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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술사 1권 1화
Prologue
“왜냐고? 그러게. 나도 모르겠네.”
병사의 갑주를 입은 검은 머리의 사내는 칼질을 멈추고 잠시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칼질이 평범한 것만 되었어도 소녀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이어지는 대답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도륙하던 것은 인간이었다.
그것도 소녀의 아버지였다.
“흐이익!”
“물어봐 놓고 대답도 듣기 전에 비명을 지르면 어떻게 해.”
“제, 제발 사, 살려…….”
검은 머리의 사내는 밝게 웃었다.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빙글 돌리자 몇 방울의 피가 벽으로 튀어 새빨간 점을 만들었다.
소녀는 감히 그의 눈을 바라볼 용기조차 없었다. 그저 그의 입가 오른쪽에 선명하게 찍혀 있는 점이 그의 표정에 따라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을 바라볼 뿐.
“그냥.”
대답은 무성의했다. 그로서는 최선을 다한 대답이었다는 점이 놀라운 점이었지만.
“그냥 생각했더니 이런 완벽한 그림이 떠올랐어. 이유는 없어.”
완벽하다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의 눈동자에는 환희가 맺혀 난도질된 시신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질척이는 피가 몇 겹의 붉은 선으로 흘러내리는 모양과 결국 그것이 바닥에 떨어져 둥글게 퍼져 나가는 모양까지.
“완벽해.”
그는 소녀의 손에 칼을 쥐여 주었다.
“너도.”
그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민가에서는 흔치 않은 엷은 금발의 소녀. 추레한 몰골이나 앙상하게 마른 몸으로 그녀의 가정 사정이 좋지 않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그 가느다란 팔과 손에 곧게 이어지는 날카로운 칼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몇 번이나 소녀가 그것을 놓치고 바닥에 떨어뜨렸지만, 그는 참을성 있게 그것을 다시 주워 들어 그녀의 손안에 단단히 쥐여 주었다.
칼에 묻어 있던 핏물과 살점 그리고 그 비릿한 향기까지 소녀의 손으로 전부 옮아 갔다.
“이제부터 그거 놓으면 죽인다?”
그가 소녀의 눈앞에 바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강제로 시선을 맞춰 그녀의 눈앞에서 웃어 보였다. 가지런한 하얀 이가 반짝이며 드러났고, 반달처럼 휘어진 눈은 붉은색으로 빛났다.
“진짜야.”
소녀의 손이 덜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칼을 쥔 손에서는 땀이 나기 시작해 꼭 그것이 미끄러져 떨어질 것만 같았다.
“흐, 흐흐흑”
정신을 놓으면 끝이다. 몸이 쓰러질 것이고 이 칼을 떨어뜨리게 된다. 그러면,
죽는다.
소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너덜너덜해진 아버지의 시체를 바라보는 것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베어 물 듯 꽉 깨물어 피가 나는 입술이 더 큰 아픔을 주었다. 그것이 그녀의 정신을 가까스로 잡아 주었다.
“옳지.”
그는 소녀를 격려했다.
“다녀올 테니까, 잠깐 그대로 있어.”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그가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그저 그가 뭐라 하든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없으니까.
“아 참.”
문을 나서던 그는 깜빡 잊을 뻔했다는 듯 뒤돌아 한 가지를 더 당부했다. 그는 턱 끝으로 아버지의 시신을 가리키며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저거 건드리지 마라. 지금 이대로 완벽하니까.”
무서운 일을 하면서도 그저 장난기뿐이었던 그의 얼굴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소녀는 긴장으로 아무런 반응을 보일 수 없었지만, 오히려 그는 그것에서 대답을 읽어 낸 모양이었다.
“금방 다시 만날 거야. 우리는.”
공포에 짓눌린 소녀는 그가 나간 후에도 한참이나 그대로 서 있었다.
