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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
이혼을 결정한 이후로, 조금씩 정리해 왔던 짐들을 들고 가현은 집 밖으로 나섰다. 시혁에게 받은 것들은 모두 놔두고 꼭 필요한 것들만 챙겨서인지 짐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게 가현은 인생에 첫 가출을 감행했다. 시혁이 출근할 때까지도 아무 내색을 하지 않은 자신이 대견했다.
“이제부터 완벽하게 홀로 서는 거야.”
시혁과 함께 살던 고급맨션을 뒤로하고서 무작정 택시에 올라탄 가현은 미리 구해 둔 원룸의 주소를 불러 주었다. 그렇게 차는 한참을 달려 한적한 주택가로 가현을 데려갔다.
그녀는 심적으로 오늘부터 시혁의 아내가 아니었다. 이런 날을 그냥 넘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든 가현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자신의 방에 대충 짐을 놔두고는 다시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여기서 제일 가까운 번화가로 가 주세요.”
가현을 태운 택시는 다시 한참을 달리더니 한 지점에서 운행을 멈췄다. 차비를 계산하고 택시에서 내린 가현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헤어숍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세요.”
유리로 된 자동문을 지나치자 데스크에 서 있는 직원이 높은 톤으로 인사를 건넸다.
“저…… 커트를 하려는데요.”
언제나 다니던 곳과는 달리 최신곡이 흐르는 헤어숍 실내는 어딘가 어수선한 분위기가 강해서 가현은 괜히 주눅이 들었다.
“네, 찾으시는 디자이너 선생님 계신가요?”
“아니요. 오늘 처음이에요.”
“그러시구나. 그럼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가현은 한쪽 공간에 놓인 소파로 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다 문득 파마 중인 여자와 그 곁을 지키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렇게 가까운 걸 보면 아마도 연인 사이겠지. 무슨 얘기가 그리도 즐거운지 서로에게만 집중하는 두 사람은 자신이 보기에도 사랑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시혁도 딱 한 번, 가현을 따라 헤어숍에 따라왔던 적이 있었다. 물론, 호의에 의한 행동은 아니었다.
‘여기서 더 기르는 건 상관없지만 짧게 자르진 마. 머리카락은 가슴에 못 미치는 기장으로 잘라.’
‘염색도, 파마도 안 돼.’
디자이너와 자신에게 간섭하고 감시하려 한 일이었지만 가현은 그런 것조차 저를 위한 관심이라고 좋게 생각했더랬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지수를 생각하며 한 행동이었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저 연인들처럼 사랑스럽게 보이진 않았을 거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따라오시겠어요?”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여자가 말을 걸었기에 가현의 상념도 끝이 났다.
“커트하신다고요. 어떤 스타일로 하실지는 정하셨어요?”
“아니요. 그게…….”
그녀를 따라 거울 앞 의자에 앉은 가현이 쉽사리 얘기를 꺼내지 못하자 헤어디자이너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다시 나타나더니 책 한 권을 가현에게 권했다. 그녀가 책장을 넘기자 여러 모습의 모델 사진이 가득히 실려 있었다.
한참을 책을 들여다보던 가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한국인 대상이라서일까. 모델들은 하나같이 갈색 머리를 하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밝거나 어두운 정도일 뿐.
“갈색…….”
가현은 자신의 입 밖으로 나온 그 단어가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듯 또 다른 결심을 하게 됐다. 염색도 해야겠어. 그녀가 보통 헤어숍을 찾게 될 때는 머리카락을 조금 다듬는 정도였기 때문에 자신이 이런 식의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녀는 변하고 싶었다. 이전의 윤가현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말이다.
“머리카락은 이 정도로 잘라 주시고요. 밝은 갈색으로 염색도 같이 해 주세요.”
가현은 맨 앞 장에 있던 모델을 가리켰다. 턱까지 오는 단발에 앞머리는 시스루뱅을 한 여자를 말이다. 그러자 헤어디자이너는 가현의 검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한마디 했다.
“오래 기르신 거 같은데 아깝진 않으시겠어요?”
“전혀요. 이 머린 이제 질렸거든요.”
가현은 거울을 보며 빙긋이 웃었다. 최지수의 도플갱어로 살아가는 데 지쳤기 때문에 시혁과 헤어지려던 것인데 같은 자리에 계속 머무를 수는 없지 않은가.
