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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3. 그녀, 헤일리(2)


구정물을 뒤집어쓴 채 어정쩡한 자세로 그녀의 허리를 안고 있던 강수는 짜증 섞인 신음을 내뱉으며 팔을 풀었다.
“아, 거. 대표라는 소리는 왜 해 가지고.”
나름의 방편으로 가방을 들어 올렸던 여신도 그의 목을 끌어안은 꼴이 된 팔을 후다닥 내렸다.
“아깐 여자한텐 여자가 먹힌다면서요.”
그녀의 야멸친 대꾸에 그가 밉살스럽게 눈을 흘기며 이죽거렸다.
“헛소리 지껄인 거지.”
‘흥!’ 여신은 콧방귀로 일축하며 호들갑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구정물이 뚝뚝 떨어지는 가방에서 꺼낸 물티슈로 그의 코트를 닦고 있다.
“어떡해……. 어우, 냄새.”
그의 뒤통수를 강타했던 가방이 보이자 더 약이 오른 강수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비아냥댔다.
“가방은 왜 들이대? 아무 소용도 없고만.”
투덜대는 소리에 질린 여신은 매섭게 눈을 흘기며 톡 쏘아붙였다.
“나한테 조금이라도 덜 튀라구요!”
그의 눈썹이 실룩, 험악하게 휘어지지만 더 이상 입은 열지 않았다. 대신 마뜩잖은 눈길로 분주한 그녀의 손을 좇고 있다.
“어우, 이거 진짜 어떡해. 코트부터 벗으세요.”
소용없어 보이는 물티슈질을 멈추게 하려면 벗는 수밖에 없겠다. 강수는 순순히 코트를 벗었다. 하지만 그녀는 또 물티슈를 한 움큼 뽑아 그의 눈앞에 들이댔다.
“머리는 이걸로 닦아 봐요.”
결국 강수의 입에서 짜증 섞인 탄식이 튀어나왔다. ‘아.’ 코앞까지 들이민 물티슈 더미와 그녀의 손을 한꺼번에 잡아챈 그는 차 쪽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일단 타요.”
“이대로 가려고요? 추워서 창문 열고 가기도 힘든데, 웬만하면 해결하고 가시죠?”
성큼성큼 걷는 그의 걸음에 맞추느라 종종걸음을 치며 여신은 쫑알쫑알 잔소리를 해 댔다.
“일단 가자고!”
강수가 우뚝 멈춰 서서 으름장을 놓자 그제야 입을 뾰족이 모아 다문 여신은 고분고분 차에 올랐다.
잠깐을 달린 차가 다시 멈춘 곳은 동네 어귀의 목욕탕 앞이다.
“여긴 왜요?”
“이대로 서울까지 어떻게 갑니까?”
“그럼 다녀오세요.”
“안 씻어요? 냄새 안 나요?”
뜨악한 표정으로 되묻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여신은 우물쭈물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대꾸했다.
“난……. 어, 전 많이 안 튀었어요. 누가 잽싸게 막아 줘서.”
사실 트렌치코트의 소매 끝과 가방을 들었던 손, 그리고 그의 뒤통수를 조금이나마 방어해 준 가방이 흠뻑 젖었을 뿐 다른 곳에는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 그 순간에 보호 본능을 발휘해 준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긴 해야 할 텐데, 지금 당장은 그러고 싶지 않다.
머뭇머뭇 대답하며 시선을 피하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그는 이죽거리며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그럼 가방이나 닦고 있든가.”

정확히 20분 후, 목욕탕 입구에 그가 나타났다. 젖은 머리를 한 손으로 털며 모습을 드러낸 그는 셔츠와 바지 차림이다. 재킷까지 젖었던 모양이다. 다른 손에는 커다란 비닐 봉투를 들고 있다. ‘풋.’ 여신은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모델 같은 몸매를 가진 남자의 손에 커다란 검정 비닐이라니……. 뭔지 모르게 웃긴 조합이다.
“코트 벗어서 넣어요. 소매에서 냄새 나니까.”
운전석에 오른 그가 빈 봉투 하나를 내밀자 여신은 냉큼 받아 챙겼다.
강수는 엉덩이를 들썩여 바지 주머니에 꽂았던 봉투 하나를 더 꺼내 그녀에게 넘겼다.
“여긴 가방 넣고.”
“그럼 가방에 있는 소지품은 어떡하구요?”
여신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의 짧은 생각을 나무랐다.
“여기.”
하지만 그의 다른 쪽 바지 주머니에서 봉투가 하나 더 나오자 ‘큭!’ 참았던 웃음이 뿜어져 나왔다. 여신은 결국 참지 못하고 깔깔 웃어 젖혔다.
그가 시키는 대로 소맷자락이 젖은 코트를 벗고, 가방을 비워 비닐에 넣으면서도 킬킬,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지나치게 조용한 그가 궁금해 시선을 들다가 흠칫한다. 운전석 시트에 머리를 기댄 그의 시선과 딱 마주쳤기 때문이다.
웃음기를 지운 여신의 눈동자가 주인의 허락도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젖은 머리칼, 그윽하게 바라보는 눈매,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진 입가, 그리고 한층 강한 인상을 주는 턱 선까지 한눈에 담았다. 너무도 그리웠던 얼굴이다. 뜬금없이 시작된 회상에 목이 메어 오더니 순식간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여신은 얼른 시선을 끌어 내려 비닐 봉투를 정리했다.
‘헤일리, 넌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
말없이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눈동자에 물기가 어리자 강수는 고개를 돌렸다.
“갑시다.”
단호한 동작으로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키지만, 이미 흔들린 마음은 쉽게 다잡아지질 않는다. 삽시간에 중독돼 버린 그를 허수아비로 만들어 놓고 철저히 숨어 버린 대가를 치르게 해 주겠다던 다짐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의 얼굴을 더듬는 동안 회한이 서리는 듯했던 눈동자를, 차라리 보지 말았어야 했다.
‘젠장.’ 강수는 욕지거리를 중얼대며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있는 발에 힘을 주었다.

