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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2. 그 남자가 나타났다(3)


책에 집중한 여신이 공간을 망각할 무렵,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여신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문간에는 많아야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서 있다. 문을 열어젖혀 놓고 놀란 10대 소년도 어리둥절한 얼굴이다.
“여기 해부시……. 아니, 명담실…….”
어눌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아이에게 잠시 의아한 시선을 던지던 여신은 이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권했다.
“아, 저도 누가 불러 주기를 기다리는 중이에요. 들어오세요.”
소년은 여신의 권유에 마지못해 발을 들이며 더듬더듬 인사를 건넸다.
“아녕하세오.”
동양인처럼 보이지만 한국어 발음이 영 서툰 아이를 여신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고향이 어디예요?”
상냥한 물음에도 소년은 지레 움찔하며 대답 한마디를 내놓았다.
“구이(桂:중국의 자치구, 광시좡족자치구의 약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여신의 눈이 커지자 10대 소년은 멋쩍은 웃음을 웃으며 또박또박 발음했다.
“고앙, 시, 성.”
“아! 광시성. 거기 알아요. 아직 한국말 어렵죠?”
“예.”
기다렸다는 듯 대답을 내놓는 소년에게 여신은 미소를 지어 주었다. 이해한다는 뜻이다. 여신 또한 처음 한국으로 왔을 때 적잖은 소통 장애를 겪었었다. 가족들끼리는 늘 쓰던 한국어였는데도 말이다. 여신은 안심하라는 듯 소년의 어깨를 두들겨 주며 광둥어로 말을 꺼냈다.
「오디션은 그곳에서 봤어요?」
소년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쳐 가고, 다음은 반가운 미소가 그려졌다. 소년은 서슴없이 주절주절, 그간의 이야기를 꺼냈다.
「오디션은 서울에서 봤어요. 오디션 공고가 인터넷으로 떴었거든요. 어릴 때부터 노래를 잘해서 어른들이 한국 가라, 한국 가라 했었어요.」
「한국 온 지는 얼마나 됐어요?」
「이 년쯤, 재작년 여름에 왔어요. 여기서 에반 만나서, 우리 듀오예요. 듀오 이름이 에반스. 저는 큰 에반, 동생은 작은 에반.」
초면인 상대를 위해 팀 이름까지 알려 주며 신나게 떠들고 있는 소년의 눈이 처음과 다르게 초롱초롱 빛나고 있다. 여신은 잠자코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이번 크리스마스쯤에 첫 앨범 나와요. 벌써 녹음은 다 끝냈고, 홍보하면서 데뷔 준비하고 있어요.」
‘데뷔’라는 말에 여신은 손뼉까지 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꿈을 안고 먼 나라까지 온 소년에게 정말 잘된 일이기 때문이다.
「축하해요. 드디어 꿈을 이루는 순간이네.」
여신의 열렬한 축하에 에반은 수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 꿈같아요. 진짜 가수가 될 수 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노래 잘하는 거 하나 믿고 온 건데…….」

