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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과외 선생님(개정판)
1화
프롤로그
“미친년.”
평상시 욕이라고는 해 본적이 없던 해란은 입에서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황금 같은 알바시간을 뒤로 하고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왔더니 한다는 말에 머리에서 스팀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넌 몰라, 이년아.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난 정말 그 놈을 사랑한다고.”
눈물 콧물 다 빼면서 소리질러대는 주희의 모습에 가뜩이나 경직된 해란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추해. 얼굴이나 돌려.”
차가운 한마디에 기어이 대성통곡하는 친구란 인간 때문에 조용한 카페에서 향긋한 커피 향을 즐기는 사람들의 이목이 그대로 모여들었지만 주희의 울음소리는 커져가기만 했다.
“아주 널을 뛰네. 킹카 잡는다고 나이트 열라 뛰더니 겨우 잡은 게 시바쓰리냐?”
“시끄러! 너 같은 년이 내 맘을 어케 알아. 내가 이래 될 줄 알았냐고.”
“진짜 신발스럽네.”
정말 기도 안 찼다. 참으려 해도 절로 욕이 나왔다. 가끔 맛이 가는 애 인줄은 알았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얼굴, 돈, 능력 다 따진다며? 그래서 나이트 뛴다며?”
황당하다 못해 이제는 질린다. 세상이 하도 편하니 저런 말이 나오지 싶어 지금이라도 확 일어나고픈 마음을 억지로 누르며 해란은 겨우 주위의 시선을 의식했다.
“좀 그치지. 쪽 시러우니까.”
“흑~ 나도 알아. 내가 미친년이라는 거. 하지만 사람 마음이 맘대로 되니?”
“네가 팔자가 편한가 보네. 그래, 그랬는데 어쩌라고. 당장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미친! 내가 총 맞았냐. 결혼은 무슨.”
더 가관이다. 도대체 그것도 아니라면 이 황금 같은 시간을 왜 여기다 쳐 바르고 있는 걸까?
“똑바로 말해. 도대체 문제가 뭐야. 왜 울고불고 난리인건데?”
가끔은 저 친구 년이라는 인간의 머리를 해부해 알알이 파헤치고 싶은 충동이 들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예 연을 끊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기가 막히잖아. 겨우 내 남자라는 생각이 든 인간이 그거라니.”
“그게 다야?”
신세한탄 하는 주희의 말에 점점 차가워지는 해란의 모습을 정작 당사자인 주희는 못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 나이트 물 좋았다고. 너도 알잖아. 나 인기 많은 거. 이 얼굴에 이 미모면 어디든 안 통하는 데가 없다는 거. 그래 자주 다니다 보니 그 녀석하고 가까이 지내게 되고, 그러다 보니 갈 때까지 가고. 근데 그게 화근이더라고. 그 인간 침대에서는 끝내주거든.”
“입 다물어.”
해란은 언제 울었냐는 듯 천진하게 떠드는 주희의 입에 걸레라도 있으면 당장 물리고픈 심정이었다. 스스로 말하지 않아도 주희의 외모는 어디 내놔도 꿀리지 않는다는 건 같이 다니는 해란이 뼛속까지 느끼고 있었다.
화려한 외모와 스스로 꾸밀 줄 아는 여자 정주희는 꽤 헤픈 축에 속했다. 정조관념이라는 건 애초에 없는, 그저 순간순간을 즐기는 이시대의 자유분방함을 표방한 망나니 과였다.
그런 주희와 해란이 친구라는 건 불가사의지만 서로의 단점을 인정하고 나면 그 다음은 거슬릴 것이 없는 좋은 인간이 또 주희였다.
나름 의리도 있고 다혈질인 그녀의 모습에서 해란은 가끔은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스스로에게 여왕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멋진 남자를 섭렵하겠다며 공부나 학교와는 담을 쌓고 나이트를 전전하더니, 결국은 엮인 게 웨이터였다. 그 웨이터 닉네임이 씨바쓰리였으니 정말 신발스러운 일이었다.
