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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차가 대기하고 있는데도 나가지 않고 자리에 멈춰 서 있는 로메오를 발견한 직원이 급하게 옆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 여자는 뭐지? 여권에 문제가 있나?』
『아…… 아닙니다.』
『신용카드 불량? 훔친 카드라도 되나?』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숙박객 정보를 알려 달라고 해서요. 알려 주기 전에는 아무 데도 못 간다고……. 가족은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위험해 보이지 않아서 우선 매니저에게 연락만 해 둔 상태입니다.』
로메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며 여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것일까, 앙다문 입술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했다.
『어떻게 할까요? 보안 직원이나 경찰에 요청을…….』
『우리 쪽 투숙객인 건 맞고?』
『두 달 전에 체크인한 한국인 남자가 있긴 합니다. 하지만…….』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던 로메오는 옆에서 남자의 정보에 대해 떠들어 대는 직원을 무시한 채 마치 여자가 부르기라도 한 것처럼 발을 놀렸다.
여행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극도의 설렘을 준다. 그리고 그 설렘은 구체적인 장소에 닿았을 때 배가 된다.
비행기를 타기 전 공항,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 반겨 주는 호텔, 낯선 사람들과의 눈인사.
특별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행복이라는 감정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열 시간이 넘도록 한숨도 자지 못하고 창밖의 빈 하늘을 응시했던 자하에게 이번 여행은 행복과 거리가 멀었다.
숙박객 정보는 알려 줄 수 없다는 한마디를 듣기 위해 비행기 좌석에 그 오랜 시간 동안 구겨져 있던 것은 아니었다.
콧대 높은 유로피안 아니랄까 봐 거절 표시를 정확하게 한 직원은 그 후 자하에게 시선 한 자락 주지 않았다.
알려 달라고 매달릴 수도, 그냥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로비에 황망히 앉아 있는 것뿐이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인지 머릿속이 새하얘 그다음 행동에 대해 계획이 서질 않았다.
묵고 있는 호텔에 도착하면 어떻게든 될 줄 알았는데. 너무 안일했나.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휴대폰을 손가락으로 쓸던 자하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로비 입구 쪽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굳어 있는 얼굴과 위압적인 체격이 강하게 눈에 박혔다.
몸에 딱 맞는 슈트는 어지럽게 눈동자를 굴리지 않아도 얼마나 비싼 가격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
갈색 머리와 그보다 더 옅은 갈색 눈동자, 적당히 그을린 피부. 이목구비는 자로 잰 듯 단정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흐트러진 분위기가 흘렀다.
셔츠 단추를 목 끝까지 완벽하게 채운 남자에게서 왜 그런 느낌을 받은 건지는 자하도 알 수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섹시하다는 게 저런 건가?
눈길을 피하지도 못한 채 앉아 있는데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바지 주머니에 한쪽 손을 꽂아 넣은 남자는 낯선 언어를 입술 밖으로 내뱉었다.
자하는 대답 대신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표정에 떠오른 당황스러움을 읽었는지 남자가 투박한 발음의 영어를 중얼거렸다.
「스페인어 못합니까?」
「…….」
「‘상혁리’이라는 사람, 찾아온 것 맞습니까?」
그의 입에서 ‘상혁’이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자하는 감전된 사람처럼 자리에서 벌떡 튀어 올랐다.
긴장감, 불안함, 들뜸.
그녀의 감정을 눈치챈 로메오가 입술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그 남자는 떠났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 체크아웃했다고.」
자하의 얼굴이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구겨졌다.
떠났다고? 어디로? 왜?
생각하는 것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수한 반응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로메오가 말을 이었다.
「바르셀로나로 갔다는데. 어때요, 이제 좀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로메오가 팔을 들어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직원을 불렀다.
그의 지시를 이해한 직원이 가까이 다가와 캐리어를 향해 팔을 뻗었다.
자하가 거칠게 그 손을 쳐내며 로메오를 노려봤다.
「바르셀로나라고요?」
「일주일 전 바르셀로나 지점에서 체크인했다고 하네요. 이만하면 많이 알려 준 것 같은데.」
얘기를 듣고 있는 여자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꾹 다문 입술에 머무른 곤란함을 모른 체하며 로메오가 말을 이었다.
「클레임을 거는 것 같은 행위는 자칫 다른 손님들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습니다. 바르셀로나 W 호텔 장소는 저기 ‘I’라고 쓰인 곳에 가면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손목시계를 다시 한 번 확인한 로메오가 웃으며 몸을 돌렸다.
두 발자국을 걸어 나가던 그가 미처 못다 한 말이 있었다는 듯 멈춰 섰다.
그리고 뻣뻣하게 굳어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검은색 눈동자를 향해 비아냥 섞인 목소리를 흘렸다.