***

경쾌한 발소리가 울리는 수 엔터테인먼트 사옥의 로비. 깔끔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남녀가 우르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중엔 여신과 국표도 있다.
그들을 태운 엘리베이터 안엔 벌써 강수가 타고 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대여섯 명이 제각각 인사를 건네자 좁은 공간을 점령이라도 한 듯 두 팔을 넓게 벌려 안전봉에 기대 있던 강수는 직원들의 인사에 일일이 묵례로 답해 주고는 팔짱을 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작은 공간은 어색한 침묵으로 꽉 찼다. 그 침묵을 호기롭게 깨는 사람은 국표다.
“햐, 역시 베스트드레서 차여신.”
여신은 오른쪽 뒤에 자리 잡은 국표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기분은 좋네요.”
“입에 발린 소리 아녜요, 팩틉니다.”
형식적인 말이 오고 가는 와중에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두 명이 열린 문으로 빠져나갔다. 삼 층, 사 층, 오 층. 엘리베이터가 멈출 때마다 한두 명씩 빠져나가고, 팔 층에 도착했을 때에는 여신과 국표, 그리고 강수와 그의 비서인 상규만 남았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덕분에 시야가 넓어진 강수는 두 발짝 앞에 선 여신의 뒤태를 눈으로 훑어 내렸다. 검은색 정장 차림으로 한쪽 팔에는 트렌치코트를 걸고 다른 손으로는 가방을 들고 꼿꼿이 서 있다. 전형적인 오피스룩이다.
발끝부터 다시 훑고 올라가던 강수의 시선이 허벅지 근처의 가방에 꽂혔다. 어제와 다른 가방이다. 아무래도 못 쓸 지경이 되었을 것이다. 다시 움직인 시선은 자연스레 굴곡진 엉덩이로 향했다. 잘록한 허리와 반듯한 등, 그리고 곧게 편 어깨까지 유심히 살펴보던 강수는 ‘땡!’ 도착했음을 알려 주는 알림음에 화들짝 눈길을 돌렸다.
“이따 회의실에서 봬요.”
예의를 차리는 여신에게 국표는 환한 미소로 답했다.
“예, Have a good time.”
여신과 국표가 먼저 내리고, 상규도 잰걸음으로 빠져나갔다. 강수는 느릿느릿 그들의 뒤를 따르며 속엣말을 중얼거렸다.
‘좀 불었나.’
그가 기억하는 그녀의 몸은, 살집이라고는 없는 소녀의 몸이었다. 물론 있어야 할 곳은 충분한 볼륨이 있어서 그를 정신 못 차리게 하긴 했지만……. 지금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몸매다. 정장 재킷이 잘록한 허리를 강조하니 더욱 그렇게 보인다. 기회가 된다면 루즈한 핏의 재킷을 입으라고 조언해 줘야겠다.
기계적으로 놀리던 발도 멈춘 채 멀어져 가는 그녀를 보고 있던 강수는 또 흠칫하고 말았다. 흔들림 없이 걸어가던 그녀가 걸음을 멈췄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를 벗어나 몇 걸음 떼었을까.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여신은 발을 멈추고 돌아섰다. 아니나 다를까, 방향이 다른 강수가 우뚝 멈춰 서서 노려보고 있다.
여신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강수는 그제야 입술을 실룩이며 말문을 열었다.
“옷이 그런 것밖에 없나?”
여신은 고개를 숙여 옷매무새를 살핀다. 무난한 길이의 스커트와 재킷은 아무 이상이 없다. 색깔마저 무난한 검은색이다. ‘대체 뭐가 문제야?’ 여신은 그에게 묻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평범이라는 단어 몰라? 여기가 무슨 런웨이도 아니고.”
제 할 말만 쏟아 내고 휙 몸을 돌려 가 버리는 그를 여신은 어이없는 얼굴로 바라봤다.