주희의 아버지는 몫 좋은 곳에 주유소 두어 개를 운영 하는 사업가였고 엄마도 강남에서 꽤 잘 나가는 사립 고등학교의 영어교사였다. 어떻게 그런 집안에서 저런 망나니 딸이 나온 걸까? 혹시 저 인간은 주워온 딸인가 싶은 의혹을 감출 수 없게 하는 존재가 정 주희였다.
“너, 당분간은 연락하지 마.”
더 이상은 들어 줄 수가 없었다.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해란이 거칠게 가방을 들고 일어서자 훌쩍이며 주절거리던 주희의 눈이 똥그래졌다.
“왜 그래? 너까지 그러면 난 어쩌라고.”
애절한 표정을 보니 주먹이라도 나갈 것 같아 이를 악문 해란은 잠시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너 팔자 편한가 본데 난 아니거든. 그 시답잖은 하소연 들어주려다 알바 잘릴 지경이라고. 너야 능력 있는 부모 만나 등록금, 생활비 걱정 없다지만 난 아니거든. 하루라도 알바 안 하면 학교생활 자체가 흔들려. 네가 웨이터를 만나든 삐끼를 만나던 그게 무슨 상관인데? 그게 사람 혼 빠지게 뛰어 나올 만큼 대단한 일이야? 정신 차려, 이 지지배야. 세상에 다 너 같은 인간만 있는 줄 알아?”
갑자기 울며불며 매달리는 통에 무슨 큰일이라도 있나 싶어 달래고 얼러 카페로 데리고 들어왔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이너마이트라도 있으면 저 인간의 입에 물리고 터트리고 싶다.
“저…… 기. 해란아.”
“내 이름도 부르지 마. 징글징글하니까. 어차피 그 죽고 못 사는 시바쓰리인가 신발쓰리인가도 흥미 떨어지면 끝낼 거잖아. 그러니 네 맘대로 하라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연락하지 마. 연락하면 너, 너희 집에 네 행동 다 알릴 테니까 알아서 해.”
멍하니 바라보는 주희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 밖으로 나온 해란은 곧 후회했다. 그녀가 저러는 게 하루 이틀이던가.
항상 같은 식으로 당하며 기가 차 하던 자신인데 오늘은 다른 날보다 더 화가 난 것뿐이다.
주희가 문제가 아니라 해란 스스로의 문제가 겹쳐 감정이 더 실려 버렸다. 내일이라도 사과하며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웃으며 만날 주희기에 사실 걱정스럽지도 않았다. 문제는 이제 앞으로의 일이었다. 늦었다고 설마 자르기야 할까. 아르바이트 가게에 전화로 사정을 설명한 해란은 가까이 있는 공원으로 가 의자에 주저앉았다
“어디서 찾는다…….”
자기가 무슨 타조새끼도 아니고 일치고 도망가면 모든 일이 해결될 거라고 믿는 이 심보 고약한 인간을 찾을 생각을 하니 앞이 깜깜해진다.
도망간 인간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돈이었다. 가뜩이나 학자금 대출 받은 것도 이제는 힘에 부쳤다. 갚을 길도 막막한데 더 받을 수도 없는 일, 집에서 난리칠 엄마를 떠올리니 진짜 이대로 땅으로 꺼지고 싶을 뿐이었다.
“미친 새끼. 지가 고딩이면 공부나 할 것이지, 또라이 같은 새끼.”
진짜 일 년 치 욕을 오늘 하루에 다 하는 것 같았다. 어디 하소연 할 곳도 없고 그저 앞이 캄캄하기만 하니 어깨가 축 늘어지며 한숨만 나왔다.
“미치겠다고, 진짜. 도와주지 못할 거면 적어도 피해는 주지 말아야지. 미친 또라이 새끼.”
순간 뻗치는 화를 못 참고 벌떡 일어나 소리소리 질러대는 해란의 모습에 지나던 사람들이 흠칫하며 슬슬 피해가고 있었다.
