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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술사 1권 7화
Chapter 2-1 (2)
어쨌든 일 처리 하나는 확실한 그녀는 루나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정확히 골라 왔으며, 프레슐은 그녀의 안목에 감탄했다.
톤다운 된 핑크색의 스커트와 하얀색의 블라우스는 소녀를 더욱 생기 있어 보이도록 했으며, 레이스 디테일로 장식된 리본으로 머리를 꾸미고 나니,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아가씨처럼 보였다. 다만 구부정한 등이 조금 거슬릴 뿐이었다.
코가 둥글어 무척이나 귀여운 검정 메리 제인 슈즈를 신고 나서 루나의 준비는 완료되었다.
“귀여워졌어요. 아가씨.”
그녀의 머릿결을 마지막까지 정돈하며 제인은 보람차게 웃었다. 루나는 용기를 내서 거울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스커트의 끝자락에 달린 프릴이 살랑이며 흔들렸다. 이런 사치스러운 장식이 달린 옷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루나는 설탕 가겟집 딸이 입었던 원피스가 가장 예쁜 옷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옷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마음에 드세요?”
제인이 물었다. 루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부끄러움에 그리고 황송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
루나가 머무는 방 가까이에 마차가 준비되었다. 될 수 있는 대로 신전의 홀은 다시 보여 주고 싶지 않다는 프레슐의 요청을 받아들여 마부는 조금 돌아가더라도 신전의 뒷문을 이용하여 마차를 몰기로 했다.
루나는 조심스럽게 문밖으로 첫발을 디뎠다. 그런 일을 당하고 난 이후 첫 외출이었다.
실내에서는 느낄 수 없던 바람이 살랑 불어왔다. 평소보다 바람이 센 걸까? 아니면 루나의 몸이 그저 예민해진 걸까? 텅 비어 있던 손가락 사이를 가장 먼저 불어온 둥근 바람이 차지하고 단단히 매달렸다.
루나는 마차의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섰다. 두 마리의 말이 얌전하게 고개를 까닥이며 마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고, 예쁜 나뭇결이 마차의 외부를 따듯하게 감싸 안는 것처럼 보였다.
루나는 마차에 대해 두려운 기억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빨리 들어가! 이 마녀!’
치안대원들은 그녀의 몸을 던지다시피 하여 마차 안에 쑤셔 넣었다. 안에 놓여 있는 무엇인가에 머리를 부딪쳐 신음을 내어도 누구 하나 그녀의 아픔을 걱정해 주지 않았다.
쾅!
부서질 듯 거칠게 문이 닫혔다. 그 문을 따라 들어오던 빛도 함께 자리를 비웠다. 예고 없이 찾아온 어둠에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허공을 응시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그녀가 가진 마차에 대한 유일한 기억.
“루나?”
루나는 프레슐의 목소리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 눈앞에는 다시 마차가 있었다. 이번 마차에는 창이 달려 있었다. 빛의 은총이 마차의 안까지 닿아 있을 뿐 아니라, 그 안에 앉아 손을 내밀고 있는 프레슐이 있었다.
그렇구나. 다른 마차구나.
그녀가 마차에 타기를 바라는 사람이 등 뒤에 있는 것과 마차 안에서 다정히 손을 내밀어 주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루나.”
그는 치안대의 대원들처럼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깊은 상념에 빠졌을 때마다 끊임없이 이름을 불러 주고 현실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주었다.
이 마차는 무서운 곳에 가지 않을 거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의 마지막 희망이 피어났다. 잔뜩 굽어 있던 등이 저절로 예쁘게 곧게 펴졌다. 바람이 걸린 손가락을 프레슐의 손 위로 조심스럽게 올려 두었다. 곧 그가 강하게 손을 잡아 그녀를 마차 위로 당겨 왔다.
이 마차 안에서는 무엇이든 있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손에 머물렀던 바람도, 항상 존재하는 햇살도 그리고 그림자도 있었다.
마차의 문이 닫히고 매끄럽게 달려 나갔다. 루나는 창밖에 보이는 제인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제인은 허리를 깊이 숙여 그녀를 정중하게 배웅했다.
