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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창문을 열고
1화
프롤로그
워낙 남쪽이라 한겨울에도 크게 온도가 떨어지지 않긴 했지만 그날은 가을 중에서도 유난히 더운 날이었다. 해가 슬슬 저물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열다섯 살이던 정아는 그때 앞서가던 남자의 뒷모습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얇은 책을 한 손으로 들고, 다른 손으론 글을 한 줄씩 가리키며 읽던 세 살 위의 도시 소년. 큰 키에 교복도 머리도 언제나 단정한 상태를 유지하던 소녀의 첫사랑.
그가 언제 서울로 돌아갈지 알 수 없었다. 정아는 연락처를 물어봐야 한다고 계속 생각했지만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세 살이나 많은 오빠라서. 그는 정아를 마냥 어린아이 보듯 할 뿐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런 그의, 신희의 태도가 당연했지만 그때는 그게 잠이 안 올 만큼 서러웠다. 정아는 열다섯 살에 이미 키가 다 자라서 성인이 된 지금의 그녀와 비슷했다. 그러니 속도 다 자랐다고 생각했었다.
모래사장을 천천히 걸어가며 책을 읽던 그를 생각하면 깔끔하게 머리칼을 정리한 유독 하얀 뒷목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를 제외한 세상은 노을에 물들어 온통 금빛이었다.
정아는 그의 뒤를 따라 자전거를 끌며 흘깃흘깃 신희의 뒷모습을 보다가 괜히 찔려서 딴청을 했다. 그러다가 키가 한참 큰 그와 보폭이 차이 나 거리가 벌어지자 몇 걸음을 달려 신희를 따라잡았다. 소녀가 달리는 발소리에 앞서가던 신희가 웃느라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정아가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 그가 그 작고 하얀 얼굴로 물었다.
“좀 천천히 걸을까?”
따라가고 있는 걸 알았나 보다. 놀란 정아가 고개를 푹 숙이더니 자전거를 인도로 끌고 가 잽싸게 올라탔다.
얼른 페달을 밟아 도망치다가 힐끔 뒤를 돌아보니 신희가 당황해 손을 뻗었다가 내리고 있다. 그 모습을 본 정아가 얼마 못 가 자전거를 멈추고 내려섰다. 귀 끝까지 빨개진 그녀가 가만히 서 있자 신희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 자전거에 달린 바구니에 책을 넣어 준다.
“읽어. 너 줄게.”
“준다고? 왜?”
정아가 묻자 신희가 다시 앞장서 걸으며 말했다.
“너 귀여워서.”
어린애 대하듯 하는 걸 알고, 정아의 빨개졌던 얼굴이 이번엔 붉으락푸르락한다. 신희가 준 책도 펼쳐 보니 심지어 동화책이다.
누군 남자로 좋아하는데, 어린애 대하듯. 중학생한테 동화책이 웬 말인가!
심술이 나서 첫 장을 폈는데, 생각보다 꽤 재미있었다. 정아가 제자리에 서서 책을 읽자 앞서가던 신희가 뒤를 돌아본다.
나름 중학생이라고 교복 입고 돌아다니는 정아가 신희의 눈엔 그저 귀여웠다. 햇빛을 가리고 다니지 않아 여름 내내 까맣게 탔다. 올해 초만 해도 초등학생 같았는데, 이제 좀 중학생 티가 난다. 그래 봤자 꼬마지. 저렇게 어린 꼬맹이도 크면 여자가 될까. 신희가 팔짱을 끼고 잠깐 고개를 기울였다가 소리 죽여 웃었다.
그럴 리가 있나, 싶었다. 저 애는 평생 가도 꼬맹이일 것 같다.
정아가 책장을 넘기다가 문뜩 바람이 세차게 불어 고개를 들었다. 아니다. 어쩌면 그 바람에 커진 파도 소리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신희가 안 가고 그녀의 앞에 여전히 서 있었다.
“천천히 읽어.”
“…….”
