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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아!”
수평선 너머로 해가 떠올랐다. 거대한 불덩어리, 생명의 근원, 파괴의 어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이 물러가고 세상의 온갖 암흑에 속해 있는 것들은 지저 깊은 곳으로 꼭꼭 몸을 숨겼다. 온몸을 가득 채우고 있던 힘도 태양 빛 아래에선 완전히 고사하여 진득한 탈력감이 몰려들면서 몸이 축 늘어졌다. 절로 몸이 떨려 왔다. 최근 그를 이토록 전율하게 하는 것은 겨우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역시 저것만은 두렵다. 근원적인 공포와 마주하는 감각이었다. 소름 끼칠 정도로 자학적인 동시에 어쩐지 눈물이 나고 있다고 착각이 들 만큼 감동적이었다.
언젠가 선글라스를 끼지 않고, 이런 보호 장비 안에 숨지 않고― 맨몸, 맨눈으로 저 태양을 마주할 수 있다면― 바로 불길에 활활 불타올라 버리겠지만, 그마저도 영광스럽겠지.
그는 탄식하고야 말았다.
“이 세상은 완벽해!”
먹이가 되는 인류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번식하고, 또 자신 같은 괴물마저 불편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문명을 발달시켰다. 무수한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그를 둘러싼 세계는 종말을 모르는 괴물이 되어 있었다. 레코드판이 돌아간다. 스피커로 라벨의 볼레로가 흘러나와 이윽고 절정을 맞이했다.
아주 완벽한 아침이었다.
***
눈을 뜨자 낯익은 얼굴 몇몇이 보였다.
“아버지!”
“징그럽게 아버지 타령은!”
그는 넌더리를 내며 관에서 몸을 일으켰다. 관을 보는 종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꺼림칙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제 손으로 관 뚜껑을 여닫는 게 몸서리쳐질 정도로 싫은 눈치였다.
이상하기도 하지. 자신의 관은 고전적인 취향의 침실이다. 아주 아늑해서 때때로는 10년이고 100년이고 쭉 관에서 나오지 않고 내리 자고 싶어질 때도 있다. 실제로 괘씸한 종속들이 그를 관에 넣고 땅에 묻어 버린 적도 있었다. 덕분에 도로 파내 꺼내 줄 때까지 몇십 년을 땅속에 갇혀 있었다. 그런 트라우마가 있는 침실인데도 버릴 수 없다니, 이 아늑함이 얼마나 위대한지 놈들도 좀 알아야 할 텐데.
“지난밤 또 사냥 나가셨더군요?”
이놈의 잔소리쟁이는 끝도 없이 떠든다.
“먹이라면 얼마든지 가져다줄 테니 제발 사냥 다니지 마시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내 입에 풀칠은 스스로 하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니?”
“그러지 않으셔도 된다고요! 뒤처리가 얼마나 복잡한지 아세요? 게다가 이웃 혈족들의 눈치는 또 어떻고요?”
“딴 놈들 불평 따위를 내가 왜 신경 써?”
“아버지!”
“시끄럽다. 귀 아직 멀쩡해.”
그는 고풍스러운 방문을 열고 나섰다. 복도에 난 커다란 창으로 별빛이 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보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호흡에 의미는 없지만 밤의 냄새를 맡을 수는 있었다. 그 음습하고 안락한 향기에 온몸에서 혈기가 빠듯하게 휘돌아 몰아친다. 이빨이 근지러웠다. 먹고 자고 약탈하고, 이 이상의 삶이 또 어딨다고 그걸 방해하는지.
유희 중 최고는 피를 마시는 것. 생명을 갈취하고 죽은 몸에 활력을 불어넣는 섭식 행위다. 그것만은 역시 수억 번을 반복해도 질리지 않았다. 그 환희와 희열과 목숨의 구차함과 세계의 틈새에서 억지로 발붙이며 연명하는 괴리감을 어찌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있을까?
잔소리꾼이 따라붙었다.
“어디 가세요?”
“어딜 가건?”
“식사부터 하시죠.”
잔소리꾼은 그가 또 밖에 나가 사고 칠까 두려운지 우선 그에게 먹이부터 먹이려 들었다.
“아직 떠먹여 줘야 할 정도로 늙진 않았다.”
“어린 소녀입니다. 마음에 드실걸요. 약에 취하지도 않았고요.”
그는 솔깃한 제의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왕성한 흡혈귀였다. 갓 흡혈귀가 된 놈들도 자신처럼 허기지진 않을 것이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자신의 대식가 식성은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사냥 행위 그 자체를 즐겼다.
물론 오래 살아온 만큼― 이를테면 땅속에 갇혔을 때처럼 몇십 년을 섭식하지 않고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다. 기분이 좀 좋지 않아질 뿐, 아니, 심각하게 나빠질 뿐― 딱히 육신을 움직이는 데 무리가 간다거나 하는 허약한 체질은 아니었다.
하지만― 왜 굳이 이 허기를 달래며 포식자의 본능을 참아야 한단 말인가? 살아가는 한 그게 가장 큰 쾌락인데.
요즘 것들이야말로 노인네 근성으로 가득하다. 세금 징수원들처럼 규칙을 적용하고 계산하고 따지기를 좋아한다. 노예처럼 일하고 봉급 타듯 피를 마신다. 수도사도 아닌데 쾌락을 등한시한다. 그러면서 고상한 체한다.
어처구니가 없다. 대체 이놈들의 정체성은 뭐란 말인가?