시선 끝에 붉고 붉은 아버지의 발이 보였다. 그 이상은 시선을 올릴 용기조차 낼 수 없었다. 장사꾼인 아버지의 발. 무거운 솜사탕 기계를 끌고 그저 묵묵히 걸었던 그 발. 개구리의 발처럼 퉁퉁 부어서 벌어지고, 보기 흉한 혹까지 달린 발.
피가 많이 나서 아플 텐데, 고통스러울 텐데도 작은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그 붉은 발을 바라보고 있으니 눈물이 흘렀다. 핏물과 같은 모양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이 그녀의 동그란 얼굴을 따라 턱으로 그리고 곧 손으로, 소녀가 쥐고 있는 날카로운 날붙이의 표면으로 떨어졌다.
피와 눈물은 쉽게 섞여 들어갔다.
∴
잔혹한 잔상은 한순간에 사그라들었다.
간지러워.
참을 수 없이 귓가가 간지러웠다.
부드러운 손길이 귓가에 닿아 소녀의 금발을 사락사락 귀 뒤로 넘겨 주었고, 곧 따듯한 입김이 가까이 닿아 왔다.
지나치게 가까운 낯선 숨소리에 소녀는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에 눈이 번쩍 뜨였고. 곧 손길의 온도와 다른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좋아. 그대로 순조롭게 앞으로 쓰러지도록.”
“으에……?”
순식간에 그녀가 처한 모든 현실이 자각되었다. 이곳은 에모티오 신전. 지금은 경건한 기도시간이며, 감정술사인 그녀는 제법 앞쪽에 서서 기도를 드리는 척 훌륭하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직도 잠기운을 간직한 몸은 둔하기 짝이 없었다. 몸이 점점 앞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인식해도 좀처럼 바로 세울 수가 없었다.
“흐악?!”
수습 감정술사 루나의 비명은 모두의 시선을 끄는 데 성공했다. 그것만으로도 아주 부끄러운데, 속절없이 앞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한 몸은 곧 무서운 대사제의 등에 그대로 처박히기까지 했다.
대사제의 표정은 경악과 험악함으로 일그러졌고, 루나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였다. 뒤늦게 기도를 드리는 척 경건한 표정을 가장했지만, 머릿속은 아직도 창피함에 어쩔 줄을 몰랐다.
루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바로 곁에 있는 프레슐을 원망의 눈길로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보랏빛 눈동자는 단 한순간도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기도 시간이 끝나자 루나는 프레슐의 뒤를 조르르 따라붙으며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깨워 주시지 않을 거라면, 잡아 주기라도 해 주셔야죠.”
“내가 왜?”
“그야, 으음……. 선배니까요?”
“선배는 자명종도 구명줄도 아니다.”
“너무해.”
“너무하긴.”
“대체 저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부끄러운 마음에 나오는 괜한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루나의 불만은 멈출 줄을 몰랐다. 프레슐은 가슴께밖에 오지 않는 소녀의 머리카락을 느릿한 손길로 헤집었다. 바로 뒤에서 종종걸음을 칠 때마다 찰랑찰랑 흔들리는 긴 금발이 햇살에 닿아 반짝인다. 그 모습은 어쩐지…….
“옥수수수염.”
루나는 길게 늘어진 자신의 머리카락을 집어 들어 한참을 들여다보고 나서야 그의 말을 이해했다.
“제, 제 머리카락이 옥수수수염이면, 선배는 뭐예요?!”
따져 묻는 소리에 프레슐은 빙글 몸을 돌렸다. 구김 하나 없는 새하얀 로브가 그의 움직임을 따라 펄럭였다. 루나와 같은 색을 가진 그의 금발도 잠시 바람의 모양을 따라 흐트러졌다.
같은 금발에 같은 보라색 눈동자. 똑같은 색을 가진 두 사람이지만, 그 느낌은 매우 달랐다.
“기어오르는 것은 거기까지다. 수염.”
뻣뻣하기 짝이 없는 프레슐.
“수, 수염이라뇨! 여자에게 수염이라뇨!”