“기다릴게.”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첫사랑 중인 소녀에게 아주 치명적인 미소였다. 태어나서 저렇게 예쁘게 웃고, 다정하게 말하는 남자는 처음 보았다. 그가 웃고, 말하는 모든 순간이 소녀에게는 설렘이었고, 아플 정도의 짝사랑이었다.
정아가 책을 탁 덮어 다시 바구니에 넣었다.
“집에 가서 읽을래.”
“그래. 그렇게 해.”
“고마워. 오빠.”
그리고 자전거를 끌며 다시 해변을 걸었고, 그 남자애도 멀찍이 떨어져 걸었다. 정아는 자기가 읽었던 부분을 신희에게 물어보고, 신희는 부드러운 말투로 대꾸를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그 순수한 시간은 정아 인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되어서, 마치 녹화해 놓은 영상처럼 종종 머릿속에 띄워 보곤 했다.
정아는 아직도 그 책을 가지고 있었다. 부모님이 그녀를 잠깐 이모네 집에 맡겼을 때에도, 서울로 대학을 갔을 때에도 가지고 다녔다.
***
한여름에도 장사가 잘되지 않는 해수욕장보다 한 정거장 먼저 내리면 읍내가 나왔다. 읍내에서 1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민가가 있는데 거기 이재하 시인의 문학관이 있다. 정아가 여기서 먼저 일하고 있던 직원, 소하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할아버지들 계속 계셔도 되는 거예요?”
아직 취직한 지 삼 일밖에 되지 않은 그녀가 난감해하며 문학관 로비를 가리키자 소하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여기 가끔 동네 분들도 오셔서 쉬실 거예요. 정아 씨한테 크게 잔소리만 안 하시면 그냥 두세요.”
“아. 네. 그럴게요. 고마워요.”
정아가 너무 깍듯하게 말하자 소하가 불편해 죽겠다는 듯 몸을 이리저리 꼬며 말했다.
“어차피 둘밖에 없으니까 그냥 말 편하게 할까요? 관장님도 신경 안 쓰세요. 원래 있던 직원 언니는 저랑 여섯 살 차이였는데도 편하게 지냈거든요.”
그녀가 쿨하게 말하자 정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럴까요?”
“응. 동갑이잖아요. 아. 이따 점심 먹을 때 카페 알려 줄게. 커피 필요하죠?”
“엄청 필요하죠. 못 마시면 좀비가 돼요.”
정아가 투덜거리자 소하가 즐겁게 웃는다. 일에 관한 건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정아는 취업이 확정된 날 받은 프린트에 적힌 이재하 시인의 이력, 문학관 역사 등을 이미 달달 외운 상태였다.
관장 하나와 직원 두 명도 많은 것 아닌가 싶을 만큼 한적한 공간이었다. 문학관은 언덕 위에 있어 창밖으로 바다가 보였다. 소하가 창밖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정아에게 말을 걸었다.
“쭉 서울에서 살았어?”
선배인 그녀가 먼저 말을 놓자 정아도 조심스레 말을 놓았다.
“아니. 나도 이 근처 사람이야. 버스로 한 시간쯤 떨어진 곳.”
“그래? 잘됐네. 집 가까워서.”
정아가 대답 없이 미소만 지었다. 본가에 갈 일이 별로 없을 거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한동안 직원이 구해지지 않아 외로웠다며, 소하는 재잘재잘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동갑내기가 들어왔는데 지난 삼 일간 서먹하게 지낸 게 억울했던 소하가 폭발적으로 수다를 떨자, 정아도 긴장이 풀려 같이 이야기를 나눴다. 대학 다닐 때 이야기며, 졸업하고 일하던 영어 학원 이야기도 했다. 정아의 대학 생활은 아르바이트의 연속이었다. 그중 영어 학원 강사 일이 잘 맞아서, 졸업 후에도 그 일을 했다. 꽤 이름이 알려져서 돈도 웬만큼 벌었다.
생활력 강한 그녀의 이야기에 소하의 입이 떡 벌어졌다.