***

월요일 회의에서 대표가 지시한 이후, 어제와 오늘로 나누어 각각 30 명 남짓, 70여 명의 면접을 일사천리로 해치운 면접관들은 남은 면접을 모두 완수하고 회의실을 나섰다. 가장 먼저 무리를 떠나는 사람은 강수다. 대표에게 묵례를 하고 돌아선 나머지들은 같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44번 검증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미숙이 궁금증을 드러냈다.
“설마 직접 하시진 않겠죠?”
장희가 대답을 생각하기도 전에 국표의 느물대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장희는 눈살을 찌푸리며 코웃음을 쳤다.
“연습생 몇 불러올리면 간단한 걸 가지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을 늘어놓고 앞장서서 가는 전무의 뒤통수에 미숙의 곱지 않은 시선이 꽂혔다.
“역시.”
“제갈공명이 울고 가겠네요.”
한껏 비아냥대던 미숙도, 속삭이듯 거들던 국표도 이내 같은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그들의 사무실도 전무와 같은 쪽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발 앞서가던 전무의 발걸음이 소회의실 앞에서 멈췄다. 미숙과 국표는 의아한 시선을 주고받으며 전무 곁으로 다가갔다.
“쟤 왜 여기 있지?”
방 안에 있는 사람을 발견한 미숙이 먼저 묻고, 한발 늦게 도착한 국표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요? 어? 큰 에반 누가 불렀어요?”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셋 중 가장 먼저 이 방 앞에 멈춰 섰던 장희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리자 미숙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일대일 면담은 안 하기로 약속하셨잖아요.”
최 전무 혼자만 ‘일대일 면담’이라고 완곡하게 표현하는 ‘닦아세우기’는 몇 달 전 임원 회의에서 금기 사항으로 정했던 행위다.
“애들 아직도 여기를 해부실이라고 부르는 거 아세요?”
국표의 입에서 나온 ‘해부실’은 연습생들 사이에 나도는 말이다. 이 방에 불려 온 아이들은 진이 빠질 때까지 일장 연설을 듣고, 반성문을 쓰고, 다짐을 해야만 풀려나올 수 있기에 저들끼리 공포감을 담아 ‘해부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국표도 못마땅한 눈으로 전무를 응시했다.
하지만 장희는 덤덤한 얼굴이다.
“원래 몸에 좋은 약은 쓴 법이야.”
표정만큼이나 덤덤한 어조로 뱉어 낸 대답이 미숙의 신경을 긁었다. 한마디를 더 쏘아붙이려 입을 여는데, 전무의 의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여자 뭐 하는 거지?”
“에반 얘기 들어 주는 것 같은데요.”
국표가 무심결에 대꾸하고, 미숙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유리문 안쪽을 들여다봤다.
“에반이 저렇게 수다스러운 애가 아닌데…….”
“광둥어 한다고 했었잖아.”
국표의 혼잣말에 미숙이 냉큼 대꾸했다. 미숙의 얼굴에는 어느새 흡족한 미소가 번지고 있다.
“아, 에반이 쓰는 중국어가 광둥어구나!”
“무슨 얘기를 저렇게 신나게 하는지 들어 보고 싶네.”
“우리 등장하는 순간 에반 입 다문다에 제 시계 걸죠.”
“들어가 볼 필요도 없겠다에 내 백 걸게.”
국표와 주거니 받거니 농을 던지던 미숙은 말이 없는 전무에게 시선을 돌렸다.
“전무님 들어가 보시겠어요?”
“됐어. 그냥 진행해.”
입을 굳게 다물고 유리창이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장희는 퉁명스럽게 대꾸하고는 제 사무실로 향했다.

***

“차여신 씨, 오래 기다리셨죠?”
이제는 친근함마저 느껴지는 여직원이 다시 그녀를 불렀을 때, 여신은 에반과의 수다에 한창 빠져들던 중이었다. 여신은 쾌활한 미소로 여직원에게 화답했다.
“아녜요. 이 친구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여직원도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차여신 씨 이쪽으로 오시구요. 에반, 내려가도 된대.”
“점무닌 안 와요?”
에반이 의아한 얼굴로 되묻자 여직원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전무의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응, 오늘 면담 없대. 연습실로 직행하라시던데?”
“네.”
한시름 놓은 얼굴로 문을 나서려던 에반이 문득 돌아서서 여신을 불렀다.
「호의 감사합니다.」
진중한 얼굴로 감사를 전하는 소년에게 여신은 따뜻한 눈빛으로 답했다.

여직원이 안내한 곳은 복도 끝, 면접 장소와 마주하고 있는 방이다. 들어서는 입구부터 심상찮은 기운이 느껴진다. 여신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대표님, 차여신 씨 오셨습니다.”
노크와 동시에 문을 연 여직원이 방문객을 알리고, 안쪽에서는 짧은 대답만 흘러나왔다.
여직원이 길을 비켜 주자 여신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표정을 정돈한다. 짧은 순간, 도도한 표정으로 무장하고 방 안으로 들어선 여신은 짓궂은 운명의 장난에 한껏 비아냥대는 투로 브라보를 외치고 말았다. 물론 마음속으로만 외쳤다.
멀지 않은 곳에 놓인 책상, 그 책상에는 그가 앉아 있다. 지리학자, 리조트의 직원, 비즈니스 여행 끝에 휴식을 취하러 온 여행객,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 그녀에게 싫증이 났던 걸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걸까……. 수없이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들었던 남자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회사의 오너가 되어 눈앞에 앉아 있다. 처음 레스토랑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말이다. 여신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내일 별다른 스케줄 있나?”
무미건조한 어조. 숨이 턱 막히는 것 같다.
“없습니다.”
여신도 최대한 덤덤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럼 내일 아침 아홉 시, 여기서 보지.”
그의 눈을 피하지 않으려 애쓰던 여신은 갑작스레 몰려오는 울음기를 감추려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동상처럼 굳어 있던 강수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가둬 두었던 공기를 내뱉으며 지친 듯 의자에 기댔다.
‘내 생각이 틀린 건가.’
그녀의 눈동자는 까만색이었다. 오점 하나 없이 잘 다듬어 낸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까만색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어떤 눈동자와는 전혀 다른 색이다.

