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4화
2. 그 남자가 나타났다(2)


똑똑.
적막을 깨는 노크 소리, 뒤이어 열린 문으로 몇 차례 이 방을 오간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36번, 38번, 자리 옮겨서 대기하세요.”
아까와 똑같은 어조로 번호를 부르고 똑같은 말로 안내를 마친 여직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번호가 불린 두 사람이 매무새를 점검하며 빠져나가고, 방 안은 다시 적막강산이다. 헛기침조차 조심스럽다.
눈치를 보던 여신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조용히 일어섰다. 화장실이라도 다녀와야 할 것 같아서다. 비워 낼 것은 없지만 이대로 앉아 있다가는 질식할 것만 같다.
얼른 방을 빠져나와 등 뒤로 문을 닫은 여신은 ‘후우.’ 그제야 긴 한숨을 뱉어 냈다. 복도의 공기는 방 안쪽과는 사뭇 다르다. 어딘가에서 풍겨 오는 로즈메리 향이 머릿속을 한결 개운하게 해 준다.
여신은 가만가만 심호흡을 하며 아까 봐 두었던 화장실로 향했다.
두어 걸음 옮겼을까, 복도 저쪽에 발소리가 들려왔다. 경쾌하게 내딛는 발걸음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닌 것 같다. 여신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복도 반대편을 응시했다. 엘리베이터와 비상계단이 있었던 통로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은 두 명의 남자다. 여신의 눈길은 두 사람 중 키가 더 큰 남자에게 붙박였다. 두 남자는 곧장 복도 끝의 방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사라질 때까지 꼼짝 않고 서 있던 여신은 그제야 참고 있던 숨을 내뱉었다.
‘잘못 본 거겠지?’
‘잘못 본 거야. 여기 있을 리가 없잖아.’
자문자답하며 화장실로 들어선 여신은 거울에 비친 허연 얼굴을 발견하고는 흠칫 몸을 굳혔다. 일순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듯한 현기증을 느꼈으니 얼굴이 창백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여신은 거울 앞에 서서 눈을 감고 심호흡에 전념했다.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간절하게 속삭이는 바람과는 반대로 감은 눈꺼풀 위로 그의 모습이 선명하게 되풀이된다. 그때와 똑같다. 각이 선명한 턱선, 시원하게 뻗은 콧대, 날카롭지만 깊은 눈매까지 그녀가 기억하는 그의 얼굴 그대로다. 심지어 그 특유의 절제된 움직임에 미친 듯이 쿵덕거리는 그녀의 심장 반응까지도 똑같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대충 털어 부스스하던 머리칼이 흐트러짐 없이 정리되어 있었다는 것과 지나치게 많은 옷을 걸쳤다는 것뿐이다.
‘어떡하지?’
여신은 눈을 뜨고 거울 속의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와 무진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마침내 찾아온 것일까, 그는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오래전 혼이 쏙 빠질 정도로 뜨거운 사랑을 나누다가 바람처럼 사라졌던 남자가 과연 한때 스쳐 간 여자를 기억이나 할까 싶다.
‘아.’
절망이 깃든 탄식을 내뱉으며 여신은 벽에 기대섰다. 남자를 찾게 되면 책임을 다하라고 다그칠 생각이었다. 인사 한 마디 없이 떠나 버린 그에게 야멸친 말 몇 마디도 던져 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결코 허튼소리를 해 본 적 없다던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렇게 떠나 버려서 미안해.’
‘혼자 짊어지게 해서 미안해.’
‘먼저 찾지 않아 미안해.’
어떤 말이든 상관없었다. 가족들을 떠나 힘겨운 선택을 한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며 ‘미안해.’ 한 마디만 한다면 기꺼이 그를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동도 없던 여신이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이 멍청아.’
순전히 그녀의 선택이었다. 레스토랑에서 그에게 시간을 내 준 것도, 다음 날 만나자던 그의 말에 설레 잠을 설친 것도, 그의 달콤한 속삭임에 홀려 피임 따위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 버린 것도……. 그리고 배 속에서 자라고 있는 생명을, 그가 남긴 선명한 흔적을 차마 저버리지 못해 독립을 감행했던 것도 모두 그녀의 선택이었다.
“44번, 여기 계세요?”
바깥쪽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가 여신의 주의를 일깨웠다.
“네, 여기 있어요.”
여신은 화들짝 돌아서서 얼굴 상태를 점검하고는 잰걸음으로 화장실을 나섰다.