세상이 바뀌면서 흡혈귀의 본질마저 변했는지, 당연한 행위를 당연하게 하는 자신이 지금은 이단자 취급을 당했다. 아니, 이치에서 벗어나 죽음에서 부활하였으니 사실 자신은 늘 이단자였다. 다만 다른 흡혈귀들이 아닌 척하는 껍데기를 덮어썼을 뿐이다. 음흉하고 약삭빠른 괴물들! 그는 싫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인상을 썼다.
“잔소리꾼들 같으니.”
“아버지! 식사는요?”
“너나 많이 먹으렴.”
그리고 그는 말릴 새도 없이 창틀에 뛰어올라 그대로 뛰어내렸다. 밤바람 속에 얼굴을 파묻고 구름 그림자 속에 몸을 숨겼다. 펄럭펄럭 나부끼는 옷을 날개처럼 퍼덕이며 저택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맨발에 흙더미가 부스러지고 바닥에는 발 모양을 본뜬 발자국이 찍혔다. 몇 걸음 걷지 않아 그의 마음은 잔뜩 들뜨고 금세 행복으로 차올랐다. 밤은 자신만의 시간이다. 오늘 밤도 그는 내키는 대로 먹어 치울 작정이었다.
***
자정이 되자 로드 하티가 도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주시하는 눈들은 기척을 죽이고 그의 뒤를 따랐다. 하티는 규칙을 따르지 않는 아주 성가신 흡혈귀였으며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괴물이기도 했다. 당연히 자신을 지켜보는 눈들의 존재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귀찮게만 하지 않으면 상관없다는 태도로 무신경하게 걸음을 옮겼다.
영주 하티가 롱아일랜드에 자리 잡은 이후, 매일 밤 그는 맨발로 뉴욕의 뒷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아무도 그가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모른다. 소문만이 무성했다.
혈족의 이름과 그의 이름이 그러하듯 하티(히타이트) 출신의 목동이란 말도 있었고 바빌론의 신관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또 그의 이름이 신화 속 인간을 포식하는 늑대 하티에게서 따왔다 여겨 게르만족의 전사가 부활한 것이라 믿기도 했다.
그러나 진실은 아무도 몰랐다.
가장 오래된 성의 영주 루파(LUPA)조차도 그녀가 태어난 로마에서 하티를 목도한 적이 여러 번 있었노라 증언한 바가 있다. 그 시절에도 그는 하룻밤에 마을 하나를 통째로 잡아먹을 정도로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는 흡혈귀였다고 했다. 전승되는 흡혈귀의 문헌을 찾아보면 그의 흔적은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잠들지 못하는 밤을 뿌리는 악마의 이야기들. 유럽 전역에 걸친 대학살의 기록이었다.
즉, 하티는 루파(LUPA)만큼 오래 살았거나 그보다 더 오래된 자였다. 어쩌면 일부 그를 숭상하는 이들이 말하듯, 정말로 모든 흡혈귀의 근원이자 시조일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아무리 거슬려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 사냥하지 말아 달라 가신들을 통해 요청할 수는 있어도 직접적으로 그에게 제재를 가할 수는 없었다. 그저 감시만 할 뿐이었다.
그는 사실 오래된 괴물이긴 해도 혈족을 이끄는 영주는 아니었다. 애당초 그에게는 혈족을 이끌 성의나 의지가 없었다. 오히려 성격만 놓고 본다면 귀족으로서의 소양이나 기품, 우아함은커녕 쓰레기라 단언해도 좋을 정도였다. 아마도 왕성한 식성으로 인해 내키는 대로 포식하다 보니 가끔 우연의 산물로 그에게 종속된 흡혈귀들이 새로 탄생하는 것을 그 자신도 막을 수 없었던 것뿐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소수의 종속들이 그를 떠받들어 모실 뿐, 그에게 로드라는 호칭은 아까웠다. 어쨌든 오늘도 그는 이끄는 이 하나 없이 혼자서 밤거리를 배회했다. 집 근처를 산책이라도 하는 듯한 가벼운 분위기였다.
얼마나 오래전이었던가?
원래 영주 하티는 대국(大國)의 국민 전체를 먹어 치운 것만큼이나 많은 인간을 잡아먹었던지라― 아주 으스스한 기운을 풍겼다고 한다. 숨결에서조차 피 냄새가 스며 나왔고,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눈빛에선 도축자의 살기가 번뜩였다. 오죽하면 밤거리에서 그와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심장마비로 쓰러지는 사람들이 속출했을까?
그랬던 살기가 그 99년의 유폐 이후 싹 사라졌다. 땅속에서 발굴한 그의 관은 썩어 문드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온 로드 하티는 아주 유순한 사람처럼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늘 그의 몸을 감싸고 떠돌던 피 냄새는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날아가던 참새가 손가락 끝에 내려앉을 수도 있을 만큼 변했다. 어처구니없는 대변화였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본질까지 변한 건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이었고, 동족들로 하여금 그를 땅에 파묻게 했던 그의 식성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하티 영주입니다. 오늘도 부랑자 같은 꼬락서니를 하고 배회하고 있습니다.”
“놓치지 말고 주시하세요.”
영주 하티는 워낙 눈에 띄는 편이라 어지간히 허튼짓을 하지 않는 한 감시자들이 그를 시선에서 놓치기도 힘들었다.
대체로 고대부터 존재해 온 흡혈귀는 키가 작았다. 그러나 그는 작지 않았다. 고대 게르만족의 평균키가 175cm를 넘었다던데 그가 게르만족이라면 평균을 조금 웃도는 선이고, 로마인(평균 160cm 초반)이라면 특출하게 큰 편이었다.
