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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전 세계 어디서든 사람이 들끓는 곳이라면 쉽게 목격할 수 있는 W 호텔이었지만 마드리드에 위치해 있는 건물은 유달리 크고 화려했다. 그리고 그만큼 번잡스러워 보였다.
내려앉아 가는 주변 어둠에 맞추어 건물을 감싸고 있는 전등에 불이 들어오자 호텔은 웅장하기보다는 마치 라스베이거스의 싸구려 술집 광고판 같은 느낌을 주었다.
차에서 내리던 로메오는 인상을 쓰며 작게 혀를 찼다.
호텔을 대면하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두통이 밀려왔다.
상속 서류에 자신의 이름을 사인하고 나면 가장 먼저 저 번쩍거리는 조명등부터 뗄 것이라 다시 한 번 다짐하며 그는 따라 내려선 운전사를 향해 들어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혼날 일이 있는 어린아이가 집 대문을 마주하고 방황하는 것처럼 한동안 앞을 서성거리다 천천히 시벨레스 광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둠이 내려서기 시작하는 평일의 마드리드는 조용했다.
특히 시벨레스 광장에서 W 호텔까지 이어지는 커다란 도로와 그 양쪽에 놓여 있는 도보용 길은 지나다니는 인적이 매우 드물었다.
인위적으로 꾸며진 길을 정처 없이 걷던 그가 문득 드르륵, 하는 불규칙적인 소음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진녹색의 커다란 캐리어를 힘들게 끌고 있는 작은 체구의 동양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잘 닦아 놨다고 해도 마드리드의 길은 캐리어를 수월하게 끌 수 있을 만큼 좋은 여건은 아니었다.
여자의 미간이 갈수록 좁아지는 것같이 느껴졌다.
보통 때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이곳은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였고, 공항버스가 지나가는 시벨레스 광장과 가까웠고, 무엇보다 호텔이 위치해 있었다.
발에 챌 정도로 보이는 게 캐리어를 끌거나 배낭을 짊어진 관광객이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씩 가까워지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누군가와 함께가 아닌 혼자라서?
그녀의 머리칼과 눈동자가 검은색이라서?
지금 이 두통을, 아니, 인생 전체를 쥐고 흔드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해서?
한 손으로는 역부족이었는지 여자는 아랫입술을 작게 깨물며 두 손으로 캐리어를 끌고 로메오의 옆을 지나쳤다.
그녀를 따라 눈동자를 움직이던 그는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낡은 청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아 넣고 검은 후드티의 모자를 뒤집어쓴 남자 두 명이 터덜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누구를 따라 가고 있는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평소였다면 절대 끼어들지 않았을 일에 로메오가 한발을 내딛었다.
두통을 멈추고 싶어서였는지,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가 작용했는지는 본인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폴리씨아(Policia).
노려보며 입 모양만으로 웅얼거리자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녀석이 미간을 좁히더니 황급히 발의 방향을 바꾸었다.
굳이 다음 행동을 취하지 않아도 알아서 꼬리를 내리고 사라지는 소매치기들을 바라보던 로메오가 쯧, 혀를 찼다.
다시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을 때 동양 여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메오는 한동안 그곳에 멈춰 서서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길의 어디쯤을 응시했다.
가라앉았다고 생각했던 두통이 조금 전보다 더욱 극심하게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1.
『병원에 들렀다 온 거야?』
『아니.』
호텔 로비로 들어서는 로메오의 옆에 바짝 붙으며 헤수스가 물었다.
『나올 필요 없으니까 병원에 가 보라고 했을 텐데.』
『가 봤자 내가 딱히 할 게 있나? 욕이나 먹겠지.』
『로메오.』
『그 이야기는 두통약 먹은 다음에 시작하자고.』
헤수스의 말을 냉정하게 끊어 내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움직이던 로메오의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멈췄다.
잔소리를 덧붙이려던 헤수스 역시 그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굳이 묻지 않아도 그가 누구에게 시선을 뺏겼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에 헤수스는 조용히 안경만 치켜 올렸다.
로비의 높은 천장 한가운데 달려 있는 샹들리에와 거기서 쏟아져 내리는 빛을 받으며 소파에 앉아 있는 동양인 여자.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로메오가 다시 발걸음을 놀렸다.
호텔의 맨 꼭대기 층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사무실이 펼쳐지는 구조였다.
걸어들어 가며 로메오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책상 서랍을 거칠게 뒤적여 알약이 담긴 병을 꺼낸 뒤 유리잔에 물 대신 보드카를 따르는 그를 보고 헤수스가 급하게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작은 페트병을 던졌다.