“우와. 그럼 학비랑 생활비 다 네가 번 거야?”
“응. 다신 못 해. 진짜.”
정아가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부르르 떤다. 소하가 감탄했다.
“대단하다. 난 졸업하고도 용돈 받으면서 살았는데. 그러고도 취업이 잘 안 돼서 이렇게 시골까지 왔……다고 하면 짜증 나지? 여기 사람이라며.”
“아니. 시골 맞지 뭐. 근데 이 정도면 번화가야. 우리 동넨 더 시골이거든.”
“윽. 진짜?”
“응. 나 처음에 서울 갔을 땐 어떻게 이렇게 어딜 가나 사람이 많나 싶더라. 그래서 동기들이랑 맨날 사람 구경 했잖아.”
온도가 뚝 떨어진 수요일, 문학관에는 관람객이 한 명도 오지 않았고 덕분에 둘은 내내 수다를 떨었다.
소하는 정아보다 삼십 분 먼저 출근해 문학관을 열고, 삼십 분 먼저 퇴근했다. 혼자 뒷정리를 마친 정아가 창가로 향했다.
파도 소리처럼 들리던 것이 실제로 파도 소리였다. 서울에 간 이후에도 가끔 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파도 소리로 착각하곤 했다. 싫어하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바다.
정아가 창문을 닫고 문단속을 했다. 다시 바다로 돌아오고 말았다.
***
“야. 너처럼 생기면 인생이 어떠냐?”
현수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면적만 넓었지 사람은 얼마 살지 않는 어느 면(面)의 보건지소. 공중보건의로 근무 중인 신희가 팔짱을 끼고 뒤로 기댔다.
“뭐. 피해는 안 주지.”
“와, 건방진 자식.”
현수가 몸서리쳤다. 신희의 진료실 책상 위에 알록달록한 단지가 있고, 그 안에 아기들 먹으라고 가져다 놓은 사탕이 들어 있었다. 디자인에 센스가 없는 신희가 직접 고른 단지는 좋게 말해 알록달록이지, 사실 조잡스러웠다. 현수가 사탕을 또 꺼내 먹자 신희가 핀잔했다.
“이 썩는다.”
“봐 봐. 사탕 몇 개 집어 먹었다고 구박하는 거. 이런 쫌생이에 결벽증 환자가 뭐가 이쁘다고 여자애들이 너만 보면 난리냐고.”
신희는 남들보다 일 년 일찍 대학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의 동기인 현수는 한 살이 많았다. 학교 다닐 때부터 가장 친하던 동기였다. 군의관인 현수의 부대가 하필 여기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곳이라 툭하면 술 먹자고 신희를 찾아온다.
귀찮기는 해도 신희의 좁디좁은 인간관계에 몇 없는 절친이었다. 같이 술집을 가는 대신, 집에서 안주를 해 먹어야 되는 불편함을 이해해 주는 친구였다. 현수가 사탕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근데 연애는 왜 안 하냐?”
“못 하는 거지.”
신희가 속눈썹이 긴 눈을 천천히 내려 감았다. 더 말하기 싫어하는 그의 표정을 깨끗이 무시하고, 현수가 물었다.
“결벽증 때문에?”
“응.”
그가 다시 눈을 떴다. 바닷가의 밝은 태양이 눈이 아프도록 진료실로 스며든다. 곧 할머니 한 분이 들어오자 현수가 눈치껏 진료실에서 나갔다.
인구가 많지 않은 동네에 삼 년 가까이 있으니 이제 환자들 대부분이 눈에 익었다. 영순 할머니는 항상 무릎이 너무 아프다고 울상이셨는데 오늘 유난히 표정이 밝았다. 신희가 영순에게 물었다.
“무릎 좀 어떠셨어요?”
“좋아. 오늘은 덜 아파.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니고.”
영순이 손으로 오밀조밀 만든 도시락을 신희의 데스크에 내려놨다.
“혼자 사니까 밥 잘 챙겨 먹으라구.”
