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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프러포즈
1화
프롤로그
가현은 거울에 비치는 창백한 안색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이게 어딜 봐서 생일을 맞이한 여자의 모습이람.”
마치 채색을 기다리는 스케치와 같은 그녀를 보며 가현은 정성 들여 화장을 했다. 봄이니까 블러셔는 화사하게 피치 톤으로, 입술은 발색을 돕기 위해 누드 톤의 립스틱을 눌러 주고 핑크 립글로즈를 덧발랐다. 옅은 화장에 맞춰 섀도우도 과하지 않도록 누드 베이지와 브라운 계열로 색을 골랐다.
“습관이란 게 참 무섭네.”
방금 전과 달리 혈색이 살아난 자신의 모습을 보며 가현은 한숨을 내쉬며 향수를 제 손목과 목덜미에 차례로 뿌렸다.
“아…….”
이 순간, 제 몸에서 풍기는 샤넬 샹스 향을 느끼며 가현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메이크업은 다시 손볼 곳 없이 완벽했지만 하필이면 이십 대의 마지막 생일마저 시혁의 취향대로 화장을 한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벌써 3년을 이렇게 지냈으니까…….”
낮게 읊조린 가현은 의자에서 일어나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클로젯 문을 열자 원피스와 블라우스, 치마가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고 바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색상도 화이트, 베이지, 핑크 같은 화사하고 여성스러운 것들뿐이다. 3년 전, 시혁과 결혼을 했던 그날부터 가현의 모든 것은 그의 취향에 맞춰 바뀌어 갔다.
“정확히는 그가 아니라 그녀의 취향이겠지.”
시혁과의 결혼 생활은 두 사람만을 위한 나날이 아니었다. 그녀가 웨딩드레스를 입는 순간부터 시혁과 가현, 그리고 그의 첫사랑이자 이미 고인(故人)이 된 지수란 여자까지, 세 명이 함께하는 생활이었다. 그리고 시혁은 언제나처럼 오늘을 가현의 생일이 아닌, 지수의 기일로만 기억하고 있을 거란 걸 그녀는 알았다.
“하긴, 이런 것도 새삼스러울 거 없잖아.”
그래서 더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클로젯에 걸린 옷들 중 오스카 드 라 렌타(Oscar de la Renta)의 흰색 레이스 원피스를 골라 재빠르게 갈아입고서 핸드백을 들고 드레스룸을 빠져나갔다. 시혁이 어쩌건, 오늘은 내 생일이니까 즐겁게 보내야지. 가현은 그렇게 다짐하며 집을 뒤로했다.
친구들과 간단한 브런치를 즐긴 가현은 생일 축하한다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헤어지자마자 홀로 백화점으로 향했다. 그녀의 스물아홉 번째 생일인 오늘, 시혁의 카드로 쇼핑을 할 생각이었다. 무얼 살지는 오래전부터 정해 두었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매장으로 향했다.
“오셨어요? 사모님.”
가현을 알아본 직원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맞이해 주기에 가현 역시도 미소로 화답했다.
“주문했던 건 왔나요?”
“네. 다행히 사모님께서 원하신 날짜에 맞춰서 입고되었네요. 바로 보여 드릴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그렇게 말한 직원이 잠시 백 플로어로 모습을 감췄다가 가현이 원하던 물건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스와로브스키가 장식된 지미추(Jimmy Choo)의 플랫슈즈. 너무 가지고 싶어서 미리 주문까지 해 두었던 걸 오늘 찾게 된 것이다.
“시착하시는 거 도와 드리겠습니다.”
직원이 가현의 앞에 무릎을 꿇고서 조심스러운 손길로 플랫슈즈를 신겨 주자 그녀는 어린아이로 돌아가 폴짝이며 좋아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 냈다.
“제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예쁘네요.”
“그러게요. 사모님께 무척이나 어울리네요.”
너무 캐주얼하지도 않고, 과하게 여성스럽지도 않은 게 가현의 마음에 쏙 들었다. 만약 직업을 가지게 된다면 오피스용으로도 적합할 것 같았다.
“시혁 씨가 보면 놀라겠네…….”
