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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귀의 왕 ― 포식자의 만찬
1권

벨벳골드마인 作



1화

서장

눈을 뜨자 보인 것은 짙은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일렁이는 형광등 불빛.
그리고 흐느끼는 여자들의 울음소리였다.
“으으―”
낯선 환경에 어색함을 느낄 여유는 없었다. 곧바로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고통과 숨 막힐 듯한 공포로 질러 대는 비명 소리는 날카롭고도 처참했다. 듣는 이조차 까마득하게 두려움에 질릴 만큼.
남자는 아직도 가물가물 덜 깨어난 정신으로 생각을 되짚어 보았다.
왜? 어째서?
분명 그는 어젯밤 지하철 역사, 폐쇄된 창고 안에서 잠들었건만, 대체 이곳은 어디란 말인가?
그러던 중 영문 모를 비명의 메아리 속에서 낮고도 리드미컬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듯 가사 없이 부르는 그 이질적인 노랫소리에 남자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나 마나 한 생각을 관두고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주위가 좀 더 잘 눈에 들어왔다.
“……어?”
좁은 케이지, 마치 애장품을 전시해 놓는 유리 장식장 같은 한 평 남짓한 투명한 유리 케이스 안에 그는 갇혀 있었다. 발치로 단단한 감촉이 와 닿았다. 남자는 손을 뻗어 유리 벽을 만져 보았다. 차가운 감촉이 손끝에 와 닿는다. 그 투명한 유리 벽에 자신의 새하얀 손이 흐릿하게 비춰 보였고 그 너머로 수십 개의 다른 유리 케이지들이 어렴풋이나마 보였다. 그 속에는 모두 소년 소녀들로 차 있었다.
흥얼거리는 낮은 노랫소리가 가까워져 왔다. 기괴할 정도로 즐거움이 가득 묻어나는 음색이었다. 어째선지 등골이 오싹해졌다. 잔뜩 기다리던 만찬을 눈앞에 둔 것 같은 흥분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남자는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려 얼굴을 바싹 유리 벽에 붙여 보았다.
그러자 얼굴 바로 앞에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손바닥이 철썩! 유리 벽을 내리갈기는 것이 아닌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자 40대쯤 되어 보이는 거구의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눈이 길게 접히도록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깨어났나?”
거구의 사내는 NYPD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고 또 제법 인상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위 상황은 사내의 경찰복이 주는 신뢰감과는 정반대 꼴인지라 남자는 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러는 가운데 경찰복의 거구는 예의 그 음침한 콧노래를 흥얼거리더니 돌아섰다.
그리고 경찰복의 사내가 케이지 앞을 지나갈 때마다 안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귀를 틀어막고 눈을 감으며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바들바들 떨어 댔다. 그 사내가 걷는 발소리는 동굴 속처럼 울렸다. 추측해 보건대 이 공간은 어딘가의 지하실임이 분명했다. 천장의 철골 구조물들이 그대로 형태를 드러내고 있었고 사방을 둘러봐도 창문 하나 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으스스한 느낌이었다.
사내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흥얼거리던 노래를 멈추었다. 그리고는 한 케이지 앞에서 멈춰 섰다.
“식사 시간이다.”
그의 말에 케이지 안에 들어 있던 소녀는 구슬피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냘픈 목소리로 애원했다.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집, 집에 보내 주세요, 아무에게 말하지 않을…… 흐흑……!”
“시간 내에 다 먹지 않으면 앞으로는 굶기겠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지?”
그러면서 사내는 문을 열어 발치에 있던 통을 안쪽으로 거꾸로 쏟아부었다.
그와 동시에 여러 케이지 안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양철통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손가락이나 귀, 코, 혓바닥, 눈알 따위의 토막이기 때문이었다. 질펀하게 쏟아져 내리는 핏물은 그로테스크하기 짝이 없어서 안에 있던 여자아이는 거의 실신할 듯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일만을 끝낸 채 다시 문을 걸어 잠갔다.
“다 먹도록 하렴. 네 친구잖니?”
“아아아악! 제시!! 엄마!! 살려 줘! 누가, 누가 좀!”
“시끄러운 계집이로군.”
사내는 삐걱대는 의자를 그 아이의 케이지 앞에 놓고 앉아, 비명을 지르는 소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안광은 기대감으로 번들번들 빛나고 있었다.
“어서 먹으렴.”
그러나 그 말처럼 소녀가 선뜻 시체 토막을 입에 댈 리는 없었다. 아이가 울고만 있자 사내는 금세 질린 듯이 옆 케이지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거의 미라처럼 바싹 마른 금발 소녀가 간신히 앉아 있었다.
“먹지 않을 거니?”
돌아오는 답변은 그저 울음소리뿐. 하는 수 없이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커다란 리빙 박스를 들고 옆 케이지로 갔다. 옆 케이지의 바싹 마른 소녀는 기운 없이, 그러나 그저 절망에 가득 찬 시선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먹지 않으면 먹히는데― 그걸 아직도 배우지 못했니?”
하고 사내는 여전히 울부짖는 소녀를 향해 물었다. 그리고는 눈앞의 케이지의 문을 열고 리빙 박스의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쏟아 냈다.
찍찍 찍찍! 요란한 소리를 내며 커다란 쥐들이 떨어져 내렸다. 남자는 재빨리 케이지의 문을 닫았다. 안쪽에 떨어진 쥐들은 정말이지 커다래서 보는 것만으로 비명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이 흉측했다. 지하철 철로 사이를 재빠르게 돌아다니는 흔히 볼 수 있는 종류의 쥐였다. 그리고 놈들은 상당히 굶주려 있었던 듯했다. 리빙 박스에서 떨어져 내린 것은 살아 있는 쥐뿐만이 아니라 틀림없이 동족 포식의 희생양이 되었을 법한 쥐의 사체들, 뜯어 먹다 남긴 내장 따위가 함께였으니 말이다.
몇 마리의 커다란 쥐들은 바쁘게 유리 케이지 안을 돌아다니다가 이윽고 너무 굶어 움직이지 못하게 된 소녀에게로 덤벼들었다. 소녀는 힘없이 손을 휘젓다가 결국 새된 비명만 내지르게 되었다. 쥐들은 연달아 소녀의 발끝을 물어뜯고 다리를 공격했다. 몇 번이고 그 공격은 반복되었다.
아마 단번에 죽지는 않을 것이다. 굶주린 쥐들이라고 해도 인간의 신체란 며칠을 뜯어 먹을 수 있는 풍족한 식사감이었으니까.
만족감에 가득 차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사내는 다시 엎드려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옆 케이지의 소녀를 보았다.
“자, 한 시간 남았다. 먹을 것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아이는 벌을 받아야겠지?”
그러나 결국 그 소녀는 한 시간이 지나도록 자신의 몫으로 배급받은 인간의 사체를 먹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사내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가 벌을 줄 죄인이 하나 더 늘었을 뿐이다. 실망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또 무슨 벌을 주어 소녀를 반성하게 할지 고민했다. 소녀 외에도 그가 벌을 줄 죄인은 많이 있었다. 바로 전날 새벽, 지하철 역사에서 노숙을 하던 남자까지 한 명 더 잡아 왔으니까. 더 이상 빈 케이지도 없다. 아주 단란한 모습이다. 경찰복의 사내는 그 모습이 몹시도 마음에 들었다.