「이건 내 개인적인 의견이니까 그냥 넘겨도 상관없지만, 여기 묵었던 그 동양 남자는 그럴싸한 미녀와 체크아웃을 한 뒤 나갔다는데. 그런 남자를 시간 아깝게 굳이 쫓을 필요 있나?」
로메오의 휘어지는 입술 끝을 발견한 자하가 캐리어의 손잡이를 거칠게 붙잡았다.
이 남자는 대체 누구이기에 갑자기 나타나서 사람 속을 이렇게 긁는 거지?
남자의 옆을 신경질적으로 지나쳤다.
테이블과 소파가 구비되어 있는 곳은 카펫이 깔려 있었지만 그곳을 벗어나자 로비의 대리석과 캐리어의 바퀴가 마찰되며 경박한 소리를 냈다.
택시를 잡아 주는 벨보이가 목적지를 물었다.
그러나 입술만 달싹였을 뿐 대답을 하지는 못했다.
혼란스러움이 정리가 되질 않았다.
벨보이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르려는 찰나,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항으로.」
고개를 돌리자 조금 전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르셀로나 항공편은 많으니 오늘 중으로는 넘어갈 수 있을 거야.」
「…….」
여자의 표정이 구겨지는 걸 로메오는 제법 기쁜 마음으로 감상했다.
왜 이렇게 속이 뒤틀리는 건지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로비에 앉아 있는 사람 따위 눈길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한 시간을 앉아 있든 열 시간을 앉아 있든 눈치채지도 못했을 것이다.
무엇이 이렇게 거슬리는지 스스로도 결론 내릴 수 없었다.
「마침 택시가 들어오는군.」
호텔 입구에서 벨보이의 신호에 맞추어 천천히 안으로 진입하는 택시를 발견한 로메오가 위태롭게 놓여 있는 캐리어의 손잡이를 잡았다.
커다란 몸이 덮치듯 다가오자 자하는 그를 세게 밀어냈다.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캐리어가 옆으로 쓰러지고, 휴대폰이 추락했으며, 남자의 재킷 주머니에 꽂혀 있던 만년필이 바닥을 굴렀다.
자하는 급히 휴대폰을 주워 들고 로메오를 노려봤다.
「함부로 손대지 마요.」
마치 불결한 어떤 것이 닿은 것처럼 파르르 떠는 그녀를 내려다보던 로메오가 쓰러진 캐리어를 바로 세웠다.
「남자한테 차인 분노를 남한테 풀면 안 되지.」
「뭐라고요?」
「혹시 그 말 알아? ‘세상에 연락 없이 찾아오는 여자만큼 곤란한 건 없다’.」
로메오에게서 캐리어를 뺏어 들은 자하는 빠르게 몸을 돌렸다.
자신을 언제 봤다고 저렇게 예의 없는 말투에 건방진 태도란 말인가.
확실히 이상한 사람이 많은 나라였다.
아니면 극악한 인종차별주의자거나.
돌아섰던 그녀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조금 전 로메오가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뒤로 움직였다.
「이 말이나 기억해요. ‘그냥 넘겨도 상관없는, 개인적인 의견은 안 내뱉는 게 낫다’.」
드르륵, 캐리어가 또다시 처량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 * *
『로메오!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여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목소리를 높였다.
복도까지 소리가 새어 나올 정도로 시끄럽던 룸이 로메오의 등장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잔을 든 채 멈춘 사람도, 입으로 새우를 가져가다 굳어진 사람도 있었다.
마치 난장판이던 교실이 선생의 등장으로 인해 조용해지듯.
자신이 환영받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온몸으로 느끼며 로메오는 자리에 앉는 대신 긴 테이블 끄트머리에 상자를 올려놓았다.
환영해 주길 바라지 않는 건 피차 마찬가지였다.
『내가 아니라 이걸 기다렸겠지.』
멀리서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여자의 파란빛 눈동자가 윤기를 머금었다.
『겸사겸사.』
로메오가 한껏 뒤틀린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카밀리아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구릿빛 피부에 어울리는 붉은색 드레스, 검은색 매니큐어가 칠해진 긴 손톱을 보자 왠지 목이 답답해져 로메오는 넥타이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사람들을 밀치고 긴 테이블을 빠져나와 냉큼 상자를 낚아챈 카밀리아는 커진 눈동자와 어울리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머, 예쁘다.』
이 여자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단어는 무엇일까.
배다른 형제, 발목을 잡는 이복동생,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져 줬으면 하는 존재…….
『뭐해?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아.』
아니면 그 모든 것을 합친 어떤 무언가.
『기다리던 물건 건네줬으니 이만 간다.』
『로메오!』
돌아서는 로메오의 팔뚝을 잡으며 카밀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생일 축하한다는 소리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거 아니야?』
여자의 눈동자는 투명할 정도로 푸르렀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색.
이 감정은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일지도 몰랐다.