그에게 구두를 살 거라고 미리 귀띔을 해 두긴 했지만 어떤 디자인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시혁은 아마도 언제나 같은 펌프스나 메리제인 슈즈를 사리라 짐작하고 있겠지. 그러니 이건 가현에게 나름의 일탈과도 같은 일이다. 오늘이 생일이기에 가능한…….
“포장 부탁할게요.”
시착을 끝낸 가현이 직원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러자 직원은 플랫슈즈를 조심스러운 손길로 박스에 넣었고 가현은 지갑에서 시혁의 카드를 꺼내 기세 좋게 내밀었다.
첫 번째 쇼핑을 기분 좋게 끝낸 가현은 발걸음을 돌려 백화점 지하 매장으로 향했다. 베이커리에 도착한 가현은 쇼케이스를 잠시 들여다보다가 시럽이 발려 루비처럼 빛나는 딸기에 마음을 뺏겼다. 봄이면 역시 딸기지.
“여기 있는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 포장해 주세요.”
주문을 마친 가현은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있어 케이크를 포장 중인 직원을 향해 외쳤다.
“긴 초도 하나, 같이 넣어 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직원이 익숙한 손길로 작은 박스에 케이크를 포장해 계산대로 향하자 가현 역시도 빠르게 계산을 마치고 베이커리를 떠났다. 이제 그녀에겐,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 * *
가현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식탁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박스를 열어 곱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케이크를 꺼내었다. 혼자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작고 흔한, 생크림과 딸기로 채워진 쇼트케이크였지만 그녀에게는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맛있겠다.”
가현은 케이크 중앙에 긴 초를 꽂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 불빛을 보며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오늘은 자신의 생일이자 지수의 기일이었다. 시혁과 결혼한 이후부터 생일이 되면 그녀에 대한 생각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변명은 하지 않을게. 넌 그녀와 많이 닮았어.’
그와 처음 만났던 그날, 시혁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다. 그리고 그의 지갑 속에 간직된 지수의 사진을 보게 되었을 때는 너무도 닮은 서로의 모습에 가현 역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에겐 네가 필요해. 이번에는 꼭 지켜 내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넌 아무 의심 말고 내가 널 필요로 한다는 진실만 믿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해.’
프러포즈와 함께 들었던 말을 잊을 수가 없다. 우리는 분명 사랑을 했다. 그래서 그의 진심을 처음에는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에게 필요한 게 나인지, 지수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아직도 우리 사이에는 사랑이 남아 있을까.
“지금까지 참고 사느라 많이 힘들었지…….”
그와의 관계는 부부라기보다 오히려 ‘마이 페어 레이디(My Fair Lady)’의 히긴스 교수와 일라이자와 같은, 혹은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의 겐지와 무라사키노우에와 같이 자신의 이상형에 맞는 여자로 만들어 가는 관계에 가까웠다. 그것도 한때 실재했던 최지수란 여자와 똑같이 말이다.
“차라리 미워했더라면…….”
그랬더라면 마음이 편했을 거다. 그러나 가현은 그를, 시혁을 진심을 다해 사랑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생활들을 견뎌 낼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생일 축하해. 윤가현.”
하지만 어찌 됐든 자신은 최지수가 될 수 없다. 그녀와 닮았을지언정 전혀 다른 사람이니까. 나는 윤가현. 아직은 이시혁의 부인인 윤가현이다.
“오늘부터 너도 새로 태어나는 거야.”
그러니까 오늘은 슬퍼하기보다 축하하자. 가현은 촛불을 향해 길게 숨을 내뿜어 불을 껐다. 그리고 초를 빼내고서 케이크를 직접 손으로 들고 한 입씩 베어 먹었다. 한 입, 두 입, 세 입……. 그렇게 몇 번을 먹고 나니 케이크는 모두 입 속으로 사라지고 생크림이 묻은 손만 남았다. 이렇게 가현의 생일을 축하하는 순간은 단숨에 끝이 났다.
“후우…….”
