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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콤 달콤
쌉쌀 짭쪼름
-정이소
상콤 달콤 쌉쌀 짭쪼름 1화
프롤로그. 수난의 시작.
민상원과 차현도는 아주 어릴 적부터 친구였고 30대 초반이 된 지금도 막역한 사이다.
둘 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고생을 많이 했다. 지금은 잘 풀려서 형편이 좋아졌지만, 과거에 이 둘이 고생해 온 스토리를 풀면 눈물 없이는 못 들을 정도였다.
우여곡절 끝에 자수성가한 사업가가 된 그들은 키가 훤칠하고 인물까지 좋아서 그 동네 명물이었다.
특히 차현도는 그 희귀하다는 알파였고, 조각 같은 외모 덕에 인기가 상상 초월이었다. 그에게 흠이 있다면 워낙 집안 형편이 어려웠기에 돈에 굉장히 집착하는 구두쇠라는 것이다.
상원은 현도와는 다르게 씀씀이가 큰 편이었다. 어릴 때 갖고 싶었던 것을 한 번도 손에 쥐어 본 적이 없어서 끌리는 건 그 자리에서 꼭 사고야 말았다. 패션 센스가 좋은 상원은 얼핏 보기에 연예인 같기도 했다. 서글서글한 인상에 성격도 좋아 베타지만 알파인 차현도보다 훨씬 낫다고 평가하는 이들이 많았다.
잘생겼지만 상거지 꼴로 다니는 차현도와 다정다감하고 세련된 민상원은 극과 극처럼 보이지만, 오랜 세월 서로 알고 지내 굉장히 끈끈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
돈을 아끼려는 속셈으로 차현도는 불알친구 상원의 집에 10년 넘게 얹혀살고 있었다. 상원은 가끔 그런 현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상원이 사는 20평대 아파트 정도는 현도에게는 껌값이었다. 그런 주제에 입만 열면 매번 돈타령에 꺼이꺼이 앓는 소리였다. 상원이 대충이나마 알고 있는 현도의 주식 수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그는 대체 저 자린고비가 언제쯤 자기 재산에 만족할 셈인지, 그 많은 돈은 대체 언제 쓰고 죽을 것인지 궁금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쥐꼬리만 한 생활비를 주고 상원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파렴치한 사나이, 차현도가 상원에게 옷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심지어 만 원이 넘는 옷도 괜찮단다. 상원은 기겁하며 이제 세상이 멸망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현도는 황당해하는 상원에게 난생처음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생겼노라 고백했고, 상원은 순간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것 같았다.
상원은 현도가 게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애정 같은 건 원래 포기하고 있었다. 현도에겐 언제나 돈이 최우선 순위였고, 연애는 돈이 든다며 꺼렸기 때문에 그간 제대로 된 연인은 없었다. 그래서 그저 자신이 그의 가장 친한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녀석이 진심으로 마음을 주는 사람이 생기니 속이 쓰렸다.
게다가 슬슬 현도도 결혼할 나이였다. 연애하다 보면 결혼 이야기도 오갈 게 당연했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 나름 가족처럼 친하게 지내 왔는데 오랜 친구가 홀로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어 자신을 떠나간다고 생각하니 섭섭했다. 골수 게이인 상원은 여자와 결혼해서 가정을 만들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데이트로 바쁜 현도를 보며 마음을 비우고 있을 무렵, 현도가 체구가 조그마한 남자애 하나를 제 애인이라며 사진으로 보여 주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사진 속 청년은 오메가라고 했다. 쭉쭉빵빵한 여자들하고만 즐겨 왔던 헤테로 차현도가 남자와 사귈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말로만 듣던 오메가라니.
알파와 오메가는 백 명 중 한 명 정도 태어날까 말까 한 희귀체질이었고, 심지어 오메가는 알파보다 수가 적어 몹시 귀했다. 여자가 아닌 남자지만, 현도가 사진 속 청년에게 목을 매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상원은 알파를 각인시킬 수 있는 오메가 청년 권유이가 내심 부러웠다.
