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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주희의 말에 오늘 하루 종일 쳐져 있던 해란의 기분이 조금은 상승되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해결 된 것은 없지만 그래도 숨통이 트일지도 몰랐다. 우선은 한 가지씩 해결해 가자고 다짐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방법이 없다면 우선은 할 수 있는 일부터 해 보는 게 최선일 수밖에 없었다.
‘나중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하루 종일 내린 결론이었다. 마치 스텝을 밟듯이 그 높은 구두 굽을 디디면서도 가볍게 걸어가는 주희를 따라가면서 해란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황사니 뭐니 해서 늘 뿌옇던 하늘이 오늘은 유난히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어쩌면 운이 좋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게 하는 그 파란빛이 맘에 들어 해란이 간만에 어깨를 쭉 폈다.
적어도 이 시간만큼은 모두 잊고 즐거운 기분을 가지고 싶었다.



제2장 그들의 사정


“다 모였나?”
“네!”
창밖으로 한적한 거리를 응시하던 호열이 뒤돌아보지도 않고 대뜸 질문을 던지자 정 자세로 서 있던 재호가 짧게 대답했다.
“그래? 그럼 가 볼까? 아까 준비하라고 했던 거 잊지 말고.”
“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호열이 돌아서자 주변이 일순 환해지는 것 같았다. 까마귀날개같이 검은 머리가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에 오닉스처럼 빛을 내고 있었다.
정갈한 이마에 숱 많은 눈썹이 반듯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남자치고는 커다란 눈이 쌍꺼풀이 없어 언뜻 차가운 느낌을 주었다. 얇지도 그렇다고 두껍지도 않은 입술선이 선명하게 두드러져 보였다.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미남이었다.
한 가지 흠이라면 분명 전에는 곧게 뻗어 있었을 콧대가 살짝 틀어져 전체적인 중심을 흩트리는 정도. 그러나 그것마저도 남자다움을 더해 그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180이 넘어 보이는 장신을 스프라이트 블랙 정장으로 빈틈없이 감싸고 있었고 하얗다못해 푸른 기마저 감도는 와이셔츠가 구릿빛이 도는 호열의 얼굴을 돋보이게 했다. 그가 움직이자 잘 생긴 외모만큼이나 발달된 근육들이 멋들어진 수트 안에서 부드럽게 물결치듯 움직였다.
언뜻 보면 근사하고 유혹적인 표범 한 마리를 연상시키는 그의 모습에 시기라도 하듯 비뚤어진 넥타이가 도리어 꽉 짜인 모습에 여유를 주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호열을 멈춰 세운 것은 그의 뒤에 조용히 서 있던 재호였다. 왜소한 체구가 아님에도 앞에 선 사람 때문에 살짝 밀리는 듯 보이는 재호가 비뚤어진 넥타이를 제대로 고정해주었다.
당연하다는 듯 그의 시중을 받아들이면서도 호열은 뭔가 불만이라도 있는 양 눈썹을 치켜 올렸다.
“너무 조이지 마. 답답하다고.”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투정에 넥타이를 만져주고 한 발 물러서 전체적인 모습을 살피던 재호의 입가에 스치듯 미소가 떠올랐다.
겉으로 보기에는 빈틈하나 없고 차가워 보이는 호열이지만 사실 그 속에 장난기 가득한 남자가 있다는 건 오직 가까이 지내온 재호만 알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살아가려면 잔혹하고 또 그만큼 거칠어야 했다. 조그마한 틈도 어느 순간 비수가 되어 뒤를 노릴지 알 수 없는 곳이다. 하지만 호열은 누구보다 스스로를 잘 숨기고 모든 난관을 헤쳐 나갔다.
“가자.”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온 호열이 앞장서자 재호도 표정을 굳히며 뒤를 따랐다.