상냥하고 발랄한 루나.
“그럼 옥수수가 나았나?”
“둘 다 싫어요!”
“마침 적당했는데.”
그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루나는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의 커다란 등이나 어깨는 예전의 그녀에게는 큰 위로가 되어 주었다. 물론 위안거리가 필요하던 시절을 떠올리는 것은 끔찍했지만, 이렇게 잔뜩 괴롭힘을 당하고 나면 조금은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그땐 소중하게 여겨 주셨는데.
어느새 두 사람은 그녀의 방 앞에 도착했고, 루나는 형식적인 인사를 건넨 후 문손잡이를 돌렸다. 여느 때라면 적당히 손을 흔드는 것으로 그녀의 인사에 답했을 프레슐이 오늘은 어쩐 일인지 그녀의 정수리 위로 커다란 손을 올렸다.
그녀의 머리를 압박하듯 살짝 누르는 손길에 루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건 아까 존 것에 대한 벌칙일까? 아니면 또 그저 수염이라고 놀리고 싶은 걸까.
“수염.”
후자였다. 루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수염이 아니…….”
“괜찮나?”
장난스러운 호칭으로 부른 것에 비해 그의 얼굴이 사뭇 진지했다. 괜찮냐고? 무엇이? 수염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일까? 루나는 의아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꿈.”
그는 짧게 대답했고, 루나는 저도 모르게 “아…….” 소리를 내었다. 분명히 좋지 않은 꿈을 꾸었다. 잔상만 겨우 남아 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기억은 아직도 건재함을 보였다. 사소한 핏자국이나 심지어 그 향기까지 마치 그날 그대로 서 있던 것처럼 선명했다.
“……이젠 괜찮아요.”
그리 말하면서도 루나는 조금 더 밝은 목소리로 말해야 했다고 후회했다. 이렇게 우울한 목소리로 괜찮다고 말하는데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그럼 되었다.”
여기에 있었다. 여기에 있었어! 그런 무심한 사람이!
루나의 표정이 다시 샐쭉해졌다.
“왜 그러지?”
“아니에요.”
“루나.”
비로소 그는 그녀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 주었다. 나지막한 목소리, 그리고 정면으로 맞춰 오는 시선에 루나는 심통 난 얼굴을 얼른 지워 내야 했다.
“위로가 필요한가?”
‘솔직하게 말해라.’라는 말이 생략되었지만, 그의 말투와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전달되었다.
“원한다면 그리 해 주겠다.”
“으응, 아니에요.”
루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위로라면 이미 여러 번에 걸쳐 충분하게 받아 왔다. 이제 그에게 의지하여 감정을 추스르는 것은 그만두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의 손은 그녀의 머릿결을 지나 작은 등의 굴곡을 따라 내려갔다. 몇 번 토닥이는 손길에 힘이 들어가고, 루나의 몸은 곧 앞으로 기울어져 그의 로브 안에 완전히 파묻히게 되었다.
“그런 건 가르친 기억이 없는데.”
“에?”
“거짓말로 애쓰는 모습이 애처롭게 보이기라도 할 줄 알았나?”
퉁명한 말과 달리 그녀의 몸을 죄어 오는 팔과 품은 무척이나 따듯했고, 뺨에 닿은 그의 옷자락은 부드러웠다.
“죄송해요.”
“알면 되었다.”
루나는 눈을 감고 완전히 그에게 기대었다. 그녀를 안심시키는 익숙한 체향.
“꿈, 어떻게 알았어요?”
루나는 잠꼬대를 한 것도 아니었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니 표정을 보인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그녀의 옆에 서 있었고, 쓰러지든, 창피해하든 그녀를 내버려 뒀을 뿐이다.
“저주지.”
“저주?”
그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모든 것을 알았다.
사소한 손가락의 움직임이 무엇을 뜻하는지, 눈동자의 방향과 무심결에 움직이는 입술의 모양이 어떤 감정을 담아내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아도 눈에 들어오고, 이해하게 되어 버린다.