한편, 오메가 청년 권유이에게는 나이 차 많이 나는 형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권이준으로, 나이는 서른셋. 차현도보다 한 살이 더 많았고 알파였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어서 이준은 오랫동안 유이의 부모 노릇을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유이를 과잉보호하고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거기에 오메가이기까지 하니 그는 동생에게 들러붙는 인간들, 특히 알파들을 눈에 쌍심지를 켜고 감시했다. 그리하여 이준은 자연스레 제 동생이 차현도라는 불한당과 사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노발대발했다.
그는 동생에게 집적대는 놈들은 모조리 마음에 안 들었지만, 차현도가 개중 으뜸으로 싫었다. 처음엔 나이를 보고 놀랐다. 이 도둑놈의 새끼가 무려 열두 살이나 많으면서 감히 우리 유이를 넘봐? 띠동갑인 나이 차도 그렇지만, 사실은 자신과 똑같은 알파라는 것이 가장 마음에 안 들었다. 오메가 수가 부족한 탓인지 알파에겐 서로를 경계하는 기질이 있었는데 이준은 유독 동족혐오가 심한 편이었다.
이준은 유이와 현도가 헤어지도록 밤낮없이 방해공작을 벌였고, 이제 클 만큼 큰 유이는 형의 간섭과 오지랖에 불만을 품고 가출했다. 유이는 집을 나오자마자 애인인 현도에게 연락했다. 결국, 현도는 갈 곳 없는 유이를 상원과 자신이 사는 집으로 데려오고 말았고.
“…….”
상원은 못마땅한 얼굴로 현관 앞에 선 현도와 그의 애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남몰래 짝사랑하던 친구가 다른 놈이랑 사귀는 것도 열 받는데 집까지 데려오다니, 짜증 나서 절로 미간이 좁아졌다. 사람 좋아 보이는 상원이 인상을 쓰자마자 유이는 더럭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야, 민상원. 왜 인상을 쓰고 그래!”
“뭐 임마?”
“유이가 무서워하잖아.”
집주인 허락 없이 제 애인을 데려온 현도는 상원에게 미안한 기색도 없이 도리어 왜 애를 겁주느냐고 자기가 성화였다. 현도의 반응에 상원은 기분이 더 상했지만, 나이 서른둘이나 먹고 갓 스무 살 된 꼬맹이에게 치사하게 구는 것도 웃기다 생각했다.
“알았어, 네 마음대로 해. 어차피 내 의견 상관없잖아.”
“애 보는 앞에서 그렇게 살벌하게 말해야겠냐?”
현도는 다른 사람에게는 민보살 소리 들을 정도로 친절하면서, 자기 애인 앞에서는 유독 무뚝뚝하게 구는 상원에게 삐쳤다. 매달 생활비도 주는데 집주인이라고 너무 생색내는 거 아닌가? 그는 치기 어린 목소리로 집을 구할 때까지만 이곳에 있다가, 곧 유이와 같이 나갈 거라고 상원에게 빵빵 큰소리를 쳤다. 상원은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애써 다잡고 너 같은 거머리가 나가면 속 시원할 거라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
그리고 그 시각, 이준은 자기 동생인 유이가 진짜 집을 나가 버려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유이는 성인이 된 지 얼마 안 된 데다, 남들보다 발육이 느린 편이라 아직 히트 사이클이 오지 않은 상태였다. 차현도와 있을 때 히트 사이클이라도 오면 놈이랑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될 텐데, 생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 망할 놈이 이성을 잃어서 우리 유이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어쩌지? 안 돼! 절대 안 돼!
착잡해진 이준은 차현도와 유이가 어디로 도피했는지 뒷조사를 시작했고 끝내는 상원의 집에 들이닥쳤다.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너 같은 늙은 알파와 내 동생을 만나게 할 순 없어!”