생크림으로 더럽혀진 손은 비누칠을 해 뽀득뽀득하게 씻어 낸 후, 비어 있는 박스를 잘 접어서 다용도실에 가져다 두었다. 그리고 시혁이 오길 기다리며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았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흐르자 삑삑삑 하고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현이 거실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자 11시 40분이었다. 그녀는 리모컨을 들어 TV를 끄고 현관으로 향했다.
“오늘은 일찍 돌아오셨네요.”
시혁은 그녀의 마중에도 아랑곳없이 술 냄새를 풍기며 가현을 지나쳐 갈 뿐이다. 이미 익숙한 광경에 그녀는 더 무어라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뒤만 쫓았다. 시혁은 흔들리는 걸음으로 겨우 거실로 가서는 소파에 몸을 던지고 누웠다. 그의 곁에 서서 시혁을 내려다보는 가현은 곧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자신을 할퀴고 지나가리라 예감했다.
“지수야……. 미안해, 지수야…….”
그녀는 3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시혁의 입을 통해서 생일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를 들은 기억이 없다. 겨우 한마디일 뿐인데. 대신에 시혁은 전혀 다른 말로 가현을 지옥으로 끌고 들어간다.
하지만 가현은 티를 내지 않고 주방으로 가 따뜻한 물에 꿀을 탔다. 조금만 더 버티면 시혁도 이성을 찾을 것이고 이전과 같은 일상이 찾아올 것이다. 그 일상이 행복으로 이어지는지 어떤지는 차치하고서.
“드세요. 꿀물이에요.”
가현은 시혁의 손길이 닿는 커피 테이블에 물 잔을 올려 두었다. 그리고 잠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화장대 서랍에 넣어 두었던 종이 뭉치를 꺼내어 다시 거실로 나왔다.
시혁이 어느새 몸을 일으켜 꿀물을 마시고 있는 게 그녀의 두 눈에 들어왔다. 가현은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거실 시계를 다시 바라보았다. 시간은 11시 50분. 다행히 그녀의 생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할 말이 있어요. 얘기 좀 해요.”
가현이 그의 곁으로 다가갔지만 시혁은 여전히 그녀를 쳐다도 보지 않고 마시고 있던 물 잔을 커피 테이블 위에 다시 올려 둘 뿐이다.
“급한 얘기 아니면 내일 해. 나 술 마셨잖아.”
“이혼해요. 우리.”
가현은 시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들고 있던 종이들을 그를 향해 내밀었다.
“필요한 서류는 내가 준비했어요. 시혁 씨가 써야 될 거까지 모두 적었으니 당신은 도장만 찍으면 돼요.”
“하……! 이혼이라…….”
날카로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혁을 보며 가현은 그를 순종적으로 사랑했던 지난날들을 떠올렸다. 그와 함께 나누었던 결혼 서약을 반드시 지키고 싶었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사랑하고 아끼며, 슬플 때도 기쁠 때도 함께하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사랑이란 혼자만의 힘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랑받을 수 없다면 하다못해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가현은 시혁의 곁을 떠나려는 것이다. 그와 함께했던 3년간 가현은 행복하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행복의 시작이 자신의 생일에 이루어지길 원했다.
“시혁 씨라면 이치에 맞게 행동해 주리라 생각해서 한 말이에요. 이혼 정도는 내 뜻대로 결정해도 되잖아요.”
“이치라……. 널 맞이한 건 내가 원해서였으니까 떠나는 순간은 네가 정해도 된다는 얘긴가.”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시혁은 가현이 내민 서류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단번에 갈가리 찢어 버렸다.
“무슨 짓이죠?”
놀란 가현이 따져 묻자 시혁은 여느 때보다 차가운 눈빛으로 가현을 바라보았다.
“난 이혼할 생각 없어. 그러니까 다신 이런 허튼짓 하지 마.”
예상하지 못한 시혁의 태도에 가현을 이를 악물었다.
“합의해 주지 않는다면 나, 소송이라도 할 거예요.”