커다란 뿔테 안경에 대충 묶어 올린 더벅머리, 남자용 사파리를 아무렇게나 걸치고 가방을 휘두르는 그녀의 모습은 갓 하얀 집에서 탈출한 환자로 보이기에 딱 이었다. 하지만 해란은 주위의 시선조차 신경 쓸 틈이 없을 정도로 약이 올라 있었다.
한동안 작은 공원에 위치한 의자에는 아무도 가까이 하는 사람이 없었고, 오직 고래고래 소리질러대며 가방을 휘두르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인간의 모습을 한 괴물이 날뛰고 있었다.
제1장 시작, 그 처음은……
아침부터 통곡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나오니 입맛이 썼다. 한두 번도 아니고 사고치고 도망가는 게 일상사인 동생 놈 때문에 그나마 엉망인 집안이 또 한 번 뒤집어진 것이다.
죽일 놈 살릴 놈 하면서도 막상 일터지면 항상 다 해결해 주며 오냐오냐 키웠으니, 이젠 욕만 한 번 먹으면 끝이라는 생각을 안 하면 그게 병신일 터였다.
아마 어디엔가 숨어서 일 해결되면 기어들어오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이번에는 심했다.
“그것도 아들이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밥상을 들고 나온 해란은 여전히 주저앉아 울고 있는 엄마 앞에 내려놓았다.
“엄마, 밥이라도 먹어.”
“넌 이 상황에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 네 년이 원래 쌀쌀맞은 건 알지만 그래도 동생이 그러고 사라졌다는데 편하게 밥이 넘어가드나?”
“그래도 기운을 차려야 애를 찾던가 하지. 그러니 우선 먹어.”
“그러게 그 비싼 등록금 내가면서 뭔 놈의 대학이야. 우리 형편에 언감생심이지. 차라리 돈을 벌어 도와주면 어데 덧나냐? 암튼 아들이나 딸이나 소용이 없어. 남편 복 없는 년이 무슨 영화가 있어 자식복을 볼까?”
아침 한번 먹이려다가 또다시 잔소리가 퍼부어졌다. 항상 사고는 동생이 치고 그 뒷감당은 해란이 몫이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해결한다고 했는데도 원망 역시 고스란히 돌아왔다.
“해란이는 먼저 먹고 학교 가라. 늦겠어.”
보다 못한 아버지가 해란이의 편을 들며 재촉했지만 이미 밥을 먹을 상황은 아니었다. 주섬주섬 가방을 들고 나오는 뒤로 이제는 상대를 바꾸어 아빠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며 난리치는 엄마의 음성이 들려왔다.
낡디 낡은 빌라. 해란은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 같은 빌라 계단에 주저앉아 잠시 스스로를 다독였다.
가난한 건 문제가 아니었다. 한번도 부유했던 기억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엄마의 원망어린 독설은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트린다. 항상 자신의 잘못은 없고 주변 사람의 탓으로 몰아 모두를 원망하며 살아가는 엄마를 볼 때마다 해란은 숨이 막혔다.
징그럽게 이기적인 동생도 , 모든 잘못이 다른 사람에게 있다고 믿으며 끊임없는 원망과 불평으로 살아가는 엄마도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당할 때마다 이가 갈렸다.
저녁에 집에 들어가면 아마도 더 엉망인 꼴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시달림을 참다못한 아빠가 폭발이라도 하면 어떤 꼴이 될지 안 봐도 훤해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이 더욱 무겁기만 했다.
생각 같아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뿐이지만 달리 갈 곳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참 초라한 삶이 아닐 수 없었다. 남들과 같은 고민으로 밤을 새우기는커녕, 항상 무엇인가에 쫓기듯 조바심치며 조용한 밤이 오면 무사히 끝난 하루에 감사하는 삶.
나이가 들면 그런대로 나아질 줄 알았건만 나이만큼의 고민과 어려움이 따라왔다. 아니, 더 심각해지고 있었다. 언젠가 벗어날 날이 있기나 한건지…….
사실 신세한탄 하는 것도 우스웠다. 당장 일어난 일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듯 두통이 밀려왔다.
다음 학기 장학금을 생각하면 공부만 해도 힘든데 지금 상황은 휴학을 해야 할 지도 모른다.