막장 드라마 같은 대사를 내뱉으며 나타난 이준은 현도의 멱살을 쥐고 짤짤 흔들었다.
현도는 유난스러운 이준이 너무나 성가셨지만, 어쨌든 나중에 처남이 될지도 모르는 그에게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형과 애인이 멱살을 잡으며 싸우는 모습을 바라보던 유이는 비운의 줄리엣이 된 양 슬픈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형! 여긴 어떻게 왔어?”
“형님. 자, 자, 고정하시고…….”
“이 자식이 감히! 누가 네 형님이야! 어?”
“형! 제발 그러지 말고, 이제 우리 사이를 인정해 줘!”
“권유이!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상원의 집 안은 순식간에 셋의 몸싸움으로 난장판이 되었다.
중증 브라더 콤플렉스를 앓고 있는 정신병자에, 호모 커플에……. 상원은 제 집을 배경으로 펼쳐진 눈물 겨운 막장 치정극을 현실감 없는 기분으로 지켜보았다.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다. 이준이 온갖 협박을 서슴지 않으며 유이를 집으로 끌고 가려 했지만, 유이가 바닥에 드러눕고는 절대 안 돌아가겠다고 울며불며 버티기 시작했던 탓이다. 동생의 눈물에 한없이 약한 이준은 결국 유이를 집으로 데려가는 데 실패했다.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이준은 유이의 순결을 지킨다는 거창한 이유로 상원의 집에 자리 잡았고, 결국 네 명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1. 내 집은 하숙집이 아니란다. (1)
현도만 얹혀살던 상원의 집에는 느닷없이 군식구 둘이 더 늘어나게 되었다.
“젠장…….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상원은 제 집에 넘쳐 나는 알파 페로몬 때문에 온몸이 쭈뼛거려 팔을 벅벅 문질렀다. 좁은 공간에 그토록 희귀하다는 알파가 둘이나 자리 잡으니 베타인 상원조차 둘이 뿜어내는 페로몬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현도와 이준은 적대관계이기 때문에 분위기가 안 좋았다. 대기 중에는 온통 살벌한 기운이 맴돌았고, 고래 싸움에 낀 새우처럼 상원의 전신이 오그라들었다.
***
그날 밤, 가뜩이나 불편한데 한 번 더 일이 터졌다. 상원의 20평짜리 아파트는 방이 두 개인데 집에 있는 사람은 네 명이니 잠자리를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가 된 것이다.
원래는 연인 사이인 현도와 유이가 방을 같이 쓸 예정이었지만, 이준의 등장 때문에 일이 이상하게 꼬여 버렸다.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와 뻔뻔하게 자리를 잡은 이준은 제 동생과 현도가 절대 같은 방을 쓰면 안 된다며 개지랄을 떨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상원이 자신이 유이와 같은 방을 쓰겠다고 했지만, 네놈은 또 어떻게 믿느냐고 펄펄 날뛰었다. 유이 같은 발육 부진 꼬마에게 전혀 관심 없는 상원은 순간 울컥했다. 야, 네 동생 줘도 안 가져!
“난 당신 동생한테 관심 없다고. 손끝도 안 건드릴 테니 걱정 마.”
억울한 상원의 항변은 들은 척도 않고 이준이 제 의견을 말했다.
“형인 내가 동생과 한방을 쓸게. 너희 두 놈이 같은 방을 써. 그럼 간단하잖아.”
그는 차현도와 민상원을 제 동생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방에 밀어 넣고, 자기가 동생과 함께 방을 쓸 속셈이었다. 유이는 다 큰 성인인 자신을 애 취급하는 형이 너무 창피해서 버럭 짜증을 냈고, 현도 역시 중증의 브라콤 환자인 이준이 유이와 한방을 쓰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렇게 서로 한발씩 양보한 결과가 유이를 제외한 나머지 셋이서 한방을 쓰는 것이었다. 집주인은 상원인데 저 세 명은 그의 의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집주인인데, 독방을 저 오메가 꼬맹이한테 주다니! 이게 말이 돼?