『죽고 싶은 거 아니면 물 마셔.』
그러나 로메오는 낚아챈 페트병을 그대로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악병만을 손에 쥔 채 소파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유언 공정 증서가 어떻게 됐다고?』
그가 입에 한 움큼 털어 넣은 알약을 얼음처럼 우둑우둑 씹어 먹기 시작하자 헤수스가 묘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8월 26일에 작성했던 유언장을 이틀 전인 10월 3일에 수정하셨어. 변호사, 증인 세 명이 함께했으니 확실해.』
『또 뭣 때문에 심사가 뒤틀린 건데. 하라는 대로 하고 있잖아. 빌어먹을 호텔 경영도, 동생인지 원수인지 모를 그 녀석 뒤치다꺼리도.』
『그러니까 무슨 일인지 병원에 들러서 확인하라고 한 거야.』
『변호사랑 얘기해 봤어?』
『그쪽 태도야 늘 그렇듯 뻣뻣하지. 씨알도 안 먹혀.』
알약을 씹어 삼킨 로메오가 소파에 몸을 더욱 깊게 파묻으며 관자놀이에 손을 짚었다.
이번엔 무엇을 트집 잡으며 유언장을 수정했을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욱신거렸다.
『유언장으로 협박하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더 이상은 못 참아. 우리 쪽 변호사 불러.』
『상속 분쟁은 유언장 내용이 공개되어야 해. 내용이 공개가 되려면…….』
말끝을 흐리는 헤수스의 얼굴을 본 로메오가 신경질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어차피 조만간이잖아. 미리 준비해서 나쁠 거 없다고.』
헤수스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변호사를 호출했다.
급하게 달려와 테이블 위에 서류를 펼쳐 보이는 남자 앞에 로메오가 보드카가 따라진 잔을 내밀었다.
돈 앞에서는 부모도 자식도 없다고 하지만, 그리고 그런 모습을 한두 해 보아 온 것도 아니건만 로메오의 앞에서 남자는 잔뜩 위축되었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호텔의 상속 분쟁이라는 거대한 스케일도 이유였으나 무엇보다 그를 긴장시키는 것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진한 갈색 눈동자였다.
그 눈앞에서 남자는 연신 손수건으로 이마 주변을 훑어야 했다.
미팅은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나서야 끝이 났다.
남자는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종이를 가방에 챙겨 넣고 노트북을 손에 들었다.
배웅하는 것은 헤수스뿐이었다.
로메오는 어둠이 사무실을 뚫고 들어올 무렵부터 책상 한편에 등을 보이고 앉아 밖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완전히 까맣게 잠식된 도시를 내려다보던 그가 자신의 어깨에 얹어지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초안 완성되면 팩스로 보내 달라고 했으니 돌아가서 수면제 먹고 좀 자.』
대답 대신 몸을 일으킨 로메오는 책상 의자에 걸쳐 있던 재킷을 들었다.
꺼낸 담배를 입에 문 그가 헤수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 금연 중인데.』
『알아. 라이터 말고.』
로메오가 뻗은 손을 흔들며 헤수스를 채근했다.
그제야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는 듯 아, 하는 소리를 낸 헤수스가 팔짱을 끼며 미간을 좁혔다.
『일단 준비하긴 했는데 정말 갈 거냐? 그것도 이런 때에?』
『안 갔다가 무슨 말을 들으려고.』
『나만 참석해도 상관없어. 컨디션 별로라고 얘기해 줄게.』
『넌 아직도 그 여자를 몰라?』
헤수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로메오가 말한 ‘그 여자’가 누구를 일컫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에.
가방에서 고급스러운 상자를 꺼내 내밀자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문 로메오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딸깍 소리와 함께 열린 상자 안에는 눈이 부실 정도로 다이아가 촘촘하게 박힌 목걸이가 자태를 뽐내며 당당하게 자리해 있었다.
더 보지도 않고 상자를 닫은 뒤 걸음을 옮겼다.
『적어도 자기 엄마한테 생일 축하 안 해 줬다고 이르진 않겠군.』
헤수스는 그저 쓰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차가 준비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로비로 내려온 로메오는 도어맨에게 살짝 눈인사를 해 보이다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9시 42분.
길거리에서부터 시선을 잡아끌었던 동양인 여자는 세 시간이 넘도록 로비 소파에 못 박힌 듯 앉아 있던 모양이었다.
문을 연 채 대기하고 있던 도어맨이 낯선 상황에 곤란한 얼굴을 해 보였다.
『저 여자, 아까부터 계속 있었나?』
『아, 네.』
캐리어를 한쪽에 고이 둔 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앉아 있는 여자는 굳이 손가락으로 콕 찍어 내지 않아도 눈에 띄었다.