음식 통에서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물씬 풍겼다. 손맛 하난 좋다는 자부심을 젊어서부터 가지고 사셨다는 말을 하신 것이 떠올랐다. 신희가 목구멍으로 치미는 구역질을 억지로 삼켰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의사 양반, 건강 잘 챙겨. 혼자 산다고 대충 끼니 때우지 말고.”
“네. 그럴게요.”
영순이 필요하다던 약만 진단받아 떠나고 얼마 후. 신희가 도시락 통을 챙겨 들었다. 속이 뒤틀리는 것 같다. 모든 신경이 이 도시락 통에 있었다. 신희는 진료실 옆에 있는 작은 주방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음식물 쓰레기통을 열어 도시락 안의 내용물을 전부 쏟아부었다. 그러고 나서야 싱크대를 붙잡고 헛구역질을 했다.
공중보건의로 오기 전, 4주 훈련 때에는 정말 굶어 죽을 뻔했었다. 남이 해 준 밥을 먹는 것이 힘들었다. 입에 정체불명의 음식을 넣는 것이 역겹다. 독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강박이 들었다.
그나마 남자들이 한 밥은 어떻게든 삼켰는데, 여자가 한 밥은 여전히 삼킬 수가 없다. 삼키기는커녕 냄새만 맡아도, 아니 심지어 보기만 해도 썩은 음식 냄새를 맡은 것처럼 역겨웠다.
먹은 것이 없어 헛구역질을 하던 신희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불도 안 켜고 있었다. 그가 열린 문 쪽으로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숨이 턱 막혀 그대로 굳었다. 되돌아왔던 영순이 주방 맞은편, 개방 화장실을 가리켰다.
“아, 아니 변소 좀 가려고…….”
그러더니 얼른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신희는 뭐라 말도 못하고 허탈한 표정으로 할머니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다.
***
정아는 문학관 일에 금방 익숙해졌다. 소하의 말대로 이재하 시인의 문학관 로비는 동네 사랑방이었다. 선선하게 에어컨이 돌아가는 곳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앉아 계셨다.
여전히 관람객이 그리 많지 않은 곳이다. 퇴근을 하기 위해 노트북을 끄고 뒷정리를 하는데 근처에서 떡갈비집을 하는 봉단 할머니가 데스크 앞으로 오신다. 정아는 봉단이 들고 있는 커다란 택배 상자에 놀라서 두 손을 뻗어 상자를 받쳤다.
“이걸 여기까지 들고 오셨어요?”
“어디서 온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글씨를 못 읽으니.”
봉단이 상자에 쓰여 있는 주소와 발신인을 가리켰다. 정아가 그것을 읽으며 말했다.
“양평에서 왔네요.”
“양평? 양평에서 뭐가 왔나.”
“김미순 님한테서 왔고 홍삼이래요.”
“아. 우리 큰며느리한테서 왔네.”
봉단의 얼굴에 금방 화색이 돈다. 정아가 가방을 꺼내며 말했다.
“저 금방 다 끝나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가게까지 제가 들어다 드릴게요.”
“어휴, 안 그래도 돼! 내가 들고 왔는데 내가 들고 가야지.”
“딱 오 분만요!”
정아가 고집을 부리더니 더욱 부산하게 뒷정리를 했다. 동네에 글씨를 읽지 못하는 할머니들이 꽤 계셨는데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이 편지나 택배가 오면 이 문학관으로 가져오셨다.
이 문학관이 기념하는 1934년생 이재하 시인은 이 지역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하고 모교에 교수로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여생을 마쳤다. 시인은 말할 것도 없이 이 동네 최고의 지식인이었단다. 동네 사람들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당연하다는 듯이 이재하 시인에게 가져와 물었다. 그녀가 칠순도 못 넘기고 작고한 후에도 동네 사람들의 그 습관은 변하지 않아, 모르는 것이 있으면 시인의 생가인 여기 문학관에 와서 무엇이든 물어보곤 했다.