기가 막혀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던 상원은 어차피 얼마 후면 모두 나가겠지 싶어 조금만 참기로 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성격이 굉장히 좋기도 했고 인내심이 강했으며, 화를 내며 얼굴 붉히는 것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자였다. 오죽하면 별명이 ‘민보살’, ‘젠틀민’이겠는가. 과거 차현도에게 몇 번 도움을 받은 적도 있어서 이번에 은혜 갚는 셈 치기로 했다.
하지만 권씨 형제가 체류하는 기간이 점점 길어지자 상원의 강인한 인내심에도 빠지직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니, 왜 내 집에서 안 나가는 건데?
군대 내무반도 아니고 텁텁한 페로몬을 뿜어 대며 밤새 코골이 하는 알파들과 지내는 것도 몹시 짜증이 났지만, 남의 집에서 공주처럼 구는 권유이가 제일 비호감이었다.
넷의 아침은 상원의 식사준비로 시작되었다. 상원 이외에는 요리를 할 줄 아는 인간들이 없어서 모두가 멀뚱멀뚱 식탁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아침을 챙겨 먹어야 하는 까다로운 권씨 형제들 덕에 상원은 참을인(忍)을 세 번 그리며 평소 먹던 아침밥의 양을 늘려야 했다. 늘 아침 식사를 거르던 현도마저 제 애인이 아침을 먹자 슬그머니 기어 나와 4인용 테이블 한쪽을 차지했다.
권유이는 아침을 빵이나 시리얼로 때우는 걸 싫어하고 꼭 가정식으로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희한한 놈이었다. 오랜 요식업 경력으로 인해 셰프 못지않게 뛰어난 상원의 요리는 까다로운 유이에게 합격점을 받았다. 그 이후로 성질 더러운 두 명의 알파는 상원에게 계속 유이의 아침상을 대령하라고 은근히 압박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식사 때엔 더더욱 가관이었다.
권유이는 눈곱도 안 떨어진 상태로 밥을 먹는다. 그런 그를 차현도는 예뻐 죽겠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권유이는 혀 짧은 소리를 내며 현도를 발끝으로 부려 먹는다. 손가락으로 상원이 만든 음식을 콕콕 짚으면 현도는 하인처럼 음식을 집어서 그의 입에 쏙 넣어 주었다.
반면 권이준은 콘크리트도 씹어 먹을 듯한 기세로 밥알을 하나하나를 꼭꼭 씹으며 그런 차현도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 광경을 라이브로 감상하는 상원의 속은 늘 더부룩하니 얹혀 있었고…….
그놈의 알파 오메가 페로몬이 뭔지, 딱히 예쁘지도 않은 밉상 권유이를 겉보기 특상급인 남자 둘이 왜 저렇게 끼고도는지 상원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솔직히, 처음에는 유이 편만 들고 제 입장과 기분은 안중에도 없는 현도 때문에 서운했었다. 짝사랑하던 마음이 정리가 안 되어 기분이 싱숭생숭하기도 했었고. 하지만 지금은 제발 셋 다 그냥 내 집에서 꺼져 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뿐이다.
고맙다! 차현도. 덕분에 마음 정리 깔끔하게 됐다! 나도 빨리 좋은 남자 만나서 솔로 탈출해야지. 크아악!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성을 지르던 상원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쇼핑을 하러 가기로 했다. 그동안 누적된 스트레스로 인해 강한 지름신이 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
상원은 백화점 남성복 코너를 돌다가 마음에 드는 붉은색 계열의 머플러를 발견했다.
매장 직원은 웜그레이 계열 롱코트에 와인 빛이 감도는 목도리를 매치시키는 상원의 안목에 감탄하며 계속 구매를 부추겼다.