바싹 마른 소녀가 쥐에게 뜯어 먹혀 살해당했다. 그 옆방의 소녀에게는 일체 식사와 식수의 공급이 중단되었다. 맞은편 케이지의 소년은 가득 차오른 물로 인해 오랫동안 발버둥 치며 수영하다가 결국 케이지 천장까지 차오른 물로 익사, 둥둥 떠다니는 중이었고 그 옆방의 미녀는 어젯밤 두 다리를 절단당했다.
시간이 되면 음침한 노랫소리와 함께 방문하는 그 사내는 꼭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케이지의 사람들을 고문하고 괴롭혔다. 그는 공무원처럼 빈 케이지를 청소하고, 소믈리에처럼 예민하게 사람들의 상태를 관찰했다. 그런가 하면 시체들을 황홀한 표정으로 오랫동안 감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항상 마지막에는 자신의 컬렉션들의 트로피를 재생해 놓고는 퇴장했다. 그것은 그가 저지른 만행들에 대한 영상 기록이었다. 어두운 케이지 한편에 갖은 방법으로 고문당하는 희생자의 처참한 광경과 공포에 가득 찬 비명 소리가 3차원 입체 영상으로 끝없이 리플레이 되었다.
케이지 속의 희생자들은 두 눈에 초점이 없었다. 그저 이미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가 되어 다가올 죽음을 기다릴 뿐이었다. 자신의 차례도 그리 멀지 않았으리라. 가장 오랫동안 갇혀 있었던 여자도 고작 한 달을 넘지 못했다고 했다.
그중 가장 최근에 갇히게 된― 지하철 역사에서 노숙하다가 납치된 남자는 그래도 다른 희생자들보다는 표정이 살아 있었다. 그는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쓰레기 같은 음식 더미를 난감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다가 결국 식사를 포기하곤 했다. 몹시도 굶주려 뭐라도 위 속에 구겨 넣어 허기를 달래고 싶었지만, 배급된 음식은 정말로 입에 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밤거리를 헤매며 쓰레기 같은 것들을 주워 먹던 남자로서도 영 입맛 떨어지는 광경이었던 것이다. 구더기가 꾸물거리는 고깃덩어리의 고약한 냄새 때문에 절로 비위가 상했다.
“배고파.”
소리 내어 말해 보니 훨씬 더 배가 고파졌다. 그는 눈앞의 고깃덩어리에서 시선을 돌려 다른 케이지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다들 시체보다도 섬뜩한 표정을 하고 있지만, 그 외모만큼은 몹시도 아름다웠다. 그 변태 자식의 취향인 모양이었다. 밝은 백금발의, 아직은 소년 소녀라고 부르는 편이 저 적절할 것 같은 젊은이들이었다.
두 다리가 잘린 여자는 적당히 쇼크사 할 것 같았는데, 용케도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그렇긴 해도 오늘을 넘길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 사내가 여자의 케이지 앞에 톱을 세워 놓았던 것이다. 아마도 오늘 밤 저걸로 그녀를 요리하려는 모양이었다.
사내는 희생자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것을 좋아했고 그 비명 소리를 듣는 다른 희생자들이 흐느껴 우는 것을 좋아했다. 절망 속에서 자신에게 매달려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걸 좋아했다. 쇠꼬챙이와 불, 물, 칼로 신체를 파괴하는 영상을 무슨 예술품이라도 되듯이 공들여 촬영했다. 그 새끼는 신이 되고 싶은 미친놈이었다.
그런 미친놈이 남자에게도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놈은 처음에는 서서히 주위의 공포스러운 광경을 보고 발악하며 절망해 가는 모습을 감상하려는 참이었겠지만, 잡혀 온 날로부터 지금까지 남자는 단 한 번도 비명을 내지르지 않았다. 놈은 그런 남자를 자극하려고 더 잔인하게 그가 보는 앞에서 사람들을 고문했다. 칼로 소년의 배를 열어 창자를 끄집어내 남자의 케이지 벽면을 향해 철썩! 집어 던지기까지 했었다. 그래서인지 남자가 구석에 있는 케이지에 들어온 날부터 무서운 속도로 다른 케이지의 주인들이 죽어 나갔다. 이제는 아사형을 선고받은 소녀를 비롯해 겨우 세 명만이 살아남아 있을 뿐이었다.
밤이 되자 그 섬뜩한 노랫소리는 다시 들려왔다. 일부러 크게 소리를 내는 것 같이 퉁퉁 울리는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와 졌다. 더 이상 비명 지를 여력도 없는 남은 희생자들의 상태 때문에 그들의 감옥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경찰복의 사내는 중간에 한 번 멈추는 법도 없이 바로 남자의 케이지 앞으로 다가와 섰다. 그는 자신이 이틀 전 아침에 배급했던 고깃덩어리를 한번 슬쩍 내려다보더니 이를 드러냈다.
“나쁜 아이네. 소중한 고기를 썩혀 버리다니.”
언제나처럼 느긋하게 기대감이 배어 있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어딘가 분노마저 내비치고 있었다. 둘의 시선이 마주치자 사내의 광기는 더욱 걷잡을 길 없이 커졌다.
“쓰레기 주제에! 날 보면 고개를 숙이고 용서를 빌란 말이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는 스위치가 꺼진 것처럼 우뚝 멈추었다.
“그렇군. 말을 못하나? 벙어리인가?”
평소에도 미친놈의 상태는 광기로 가득 차 있어 도저히 정상인의 상태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오늘은 유독 더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그는 일국의 왕 같은 기세로 으스대며 사람들을 벌하던 역할 대신 마치 죄수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간수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듯 보였다.
사내는 스스로에게 변명하듯 읊조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었다.
“그렇군, 그래. 그럼 이 몸의 두려움을 직접 가르치는 수밖에.”
그렇게 말한 사내는 두 다리가 잘린 여자의 케이지 앞에 세워 둔 톱을 가져왔다. 그는 흥분으로 부들부들 떨며 눈을 빛냈다.
“벙어리가 내지르는 비명은 처음 들어 보겠군.”
경찰복의 사내는 케이지 구석으로 몸을 옮기는 청년의 모습에 짜릿하게 몸을 떨며 입술을 핥아 올렸다. 예쁜 얼굴이 일그러지며 눈물지을 모습을 상상하자니 벌써부터 사정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는 남자를 가둬 놓은 후 배식구를 제외하곤 한 번도 열지 않았던 유리문을 처음으로 열었다. 안쪽에 작게 몸을 웅크리고 주저앉아 있는 남자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사내를 쳐다보았다.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도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는 한 쌍의 눈동자가 두려움 없이 그를 직시해 왔다.
그 순간 사내는 전율하고 말았다. 저 아름다운 눈동자를 상처 없이 파내어 오랫동안 간직해야겠다는 강박이 들었다. 공포에 떨지 않는 남자에 대한 괘씸함도 잊고 말이다.
“가만히 있어라.”
그 말을 못 알아들었는지 남자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백금발이라 칭하기에는 훨씬 순수한 하얀색의 머리카락이 사내의 고갯짓에 따라 한쪽으로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머리카락 사이로 보기 좋은 도톰한 붉은색의 입술이 달싹였다.
“하?”
그 청아한 목소리에 톱을 든 사내는 움찔 자리에서 멈추었다. 마주친 눈이 생긋이 웃음 짓는다. 공포에 미쳐 버린 자의 얼굴은 아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 백발의 청년이 말을 이었다.
“나 벙어리 아닌데?”
“너?!”
백발의 남자는 나비처럼 팔랑거리는 흰색의 속눈썹을 깜빡이며 웃음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그 모습은 어딘가 비현실적이리만큼 황홀한 매혹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찌 보면 신성하기까지 했다.
“뭔가 살아 있는 걸 기를 때는 식성을 잘 파악해야지.”
“뭐?”
“나 죽은 고기는 못 먹는다고.”
“어?”
청년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러자 감춰져 있었던 기다란 한 쌍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포식계 육식 동물의 길고 사나운 모양의……. 거구의 사내는 그게 마치 괴기 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느꼈다.
으드득!!
그리고 다음 순간 어째서 자신의 머리 없는 몸통이 저 청년의 손에 잡혀 분수처럼 피를 내뿜고 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어졌다.