가현의 으름장에 시혁은 잠시 놀란 듯 두 눈이 커지더니 이내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하, 소송? 잊고 있는가 본데 법적으로 넌 내게 이혼을 요구할 자격이 없어. 혼전 계약서에 관해서 잊었어? 우리 둘 중 누군가에게 유책 사유가 있어야만 이혼이 가능한데, 당신이나 나나 법적으로 문제 될 일을 한 적이 없어. 그런데 어떤 유책을 근거로 소송을 건다는 거지. 기껏해야 부부 생활 안 한 거, 그게 문제가 되긴 하겠네. 근데 증거도 없이 그 사실을 어떻게 입증할 거지.”
시혁이 속사포처럼 내뱉는 말들에 가현은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잊고 있었던 혼전 계약서에 관한 문제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돈에 관해서는 아까운 게 없었다. 그까짓 돈, 안 받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배우자로서 의무를 제대로 지켜 왔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부부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가현은 이 생활을 더 이상 이어 갈 생각이 없었다.
“내가 그 증거예요. 당신과 함께 살았던 지난 3년간의 내가, 그 증거라고요.”
“괜한 억지 부리지 마. 설사 그 얘기를 믿는 변호사가 있다고 해도 소송에 이길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니까 포기하는 게 편할 거야.”
겨우 결심했던 일이 이렇게 간단히 수포로 돌아가자 가현은 기가 차고 화가 났다. 당신이란 남자, 어쩌면 끝까지 이렇게 이기적일까. 가현은 원망을 가득히 담아 시혁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가현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한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녀 곁으로 바짝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넌 내 부인으로 있어야 해.”
그때, 12시를 넘어가는 시곗바늘이 가현의 눈에 들어왔다. 행복을 찾고 싶었던 가현의 생일은 그렇게 시혁의 손안에서 허무하게 끝이 났다. 일이 이런 식으로 흐를 거라 생각하진 못했지만 가현은 어렵게 결심한 일을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언제까지고 당신 뜻대로 될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가현은 시혁을 밀어 내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고 몸을 숙여 찢어진 이혼 서류를 그러모았다. 제멋대로 흩어져 제 조각을 찾지 못한 모습이 마치 자신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가현은 이대로 끝내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이제 겨우 한 발짝을 내디뎠을 뿐이다. 이제까지는 시혁이 자신을 제멋대로 휘둘러 왔다면 이제는 가현의 차례였다.
1화
프롤로그
가현은 거울에 비치는 창백한 안색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이게 어딜 봐서 생일을 맞이한 여자의 모습이람.”
마치 채색을 기다리는 스케치와 같은 그녀를 보며 가현은 정성 들여 화장을 했다. 봄이니까 블러셔는 화사하게 피치 톤으로, 입술은 발색을 돕기 위해 누드 톤의 립스틱을 눌러 주고 핑크 립글로즈를 덧발랐다. 옅은 화장에 맞춰 섀도우도 과하지 않도록 누드 베이지와 브라운 계열로 색을 골랐다.
“습관이란 게 참 무섭네.”
방금 전과 달리 혈색이 살아난 자신의 모습을 보며 가현은 한숨을 내쉬며 향수를 제 손목과 목덜미에 차례로 뿌렸다.
“아…….”
이 순간, 제 몸에서 풍기는 샤넬 샹스 향을 느끼며 가현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메이크업은 다시 손볼 곳 없이 완벽했지만 하필이면 이십 대의 마지막 생일마저 시혁의 취향대로 화장을 한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벌써 3년을 이렇게 지냈으니까…….”
낮게 읊조린 가현은 의자에서 일어나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클로젯 문을 열자 원피스와 블라우스, 치마가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고 바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색상도 화이트, 베이지, 핑크 같은 화사하고 여성스러운 것들뿐이다. 3년 전, 시혁과 결혼을 했던 그날부터 가현의 모든 것은 그의 취향에 맞춰 바뀌어 갔다.
“정확히는 그가 아니라 그녀의 취향이겠지.”
시혁과의 결혼 생활은 두 사람만을 위한 나날이 아니었다. 그녀가 웨딩드레스를 입는 순간부터 시혁과 가현, 그리고 그의 첫사랑이자 이미 고인(故人)이 된 지수란 여자까지, 세 명이 함께하는 생활이었다. 그리고 시혁은 언제나처럼 오늘을 가현의 생일이 아닌, 지수의 기일로만 기억하고 있을 거란 걸 그녀는 알았다.