졸업까지 이년인데 그것마저도 허락을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대학이라는 건 어울리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오기라고 해도 좋았다. 그래도 대학을 나오고 당당해지고 싶었다.
오전 강의가 빈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집을 나온 해란은 이제 막 봄 바람이 부는 거리의 부산함을 느끼며 옷깃을 여몄다. 얇아지는 사람들의 옷차림과는 대조적으로 해란의 옷은 아직도 겨울에 머물러 있었다.
물 빠진 청바지에 대충 걸친 흰 티를 사파리잠바로 감싼 해란은 언뜻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리송해 보였다. 거기다 머리감는 것도 귀찮아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모습은 막 가출한 고삐리처럼 보이게도 했다.
게다가 어딘가 많이 쓸쓸하고 처량한 기운까지 곁들어 지나는 사람들이 슬금슬금 비켜주고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낡은 스니커즈끝을 바라보며 걸어갈 뿐이었다.
학교까지 다섯 정거장이지만 급하지 않으면 걸어 다녔다. 단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기를 썼는데 그것도 모자란 모양이었다.
“야! 주해란, 주 해란.”
날카롭게 울리는 자신의 이름에 문득 고개를 드니 주희가 빨간색의 네모 깍뜻한 경차를 운전하며 애타게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얼른 타. 클랙션을 얼마나 눌렀는데 한번을 안 돌아보냐. 짜증나게.”
어제의 일이 꿈이라도 되는 양 밝은 얼굴로 웃고 있는 친구라는 이름을 단 인간을 보니 해란은 기가 막혔다.
빨간색의 귀여운 경차라는 게 원래 여자애가 몰기에도 부담 없는 예쁜 차인 건 분명하지만 운전하는 인간이 지나치게 화려하면 꽤 웃기는 모양새가 된다는 걸 이 정신 나간 여자는 알고나 있을까?
하지만 해란은 내색하지 않고 구겨지듯이 조수석에 올랐다.
“오늘은 어떻게 더 화려하다.”
짙은 꽃 분홍 원피스에 어디서 구한 건지 화려한 분홍차양이 달린 모자까지, 온 몸을 분홍으로 감싼 주희의 모습에 해란은 당장이라도 내려 다시 걸어가고픈 충동이 일었다.
물론 다른 사람이라면 천박하거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겠지만 주희에게는 제법 잘 어울린다. 그래도 사람의 시선을 끄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기분 전환이야. 봄도 무르익었고 나도 새로운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려는. 그런데 넌 강의 없잖아.”
“오전 강의만 없어.”
“나도 알아. 지금 그 이야기 하는 거잖아. 기분은 좀 풀렸어?”
“뭘?”
“어제 화나서 가 버렸잖아.”
“내가 화난 건 알았냐?”
“내가 바보냐?”
주희의 밝은 웃음에 해란도 억지 미소를 지어보였다.
피아노학과를 다니는 주희는 모든 것이 자유로운 애였다. 돈에 구애 받는 것도 아니고, 그저 제대로 졸업해 근사한 남자 만나 사모님소리 들으며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편하게 사는 아이기도 했다.
외모도 근사했다. 꾸미지 않아도 충분히 예쁜 주희는 스스로도 잘난 외모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고생이라고는 해 본적도 없어 보이는 손으로 가볍게 핸들을 잡고 차안에 흐르는 발라드에 맞춰 손끝을 까닥이는 모습에는 여유가 넘친다.
물론 그 기다랗고 예쁘게 색칠된 손톱을 보면 저 애가 정말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 맞는지 의문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피아노로 기본은 한다니 믿을 수밖에.
“시바쓰리는 해결된 거야?”
“해결은 무슨. 네 말대로 즐기다 끝나면 되지. 그래서 말인데, 오늘 같이 안 갈래?”
“어딜?”
“어디겠어? 무도회장이지.”
“미친! 너나 가. 나 할 일 있어.”
“알바? 하루쯤 제껴라. 너 그러다 재벌 되겠다.”
“시끄러. 그렇잖아도 심란해 죽을 지경이야.”