미친놈의 머리를 잡아 몸통에서 뽑아 버리고는 그대로 목의 단면에 얼굴을 묻고 솟구치는 피를 입 안 가득히 빨아들였다. 몇 번이고 꿀꺽꿀꺽 삼키고 나서야 겨우 죽을 것 같던 갈증이 가셨다. 착하게 기다렸는데― 다른 아이들에게는 잘도 신선한 사람을 먹으라고 들이밀면서도 어째서 자신에게는 배급해 주지 않았는지? 도저히 먹지 못할 것만 들이밀던 놈을 향한 별것 아닌 원망도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다.
햇빛을 피해 어둑한 곳에서 잠을 청했던 자신을 허락도 없이 모르는 곳으로 데려와 버린 놈의 피는 상상 이상으로 훨씬 더 달콤했다. 상상하기로도 맛있어 보이는 튼튼한 몸이긴 했지만 실제로 맛보고 나니 확실히 건강하게 맥박 치는 혈액이었다. 어쩌면 오랫동안 굶어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당장의 허기를 채운 백발의 남자는 며칠간 자신의 휴식처가 되어 주었던 유리 케이지 안에서 나왔다.
살아남아 있는 여자아이들이 초점 없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 시선을 모른 체하지 않고 유리 케이지의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차례대로 소녀들의 피를 남김없이 빨아들였다. 그 짓을 몇 번 반복하는 동안 허기는 완전히 가시고 포만감으로 가득 찼다. 그는 몹시도 행복해졌다.