“하긴, 이런 것도 새삼스러울 거 없잖아.”
그래서 더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클로젯에 걸린 옷들 중 오스카 드 라 렌타(Oscar de la Renta)의 흰색 레이스 원피스를 골라 재빠르게 갈아입고서 핸드백을 들고 드레스룸을 빠져나갔다. 시혁이 어쩌건, 오늘은 내 생일이니까 즐겁게 보내야지. 가현은 그렇게 다짐하며 집을 뒤로했다.
친구들과 간단한 브런치를 즐긴 가현은 생일 축하한다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헤어지자마자 홀로 백화점으로 향했다. 그녀의 스물아홉 번째 생일인 오늘, 시혁의 카드로 쇼핑을 할 생각이었다. 무얼 살지는 오래전부터 정해 두었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매장으로 향했다.
“오셨어요? 사모님.”
가현을 알아본 직원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맞이해 주기에 가현 역시도 미소로 화답했다.
“주문했던 건 왔나요?”
“네. 다행히 사모님께서 원하신 날짜에 맞춰서 입고되었네요. 바로 보여 드릴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그렇게 말한 직원이 잠시 백 플로어로 모습을 감췄다가 가현이 원하던 물건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스와로브스키가 장식된 지미추(Jimmy Choo)의 플랫슈즈. 너무 가지고 싶어서 미리 주문까지 해 두었던 걸 오늘 찾게 된 것이다.
“시착하시는 거 도와 드리겠습니다.”
직원이 가현의 앞에 무릎을 꿇고서 조심스러운 손길로 플랫슈즈를 신겨 주자 그녀는 어린아이로 돌아가 폴짝이며 좋아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 냈다.
“제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예쁘네요.”
“그러게요. 사모님께 무척이나 어울리네요.”
너무 캐주얼하지도 않고, 과하게 여성스럽지도 않은 게 가현의 마음에 쏙 들었다. 만약 직업을 가지게 된다면 오피스용으로도 적합할 것 같았다.
“시혁 씨가 보면 놀라겠네…….”
그에게 구두를 살 거라고 미리 귀띔을 해 두긴 했지만 어떤 디자인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시혁은 아마도 언제나 같은 펌프스나 메리제인 슈즈를 사리라 짐작하고 있겠지. 그러니 이건 가현에게 나름의 일탈과도 같은 일이다. 오늘이 생일이기에 가능한…….
“포장 부탁할게요.”
시착을 끝낸 가현이 직원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러자 직원은 플랫슈즈를 조심스러운 손길로 박스에 넣었고 가현은 지갑에서 시혁의 카드를 꺼내 기세 좋게 내밀었다.
첫 번째 쇼핑을 기분 좋게 끝낸 가현은 발걸음을 돌려 백화점 지하 매장으로 향했다. 베이커리에 도착한 가현은 쇼케이스를 잠시 들여다보다가 시럽이 발려 루비처럼 빛나는 딸기에 마음을 뺏겼다. 봄이면 역시 딸기지.
“여기 있는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 포장해 주세요.”
주문을 마친 가현은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있어 케이크를 포장 중인 직원을 향해 외쳤다.
“긴 초도 하나, 같이 넣어 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직원이 익숙한 손길로 작은 박스에 케이크를 포장해 계산대로 향하자 가현 역시도 빠르게 계산을 마치고 베이커리를 떠났다. 이제 그녀에겐,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 * *
가현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식탁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박스를 열어 곱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케이크를 꺼내었다. 혼자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작고 흔한, 생크림과 딸기로 채워진 쇼트케이크였지만 그녀에게는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맛있겠다.”
가현은 케이크 중앙에 긴 초를 꽂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 불빛을 보며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오늘은 자신의 생일이자 지수의 기일이었다. 시혁과 결혼한 이후부터 생일이 되면 그녀에 대한 생각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변명은 하지 않을게. 넌 그녀와 많이 닮았어.’
그와 처음 만났던 그날, 시혁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다. 그리고 그의 지갑 속에 간직된 지수의 사진을 보게 되었을 때는 너무도 닮은 서로의 모습에 가현 역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에겐 네가 필요해. 이번에는 꼭 지켜 내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넌 아무 의심 말고 내가 널 필요로 한다는 진실만 믿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해.’