“어머, 손님! 너무 근사해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 멋지고 잘 어울리시네요. 이렇게 레드 컬러를 잘 소화하는 손님은 처음 봤어요.”
상원은 전신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너무 잘 어울린다는 것 나도 잘 알고 있지. 난 잘생겼으니까. 하하핫! 상원은 점원을 향해 싱긋 웃었다.
“이거 주세요.”
근사한 미소에 직원은 얼굴을 발갛게 붉히며 끄덕였고, 상원은 직원이 추천해 주는 셔츠와 바지까지 모조리 지르고 룰루랄라 매장에서 나왔다.
간만에 마음에 드는 목도리를 손에 넣어서 마음이 훈훈해진다. 캐시미어라서 가격이 사악하긴 하지만 이런 고급진 색상은 구하기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은 짠돌이 차현도가 아니다. 된장남 민상원이지. 이게 사는 맛 아니겠는가.
나온 김에 백화점을 쭉 돌아다니던 상원은 식품 코너에 진열된 싱싱한 대하를 보고 멈춰 섰다.
대하철이라서 그런지 때깔이 반지르르하니 좋다. 어느덧 식모 생활에 익숙해진 상원은 자신도 모르게 제 집에 서식하는 세 마리 식충이들에게 뭘 먹일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간만에 해물탕이나 해 볼까 싶어서 장까지 보고 집에 들어갔다.
그러나 온화한 보살 모드로 집에 돌아온 상원의 눈에 맨 처음 띈 것은 소파에서 뒹굴고 있는 권유이였다. 놈은 상원이 만들어 놓은 수제 쿠키와 생과일주스를 몽땅 먹어 치운 것도 모자라 거실을 과자 부스러기로 엉망을 만들어 놨다. 카펫 청소하기가 얼마나 힘든데 대체 이게 무슨 짓이지.
자이로드롭처럼 휘이잉- 수직 낙하하는 기분을 느끼며 상원은 유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뭐 저런 애가 다 있나 싶었다. 차현도보다 더한 철면피라니.
상원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침한 오라를 눈치채지 못한 유이는 반짝이는 눈으로 상원의 머플러를 가리켰다.
“상원 씨.”
“어……?”
“그거 새로 샀나 봐요.”
“어. 그…… 그런데.”
뭔지 모를 불길한 느낌에 상원은 제 신상 목도리를 보호하듯 감싸 쥐었다.
“엄청 예뻐요오! 저어 내일 빌려주시면 안 되나요오?”
두 번째 손가락을 입에 문 유이는 혀 짧은 소리를 내며 애교 필살기를 발사했지만 같잖은 귀여운 척은 현도에게나 먹히지 상원에겐 절대 통하지 않았다.
당연히 안 되지! 저걸 말이라고. 개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걸 빌려 달라니. 미쳤어? 절대 안 돼!
거절의 말을 꺼내려 입을 여는데, 늘어져 자고 있던 차현도가 기막힌 타이밍에 거실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왔다. 목구멍이 보일 정도로 크게 하품을 하던 현도는 신상을 두르고 있는 상원을 향해 충고했다.
“너 또 옷 샀지? 제발 나처럼 저축 좀 해라, 상원아. 흥청망청 쓰지 말고. 걱정돼서 그런다.”
“저축? 거머리처럼 남의 집에서 밥이나 축내는 네가 할 소리냐?”
상원은 발끈했지만, 현도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들은 척도 안 했다.
중간에서 가만히 있던 유이는 불현듯 현도에게 다가가 양손을 꼭 모으고 호소하는 눈빛을 했다.
“형어엉!”
“오구오구. 왜 그래, 유이야?”
“저도 저 목도리 갖구시포요오.”
“저 뻘건 목도리? 얼마냐, 상원아?