1화
프롤로그
“미친년.”
평상시 욕이라고는 해 본적이 없던 해란은 입에서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황금 같은 알바시간을 뒤로 하고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왔더니 한다는 말에 머리에서 스팀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넌 몰라, 이년아.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난 정말 그 놈을 사랑한다고.”
눈물 콧물 다 빼면서 소리질러대는 주희의 모습에 가뜩이나 경직된 해란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추해. 얼굴이나 돌려.”
차가운 한마디에 기어이 대성통곡하는 친구란 인간 때문에 조용한 카페에서 향긋한 커피 향을 즐기는 사람들의 이목이 그대로 모여들었지만 주희의 울음소리는 커져가기만 했다.
“아주 널을 뛰네. 킹카 잡는다고 나이트 열라 뛰더니 겨우 잡은 게 시바쓰리냐?”
“시끄러! 너 같은 년이 내 맘을 어케 알아. 내가 이래 될 줄 알았냐고.”
“진짜 신발스럽네.”
정말 기도 안 찼다. 참으려 해도 절로 욕이 나왔다. 가끔 맛이 가는 애 인줄은 알았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얼굴, 돈, 능력 다 따진다며? 그래서 나이트 뛴다며?”
황당하다 못해 이제는 질린다. 세상이 하도 편하니 저런 말이 나오지 싶어 지금이라도 확 일어나고픈 마음을 억지로 누르며 해란은 겨우 주위의 시선을 의식했다.
“좀 그치지. 쪽 시러우니까.”
“흑~ 나도 알아. 내가 미친년이라는 거. 하지만 사람 마음이 맘대로 되니?”
“네가 팔자가 편한가 보네. 그래, 그랬는데 어쩌라고. 당장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미친! 내가 총 맞았냐. 결혼은 무슨.”
더 가관이다. 도대체 그것도 아니라면 이 황금 같은 시간을 왜 여기다 쳐 바르고 있는 걸까?
“똑바로 말해. 도대체 문제가 뭐야. 왜 울고불고 난리인건데?”
가끔은 저 친구 년이라는 인간의 머리를 해부해 알알이 파헤치고 싶은 충동이 들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예 연을 끊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기가 막히잖아. 겨우 내 남자라는 생각이 든 인간이 그거라니.”
“그게 다야?”
신세한탄 하는 주희의 말에 점점 차가워지는 해란의 모습을 정작 당사자인 주희는 못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 나이트 물 좋았다고. 너도 알잖아. 나 인기 많은 거. 이 얼굴에 이 미모면 어디든 안 통하는 데가 없다는 거. 그래 자주 다니다 보니 그 녀석하고 가까이 지내게 되고, 그러다 보니 갈 때까지 가고. 근데 그게 화근이더라고. 그 인간 침대에서는 끝내주거든.”
“입 다물어.”
해란은 언제 울었냐는 듯 천진하게 떠드는 주희의 입에 걸레라도 있으면 당장 물리고픈 심정이었다. 스스로 말하지 않아도 주희의 외모는 어디 내놔도 꿀리지 않는다는 건 같이 다니는 해란이 뼛속까지 느끼고 있었다.
화려한 외모와 스스로 꾸밀 줄 아는 여자 정주희는 꽤 헤픈 축에 속했다. 정조관념이라는 건 애초에 없는, 그저 순간순간을 즐기는 이시대의 자유분방함을 표방한 망나니 과였다.
그런 주희와 해란이 친구라는 건 불가사의지만 서로의 단점을 인정하고 나면 그 다음은 거슬릴 것이 없는 좋은 인간이 또 주희였다.
나름 의리도 있고 다혈질인 그녀의 모습에서 해란은 가끔은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스스로에게 여왕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멋진 남자를 섭렵하겠다며 공부나 학교와는 담을 쌓고 나이트를 전전하더니, 결국은 엮인 게 웨이터였다. 그 웨이터 닉네임이 씨바쓰리였으니 정말 신발스러운 일이었다.
