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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 나만 바라본다
1화
Prologue


뒤 세계에 발을 들이댄 자들은 많았다. 영역 다툼은 밤에 잠을 자고 일어나 숨을 쉬는 것만큼 흔한 일상이었으니까.
다만…….
이정인은 하얀 종이에 적힌 글들을 보다 피식, 웃으며 종이 뭉텅이를 탁자에 던졌다.
그와 동시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의 무표정한 눈동자가 종이 뭉텅이로 향했다. 그 뒤에 서 있던 비서의 시선은 소파에 느긋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에게 향했다. 고 비서는 기억을 더듬어 남자가 이정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도 기억해 냈다.
남자치고는 왜소한 몸짓과 주먹만 한 작은 얼굴에 눈과 코와 입술이 오목조목 다 들어가 있었다. 차가운 얼굴은 아닌데 딱히, 누군가에게 관심을 바라지도 않는 무심한 얼굴이 묘한 느낌을 만들었다. 게다가 호리호리하게 생겨서 전체적으로 가는 선이 한 대 툭, 때리면 바닥에 엎어지게 생겼는데 이상하리만큼 우리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고요했다.
너무 빤히 쳐다봤던 걸까.
앞머리를 후, 입김으로 허공에 날린 이정인과 눈이 마주쳤다.
“음? 나한테 관심 있나?”
“예……?”
고 비서가 한발 늦게 답했다.
“눈빛이 뜨겁길래.”
헛, 숨을 들이켜는 고 비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무슨 소리냐며 말을 더듬던 그는 결국 침묵을 택했다. 당혹스러워하는 고 비서의 반응에 작게 웃은 이정인은 바꾼 지 얼마 안 된 소파에 몸을 푹 기대며 정면을 응시했다.
고목처럼 서 있는 고 비서의 앞에 앉은 남자는 은은한 빛이 감도는 회색 슈트를 입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차가워 보이는 남자와 잘 어울리는 색상이라 생각했다. 만지면 손이 베일 것처럼 날카로운 셔츠 깃.
이정인은 다시 눈동자만 위로 쓱, 올렸다.
딱히, 말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지 않은 얼굴이 제법 괜찮았다. 결 좋은 흑발과 뚜렷한 이목구비. 천으로 겹겹이 감싸도 숨겨지지 않는 넓은 어깨와 균형 잡힌 몸매에 동우가 ‘대단한 얼굴이네.’라고 중얼거릴 정도였으니까.
한눈에 봐도 밝은 곳을 사뿐히 걸어 다녀야 할 이런 남자가 왜 이곳까지 발걸음을 한 걸까. 귀티가 흐르는 남자의 품행에 철호가 고개를 갸웃, 하는 것도 당연했다.
간혹 자신들의 손을 더럽히기 싫어하는 이들이 찾아오곤 했지만, 그쪽으로 일을 확실하게 처리해 주는 전문 조직이 있었다. 해서, 우리에게 오는 이는 대부분 중상층 정도.
딱히, 불만은 없다.
큰 건, 특히 재벌들과 엮일수록 어려운 의뢰를 수행해야 하니까. 목숨을 내놓아야 할 정도의 의뢰도 빈번하게 들어온다고 귓등으로 들었던 적이 있다. 물론, 돈에 환장한 놈들이야 물불 안 가린다고 하지만.
이정인은 팔짱을 둘렀던 손을 자연스럽게 내려 느슨하게 깍지를 꼈다.
확실히 의외였다. 티브이에도 여러 번 얼굴을 비친 남우기업 하 전무가 직접 찾아올 줄은.
카지노, 라는 단어가 적힌 종이를 쑥, 훑으며 가볍게 물었다.
“몇 살이죠?”
하 전무의 눈이 가늘어졌다.
“스물여섯입니다.”
하 전무에게 몇 번 의뢰를 받았던 놈들의 말이 맞았다. 아랫사람에게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는 상사라니.
“음, 내가 세 살 더 많으니까 말 놔도 되지? 격식 차리는 거 갑갑해하는 성질이라.”