반듯한 슈트 차림에도 길들여지지 않은 야수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호열과 세련된 느낌의 재호는 언뜻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차갑게 빛나는 무테안경 끝을 올린 재호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마 이번 일은 호열도 꽤나 골치가 아플 것이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하니 자꾸 웃음이 비집고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낸 재호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에? 그런 말도 안 되는…….”
다들 넋이 나간 표정인 것을 보며 재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의 반응은 예상한 그대로였다. 앞 뒤 없이 본론만 전한 호열을 대신해 재호가 천천히 지금의 상황을 다시 설명하자 이제는 황당해 하는 침묵이 사무실을 지배했다.
여느 사무실과 유사한 분위기지만 한 가지 틀린 점이 있다면 커다란 책상 앞으로 그것보다 몇 배는 넓은 탁자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사무실이라기보다는 회의실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하지만 그 탁자를 둘러 싼 남자들의 모습은 회의를 한다기보다는 군기 훈련을 받으려 모인 것 같았다. 일사불란하게 일어서 호열에게 구십 도로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하는 우렁찬 목소리에 사무실이 들썩거릴 정도였다.
“앉아라.”
그 커다란 울림에 호열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 뿐이었다. 맨 상석에 편하게 자리 잡은 호열이 긴 다리를 꼬고 앉아 슥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의 얼굴에 묘한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항상 모이던 날짜가 아님에도 긴급소집을 했을 때에는 뭔가 일이 있다는 소리였다.
자신들이 혹시 잘못한 일이 있었는지 되씹고 있었지만 딱히 집히는 일도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니 온통 귀와 눈이 앞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는 호열의 표정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무심한 목소리를 놓치고 말았다.
옆에 선 재호가 다시 한 번 그 설명을 한 후에야 멍하게 굳어있던 사람들 중 제일 성격이 급한 만수가 입을 열었다.
“형님, 그게 무신 소리십니꺼? 저희더러 지금 공부를 하라 하는 깁니꺼?”
귀를 파고 다시 들어도 그 소리였다. 이 나이에 공부를 하라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지경이었다.
“저희더러 지금 학교를 다니라는 겁니까?”
황당해 하기는 만수 옆에 있던 무진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쌍끌이파와 한 판 붙나 싶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달려왔건만 공부를 하라니!
“니네 나이가 몇인데 학교를 다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무진의 말에 더욱 짜증이 난 호열이 바락 인상을 썼다. 이들이 기겁하는 이유를 그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떨어진 명령이었다. 그리고 꼭 해내야 하는 일이었다. 이번일의 성사로 앞으로의 행보가 틀려질 수 있다는 걸 호열은 은연중 느끼고 있었다.
“회장님 명령이야. 아무리 우리가 지하세계에서 산다지만 요즘 같은 글로벌 시대에 그런 학력으로는 조직을 운영할 수 없다는 말씀이시다. 그러니 시끄럽게 내 말에 토 달지 마.”
호열이 무서운 기세로 탁자를 내리치자 일시에 소란스러움이 자취를 감추고 적막한 고요가 찾아왔다.
“이번 일은 회장님의 지시이십니다. 우리 쪽만 해당 되는 상황은 아닙니다. 로열 쪽도 이미 전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참고로 이번 프로젝트의 성과로 차기 회장후보서열에 지대한 영향이 있을 거라고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전폭적인 지지가 필요합니다.”
“로열도?”
또 다시 웅성거리며 서로를 바라보는 남자들의 표정에는 당혹감이 역력했다. 아마 로열 쪽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으리라.
“그럼 어쩌라는 겁니까? 졸업장이라도 만들라는 겁니까?”
“가짜가 통할 거라고 믿는 거냐? 씨바쓰리?”
“아이! 씨바쓰리라고 하지 마십시오. 제 이름은 성진입니다, 노 성진.”
