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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그 말대로 멀끔하고 품위 넘치게 차려입은 카스파르는 헤매는 법도 없이 곧장 하티에게 다가왔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아버지만을 향해 있었다.
“아버지, 모시러 왔습니다.”
하티는 모처럼 반색했다.
“오냐, 잘 왔다. 어서 나를 데려가라.”
그는 얼른 카스파르에게 답삭 안겨 들었다. 카스파르는 안면 근육이 실룩거려 무심코 웃는 얼굴을 할 뻔했지만 겨우 표정 관리를 하곤 하티를 안아 들었다. 버릇이 되었는지 아버지는 당연하게도 자신을 탈것 취급 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그런 응석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뭐 남들이 보면 덩치 큰 사내놈들끼리 참 유난이다, 싶게 우스꽝스러운 꼴이겠지만.
“호오― 카스파르 경이로군요.”
어느샌가 지점장의 얼굴로 갈아탄 사원의 지배자가 일어서서 보기에도 한숨이 나올 만큼 근사해 보이는 바른 자세로 인사했다.
“저희 점포를 직접 찾아 주신 건 처음이시군요.”
그러나 카스파르는 살짝 묵례만 해 보이고는 다시 하티에게만 집중했다.
“먹으려던 것 아니셨나요, 아버지?”
“아니야. 어서 이 기분 나쁜 곳을 나가자꾸나.”
카스파르는 하티의 등을 커다란 손으로 쓸며, 식용일 것이 분명한 흑인과 덩굴 사원의 점장을 번갈아 보았다. 혹시라도 아버지께 폐를 끼치진 않았는지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겉보기가 어떻든 눈앞에 미끈하게 생긴 점장과 몸 좋은 흑인은 동족을 가축으로 사육해서 내다 파는 도축꾼과 고기였다.
하티가 말했다.
“얼른 집에 가고 싶어.”
하얀 머리카락 사이로 푸른빛이 도는 초록색 눈동자가 채근하는 의미를 담아 카스파르를 응시했다. 영혼까지 그의 종인 카스파르는 군말 없이 그를 안고 자리를 떠났다.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사원의 지배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재회한 하티는 그의 눈에는 여전히 걸어 다니는 시체 꼴이나 다름없었다. 실로 사랑스러운 황폐함이었다.

***

카스파르는 덩굴 사원의 점장을 떠올렸다. 차에 타기 직전 하티가 이곳의 점장은 사원의 괴수이니 아예 엮이지 말라고 경고했기 때문이었다.
‘무서운 인간이 능청을 떨고 있었군.’
사원의 지배자를 실제로 본 외부인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존재 자체가 베일 속에 가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아버지는 언제나 옳다.
‘사원의 지배자라.’
먹이 사슬의 최상위에서 불멸을 누리며 번창할 것 같은 뱀파이어지만, 그들은 언제나 소수파였다. 흔히 민간에 알려져 있듯 그저 피를 빠는 것으로 동족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피에 각인된 힘이 아주 강력한 뱀파이어가 아니고서야 혈족을 만들기란 한없이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게다가 고위 귀족들은 혈족을 늘리는 데 굉장히 까다로운 기준을 적용했다. 결국 동족들은 언제나 소멸하는 이상으로 더 태어나지는 않았다.
그에 비해 인간 주술사들은 뱀파이어 사회보다 훨씬 강력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다. 가장 압도적인 점은 개체 수의 우월함이다.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은 인간 중, 특별한 재능을 가진 이는 역사를 통틀어 언제나 일정 비율로 태어났다. 즉, 인간이 번성함에 따라 그들 역시 번영해 왔다.
서구권에 존재하는 최소 1백만 흑법사들의 수장이 가진 힘이란 감히 가늠하기조차 힘들었다. 그런 하늘 위에 사는 오컬트의 정점이 대체 무슨 일로 이 천박한 도시로 기어 내려왔단 말인가?
그동안 탑 속에서 두문불출하며 그림자만 드문드문 보이던 괴수가 한낱 레스토랑의 점장으로 자신을 스스로 노출하다니, 그런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른 저의를 생각하자 불안부터 들었다. 혹시나 아버지께 해를 끼치진 않을지.