“그래. 저주.”
전통, 굴레, 습관. 그 어떤 것도 어울리지 않았다. 이건 그저 저주일 뿐이었다. 완벽한 이해의 끝에 떠오르는 것은 제 손 안에서 그 감정과 반응까지도 전부 통제하고 싶다는 추악한 소유욕이었다.
“뭐, 어차피 벗어날 수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지만.”
프레슐은 그날을 아직도 기억했다.
죽음의 바로 옆에서 신음하던 여자아이를 처음 마주친 순간.
저주는 바로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Chapter 1-1 (1)
갑자기 가느다란 비가 내렸다. 회색 원피스를 입은 작은 소녀는 주머니에 얼른 손을 넣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그녀를 바라보지 않고 있어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소녀의 엷은 금발에 보석 같은 빗방울이 닿아 구슬 장식처럼 예쁘게 송골송골 맺혔다. 보랏빛 눈동자는 물기가 닿은 속눈썹 덕분에 더욱 깊고 깊어 보였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맺혀 있던 빗방울은 사르르 동그란 뺨을 타고 내렸다.
비는 거세졌다.
눈치가 조금 보이기는 했지만, 어느 집의 좁은 처마에 잠시 몸을 피했다. 비는 멈추지 않았다.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팠다. 그리고 그때 몇 명의 무장한 군사들이 그녀의 앞을 지나갔다. 마을에 전쟁이라는 말이 돌기 시작하면서, 국경 지역에서 가까운 그녀의 마을에는 이렇게 가끔 군사들의 무리가 나타나곤 했다.
소녀는 칼을 차고 있는 그들을 두려워했고, 결국 비를 맞으며 도망치듯 달리기로 했다.
물이 고여 있는 길은 미끄러웠다. 몇 번인가 넘어질 뻔한 위기를 넘겨, 비로소 집에 도착했다. 소녀와 아버지가 함께 사는 곳이었다.
Prologue
“왜냐고? 그러게. 나도 모르겠네.”
병사의 갑주를 입은 검은 머리의 사내는 칼질을 멈추고 잠시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칼질이 평범한 것만 되었어도 소녀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이어지는 대답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도륙하던 것은 인간이었다.
그것도 소녀의 아버지였다.
“흐이익!”
“물어봐 놓고 대답도 듣기 전에 비명을 지르면 어떻게 해.”
“제, 제발 사, 살려…….”
검은 머리의 사내는 밝게 웃었다.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빙글 돌리자 몇 방울의 피가 벽으로 튀어 새빨간 점을 만들었다.
소녀는 감히 그의 눈을 바라볼 용기조차 없었다. 그저 그의 입가 오른쪽에 선명하게 찍혀 있는 점이 그의 표정에 따라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을 바라볼 뿐.
“그냥.”
대답은 무성의했다. 그로서는 최선을 다한 대답이었다는 점이 놀라운 점이었지만.
“그냥 생각했더니 이런 완벽한 그림이 떠올랐어. 이유는 없어.”
완벽하다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의 눈동자에는 환희가 맺혀 난도질된 시신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질척이는 피가 몇 겹의 붉은 선으로 흘러내리는 모양과 결국 그것이 바닥에 떨어져 둥글게 퍼져 나가는 모양까지.
“완벽해.”
그는 소녀의 손에 칼을 쥐여 주었다.
“너도.”
그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민가에서는 흔치 않은 엷은 금발의 소녀. 추레한 몰골이나 앙상하게 마른 몸으로 그녀의 가정 사정이 좋지 않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그 가느다란 팔과 손에 곧게 이어지는 날카로운 칼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몇 번이나 소녀가 그것을 놓치고 바닥에 떨어뜨렸지만, 그는 참을성 있게 그것을 다시 주워 들어 그녀의 손안에 단단히 쥐여 주었다.