여신이 자리에 앉은 뒤, 짧은 침묵이 흐른다. 질문이 시작되기 전, 마치 중요한 운동 경기의 전초전 같은 긴장감이다.
여신은 내리깔고 있던 눈을 똑바로 뜨고 면접관들의 면면을 살폈다. 그들 중엔 그도 앉아 있다. 여신의 시선은 그에게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그는 시종일관 무심한 얼굴로 파일만 넘기고 있다.
이 면접을 잘 치러야 하나, 엉망으로 치르고 도망쳐야 하나, 생뚱맞은 고민이 그녀를 괴롭혔다. 그가 알아보는 게 다행일까, 모르고 있는 게 다행일까, 황당한 고민은 계속됐다. 칠 년 동안 꿈꿔 왔던 소심한 복수를 위해서는 그가 기억을 못 하는 쪽도 나쁘지 않다. 더욱 강한 한 방이 될 테니까. 하지만 그가 알아본다면? 단박에 알아보고 ‘헤일리!’ 잊고 살았던 그 이름으로 부른다면 그녀는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질 것이다.
‘알아볼까?’
그녀와 눈이 마주친다면, 그는 알아볼까. 조금이라도 미안한 기색을 내비칠까, 아니면 당황한 기색이라도 말이다. 일말의 기대감이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시선을 돌렸다. 다른 쪽에서 질문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 회사에서 본인이 할 일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또다시 흘러나온 판에 박힌 질문에 국표의 입술이 뒤틀린다. 어제와 오늘, 수십 명을 면접하는 동안 전무는 똑같은 질문으로 포문을 열었다. 대단한 일관성이다. 국표는 얼른 표정을 정돈하며 전무의 질문에 사족을 붙였다.
“우리 회사에 요즘 이탈하는 연습생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의욕 저하랄까, 중도 포기랄까, 어떤 외부적인 요인이 작용했을 수도 있겠지만, 아시다시피 우리 회사는 연습생들을 핍박하는 그런 회사가 아니거든요. 부쩍 잦아진 이탈 현상이 어떤 요인 때문인지, 혹시 심리학적으로 부합하는 케이스가 있는지, 얘기를 들어 볼 수 있을까요?”
젊은 남자의 친절한 부연 설명에 작은 미소로 답한 여신은 또록또록한 발음으로 의견을 말했다.
“제 짧은 식견으로는 아무래도 부담감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싶어요. 한국은 체계적인 육성 시스템이 있다고 들었어요. 특히 아이돌 같은 경우에는 더더욱 교육이 엄격하다더군요. 어린 나이에 연습생 생활을 시작한 사람일수록 그런 엄격한 시스템에서 불가피하게 받게 되는 피로감이 해소되지 못하고 누적될 확률이 높습니다.”
“어린 나이에 시작할수록 더 완벽하게 적응하게 되는 겁니다. 인간의 뇌는 어릴수록 적응력이 뛰어나거든.”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치고 들어오는 목소리가 잠자고 있던 오기를 발동시켰다. ‘이 남자 뭐지?’ 처음 거만한 투로 질문을 시작했던 그 남자다.
불쑥 끼어드는 장희에게 못마땅한 눈빛을 보내는 또 한 사람은 국표다.
“계속하세요.”
국표는 친절한 미소로 면접자를 격려했다.
여신은 태연한 얼굴로 남은 대답을 읊어 냈다.
“그 피로감에 데뷔에 대한 불안함, 아직 맞닥뜨려 본 적 없는 대중에 대한 막연한 공포, 완벽을 추구할수록 커져 가는 무대 공포까지, 그들을 괴롭히는 심리적 요인은 연습생 수만큼 다양한 종류일 테죠. 그런 불안감과 공포감을 해소할 길을 열어 주는 것도 하나의 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젯밤, 지현에게 벼락치기 과외를 받은 것이 제법 도움이 됐다. 연예기획사라는 화려한 간판 뒤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거래며 범법 행위까지, 고급 정보를 지현은 아낌없이 쏟아 주었다. 무사히 첫 질문을 넘긴 여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친구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녀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면접관 네 명이, 아니 그를 제외한 세 명이 일사불란하게 항목을 체크했다. 체크를 끝내고 고개를 드는 것도 그네들이 지향하는 칼군무 같다.
“고용 센터에서는 어떤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까?”
다음 질문은 친절한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첫 질문이 중요한 것이었나 보다. 이제는 신변잡기에 관한 것들을 묻겠지, 여신은 속으로 면접의 수순을 체크하며 성심껏 대답했다.
“주로 구직자들입니다. 아직 첫 직장조차 제대로 가져 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고, 여러 차례의 실직으로 자신감이 상당 부분 결여된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몇 차례 대화만으로 그런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다고 믿습니까?”
강수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끼어들자 방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아직 끝이 아니었나 보다. 여신은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안정된 톤으로 질문의 오류를 바로잡아 주었다.
“구제가 아니라 도움을 주는 겁니다. 사람과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행위는 상상도 못 할 만큼 엄청난 치유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지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어떤 사람들은 무기력을 떨쳐 버리기도 하구요. 반면에 상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스스로 치유해 나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고작 몇 마디 말을 나누는 것으로 네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느냐 하는 뜻의 질문이었다면, 네, 저는 최선을 다해 대화를 나누는 것이 카운슬러의 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눈을 마주치며 나누는 대화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으니까요.”
말을 마친 여신은 차갑게 쏘아보고 있는 강수를 똑바로 쳐다봤다.
강수는 호전적인 그녀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뭐지?’
쉽사리 눈을 뗄 수가 없다. 까만 눈동자 깊숙이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만 같다. 그 비밀을 알아내고 싶다. 하지만 선뜻 입을 열지는 못하겠다. 뒷덜미를 스치는 미세한 전율도 그를 당황시키는 이유 중 하나다.
호기심과 두려움이 같은 크기로 부풀어 올라 머릿속을 꽉 채우는 것 같다. 오래전 기억들을 더듬게 만드는 익숙한 목소리가 자극하는 호기심과, 필요에 의해 고용할 대상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을 보이려는 스스로에 대한 두려움이다.
해악을 봉인해 놓은 항아리에 대한 호기심을 누르지 못해 안달 냈던 판도라처럼 그의 눈은 열성적으로 그녀의 눈동자를 파고드는 중이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서는 오래전 기억 하나가 영화처럼 펼쳐졌다.