서열로 치면 아직은 낮은 단계지만 제법 깡다구 있고 잔머리가 좋아 호열의 눈에 뜨인 성진은 씨바쓰리라는 별명으로 웨이터를 하고 있어 제 이름으로 불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 다들 재밌어 했지만 정작 본인은 질색을 한다.
“너 중학교 중퇴던가?”
호열이 아까 잠깐 읽었던 성진의 학력을 기억해 내고는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장난을 알아보는 사람은 재호 뿐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서늘한 한기만 느끼고 있었다. 호열이 폭발할 때마다 저 비슷한 미소를 보인 까닭이었다.
“그게…… 네.”
머쓱해 하며 어깨를 움츠리는 성진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한꺼번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곧 재호가 읽어 내리는 서류에서 본인의 학력이 나오자 금세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갔다.
하긴 다른 사람의 학력을 보고 웃을 상황이 아니었다.
“다들 화려하긴 하다. 그래도 정호 너는 졸업은 했구나.”
호열이 중간에 자리 잡은 정호를 보며 장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곰 같은 덩치의 정호가 얼굴을 붉혔다.
“그게 어머니의 소원이었거든요.”
너무 짧게 잘라 손에 잡히지도 않는 머리를 괜스레 건드리는 정호의 모습은 과히 어울리지 않았음에도 누구하나 놀리지 못하고 존경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제일 낮은 학력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아 보였는데, 역시 사람은 보이는 모습이 다가 아닌 모양이었다.
“저희 가족들 중에 가장 어린 나이가 23세 입니다. 그 나이로 학교를 다시 다닌다는 건 무리지 싶습니다. 사실 못 다닐 것도 없지만 그러려면 우리 일에도 차질이 있으므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겁니다. 참고로 이제부터 우리 조직의 최하 학력은 고졸로 합니다. 따라서 학력이 딸리면 우리 조직에서도 나가야 합니다.”
딱딱한 어투에 아무런 감정도 싣지 않은 음성이 사무실을 가득 메웠다. 넋이 빠진 얼굴을 한 사내들이 할말을 잃고 숨을 헐떡였다. 저 말대로라면 조직에 남을 사람은 딱 한 사람, 불곰 정호밖에 없다는 소리가 된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행님, 그럼 지금 우리 모두들 쪼까낸다는 말입니꺼?”
“지금 까지 우리가 울매나 충성을 하며 여기를 지켜 왔는데 이렇게 쫓아낸다는 말인교?”
겨우 정신을 차린 사내들이 붉어진 얼굴로 콧김을 뿜으며 들고 일어섰다. 당장이라도 주변을 들어 엎을 것 같은 살벌함이 넘실거리자 느긋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호열의 눈썹이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표정은 그의 감정이 상했을 때 나타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어 보통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을 사내들이 오늘은 너무도 충격적인 말을 들어서인지 꿈쩍도 안 하고 저마다 언성을 높이며 화를 냈다.
“시끄러. 아직 말 안 끝났어. 지금 이 순간부터 재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입 여는 인간은 사시미로 회를 뜬다. 알겠나?”
다시 한번 호열이 탁자를 들썩이며 낮게 으르렁거리자 그제야 사내들은 입을 다물고 슬그머니 엉덩이를 의자에 붙였다. 잠시 소란스러움을 지켜보고 있던 재호가 호열을 향해 감사가 담긴 고개 짓을 하고 입을 열었다.
“제가 말씀드린 고졸이란 학력은 지금부터 일년간 유보가 됩니다. 학력이 모자란 분들은 이제부터 검정고시 준비를 해 통과하면 됩니다. 일 년이라는 기간 안에 중퇴인 분들은 중학교 검정고시부터 준비합니다. 이건 여러분의 자질을 높이고 나아가 앞으로 활동하는데 학력이 문제가 되는 일이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자는 회장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음을 전합니다.”
