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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잔뜩 가라앉은 음성에 그제야 흥겹게 콧소리를 내던 주희가 힐끗 해란을 바라보았다.
‘저거 또 일 터졌구먼.’
오랜 시간 만난 것은 아니지만 주희는 해란의 사정을 대충 알고 있었다.
일학년 봄, 우연히 말을 섞고 가까워졌지만 어두운 모습 안쪽에 얼마나 곧고 똑바른 아이가 있는지 깨닫기엔 충분했다. 문제는 그 주변 환경이라는 것도.
조금만 받쳐준다면 정말 활기차고 명랑한 친구일 텐데……. 주희는 그 점이 늘 안쓰러웠다
“이번에는 또 뭐야?”
덩달아 주희의 음성도 조심스러워졌다. 가정 사는 언제나 해란에게 있어 아킬레스건이었다. 그나마도 기를 쓰고 버티는 원동력은 바로 그녀의 자존심이었다.
남에게 고개 숙이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해란을 항상 무릎 꿇고 빌게 만드는 게 바로 그녀의 그 잘난 가족이었다.
부모란 언제나 자식이 잘 되는 것만 바라고 또 그렇게 해주려고 애를 쓰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주희에게 해란의 가족은 정말 미스터리 한 존재들이었다.
이제 대학 3학년인 딸내미가 무슨 힘이 있어 그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리라 믿는 걸까? 그러나 해란은 끙끙거리면서도 끝내 해결을 보았다. 지켜보면 신기할 정도였다. 그래도 하늘에서 뚝딱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닌 바에야 나중에 초주검이 되는 것도 바로 해란이었다.
“너, 돈 있냐?”
한참을 망설이다 창밖을 바라보며 툭 던지는 말에 주희는 역시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긴 저 집안에 돈 문제 아니면 난리 날일도 없을 테니까.
“난 친구지간에 돈 거래 안 하잖아.”
딱 부러지게 끊어내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저 말 꺼내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고 모자까지 눌러 쓴 해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해란은 주희의 대답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문득 서운함이 밀려왔다. 한 번도 돈 문제로 사람과 얽혀보지 않았음에도 주희는 이상하리만치 돈 문제에는 철저하게 냉정한 입장을 취하곤 했다.
사실 그게 사람을 사귀는 정석임을 해란도 알지만 너무 궁한 자신의 입장에 그 말이 상처가 되어 돌아왔다. 잠시 가벼운 발라드가 흐르는 차안이 순간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느새 작은 세영의 차가 학교 정문을 지나 주차장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렵지 않게 주차를 시킨 주희가 시동을 끄자 그나마 흐르던 음악이 꺼지며 잠시 조용한 침묵이 차안을 가득 메웠다.
“얼마나 필요한거야?”
하는 수 없다는 듯 주희가 입을 열었다. 믿고 안 믿고를 떠나 그것 때문에 힘들어할지 뻔히 아는데 쉽게 모른 척 할 수도 없었다. 까짓것 그냥 준다 생각하고 해줄 수 있으면 해 주자는 생각이었다.
“이천.”
“장난 하냐? 설마 이천 원을 말하는 건 아닐 테고, 이백이면 몰라도 이천은 심해.”
엄청난 금액에 놀란 주희가 소리를 빽 지르자 그제야 고개를 든 해란이 인상을 찡그렸다.
“알아. 그리고 그런 돈 너 없는 것도 알고. 그냥 답답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 있잖아.”
기운 빠진 해란의 목소리가 주희마저도 맥 빠지게 했다.
“이번에는 또 누구야? 아빠? 해민이?”
“우리 집 똥파리놈.”
씹듯 내뱉는 말투에 동생에 대한 원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번엔 또 뭔 사고를 친 거야? 교통사고라도 냈니? 아니지, 걔 아직 면허도 없잖아.”
절래절래 고개를 저으며 주희가 혀를 찼다. 말썽 많은 동생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번에는 액수가 과했다.
“맞아. 남의 오토바이 끌고 가서 사고 냈어. 그쪽 피해자 측이 요구하는 게 이천이야.”
절로 신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씹어 삼키며 주희가 머리를 짚었다.
“많이 다친 거야?”
“아니, 그냥 팔 하나 부러졌다네. 문제는 그 망할 놈이 무면허에 음주였단다. 그리고 잽싸게 도망간 거지.”
“미친!”
“게다가 그 친구라는 오토바이 주인이 사고경위 듣고는 바로 오토바이 절도로 신고했단다. 덕분에 지금 현상 수배 걸렸다나. 아직 어리니까 합의해주면 없던 일로 한다고 하는데, 돈이 어딨냐.”
“차라리 그냥 잡혀서 살아보라 해. 겁 많은 애니까 그런 일 겪으면 다시는 그런 문제 안 일으킬 거 아냐. 돈도 없고, 무조건 해결해 주는 게 해민이를 위하는 일도 아니잖아.”
가차 없는 주희의 말에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울컥 기분이 상하는지 해란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그래도 동생이란 것일까. 그러나 주희 말이 어느 하나 틀린 것도 없었다.