차가 대기하고 있는데도 나가지 않고 자리에 멈춰 서 있는 로메오를 발견한 직원이 급하게 옆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 여자는 뭐지? 여권에 문제가 있나?』
『아…… 아닙니다.』
『신용카드 불량? 훔친 카드라도 되나?』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숙박객 정보를 알려 달라고 해서요. 알려 주기 전에는 아무 데도 못 간다고……. 가족은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위험해 보이지 않아서 우선 매니저에게 연락만 해 둔 상태입니다.』
로메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며 여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것일까, 앙다문 입술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했다.
『어떻게 할까요? 보안 직원이나 경찰에 요청을…….』
『우리 쪽 투숙객인 건 맞고?』
『두 달 전에 체크인한 한국인 남자가 있긴 합니다. 하지만…….』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던 로메오는 옆에서 남자의 정보에 대해 떠들어 대는 직원을 무시한 채 마치 여자가 부르기라도 한 것처럼 발을 놀렸다.
여행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극도의 설렘을 준다. 그리고 그 설렘은 구체적인 장소에 닿았을 때 배가 된다.
비행기를 타기 전 공항,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 반겨 주는 호텔, 낯선 사람들과의 눈인사.
특별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행복이라는 감정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열 시간이 넘도록 한숨도 자지 못하고 창밖의 빈 하늘을 응시했던 자하에게 이번 여행은 행복과 거리가 멀었다.
숙박객 정보는 알려 줄 수 없다는 한마디를 듣기 위해 비행기 좌석에 그 오랜 시간 동안 구겨져 있던 것은 아니었다.
콧대 높은 유로피안 아니랄까 봐 거절 표시를 정확하게 한 직원은 그 후 자하에게 시선 한 자락 주지 않았다.
알려 달라고 매달릴 수도, 그냥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로비에 황망히 앉아 있는 것뿐이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인지 머릿속이 새하얘 그다음 행동에 대해 계획이 서질 않았다.
묵고 있는 호텔에 도착하면 어떻게든 될 줄 알았는데. 너무 안일했나.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휴대폰을 손가락으로 쓸던 자하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로비 입구 쪽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굳어 있는 얼굴과 위압적인 체격이 강하게 눈에 박혔다.
몸에 딱 맞는 슈트는 어지럽게 눈동자를 굴리지 않아도 얼마나 비싼 가격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
갈색 머리와 그보다 더 옅은 갈색 눈동자, 적당히 그을린 피부. 이목구비는 자로 잰 듯 단정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흐트러진 분위기가 흘렀다.
셔츠 단추를 목 끝까지 완벽하게 채운 남자에게서 왜 그런 느낌을 받은 건지는 자하도 알 수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섹시하다는 게 저런 건가?
눈길을 피하지도 못한 채 앉아 있는데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바지 주머니에 한쪽 손을 꽂아 넣은 남자는 낯선 언어를 입술 밖으로 내뱉었다.
자하는 대답 대신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표정에 떠오른 당황스러움을 읽었는지 남자가 투박한 발음의 영어를 중얼거렸다.
「스페인어 못합니까?」
「…….」
「‘상혁리’이라는 사람, 찾아온 것 맞습니까?」
그의 입에서 ‘상혁’이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자하는 감전된 사람처럼 자리에서 벌떡 튀어 올랐다.
긴장감, 불안함, 들뜸.
그녀의 감정을 눈치챈 로메오가 입술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그 남자는 떠났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 체크아웃했다고.」
자하의 얼굴이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구겨졌다.
떠났다고? 어디로? 왜?
생각하는 것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수한 반응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로메오가 말을 이었다.
「바르셀로나로 갔다는데. 어때요, 이제 좀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로메오가 팔을 들어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직원을 불렀다.
그의 지시를 이해한 직원이 가까이 다가와 캐리어를 향해 팔을 뻗었다.
자하가 거칠게 그 손을 쳐내며 로메오를 노려봤다.
「바르셀로나라고요?」
「일주일 전 바르셀로나 지점에서 체크인했다고 하네요. 이만하면 많이 알려 준 것 같은데.」
얘기를 듣고 있는 여자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꾹 다문 입술에 머무른 곤란함을 모른 체하며 로메오가 말을 이었다.
「클레임을 거는 것 같은 행위는 자칫 다른 손님들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습니다. 바르셀로나 W 호텔 장소는 저기 ‘I’라고 쓰인 곳에 가면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손목시계를 다시 한 번 확인한 로메오가 웃으며 몸을 돌렸다.
두 발자국을 걸어 나가던 그가 미처 못다 한 말이 있었다는 듯 멈춰 섰다.
그리고 뻣뻣하게 굳어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검은색 눈동자를 향해 비아냥 섞인 목소리를 흘렸다.