또박 또박 할 말을 다 하고 한숨 돌리던 재호가 잊은 것이 있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아! 만약 공부에 의외로 취미가 있어 대학교 진학을 원하신다면 그 뒤도 봐드리겠다는 말씀도 있으셨습니다. 합격하신다면 졸업하는 그 순간까지 학비나 그 외 모든 비용은 회사에서 나옵니다. 이상입니다.”
“이게 끝이야?”
또 다른 말이 있을까 싶어 귀를 기울이던 사내들이 호열의 말에 수긍하는 재호를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이 일이 딱히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일리는 있어. 너희들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새끼들이 아버지 학력에 대해 물으면 쪽 팔리지 않겠냐? 다 좋은 취지니까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앞으로의 대책이나 세워라. 검정고시는 어렵지 않게 나온다더라. 그리고 재호처럼 대학까지 가면 금상…… 암튼 거시기 하잖아. 더 이상 이 문제로 시끄러운 건 용납 못해. 이제 검정고시를 준비하려면 뭐가 필요한지부터 알아봐.”
결론을 내린 호열은 잔뜩 찡그린 이마를 풀지 않은 채 벌게진 얼굴로 열을 내는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똑같은 검정 양복을 차려 입고 있어 누가 보아도 조직임을 알 수 있는 모양새였다.
그들에게 있어 삶이란 구역을 지키고 또 넓히는 싸움의 연장이지 펜을 들고 머리를 쓰는 일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호열이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이 느끼는 감정을 손에 잡힐 듯 알 수 있었다.
당혹감과 함께 분노가 가득 한 그들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다.
“이미 정해진 일이라는 말씀이시군요.”
어깨를 늘어트린 성진이 침울한 얼굴로 다시 한번 확인 하자 호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발, 공부라니……. 우리가 공부를 한다는 건 지나가는 개도 웃을 일입니다.”
호열 앞에서는 항상 말을 조심하던 무진마저 격한 감정에 무심코 상소리를 했지만 아무도 그를 탓하지 않았다.
“제가 생각해 봤는데, 우선은 다들 공부와 인연이 없던 분들이니까 선생을 두고 준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한두 명이면 제가 어떻게 해 보겠지만 인원수도 꽤 되고, 더구나 전 따로 할 일이 있어 전념할 수도 없는 입장이고요. 아, 불곰은 고졸이니 다른 분들 공부 도와주는 일을 하면 되겠군요.”
재호의 말에 불곰 정호의 얼굴이 더욱 뻘게졌다.
“전…… 겨우 졸업한 사람이라…….”
“에이! 불곰형은 나보다 한글 받침도 제대로 못 써요.”
깐죽대는 성진의 말에 순간 불곰이 솥뚜껑만한 주먹을 쥐며 인상을 썼다. 그 모습에 흠칫한 성진이 잽싸게 탁자 밑으로 몸을 숨겼다. 그들을 지켜보던 재호가 고개를 저으며 이번에는 진심이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것에 비해 검정고시가 쉽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기본이 있어야 하는데, 여기 모인 인간들은 그 기본조차도 없는 것이다.
“우선은 과외선생을 먼저 구하고, 일년간 합숙하는 걸로 하죠. 제가 파악해보니 로열 쪽은 많은 인원이 고등학교 졸업장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대학 졸업자도 세 명이었습니다. 그쪽 보스도 역시 대학 졸업장을 가지고 있다는 건 형님도 알고 계실 겁니다. 그래도 질 수 없는 게임입니다. 사실 우리가 많이 불리하긴 해도 다들 원하는 만큼 성적만 나온다면 그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습니다.”
재호가 찬찬히 앞으로의 계획을 말하자 점점 사내들의 표정이 뭐 씹은 듯 일그러졌다. 같은 계열이라고는 해도 로열 쪽과는 항상 경쟁구도에 있었다.
더구나 보스와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여기서 지는 순간 조직에서 쫓겨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불을 보듯 뻔했다. 싫어도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자 여태 움츠린 적이 없던 어깨에서 절로 기운이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