***

잠에서 깨어난 하티는 폭신폭신한 잠옷의 감촉에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후드에는 긴 토끼 귀가 달려 있는 흰 토끼 잠옷이었다. 최근 유행하는 복식인가? 외양이야 어떻든 보드라운 촉감이 마음에 들어 기분이 좋아진 그는 발랄한 걸음걸이로 문을 열고 나와 복도를 걸었다. 인체의 시계는 몹시도 정확해서 활짝 걷힌 커튼 사이로 창밖에는 둥그런 달이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응접실로 나오자 카스파르가 그를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그 기세가 사뭇 난폭하여 움찔 놀라자니 냉큼 끌어안고는 뺨을 비벼 댔다.
“귀여워!”
“윽, 이거 놓아라, 이놈!”
큼큼, 헛기침을 한 카스파르는 발그레 달아오른 뺨을 감추지도 않고서 말을 이었다.
“자, 잘 어울리세요.”
“이런 게 요즘 유행이냐?”
카스파르의 동공이 초점 없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하티는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세탁엔 문제가 없나? 이렇게 하얀 옷을 피로 적시면 잘 지지 않을 것 같은데.”
흠칫 놀란 카스파르가 하티를 말렸다.
“아버지, 이건 잠옷이니까 절대로 입은 채로 나가시면 안 됩니다, 아셨죠?”
“편하고 기분 좋은데?”
“속옷만 걸치고 거리를 다니는 것만큼 이상한 짓이에요.”
트레이를 끌고 응접실로 들어온 메이드복의 뱀파이어 아가씨가 두 사람 사이에 찻잔을 올렸다. 그 안에는 방금 짜낸 것이 틀림없는 따뜻한 피가 듬뿍 담겨 있었다. 달큼한 피 내음에 하티는 두 손으로 찻잔을 받치고 꿀꺽꿀꺽 내용물을 삼켰다. 그러자 메이드 아가씨는 흐뭇하게 눈을 접어 웃으며 하티의 잔을 다시 채워 주었다. 그 모양이 자식 입에 먹이를 넣어 주는 어미 새를 연상시켰다.
카스파르가 말했다.
“아버지, 어제 말씀하신 그 덩굴 사원의 지점장 말입니다.”
“음.”
“불온한 전조는 아닐는지요?”
“너는 신경 쓰지 말거라.”
물론 그렇게 말해 두었다 해서 아버지의 일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카스파르가 잠자코 있을 리 없었다.
“그가 또 아버질 성가시게 하진 않을지 염려됩니다. 무엇보다 그 존재가 이렇게 자신을 드러낸 적은 그동안 단 한 번도 없지 않았습니까?”
“천만에. 너희들이 모르고 있을 뿐, 놈은 이런 짓거릴 꽤나 다양하게 해 오고 있었지.”
실제로 사원의 괴수는 낮의 세계의 정치가로 활동한 적도 있었다. 그의 얼굴을 아는 하티는 TV를 틀었다가 등장한 젊은 정치가 뉴스에 헛웃음을 터뜨린 적도 있었다. 대체 그 능구렁이 같은 속에 뭐가 들어앉아 있는지 모를 놈이다. 그렇긴 해도―
“그 정도로 오래 살면 딱히 뒤틀리는 것마저 쉽지 않으니까.”
“네?”
아마도 사원의 괴수에게는 악(惡)의 개념이라든가 세상을 절망시키겠다는 의지 따위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사소한 선과 악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그저 균형의 수호자였다. 어쩌면 오래전에는 그에게도 굴절된 야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모든 것은 퇴색되고 이제 와서는 평범한 소일거리만 남았으리라. 이를테면 항상 염원해 왔던, 우주에 사원을 짓겠다는 동화 같은 소망이라든가. 어지간히도 하늘 위의 일에 관심이 높은 인간이라니까.
하티는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사고 치는 놈은 언제나 젊은 놈이지.”
물론 그 젊음의 기준은 남들과 좀 다른 점이 있었다.