덩치는 크지 않았다. 뼈대가 가늘고 팔다리는 길쭉하게 뻗어 있었다. 몸이라곤 쓰지 않는 학자나 신관처럼도 보였다. 겉으로 봐선 무해할뿐더러 우아하고 고상하기만 했다. 그러나 단언컨대 그는 태생부터 난폭한 괴물이었다. 그 무자비한 성정은 로마의 검투사나 게르만 전사로 추측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어쨌거나 아무도 그의 기원을 몰랐지만.
출신을 짐작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외모 탓이었다. 특정 종의 특징을 초월했기 때문이었다. 너풀거리는 머리카락은 눈 덮인 설산의 북극 늑대처럼 하얗게 세었고, 눈동자는 색이 흐렸다. 옅은 갈색으로도 보이고 밝은 카키색으로도 보인다. 어떨 때는 맑은 에메랄드 바다색으로 반짝이기도 했지만 대개는 흐릿한 초록색으로 보였다. 언뜻 봐서는 백색증을 앓는 이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큰 키에 백인 특유의 하얀 피부는 페르시아 제국이 건설되기 전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지배하던 메디아인의 특징 같기도 했고, 유럽계 게르만족 같기도 했다. 백색증이 아니라면 하얀색의 결 좋은 머리는 슬라브족의 특징일 수도 있었다.
얼굴은 갸름하고 날카로웠다. 처진 눈이 아니었다면 굉장히 매서운 인상이 되었을 것이다. 대신 슬쩍 처진 눈꼬리 덕분에 나른한 인상을 풍겼다. 지켜본 결과 그 느긋한 눈매에 긴장감이 돌 때는 오직 먹이를 잡아먹을 때뿐이었다. 콧대는 로마인처럼 높았다.
고대인 특유의 이목구비의 굴곡은 종을 초월하여 신비롭도록 우아하기만 했다.
그 귀족적인 외모로 나른한 눈빛을 보내올 때면 누구든지 간에 낱낱이 발가벗겨지는 것처럼 몸 둘 바를 모르게 되었다. 후드를 덮어쓴 그의 눈동자가 고양잇과 짐승의 눈처럼 어둠 속에서도 번뜩였다.
말하자면 그는 달을 쫓는 늑대라는 이름이 더없이 잘 어울리게끔, 신비 그 자체를 두르고 있었다. 지금처럼 어둠 속에서 맨발로 도시를 거니는 모습조차 욕망을 분탕질했다.
21세기에 살아 움직이는 고대인이라니. 루파(LUPA)를 볼 때 느끼는 신비로움과 경탄은 그에게서도 비껴가지 않았다. 다만 그가 살아온 세월답게 조금만 더 지혜롭거나 절제할 줄 아는 괴물이었다면 그의 위상도 지금과는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쉽게 말해 얼굴이 아까운 성질머리란 거다. 겉과 안의 차이가 매력적인 것도 정도껏이어야지. 솔직히 하티 수준에 이르게 되면 민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하얀 흡혈귀의 걸음이 불빛으로 환한 밤거리에서 멈췄다. 밤이면 문을 닫는 가게들 대신 오히려 점등하는 가게들이 모여 있는 브루클린의 어떤 거리였다. 적당한 곳에 멈춘 그는 느긋하게 벽에 몸을 기댔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차 한 대가 그의 앞에 멈춰 섰다.
창문이 내려가고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그를 불렀다.
“어이, 거기.”
그 목소리에 따라 하티는 벽에서 몸을 일으켜 차도 쪽으로 몇 걸음 다가와 섰다.
문제는 유폐 이후 그의 얼굴에서 유순한 인상이 강해졌다는 점이다. 처진 눈꼬리로 눈웃음을 치며 생글거리는 모양새를 보니 식욕이 당긴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는 인간으로서의 죽음을 제법 어린 나이에 맞이한 덕분에 겉보기엔 풋내 날 정도로 아주 파릇파릇한 젊은이였다. 물론 그 속 모를 눈빛을 제대로 마주하고 나면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게 되겠지만.
어쨌거나 그는 인간이 느끼기에 그다지 위협적인 외관은 아니었다. 무표정하게 짐승 같은 눈을 번뜩이지만 않으면 말이다.
그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확인한 차 안의 남자가 만족스러운 얼굴이 된다. 일견 황홀경에 빠진 것 같기도 했다. 그런 남자를 향해 하티는 도톰한 붉을 입술을 달싹이며 닳고 닳은 남창처럼 웃음을 흘렸다. 그는 나긋한 어조로 가격을 말했다.
“오랄은 30$, 뒤로는 50$.”
“좋아, 타.”
그는 고양이처럼 느긋한 태도로 조수석 문을 열고는 냉큼 올라탔다. 그러자 그대로 하티를 태운 차량은 인적이 드문 으슥한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자들도 바쁘게 뒤따랐다. 물론 남자는 만족스러운 밤을 보내기보다 온몸의 피를 빨리고 날이 밝기 전에 아무 거리에나 버려질 것이다.
“정말 악취미야.”
영주라는 자가 음탕하게 남자를 유혹해서 먹어 치우니, 혈족의 체면이 남아날 리 없다. 뒤따르는 자 중 하티의 혈족이 가장 빠르게 움직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고대 흡혈귀의 종속인 덕분에 그들 역시 보통의 흡혈귀보다는 훨씬 강했고, 또 주인과는 다르게 빈틈없이 지혜롭다는 점이었다.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그들이 제 주인 챙기기에 바빠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다른 혈족으로서도 참 보기 안타까운 광경이었다.
인적이 드문 주차장, 어둠 속에서 흰색 머리카락이 짐승의 갈기처럼 흔들렸다. 덩달아 자동차도 거칠게 흔들렸다.