***

드넓은 모래밭, 그리고 하얀 모래보다 더욱 눈부시게 빛나는 바다를 배경으로 두 남녀가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자는 일광욕을 즐기는 중이고, 남자는 여자의 목덜미를 탐하는 중이다.
“헤일리, 헤일리…….”
강수는 중독성이 강한 그녀의 체취를 욕심껏 들이마시며 뇌 깊숙이 각인된 이름을 연거푸 중얼거렸다.
“하아.”
그녀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오자 강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소담한 귓불을 깨물었다.
“아!”
움찔한 그녀가 날카롭게 흘겨보자 강수는 큭큭 웃음을 터뜨리다가 그녀의 말간 눈을 지그시 바라본다. 햇볕을 고스란히 투영시킨 듯 투명한 눈동자가 그를 부르고 있다. 핑크빛으로 달아오른 그녀의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달라졌군.’ 전날 밤에는 짙푸른 회색빛을 내던 눈동자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서서히 다가오자 그는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그의 의도를 눈치챈 그녀가 싱긋, 짓궂은 미소를 짓는가 싶더니 이내 새초롬한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피식, 그의 입에서도 실소가 새어 나왔다.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다가도 일순간 돌변해 그를 지배해 버리는 여자임을 알기 때문이다. 매끈한 허벅지를 그의 배에 걸치며 사악한 미소로 키스를 부르는,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그는 기꺼이 그녀의 명령을 수행했다. 그의 거친 키스에 짧은 웃음을 터뜨리던 그녀의 눈꺼풀이 내려 닫히기 직전까지 그는 그녀의 눈동자를 놓치지 않았다.
‘이건 재앙이야. 아름다운 재앙.’

***

‘아름다운 재앙.’