가현은 지금 이 순간, 마음이 조금 들떴다. 머리카락이 사각거리며 잘려 가는 소리가 마치 듣기 좋은 음악 같았고, 염색약을 발라 납작하게 달라붙은 머리를 봐도 보기가 좋았다. 그렇게 가현은 이전과는 달라진 모습으로 헤어숍을 빠져나왔다. 봄바람이 살랑이며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자 가현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 시원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잠깐 동안 바람을 느끼던 가현이 가벼운 마음으로 앞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곧 해가 질 듯 주황빛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가현은 쇼윈도에 비치는 자신을 자꾸만 힐끔거렸다. 늘 길고 검은 생머리를 유지했던 지난날의 가현은 사라지고 단발에 갈색 머리를 한 여자가 자신을 따라서 웃고 있다. 짧아진 머리카락을 보면 시혁은 분명 기함하겠지.
“이시혁, 꼴좋다.”
그 생각을 하니 가현은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은 자신도 이 모습이 낯설긴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마치 잃어버린 3년을 다시 찾아온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러다 가현은 불현듯 한 가게 앞에 멈춰 서서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 옷 괜찮은데.”
빈티지 느낌이 나는 연하늘색의 스키니진은 발목까지 꽉 죄고, 옆구리 선을 따라 금장 지퍼가 들어간 검은색 무지 브이넥 티는 언뜻 보기에 심플해 보였지만 캐주얼한 느낌이 강해서 나이 대에 맞는 개성이 있었다. 가현은 문득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바라보았다.
“음…… 이건 좀 아닌가?”
도트가 들어간 생 로랑(Saint Laurent)의 블랙 에이라인 원피스를 입고 메리제인 슈즈를 신은 자신은 나이에 비해 소녀 같은 느낌이 강했다. 영원히 나이 먹지 않을 지수의 모습과 똑같이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가현은 무작정 그 가게 안으로 들어가고야 말았다.
“어머. 언니, 어서 와요.”
자신의 또래 정도로 보이는 가게 여주인이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자 가현은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막상 옷을 사러 들어왔음에도 이상하게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온 것처럼 불편한 느낌을 지우지 못한 가현은 주저하며 실내를 둘러보기만 했다. 그러자 여주인이 그녀 가까이 다가오며 살갑게 말을 건넨다.
“뭐 특별히 찾는 거 있어요? 근데 언니 지금 입은 거 보니까 여성스러운 거 좋아하는가 보다. 비슷한 스타일로 보여 드려요?”
“아니요. 그게, 저…….”
여주인의 넉살 좋은 말주변에 가현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 3년간, 돌이켜 보면 늘 쇼핑은 백화점 내에서만 했던 가현이다. 한결같은 친절함으로 사모님 대접을 하며 두 발짝 정도 뒤에서 가현이 편하게 물건을 고르도록 도와주던 직원들과 적극적으로 물건을 권하는 지금의 여주인은 판이하게 다르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상황이 평범한 것이 아닐까.
“저기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이 보고 싶은데요.”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가현은 가게 밖에서부터 마음에 들었던 옷을 가리켰다. 그러자 여주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같은 디자인의 옷을 찾아와 그녀에게 건네는 것이다.
“언니 역시 보는 눈 있으시다? 이게 베이직해 보여도 요즘 인기가 좋아. 원래 심플 이즈 베스트잖아요. 좋은 냄새 나는 게 언니 방금 머리하고 왔죠? 지금 언니 단발이랑도 진짜 잘 어울릴 거 같은데 한번 입어 봐요. 티는 프리사이즈라 그냥 입으면 되고, 데님은…… 언니 정도면 24사이즈 입으면 될 거야.”
속사포처럼 내뱉는 말에 가현은 떠밀리듯이 피팅룸으로 향해 걸어갔다.
“아니, 근데…… 저 25사이즈 입어요.”
“이 바지가 사이즈가 좀 크게 나와서 그러니까 그냥 입어 봐요. 내 말이 맞을 테니까.”
자신이 원하던 옷을 손에 들고 있음에도 강매를 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어째서일까. 피팅룸으로 들어온 가현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천천히 옷을 갈아입었다. 오랜만에 입어 보는 바지는 다리를 감싸는 느낌이 썩 나쁘지 않았고 여주인의 말처럼 사이즈도 딱 맞았다.
“편하고 좋네.”