남자는 눈만 크게 치뜬 채 단말마조차 지르지 못했다. 생명의 불꽃이 꺼져 가고 있었다. 열린 목구멍에서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제 귀로 들려왔다. 피가 끓어올라 눈앞이 흐려졌다.
삶이 그의 곁에서 멀어져 가는 게 느껴졌다. 죽음이 그의 목 뒤에서 서늘한 손길을 뻗어오고 있었다. 죽음의 느낌은 섬뜩하도록 차가웠다.
이윽고 축 늘어지는 남자의 상체를 부둥켜 잡으며 하티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이 온통 붉게 피 칠갑 되어 있었다. 그는 혀로 입가를 핥으며 숨을 골랐다. 사신이 남자의 목을 베어 가는 모습을 나른하게 처진 눈매로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조수석으로 건너가 편하게 앉았다. 손끝에 온기가 돌았다. 한동안은 인간의 체온과 비슷할 정도로 몸이 데워져 있을 것이다. 한바탕 오르가즘을 느끼고 난 것처럼 기분 좋은 탈력감에 가르랑거렸다.
그는 누가 이런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것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순찰 중이던 경찰의 눈에 띄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다시 포식을 즐길 수 있을 텐데.
“귀찮은 놈들.”
그러나 그런 그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것들은 뜨거운 피로 가득 찬 인간이 아니라 마셨다가는 가닥가닥 혈관이 끊어져 고통스럽게만 할 흡혈귀들이었다. 먹지도 못하고 방해만 되는, 쓸모라곤 없는 족속들이었다. 세상에서 흡혈귀는 자기 혼자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영주 하티는 차 문을 열고 나와 어둠 속을 응시했다. 낯익은 녀석들도 있었고 기억이 가물가물한 얼굴들도 있었다. 그는 잠깐 그들을 보다가 발끝에 힘을 줘서 날아올랐다. 건물의 외벽을 잡고 땅 위를 달리듯 위로 뛰어 올라갔다. 건물 그림자에 몸을 묻자 어둠은 온전히 그의 모습을 숨겨 주었다. 그런 방식으로 건물과 건물 사이를 검은 표범처럼 달려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순식간에 경치가 뒤바뀌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가로수를 통해 보도로 뛰어내렸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그가 갑자기 툭 뛰어내리자 지나가던 피자 배달부가 깜짝 놀라 오토바이를 휘청거렸다. 그래도 하티는 신경도 쓰지 않고 시간을 확인하고는 느긋하게 지하철역으로 들어섰다. 밤은 아직 길었다.
괴물이 되어 잔뜩 겁줘 물어 죽이거나, 추수하는 농부처럼 부지런히 목을 따거나 그도 아니면 흔히 그 옛날 능력 없는 흡혈귀들이 사냥감을 고를 때 그러했던 것처럼 몸을 파는 약자 행세를 해 유혹하거나. 뭐 요즘은 대체로 인간 장사를 하는 놈들에게 공급받아 식사를 한다지만, 하티의 취향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역시 죽기 싫어하는 날것의 생명을 약탈하는 쪽이었다. 그 방법은 스스로 수고를 들이기만 한다면 무엇이라도 좋았다.
위협하듯 날카로운 목소리가 길을 걷는 하티를 불러 세웠다. 그가 못 들은 체하며 그러나 충분히 따라잡힐 정도로 느리게 걷자니 누군가가 난폭하게 그의 어깨를 잡아챘다.
“어이, 이 남창 새끼가! 누구 허락 받고 여기서 장사야?”
하티는 성난 얼굴로 돌려세우는 사람들을 보며 “아파요.” 하고 몸을 움츠렸다. 남자 중 한 명이 그런 하티의 얼굴을 손으로 잡아채더니 배려 없는 손길로 이리저리 돌리며 뜯어봤다. 그러더니 하티가 쓰고 있는 후드를 벗겼다. 양털처럼 하얀 머리카락이 한가득 쏟아져 내렸다. 남자들은 후드 청년의 예상 밖의 외모에 놀란 것 같았다.
하티는 겁먹은 눈으로 그들을 올려다보며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쥔 남자의 손을 붙들었다. 그리고는 애원하듯 놓아 달라고 부탁했다.
“저, 이것 좀…….”
“이것 봐라!”
감탄이 스며든 목소리가 핥듯이 하티의 목을 훑었다. 얼굴을 놓아준 남자가 짐짓 위협하듯 으르렁거렸다.
“누구 허락받고 여기서 호모질이야?”
“죄송, 잘못했어요, 여긴 다신 안 올 테니까.”
윽박지르는 소리에 하티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그 애처로운 얼굴을 보며 남자가 비열하게 웃었다.
“누가 오지 말랬나? 규칙이 있으니까 따르라는 거지.”
그를 훑어보던 다른 남자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 발은 또 왜 그 모양이야?”
“신발을 잃어버려서.”
하티가 얼굴을 붉히며 발을 꼼지락거리자 남자 중 하나가 혀를 찼다. 그러더니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하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여기서 장사를 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돼. 그보다 너라면 좀 더 돈이 될 만한 게 있는데, 어때?”
“네?”
남자는 엄지와 검지를 비비며 돈을 그렸다.
“돈 필요한 거 아냐?”
하티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몸 파는 것보다 훨씬 돈이 된다고. 한두 시간이면 몇백 불은 그냥 벌걸? 평소 하던 거 카메라 돌아가는 데서 하기만 하면 돼. 어때, 소개해 줄까?”
아아― 멍한 표정의 하티는 조금 망설인 후 백치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아!”