현도는 까짓 거 만 원 넘겠나 싶어 심드렁하게 물어봤지만, 상원이 가격을 말하자 안면근육이 현란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차현도를 무려 20년 겪어 본 상원이 봤을 때, 놈은 ‘저딴 불그죽죽한 천 쪼가리 하나가 뭐 몇십만 원씩이나 해? 때려치워! 시발, 이 개 같은 세상.’이라고 외치고 싶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 네가 별수 있냐? 역시 너한텐 돈이 최고지. 상원은 슬그머니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현도는 상원이 예상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당장 죽을 것처럼 심호흡하던 그는 무언가 많이 억누르는 얼굴로 유이의 손을 꼭 쥐었다.
“유이야.”
“네?”
“내일 쇼핑가자. 저거 사 줄게.”
“형! 고마워요! 역시 우리 형이야.”
유이는 감동받은 얼굴로 현도의 품에 폴짝 뛰어들었고, 그 꼴같잖은 광경을 바라보던 상원은 컥, 뒷목을 잡았다.
저 자식이. 지금 이 목도리를 사 주겠다고?
순간 상원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무언가마저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짝사랑은 애초에 셋이 자신의 집에서 벌인 행패에 함락된 지 오래였고, 이번에 무너져 내린 건 우정이라는 깃발을 꽂은 성이었다.
저…… 저…… 죽일 놈!
20년 넘게 사귄 불알친구 생일은 매번 잊어버리면서 고작 1년도 안 본 애새끼한테는 몇십만 원짜리 캐시미어 머플러를 덥석 사 주겠다니. 생일 선물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매일 내 주머니에서 야금야금 잔돈 얻어 쓸 궁리나 하고, 그 흔한 열쇠고리 하나 베푼 적 없는 저 새끼가 뭐라? 내가 한 달 내내 노래를 불렀던 이 명품 머플러를 저 여우 새끼에게 사 주시겠다? 이 벼락 맞아 죽을 배신자 같으니!
배신감과 서러움이 목 끝까지 차올라 상원은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였다.
감정을 달래기 위해 심호흡을 하는데, 욕 나오게도 상원의 방 안에서는 이준이 자리를 버젓이 잡고 노트북을 하고 있었다.
눈물로 인해 벌겋게 충혈된 상원의 눈과 이준의 눈이 불현 듯 허공에서 마주쳤고, 그는 소, 닭 보듯 상원을 구경하더니 다시 노트북으로 관심을 돌렸다.
나이 먹은 청년이 울고 있으면 모르는 사람마저 왜 우냐고 물을 법도 한데 저 권이준이라는 브라콤 환자는 상원과 동거하는 기간 내내 말 한마디 섞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제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늘 심드렁한 얼굴로 자신을 본척만척했다. 집주인을 병풍만도 못하게 취급하는 태도에 상원은 이젠 열불이 나다 못해 기절할 것 같았다.
현도만큼은 아니더라도, 사람들에게 늘 인기가 많았던 상원은 요즘 몹시 자존감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
타당탕탕탕-! 탁!
브라콤 이준이 있는 방에서 도망치듯 나온 뒤 무심코 밤에 먹을 해물탕 재료를 다듬던 상원은, 문득 고장 난 인형처럼 우뚝 멈췄다.
잠깐만, 지금 내가 대체 누구 좋으라고 요리를 하고 있지?
드디어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그의 굳센 인내심이 와장창 산산조각이 났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곱씹을수록 깊은 노여움이 몰려와 뒷목이 뻐근해졌다.
차현도오오! 이 은혜도 모르는 새끼. 밥값도 아깝다며 삼시 세끼 라면만 먹던 놈. 그나마 먹이고 입혀 사람 꼴로 만든 게 누구야? 나잖아? 유기견 주제에 밥 먹이고 집 제공한 주인을 물어?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그는 부글부글 끓고 있는 국물에 감정 이입하다가 아주 소심한 복수를 시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