상대방은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이정인을 보는 눈빛이 탐탁지 않음을.
많이 변했구나. 어릴 적, 잠깐 스쳐 지나간 인연이라 말 몇 마디 못 나눠 봤지만 저런 성격이었던가, 싶을 정도로.
“아직도 눈 오면 우나?”
넌지시 던진 질문에 돌아온 건 하 전무의 서늘한 눈빛이었다.
“아, 실례. 눈이 펑펑 오던 날 눈물 훔치던 애가 생각나서 말이야.”
신고 있는 구두 앞을 바닥에 탁탁, 부딪치며 이정인은 마저 말을 이었다.
“꼭, 너랑 닮았거든.”
풀어질 줄 모르는 하 전무의 차가운 기운에 이정인은 짧게 혀를 찼다. 괜한 이야기를 꺼냈구나 싶어 쭉 뻗은 늘씬한 다리를 꼬는데.
“그런 식으로 거래하는 줄은 몰랐군요.”
하 전무가 입술 끝을 끌어당겼다.
“당신 추억 팔이에 저는 빼 주시겠습니까. 전 그쪽, 아니니까.”
“그쪽?”
잠깐의 생각도 할 가치가 없었다. 갈색 구두를 신고 있는 발끝에서 쭉 올라와 타이트하게 맞춘 남색 슈트. 그 안을 살포시 감싼 흰색 베스트. 앞 단추 두 개를 풀어헤친 셔츠 위로는 옅은 갈색빛을 띠고 있는 짧은 머리카락.
아무리 봐도 남자로 보였다. 우락부락한 남자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턱선이라든가, 아담한 몸은 예외겠지만. 이정인은 압박 붕대로 감싼 가슴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짧게 웃었다.
“소문대로네요.”
하 전무가 꼿꼿한 자세로 말했다.
“어떤 소문이 돌았는지 궁금하네.”
“오물 묻은 구두도 핥을 정도로 가벼운 사람이라더군요.”
“뭐? 이 새끼가!”
하 전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으로 달려들려는 철호를 향해 이정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 자리에서 멈춘 철호가 씩씩거리며 하 전무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말리지 마세요! 저 주둥이 비틀어야 속이 풀릴 테니까!”
“됐어.”
이정인은 철호의 외침을 가볍게 넘겼다. 뒤에 서 있던 동우가 철호를 가뿐히 뒤로 잡아당겼다. 동우의 힘에 눌린 철호의 숨소리가 거칠게 나돌아 다닌다.
“너, 오늘 운 좋은 줄 알아라.”
눈을 부릅뜬 철호는 20대 초반답게 혈기왕성했다. 성욕이든 기쁨이든 슬픔이든 분노든 모든 감정에. 저것만 고친다면 괜찮을 텐데. 덜 여물어서겠지.
철호가 잠잠해지자 이번에는 동우가 한마디 거들었다.
“단장님.”
“응.”
“저도 철호 말에 일리는 있다고 봅니다.”
평소 애늙은이 소리를 듣는 동우도 하 전무의 말에 화가 났는지 얇은 입술을 안으로 말며 조용히 화를 삭이고 있었다. 이정인은 옆에 서 있는 동우를 올려다보며 씩, 웃었다.
“화내지 마. 얼굴 못생겨져.”
“……단장님.”
동우가 못마땅한 얼굴로 이정인을 내려 봤다. 그 시선을 넘긴 이정인이 턱을 긁적이며 올해 네가 몇이지? 물었다.
“스물일곱입니다.”
“하 전무보단 네가 한 살 더 많아.”
“……아, 예.”
그런데요? 이 물음이 입 밖으로 터질 것 같아 동우는 입술에 힘을 주었다.
“하 전무, 우리보다 어리잖아. 스물여섯이면 치기 어린 나이지. 상대방에게 말실수도 할 수 있는 나이고. 우리 같은 서민이야 학창 시절에나 잠깐 그렇다 치지만 금수저 물고 태어난 이들은 지금이 딱 세상이 다 내 것으로 보일 나이잖아.”