프러포즈와 함께 들었던 말을 잊을 수가 없다. 우리는 분명 사랑을 했다. 그래서 그의 진심을 처음에는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에게 필요한 게 나인지, 지수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아직도 우리 사이에는 사랑이 남아 있을까.
“지금까지 참고 사느라 많이 힘들었지…….”
그와의 관계는 부부라기보다 오히려 ‘마이 페어 레이디(My Fair Lady)’의 히긴스 교수와 일라이자와 같은, 혹은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의 겐지와 무라사키노우에와 같이 자신의 이상형에 맞는 여자로 만들어 가는 관계에 가까웠다. 그것도 한때 실재했던 최지수란 여자와 똑같이 말이다.
“차라리 미워했더라면…….”
그랬더라면 마음이 편했을 거다. 그러나 가현은 그를, 시혁을 진심을 다해 사랑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생활들을 견뎌 낼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생일 축하해. 윤가현.”
하지만 어찌 됐든 자신은 최지수가 될 수 없다. 그녀와 닮았을지언정 전혀 다른 사람이니까. 나는 윤가현. 아직은 이시혁의 부인인 윤가현이다.
“오늘부터 너도 새로 태어나는 거야.”
그러니까 오늘은 슬퍼하기보다 축하하자. 가현은 촛불을 향해 길게 숨을 내뿜어 불을 껐다. 그리고 초를 빼내고서 케이크를 직접 손으로 들고 한 입씩 베어 먹었다. 한 입, 두 입, 세 입……. 그렇게 몇 번을 먹고 나니 케이크는 모두 입 속으로 사라지고 생크림이 묻은 손만 남았다. 이렇게 가현의 생일을 축하하는 순간은 단숨에 끝이 났다.
“후우…….”
생크림으로 더럽혀진 손은 비누칠을 해 뽀득뽀득하게 씻어 낸 후, 비어 있는 박스를 잘 접어서 다용도실에 가져다 두었다. 그리고 시혁이 오길 기다리며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았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흐르자 삑삑삑 하고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현이 거실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자 11시 40분이었다. 그녀는 리모컨을 들어 TV를 끄고 현관으로 향했다.
“오늘은 일찍 돌아오셨네요.”
시혁은 그녀의 마중에도 아랑곳없이 술 냄새를 풍기며 가현을 지나쳐 갈 뿐이다. 이미 익숙한 광경에 그녀는 더 무어라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뒤만 쫓았다. 시혁은 흔들리는 걸음으로 겨우 거실로 가서는 소파에 몸을 던지고 누웠다. 그의 곁에 서서 시혁을 내려다보는 가현은 곧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자신을 할퀴고 지나가리라 예감했다.
“지수야……. 미안해, 지수야…….”
그녀는 3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시혁의 입을 통해서 생일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를 들은 기억이 없다. 겨우 한마디일 뿐인데. 대신에 시혁은 전혀 다른 말로 가현을 지옥으로 끌고 들어간다.
하지만 가현은 티를 내지 않고 주방으로 가 따뜻한 물에 꿀을 탔다. 조금만 더 버티면 시혁도 이성을 찾을 것이고 이전과 같은 일상이 찾아올 것이다. 그 일상이 행복으로 이어지는지 어떤지는 차치하고서.
“드세요. 꿀물이에요.”
가현은 시혁의 손길이 닿는 커피 테이블에 물 잔을 올려 두었다. 그리고 잠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화장대 서랍에 넣어 두었던 종이 뭉치를 꺼내어 다시 거실로 나왔다.
시혁이 어느새 몸을 일으켜 꿀물을 마시고 있는 게 그녀의 두 눈에 들어왔다. 가현은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거실 시계를 다시 바라보았다. 시간은 11시 50분. 다행히 그녀의 생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할 말이 있어요. 얘기 좀 해요.”
가현이 그의 곁으로 다가갔지만 시혁은 여전히 그녀를 쳐다도 보지 않고 마시고 있던 물 잔을 커피 테이블 위에 다시 올려 둘 뿐이다.