잘 정비된 수도의 길은 마차가 심하게 흔들리지 않도록 해 주었고, 마차의 훌륭한 바퀴는 편안한 승차감을 선물했다. 당연한 마차의 기능을 다하고 있을 뿐인데도 루나는 지난번의 덜컹거리는 마차를 떠올리며 이 편안함에 감사했고 안도했다.
루나는 프레슐을 바라보았다. 그녀와 비슷한 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을 가졌지만, 그는 어딘가 고귀한 사람 같아 보였다. 그와 루나가 무척 닮았다고 제인이 말해 주었지만, 루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어딘가 나른한 듯한 표정은 항상 여유가 넘쳤고, 툭툭 던지는 말은 그저 따스했다.
높은 성벽을 차례로 지날 때마다 마차는 멈추었다. 그녀를 잡아들였던 병사들과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몇 번이나 스쳐 지나갔다. 그때마다 루나는 옷자락과 바람을 꼭 쥐었다.
세 번째의 성벽을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마차는 완전히 멈추었다. 새들이 물 위에서 노닐고 있는 호수가 보이고, 작은 동물들이 풀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있었다. 루나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새겨졌다.
마차에서 먼저 내린 프레슐이 루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루나의 손이 그의 위로 올라가자 프레슐은 그녀에게 물었다.
“너와 나는 무엇이라 했지?”
루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감정술사라고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물론 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좋아. 정답.”
프레슐은 첫 번째 가르침을 잘 기억하는 착한 후배를 마차 밖으로 이끌어 주었다.
“상으로 네게 소개하지.”
루나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곡선미를 뽐내는 백색의 신전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감정술사의 집. 황궁 신전.”
그들을 내린 마차는 다그닥 소리를 내며, 신전 앞을 빠른 속도로 빠져나갔다. 임무를 마친 말이 기분이 좋았는지 히이잉 소리를 내며 노래하자, 호수에 있던 몇 마리의 소심한 새들이 퍼드덕거리며 하늘 위로 높이 날아올랐다.
“너의 집이 될 곳이야.”
Chapter 2-2 (1)
프레슐이 루나를 데리고 돌아온다는 소식은 이미 황궁 신전에도 전해졌다. 블랑은 한발 앞서 그녀가 사용할 방을 야심차게 준비해 두었고, 오늘 드디어 그의 노력을 선보이게 되었다.
걸음이 느린 루나가 천천히 그의 뒤를 따라오는 동안, 프레슐은 루나에게 배정된 방을 얼른 열어 내부를 확인했다. 블랑이 준비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불안하긴 했지만, 이것은 상상 이상이었다.
문 앞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블랑을 바라보며, 프레슐은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이건 다 뭡니까?”
“히히, 마음에 들어?”
“수습 감정술사에게 이런 호사스러운 방이 가당키나 합니까!”
프레슐의 손끝이 방 안의 구석구석을 지적했다.
“저 나풀거리는 것이 달린 거대한 침대는 뭡니까? 게다가 저 장식이 많은 가구는 뭐고요? 어째서 저렇게 커다란 옷장이 있습니까? 코끼리도 넣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근본적인 문제도 있었다.
“방이 지나치게 넓습니다. 응접세트까지는 필요 없지 않습니까.”
프레슐은 자신이 처음 신전에 들어왔을 때 사용했던 검소한 방을 떠올리며 마음껏 블랑을 질책했다.
“하지만 루나는 여자아이니까.”
“평범한 수습으로는 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까?”
“받아 둬. 루베르 님이 결정하신 뜻이야.”
블랑이 조심스럽게 말하며 프레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감정술사 중의 최고령이자, 수장의 자리에 앉아 있는 그의 결정이라면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루베르 님이 어째서?”
“사실 신전에서 사죄의 뜻으로 루나에게 이것저것 보내온 모양이야. 제 발이 저렸던 거지. 황제의 발바닥을 핥느라 감정술사를 알아보지도 못한 것이.”
“그들이 보낸 물건이라면 더더욱…….”
프레슐이 발끈하여 대답하자, 블랑은 그의 목덜미를 가볍게 손으로 쓸어 내며 시선을 맞추었다.