그리고 브이넥 티 역시도 편하기만 했다. 늘 화사하고 여성스러운 옷만 입었던 가현은 캐주얼하게 입고 나자 막혔던 숨이 단숨에 탁 하고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 기세로 피팅룸을 나와 거울 앞에 선 가현은 눈앞에 있는 존재가 무척이나 생경했지만 싫지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와, 너무 잘 어울려요. 딱 언니 옷이야. 내가 이런 말 잘 안 하는데, 언니 라인이 예뻐서 옷 핏이 살아요. 막 그냥 주고 싶을 정도야.”
가현은 그녀의 말이 영업을 위한 공치사인 걸 알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누군가의 아내도 아니고, 사모님도 아닌 자신을 각인시켜 주는 것 같아서 오히려 고마울 정도였다.
“근데 언니, 이 옷에 그 신발은 좀 아니다. 잠시만 있어 봐요.”
그렇게 말하고서 잠시 매장 한편으로 사라졌던 여주인은 곧 슬립온 한 켤레를 들고 가현에게로 다가왔다.
“이게 완전 핫한 상품이라 다른 사이즈 없이 이거 달랑 하나 남은 거예요. 언니한테 맞으면 내가 거저 줄게요. 내가 딴 사람이 아니라 언니라서 밑지는 장사 하는 거야. 정말.”
힐에서 내려온 가현은 주저하며 슬립온 안으로 발을 밀어 넣었다. 마치 유리 구두를 신는 신데렐라의 심정으로 그녀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슬립온을 신었다. 그러자 그녀의 발에 꼭 맞는 것이다.
“와아. 딱 맞아요!”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낸 것처럼 가현의 가슴이 뛰었다. 그렇게 다시 거울을 본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시혁의 옆을 지키던 여자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 이혼을 결심하기 전에는 한 남자의 곁에서 그의 뜻대로 사는 것이 맞는 일인 줄로만 알았다. 그것만이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다 가현은 문득 아직도 자신의 왼손 약지에 결혼반지가 껴져 있다는 걸 알아챘다.
“이걸로 여기 있는 옷들 백 벌은 사고도 남겠지.”
하지만 가현은 지금 거울에 비치는 자신이 이전보다 훨씬 행복해 보인다는 걸 알았다. 남들보다 잘 웃고 밝았던, 과거의 윤가현이 거울 속에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거 다 살게요. 그리고 제가 입고 왔던 옷이랑 신발은 버려 주세요.”
“네?”
가현의 말에 여주인은 잠시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정말 괜찮겠어요?”
“괜찮아요. 저한텐 이제 필요가 없거든요.”
그렇게 말한 가현은 자신의 카드를 꺼내 단숨에 계산을 끝내고는 가게 밖으로 나왔다. 어차피 가출까지 한 지금, 과거와 관련된 것들 중 일부를 버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후련해졌다. 구두에서 내려와 처음으로 신는 슬립온은 너무도 편했다. 포장되지 않은 흙길을 맨발로 걷는 것처럼 자신이 살아 있다는 느낌이 너무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 매일 이랬으면 좋겠다.”
그렇게 인파에 섞여 한참을 걷던 가현은 길 끝에 다다르자 어둠을 밝히는 불빛들 사이에 자신만 홀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조금, 외로움을 느낀 그녀는 아직 하루를 끝내기가 아쉬워서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부재중 전화는 0통. 어디서도 그녀를 찾지 않았다. 시혁 역시도 말이다.
가현은 괜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떨쳐 내며 목록에서 유나를 찾아내어 전화를 걸었다.
[가현이 네가 먼저 전화하고, 웬일이야.]
“유나야. 나 오늘 가출했어.”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보다 먼저, 자신의 가출 얘기부터 꺼냈다. 그러자 유나가 잠시 아무 말도 없기에 가현은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나, 오늘 완벽하게 삐뚤어지려고. 근데 3년이나 사모님으로 살았더니 어떻게 삐뚤어져야 할지 모르겠어. 네가 좀 알려 주면 안 될까?”
[너 지금 어디야?]
가현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는 자신이 어디쯤에 있는지 찬찬히 말해 주었다.
[거기 근처에 아무 커피숍이나 들어가서 잠시만 기다려. 데리러 갈게. 그리고 내가 오늘 밤에 진짜 화끈한 데 데려가 줄 테니까 각오 단단히 하고 있어.]
가현은 유나의 으름장에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겨우 해가 졌을 뿐이다. 시혁에게서 벗어난 오늘을 축하하는 건 지금부터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