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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2. 그 남자가 나타났다(4)


‘이때다 싶어 펑펑 쓰고 왔나 보군.’

아까는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한마디가 못내 걸린다.
부족할 것 없이 자랐지만 잠깐의 일탈을 꿈꿨던 소녀에게, 휴양지에서 만난 남자의 의미는 과연 얼마만큼이었을까.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 한 자락이 그를 붙들고 놔주지 않았다.

***

회상에 젖어 있던 강수는 문득 책상 위의 폴더를 열어 서류를 응시했다. 이 서류에 칠 년 전 그가 알고 있던 정보는 없다.
‘헤일리 차’라는 이름은 체크인 정보에서, 동양인이라는 정보와 나이는 그녀의 친오빠라고 자신을 소개하던 남자에게서, 그리고 더 이상 그녀를 못 만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그녀의 집 대문을 빠져나오며 깨달았었다. 늦어도 한참 늦은 깨달음이었고, 빈약하기 짝이 없는 정보였다.
진작 알았더라면, 그녀의 입술을 탐하는 대신 그 입술이 해 주는 이야기를 조금만 귀담아들었더라면, 아니, 그날 그가 떠나지만 않았었다면, 그랬으면 그녀를 놓치는 일은 없었을까.
‘아니야.’
그는 아직 그녀를 놓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녀가 다시 돌아온 것일 수도 있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던 호전적인 눈동자는 기억에 없는 까만색이지만, 그리고 그녀는 그를 못 알아본 건지도 모르지만, 그에게 다시 기회가 온 것일 수도 있다.
삐이.
인터폰의 전자음이 주의를 일깨웠다.
― 회장님과 허 이사님과의 점심 약속, 차 대기시켰습니다.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다. 스피커 너머의 비서가 그렇게 일깨워 주는 것 같다. 감회에 젖어 허우적거리는 로미오가 아니라 내 것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허강수로 돌아갈 시간이다. 강수는 거울 앞으로 가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3. 그녀, 헤일리(1)