1화
프롤로그
워낙 남쪽이라 한겨울에도 크게 온도가 떨어지지 않긴 했지만 그날은 가을 중에서도 유난히 더운 날이었다. 해가 슬슬 저물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열다섯 살이던 정아는 그때 앞서가던 남자의 뒷모습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얇은 책을 한 손으로 들고, 다른 손으론 글을 한 줄씩 가리키며 읽던 세 살 위의 도시 소년. 큰 키에 교복도 머리도 언제나 단정한 상태를 유지하던 소녀의 첫사랑.
그가 언제 서울로 돌아갈지 알 수 없었다. 정아는 연락처를 물어봐야 한다고 계속 생각했지만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세 살이나 많은 오빠라서. 그는 정아를 마냥 어린아이 보듯 할 뿐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런 그의, 신희의 태도가 당연했지만 그때는 그게 잠이 안 올 만큼 서러웠다. 정아는 열다섯 살에 이미 키가 다 자라서 성인이 된 지금의 그녀와 비슷했다. 그러니 속도 다 자랐다고 생각했었다.
모래사장을 천천히 걸어가며 책을 읽던 그를 생각하면 깔끔하게 머리칼을 정리한 유독 하얀 뒷목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를 제외한 세상은 노을에 물들어 온통 금빛이었다.
정아는 그의 뒤를 따라 자전거를 끌며 흘깃흘깃 신희의 뒷모습을 보다가 괜히 찔려서 딴청을 했다. 그러다가 키가 한참 큰 그와 보폭이 차이 나 거리가 벌어지자 몇 걸음을 달려 신희를 따라잡았다. 소녀가 달리는 발소리에 앞서가던 신희가 웃느라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정아가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 그가 그 작고 하얀 얼굴로 물었다.
“좀 천천히 걸을까?”
따라가고 있는 걸 알았나 보다. 놀란 정아가 고개를 푹 숙이더니 자전거를 인도로 끌고 가 잽싸게 올라탔다.
얼른 페달을 밟아 도망치다가 힐끔 뒤를 돌아보니 신희가 당황해 손을 뻗었다가 내리고 있다. 그 모습을 본 정아가 얼마 못 가 자전거를 멈추고 내려섰다. 귀 끝까지 빨개진 그녀가 가만히 서 있자 신희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 자전거에 달린 바구니에 책을 넣어 준다.
“읽어. 너 줄게.”
“준다고? 왜?”
정아가 묻자 신희가 다시 앞장서 걸으며 말했다.
“너 귀여워서.”
어린애 대하듯 하는 걸 알고, 정아의 빨개졌던 얼굴이 이번엔 붉으락푸르락한다. 신희가 준 책도 펼쳐 보니 심지어 동화책이다.
누군 남자로 좋아하는데, 어린애 대하듯. 중학생한테 동화책이 웬 말인가!
심술이 나서 첫 장을 폈는데, 생각보다 꽤 재미있었다. 정아가 제자리에 서서 책을 읽자 앞서가던 신희가 뒤를 돌아본다.
나름 중학생이라고 교복 입고 돌아다니는 정아가 신희의 눈엔 그저 귀여웠다. 햇빛을 가리고 다니지 않아 여름 내내 까맣게 탔다. 올해 초만 해도 초등학생 같았는데, 이제 좀 중학생 티가 난다. 그래 봤자 꼬마지. 저렇게 어린 꼬맹이도 크면 여자가 될까. 신희가 팔짱을 끼고 잠깐 고개를 기울였다가 소리 죽여 웃었다.
그럴 리가 있나, 싶었다. 저 애는 평생 가도 꼬맹이일 것 같다.
정아가 책장을 넘기다가 문뜩 바람이 세차게 불어 고개를 들었다. 아니다. 어쩌면 그 바람에 커진 파도 소리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신희가 안 가고 그녀의 앞에 여전히 서 있었다.
“천천히 읽어.”
“…….”