칼에 묻어 있던 핏물과 살점 그리고 그 비릿한 향기까지 소녀의 손으로 전부 옮아 갔다.
“이제부터 그거 놓으면 죽인다?”
그가 소녀의 눈앞에 바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강제로 시선을 맞춰 그녀의 눈앞에서 웃어 보였다. 가지런한 하얀 이가 반짝이며 드러났고, 반달처럼 휘어진 눈은 붉은색으로 빛났다.
“진짜야.”
소녀의 손이 덜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칼을 쥔 손에서는 땀이 나기 시작해 꼭 그것이 미끄러져 떨어질 것만 같았다.
“흐, 흐흐흑”
정신을 놓으면 끝이다. 몸이 쓰러질 것이고 이 칼을 떨어뜨리게 된다. 그러면,
죽는다.
소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너덜너덜해진 아버지의 시체를 바라보는 것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베어 물 듯 꽉 깨물어 피가 나는 입술이 더 큰 아픔을 주었다. 그것이 그녀의 정신을 가까스로 잡아 주었다.
“옳지.”
그는 소녀를 격려했다.
“다녀올 테니까, 잠깐 그대로 있어.”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그가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그저 그가 뭐라 하든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없으니까.
“아 참.”
문을 나서던 그는 깜빡 잊을 뻔했다는 듯 뒤돌아 한 가지를 더 당부했다. 그는 턱 끝으로 아버지의 시신을 가리키며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저거 건드리지 마라. 지금 이대로 완벽하니까.”
무서운 일을 하면서도 그저 장난기뿐이었던 그의 얼굴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소녀는 긴장으로 아무런 반응을 보일 수 없었지만, 오히려 그는 그것에서 대답을 읽어 낸 모양이었다.
“금방 다시 만날 거야. 우리는.”
공포에 짓눌린 소녀는 그가 나간 후에도 한참이나 그대로 서 있었다.
시선 끝에 붉고 붉은 아버지의 발이 보였다. 그 이상은 시선을 올릴 용기조차 낼 수 없었다. 장사꾼인 아버지의 발. 무거운 솜사탕 기계를 끌고 그저 묵묵히 걸었던 그 발. 개구리의 발처럼 퉁퉁 부어서 벌어지고, 보기 흉한 혹까지 달린 발.
피가 많이 나서 아플 텐데, 고통스러울 텐데도 작은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그 붉은 발을 바라보고 있으니 눈물이 흘렀다. 핏물과 같은 모양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이 그녀의 동그란 얼굴을 따라 턱으로 그리고 곧 손으로, 소녀가 쥐고 있는 날카로운 날붙이의 표면으로 떨어졌다.
피와 눈물은 쉽게 섞여 들어갔다.
∴
잔혹한 잔상은 한순간에 사그라들었다.
간지러워.
참을 수 없이 귓가가 간지러웠다.
부드러운 손길이 귓가에 닿아 소녀의 금발을 사락사락 귀 뒤로 넘겨 주었고, 곧 따듯한 입김이 가까이 닿아 왔다.
지나치게 가까운 낯선 숨소리에 소녀는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에 눈이 번쩍 뜨였고. 곧 손길의 온도와 다른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좋아. 그대로 순조롭게 앞으로 쓰러지도록.”
“으에……?”
순식간에 그녀가 처한 모든 현실이 자각되었다. 이곳은 에모티오 신전. 지금은 경건한 기도시간이며, 감정술사인 그녀는 제법 앞쪽에 서서 기도를 드리는 척 훌륭하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직도 잠기운을 간직한 몸은 둔하기 짝이 없었다. 몸이 점점 앞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인식해도 좀처럼 바로 세울 수가 없었다.
“흐악?!”
수습 감정술사 루나의 비명은 모두의 시선을 끄는 데 성공했다. 그것만으로도 아주 부끄러운데, 속절없이 앞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한 몸은 곧 무서운 대사제의 등에 그대로 처박히기까지 했다.