이정인은 동우의 팔을 토닥였다.
“한 살 많은 네가 이해해.”
“풉.”
동우에게 붙들려 있던 철호가 웃는 동시에 하 전무의 얼굴에 표정이 드러났다. 처음으로 내비친 감정은 어이없음, 그리고 불쾌감. 그 감정을 뒤에 서 있던 고 비서도 느낀 건지 하 전무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전무님. 다른 곳으로 가시죠.”
처음 이곳에 올 때부터 못마땅했던 고 비서가 가져온 서류를 가방에 챙길 때였다.
“그래서, 거래는 거절입니까.”
“전무님! 상종할 인간들이 아닙니다.”
서로 감정이 상하면 이를 부득 갈며 저 문을 열고 나가는 사람이 많았다. 말을 받았으니 말로 돌려주었다. 철호나 동우가 나서지 않아도 하 전무에게 한마디 해 줄 생각이었으니까.
그 말을 듣고도 거래를 하자는 건 공은 공이고 사는 사라는 건가. 이정인은 탁자에 던져 놓은 종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이번에 정부에서 창조경제를 내세워 카지노 사업을 모집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5천억 이상 투자할 경우만 사업 허가를 내준다던데.”
문제는 단 한 곳만 카지노 설립 허가권을 내준다는 거겠지만. 이정인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규모가 큰 기업은 남우기업 말고도 세네 곳은 더 있었다. 빠르게 셈을 마친 이정인이 종이 끝에서 시선을 거둬들였다.
“세 곳이나 막을 자신, 없는데. 어떡하지?”
이정인이 거절을 내비치자 하 전무가 손가락 하나를 폈다.
“삼주와 가화는 참여하지 않을 겁니다.”
“한 곳만 막으면 된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 단, 한 곳이 설마 노루는 아니겠지.”
“잘 아시는군요. 노루만 막아 주면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하겠습니다.”
이정인은 난감한 얼굴로 표정을 굳혔다. 노루기업의 바탕은 조폭이다. 멀쩡한 양복 입고 건실한 기업에 다니고 있지만, 실상은 거대한 조폭 집단. 해서, 이 바닥에서도 웬만하면 노루기업에 관련된 의뢰는 받지 않는다. 되레 보복당할 수 있으니까.
“이거 어쩌지? 벌써 죽고 싶진 않아서.”
굳이, 피를 묻혀 가며 노루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웬만하면 좋게 좋게 가자는 주의였기 때문에 사서 적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아, 겁먹어서 그러는 건 아니니까 오해 말고.”
이정인이 넉살스럽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절의 뜻을 내비치자 잠자코 듣고만 있던 하 전무가 천천히 일어섰다. 흡사, 표범이 사냥하듯 웅크리고 있다가 느릿하게 일어나는 것 같은 느낌에 이정인이 팔짱을 끼고 막 입을 연 그를 응시했다.
“불나방이 필요합니다.”
“필요하겠지.”
카지노 수익이 상상을 초월하니까. 그걸 따내기 위해서 누군가는 방패가 되어 희생해야겠지. 이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불나방, 그쪽이 해 줬으면 좋겠는데.”
“난 아직 더 살고 싶다니까.”
귀찮은 기색으로 손을 내젓는 이정인을 내려다본 하 전무는 안주머니에서 꺼낸 명함을 이정인 포켓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생각 바뀌면 연락 주세요.”
“필요 없다니…….”
겉옷 주머니에서 꺼낸 명함을 돌려주려던 이정인의 손길을 하 전무가 막았다.
“필요할 겁니다. 분명히.”



1.


굳이 명함을 손에 꽉, 쥐여 준 하 전무의 의도를 며칠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휙!
시원하게 쭉 뻗은 주먹을 그대로 잡아 뒤로 꺾자 남자의 비명이 조용한 밤거리를 찢어 놨다.