“진정해.”
“선배…….”
“그래서 루베르 님께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머리핀 하나까지 완벽하게 갖추고 있으니 자네들의 성의는 필요 없다.’라고 선언해 버리셨거든. 뭐 결국 그 선언대로 뒤늦게 완벽을 기해 방을 준비하느라 고생한 건 나였지만.”
“완벽을 기해 준비한다는 것이 이런 의미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어쨌든 상황을 알아 버린 이상 더는 블랑을 탓할 수만은 없었다. 프레슐은 루베르가 그들의 호의를 받지 않은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일에 대해 가벼운 사죄 정도로는 넘어가지 않겠다는 표현이었다. 그 든든한 마음이 감사했다.
곧 루나가 프레슐의 뒤에 도착하여 블랑을 발견하고는 살짝 몸을 숨겼다. 너무나도 낯선 장소에서는 그나마 조금 더 얼굴이 익은 프레슐이 마음의 의지가 되는 모양이었다.
“헤에…….”
그녀의 꾀죄죄한 모습을 기억하는 블랑은 완전히 바뀌어 버린 그녀의 모습에 탄성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애썼구나, 프레슐.”
“별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 감정술사라는 족속은 후배라면 죽고 못 사는 존재들이니까.”
블랑은 프레슐 뒤에 숨어 있는 루나를 향해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추었다. 루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안녕, 반가워. 나는 프레슐의 선배인 블랑.”
루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으나 여전히 시선을 맞추지는 못했다. 블랑은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프레슐이 혹시라도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하면 언제든지 나한테 이야기하렴. 물론 내가 엄격하게 키워서 그럴 리는 없지만.”
“선배!”
“뭐, 내가 잘못 가르친 부분도 있긴 해. 후배의 침대에 몰래 들어간다거나. 그건 좀 걱정이네. 이 뻣뻣한 녀석의 후배가 여자아이가 될 줄은 몰랐거든.”
“그러니까, 그런 부분은 절대 배우지 않습니다.”
“그렇게 항상 부정하는 것치고는, 내 말대로 훌륭하게 ‘후배 걱정’을 하고 있잖아?”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누구나 다 걱정을 하는 법입니다.”
하지만 만난 지 겨우 며칠밖에 되지 않은 생판 남을 그렇게까지 열렬하게 돌보지는 않을 것이다. 블랑은 더 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프레슐은 뻣뻣하게 버티기를 좋아하는 부끄럼쟁이니까, 괜한 점을 지적했다가는 머쓱한 마음에 루나로부터 몇 걸음 더 멀어지려 할 것이다. 이대로 두면 자연스럽게 점점 더 후배를 걱정하고, 참견하며 훌륭한 감정술사를 키워 낼 것이다.
“루나, 네 방을 보여 줄게. 아마 저 뻣뻣한 너의 선배는 지금부터 보고하러 가야 할 것 같으니까. 오빠랑 같이 있을까?”
“누가, 누가 오빠입니까.”
“하지만 나는 선배가 아니니까.”
“참 뻔뻔하기도 하십니다. 35살이나 되어서 이렇게 어린아이한테 그런 말이 듣고 싶으세요?”
“응. 미치도록 듣고 싶네.”
“안 됩니다.”
“왜!”
“규칙입니다. 블랑 님이라고 제대로 부르는 것이 옳습니다.”
감정술사의 규칙. 바로 윗대는 ‘선배’라고 부르고 모든 가르침에 순응할 것. 그리고 그보다 위의 술사님들에게는 ‘님’으로 호칭하며 존경하는 마음을 보여야 했다.
“어휴, 잘난 선배님 나셨어요. 그렇지? 루나?”
“그리고 루베르 님께 가는 것은 루나도 함께 가겠습니다. 어차피 인사도 드려야 하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선배에게 맡기는 것이 불안해졌습니다.”
그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후, 빠른 걸음으로 루베르의 집무실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루나도 그를 따라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새로 산 신발이 발을 괴롭히는 탓에 무척이나 힘겨웠지만, 지금은 어쨌든 그의 등을 필사적으로 따라갔다.