대사제의 표정은 경악과 험악함으로 일그러졌고, 루나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였다. 뒤늦게 기도를 드리는 척 경건한 표정을 가장했지만, 머릿속은 아직도 창피함에 어쩔 줄을 몰랐다.
루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바로 곁에 있는 프레슐을 원망의 눈길로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보랏빛 눈동자는 단 한순간도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기도 시간이 끝나자 루나는 프레슐의 뒤를 조르르 따라붙으며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깨워 주시지 않을 거라면, 잡아 주기라도 해 주셔야죠.”
“내가 왜?”
“그야, 으음……. 선배니까요?”
“선배는 자명종도 구명줄도 아니다.”
“너무해.”
“너무하긴.”
“대체 저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부끄러운 마음에 나오는 괜한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루나의 불만은 멈출 줄을 몰랐다. 프레슐은 가슴께밖에 오지 않는 소녀의 머리카락을 느릿한 손길로 헤집었다. 바로 뒤에서 종종걸음을 칠 때마다 찰랑찰랑 흔들리는 긴 금발이 햇살에 닿아 반짝인다. 그 모습은 어쩐지…….
“옥수수수염.”
루나는 길게 늘어진 자신의 머리카락을 집어 들어 한참을 들여다보고 나서야 그의 말을 이해했다.
“제, 제 머리카락이 옥수수수염이면, 선배는 뭐예요?!”
따져 묻는 소리에 프레슐은 빙글 몸을 돌렸다. 구김 하나 없는 새하얀 로브가 그의 움직임을 따라 펄럭였다. 루나와 같은 색을 가진 그의 금발도 잠시 바람의 모양을 따라 흐트러졌다.
같은 금발에 같은 보라색 눈동자. 똑같은 색을 가진 두 사람이지만, 그 느낌은 매우 달랐다.
“기어오르는 것은 거기까지다. 수염.”
뻣뻣하기 짝이 없는 프레슐.
“수, 수염이라뇨! 여자에게 수염이라뇨!”
상냥하고 발랄한 루나.
“그럼 옥수수가 나았나?”
“둘 다 싫어요!”
“마침 적당했는데.”
그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루나는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의 커다란 등이나 어깨는 예전의 그녀에게는 큰 위로가 되어 주었다. 물론 위안거리가 필요하던 시절을 떠올리는 것은 끔찍했지만, 이렇게 잔뜩 괴롭힘을 당하고 나면 조금은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그땐 소중하게 여겨 주셨는데.
어느새 두 사람은 그녀의 방 앞에 도착했고, 루나는 형식적인 인사를 건넨 후 문손잡이를 돌렸다. 여느 때라면 적당히 손을 흔드는 것으로 그녀의 인사에 답했을 프레슐이 오늘은 어쩐 일인지 그녀의 정수리 위로 커다란 손을 올렸다.
그녀의 머리를 압박하듯 살짝 누르는 손길에 루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건 아까 존 것에 대한 벌칙일까? 아니면 또 그저 수염이라고 놀리고 싶은 걸까.
“수염.”
후자였다. 루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수염이 아니…….”
“괜찮나?”
장난스러운 호칭으로 부른 것에 비해 그의 얼굴이 사뭇 진지했다. 괜찮냐고? 무엇이? 수염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일까? 루나는 의아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꿈.”
그는 짧게 대답했고, 루나는 저도 모르게 “아…….” 소리를 내었다. 분명히 좋지 않은 꿈을 꾸었다. 잔상만 겨우 남아 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기억은 아직도 건재함을 보였다. 사소한 핏자국이나 심지어 그 향기까지 마치 그날 그대로 서 있던 것처럼 선명했다.
“……이젠 괜찮아요.”
그리 말하면서도 루나는 조금 더 밝은 목소리로 말해야 했다고 후회했다. 이렇게 우울한 목소리로 괜찮다고 말하는데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그럼 되었다.”
여기에 있었다. 여기에 있었어! 그런 무심한 사람이!