사무실 문 앞에 도착해 지체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선 강수는 소파에 앉아 있는 수현을 발견하고 굳은 얼굴로 책상으로 향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오빠 보고 싶어서 왔지.”
벌써 깨끗이 정돈돼 있는 책상을 또다시 정리하며 괜히 시간을 끌던 강수는 눈을 치켜떴다. 그 기세에 수현은 애교 섞인 눈웃음으로 응수하며 상냥한 목소리를 냈다.
“이번 주는 촬영 이틀밖에 없어.”
강수는 대꾸 없이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수현은 천연덕스럽게 딴 얘기를 꺼냈다.
“희정이는 어떻게 됐어? 안 나타났어?”
그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수현은 새초롬하게 눈을 흘기다가 또 금세 조잘조잘 입을 놀렸다.
“보조출연이라도 좋으니 얼굴 한 번만 비췄으면 좋겠다고 안달복달하더니 대체 무슨 바람이 든 거야.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워낙 가볍게 입 떼는 일이 없는 남자라 이 정도 무시는 이제 화도 안 난다.
“걱정돼?”
예상치 못한 그의 물음에 수현은 한껏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걱정되지. 눈여겨보던 후밴데.”
“후배…….”
그녀의 마지막 말을 되풀이하는 그의 입가에는 뜻밖에도 미소가 번져 있다. 수현은 책상 가까운 쪽으로 바짝 다가앉으며 애교를 부렸다.
“오전 스케줄 바빠?”
“회의 있어.”
“회의 끝나고 나서는?”
“약속 있어.”
두 번의 시도를 모두 묵살당한 수현의 입에서는 실망스러운 탄식이 새어 나왔다.
“오랜만에 드라이브나 할까 했는데…….”
“오랜만에 회사 나왔으니 그렇게 아끼는 후배들 밥이나 좀 사주고 가.”
강수의 대꾸는 그녀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수현은 못마땅한 얼굴로 강수의 정수리를 노려본다. 그러다 또 생긋, 미소 띤 얼굴로 그녀에게 유리한 카드를 내놓는다.
“점심 약속 있어. 할아버지랑.”
노트북 키보드를 두들기던 강수의 손이 허공에서 멈춘다. 부러 강조한 것이 분명한 선약 상대 때문이다. 그의 할아버지, 아흔에 가까운 연세에도 벼락같은 호통으로 일가를 쥐락펴락하는 허창식 회장이다.
“맛있는 거 먹어.”
강수는 태연하게 대답을 읊조리지만 수현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를 멈추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그의 할아버지는 강력한 브레이크다. 그리고 그 브레이크는 그녀가 잡고 있다. 수현은 이내 실망감이 짙게 밴 표정을 꾸며 내며 일어섰다.
“에이, 김샌다. 나 갈게.”

복도로 통하는 문을 열어 주는 주영에게 수현이 속삭이듯 물었다.
“상담원 뽑았다며? 어디 있어? 로비엔 안 보이던데, 삼 층? 사 층?”
일부러 골랐을 게 뻔한 ‘상담원’이라는 말에 표정이 굳어지지만, 주영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팔 층이요.”
“신입 사원이 아니라 임원이야?”
의아함이 깃든 수현의 물음이 이어지고, 주영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대꾸했다.
“임원은 아니구요.”
‘으응.’ 길게 대답 소리를 늘이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수현을, 주영은 가만히 바라봤다.
“눈도장이나 찍구 가야겠네.”
혼잣말을 중얼대며 나가는 수현의 등에 대고 주영은 꾸벅 인사를 했다.
“들어가세요.”
“응, 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만 들어 보내는 인사다. 한 걸음 더 나와 복도를 내다보던 주영은 ‘우씨!’ 입 모양으로 욕지거리를 뱉으며 꽉 쥔 주먹으로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시늉으로 되겠어? 나가서 한판 붙지 왜?”
안쪽에서 상사인 상규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주영은 입을 삐죽이며 정곡을 찔렀다.
“점잖은 척 하지 마세요. 실장님도 마음에 안 들면서, 뭐.”