“기다릴게.”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첫사랑 중인 소녀에게 아주 치명적인 미소였다. 태어나서 저렇게 예쁘게 웃고, 다정하게 말하는 남자는 처음 보았다. 그가 웃고, 말하는 모든 순간이 소녀에게는 설렘이었고, 아플 정도의 짝사랑이었다.
정아가 책을 탁 덮어 다시 바구니에 넣었다.
“집에 가서 읽을래.”
“그래. 그렇게 해.”
“고마워. 오빠.”
그리고 자전거를 끌며 다시 해변을 걸었고, 그 남자애도 멀찍이 떨어져 걸었다. 정아는 자기가 읽었던 부분을 신희에게 물어보고, 신희는 부드러운 말투로 대꾸를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그 순수한 시간은 정아 인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되어서, 마치 녹화해 놓은 영상처럼 종종 머릿속에 띄워 보곤 했다.
정아는 아직도 그 책을 가지고 있었다. 부모님이 그녀를 잠깐 이모네 집에 맡겼을 때에도, 서울로 대학을 갔을 때에도 가지고 다녔다.
***
한여름에도 장사가 잘되지 않는 해수욕장보다 한 정거장 먼저 내리면 읍내가 나왔다. 읍내에서 1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민가가 있는데 거기 이재하 시인의 문학관이 있다. 정아가 여기서 먼저 일하고 있던 직원, 소하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할아버지들 계속 계셔도 되는 거예요?”
아직 취직한 지 삼 일밖에 되지 않은 그녀가 난감해하며 문학관 로비를 가리키자 소하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여기 가끔 동네 분들도 오셔서 쉬실 거예요. 정아 씨한테 크게 잔소리만 안 하시면 그냥 두세요.”
“아. 네. 그럴게요. 고마워요.”
정아가 너무 깍듯하게 말하자 소하가 불편해 죽겠다는 듯 몸을 이리저리 꼬며 말했다.
“어차피 둘밖에 없으니까 그냥 말 편하게 할까요? 관장님도 신경 안 쓰세요. 원래 있던 직원 언니는 저랑 여섯 살 차이였는데도 편하게 지냈거든요.”
그녀가 쿨하게 말하자 정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럴까요?”
“응. 동갑이잖아요. 아. 이따 점심 먹을 때 카페 알려 줄게. 커피 필요하죠?”
“엄청 필요하죠. 못 마시면 좀비가 돼요.”
정아가 투덜거리자 소하가 즐겁게 웃는다. 일에 관한 건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정아는 취업이 확정된 날 받은 프린트에 적힌 이재하 시인의 이력, 문학관 역사 등을 이미 달달 외운 상태였다.
관장 하나와 직원 두 명도 많은 것 아닌가 싶을 만큼 한적한 공간이었다. 문학관은 언덕 위에 있어 창밖으로 바다가 보였다. 소하가 창밖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정아에게 말을 걸었다.
“쭉 서울에서 살았어?”
선배인 그녀가 먼저 말을 놓자 정아도 조심스레 말을 놓았다.
“아니. 나도 이 근처 사람이야. 버스로 한 시간쯤 떨어진 곳.”
“그래? 잘됐네. 집 가까워서.”
정아가 대답 없이 미소만 지었다. 본가에 갈 일이 별로 없을 거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한동안 직원이 구해지지 않아 외로웠다며, 소하는 재잘재잘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동갑내기가 들어왔는데 지난 삼 일간 서먹하게 지낸 게 억울했던 소하가 폭발적으로 수다를 떨자, 정아도 긴장이 풀려 같이 이야기를 나눴다. 대학 다닐 때 이야기며, 졸업하고 일하던 영어 학원 이야기도 했다. 정아의 대학 생활은 아르바이트의 연속이었다. 그중 영어 학원 강사 일이 잘 맞아서, 졸업 후에도 그 일을 했다. 꽤 이름이 알려져서 돈도 웬만큼 벌었다.
생활력 강한 그녀의 이야기에 소하의 입이 떡 벌어졌다.