수평선 너머로 해가 떠올랐다. 거대한 불덩어리, 생명의 근원, 파괴의 어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이 물러가고 세상의 온갖 암흑에 속해 있는 것들은 지저 깊은 곳으로 꼭꼭 몸을 숨겼다. 온몸을 가득 채우고 있던 힘도 태양 빛 아래에선 완전히 고사하여 진득한 탈력감이 몰려들면서 몸이 축 늘어졌다. 절로 몸이 떨려 왔다. 최근 그를 이토록 전율하게 하는 것은 겨우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역시 저것만은 두렵다. 근원적인 공포와 마주하는 감각이었다. 소름 끼칠 정도로 자학적인 동시에 어쩐지 눈물이 나고 있다고 착각이 들 만큼 감동적이었다.
언젠가 선글라스를 끼지 않고, 이런 보호 장비 안에 숨지 않고― 맨몸, 맨눈으로 저 태양을 마주할 수 있다면― 바로 불길에 활활 불타올라 버리겠지만, 그마저도 영광스럽겠지.
그는 탄식하고야 말았다.
“이 세상은 완벽해!”
먹이가 되는 인류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번식하고, 또 자신 같은 괴물마저 불편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문명을 발달시켰다. 무수한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그를 둘러싼 세계는 종말을 모르는 괴물이 되어 있었다. 레코드판이 돌아간다. 스피커로 라벨의 볼레로가 흘러나와 이윽고 절정을 맞이했다.
아주 완벽한 아침이었다.
***
눈을 뜨자 낯익은 얼굴 몇몇이 보였다.
“아버지!”
“징그럽게 아버지 타령은!”
그는 넌더리를 내며 관에서 몸을 일으켰다. 관을 보는 종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꺼림칙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제 손으로 관 뚜껑을 여닫는 게 몸서리쳐질 정도로 싫은 눈치였다.
이상하기도 하지. 자신의 관은 고전적인 취향의 침실이다. 아주 아늑해서 때때로는 10년이고 100년이고 쭉 관에서 나오지 않고 내리 자고 싶어질 때도 있다. 실제로 괘씸한 종속들이 그를 관에 넣고 땅에 묻어 버린 적도 있었다. 덕분에 도로 파내 꺼내 줄 때까지 몇십 년을 땅속에 갇혀 있었다. 그런 트라우마가 있는 침실인데도 버릴 수 없다니, 이 아늑함이 얼마나 위대한지 놈들도 좀 알아야 할 텐데.
“지난밤 또 사냥 나가셨더군요?”
이놈의 잔소리쟁이는 끝도 없이 떠든다.
“먹이라면 얼마든지 가져다줄 테니 제발 사냥 다니지 마시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내 입에 풀칠은 스스로 하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니?”
“그러지 않으셔도 된다고요! 뒤처리가 얼마나 복잡한지 아세요? 게다가 이웃 혈족들의 눈치는 또 어떻고요?”
“딴 놈들 불평 따위를 내가 왜 신경 써?”
“아버지!”
“시끄럽다. 귀 아직 멀쩡해.”
그는 고풍스러운 방문을 열고 나섰다. 복도에 난 커다란 창으로 별빛이 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보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호흡에 의미는 없지만 밤의 냄새를 맡을 수는 있었다. 그 음습하고 안락한 향기에 온몸에서 혈기가 빠듯하게 휘돌아 몰아친다. 이빨이 근지러웠다. 먹고 자고 약탈하고, 이 이상의 삶이 또 어딨다고 그걸 방해하는지.
유희 중 최고는 피를 마시는 것. 생명을 갈취하고 죽은 몸에 활력을 불어넣는 섭식 행위다. 그것만은 역시 수억 번을 반복해도 질리지 않았다. 그 환희와 희열과 목숨의 구차함과 세계의 틈새에서 억지로 발붙이며 연명하는 괴리감을 어찌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있을까?
잔소리꾼이 따라붙었다.
“어디 가세요?”
“어딜 가건?”
“식사부터 하시죠.”
잔소리꾼은 그가 또 밖에 나가 사고 칠까 두려운지 우선 그에게 먹이부터 먹이려 들었다.
“아직 떠먹여 줘야 할 정도로 늙진 않았다.”
“어린 소녀입니다. 마음에 드실걸요. 약에 취하지도 않았고요.”
그는 솔깃한 제의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왕성한 흡혈귀였다. 갓 흡혈귀가 된 놈들도 자신처럼 허기지진 않을 것이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자신의 대식가 식성은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사냥 행위 그 자체를 즐겼다.
물론 오래 살아온 만큼― 이를테면 땅속에 갇혔을 때처럼 몇십 년을 섭식하지 않고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다. 기분이 좀 좋지 않아질 뿐, 아니, 심각하게 나빠질 뿐― 딱히 육신을 움직이는 데 무리가 간다거나 하는 허약한 체질은 아니었다.
하지만― 왜 굳이 이 허기를 달래며 포식자의 본능을 참아야 한단 말인가? 살아가는 한 그게 가장 큰 쾌락인데.
요즘 것들이야말로 노인네 근성으로 가득하다. 세금 징수원들처럼 규칙을 적용하고 계산하고 따지기를 좋아한다. 노예처럼 일하고 봉급 타듯 피를 마신다. 수도사도 아닌데 쾌락을 등한시한다. 그러면서 고상한 체한다.
어처구니가 없다. 대체 이놈들의 정체성은 뭐란 말인가?