여신의 넓은 책상에는 제본된 논문 몇 권이 쌓여 있다. 선배들에게 부탁해 빌려 온 논문들이다.
종류도, 발현 형태도 다양한 공포증, 그중에서도 연예인들이나 연예인 지망생들에게 발현될 만한 것들로만 골라 심각한 얼굴로 숙독하고 있다. 상담심리 학위를 딴 지 사 년이 지나서야 제대로 일하고 있는 것 같아 집중도 더 잘된다.
페이지 몇 장을 더 넘겼을 때쯤,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여신은 또 느닷없는 강수의 방문이겠거니 체념하며 고개를 들었다.
“와아, 사무실 넓다. 무슨 백을 쓰셨길래 입사하자마자 이렇게 넓은 사무실을 받으셨나?”
여신을 방해한 것은 액세서리를 주렁주렁 달고 나타난 젊은 여자의 목소리다. 여신은 책상에 앉은 채로 문간에 선 여자를 훑어본다. 피부로 보나 목소리로 보나, 그리고 놀란 시늉을 하면서도 예쁜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눈매로 보나, 천생 20대 연예인이다.
“나 알죠?”
거만을 떨며 책상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여자가 책상 위를 손끝으로 훑자 여신의 입이 일자로 다물어졌다. 그녀의 손끝이 멈춘 곳은 오늘 아침 총무과에서 가져다준 명함 박스가 놓인 곳이다. 눈길로 좇고 있던 여신은 시선을 끌어 올려 여자의 얼굴을 쳐다봤다. ‘개념 얻다 팔아먹구 왔니?’ 한마디 쏴붙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입술에 힘을 줘 참고 있는 중이다.
“심리학 박사? 직함이 박사예요?”
명함을 한 장 꺼내 든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여신은 미안함이 담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죄송하지만 제가 TV를 잘 안 봐서요.”
여자의 얼굴에 짜증이 확 피어오르다가 곧장 사그라졌다.
몸을 휙 돌려 소파로 다가간 여자는 제멋대로 자리를 잡고 앉으며 여신을 불렀다.
“뭐, 됐고. 여기 앉아 봐요. 나도 상담 한번 받아 보게.”
여신은 잠시 고민해야 했다. 건방을 떠는 저 여자의 사진은 이미 회사 소속 아티스트 프로필 폴더에서 봤었다. 물론 이름도 기억한다. 수현도 이 회사 소속이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그녀가 들어 주는 것이 마땅하다.
“어떤 문제가 있으신가요?”
맞은편에 자리 잡은 여신이 묻자 수현은 드라마에서처럼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 드라마, 내가 보기엔 영 재미없거든. 근데 또 이게 주4회 드라마라 들어오는 게 쏠쏠해요. 그냥 보내 버리기엔 아깝단 말이지. 어떻게 조기종영 안 되고 끝까지 갈 수 있을까?”
끊어질 듯 말 듯, 은밀하게 속삭이며 고민이랍시고 털어놓는 얘기가, 여신은 황당하기만 하다.
앞에 앉은 20대 여배우는 심리 상담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여신을 조롱하기 위해 온 것 같다. ‘대체 왜?’ 사적으로 악의가 있는 게 아니라면 이러는 이유가 대체 뭘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조롱엔 조롱이 답이지.’
여신은 조용히 움직여 메모지와 펜을 가져온다. 그러고는 다시 소파에 앉아 약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여기가 신촌이에요. 이쪽이 여대구요. 이 사거리에서 좌측으로 가다가 두 번째 골목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사주 보는 빨간 천막이 있어요. 거기로 가 보세요.”
마침내 설명을 끝낸 여신이 약도가 그려진 메모지를 내밀자 수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장난해요?”
빽 내지르는 소리에 여신은 짐짓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진중한 어조로 답했다.
“아뇨, 장난이라뇨. 심리학 학술서에 미래를 점치는 법 같은 건 안 나와 있거든요. 제가 못 배워서 대답 못 해드리는 부분이니 대체 방법을 제시하는 거예요.”
진지하다 못해 정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여신의 행동이 기가 막혀 수현은 실소를 뿜었다.
“나, 참!”
약이 올라 바락 소리를 지르며 일어서는 수현을 따라 여신도 일어섰다.
“새 식구 왔다 그래서 인사하러 온 사람한테 대체 이게 무슨 경우야?”
마치 더러운 오물이라도 보는 듯 눈살을 찌푸리는 수현을 똑바로 마주 보며 여신은 차분한 목소리를 냈다.
“제가 받은 건 인사가 아니었어요, 노골적인 조롱이었지.”
정곡을 찔린 수현은 상대를 매섭게 노려봤다. 이 제스처는 그간의 경험으로 인증된 노하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의 매서운 눈총에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곤 하니까. 하지만 앞에 선 여자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 갔다.
“배우로서 평판은 본인이 만들어 가는 거예요. 그리고 사소한 것에도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는 행동은 결코 좋은 평판에 도움이 되지 못해요.”
수현은 여신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지기 싫다 이거지?’
수현은 조소를 흘리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자주 보게 될 거예요, 차여신 씨.”
“네, 또 봬요, 제갈수현 씨.”
여신은 상냥하게 대꾸하며 수현을 문간으로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