똑똑.
“들어오게”
허락이 떨어지자 프레슐은 문을 열고 들어가 공손하게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뒤늦게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온 루나는 엉거주춤 그와 같은 모양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가 누구인지 이 인사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도 전혀 모른 채.
“보고가 늦었습니다. 루베르 님.”
“괜찮다. 네 덕에 보석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지. 잘했다 프레슐.”
푹신한 의자에 몸을 편안히 기댄 노인은 빙긋 웃었다. 그의 표정을 따라 주름이 함께 움직여 더욱 즐거운 얼굴이 되었다.
“가까이 오너라. 아가.”
루베르는 루나에게 손짓했다. 루나는 고개를 돌려 프레슐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용기를 내어 루베르의 오른편에 가까이 다가갔다.
“예쁜 아이로구나.”
루베르는 의자에 몸을 완전히 기댄 채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루나도 그를 따라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되었다. 마차에서 내릴 때 보았던 예쁜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감정술사는 에모티오 여신께서 이 세상에 내려 보내는 따듯한 손길이라고도 하고, 그녀의 아이들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지.”
그는 잠시 말을 쉬었다. 늙은 폐와 공기가 닿는 색색 소리가 실내를 잠시 울렸다.
“나는 그녀의 아이들이라는 말이 참 기쁘네. 그리 생각하면 우리는 모두 다 가족이라는 뜻이 되거든.”
루베르는 의자의 손잡이 부분을 손으로 짚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루나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는 무리하게 다가가지도, 닿지도 않았다. 그저 기다렸다. 그녀가 혼자 불안을 이기고 시선을 들어 올릴 때까지.
한참이 지나자 발끝에 묶어 두었던 루나의 시선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루베르의 주름진 목선과 미소를 짓는 입술을 지나 비로소 그의 인자한 눈에 그녀의 눈동자가 닿았다.
루나의 작은 용기에 대한 보답일까, 이어지는 그의 말은 루나의 마음을 한 번 더 포근하게 안아 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걸 환영한다. 아가야.”
Chapter 2-1 (2)
어쨌든 일 처리 하나는 확실한 그녀는 루나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정확히 골라 왔으며, 프레슐은 그녀의 안목에 감탄했다.
톤다운 된 핑크색의 스커트와 하얀색의 블라우스는 소녀를 더욱 생기 있어 보이도록 했으며, 레이스 디테일로 장식된 리본으로 머리를 꾸미고 나니,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아가씨처럼 보였다. 다만 구부정한 등이 조금 거슬릴 뿐이었다.
코가 둥글어 무척이나 귀여운 검정 메리 제인 슈즈를 신고 나서 루나의 준비는 완료되었다.
“귀여워졌어요. 아가씨.”
그녀의 머릿결을 마지막까지 정돈하며 제인은 보람차게 웃었다. 루나는 용기를 내서 거울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스커트의 끝자락에 달린 프릴이 살랑이며 흔들렸다. 이런 사치스러운 장식이 달린 옷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루나는 설탕 가겟집 딸이 입었던 원피스가 가장 예쁜 옷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옷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마음에 드세요?”
제인이 물었다. 루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부끄러움에 그리고 황송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
루나가 머무는 방 가까이에 마차가 준비되었다. 될 수 있는 대로 신전의 홀은 다시 보여 주고 싶지 않다는 프레슐의 요청을 받아들여 마부는 조금 돌아가더라도 신전의 뒷문을 이용하여 마차를 몰기로 했다.
루나는 조심스럽게 문밖으로 첫발을 디뎠다. 그런 일을 당하고 난 이후 첫 외출이었다.
실내에서는 느낄 수 없던 바람이 살랑 불어왔다. 평소보다 바람이 센 걸까? 아니면 루나의 몸이 그저 예민해진 걸까? 텅 비어 있던 손가락 사이를 가장 먼저 불어온 둥근 바람이 차지하고 단단히 매달렸다.
루나는 마차의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섰다. 두 마리의 말이 얌전하게 고개를 까닥이며 마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고, 예쁜 나뭇결이 마차의 외부를 따듯하게 감싸 안는 것처럼 보였다.