지하실에서 나온 하얀 머리 사내는 대충 얼굴에 묻은 피를 옷에 비벼 닦아 내고는 푸르른 달빛 아래로 걸어 나갔다. 그곳은 브루클린 외곽의 창고 지역이었다. 그렇게 밤거리를 맨발로 방황한 지 단 오 분 만에 그의 앞에 한 대의 차가 멈춰 섰다. 이런 시간에 이런 곳을 어슬렁거릴 거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고급 세단이었다. 문이 열리고 잘 차려입은 덩치 큰 남자가 그의 앞에 내려섰다. 그는 키가 190도 훨씬 넘어서, 굉장한 꼴을 하고 있는 흰 머리의 청년을 내려다보더니 못마땅한 표정이 되어 질색했다.
“이게 대체 무슨 꼬락서니입니까?”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백발의 청년은 대답했다.
“그놈의 잔소리.”
“웬일로 며칠을 조용히 있나 했습니다.”
백발의 남자는 뭔가를 떠올리는 듯 배시시 웃었다.
“취미가 재밌는 사람에게 주워졌거든.”
“네?”
“밥을 제대로 주지 않아서 먹어 치워 버리고 나왔어.”
“…….”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덩치 큰 남자는 이윽고 피식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건 잘하셨습니다, 아버지. 음, 충분히 드셨습니까?”
“이젠 배 안 고프다. 예까진 무슨 일이냐?”
“외출이 길어지셔서 아버지 마중 나왔지요.”
“별 쓸데없는.”
덩치 큰 남자는 생글거리며 맨발 사내를 안아 들었다.
“그럼 해가 뜨기 전에 돌아가실까요?”