세상이 바뀌면서 흡혈귀의 본질마저 변했는지, 당연한 행위를 당연하게 하는 자신이 지금은 이단자 취급을 당했다. 아니, 이치에서 벗어나 죽음에서 부활하였으니 사실 자신은 늘 이단자였다. 다만 다른 흡혈귀들이 아닌 척하는 껍데기를 덮어썼을 뿐이다. 음흉하고 약삭빠른 괴물들! 그는 싫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인상을 썼다.
“잔소리꾼들 같으니.”
“아버지! 식사는요?”
“너나 많이 먹으렴.”
그리고 그는 말릴 새도 없이 창틀에 뛰어올라 그대로 뛰어내렸다. 밤바람 속에 얼굴을 파묻고 구름 그림자 속에 몸을 숨겼다. 펄럭펄럭 나부끼는 옷을 날개처럼 퍼덕이며 저택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맨발에 흙더미가 부스러지고 바닥에는 발 모양을 본뜬 발자국이 찍혔다. 몇 걸음 걷지 않아 그의 마음은 잔뜩 들뜨고 금세 행복으로 차올랐다. 밤은 자신만의 시간이다. 오늘 밤도 그는 내키는 대로 먹어 치울 작정이었다.
***
자정이 되자 로드 하티가 도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주시하는 눈들은 기척을 죽이고 그의 뒤를 따랐다. 하티는 규칙을 따르지 않는 아주 성가신 흡혈귀였으며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괴물이기도 했다. 당연히 자신을 지켜보는 눈들의 존재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귀찮게만 하지 않으면 상관없다는 태도로 무신경하게 걸음을 옮겼다.
영주 하티가 롱아일랜드에 자리 잡은 이후, 매일 밤 그는 맨발로 뉴욕의 뒷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아무도 그가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모른다. 소문만이 무성했다.
혈족의 이름과 그의 이름이 그러하듯 하티(히타이트) 출신의 목동이란 말도 있었고 바빌론의 신관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또 그의 이름이 신화 속 인간을 포식하는 늑대 하티에게서 따왔다 여겨 게르만족의 전사가 부활한 것이라 믿기도 했다.
그러나 진실은 아무도 몰랐다.
가장 오래된 성의 영주 루파(LUPA)조차도 그녀가 태어난 로마에서 하티를 목도한 적이 여러 번 있었노라 증언한 바가 있다. 그 시절에도 그는 하룻밤에 마을 하나를 통째로 잡아먹을 정도로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는 흡혈귀였다고 했다. 전승되는 흡혈귀의 문헌을 찾아보면 그의 흔적은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잠들지 못하는 밤을 뿌리는 악마의 이야기들. 유럽 전역에 걸친 대학살의 기록이었다.
즉, 하티는 루파(LUPA)만큼 오래 살았거나 그보다 더 오래된 자였다. 어쩌면 일부 그를 숭상하는 이들이 말하듯, 정말로 모든 흡혈귀의 근원이자 시조일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아무리 거슬려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 사냥하지 말아 달라 가신들을 통해 요청할 수는 있어도 직접적으로 그에게 제재를 가할 수는 없었다. 그저 감시만 할 뿐이었다.
그는 사실 오래된 괴물이긴 해도 혈족을 이끄는 영주는 아니었다. 애당초 그에게는 혈족을 이끌 성의나 의지가 없었다. 오히려 성격만 놓고 본다면 귀족으로서의 소양이나 기품, 우아함은커녕 쓰레기라 단언해도 좋을 정도였다. 아마도 왕성한 식성으로 인해 내키는 대로 포식하다 보니 가끔 우연의 산물로 그에게 종속된 흡혈귀들이 새로 탄생하는 것을 그 자신도 막을 수 없었던 것뿐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소수의 종속들이 그를 떠받들어 모실 뿐, 그에게 로드라는 호칭은 아까웠다. 어쨌든 오늘도 그는 이끄는 이 하나 없이 혼자서 밤거리를 배회했다. 집 근처를 산책이라도 하는 듯한 가벼운 분위기였다.
얼마나 오래전이었던가?
원래 영주 하티는 대국(大國)의 국민 전체를 먹어 치운 것만큼이나 많은 인간을 잡아먹었던지라― 아주 으스스한 기운을 풍겼다고 한다. 숨결에서조차 피 냄새가 스며 나왔고,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눈빛에선 도축자의 살기가 번뜩였다. 오죽하면 밤거리에서 그와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심장마비로 쓰러지는 사람들이 속출했을까?
그랬던 살기가 그 99년의 유폐 이후 싹 사라졌다. 땅속에서 발굴한 그의 관은 썩어 문드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온 로드 하티는 아주 유순한 사람처럼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늘 그의 몸을 감싸고 떠돌던 피 냄새는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날아가던 참새가 손가락 끝에 내려앉을 수도 있을 만큼 변했다. 어처구니없는 대변화였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본질까지 변한 건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이었고, 동족들로 하여금 그를 땅에 파묻게 했던 그의 식성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하티 영주입니다. 오늘도 부랑자 같은 꼬락서니를 하고 배회하고 있습니다.”
“놓치지 말고 주시하세요.”
영주 하티는 워낙 눈에 띄는 편이라 어지간히 허튼짓을 하지 않는 한 감시자들이 그를 시선에서 놓치기도 힘들었다.
대체로 고대부터 존재해 온 흡혈귀는 키가 작았다. 그러나 그는 작지 않았다. 고대 게르만족의 평균키가 175cm를 넘었다던데 그가 게르만족이라면 평균을 조금 웃도는 선이고, 로마인(평균 160cm 초반)이라면 특출하게 큰 편이었다.