“아아아아악!”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자 우득, 뼈가 뒤틀리는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치자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남자가 데루루루 굴러가는 걸 보며 입에 고인 핏물을 뱉어 냈다.
벌써 여섯 번째. 이틀에 한 번 꼴로 벌떼처럼 달려드는 통에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망할.”
하 전무란 놈이 왔다 간 뒤부터 엉망으로 꼬이기 시작했다. 이름도 모를 한 덩치 하는 남자들이 하루가 멀다고 달려들자 피곤이 극도로 몰려들었다. 하 전무가 뒤로 손을 썼다고밖에 볼 수 없는 상황. 돈에 굶주린 놈들에게 손을 뻗은 거야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그 표적이 자신이라면 그대로 방치할 수도 없는데.
지긋한 두통에 이정인은 저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이러다 언제 한번 크게 다치겠다, 생각하며 일어선 그녀의 발목을 누군가 턱, 잡았다. 밑으로 끌어당기는 악력에 순식간에 바닥에 몸이 뒹굴었다. 그녀의 배 위로 올라탄 남자가 주먹을 쥐고 복부에 힘을 가했다.
“커억!”
젠장. 그제 맞았던 곳에 충격이 가해지자 몸뚱이가 징, 하고 울렸다. 그대로 발을 뻗어 위에 올라탄 놈의 가슴팍을 힘껏 차 버렸다.
“으윽!”
가슴팍을 잡고 뒹구는 남자의 배를 힘껏 밟았다. 몇 초간 움찔거리던 남자의 몸이 이내 추욱 늘어진 걸 보고 나서야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스름한 골목은 인적이 드물었다. 차가운 밤공기에 열을 식히며 볼록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온몸에 남은 기운이 모두 발끝으로 쏟아져 버린 느낌. 손 하나 까딱할 힘이 없다. 숨을 내쉴 때마다 배가 뒤틀리자 애써 폈던 미간이 다시 좁아지는데 시야에 장신의 남자가 걸렸다.
이정인은 남자에게 초점을 맞추기 위해 눈가를 좁혔다. 그러자 좀 더 명확하게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담배를 입에 문 남자의 얼굴이 어스름한 가로등 불빛에 번져 나오는 순간 이정인은 피식, 웃었다.
“어이.”
소음이 사라진 공간에 그녀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언뜻 남자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이정인은 있는 힘을 끌어모아 다시 불렀다.
“어이, 하 전무.”
이번에는 또렷이 들렸는지 밤 그늘에 숨어 있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뒤에서 나쁜 짓이나 하다니. 너무…… 쿨럭, 한걸……?”
매캐한 냄새가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담배 끝을 입에 문 그가 가볍게 쭈그리고 앉았다. 접힌 허벅지 근육이 팽창하며 단단해졌다. 힘껏 내려쳐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성이 난 허벅지에서 시선을 들어 올리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두 뼘 정도의 거리에서 시선이 같아진 그가 빠르게 이정인을 훑었다.
전봇대에 간신히 기대고 있는 이정인의 상태는 잘해 봐야 양호한 정도. 남자치고는 예쁘장하다고 고 비서가 말했던 입술이 찢어져 있었다.
“제법이네요, 당신.”
아담한 체구에 가벼운 체중. 바람 불면 날아가진 않더라도 어지럽게 흔들릴 것처럼 생긴 이정인의 실력은 꽤, 쓸 만했다. 처음 봤을 땐 저 외모로 어떻게 그 자리에 있는 걸까, 하던 의구심이 완벽하게 걷어질 만큼.
입에 문 담배를 툭, 뱉어 매끄러운 검정 구두로 짓누른 하 전무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거절하지 않고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집까지 바래다주겠습니다.”
“병 주고 약 주고 할 거면 둘 다 주지 마. 사양하마.”
이정인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지저분해진 셔츠를 대충 털다 겉옷을 벗어 어깨에 걸쳤다. 비명을 지르는 다리를 질질 끌며 걸어가던 그녀가 문득 자리에 멈췄다. 하우인은 그 자리에 서서 이정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