로드 하티

동틀 새벽 무렵, 아침 맞이 준비로 집안은 분주해진다. 밤낮이 뒤바뀐 인간이 있듯이 흡혈귀들에게도 아침은 이제 더 이상 낯선 시간이 아니었다.
특별 제작한 SPF190짜리 선크림을 전신에 꼼꼼히 잘 펴 바르고, 그 위에 햇빛을 차단하는 방어구들을 차분히 장착했다. 살결이라고는 드러나지 않도록 껴입는 것이 관건이다. 긴팔, 긴바지 정장에 발목을 덮는 목이 긴 양말, 구두, 손에는 장갑, 목에는 머플러, 머리와 얼굴엔 모자와 선글라스, 마스크까지 장착.
거울을 보니 이런 수상쩍은 놈이 또 어디 있을까? 싶지만 아무렴 어때? 현시대는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훌륭한 시대다. 피부라곤 조금도 드러내지 않은 그는 태평스레 중얼거렸다.
“태닝은 역시 아침 태닝이지.”
테라스에 나가자 새벽녘의 어스름이 서서히 물러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막 여행을 했을 때 쓰던 캐노피를 그대로 가지고 와서 테라스에 설치해 뒀다. 하늘하늘 휘날리는 천 자락 사이로 들어가서 느긋하게 선베드에 몸을 뉘었다. 이제 10분 후면 태양이 떠오른다.
그 광경은 매일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일출 감상은 꼭 심장이 뛴다는 착각이 들 만큼 스릴 넘치는 유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