“그러고 싶어. 이번에는 정말 나도 그러고 싶긴 한데, 문제는 엄마잖아. 엄마만 아니면 처음 사고 쳤을 때 집어넣었을 거야.”
“니네 엄마도 진짜, 정말 이해불가능이야.”
“이해정도로 넘어갈 문제는 아니지.”
주희의 말에 동의하는 해란의 말투가 꽤 씁쓸한 기운을 띠고 있었다. 자신의 엄마이지만 결코 편들어 줄 수 없는 상황이 정말로 화가 난다.
“네 남동생도 문제지만 난 어머니가 더 크다고 봐. 차라리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하는 게 어때? 솔직히 심각하잖아.”
누구보다 상담을 받게 하고픈 건 해란이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본인 스스로 동의하지 않는 한 억지로 밀어 넣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주희도 만약 자신의 일이었다면 그런 식으로 쉽게 말할 수 없으리라.
“관두자. 항상 똑같은 결론이잖아. 알면서도 못하는 내 심정은 오죽하겠니.”
가벼운 그녀의 말속에 얼마만큼 큰 상처가 있는지 모르지 않는 주희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안 내려? 넌 오전 강의잖아. 괜히 강의 빼먹어 쌍권총 달지 말고 수업이나 들어가.”
“넌 어쩌려고?”
“그냥 심란해서 일찍 온 거야. 도서실 가서 책이라도 읽던지 하지 뭐.”
“책이 눈에 들어 오냐? 암튼 끝나고 만나자. 내가 도움은 안 되도 오늘 술 쏠게.”
가벼운 책 두어 권과 노트북을 챙겨 운전석문을 열던 주희가 다시 고개를 저으며 해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하긴 집에 들어가 봐야 뻔한 상황이니 솔직히 늦추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래. 그래도 씨바쓰리는 싫다.”
“시끄러. 도서실에 꼭 있어. 어케 넌 그 흔한 핸드폰 하나가 없다니. 아주 짜증나.”
차 밖으로 나온 해란을 향해 주희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현대인의 필수품인 휴대폰조자 없는 친구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안쓰러웠다.
알았다는 표시로 가볍게 손을 들어 까닥이고는 가방을 둘러메고 저 멀리 사라지는 해란의 모습이 지금이라도 땅으로 꺼질 듯 느껴져 주희의 얼굴에 작은 불안이 서렸다. 저러다 무너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엄마한테 부탁하면 미친년 취급받겠지? 그동안 신뢰라도 쌓아놓을 걸. 나란 인간도 참.”
돈을 구할 방법이 떠올랐지만 곧 머리를 흔들며 지워버렸다. 자신보다 더 짠순이인 엄마가 그리 쉽게 줄 리가 없었다. 작은 돈도 아니고 그런 큰돈을.
그래도 처음으로 부모가 고마워졌다. 적어도 자신은 고민 없이 즐기며 살수 있는 환경을 주신 부모님이니……. 속물이면 좀 어떠랴.

책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도서관에서 아무거나 손에 집히는 대로 들고 온 책은 아직도 한 페이지를 못 넘긴 채 멍하니 책상에 붙어 있었다.
남들은 어렵고 귀찮다고 싫어하는 수학을 유난히 좋아했던 해란은 학과마저도 수학과를 택했다. 다른 과목 성적도 월등히 좋았지만 조그마한 꿈이라면 수학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중학교 시절, 한창 집안이 벌집 쑤신 듯 뒤집어 졌을 때 죽고 싶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해란을 구원해준 사람이 수학을 가르치던 담임선생님이었다.
수학을 딱히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선생님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마음에 더 기를 쓰고 공부를 했었다.
“다른 건 깊이 생각해야 답이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수학은 생각하고 말고 없이 답이 나오잖아. 난 그런 분명함이 좋아.”
우연히 스치듯 말씀하신 수학에 대한 정의가 뇌리에 깊이 박혀 누군가 해란에게 왜 수학을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 말을 하게 되었다.
엉킨 실타래처럼 풀어도 답이 없던 생활에서 오직 명쾌한 답을 주는 과목이기도 했다. 어쩌면 실생활이 그러니 더욱 수학이라는 과목에 매력을 느끼는지도 몰랐다.
기댈 곳이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공부 밖에 없었다. 그래서 더욱 기를 쓰고 매달렸다. 하지만 오늘은 그 명쾌한 수학이라는 공부조차도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했다.
동생이 문제가 아니었다. 죄를 지으면 어떻게든 그 벌을 받으면 그만이었다. 어쩌면 주희 말대로 일찌감치 가르쳐야 했을 일이었다. 벌써 늦은 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해란은 그 뒷감당이 무서웠다.
알콜 중독 증세 까지 있는 엄마가 또 얼마나 집을 뒤집어 놓을지 생각하니 벌써 한숨이 나왔다. 예전의 엄마는 그 정도로 망가지지는 않았었다. 서서히 망가지는 것을 놓치는 바람에 이제는 방법이 없었다.
솔직히 엄마가 망가지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때는 아빠가 온통 집안을 풍비박산 내놓고 있었으니까.