어쨌든 증오, 복수심, 열망, 절망, 비애 따위의 과격한 감정은 젊은이의 전유물이다. 대단한 의지를 가진 놈일수록 세월에 바스러져서는 시간을 이기질 못하고 미쳐 나자빠지니― 살아남은 늙은이 중에 제대로 된 감성을 유지하고 있는 존재는 드물었다. 현생인류에게는 그나마 다행인 일일 것이다. 살아남은 이들 대부분이 감정적으로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오죽하면 하티는 자기를 고문한 괴수 놈과 코앞에서 대면하고도, 그냥 서로 신경 끄고 지내자 할 만큼 대단한 증오심조차 들지 않았겠는가 말이다.
“아버지, 그는 인간들 사이에서는 살아 있는 신이라 추앙받는 자입니다. 주의하지 않으면―”
카스파르는 평소에는 똑똑하다가도 아버지의 일만 되면 맹목적으로 돌변했다. 사실 그가 이리 날을 세워 봤자 그 괴수 놈이 마음만 먹으면 하티의 성을 쓸어버리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괜한 분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엮이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선 논하지 말거라.”
그때 있는 줄도 몰랐던 손님 한 명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흠!”
하티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하자 편안한 정장 차림의 남자는 이윽고 하티를 향해 한쪽 무릎을 굽히고 예를 표했다.
“로드 하티.”
“흥, 얼굴 없는 감시자 따위가 예까진 무슨 일이지?”
“부디 호메르라 불러 주십시오.”
그는 천천히 일어나더니 하티를 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그나저나 이것 참, 예상치 못했던 모습이십니다.”
이런 깜찍한 모습으로는 어디 가서 영주 하티라고 말해도 누구도 믿지 못하겠네요, 하고 덧붙이는 그를 향해 하티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겁대가릴 상실한 놈.”
“로드께서는 이런 음흉한 인간의 피는 맛보고 싶지 않으시겠죠?”
“글쎄. 딱히 미식 취미는 없는데?”
“참아 주십시오. 잘못 먹다가 탈 나십니다.”
저 말은 옳다. 저놈의 가문은 대대로 낮의 축복을 받아, 어둠에서 부활한 시체들이 함부로 먹으려 들었다가는 오히려 불에 타 재가 되기에 십상이었다. 코웃음을 치는 하티를 향해 그는 빈틈없이 정중한 태도로 아뢰었다.
“마침 뵈었으니, 오늘 제가 성을 방문한 까닭을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하티는 또 성가신 일이 벌어졌겠거니, 직감했다. 그가 허락의 의미로 턱을 한 번 까닥이자 호메르가 말을 이었다.
“세계의 축을 흔드는 커다란 문제가 생겼습니다.”
세계의 축. 이면 세계의 인간들은 현 세계를 크게 둘로 분리하여 보았다. 낮과 밤이라 불리는 세상과 어둠에서 부활한 시체들의 세상이 바로 그것이다.
살아 있는 자들로 구성된 ‘낮과 밤의 세계’는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큰 동력원이다. 구성원으로는 인간과 리칸트로페(반인반수)를 통틀었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는 사원의 지배자의 탐구욕에 의해 태어난 존재, 즉 유전자 변이 인간(Canis lupus mutation: 이하 CM)까지 포함하는 개념이 되었다. 이면 세계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일반인(낮의 인간)은 물론, 이면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밤의 인간들, 그리고 과학에 의해 태어난 이들까지, 즉 살아 있는 자 전부의 세상을 통틀어 가리킨다.
나머지 한 축은 ‘어둠에서 부활한 시체들의 세계’. 흡혈귀 사회는 물론 어둠에서 부활한 모든 시체, 혹은 정령의 세계를 뜻했다.
두 세계가 언제나 반목해 온 것은 필연일 것이다. 부활한 시체들은 살아 있는 자들로부터 세계의 패권을 빼앗고자 호시탐탐 노려 왔으나, 압도적인 종의 우위에 있던 낮과 밤의 세계의 주민들도 탐욕스럽긴 매한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개체 수가 번창한 만큼, 부활한 시체들보다 훨씬 큰 욕망의 집합체였고 이들은 결코 패배하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반목과 전쟁, 억압과 증오, 공포와 열망, 그 무수한 역사를 거쳐 현재는 어떠한가?