루나는 마차에 대해 두려운 기억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빨리 들어가! 이 마녀!’
치안대원들은 그녀의 몸을 던지다시피 하여 마차 안에 쑤셔 넣었다. 안에 놓여 있는 무엇인가에 머리를 부딪쳐 신음을 내어도 누구 하나 그녀의 아픔을 걱정해 주지 않았다.
쾅!
부서질 듯 거칠게 문이 닫혔다. 그 문을 따라 들어오던 빛도 함께 자리를 비웠다. 예고 없이 찾아온 어둠에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허공을 응시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그녀가 가진 마차에 대한 유일한 기억.
“루나?”
루나는 프레슐의 목소리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 눈앞에는 다시 마차가 있었다. 이번 마차에는 창이 달려 있었다. 빛의 은총이 마차의 안까지 닿아 있을 뿐 아니라, 그 안에 앉아 손을 내밀고 있는 프레슐이 있었다.
그렇구나. 다른 마차구나.
그녀가 마차에 타기를 바라는 사람이 등 뒤에 있는 것과 마차 안에서 다정히 손을 내밀어 주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루나.”
그는 치안대의 대원들처럼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깊은 상념에 빠졌을 때마다 끊임없이 이름을 불러 주고 현실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주었다.
이 마차는 무서운 곳에 가지 않을 거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의 마지막 희망이 피어났다. 잔뜩 굽어 있던 등이 저절로 예쁘게 곧게 펴졌다. 바람이 걸린 손가락을 프레슐의 손 위로 조심스럽게 올려 두었다. 곧 그가 강하게 손을 잡아 그녀를 마차 위로 당겨 왔다.
이 마차 안에서는 무엇이든 있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손에 머물렀던 바람도, 항상 존재하는 햇살도 그리고 그림자도 있었다.
마차의 문이 닫히고 매끄럽게 달려 나갔다. 루나는 창밖에 보이는 제인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제인은 허리를 깊이 숙여 그녀를 정중하게 배웅했다.
잘 정비된 수도의 길은 마차가 심하게 흔들리지 않도록 해 주었고, 마차의 훌륭한 바퀴는 편안한 승차감을 선물했다. 당연한 마차의 기능을 다하고 있을 뿐인데도 루나는 지난번의 덜컹거리는 마차를 떠올리며 이 편안함에 감사했고 안도했다.
루나는 프레슐을 바라보았다. 그녀와 비슷한 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을 가졌지만, 그는 어딘가 고귀한 사람 같아 보였다. 그와 루나가 무척 닮았다고 제인이 말해 주었지만, 루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어딘가 나른한 듯한 표정은 항상 여유가 넘쳤고, 툭툭 던지는 말은 그저 따스했다.
높은 성벽을 차례로 지날 때마다 마차는 멈추었다. 그녀를 잡아들였던 병사들과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몇 번이나 스쳐 지나갔다. 그때마다 루나는 옷자락과 바람을 꼭 쥐었다.
세 번째의 성벽을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마차는 완전히 멈추었다. 새들이 물 위에서 노닐고 있는 호수가 보이고, 작은 동물들이 풀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있었다. 루나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새겨졌다.
마차에서 먼저 내린 프레슐이 루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루나의 손이 그의 위로 올라가자 프레슐은 그녀에게 물었다.
“너와 나는 무엇이라 했지?”
루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감정술사라고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물론 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좋아. 정답.”
프레슐은 첫 번째 가르침을 잘 기억하는 착한 후배를 마차 밖으로 이끌어 주었다.
“상으로 네게 소개하지.”
루나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곡선미를 뽐내는 백색의 신전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감정술사의 집. 황궁 신전.”
그들을 내린 마차는 다그닥 소리를 내며, 신전 앞을 빠른 속도로 빠져나갔다. 임무를 마친 말이 기분이 좋았는지 히이잉 소리를 내며 노래하자, 호수에 있던 몇 마리의 소심한 새들이 퍼드덕거리며 하늘 위로 높이 날아올랐다.
“너의 집이 될 곳이야.”
