둘러봤다. 회의실로 쓰일 법한 방 안은 지원자들로 그득 차 있다.
<카운슬링의 새 영역을 넓혀 갈 창의적인 인물>
지난주 지현이 흥분해 전해 줬던 채용 정보의 타이틀이었다. 연예인을 양성하고 관리하는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무슨 이유로 상담심리학자들을 모집하는지 호기심도 일었었다. 그리고 그 호기심보다 더 유혹적이었던 것은 처우였다. 일반적인 기업보다 여유 있는 출근 시간, 인턴십이나 기약 없는 임시 계약직이 아니라 단번에 정규직으로 계약, 평균보다 높은 연봉, 그리고 개인 사무실까지.
여신에겐 갑작스러운 퇴사로 암울할 것만 같던 현실에 기막힌 반전이 되어 줄 직장이다. 혹여 허울만 번드르르한 사기에 당하는 것은 아닐까 불안할 정도였으니까.
그런 걱정은 바로 그날 밤 지현이 속 시원하게 풀어 주었었다.
‘꽤 뜨고 있는 회사야. 창립한 지는 오 년밖에 안 됐지만, 히트시킨 가수랑 배우는 벌써 열 손가락 넘어간다니까. 여기 대표가 재벌 3세라는 소문도 있어.’
사회부 기자인 지현에게까지 그 소문이 닿을 정도라면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결국 그 유혹에 기꺼이 발을 담근 여신은 지금 대기실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중이다. 달콤한 먹잇감에 벌 떼처럼 달려든 지원자들과 함께 말이다. 모여 있는 사람 수에 비해 소음은 거의 없다. 도도한 표정으로 경쟁자를 살피거나 혼자만의 사색에 잠겨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취업사이트가 아니라 대학원 학부 카페들만 골라 올린 채용 공고였으니, 심리학 쪽으로는 꽤나 자신만만한 인사들이 모였을 것이다. 그들의 면면을 둘러보자니 긴장감만 더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