현대의 부활한 시체들은 계속되는 패배로 인해 만성 패배주의에 물든 상태였다. 지금 같아서는 시체들이 살아 있는 인간을 지배할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특히 그중에서도 뱀파이어들은 공포로 인간을 다스리기를 완전히 포기했다. 그들을 부릴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무기는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욕망과 타협. 길들이고 기만하면 훨씬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비록 영원히 주류가 되지는 못할지라도 말이다. 그렇게 고착된 현재, 두 세계는 겨우 휴전 비슷한 평화라도 얻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내 균형을 이룬 세계의 축이 흔들린다니?
호메르는 하티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스크린 세이버로 한 영상을 재생했다. 빛의 입자가 응접실 허공에서 정밀하게 3차원의 영상을 이루었다. 하티는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에 집중했다.
보이는 화면은 어딘가의 시가전인 듯했다. 치열한 접전이었다. 병사들은 쉴 새 없이 화기를 난사하고 있었다. 총구가 불을 뿜고, 폭격으로 인해 건물이 쓰러져 내린다. 전해질 리 없는 매캐한 화약 냄새가 이곳까지 풍겨 오는 것만 같았다. 영상 속 인간들은 서로가 전멸할 때까지 살육을 벌일 참인 듯싶었다. 폭발이 일어나고 휘말려 든 병사들의 시체가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이들은 다시 전진했다.
그러나 가장 불쾌한 것은 이다음에 펼쳐진 장면이었다. 폭발에 휘말렸던 이들 중 피육이 간신히 형체를 유지할 정도로 육체가 손상된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내장을 드러낸 채로, 눈알이 터져 나간 채로, 팔다리가 기괴하게 꺾인 채로, 고통을 모르는 불사신처럼 기관총을 들고 전진했다. 그런 모습은 한둘이 아니었다. 전장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카스파르가 말했다.
“언데드인가?”
그러나 분명 눈앞에 움직이고 있는 화면의 시간대는 낮이었다. 태양이 힘을 발하는 시간에 움직이는 언데드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호메르가 말했다.
“우린 이 사건을 ‘시체의 낮’이라고 부릅니다.”
“이것들은 뭐지?”
하티는 미친 듯이 정면을 향해 총기를 난사하고 있는 시체를 쳐다보았다.
“이건 그냥 시체잖아?”
“그렇습니다. 확실히 생체 활동은 이미 한 번 종말을 맞았습니다. 지금은 강제로 움직이고 있죠. 기계의 힘을 빌려 말입니다.”
호메르의 손짓에 따라 빛의 파편이 흩어지고 시가전의 영상 대신 한 사람의 형상으로 재구성되었다. 젊고 연예인처럼 잘생겼으며 품위 넘치는 청년의 모습이었다. 그를 가리키며 호메르가 말했다.
“진 패트럴. 몇 해 전 사망한 인물입니다. 그가 죽기 전 개발해 낸 병기가 있는데, 생체 이식용 나노 머신으로 살아 있는 생물의 몸속에 심는 형태죠. 숙주의 신체를 파괴하거나 더 강력한 힘을 내게끔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번 ‘시체의 낮’의 주범은 그것의 개량형으로 보입니다. 스스로 동력원을 공급할 뿐만 아니라 생체 활동이 멈춘 시체까지도 조종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데드맨 바이러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또 데드맨 바이러스에 감염당한 이 시체들을 우리는 데드맨이라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티의 눈엔 이 해프닝이 세계의 축을 흔들 만큼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어차피 인간들에게는 더 강력한 첨단 병기들이 많지 않은가? 성가시다면 쓸어버리면 되지. 그러나 호메르는 슬쩍 미간을 찌푸리고는 말을 이었다.
“데드맨 바이러스의 가장 골치 아픈 점은 전염성에 있습니다. 이것들은 스스로 번식합니다.”
진 패트럴의 모습이 하나의 데드맨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입자들은 데드맨의 내부 모습을 비추었다. 점으로 표시된 나노 칩들이 자가 분열하는 게 보였다.