Chapter 2-2 (1)
프레슐이 루나를 데리고 돌아온다는 소식은 이미 황궁 신전에도 전해졌다. 블랑은 한발 앞서 그녀가 사용할 방을 야심차게 준비해 두었고, 오늘 드디어 그의 노력을 선보이게 되었다.
걸음이 느린 루나가 천천히 그의 뒤를 따라오는 동안, 프레슐은 루나에게 배정된 방을 얼른 열어 내부를 확인했다. 블랑이 준비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불안하긴 했지만, 이것은 상상 이상이었다.
문 앞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블랑을 바라보며, 프레슐은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이건 다 뭡니까?”
“히히, 마음에 들어?”
“수습 감정술사에게 이런 호사스러운 방이 가당키나 합니까!”
프레슐의 손끝이 방 안의 구석구석을 지적했다.
“저 나풀거리는 것이 달린 거대한 침대는 뭡니까? 게다가 저 장식이 많은 가구는 뭐고요? 어째서 저렇게 커다란 옷장이 있습니까? 코끼리도 넣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근본적인 문제도 있었다.
“방이 지나치게 넓습니다. 응접세트까지는 필요 없지 않습니까.”
프레슐은 자신이 처음 신전에 들어왔을 때 사용했던 검소한 방을 떠올리며 마음껏 블랑을 질책했다.
“하지만 루나는 여자아이니까.”
“평범한 수습으로는 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까?”
“받아 둬. 루베르 님이 결정하신 뜻이야.”
블랑이 조심스럽게 말하며 프레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감정술사 중의 최고령이자, 수장의 자리에 앉아 있는 그의 결정이라면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루베르 님이 어째서?”
“사실 신전에서 사죄의 뜻으로 루나에게 이것저것 보내온 모양이야. 제 발이 저렸던 거지. 황제의 발바닥을 핥느라 감정술사를 알아보지도 못한 것이.”
“그들이 보낸 물건이라면 더더욱…….”
프레슐이 발끈하여 대답하자, 블랑은 그의 목덜미를 가볍게 손으로 쓸어 내며 시선을 맞추었다.
“진정해.”
“선배…….”
“그래서 루베르 님께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머리핀 하나까지 완벽하게 갖추고 있으니 자네들의 성의는 필요 없다.’라고 선언해 버리셨거든. 뭐 결국 그 선언대로 뒤늦게 완벽을 기해 방을 준비하느라 고생한 건 나였지만.”
“완벽을 기해 준비한다는 것이 이런 의미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어쨌든 상황을 알아 버린 이상 더는 블랑을 탓할 수만은 없었다. 프레슐은 루베르가 그들의 호의를 받지 않은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일에 대해 가벼운 사죄 정도로는 넘어가지 않겠다는 표현이었다. 그 든든한 마음이 감사했다.
곧 루나가 프레슐의 뒤에 도착하여 블랑을 발견하고는 살짝 몸을 숨겼다. 너무나도 낯선 장소에서는 그나마 조금 더 얼굴이 익은 프레슐이 마음의 의지가 되는 모양이었다.
“헤에…….”
그녀의 꾀죄죄한 모습을 기억하는 블랑은 완전히 바뀌어 버린 그녀의 모습에 탄성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애썼구나, 프레슐.”
“별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 감정술사라는 족속은 후배라면 죽고 못 사는 존재들이니까.”
블랑은 프레슐 뒤에 숨어 있는 루나를 향해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추었다. 루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안녕, 반가워. 나는 프레슐의 선배인 블랑.”
루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으나 여전히 시선을 맞추지는 못했다. 블랑은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프레슐이 혹시라도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하면 언제든지 나한테 이야기하렴. 물론 내가 엄격하게 키워서 그럴 리는 없지만.”
“선배!”
“뭐, 내가 잘못 가르친 부분도 있긴 해. 후배의 침대에 몰래 들어간다거나. 그건 좀 걱정이네. 이 뻣뻣한 녀석의 후배가 여자아이가 될 줄은 몰랐거든.”
“그러니까, 그런 부분은 절대 배우지 않습니다.”