덩치는 크지 않았다. 뼈대가 가늘고 팔다리는 길쭉하게 뻗어 있었다. 몸이라곤 쓰지 않는 학자나 신관처럼도 보였다. 겉으로 봐선 무해할뿐더러 우아하고 고상하기만 했다. 그러나 단언컨대 그는 태생부터 난폭한 괴물이었다. 그 무자비한 성정은 로마의 검투사나 게르만 전사로 추측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어쨌거나 아무도 그의 기원을 몰랐지만.
출신을 짐작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외모 탓이었다. 특정 종의 특징을 초월했기 때문이었다. 너풀거리는 머리카락은 눈 덮인 설산의 북극 늑대처럼 하얗게 세었고, 눈동자는 색이 흐렸다. 옅은 갈색으로도 보이고 밝은 카키색으로도 보인다. 어떨 때는 맑은 에메랄드 바다색으로 반짝이기도 했지만 대개는 흐릿한 초록색으로 보였다. 언뜻 봐서는 백색증을 앓는 이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큰 키에 백인 특유의 하얀 피부는 페르시아 제국이 건설되기 전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지배하던 메디아인의 특징 같기도 했고, 유럽계 게르만족 같기도 했다. 백색증이 아니라면 하얀색의 결 좋은 머리는 슬라브족의 특징일 수도 있었다.
얼굴은 갸름하고 날카로웠다. 처진 눈이 아니었다면 굉장히 매서운 인상이 되었을 것이다. 대신 슬쩍 처진 눈꼬리 덕분에 나른한 인상을 풍겼다. 지켜본 결과 그 느긋한 눈매에 긴장감이 돌 때는 오직 먹이를 잡아먹을 때뿐이었다. 콧대는 로마인처럼 높았다.
고대인 특유의 이목구비의 굴곡은 종을 초월하여 신비롭도록 우아하기만 했다.
그 귀족적인 외모로 나른한 눈빛을 보내올 때면 누구든지 간에 낱낱이 발가벗겨지는 것처럼 몸 둘 바를 모르게 되었다. 후드를 덮어쓴 그의 눈동자가 고양잇과 짐승의 눈처럼 어둠 속에서도 번뜩였다.
말하자면 그는 달을 쫓는 늑대라는 이름이 더없이 잘 어울리게끔, 신비 그 자체를 두르고 있었다. 지금처럼 어둠 속에서 맨발로 도시를 거니는 모습조차 욕망을 분탕질했다.
21세기에 살아 움직이는 고대인이라니. 루파(LUPA)를 볼 때 느끼는 신비로움과 경탄은 그에게서도 비껴가지 않았다. 다만 그가 살아온 세월답게 조금만 더 지혜롭거나 절제할 줄 아는 괴물이었다면 그의 위상도 지금과는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쉽게 말해 얼굴이 아까운 성질머리란 거다. 겉과 안의 차이가 매력적인 것도 정도껏이어야지. 솔직히 하티 수준에 이르게 되면 민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하얀 흡혈귀의 걸음이 불빛으로 환한 밤거리에서 멈췄다. 밤이면 문을 닫는 가게들 대신 오히려 점등하는 가게들이 모여 있는 브루클린의 어떤 거리였다. 적당한 곳에 멈춘 그는 느긋하게 벽에 몸을 기댔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차 한 대가 그의 앞에 멈춰 섰다.
창문이 내려가고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그를 불렀다.
“어이, 거기.”
그 목소리에 따라 하티는 벽에서 몸을 일으켜 차도 쪽으로 몇 걸음 다가와 섰다.
문제는 유폐 이후 그의 얼굴에서 유순한 인상이 강해졌다는 점이다. 처진 눈꼬리로 눈웃음을 치며 생글거리는 모양새를 보니 식욕이 당긴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는 인간으로서의 죽음을 제법 어린 나이에 맞이한 덕분에 겉보기엔 풋내 날 정도로 아주 파릇파릇한 젊은이였다. 물론 그 속 모를 눈빛을 제대로 마주하고 나면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게 되겠지만.
어쨌거나 그는 인간이 느끼기에 그다지 위협적인 외관은 아니었다. 무표정하게 짐승 같은 눈을 번뜩이지만 않으면 말이다.
그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확인한 차 안의 남자가 만족스러운 얼굴이 된다. 일견 황홀경에 빠진 것 같기도 했다. 그런 남자를 향해 하티는 도톰한 붉을 입술을 달싹이며 닳고 닳은 남창처럼 웃음을 흘렸다. 그는 나긋한 어조로 가격을 말했다.
“오랄은 30$, 뒤로는 50$.”
“좋아, 타.”
그는 고양이처럼 느긋한 태도로 조수석 문을 열고는 냉큼 올라탔다. 그러자 그대로 하티를 태운 차량은 인적이 드문 으슥한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자들도 바쁘게 뒤따랐다. 물론 남자는 만족스러운 밤을 보내기보다 온몸의 피를 빨리고 날이 밝기 전에 아무 거리에나 버려질 것이다.
“정말 악취미야.”
영주라는 자가 음탕하게 남자를 유혹해서 먹어 치우니, 혈족의 체면이 남아날 리 없다. 뒤따르는 자 중 하티의 혈족이 가장 빠르게 움직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고대 흡혈귀의 종속인 덕분에 그들 역시 보통의 흡혈귀보다는 훨씬 강했고, 또 주인과는 다르게 빈틈없이 지혜롭다는 점이었다.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그들이 제 주인 챙기기에 바빠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다른 혈족으로서도 참 보기 안타까운 광경이었다.
인적이 드문 주차장, 어둠 속에서 흰색 머리카락이 짐승의 갈기처럼 흔들렸다. 덩달아 자동차도 거칠게 흔들렸다.