도어맨이 황급히 대답하자 로메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프롤로그
전 세계 어디서든 사람이 들끓는 곳이라면 쉽게 목격할 수 있는 W 호텔이었지만 마드리드에 위치해 있는 건물은 유달리 크고 화려했다. 그리고 그만큼 번잡스러워 보였다.
내려앉아 가는 주변 어둠에 맞추어 건물을 감싸고 있는 전등에 불이 들어오자 호텔은 웅장하기보다는 마치 라스베이거스의 싸구려 술집 광고판 같은 느낌을 주었다.
차에서 내리던 로메오는 인상을 쓰며 작게 혀를 찼다.
호텔을 대면하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두통이 밀려왔다.
상속 서류에 자신의 이름을 사인하고 나면 가장 먼저 저 번쩍거리는 조명등부터 뗄 것이라 다시 한 번 다짐하며 그는 따라 내려선 운전사를 향해 들어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혼날 일이 있는 어린아이가 집 대문을 마주하고 방황하는 것처럼 한동안 앞을 서성거리다 천천히 시벨레스 광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둠이 내려서기 시작하는 평일의 마드리드는 조용했다.
특히 시벨레스 광장에서 W 호텔까지 이어지는 커다란 도로와 그 양쪽에 놓여 있는 도보용 길은 지나다니는 인적이 매우 드물었다.
인위적으로 꾸며진 길을 정처 없이 걷던 그가 문득 드르륵, 하는 불규칙적인 소음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진녹색의 커다란 캐리어를 힘들게 끌고 있는 작은 체구의 동양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잘 닦아 놨다고 해도 마드리드의 길은 캐리어를 수월하게 끌 수 있을 만큼 좋은 여건은 아니었다.
여자의 미간이 갈수록 좁아지는 것같이 느껴졌다.
보통 때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이곳은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였고, 공항버스가 지나가는 시벨레스 광장과 가까웠고, 무엇보다 호텔이 위치해 있었다.
발에 챌 정도로 보이는 게 캐리어를 끌거나 배낭을 짊어진 관광객이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씩 가까워지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누군가와 함께가 아닌 혼자라서?
그녀의 머리칼과 눈동자가 검은색이라서?
지금 이 두통을, 아니, 인생 전체를 쥐고 흔드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해서?
한 손으로는 역부족이었는지 여자는 아랫입술을 작게 깨물며 두 손으로 캐리어를 끌고 로메오의 옆을 지나쳤다.
그녀를 따라 눈동자를 움직이던 그는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낡은 청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아 넣고 검은 후드티의 모자를 뒤집어쓴 남자 두 명이 터덜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누구를 따라 가고 있는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평소였다면 절대 끼어들지 않았을 일에 로메오가 한발을 내딛었다.
두통을 멈추고 싶어서였는지,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가 작용했는지는 본인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폴리씨아(Policia).
노려보며 입 모양만으로 웅얼거리자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녀석이 미간을 좁히더니 황급히 발의 방향을 바꾸었다.
굳이 다음 행동을 취하지 않아도 알아서 꼬리를 내리고 사라지는 소매치기들을 바라보던 로메오가 쯧, 혀를 찼다.
다시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을 때 동양 여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메오는 한동안 그곳에 멈춰 서서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길의 어디쯤을 응시했다.
가라앉았다고 생각했던 두통이 조금 전보다 더욱 극심하게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1.
『병원에 들렀다 온 거야?』
『아니.』
호텔 로비로 들어서는 로메오의 옆에 바짝 붙으며 헤수스가 물었다.
『나올 필요 없으니까 병원에 가 보라고 했을 텐데.』
『가 봤자 내가 딱히 할 게 있나? 욕이나 먹겠지.』
『로메오.』
『그 이야기는 두통약 먹은 다음에 시작하자고.』
헤수스의 말을 냉정하게 끊어 내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움직이던 로메오의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멈췄다.
잔소리를 덧붙이려던 헤수스 역시 그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굳이 묻지 않아도 그가 누구에게 시선을 뺏겼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에 헤수스는 조용히 안경만 치켜 올렸다.
로비의 높은 천장 한가운데 달려 있는 샹들리에와 거기서 쏟아져 내리는 빛을 받으며 소파에 앉아 있는 동양인 여자.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로메오가 다시 발걸음을 놀렸다.
호텔의 맨 꼭대기 층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사무실이 펼쳐지는 구조였다.
걸어들어 가며 로메오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책상 서랍을 거칠게 뒤적여 알약이 담긴 병을 꺼낸 뒤 유리잔에 물 대신 보드카를 따르는 그를 보고 헤수스가 급하게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작은 페트병을 던졌다.