“그렇게 항상 부정하는 것치고는, 내 말대로 훌륭하게 ‘후배 걱정’을 하고 있잖아?”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누구나 다 걱정을 하는 법입니다.”
하지만 만난 지 겨우 며칠밖에 되지 않은 생판 남을 그렇게까지 열렬하게 돌보지는 않을 것이다. 블랑은 더 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프레슐은 뻣뻣하게 버티기를 좋아하는 부끄럼쟁이니까, 괜한 점을 지적했다가는 머쓱한 마음에 루나로부터 몇 걸음 더 멀어지려 할 것이다. 이대로 두면 자연스럽게 점점 더 후배를 걱정하고, 참견하며 훌륭한 감정술사를 키워 낼 것이다.
“루나, 네 방을 보여 줄게. 아마 저 뻣뻣한 너의 선배는 지금부터 보고하러 가야 할 것 같으니까. 오빠랑 같이 있을까?”
“누가, 누가 오빠입니까.”
“하지만 나는 선배가 아니니까.”
“참 뻔뻔하기도 하십니다. 35살이나 되어서 이렇게 어린아이한테 그런 말이 듣고 싶으세요?”
“응. 미치도록 듣고 싶네.”
“안 됩니다.”
“왜!”
“규칙입니다. 블랑 님이라고 제대로 부르는 것이 옳습니다.”
감정술사의 규칙. 바로 윗대는 ‘선배’라고 부르고 모든 가르침에 순응할 것. 그리고 그보다 위의 술사님들에게는 ‘님’으로 호칭하며 존경하는 마음을 보여야 했다.
“어휴, 잘난 선배님 나셨어요. 그렇지? 루나?”
“그리고 루베르 님께 가는 것은 루나도 함께 가겠습니다. 어차피 인사도 드려야 하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선배에게 맡기는 것이 불안해졌습니다.”
그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후, 빠른 걸음으로 루베르의 집무실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루나도 그를 따라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새로 산 신발이 발을 괴롭히는 탓에 무척이나 힘겨웠지만, 지금은 어쨌든 그의 등을 필사적으로 따라갔다.
똑똑.
“들어오게”
허락이 떨어지자 프레슐은 문을 열고 들어가 공손하게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뒤늦게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온 루나는 엉거주춤 그와 같은 모양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가 누구인지 이 인사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도 전혀 모른 채.
“보고가 늦었습니다. 루베르 님.”
“괜찮다. 네 덕에 보석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지. 잘했다 프레슐.”
푹신한 의자에 몸을 편안히 기댄 노인은 빙긋 웃었다. 그의 표정을 따라 주름이 함께 움직여 더욱 즐거운 얼굴이 되었다.
“가까이 오너라. 아가.”
루베르는 루나에게 손짓했다. 루나는 고개를 돌려 프레슐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용기를 내어 루베르의 오른편에 가까이 다가갔다.
“예쁜 아이로구나.”
루베르는 의자에 몸을 완전히 기댄 채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루나도 그를 따라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되었다. 마차에서 내릴 때 보았던 예쁜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감정술사는 에모티오 여신께서 이 세상에 내려 보내는 따듯한 손길이라고도 하고, 그녀의 아이들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지.”
그는 잠시 말을 쉬었다. 늙은 폐와 공기가 닿는 색색 소리가 실내를 잠시 울렸다.
“나는 그녀의 아이들이라는 말이 참 기쁘네. 그리 생각하면 우리는 모두 다 가족이라는 뜻이 되거든.”
루베르는 의자의 손잡이 부분을 손으로 짚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루나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는 무리하게 다가가지도, 닿지도 않았다. 그저 기다렸다. 그녀가 혼자 불안을 이기고 시선을 들어 올릴 때까지.
한참이 지나자 발끝에 묶어 두었던 루나의 시선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루베르의 주름진 목선과 미소를 짓는 입술을 지나 비로소 그의 인자한 눈에 그녀의 눈동자가 닿았다.
루나의 작은 용기에 대한 보답일까, 이어지는 그의 말은 루나의 마음을 한 번 더 포근하게 안아 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걸 환영한다. 아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