“ 한 번쯤 좀비 영화를 본 적 있으시겠죠? 이 작은 살인 병기들은 스스로 다른 개체로의 이식이 가능합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카스파르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졌다. 로드 하티와 같은 포식자들이 셀 수도 없이 자가 증식 할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이 생체 병기를 이용하려는 자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이대로라면 인간들과 함께 뱀파이어 사회도 공멸할지도 모릅니다.”
흡혈귀는 오직 살아 있는 인간의 피만을 섭취할 수 있다. 확실히 온통 죽은 자들만 거리에 돌아다니게 되면 흡혈귀도 마찬가지로 곤란해진다.
카스파르가 물었다.
“진행 상황은?”
“통제하고는 있지만 어떤 루트로든 퍼져 나가고 있어. 배후에서 이걸 개량해 낸 인물이 조종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배후라 함은?”
호메르는 안경을 꺼내 쓰며 하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는 이 데드맨들의 배후에 사원이 있을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인체 개조 실험이라. 사원의 지배자는 원래 이런 놀이가 취미인 인간이긴 했다. 일견 그의 추측이 타당해 보였다. 그리고 호메르가 굳이 여기까지 찾아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여차하면 자신이 가진 유물을 사용해 주길 바라는 것이다.
하티는 돈이 최고인 이 세상에서 돈 주고도 못 구하는 신묘한 힘을 가진 유물들을 셀 수도 없이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 유물은 누군가에게는 박물관이나 사원에 봉헌되어 귀중하게 관리해야 할 가치가 있는 보물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쓰다 질려 팽개쳐 놓은 고물일 수도 있는 법이다. 하티가 말했다.
“감시자로서의 소견인가?”
“그렇습니다, 로드. 사원의 개입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 아기 양, 늑대, 괴물, 악마, 마왕― 불리는 호칭이 하도 많은 하티는 자신을 존중하지도 않으면서 로드라 부르는 호메르를 마땅찮은 눈으로 보았다. 더욱이 이놈은 언제고 자신을 파멸시킬 준비가 된 유력한 후보 중 하나였다. 하티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기술이 흘러들어 간 경로를 파악해. 그러지 않고서 사원의 지배자를 압박할 수는 없어. 그는 위험한 자다.”
“물론입니다, 로드.”
빙글빙글 웃고 있는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놈 중 하나였다. 낮의 세계를 수호하는 일곱 기사 가문의 일좌이자 낮과 밤의 경계를 지키는 파수꾼으로 인간을 위해서라면 무슨 위험한 짓을 벌일지 모르는 광기의 결정체이기도 했다. 그리고 낮의 세계에서는 범죄를 소탕하는 초법적 국제기관 특별경찰의 총감이기도 했다.
그래서 하티는 그의 예의 바른 얼굴에도 결코 속지 않았다. 그의 아비도, 그 아비의 아비도, 먼 조상까지 저리 웃는 얼굴로 무서운 짓들을 벌여 왔다. 더군다나 최근 그는 먼 옛날 인간들이 마왕 하티에 대적하기 위해 만든 생체 병기를 입수했다지 않았던가?
하티가 말했다.
“네놈이 샌시의 왕을 끌어들인 건 이미 알고 있느니라, 이 영악한 인간아.”
“쓸 만한 부하지요.”
호메르는 그저 싱긋 웃어 보였다. 그의 가장 원대한 꿈은 살아생전 눈앞의 흡혈귀를 지구에서 영원히 추방하는 것이었다. 하티는 그의 웃는 낯이 서푼 가치도 없는 가식일 뿐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리칸트로페인지 개조 인간인지 분간도 못 하는 덜떨어진 사냥개라도 너희들 수준에선 쓸 만한가 보구나.”
그 통렬한 비웃음에도 호메르는 그저 웃기만 했다.
“어설프게 일을 벌였다간 네놈이 아끼는 부하들을 다 먹어 치워 버릴 줄 알거라.”
“잘 알고 있습니다, 로드. 경고는 명심하도록 하지요.”
그런 차림으로 위협해 봤자 귀엽기만 하지만요. 하고 능글맞게 덧붙이는 호메르를 보며 하티는 흥, 코웃음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