세월이 흘러 아빠가 잠잠해지니 기다렸다는 듯 엄마가 그러는 모습에 해란은 이제 더 이상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엄마의 하소연에 내몰리듯 어떻게든 엄마가 좋아하고 기뻐하는 일만 찾아 했었다.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아빠도 나이가 들면 조금은 좋아질 거라고 믿었었다. 설마 엄마가 변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단 하루도 편안하다는 느낌을 가져 본적이 없었다. 항상 지뢰를 끼고 살아가는 기분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덕분에 작은 소리에도 놀라는 노이로제까지 걸릴 지경이었다.
이러고 있느니 차라리 캠퍼스에 가 볼까 하는 생각에 해란은 무작정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버릇처럼 공중전화부터 찾았다.
괜히 소리 없이 사라져 나중에라도 주희의 핀잔을 듣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주희는 요즘 공짜 폰도 많다고 사라고 졸라대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한 때는 혜란도 휴대폰이라는 앙증맞은 기계가 있었다. 대학에 들어와 꼭 필요한 기계라는 걸 알고 큰 맘 먹고 만들었던 기계는 또 다른 족쇄가 되리라는 건 몰랐다. 엄마가 화가 나 휴대폰을 부서준 일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그 후로는 다시는 휴대폰이라는 물건을 만들지 않았다.
휴대폰을 가지는 순간 한 순간도 쉼 없이 찾을 것이 뻔한 엄마 때문이었다. 적어도 밖에 있는 순간만큼은 자유롭고 싶었다.
카톡이니 밴드니 학교용의 메신저는 간신히 제 기능을 하고 있는 낡은 노트북에 깔아놓아 인터넷만 연결되어 있으면 과 동기들에게 연락은 받을 수 있었다.
지금 아르바이트도 괜찮지만 조금 더 일당이 높은 곳을 찾아봐야 할 것 같아 게시판을 헤매던 해란은 끝내 옅은 한숨을 쉬고는 가까이 있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과외를 해 볼까?”
일 학년 때 잠깐 했었지만 별반 재미를 보지 못했었다. 자식 머리 나쁜 건 생각도 안 하고 과외선생의 자질을 탓하며 잘린 게 서너 번 되다보니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서빙이나 갈빗집 설거지 정도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래도 과외만큼 수입이 좋은 것도 없기에 슬며시 또 욕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사실 일 학년이었던 해란이 처음부터 고삼 아이들을 가르치기엔 무리가 있었다. 나이로 보나 체격으로 보나 차이가 없다보니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제 제법 나이도 있고 아이들한테 밀리지 않을 자신도 생겼다. 솔직히 이것 것 가릴 형편이 아닌 것이다.

해란과 주희가 만나는 장소는 늘 정해져 있어 그녀를 찾는 것은 쉬웠다. 캠퍼스 끝자락에 위치한 작은 정자에 도착하자 여유로운 표정으로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주희가 보였다.
지나는 학생들의 옷차림을 살펴보며 흉을 보는 게 주희의 또 다른 취미 생활이기도 했다. 하지만 본인이 눈요깃감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으니 어쩌면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오래 기다렸어?”
“좀.”
모자는 어디에 버리고 왔는지 주희는 빛 좋은 갈색 웨이브 머리카락을 돌돌 말며 불퉁하게 대꾸했다
그 모습에 해란은 쓴 웃음을 지었다. 길이 엇갈리는 바람에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는 그녀가 꽤 오랜 시간 죽치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조금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그냥 가지 그랬어. 나 상관하지 말고.”
“시끄러. 너 알바 잘렸잖아. 것도 나 때문에. 이 정도는 충분히 해 줄 수 있어.”
바쁠 때 빠졌다는 이유로 그만두라는 소리를 들은 건 사실이지만 지금 상황에선 관두는 편이 나았다.
“너 때문은 아니야. 어차피 관두려고 했었어.”
“왜? 더 좋은 자리 생겼어?”
알바라면 열 일 제치고 나서는 친구가 관둔다는 소리에 놀란 표정을 짓던 주희가 금방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동생일 해결하려면 당분간 바쁘게 움직여야 할 텐데 알바에 묶이면 여의치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나 과외 하려고.”
“과외? 너 과외라면 치를 떨잖아.”
“그래도 그게 돈이 되잖아.”
“하긴, 뭐 이제 연륜도 있고 그때만 하겠냐? 내가 알아봐 줄까? 너 성적 좋아서 대우 좋은 쪽으로 자리 있을 거야.”
주희의 말에 해란의 눈이 반짝였다. 왜 주희를 생각 못했을까. 주희의 어머님은 강남의 사립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으로 월급보다 과외로 받는 돈이 더 많은 걸로 유명하다. 그 어머니를 통하면 괜찮은 과외 자리를 구할 수 있을 지도 몰랐다.
“정말 해줄 거야?”
“그렇게 얼굴 들이대지 마. 너 머리 안 감아서 모자 쓴 거지? 비듬 떨어져.”
“기지배 눈치는…….”
“움직이기나 하자. 아무리 봄날이라지만 오랜 시간 있었더니 춥다. 봐, 내 고운 살결에 닭들이 지나간 자리를.”
“그래, 가자. 얼른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