남자는 눈만 크게 치뜬 채 단말마조차 지르지 못했다. 생명의 불꽃이 꺼져 가고 있었다. 열린 목구멍에서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제 귀로 들려왔다. 피가 끓어올라 눈앞이 흐려졌다.
삶이 그의 곁에서 멀어져 가는 게 느껴졌다. 죽음이 그의 목 뒤에서 서늘한 손길을 뻗어오고 있었다. 죽음의 느낌은 섬뜩하도록 차가웠다.
이윽고 축 늘어지는 남자의 상체를 부둥켜 잡으며 하티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이 온통 붉게 피 칠갑 되어 있었다. 그는 혀로 입가를 핥으며 숨을 골랐다. 사신이 남자의 목을 베어 가는 모습을 나른하게 처진 눈매로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조수석으로 건너가 편하게 앉았다. 손끝에 온기가 돌았다. 한동안은 인간의 체온과 비슷할 정도로 몸이 데워져 있을 것이다. 한바탕 오르가즘을 느끼고 난 것처럼 기분 좋은 탈력감에 가르랑거렸다.
그는 누가 이런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것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순찰 중이던 경찰의 눈에 띄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다시 포식을 즐길 수 있을 텐데.
“귀찮은 놈들.”
그러나 그런 그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것들은 뜨거운 피로 가득 찬 인간이 아니라 마셨다가는 가닥가닥 혈관이 끊어져 고통스럽게만 할 흡혈귀들이었다. 먹지도 못하고 방해만 되는, 쓸모라곤 없는 족속들이었다. 세상에서 흡혈귀는 자기 혼자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영주 하티는 차 문을 열고 나와 어둠 속을 응시했다. 낯익은 녀석들도 있었고 기억이 가물가물한 얼굴들도 있었다. 그는 잠깐 그들을 보다가 발끝에 힘을 줘서 날아올랐다. 건물의 외벽을 잡고 땅 위를 달리듯 위로 뛰어 올라갔다. 건물 그림자에 몸을 묻자 어둠은 온전히 그의 모습을 숨겨 주었다. 그런 방식으로 건물과 건물 사이를 검은 표범처럼 달려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순식간에 경치가 뒤바뀌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가로수를 통해 보도로 뛰어내렸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그가 갑자기 툭 뛰어내리자 지나가던 피자 배달부가 깜짝 놀라 오토바이를 휘청거렸다. 그래도 하티는 신경도 쓰지 않고 시간을 확인하고는 느긋하게 지하철역으로 들어섰다. 밤은 아직 길었다.
괴물이 되어 잔뜩 겁줘 물어 죽이거나, 추수하는 농부처럼 부지런히 목을 따거나 그도 아니면 흔히 그 옛날 능력 없는 흡혈귀들이 사냥감을 고를 때 그러했던 것처럼 몸을 파는 약자 행세를 해 유혹하거나. 뭐 요즘은 대체로 인간 장사를 하는 놈들에게 공급받아 식사를 한다지만, 하티의 취향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역시 죽기 싫어하는 날것의 생명을 약탈하는 쪽이었다. 그 방법은 스스로 수고를 들이기만 한다면 무엇이라도 좋았다.
위협하듯 날카로운 목소리가 길을 걷는 하티를 불러 세웠다. 그가 못 들은 체하며 그러나 충분히 따라잡힐 정도로 느리게 걷자니 누군가가 난폭하게 그의 어깨를 잡아챘다.
“어이, 이 남창 새끼가! 누구 허락 받고 여기서 장사야?”
하티는 성난 얼굴로 돌려세우는 사람들을 보며 “아파요.” 하고 몸을 움츠렸다. 남자 중 한 명이 그런 하티의 얼굴을 손으로 잡아채더니 배려 없는 손길로 이리저리 돌리며 뜯어봤다. 그러더니 하티가 쓰고 있는 후드를 벗겼다. 양털처럼 하얀 머리카락이 한가득 쏟아져 내렸다. 남자들은 후드 청년의 예상 밖의 외모에 놀란 것 같았다.
하티는 겁먹은 눈으로 그들을 올려다보며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쥔 남자의 손을 붙들었다. 그리고는 애원하듯 놓아 달라고 부탁했다.
“저, 이것 좀…….”
“이것 봐라!”
감탄이 스며든 목소리가 핥듯이 하티의 목을 훑었다. 얼굴을 놓아준 남자가 짐짓 위협하듯 으르렁거렸다.
“누구 허락받고 여기서 호모질이야?”
“죄송, 잘못했어요, 여긴 다신 안 올 테니까.”
윽박지르는 소리에 하티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그 애처로운 얼굴을 보며 남자가 비열하게 웃었다.
“누가 오지 말랬나? 규칙이 있으니까 따르라는 거지.”
그를 훑어보던 다른 남자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 발은 또 왜 그 모양이야?”
“신발을 잃어버려서.”
하티가 얼굴을 붉히며 발을 꼼지락거리자 남자 중 하나가 혀를 찼다. 그러더니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하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여기서 장사를 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돼. 그보다 너라면 좀 더 돈이 될 만한 게 있는데, 어때?”
“네?”
남자는 엄지와 검지를 비비며 돈을 그렸다.
“돈 필요한 거 아냐?”
하티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몸 파는 것보다 훨씬 돈이 된다고. 한두 시간이면 몇백 불은 그냥 벌걸? 평소 하던 거 카메라 돌아가는 데서 하기만 하면 돼. 어때, 소개해 줄까?”
아아― 멍한 표정의 하티는 조금 망설인 후 백치처럼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