***

산들바람이 커튼을 흔들기 시작할 즈음, 잠에서 깨어난 강수는 옆구리에 느껴지는 온기를 본능적으로 당겨 더욱 단단히 가뒀다.
그녀의 방, 그녀의 물건, 그녀의 향기 속에서 잠을 깨는 것은 어디에서도 느껴 보지 못한 강한 성취감을 느끼게 했다. 마치 새로 태어난 것 같기도 하다.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지는 아침이다.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향기를 만끽하던 강수는 문득 고개를 들고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무방비 상태인 그녀를 보는 것은 처음이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짧은 금발, 처음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도 바로 이 톰보이 같은 헤어스타일이었다.
동그란 이마에 정갈한 눈썹, 이제 보니 선명한 흑갈색이다. 원래 금발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또래의 백인 소녀들이 늘 꿈꾸는 브론즈 헤어를, 그녀도 가져 보고 싶었었나 보다. 그녀의 소박한 꿈이 사랑스러워 미소가 절로 번졌다.
그림자를 드리운 속눈썹과 작고 오뚝한 코를 지나 시선을 조금 더 끌어 내리자 보기 좋게 부푼 입술이 그의 시선을 붙들었다. 그 입술을 다시 머금고 그녀를 깨워 소리 지를 때까지 사랑해 주고 싶은 충동이 불쑥 치솟는다. 하지만 이내 그의 눈에는 안쓰러운 빛이 감돌고 있다. 동이 터올 때까지 그녀를 괴롭혔던 게 기억났기 때문이다.
첫날 그녀의 입술을 맛본 뒤 주체할 수 없는 열망에 사로잡혀 지난 이틀 동안 그는 그녀를 풀어 주지 않았었다.
해변에서, 카페에서, 산책로 끝자락에 숨어 있는 벤치에서……. 시간과 장소가 허락하는 대로 그는 그녀를 탐하는 데에 집중했었다.
이틀 동안 그녀는 마른 몸에 저장했던 모든 에너지를 써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번뜩 떠올랐다.
지금쯤이면 메인 레스토랑의 주방은 아침 식사 준비가 한창일 것이다. 그녀만을 위한 식사를 주문해야겠다. 기왕이면 스태미나를 회복해 줄 음식으로 말이다.
혼자 마음먹은 강수는 침대를 벗어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이내 자석처럼 그녀의 입술로 가 붙박였다. 발간 입술로 뱉어 내는 달큰한 숨결이 코끝에 닿는 듯한 착각마저 들 지경이다.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한 그는 다시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꿀맛 같은 잠을 방해 받은 그녀는 어리광 섞인 소리로 투덜대며 그를 향해 돌아누웠다. 그래도 그를 뿌리치진 않았다.
자세가 바뀌니 그녀를 탐하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강수는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그녀의 입 안을 헤집다가 아쉬움이 짙게 밴 입맞춤을 작은 얼굴 구석구석에 퍼붓고는 몸을 일으켰다.
지금 멈추지 않으면 종일 침대 밖으로 나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녀만을 위한 아침 식사를 위해서라도 움직여야만 한다. 면 소재의 셔츠와 바지를 대충 걸친 강수는 아직 꿈속을 헤매고 있는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눈길을 던지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위급했던 순간이 지나가고 몰디브로 다시 돌아갔을 때에는, 그녀는 없었다.
하지만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모든 호텔과 리조트에는 체크인 단계에서 고객 정보를 저장하는 시스템이 있으니까.
원하는 정보를 손쉽게 얻은 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할아버지가 맡겼던 프로젝트를 마무리 지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안심하고 있었다. 아니, 방심하고 있었다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겨울이 봄으로 바뀌어 갈 즈음, 그는 벅찬 가슴을 안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지루한 비행이 끝나면, 뉴욕에서 일상을 즐기고 있을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찾아간 그곳에 그녀는 없었다. 도우미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그녀는 유학중’이라는 짧은 메시지를 전해 줬을 뿐이다.