출근 사흘째, 여신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소회의실로 출근했다. 사흘 전 에반과 대화를 나눴던 그 방이다. 방으로 들어서자 청량한 소나무 향이 그녀를 반겼다. 임시 책상 위에 놓인 디퓨저를 두어 번 톡톡 건드려 조금 더 짙은 향을 음미했다. 그러곤 커피가 담긴 텀블러를 내려놓고 가방과 코트를 걸었다.
그녀가 책상으로 다가서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다. 마치 그녀의 뒷모습을 발견하자마자 쫓아온 사람 같다.
“차 실장님!”
“어서 오세요.”
오늘 첫 번째 방문객은 친절한 얼굴로 면접자들을 안내했던 여자다. 이틀을 출근하고서야 그녀가 대표이사 비서실 소속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차 실장님!”
반가운 인사에도 주영은 여신을 부르기만 했다. 여신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달려와 와락, 여신을 껴안았다.
“고마워요, 차 실장님. 아니, 언니! 언니 덕분에 나 연애해요!”
여신은 ‘풋!’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제와 그제, 주영의 이야기를 들어 줬을 뿐인데 일이 잘 풀렸나 보다.
‘이런 일 하라고 뽑아 놓은 건 아닐 텐데…….’ 뜬금없는 걱정이 머리를 스치지만 여신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축하해 주었다.
“축하해요.”
“고마워요, 정말 언니 덕분이에요.”
“난 아무것도 한 거 없어요.”
거듭된 인사에 여신은 고개를 가로젓지만 주영은 더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어젯밤 있었던 일을 종알종알 풀어냈다.
“언니랑 얘기하고 나서 조급증이 사라지니까 그제야 앞이 조금씩 보이더라구요. 너무 막무가내로 매달렸구나 싶어서 이제 부담 가지지 말라구, 그동안 미안했다구 문자 보냈는데 세상에! 아니라고, 더 일찍 받아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답이 온 거예요! 꺅! 아직도 떨려!”
주영의 호들갑스러운 탄사와 여신의 경쾌한 웃음소리가 작은 공간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도 섞여 들었다.
“좋은 일 있어?”
화들짝 돌아본 문간에는 매니지먼트 총괄이사 미숙이 서 있다.
“아침부터 시끌시끌하네.”
웃음기 어린 목소리를 내는 이사에게 주영과 여신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나오셨어요, 이사님?”
“좋은 아침이에요, 이사님.”
미숙은 장난스레 손을 흔드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전달 사항을 말했다.
“주영 씨, 윤 비서가 찾던데? 여신 씨, 우린 30분 후에 내려갑시다.”
미숙과 주영이 동시에 떠난 사무실은 갑자기 귀가 먹먹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여신은 입술을 쭉 내밀었다가 도로 집어넣으며 안면 근육을 정돈했다. 30분 후에 연습실과 작업실, 그리고 대회의실까지 돌며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어 주려면 스트레칭은 필수다.
복도 쪽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창가 쪽으로 의자를 돌린 여신은 스트레칭에 집중했다.
“직원들 이 방에 쓸데없이 들락거리는 일 없도록.”
기척도 없이 나타난 강수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울려 퍼지자 여신은 화들짝 놀라 돌아앉았다.
“쓸데없이 오는 직원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방어적으로 대꾸하는 여신을, 강수는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봤다.
“수다나 받아 주라고 고용한 게 아니라는 뜻이야.”
“잠시 아침 인사 나눈 것뿐입니다.”
강수의 으름장에도 여신은 당당하다.
할 말만 끝내고 몸을 돌려 나가려던 강수는 다시 돌아서서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줘 말했다.
“프라이버시 공유하며 시시덕대기 시작하면 업무 분위기 엉망 되는 건 시간문젭니다. 알겠습니까, 차여신 씨?”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보던 여신의 눈썹이 일그러지기 시작하자 강수는 ‘쯧.’ 혀 차는 소리를 내며 마지막 당부를 남겼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행동하세요.”
더 이상의 대꾸는 없다. 강수는 태연하게 돌아서서 문으로 향했다. 그가 문간을 지나려는 찰나, 안쪽에서 투덜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 같은 사람은 가능하겠죠. 뼛속까지 시베리아 벌판이니까.”
‘시베리아 벌판?’ 강수의 짙은 눈썹이 꿈틀댔다. ‘그냥 가 버려.’ 마음속의 목소리 하나가 명령하지만 결국 그는 돌아보고 말았다.
“뭐라고?”
도도한 표정으로 무장한 그녀가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못마땅한 표정의 그도 그녀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소리 없이 치열한 신경전을 먼저 끝내는 사람은 강수다.
“수고하세요.”
성의 없는 인사 한마디를 남기고 문을 나선 강수는 복도를 가로지르며 속엣말을 중얼거렸다.
‘졌군.’
그가 졌다. 아니, 져 준 것이다. 그녀의 특유의 황당한 표정을 발견한 순간부터 그는 지기로 마음먹었었다. 더 큰 승리를 위해서 말이다.
‘머리카락과 눈동자에 무슨 짓을 했었는지는 몰라도 표정과 성격까지 감출 수는 없지.’
위급한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가 먼저 떠났지만, 그녀는 아예 행방을 찾을 수 없도록 도망치지 않았던가. 리조트라는 커다랗고 명확한 단서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를 찾을 노력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가 갑작스럽게 떠난 뒤, 그녀는 이틀 정도를 혼자 조용히 보내다가 떠났다고 했었다. 당시의 지배인들에게 들은 정보다. 그리고 그들은 아주 중요한 정보도 줬었다. 그 이틀 동안 그녀가 그의 행방에 대한 것을 아무에게도 묻지 않았다는 정보. 늘 지배인들이 직접 나서서 수발을 드는 그와 함께 리조트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는데도 말이다.
사무실 앞에 도착한 강수는 불현듯 발을 멈추고 걸어온 길을 돌아봤다. 정확히는 그녀의 임시 사무실을 노려보는 중이다.
‘하! 시베리아 벌판?’