“우와. 그럼 학비랑 생활비 다 네가 번 거야?”
“응. 다신 못 해. 진짜.”
정아가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부르르 떤다. 소하가 감탄했다.
“대단하다. 난 졸업하고도 용돈 받으면서 살았는데. 그러고도 취업이 잘 안 돼서 이렇게 시골까지 왔……다고 하면 짜증 나지? 여기 사람이라며.”
“아니. 시골 맞지 뭐. 근데 이 정도면 번화가야. 우리 동넨 더 시골이거든.”
“윽. 진짜?”
“응. 나 처음에 서울 갔을 땐 어떻게 이렇게 어딜 가나 사람이 많나 싶더라. 그래서 동기들이랑 맨날 사람 구경 했잖아.”
온도가 뚝 떨어진 수요일, 문학관에는 관람객이 한 명도 오지 않았고 덕분에 둘은 내내 수다를 떨었다.
소하는 정아보다 삼십 분 먼저 출근해 문학관을 열고, 삼십 분 먼저 퇴근했다. 혼자 뒷정리를 마친 정아가 창가로 향했다.
파도 소리처럼 들리던 것이 실제로 파도 소리였다. 서울에 간 이후에도 가끔 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파도 소리로 착각하곤 했다. 싫어하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바다.
정아가 창문을 닫고 문단속을 했다. 다시 바다로 돌아오고 말았다.
***
“야. 너처럼 생기면 인생이 어떠냐?”
현수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면적만 넓었지 사람은 얼마 살지 않는 어느 면(面)의 보건지소. 공중보건의로 근무 중인 신희가 팔짱을 끼고 뒤로 기댔다.
“뭐. 피해는 안 주지.”
“와, 건방진 자식.”
현수가 몸서리쳤다. 신희의 진료실 책상 위에 알록달록한 단지가 있고, 그 안에 아기들 먹으라고 가져다 놓은 사탕이 들어 있었다. 디자인에 센스가 없는 신희가 직접 고른 단지는 좋게 말해 알록달록이지, 사실 조잡스러웠다. 현수가 사탕을 또 꺼내 먹자 신희가 핀잔했다.
“이 썩는다.”
“봐 봐. 사탕 몇 개 집어 먹었다고 구박하는 거. 이런 쫌생이에 결벽증 환자가 뭐가 이쁘다고 여자애들이 너만 보면 난리냐고.”
신희는 남들보다 일 년 일찍 대학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의 동기인 현수는 한 살이 많았다. 학교 다닐 때부터 가장 친하던 동기였다. 군의관인 현수의 부대가 하필 여기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곳이라 툭하면 술 먹자고 신희를 찾아온다.
귀찮기는 해도 신희의 좁디좁은 인간관계에 몇 없는 절친이었다. 같이 술집을 가는 대신, 집에서 안주를 해 먹어야 되는 불편함을 이해해 주는 친구였다. 현수가 사탕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근데 연애는 왜 안 하냐?”
“못 하는 거지.”
신희가 속눈썹이 긴 눈을 천천히 내려 감았다. 더 말하기 싫어하는 그의 표정을 깨끗이 무시하고, 현수가 물었다.
“결벽증 때문에?”
“응.”
그가 다시 눈을 떴다. 바닷가의 밝은 태양이 눈이 아프도록 진료실로 스며든다. 곧 할머니 한 분이 들어오자 현수가 눈치껏 진료실에서 나갔다.
인구가 많지 않은 동네에 삼 년 가까이 있으니 이제 환자들 대부분이 눈에 익었다. 영순 할머니는 항상 무릎이 너무 아프다고 울상이셨는데 오늘 유난히 표정이 밝았다. 신희가 영순에게 물었다.
“무릎 좀 어떠셨어요?”
“좋아. 오늘은 덜 아파.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니고.”
영순이 손으로 오밀조밀 만든 도시락을 신희의 데스크에 내려놨다.
“혼자 사니까 밥 잘 챙겨 먹으라구.”