그녀가 체크인하면서 남겼던 주소는 롱아일랜드의 범상찮은 저택이었다. 하지만 길가에서는 지붕 끄트머리만 보일 정도로 긴 진입로를 가진 그 집의 대문을 지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정작 힘든 상대는 현관에서 마주치게 됐다. 현관문을 열고 방문객을 직접 맞이한 중년 여성은 같은 말만 되풀이하며 강수를 막아섰다.
「대학원 공부를 하러 떠났어요, 이 주 전에.」
현관문 안으로 발도 못 들이게 철벽 방어를 하는 여자에게 강수는 절실한 얼굴로 부탁했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을까요.」
하지만 냉소적인 웃음만 돌아왔다.
「알려 줄 수 없다는 거 알죠?」
그녀에게 다시 부탁해 볼 요량으로 한 발 다가서는데 등 뒤에서 경계심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죠?」
휙 돌아선 강수는 동양인 남자의 등장에 흠칫,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다시 한 걸음 물러섰다. 동양인 남자의 곁에는 아직 시동을 끄지 않은 대형 세단이 서 있다.
강수는 발랄한 헤일리와 젊은 동양인과 대형 세단을 운전하는 기사, 그리고 저택을 연결해 줄 고리를 찾으려 애쓰다가 겨우 한마디를 꺼냈다.
「헤일리 양을 찾고 있습니다.」
「무슨 일로? 그 아이는 지금 여기 없는데요.」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동양인 남자에게 강수는 경계심을 드러냈다. 두 차례나 그녀가 이 저택에 없다는 말을 들었지만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
날카로운 눈으로 관찰하고 있는 강수를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던 동양인 남자는 싱긋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헤일리 오빠예요.」
「얼마 전 저희 리조트에 머무를 때, 놓고 간 짐이 있어서요.」
한국계인가? 아니면 중국계? 복잡해진 강수의 머릿속 사정을 모르는 동양인 남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제 궁금증을 해결하기에 바쁘다.
「리조트에서 이런 것까지 신경 써 주나요? 사람이 직접 방문할 정도로?」
「VIP고객에게만 드리는 특혜입니다.」
패닉 상태가 된 강수는 주절주절, 되는대로 지껄이고 있다.
「이제 갓 졸업한 애송이가 VIP라니, 이때다 싶어 펑펑 쓰고 왔나 보군. 이거 헤일리 방에 챙겨 둬요.」
동양인 남자가 애정 어린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비꼬지만 강수는 귀담아듣지 못했다. 그의 손을 떠나 도우미에게 넘겨지고 있는 선물 상자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탓이다.
그녀를 만나면 사과와 함께 전해 주려 했던 선물이었다. 눈처럼 하얀 피부를 돋보이게 해 줄 붉은색 드레스. 용서를 받는다면 그 드레스를 입은 그녀와 못다 한 밀월을 즐길 생각이었다. 타이밍을 맞추지 못한 지금, 그 선물은 눈앞에서 사라지는 중이다.
멀뚱히 서 있는 그에게 동양인 남자는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다.
「어쨌든 고맙습니다. 살펴 가세요.」
「예, 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어눌한 소리로 대답한 강수는 미련이 남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경계심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남자 앞에서 결국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예, 그럼…….」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그의 등 뒤로 동양인 남자의 매끄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두 분 아직 준비 안 하셨어요?」
「아직이요, 안에서 기다리셔야 할 것 같아요.」
강수를 대할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도우미의 상냥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서둘러 차에 오른 강수는 곧장 시동을 걸고 그곳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