주희의 아버지는 몫 좋은 곳에 주유소 두어 개를 운영 하는 사업가였고 엄마도 강남에서 꽤 잘 나가는 사립 고등학교의 영어교사였다. 어떻게 그런 집안에서 저런 망나니 딸이 나온 걸까? 혹시 저 인간은 주워온 딸인가 싶은 의혹을 감출 수 없게 하는 존재가 정 주희였다.
“너, 당분간은 연락하지 마.”
더 이상은 들어 줄 수가 없었다.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해란이 거칠게 가방을 들고 일어서자 훌쩍이며 주절거리던 주희의 눈이 똥그래졌다.
“왜 그래? 너까지 그러면 난 어쩌라고.”
애절한 표정을 보니 주먹이라도 나갈 것 같아 이를 악문 해란은 잠시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너 팔자 편한가 본데 난 아니거든. 그 시답잖은 하소연 들어주려다 알바 잘릴 지경이라고. 너야 능력 있는 부모 만나 등록금, 생활비 걱정 없다지만 난 아니거든. 하루라도 알바 안 하면 학교생활 자체가 흔들려. 네가 웨이터를 만나든 삐끼를 만나던 그게 무슨 상관인데? 그게 사람 혼 빠지게 뛰어 나올 만큼 대단한 일이야? 정신 차려, 이 지지배야. 세상에 다 너 같은 인간만 있는 줄 알아?”
갑자기 울며불며 매달리는 통에 무슨 큰일이라도 있나 싶어 달래고 얼러 카페로 데리고 들어왔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이너마이트라도 있으면 저 인간의 입에 물리고 터트리고 싶다.
“저…… 기. 해란아.”
“내 이름도 부르지 마. 징글징글하니까. 어차피 그 죽고 못 사는 시바쓰리인가 신발쓰리인가도 흥미 떨어지면 끝낼 거잖아. 그러니 네 맘대로 하라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연락하지 마. 연락하면 너, 너희 집에 네 행동 다 알릴 테니까 알아서 해.”
멍하니 바라보는 주희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 밖으로 나온 해란은 곧 후회했다. 그녀가 저러는 게 하루 이틀이던가.
항상 같은 식으로 당하며 기가 차 하던 자신인데 오늘은 다른 날보다 더 화가 난 것뿐이다.
주희가 문제가 아니라 해란 스스로의 문제가 겹쳐 감정이 더 실려 버렸다. 내일이라도 사과하며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웃으며 만날 주희기에 사실 걱정스럽지도 않았다. 문제는 이제 앞으로의 일이었다. 늦었다고 설마 자르기야 할까. 아르바이트 가게에 전화로 사정을 설명한 해란은 가까이 있는 공원으로 가 의자에 주저앉았다
“어디서 찾는다…….”
자기가 무슨 타조새끼도 아니고 일치고 도망가면 모든 일이 해결될 거라고 믿는 이 심보 고약한 인간을 찾을 생각을 하니 앞이 깜깜해진다.
도망간 인간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돈이었다. 가뜩이나 학자금 대출 받은 것도 이제는 힘에 부쳤다. 갚을 길도 막막한데 더 받을 수도 없는 일, 집에서 난리칠 엄마를 떠올리니 진짜 이대로 땅으로 꺼지고 싶을 뿐이었다.
“미친 새끼. 지가 고딩이면 공부나 할 것이지, 또라이 같은 새끼.”
진짜 일 년 치 욕을 오늘 하루에 다 하는 것 같았다. 어디 하소연 할 곳도 없고 그저 앞이 캄캄하기만 하니 어깨가 축 늘어지며 한숨만 나왔다.
“미치겠다고, 진짜. 도와주지 못할 거면 적어도 피해는 주지 말아야지. 미친 또라이 새끼.”
순간 뻗치는 화를 못 참고 벌떡 일어나 소리소리 질러대는 해란의 모습에 지나던 사람들이 흠칫하며 슬슬 피해가고 있었다.