“급한 얘기 아니면 내일 해. 나 술 마셨잖아.”
“이혼해요. 우리.”
가현은 시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들고 있던 종이들을 그를 향해 내밀었다.
“필요한 서류는 내가 준비했어요. 시혁 씨가 써야 될 거까지 모두 적었으니 당신은 도장만 찍으면 돼요.”
“하……! 이혼이라…….”
날카로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혁을 보며 가현은 그를 순종적으로 사랑했던 지난날들을 떠올렸다. 그와 함께 나누었던 결혼 서약을 반드시 지키고 싶었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사랑하고 아끼며, 슬플 때도 기쁠 때도 함께하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사랑이란 혼자만의 힘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랑받을 수 없다면 하다못해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가현은 시혁의 곁을 떠나려는 것이다. 그와 함께했던 3년간 가현은 행복하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행복의 시작이 자신의 생일에 이루어지길 원했다.
“시혁 씨라면 이치에 맞게 행동해 주리라 생각해서 한 말이에요. 이혼 정도는 내 뜻대로 결정해도 되잖아요.”
“이치라……. 널 맞이한 건 내가 원해서였으니까 떠나는 순간은 네가 정해도 된다는 얘긴가.”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시혁은 가현이 내민 서류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단번에 갈가리 찢어 버렸다.
“무슨 짓이죠?”
놀란 가현이 따져 묻자 시혁은 여느 때보다 차가운 눈빛으로 가현을 바라보았다.
“난 이혼할 생각 없어. 그러니까 다신 이런 허튼짓 하지 마.”
예상하지 못한 시혁의 태도에 가현을 이를 악물었다.
“합의해 주지 않는다면 나, 소송이라도 할 거예요.”
가현의 으름장에 시혁은 잠시 놀란 듯 두 눈이 커지더니 이내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하, 소송? 잊고 있는가 본데 법적으로 넌 내게 이혼을 요구할 자격이 없어. 혼전 계약서에 관해서 잊었어? 우리 둘 중 누군가에게 유책 사유가 있어야만 이혼이 가능한데, 당신이나 나나 법적으로 문제 될 일을 한 적이 없어. 그런데 어떤 유책을 근거로 소송을 건다는 거지. 기껏해야 부부 생활 안 한 거, 그게 문제가 되긴 하겠네. 근데 증거도 없이 그 사실을 어떻게 입증할 거지.”
시혁이 속사포처럼 내뱉는 말들에 가현은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잊고 있었던 혼전 계약서에 관한 문제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돈에 관해서는 아까운 게 없었다. 그까짓 돈, 안 받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배우자로서 의무를 제대로 지켜 왔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부부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가현은 이 생활을 더 이상 이어 갈 생각이 없었다.
“내가 그 증거예요. 당신과 함께 살았던 지난 3년간의 내가, 그 증거라고요.”
“괜한 억지 부리지 마. 설사 그 얘기를 믿는 변호사가 있다고 해도 소송에 이길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니까 포기하는 게 편할 거야.”
겨우 결심했던 일이 이렇게 간단히 수포로 돌아가자 가현은 기가 차고 화가 났다. 당신이란 남자, 어쩌면 끝까지 이렇게 이기적일까. 가현은 원망을 가득히 담아 시혁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가현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한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녀 곁으로 바짝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넌 내 부인으로 있어야 해.”
그때, 12시를 넘어가는 시곗바늘이 가현의 눈에 들어왔다. 행복을 찾고 싶었던 가현의 생일은 그렇게 시혁의 손안에서 허무하게 끝이 났다. 일이 이런 식으로 흐를 거라 생각하진 못했지만 가현은 어렵게 결심한 일을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언제까지고 당신 뜻대로 될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가현은 시혁을 밀어 내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고 몸을 숙여 찢어진 이혼 서류를 그러모았다. 제멋대로 흩어져 제 조각을 찾지 못한 모습이 마치 자신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가현은 이대로 끝내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이제 겨우 한 발짝을 내디뎠을 뿐이다. 이제까지는 시혁이 자신을 제멋대로 휘둘러 왔다면 이제는 가현의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