「이건 내 개인적인 의견이니까 그냥 넘겨도 상관없지만, 여기 묵었던 그 동양 남자는 그럴싸한 미녀와 체크아웃을 한 뒤 나갔다는데. 그런 남자를 시간 아깝게 굳이 쫓을 필요 있나?」
로메오의 휘어지는 입술 끝을 발견한 자하가 캐리어의 손잡이를 거칠게 붙잡았다.
이 남자는 대체 누구이기에 갑자기 나타나서 사람 속을 이렇게 긁는 거지?
남자의 옆을 신경질적으로 지나쳤다.
테이블과 소파가 구비되어 있는 곳은 카펫이 깔려 있었지만 그곳을 벗어나자 로비의 대리석과 캐리어의 바퀴가 마찰되며 경박한 소리를 냈다.
택시를 잡아 주는 벨보이가 목적지를 물었다.
그러나 입술만 달싹였을 뿐 대답을 하지는 못했다.
혼란스러움이 정리가 되질 않았다.
벨보이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르려는 찰나,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항으로.」
고개를 돌리자 조금 전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르셀로나 항공편은 많으니 오늘 중으로는 넘어갈 수 있을 거야.」
「…….」
여자의 표정이 구겨지는 걸 로메오는 제법 기쁜 마음으로 감상했다.
왜 이렇게 속이 뒤틀리는 건지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로비에 앉아 있는 사람 따위 눈길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한 시간을 앉아 있든 열 시간을 앉아 있든 눈치채지도 못했을 것이다.
무엇이 이렇게 거슬리는지 스스로도 결론 내릴 수 없었다.
「마침 택시가 들어오는군.」
호텔 입구에서 벨보이의 신호에 맞추어 천천히 안으로 진입하는 택시를 발견한 로메오가 위태롭게 놓여 있는 캐리어의 손잡이를 잡았다.
커다란 몸이 덮치듯 다가오자 자하는 그를 세게 밀어냈다.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캐리어가 옆으로 쓰러지고, 휴대폰이 추락했으며, 남자의 재킷 주머니에 꽂혀 있던 만년필이 바닥을 굴렀다.
자하는 급히 휴대폰을 주워 들고 로메오를 노려봤다.
「함부로 손대지 마요.」
마치 불결한 어떤 것이 닿은 것처럼 파르르 떠는 그녀를 내려다보던 로메오가 쓰러진 캐리어를 바로 세웠다.
「남자한테 차인 분노를 남한테 풀면 안 되지.」
「뭐라고요?」
「혹시 그 말 알아? ‘세상에 연락 없이 찾아오는 여자만큼 곤란한 건 없다’.」
로메오에게서 캐리어를 뺏어 들은 자하는 빠르게 몸을 돌렸다.
자신을 언제 봤다고 저렇게 예의 없는 말투에 건방진 태도란 말인가.
확실히 이상한 사람이 많은 나라였다.
아니면 극악한 인종차별주의자거나.
돌아섰던 그녀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조금 전 로메오가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뒤로 움직였다.
「이 말이나 기억해요. ‘그냥 넘겨도 상관없는, 개인적인 의견은 안 내뱉는 게 낫다’.」
드르륵, 캐리어가 또다시 처량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 * *
『로메오!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여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목소리를 높였다.
복도까지 소리가 새어 나올 정도로 시끄럽던 룸이 로메오의 등장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잔을 든 채 멈춘 사람도, 입으로 새우를 가져가다 굳어진 사람도 있었다.
마치 난장판이던 교실이 선생의 등장으로 인해 조용해지듯.
자신이 환영받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온몸으로 느끼며 로메오는 자리에 앉는 대신 긴 테이블 끄트머리에 상자를 올려놓았다.
환영해 주길 바라지 않는 건 피차 마찬가지였다.
『내가 아니라 이걸 기다렸겠지.』
멀리서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여자의 파란빛 눈동자가 윤기를 머금었다.
『겸사겸사.』
로메오가 한껏 뒤틀린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카밀리아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구릿빛 피부에 어울리는 붉은색 드레스, 검은색 매니큐어가 칠해진 긴 손톱을 보자 왠지 목이 답답해져 로메오는 넥타이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사람들을 밀치고 긴 테이블을 빠져나와 냉큼 상자를 낚아챈 카밀리아는 커진 눈동자와 어울리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머, 예쁘다.』
이 여자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단어는 무엇일까.
배다른 형제, 발목을 잡는 이복동생,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져 줬으면 하는 존재…….
『뭐해?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아.』
아니면 그 모든 것을 합친 어떤 무언가.
『기다리던 물건 건네줬으니 이만 간다.』
『로메오!』
돌아서는 로메오의 팔뚝을 잡으며 카밀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생일 축하한다는 소리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거 아니야?』
여자의 눈동자는 투명할 정도로 푸르렀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색.
이 감정은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일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