음식 통에서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물씬 풍겼다. 손맛 하난 좋다는 자부심을 젊어서부터 가지고 사셨다는 말을 하신 것이 떠올랐다. 신희가 목구멍으로 치미는 구역질을 억지로 삼켰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의사 양반, 건강 잘 챙겨. 혼자 산다고 대충 끼니 때우지 말고.”
“네. 그럴게요.”
영순이 필요하다던 약만 진단받아 떠나고 얼마 후. 신희가 도시락 통을 챙겨 들었다. 속이 뒤틀리는 것 같다. 모든 신경이 이 도시락 통에 있었다. 신희는 진료실 옆에 있는 작은 주방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음식물 쓰레기통을 열어 도시락 안의 내용물을 전부 쏟아부었다. 그러고 나서야 싱크대를 붙잡고 헛구역질을 했다.
공중보건의로 오기 전, 4주 훈련 때에는 정말 굶어 죽을 뻔했었다. 남이 해 준 밥을 먹는 것이 힘들었다. 입에 정체불명의 음식을 넣는 것이 역겹다. 독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강박이 들었다.
그나마 남자들이 한 밥은 어떻게든 삼켰는데, 여자가 한 밥은 여전히 삼킬 수가 없다. 삼키기는커녕 냄새만 맡아도, 아니 심지어 보기만 해도 썩은 음식 냄새를 맡은 것처럼 역겨웠다.
먹은 것이 없어 헛구역질을 하던 신희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불도 안 켜고 있었다. 그가 열린 문 쪽으로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숨이 턱 막혀 그대로 굳었다. 되돌아왔던 영순이 주방 맞은편, 개방 화장실을 가리켰다.
“아, 아니 변소 좀 가려고…….”
그러더니 얼른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신희는 뭐라 말도 못하고 허탈한 표정으로 할머니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다.
***
정아는 문학관 일에 금방 익숙해졌다. 소하의 말대로 이재하 시인의 문학관 로비는 동네 사랑방이었다. 선선하게 에어컨이 돌아가는 곳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앉아 계셨다.
여전히 관람객이 그리 많지 않은 곳이다. 퇴근을 하기 위해 노트북을 끄고 뒷정리를 하는데 근처에서 떡갈비집을 하는 봉단 할머니가 데스크 앞으로 오신다. 정아는 봉단이 들고 있는 커다란 택배 상자에 놀라서 두 손을 뻗어 상자를 받쳤다.
“이걸 여기까지 들고 오셨어요?”
“어디서 온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글씨를 못 읽으니.”
봉단이 상자에 쓰여 있는 주소와 발신인을 가리켰다. 정아가 그것을 읽으며 말했다.
“양평에서 왔네요.”
“양평? 양평에서 뭐가 왔나.”
“김미순 님한테서 왔고 홍삼이래요.”
“아. 우리 큰며느리한테서 왔네.”
봉단의 얼굴에 금방 화색이 돈다. 정아가 가방을 꺼내며 말했다.
“저 금방 다 끝나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가게까지 제가 들어다 드릴게요.”
“어휴, 안 그래도 돼! 내가 들고 왔는데 내가 들고 가야지.”
“딱 오 분만요!”
정아가 고집을 부리더니 더욱 부산하게 뒷정리를 했다. 동네에 글씨를 읽지 못하는 할머니들이 꽤 계셨는데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이 편지나 택배가 오면 이 문학관으로 가져오셨다.
이 문학관이 기념하는 1934년생 이재하 시인은 이 지역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하고 모교에 교수로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여생을 마쳤다. 시인은 말할 것도 없이 이 동네 최고의 지식인이었단다. 동네 사람들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당연하다는 듯이 이재하 시인에게 가져와 물었다. 그녀가 칠순도 못 넘기고 작고한 후에도 동네 사람들의 그 습관은 변하지 않아, 모르는 것이 있으면 시인의 생가인 여기 문학관에 와서 무엇이든 물어보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