***

다음 날, 드디어 여신의 새 사무실이 완성되었다.
임시 사무실보다 넓은 공간에 더 커진 책장, 더 커진 소파, 더 커진 창문이 있는 방이다. 여신은 흡족한 얼굴로 사무실을 둘러본다. 새 물건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쓰다듬어 보며 창가 쪽으로 향하던 여신은 창틀에 놓인 꽃다발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한데 모여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화려한 그 자태가 흔히 볼 수 있는 꽃송이는 아니다.
‘이것도 인테리어인가?’
여신은 손을 뻗어 꽃송이를 만져 본다. 생화다. 인테리어용이라면 으레 조화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여신은 꽃다발을 들고 소담한 꽃더미에 코를 박는다. 하지만 곧…….
“아야!”
코끝을 찌르는 무언가 때문에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카드가 꽂혀 있다. 여신은 어이가 없어 입을 딱 벌렸다. 꽃더미 속 깊숙이 카드를 꽂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촌스럽기는.’
혼잣말을 중얼대며 카드를 꺼내 펼치자 시원스러운 필체가 드러났다.
『축하합니다. 허강수.』
단 두 줄뿐인 메시지를 여신은 읽고 또 읽었다. 말투처럼 무미건조한 인사일 뿐이지만 숨겨진 의미가 있는 것만 같아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알아본 건가?’
실낱같은 희망도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살포시 피어올랐다.
카드에 시선을 붙박은 채 흐릿한 미소를 짓던 여신은 품에 안고 있던 꽃다발에 다시 코를 묻었다.
‘향긋해.’
“출근했군.”
문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여신은 화들짝 돌아섰다. 꽃 내음을 만끽하느라 들떴던 기분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상태다.
“꽃 고맙…….”
“코트 벗지 말고 일 층으로 내려와요, 갈 데가 있으니까.”
상냥하게 인사를 전하려던 여신은 말허리를 가로채이자 뾰로통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알겠습니다.”
성의 없는 투로 대답한 여신은 눈을 흘기며 입술을 실룩이다가 문간을 막 벗어나려는 그를 불렀다.
“그리구요!”
문을 반쯤 벗어났던 강수가 휙 뒤돌아보자 여신은 야무진 입매로 요구 사항을 말했다.
“노크 좀 하셨으면 좋겠네요.”
‘하!’ 강수는 세찬 코웃음으로 응수하고는 다시 발을 뗐다. 하지만 한 걸음도 못 가 문간으로 되돌아갔다.
“아, 그리고.”
그녀를 흉내 낸 부름에 여신도 ‘하!’ 세찬 날숨으로 대꾸했다.
“아까 하려고 했던 말, 마저 해요.”
입을 삐죽이며 엉뚱한 말을 늘어놓는 그를, 여신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어떤……?”
강수는 괜스레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가슴께를 가리켰다.
“꽃.”
그의 손가락이 향한 곳으로 시선을 옮기던 여신은 여태 꽃다발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팔을 푼다.
꽃다발이 책상 위로 툭 떨어지고, 그녀의 성의 없는 인사도 툭 던져진다.
“아, 꽃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거만한 표정으로 인사를 받아 챙기고 떠나는 강수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여신은 유리 너머로 눈을 흘겼다. 그리고 그가 시야를 벗어났을 때, ‘아오!’ 억눌린 신음을 내뱉으며 빈 주먹질을 해 댔다.
“저렇게 재수 없는 남자였을 줄이야.”