커다란 뿔테 안경에 대충 묶어 올린 더벅머리, 남자용 사파리를 아무렇게나 걸치고 가방을 휘두르는 그녀의 모습은 갓 하얀 집에서 탈출한 환자로 보이기에 딱 이었다. 하지만 해란은 주위의 시선조차 신경 쓸 틈이 없을 정도로 약이 올라 있었다.
한동안 작은 공원에 위치한 의자에는 아무도 가까이 하는 사람이 없었고, 오직 고래고래 소리질러대며 가방을 휘두르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인간의 모습을 한 괴물이 날뛰고 있었다.
제1장 시작, 그 처음은……
아침부터 통곡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나오니 입맛이 썼다. 한두 번도 아니고 사고치고 도망가는 게 일상사인 동생 놈 때문에 그나마 엉망인 집안이 또 한 번 뒤집어진 것이다.
죽일 놈 살릴 놈 하면서도 막상 일터지면 항상 다 해결해 주며 오냐오냐 키웠으니, 이젠 욕만 한 번 먹으면 끝이라는 생각을 안 하면 그게 병신일 터였다.
아마 어디엔가 숨어서 일 해결되면 기어들어오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이번에는 심했다.
“그것도 아들이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밥상을 들고 나온 해란은 여전히 주저앉아 울고 있는 엄마 앞에 내려놓았다.
“엄마, 밥이라도 먹어.”
“넌 이 상황에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 네 년이 원래 쌀쌀맞은 건 알지만 그래도 동생이 그러고 사라졌다는데 편하게 밥이 넘어가드나?”
“그래도 기운을 차려야 애를 찾던가 하지. 그러니 우선 먹어.”
“그러게 그 비싼 등록금 내가면서 뭔 놈의 대학이야. 우리 형편에 언감생심이지. 차라리 돈을 벌어 도와주면 어데 덧나냐? 암튼 아들이나 딸이나 소용이 없어. 남편 복 없는 년이 무슨 영화가 있어 자식복을 볼까?”
아침 한번 먹이려다가 또다시 잔소리가 퍼부어졌다. 항상 사고는 동생이 치고 그 뒷감당은 해란이 몫이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해결한다고 했는데도 원망 역시 고스란히 돌아왔다.
“해란이는 먼저 먹고 학교 가라. 늦겠어.”
보다 못한 아버지가 해란이의 편을 들며 재촉했지만 이미 밥을 먹을 상황은 아니었다. 주섬주섬 가방을 들고 나오는 뒤로 이제는 상대를 바꾸어 아빠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며 난리치는 엄마의 음성이 들려왔다.
낡디 낡은 빌라. 해란은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 같은 빌라 계단에 주저앉아 잠시 스스로를 다독였다.
가난한 건 문제가 아니었다. 한번도 부유했던 기억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엄마의 원망어린 독설은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트린다. 항상 자신의 잘못은 없고 주변 사람의 탓으로 몰아 모두를 원망하며 살아가는 엄마를 볼 때마다 해란은 숨이 막혔다.
징그럽게 이기적인 동생도 , 모든 잘못이 다른 사람에게 있다고 믿으며 끊임없는 원망과 불평으로 살아가는 엄마도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당할 때마다 이가 갈렸다.
저녁에 집에 들어가면 아마도 더 엉망인 꼴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시달림을 참다못한 아빠가 폭발이라도 하면 어떤 꼴이 될지 안 봐도 훤해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이 더욱 무겁기만 했다.
생각 같아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뿐이지만 달리 갈 곳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참 초라한 삶이 아닐 수 없었다. 남들과 같은 고민으로 밤을 새우기는커녕, 항상 무엇인가에 쫓기듯 조바심치며 조용한 밤이 오면 무사히 끝난 하루에 감사하는 삶.
나이가 들면 그런대로 나아질 줄 알았건만 나이만큼의 고민과 어려움이 따라왔다. 아니, 더 심각해지고 있었다. 언젠가 벗어날 날이 있기나 한건지…….
사실 신세한탄 하는 것도 우스웠다. 당장 일어난 일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듯 두통이 밀려왔다.
다음 학기 장학금을 생각하면 공부만 해도 힘든데 지금 상황은 휴학을 해야 할 지도 모른다.