오래된 기억 하나를 더듬느라 여념 없던 강수는 상무의 헛기침 소리에 정신을 가다듬었다.
“혹시 강연을 했거나 책을 낸 적도 있습니까?”
국표는 경영이사다운 어조와 표정으로 질문을 이어 갔다.
“없습니다.”
“도전해 보셔도 되겠는데요. 가깝게는 연예인 지망생들에게, 더 나아간다면 대학이나 기업에도요.”
“전 에이전시를 찾으러 온 강사가 아닙니다.”
재치 있는 여신의 대답에 면접관 중 유일한 여자가 빙긋이 웃어 보였다. 온몸으로 커리어 우먼의 포스를 내뿜고 있는 여자는 부드러운 어조로 다음 질문을 했다.
“영어는 어느 정도 합니까?”
“모국어나 다름없습니다.”
“다른 언어는?”
미숙은 또 다른 것을 묻는다.
매니지먼트 팀을 총괄하는 책임자로서, 국적이 다양해지고 있는 연습생들과의 소통에 무리가 없을지 미리 체크하려는 것이다.
“불어와 독일어 공부했었습니다.”
똑 부러지는 여신의 대답에 미숙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중국어는 혹시 안 됩니까?”
릴레이처럼 이어지던 문답이 뚝 끊겨 버렸다.
“중국어는…….”
거침없이 대답하던 여신이 말끝을 얼버무리자 네 사람의 시선이 일시에 그녀에게로 모아졌다. 여신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낮은 어조로 대답을 읊조렸다.
“광둥어를 좀 배웠습니다.”
“역시.”
만족스러운 면접관의 목소리에 여신은 참았던 숨을 조심스레 내뱉는다. 하지만 다시 시선을 든 순간, 레이저를 쏘고 있는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여신의 눈이 동그래지지만 그의 표정은 변화가 없다. 괜스레 움찔하게 만드는 날카로운 표정으로 시선을 붙박고 있던 그가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열자 여신은 귀를 쫑긋 세웠다.
“특이하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별다를 것 없는 평가다. 여신은 티 나지 않게 어깨를 늘어뜨리며 안도감을 만끽했다. 식은땀 한 줄기가 뒷덜미를 타고 쪼르륵 흘러내렸다.
이제 네 사람은 하나같이 파일에 눈길을 박고 손을 놀리고 있다. 여신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기다렸다. 째깍째깍, 초침 돌아가는 소리가 느껴질 만큼 숨 막히는 순간이다.
‘이 자리에서 바로 발표하나?’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나가라는 말을 하지 않으니 답답하다.
“나가시면 됩니다. 우리 직원이 안내해 줄 거예요.”
마침내 그녀를 풀어 주는 한마디가 들려오고, 여신은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감사합니다.”

“44번.”
강수가 번호를 하나 부르자 국표도 같은 번호를 불렀다.
“저도 44번이요.”
“우리 회사의 채용 방식은…….”
“지금까지로 봐서는 44번이 제일 낫네요.”
장희의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지만 미숙의 동의에 묻혀 버렸다. 국표는 기다렸다는 듯 44번의 이력을 소리 내 체크했다.
“44번은 좀 특이합니다. 브라운대 출신에 국내 대학원 수료. 흔히 볼 수 있는 유학생이겠거니 했는데 외국인 신분이구요.”
“4개 국어가 가능한 사람은 44번뿐이었어요. 한국어까지 하면 5개 국어네요.”
“검증도 없었잖나.”
“검증하면 되죠.”
경영이사, 매니지먼트 팀 이사, 기획이사의 목소리가 섞여 드는 동안 강수의 입은 굳게 닫혀 있다.
“44번, 잠시 대기하시라고 해 줘요. 전무님이 검증할 게 아직 남았다고 하시네요.”
경영이사인 국표가 명쾌한 어조로 여직원을 향해 지시를 내리는 동안에도 강수는 상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차여신 씨?”
엘리베이터 앞에 선 그녀를 부르는 사람은 아까의 그 여직원이다. 여신은 아까보다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상냥하게 대답했다.
“네?”
“혹시 다른 스케줄 없으시면 잠시 기다리시겠어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여신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왜 그러시죠?”
“이사님들 지시예요.”
간결한 말로 윗선의 지시 사항임을 알려 준 여직원은 곧장 앞장서서 그녀를 안내했다. 여신은 마지못해 그녀를 따라 발을 놀렸다.
여직원이 안내한 방은 대기자들이 모여 있던 방 바로 옆의 회의실이다. 여직원은 그녀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휑하니 문을 닫고 사라져 버렸다.
혼자 남은 여신은 미심쩍은 상황을 되짚어 보며 방을 둘러봤다. 아까의 방보다 좁은 공간이지만 원탁과 소파, 벽면을 활용한 장식 선반 위를 차지하고 있는 물건들은 다름없이 화려하다. 온갖 트로피와 감사패, TV에서 봤던 아이돌들의 사진도 있다. 창틀과 같은 높이로 재단된 선반에는 갖가지 책도 꽂혀 있다.
여신은 망설임 없이 책꽂이로 다가갔다. 얼마를 기다려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게다가 아직 무진의 하교 시간도 넉넉하게 남았다. 우두커니 앉아 잡념에 사로잡히느니 뭐라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다.
어렵지 않게 책을 한 권 고른 여신은 원탁에 배치된 여러 종류의 의자 중 편안해 보이는 윙체어에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