출근한 상태 그대로 다시 회사를 나선 여신은 강수의 차 조수석에 앉아 있다. 그의 차가 향하는 곳은 뜻밖에도 강원도다. 고속도로에 진입하고 나서야 내비게이션을 확인한 여신은 못마땅한 얼굴이다. 하지만 선뜻 불만을 드러내진 못했다. 정말 일 때문에 가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조수석을 흘끔, 곁눈질 하던 강수는 ‘핏.’ 소리 없는 실소를 뿜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분주히 움직이다가 내비게이션에 붙박이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강수는 최대한 사무적인 어조를 꾸며 내 그녀가 궁금해 하는 것을 알려 주었다.
“무단이탈 중인 연습생 찾으러 가는 겁니다.”
태연한 얼굴로 외근 목적을 알려 주는 목소리에 여신은 당혹감을 감추며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해외에서도 오디션을 보러 먼 길을 찾아오는데, 지방 출신 연습생이 왜 없겠는가.
두 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곳은 춘천 시내의 주택가이다. 이면도로에 차를 세운 강수는 곧장 문을 열고 내린다. 여신도 서둘러 차를 빠져나왔다.
성큼성큼, 자신 있는 걸음걸이로 대문 앞에 다가선 강수는 망설임 없이 초인종을 눌렀다. 하지만 안쪽에서는 대답이 없다. 두어 차례 초인종을 더 누르자 마침내 인기척이 들린다.
여신은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누구세요?”
방문객의 정체를 묻는 목소리는 인터폰에 달린 스피커가 아니라 대문 바로 뒤에서 흘러나왔다. 곧이어 대문이 열리고 중년 여자의 모습이 드러나자 강수는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소속을 밝혔다.
“수 엔터테…….”
“볼일 없으니까 가세요.”
하지만 강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자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대문을 닫아 버린다. 다급해진 강수는 대문으로 성큼 다가서며 외쳤다.
“희정이 만나서 직접 얘기하겠습니다.”
“볼일 없다구요. 애도 그쪽에 만정이 다 떨어졌지만, 설령 애가 다시 한다고 해도 이젠 내가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말릴 거예요. 그러니까 가세요.”
안쪽에서는 한 치의 틈도 주지 않았다.
보다 못한 여신이 대문간으로 다가서며 상냥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본인하고 직접, 잠깐이라도 얘기할 수 없을까요?”
“그쪽들하고 엮이고 싶은 생각 추호도 없으니까 가시라구요!”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얘기를 들어 봐야 알 수 있지 않겠어요? 어머니, 이러지 마시고 희정 씨 한 번만 만나게 해 주세요. 저희 희정 씨 괴롭히러 온 사람들 아녜요. 상황을 들어 보고 해결하기 위해서 온 거예요.”
포기하지 않는 여신의 말이 끝날 때까지 안쪽에서는 기척이 없다. ‘들어가 버렸나?’ 발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으니 아직 대문간에 있을 것이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안쪽이 보이지 않는 대문을 살펴보던 여신은 마지막 시도를 해 본다.
“저는 희정 씨 위해서 함께 온 카운슬러구요, 이분은 수 엔터테인먼트 대표님이세요.”
마침내 대문이 다시 열리고, 의구심이 깃든 여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여자의 시선은 강수를 향해 있다.
“이 양반이 대표예요?”
강수는 다시금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예, 수 엔터테인먼트 대표 허…….”
“여기 꼼짝 말고 기다려요.”
이번에도 강수의 말허리를 채 간 여자는 비장한 투로 한마디를 남기고는 안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여신은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강수를 돌아봤다. 그의 입가에도 흡족한 미소가 번지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괜히 멋쩍어진 강수는 시선을 피하며 딴소리를 지껄였다.
“역시 여자한텐 여자가 먹히는군.”
“여성 비하 발언 같네요.”
“아닙니다.”
“그렇게 들렸습니다.”
“예, 제가 졌습니다. 그 귀 참 신통하네.”
비아냥대는 그의 목소리가 잦아들기도 전에 후다다닥, 대문 안쪽에서 바쁜 발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다시금 접대용 미소를 지으며 대문을 향해 돌아섰다. 하지만 그들의 미소에 답한 것은 쓰레기통이다.
커다란 쓰레기통이 슬로모션처럼 기울여지고, 통 안에서 출렁대는 수상한 액체를 확인한 순간 강수는 몸을 돌려 여신을 감싸 안았다. 여신도 본능적으로 가방을 들어 올려 그의 머리와 자신의 머리를 보호했다.
“댁들 같은 쓰레기하고는 말 한마디 더 섞고 싶지 않아. 내가 애 내려온 뒤부터 이를 갈면서 구정물을 모았어. 당신 나타나면 면상에 대고 뿌려 주려고! 멀쩡한 애 데려다가 헛짓거리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무단외출, 무단결석, 무단이탈? 누구 마음대로 무단이야? 같잖은 소리 하고 있네, 정말. 한 번만 더 나타나 봐. 그땐 정말 똥물을 퍼부어 줄 테니까!”
중년 부인의 악다구니 다음은 ‘꽝!’ 힘껏 닫히는 대문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