루나의 표정이 다시 샐쭉해졌다.
“왜 그러지?”
“아니에요.”
“루나.”
비로소 그는 그녀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 주었다. 나지막한 목소리, 그리고 정면으로 맞춰 오는 시선에 루나는 심통 난 얼굴을 얼른 지워 내야 했다.
“위로가 필요한가?”
‘솔직하게 말해라.’라는 말이 생략되었지만, 그의 말투와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전달되었다.
“원한다면 그리 해 주겠다.”
“으응, 아니에요.”
루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위로라면 이미 여러 번에 걸쳐 충분하게 받아 왔다. 이제 그에게 의지하여 감정을 추스르는 것은 그만두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의 손은 그녀의 머릿결을 지나 작은 등의 굴곡을 따라 내려갔다. 몇 번 토닥이는 손길에 힘이 들어가고, 루나의 몸은 곧 앞으로 기울어져 그의 로브 안에 완전히 파묻히게 되었다.
“그런 건 가르친 기억이 없는데.”
“에?”
“거짓말로 애쓰는 모습이 애처롭게 보이기라도 할 줄 알았나?”
퉁명한 말과 달리 그녀의 몸을 죄어 오는 팔과 품은 무척이나 따듯했고, 뺨에 닿은 그의 옷자락은 부드러웠다.
“죄송해요.”
“알면 되었다.”
루나는 눈을 감고 완전히 그에게 기대었다. 그녀를 안심시키는 익숙한 체향.
“꿈, 어떻게 알았어요?”
루나는 잠꼬대를 한 것도 아니었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니 표정을 보인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그녀의 옆에 서 있었고, 쓰러지든, 창피해하든 그녀를 내버려 뒀을 뿐이다.
“저주지.”
“저주?”
그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모든 것을 알았다.
사소한 손가락의 움직임이 무엇을 뜻하는지, 눈동자의 방향과 무심결에 움직이는 입술의 모양이 어떤 감정을 담아내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아도 눈에 들어오고, 이해하게 되어 버린다.
“그래. 저주.”
전통, 굴레, 습관. 그 어떤 것도 어울리지 않았다. 이건 그저 저주일 뿐이었다. 완벽한 이해의 끝에 떠오르는 것은 제 손 안에서 그 감정과 반응까지도 전부 통제하고 싶다는 추악한 소유욕이었다.
“뭐, 어차피 벗어날 수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지만.”
프레슐은 그날을 아직도 기억했다.
죽음의 바로 옆에서 신음하던 여자아이를 처음 마주친 순간.
저주는 바로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Chapter 1-1 (1)
갑자기 가느다란 비가 내렸다. 회색 원피스를 입은 작은 소녀는 주머니에 얼른 손을 넣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그녀를 바라보지 않고 있어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소녀의 엷은 금발에 보석 같은 빗방울이 닿아 구슬 장식처럼 예쁘게 송골송골 맺혔다. 보랏빛 눈동자는 물기가 닿은 속눈썹 덕분에 더욱 깊고 깊어 보였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맺혀 있던 빗방울은 사르르 동그란 뺨을 타고 내렸다.
비는 거세졌다.
눈치가 조금 보이기는 했지만, 어느 집의 좁은 처마에 잠시 몸을 피했다. 비는 멈추지 않았다.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팠다. 그리고 그때 몇 명의 무장한 군사들이 그녀의 앞을 지나갔다. 마을에 전쟁이라는 말이 돌기 시작하면서, 국경 지역에서 가까운 그녀의 마을에는 이렇게 가끔 군사들의 무리가 나타나곤 했다.
소녀는 칼을 차고 있는 그들을 두려워했고, 결국 비를 맞으며 도망치듯 달리기로 했다.
물이 고여 있는 길은 미끄러웠다. 몇 번인가 넘어질 뻔한 위기를 넘겨, 비로소 집에 도착했다. 소녀와 아버지가 함께 사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