『죽고 싶은 거 아니면 물 마셔.』
그러나 로메오는 낚아챈 페트병을 그대로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악병만을 손에 쥔 채 소파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유언 공정 증서가 어떻게 됐다고?』
그가 입에 한 움큼 털어 넣은 알약을 얼음처럼 우둑우둑 씹어 먹기 시작하자 헤수스가 묘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8월 26일에 작성했던 유언장을 이틀 전인 10월 3일에 수정하셨어. 변호사, 증인 세 명이 함께했으니 확실해.』
『또 뭣 때문에 심사가 뒤틀린 건데. 하라는 대로 하고 있잖아. 빌어먹을 호텔 경영도, 동생인지 원수인지 모를 그 녀석 뒤치다꺼리도.』
『그러니까 무슨 일인지 병원에 들러서 확인하라고 한 거야.』
『변호사랑 얘기해 봤어?』
『그쪽 태도야 늘 그렇듯 뻣뻣하지. 씨알도 안 먹혀.』
알약을 씹어 삼킨 로메오가 소파에 몸을 더욱 깊게 파묻으며 관자놀이에 손을 짚었다.
이번엔 무엇을 트집 잡으며 유언장을 수정했을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욱신거렸다.
『유언장으로 협박하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더 이상은 못 참아. 우리 쪽 변호사 불러.』
『상속 분쟁은 유언장 내용이 공개되어야 해. 내용이 공개가 되려면…….』
말끝을 흐리는 헤수스의 얼굴을 본 로메오가 신경질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어차피 조만간이잖아. 미리 준비해서 나쁠 거 없다고.』
헤수스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변호사를 호출했다.
급하게 달려와 테이블 위에 서류를 펼쳐 보이는 남자 앞에 로메오가 보드카가 따라진 잔을 내밀었다.
돈 앞에서는 부모도 자식도 없다고 하지만, 그리고 그런 모습을 한두 해 보아 온 것도 아니건만 로메오의 앞에서 남자는 잔뜩 위축되었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호텔의 상속 분쟁이라는 거대한 스케일도 이유였으나 무엇보다 그를 긴장시키는 것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진한 갈색 눈동자였다.
그 눈앞에서 남자는 연신 손수건으로 이마 주변을 훑어야 했다.
미팅은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나서야 끝이 났다.
남자는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종이를 가방에 챙겨 넣고 노트북을 손에 들었다.
배웅하는 것은 헤수스뿐이었다.
로메오는 어둠이 사무실을 뚫고 들어올 무렵부터 책상 한편에 등을 보이고 앉아 밖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완전히 까맣게 잠식된 도시를 내려다보던 그가 자신의 어깨에 얹어지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초안 완성되면 팩스로 보내 달라고 했으니 돌아가서 수면제 먹고 좀 자.』
대답 대신 몸을 일으킨 로메오는 책상 의자에 걸쳐 있던 재킷을 들었다.
꺼낸 담배를 입에 문 그가 헤수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 금연 중인데.』
『알아. 라이터 말고.』
로메오가 뻗은 손을 흔들며 헤수스를 채근했다.
그제야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는 듯 아, 하는 소리를 낸 헤수스가 팔짱을 끼며 미간을 좁혔다.
『일단 준비하긴 했는데 정말 갈 거냐? 그것도 이런 때에?』
『안 갔다가 무슨 말을 들으려고.』
『나만 참석해도 상관없어. 컨디션 별로라고 얘기해 줄게.』
『넌 아직도 그 여자를 몰라?』
헤수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로메오가 말한 ‘그 여자’가 누구를 일컫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에.
가방에서 고급스러운 상자를 꺼내 내밀자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문 로메오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딸깍 소리와 함께 열린 상자 안에는 눈이 부실 정도로 다이아가 촘촘하게 박힌 목걸이가 자태를 뽐내며 당당하게 자리해 있었다.
더 보지도 않고 상자를 닫은 뒤 걸음을 옮겼다.
『적어도 자기 엄마한테 생일 축하 안 해 줬다고 이르진 않겠군.』
헤수스는 그저 쓰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차가 준비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로비로 내려온 로메오는 도어맨에게 살짝 눈인사를 해 보이다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9시 42분.
길거리에서부터 시선을 잡아끌었던 동양인 여자는 세 시간이 넘도록 로비 소파에 못 박힌 듯 앉아 있던 모양이었다.
문을 연 채 대기하고 있던 도어맨이 낯선 상황에 곤란한 얼굴을 해 보였다.
『저 여자, 아까부터 계속 있었나?』
『아, 네.』
캐리어를 한쪽에 고이 둔 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앉아 있는 여자는 굳이 손가락으로 콕 찍어 내지 않아도 눈에 띄었다.
도어맨이 황급히 대답하자 로메오가 고개를 갸웃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