졸업까지 이년인데 그것마저도 허락을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대학이라는 건 어울리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오기라고 해도 좋았다. 그래도 대학을 나오고 당당해지고 싶었다.
오전 강의가 빈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집을 나온 해란은 이제 막 봄 바람이 부는 거리의 부산함을 느끼며 옷깃을 여몄다. 얇아지는 사람들의 옷차림과는 대조적으로 해란의 옷은 아직도 겨울에 머물러 있었다.
물 빠진 청바지에 대충 걸친 흰 티를 사파리잠바로 감싼 해란은 언뜻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리송해 보였다. 거기다 머리감는 것도 귀찮아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모습은 막 가출한 고삐리처럼 보이게도 했다.
게다가 어딘가 많이 쓸쓸하고 처량한 기운까지 곁들어 지나는 사람들이 슬금슬금 비켜주고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낡은 스니커즈끝을 바라보며 걸어갈 뿐이었다.
학교까지 다섯 정거장이지만 급하지 않으면 걸어 다녔다. 단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기를 썼는데 그것도 모자란 모양이었다.
“야! 주해란, 주 해란.”
날카롭게 울리는 자신의 이름에 문득 고개를 드니 주희가 빨간색의 네모 깍뜻한 경차를 운전하며 애타게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얼른 타. 클랙션을 얼마나 눌렀는데 한번을 안 돌아보냐. 짜증나게.”
어제의 일이 꿈이라도 되는 양 밝은 얼굴로 웃고 있는 친구라는 이름을 단 인간을 보니 해란은 기가 막혔다.
빨간색의 귀여운 경차라는 게 원래 여자애가 몰기에도 부담 없는 예쁜 차인 건 분명하지만 운전하는 인간이 지나치게 화려하면 꽤 웃기는 모양새가 된다는 걸 이 정신 나간 여자는 알고나 있을까?
하지만 해란은 내색하지 않고 구겨지듯이 조수석에 올랐다.
“오늘은 어떻게 더 화려하다.”
짙은 꽃 분홍 원피스에 어디서 구한 건지 화려한 분홍차양이 달린 모자까지, 온 몸을 분홍으로 감싼 주희의 모습에 해란은 당장이라도 내려 다시 걸어가고픈 충동이 일었다.
물론 다른 사람이라면 천박하거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겠지만 주희에게는 제법 잘 어울린다. 그래도 사람의 시선을 끄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기분 전환이야. 봄도 무르익었고 나도 새로운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려는. 그런데 넌 강의 없잖아.”
“오전 강의만 없어.”
“나도 알아. 지금 그 이야기 하는 거잖아. 기분은 좀 풀렸어?”
“뭘?”
“어제 화나서 가 버렸잖아.”
“내가 화난 건 알았냐?”
“내가 바보냐?”
주희의 밝은 웃음에 해란도 억지 미소를 지어보였다.
피아노학과를 다니는 주희는 모든 것이 자유로운 애였다. 돈에 구애 받는 것도 아니고, 그저 제대로 졸업해 근사한 남자 만나 사모님소리 들으며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편하게 사는 아이기도 했다.
외모도 근사했다. 꾸미지 않아도 충분히 예쁜 주희는 스스로도 잘난 외모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고생이라고는 해 본적도 없어 보이는 손으로 가볍게 핸들을 잡고 차안에 흐르는 발라드에 맞춰 손끝을 까닥이는 모습에는 여유가 넘친다.
물론 그 기다랗고 예쁘게 색칠된 손톱을 보면 저 애가 정말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 맞는지 의문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피아노로 기본은 한다니 믿을 수밖에.
“시바쓰리는 해결된 거야?”
“해결은 무슨. 네 말대로 즐기다 끝나면 되지. 그래서 말인데, 오늘 같이 안 갈래?”
“어딜?”
“어디겠어? 무도회장이지.”
“미친! 너나 가. 나 할 일 있어.”
“알바? 하루쯤 제껴라. 너 그러다 재벌 되겠다.”
“시끄러. 그렇잖아도 심란해 죽을 지경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